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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4:1-3 어리석은 자는 : 칼빈
처음 부분에서 다윗은 거의 모든 백성이 범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못된 경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1-4).
자신의 하소연에 무게를 더하려는 뜻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친히 말씀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5-7).
다음으로 그는 자신과 타인들을 해결책에 대한 소망으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이 자기 눈앞에 펼쳐지는 무질서에 대해 신음하며 깊은 고통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이 해결책을 신속히 제공하실 것이라는 점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1. 본문의 표제는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은 본 시편에 자기 민족의 장차 압박에 대한 예언이 제시되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성령님께서 계시하여 주심에 따라 이방인들의 횡포 밑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억눌리는 상태에 있다고 슬퍼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현재 우리가 보는 그들의 분산된 상태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자신들은 하나님의 귀한 기업인데 들짐승들이 집어삼킨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그들이 자기 민족의 수치를 덮으려는 마음에서 아무 정당한 근거도 없이 아브라함의 비뚤어진 자녀들에 대해서 언급된 내용을 이방인들에게 억지로 적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로서는 사도 바울보다 더 자격이 있는 해설자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도는 본 시편을 분명히 율법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적용시킵니다(롬3:19).
그렇지만 본 시편 구조는 다윗이 외국인들보다는 국내의 횡포자들과 신실한 자들의 원수들을 의중에 두고 있다는 점을 아주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꼭 이해하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악이 터져 나와 교회에 만연하고,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은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반면, 악인들은 쾌락에 따라서 잔인하게 지배하는 꼴을 본다는 것은 심히 가슴 아픈 시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참한 광경을 대할 때 거의 낙심하게 됩니다.
시편 14 편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윗이 여기서 우리 앞에 제시하는 본으로써 무장할 필요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교회 안에서 보는 더없이 큰 부패 현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마침내 교회를 그들로부터 구출하실 것이라는 이 확신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것이 사울이 공공연하게 횡포를 부리기 시작할 때부터 있게 된 유대 나라의 무질서하고 황량한 상태가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로 말하자면 마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인간들의 마음에서 불식된 것처럼 모든 신앙심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인간 사회의 정직성이나 올바름에 대해서도 경건성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대한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2. 본문 1절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입니다.
1) (나발)이라는 히브리어에는 '어리석다'는 뜻 뿐 아니라 사악하고 추악하며 비열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보다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내팽개쳐 버리고 불의에 자신들을 내어 맡긴 모든 속된 사람들의 광기가 정죄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자기 원수들에게 평범한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이 탁월한 지혜를 가진 것으로 여기는 자들의 어리석고 광적인 강퍅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대로 자신들과 타인들 보기에 해학과 지혜에 있어서 탁월한 자들은 그들의 간사함을 덫을 놓는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음의 교활성을 하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는데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먼저 무제한으로 사악을 즐기는 이 교활하고 조소하는 인물들이 제아무리 세상의 박수 갈채를 많이 받는다 하더라도 성령께서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로 정죄 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망각보다 더 야만적인 우매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동시에 그들이 모든 종교심을 포기한 것으로 다윗이 결론짓는데 관한 증거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모든 질서를 무너뜨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선과 악에 대해서 도무지 구별하지 않고 정직에 대한 관심도 없고 인정도 없고 사랑도 없다는 점입니다.
시편 14 편
그러므로 다윗은 악인들의 마음에 숨겨져 있는 감정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외적인 행동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만 언급합니다.
그의 의도는 이 사람들이 의와 공평에 대해서 도무지 관심을 쓰지 않을 정도로 담대하고 포악하게 자신의 정욕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광적으로 모든 종류의 사악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그들이 모든 종교에 대한 지각을 내팽개쳐 버리고 할 수 있는 한 그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어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종교의식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 겸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양심의 명령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을 어느정도 억제하고 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부터 악한 자들이 자신들의 의향만을 따르되 여기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도무지 수치심이 없이 철두철미하게 완고하고 오만하게 나갈 경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내던져버렸다는 증거라는 결론입니다.
2) 시편 기자는 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말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란 없어'라는 망측한 모독을 자기들 입으로 발설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의 절제를 모르는 방종성은 모든 경건성이 결핍되어 있는 그들의 마음 속으로 태연자약하게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소리쳐 외칩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말대로 무슨 추론에 입각한 논증이나 정식적인 삼단논법에 의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이 더욱 더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때때로 제아무리 악독한 사람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을 시인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올바른 지식을 그들 마음에 스며들여 보내든 그들은 자신들 속에 있는 신앙심이 무기력하게 되고 마침내 시들어버릴 때까지 한편으로 하나님에 대항하는 그들의 악의로 그 올바른 지식을 억누르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곡해시켜 버립니다.
그들은 어떤 신의 존재를 노골적으로 부정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에 봉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와 능력을 박탈당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그들이 하나님 앞에 심판 받으러 나타나야 할 때가 그들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아 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활 모든 영역과 관심사에서 하나님을 더없이 먼 곳으로 제거해 버립니다. 그렇게 하고 그들 마음에서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모든 의식을 지워 버리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시편 14 편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좌에서 끌어내려지며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의 성격이 박탈되는 때에 불신앙은 극치에 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벌을 받지 않고 지나칠 것이라는 허황된 소망으로 온갖 종류의 사악을 마음껏 범하는 자들이란 바로 그 마음 속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자들이라고 선언하는 다윗이 더없이 확실하게 진리에 입각해서 말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시편 제53편은 몇 가지 바뀐 단어들만 제외한다면 본 시편의 반복처럼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그들의 "소행이 가증하여" 라고 하소연하고 있는데, 거기에 나오는 '소행' 에 해당하는 단어는 '불의' 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윗이 한두 가지 일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이 모든 합법적인 질서를 왜곡하고, 또 '타락시켰다' 는 점을 들추어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이 자신들 전 생활을 가증스러울 정도로 더럽혔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이것에 대한 증거로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그들이 서로간의 거리에 있어서 도무지 정적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그들 동료 인간들에 대한 모든 인정과 자선을 망각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2절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입니다.
1)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부패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다윗이 자기 이름으로 이 말을 한 것보다 더 강조적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행동을 살피시려고 자기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극도로 마비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위엄을 보고 벌벌 떨어야 합니다.
죄짓는 습관이 주는 결과는, 인간이 자기 죄악에 말려들수록 마치 침침한 흑암 속에 감싸인 것 처럼 아무 것도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악이 처벌되지 아니한 채 이 세상에서 판을 치는 때에 스스로를 자랑하고 자신을 속여봤자 얻는 것이라곤 없다고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 진행과정을 알아보려고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며 사방으로 눈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증거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심문을 하거나 살필 필요가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렇지만 그 분께서 자신을 지상 재판관에 비교하는 것은 우리 제한된 능력을 감안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이성이 단번에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어떤 이해를 갖게 하시려는 뜻에서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된 말씀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그 분의 법정에 소환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시편 14 편
그리고 세상은 스스로 그럴듯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버림받은 자들은 사고의 결핍, 위선, 또는 몰염치에 의해서 자신들의 죄악을 망각 속에 묻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자신들의 고집 때문에 눈이 멀어 버립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하늘에 있는 그분의 높은 보좌에서 내려다 보시며 이 아래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살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같은 사실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모든 무관심과 우매를 떨어버리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2) 2절 끝 부분은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입니다.
여기서는 선하고 의로운 생활의 전반적인 법칙은 지각의 빛에 따라서 지배를 받고 다스려지는데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본 시편 첫 부분에서 어리석음이 모든 악의 뿌리인 것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은 옳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에서 그는 또한 아주 공정하게, 정직하고 성실한 삶의 시작은 깨우쳐져서 건전해진 마음에 있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자기 지적인 능력을 기만적인 목적에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즉시 한마디로 참 지각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참 지각이란 무엇인가? 할 때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데 있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는 그들 생활이 올바른 질서를 잡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각이 있어"로 번역한 (마스킬)을 다윗은 버림받은 자들에게 모든 이성과 판단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밝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4. 본문 3절은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입니다.
1) 여기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곧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인간들은 그들의 못된 반역에 대해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마치 배도자들로 부터는 부패와 오염의 악취밖에 풍길 것이 없다는 듯이, 그들 전체 생활의 역겨운 부패와 냄새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싸르) 라는 히브리어는 거의 전반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53편에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 단어인 (싸그)가 나옵니다.
다윗은 모든 인간들이 자신들의 변덕스러운 정욕에 얼마나 정신이 팔려 있던지 그들 전 생활을 통해서 순결이나 정직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시편 14 편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생활은 너무도 완벽한 이탈로써 결국 모든 경건성을 말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은 여기서 일부 백성을 지탄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동일한 저주에 똑같이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특수한 백성으로 선택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들이 가장 낮은 자에서부터 가장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그처럼 타락했다는 것은 정말 경악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경이적인 사건이었습니다.
2) 그러나 다윗은 뒤에 가서 가련한 자와 압제받는 자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말하면서 어떻게 여기서는 예외를 두지 않고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도다"고 선언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두가 악했다면 그가 본 시편의 마지막에 가서 장차 구속을 두고 찬송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도 이 백성가운데 하나였으면서 왜 최소한 자신만이라도 예외로 하지 않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우리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가 여기서 비난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육적 단체이며 타락한 단체를 말하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구별한 자손에 해당하는 소수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로마서 제3장 10절에서 이 판결을 모든 인류에게 확대합니다.
다윗이 사울 통치 아래서의 무질서하고 황폐한 상태를 두고 통탄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자녀들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 자신들의 육신의 의향에 따라서 끌려 다니는 자들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거기서 추론하고 있는 주제는 대다수 인간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타락한 본성의 지배와 안내를 받는 모든 사람들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둘째 아담의 계열에 다윗이 자신과 남은 소수의 경건한 자들을 한편에 두고 다른 편에 전체 백성을 두는 것은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들과 타락과 부패가 주도권을 발휘하는 첫째 아담 계열의 모든 후손들에 대한 명백한 구별을 지으려는 뜻에서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어머니 모태로부터 태어날 때 어리석음과 더러움을 갖고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대로 이것들이 우리 전 생활에 드러나서 하나님이 자기 신비로운 은혜에 의하여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주시기 전에는 계속 그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편 14 편
시14:4-5 죄악을 행하는 자는
이 시편이 제 12편(다윗 작품) 사상과 같이 어두운 사회상에 관계된 것을 보면 역시 다윗 작품인 것이 확실합니다.
다만 7절 말씀 내용이 이 시편을 포로 시대 혹은 그 후 시대 작품인 듯이 암시합니다.
그러나 거기 "포로된 것을 돌이킨다" 는 말은 "돌이킴을 돌이킨다"는 것이니 "곤경을 돌이킨다"는 뜻도 가지는 때가 있습니다(욥42:10).
리델보스는 이것이 불행한 "처지를 고쳐 줌"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타락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와 도덕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 시편이 다윗 작품인 사실과 충돌되지 않습니다.
Ⅰ. 먼저 본 시편 전체를 대략 살펴보겠습니다.
1. 다윗은 제 12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극악한 상태를 탄식합니다(1-4).
그는 인류의 도덕적 부패가 바로 하나님을 모르는 데서 유래된 것을 지적합니다.
그는 참 도덕과 참 종교의 일체성을 말해줍니다.
사람 행실이 악하면 그만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론적인 무신론자가 있는 동시에 실제적인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실제적인 무신론자는 말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 라고 하였습니다(딛1:16).
무신론자의 이론도 악하지만 실제행위가 부패한 자도 불신앙을 퍼뜨리는데 유력합니다
우리 본문에 실제 무신론자에 대하여 주로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그들은 선을 행치 아니합니다(1절 하반, 3절 하반).
(2) 그들은 하나님을 알아 보려고 힘쓰지도 아니합니다(2절 하반).
(3)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합니다(4절 상반).
(4)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합니다(4절 하반).
이 네 가지는 본문이 드러내는 그들이 가진 주요한 죄악들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하나님에게 대하여 인간이 얼마나 등한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4 편
사람이 자기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무슨 희생이라도 달게 여겨 힘써야 될 것인데 그들은 도무지 힘쓰지 않습니다.
그들은 희생적으로 선을 행하는 일도 없고 희생적으로 하나님을 찾아 보지도 않습니다
2. 다윗은 이렇게 대다수의 인류가 하나님을 모르지만 그래도 땅위에 의인의 세대가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합니다(5-7).
이 점에 있어서 그가 지적한 것은,
(1) 수다한 무신론자들이 두려워할 만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따금 나타난다는 것(5, 6)입니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 고 한 사실은 그분께서 의인들을 구원하시면서 악인들을 파멸시키는 일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일이 역사상에 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그런 일을 이루시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사건(출14:1-31) 이 그렇습니다.
또 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멸망시킨 사건(사37:36)과 같은 것입니다.
(2) 다윗은 하나님의 행동 원리에 근거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성도들이 구원받을 일을 내다 보고 기뻐합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사건은 캄캄한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등불과 같습니다
Ⅱ. 다음에는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본문 4절은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입니다.
1) 여기 덧붙여진 것은 앞에 나온 가르침을 더욱 두드러지게 설명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선지자는 앞에서 하나님이 하늘 위에서부터 인간들의 행위를 관찰하시며 그들 모두가 곁길로 나가버린 것을 발견하신 것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경악한 나머지 '내 백성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그들에게 온갖 친절한 행위를 정성껏 수행해야 할 자들이 도무지 인정이 없는 야수들처럼 그들을 압박하며 그들에게 덤벼들다니 이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이냐?' 라고 외치시는 것으로 소개합니다.
선지자가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무슨 이상하거나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분노 하시는 성격을 더욱더 강력하게 표현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시편 14 편
선지자 이사야도 거의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 여호와께서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사59:16)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런 감정을 체험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께서 자신에게 이런 감정이 있는 것으로 드러내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악이 얼마나 괴상하던지, 자신이 그것을 보고 당황하고 혼란에 빠질 정도라는 점을 선언하실 때, 우리가 우리의 죄악 때문에 더없이 크게 당황하며 두려워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혐오감을 보여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목석보다 못한 사람이 아닌 바에야 이 세상에 팽배하고 있는 그 사악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머리털 끝이 서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2)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서두에 지적한 점, 곧 다윗이 본 시편에서 외국 독재자들이나 교회의 명백한 원수들이 아니라 권력과 권위를 부여받은 자기 백성의 지도자들과 군주들을 두고 말하고 있다는 점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이 묘사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전혀 생소한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은 도덕적 법, 곧 생활의 규칙이 없는 자들이 횡포와 압제에 전념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정죄된 행위의 극악성이 더욱더 부각되는 것은 양떼를 먹이고 보살피는 임무를 가진 목자들이 그 양떼를 잔인하게 집어삼키며 하나님의 백성과 기업마저 아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가3장 1-3절에 보면 동일한 불평이 나옵니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만약에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고 자처하는 자들도 바벨론 사람들이나 애굽 사람들에게 그런 잔인한 행위를 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불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떡먹듯이 성도들의 피와 살로 포식한다는 것은 천사와 인간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할 극악스러운 불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건전한 지각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처럼 무섭게 미친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뻔히 알면서 일부러 하나님의 백성을 그처럼 매정하게 괴롭히며 게걸스럽게 먹어 삼키는 것을 볼 때 그들은 마귀에 의해서 완전히 눈이 멀게 되고 분별력과 이해력을 전적으로 상실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이 구절은 목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경건한 자들에게 행하는 잔인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괘씸하며 가증스러운 것인가 하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시편 14 편
3) 본 구절 마지막에 가서 선지자는 그들이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하는 말로써 이 굴레 벗은 사악의 원인과 근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곧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신앙이야말로 우리 상호간에 공평과 정직을 유지하도록 가르쳐주는 최선의 교사입니다
신앙에 대한 관심이 불식된 곳에는 공의에 대한 모든 관심이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여호와를 부른다"는 구절에 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경건의 핵심적인 행사이듯이 이 말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성경 구절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전체 생활이 대유법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적 표현인 것입니다.
2. 본문 5절은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입니다.
1) 선지자는 이제 자신과 모든 신실한 자들을 최선의 위로로 감싸 안아주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침내 자신을 그들의 옹호자로 드러내실 것이라는 점으로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혹자는 '거기서'(there)를 장소의 부사로 보고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횡포를 부렸기 때문에 그 악한 자들에게 성도들 보는 앞에서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는 의미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말에 그 악한 자들에 대한 처벌의 확실성이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봅니다.
곧 시편 기자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듯이 말한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시편 53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있을 때 그것이 그들에게 갑자기 닥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53편에는 곧이어 "저희가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또는 "두려움이 없던 곳에서"라는 문장이 덧붙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주석가들은 이 단어를 두고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혹자는 "......에 필적할" 또는 '......와 같은' 이라는 단어를 보충함으로서 '그것에 필적할 공포가 없도다' 로 읽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이것을 악한 사람들이 염려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때에도 괴로워하는 은밀한 경악과 관련시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쫓는자가 없어도 도망하며"(레26:17, 잠28:1)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할"(레26:36) 만큼 심한 정신적 고통을 경고합니다.
시편 14 편
이것은 자신들에게 정신적 번민을 야기시키는 외적 요인이 전혀 없는데도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고문자가 되고 그것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경우에서 엿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선지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습니다.
곧 그들의 일이 더없이 안전하고 번영을 구가하는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갑자기 그들에게 번개같은 보복을 퍼부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는 것입니다(살전5:3).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한 자들이 스스로 모든 위험을 벗어난 것으로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승리를 안전하게 축하할 때, 그들은 갑작스런 파멸로 전복되고 말 것이라는 점으로 신실한 자들을 격려하며 부축하고 있습니다.
2) 여기에 대한 이유가 본 구절의 맨 마지막 소절에 덧붙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을 변호하고 그들의 사건을 취급하실 결심이 서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시기 때문이다' 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폭력과 착취를 수단으로 그들을 부당하게 괴롭히고 압박하는 그들의 원수들에게 하늘로부터 자기 진노의 벼락을 내리치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대'로 번역한 (도르) 라는 단어에는 좀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이 명사가 히브리어에서는 '한 세기' 또는 '인생의 과정' 의 의미를 지닌다 해서 이 문장을 비록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악인들이 자신의 종들에게 가하는 해악을 못 보시는 척하시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은혜를 행사하신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의 편에 계시며 우리가 말하듯이 그들의 편을 들고 계신다 라고 이 소절을 해석하는 것이 더 간단하고 자연스런 해석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가 갖는 의미는 라틴어에서 nat o(나시오 ; 민족) 가 갖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3) 시편 53편 5절에서 시편 기자는 본 시편에 나오지 않는 문장 하나를 덧붙이고 있는데 곧 "너를 대하여 진친 저희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신 고로 네가 저희로 수치를 당케 하였도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의인들을 보호하시는가 하는 점을 더욱 더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한 성읍을 포위한 자들을 패주시키고 전에 큰 위협을 받으며 갇혀 있던 본 주민을 해방시켜 주는 사람과 같이 그들을 사망의 입구로부터 구원하는 가운데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점을 보다더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편 14 편
여기서 우리가 가장 위험한 시기에 하나님의 손에 보호와 유지를 받으려면 압박을 참을성 있게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뼈" 라는 표현은 '힘' 이나 '능력' 에 대한 비유적 표현입니다.
선지자가 특별히 그들의 능력을 언급하는 것은 만약에 악인들에게 그들을 기고만장하고 막강하게 하는 재물, 무기, 그리고 부대가 없다면 마침내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을 박살낸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다음으로 신실한 자들에게 거룩한 자랑을 권하면서 악인들의 머리에 흉측한 파멸이 넘실거리고 있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이유는 '하나님이 저희를 버리셨기' 때문이요, 만약에 하나님이 그들을 반대하신다면 궁극적으로 만사가 그들에게는 불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버리다' 로 번역하는 (마아스) 에는 종종 '멸시하다'의 의미도 있으므로 혹자는 이것을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멸시하셨기 때문이다' 는 식으로 번역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본 구절과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그들을 천박하게 만드셨다' 또는 '그들을 수치와 굴욕에 복종시키셨다'라는 뜻으로 읽는 것이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치켜세우려 하지만 자신들에게 불명예와 수치를 끌어당길 뿐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시편 14 편
시14:6-7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이 시편에서 선지자는 하늘의 평가를 지상에 전하고 있습니다.
이 평가는 모든 인류가 대대로 피할 수 없는 평가였습니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 같은 하늘의 절대 절명의 평가는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라고 선언합니다.
Ⅰ. 본문 전체는 우리에게 두 종류의 어리석은 자들을 선언합니다.
1. 하나님이 없다 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습니다(1).
1) '하나님이 계시다면 증명해 보이라' 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더 힘듭니다.
이것은 단지 논리성이나 설득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알만한 종교의 씨를 사람 속에 심으셨기 때문입니다(롬1:19).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2-3), 부르지도 않는 것은(4하), 곧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입술로는 하나님을 시인할지라도 행위로 부정하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입니다(딛1:16, 롬1:21).
물론 하나님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열매를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천기(天氣)를 분별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소경이기 때문입니다(마16:3).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믿음이 없는 세대"(마17:17) 라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 지식이 없는 것이야말로 사망과 멸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호4:6).
그러므로 생명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요17:3).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는 순종이 요구됩니다.
2) 아담이 930세에 죽었지만(창5:5), 실제로는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그 순간 죽은 것입니다(창2:17). 불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죽음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삼상15:22).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약3:17-18).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만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입니다(잠1:7, 9:10).
시편 14 편
2. 하나님을 찾지 않는 어리석은 자가 있습니다(2-3).
1)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어리석고 가증하며 더럽고 무지한 행악자들 뿐입니다(2-3).
마음과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창6:5).
모친이 죄 중에 잉태했고 죄악 중에 출생했습니다(시51:5).
다 죄 아래 있기 때문에 더 나은 자가 없습니다(롬3:9). 예외가 없습니다.
죄를 행치 아니하고 선을 행하는 의인은 결코 없습니다(전7:2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의인 열이 없어서 망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대가 소돔과 고모라 보다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미11:24).
2)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렘17:9) 인간은 죄를 짓기에 열심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다수와 전체가 뜻을 '함께'(3) 합니다.
그렇게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이 합심했습니다(행4:27).
그들은 강도를 풀어주고 영광의 주는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마치 도적과 이리는 환영하고 목자는 반가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 뿐 입법자와 왕과 심판자 되신(사33:2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들의 신은 자신의 힘입니다(합1:11).
다수가 모여 악을 토하는 것 외에 의견을 일치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악의 관영' 이라고 말합니다.
3.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는 지혜로운 자가 있습니다(4-6, 14:6-7).
인간의 사악함은 힘이 될 수 없습니다. 단지 어리석을 뿐입니다(1).
사악한 죄의 세력이 아무리 클지라도 아들조차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력할 뿐입니다. 죄가 강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더 강합니까?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 때문에 교회는 죄악의 쇠사슬에 영원히 묶이지 않습니다.
그 누가 하나님의 백성을 떡먹듯이 먹을지라도(4),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칠천을 남겨두십니다(시14:5하).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에 대한 노략질도 끝까지 묵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악이 범람하는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나오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십니다. 포로 되었을지라도 돌이키십니다(6).
그래서 사단이 도적과 이리를 동원하여 지상교회의 보좌를 앗아갈지라도 천상교회의 보좌는 흔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질 수조차 없게 하십니다(요일5:18).
시편 14 편
그렇게 하나님께서 교회의 피난처(시14:6)와 안전지대(시12:5)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외에 그 무엇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할 바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5상).
돈과 세상과 사람을 두려워하며 의식주의 염려로 가득 차게 됩니다.
헛된 공포로 생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참된 교회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합니다.
창조자 외에 그 누구도 심판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참된 교회의 소유는 주의 법도를 순종하는 것 외에 없습니다(시119:56).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기업인 택한 자에게서 찾으시는 열매이며 지혜입니다.
Ⅱ. 이제 나머지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1. 본문 6절은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입니다.
선지자는 신실한 자들이 고통 중에 하나님께서 구원자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점을 침착하게 기대하는 그 순진성을 조롱하는 거인들을 향해서 비난을 퍼붓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재난으로부터 구원하지도 않은 때에 그분에게 우리 자신들을 내맡기는 일처럼 육신에게 더 불합리해 보이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육신은 현재 있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재난에 압도되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비치는 대로 근거도 없는 확신을 들어 하나님의 자녀들을 비난하며 어떤 느낄 수 있는 도움도 받지 못하면서 그런 하나님을 그래도 확실한 소망으로 의지한다고 빈정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의 건방진 태도에 도전하고 조롱하며 가련하고 비참한 자들에 대한 그들의 조소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의지하는 가운데 재난에 압도되지 않으려는 것을 어리석음으로 돌리는 그들의 비난이 바로 자신들의 파멸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선지자는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결단보다 더 현명한 결단이 따로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또 우리가 제아무리 재난으로 포위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도움을 신뢰하는 것이 최상의 지혜라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시편 14 편
2. 본문 7절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입니다.
1) 본문 7절 초두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은 위로에 대한 가르침을 이야기한 다음 다시 기도와 탄식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그는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장기간에 걸쳐 고달프게 내버려두시는 경우가 있더라도 우리는 피곤해 하거나 낙심할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을 자랑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우리 고통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위로는 종종 기도하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줄 것인가?' (칼빈 사역) 하는 의문문에는 자신이 이쪽저쪽 기웃거렸거나 다른 구원자를 찾아 하나님에게서 자기 눈을 돌렸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도는 오직 자기 열정을 표현하는데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의 구원을 제시하며 그것을 완전하게 드러내실 때에는 언제인가 하는 내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덧붙이고 있는 '시온' 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는 자기 소망이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의 기도를 들어줄 것으로 약속한 거룩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외적 보증이며 상징인 언약궤가 있었던 처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분이 누구일 것인가 하는 점을 두고 의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구원이 마침내 드러날 시기는 언제인가 하고 슬픈 마음으로 묻고 있습니다.
만약 이 기도가 사울 시대와 관련된 것이라면 어떻게 시온이 이미 하나님의 성소로 지명된 것으로 명명되는 것이 타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예언의 영에 따라서 아직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두고 예언할 수 있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약궤가 시온산에 놓여지기까지는 본 시편이 작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견해를 훨씬 더 있을 듯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은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서 오래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후손을 위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전 교회의 안녕을 무엇보다 안타깝게 여기고 있으며 자기 일신상의 문제보다 이 문제에 더 집착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시편 14 편
우리는 우리 자신의 특수한 슬픔에 빠질 때, 우리 형제들의 안녕을 거의 전적으로 소홀히 하고 만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특별히 주목을 요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찾아오실 때 사용하는 특수한 고통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다윗이 여기서 이스라엘을 자신과 동일시하듯이 우리 관심과 주의를 전체 교회의 안녕에 돌리고 그것의 필요를 생각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2) 본문 7절 후반에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을 계속적인 슬픔에 잠겨 기진맥진 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분명히 그의 의도는 자신과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약속된 구원을 소망할 것을 확고히 하고 격려하려는 데 있습니다.
① 그러므로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지연하시거나 우리가 바라는 만큼 신속히 서두르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자기 백성을 포로로부터 되찾으심으로써 그들의 옹호자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② 다음으로 그는 슬픔이 마침내 기쁨으로 바뀔 것이므로 그들의 슬픔의 결말이 즐거울 것이라는 점을 제시함으로써 슬픔을 달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포로 된 것"은 바벨론 포로시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 가운데 흩어져 살던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악인들이 교회 안에서 포학자처럼 행동할 때에 오는 내적인 압박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을 통해서 그와 같은 포악한 원수들이 하나님의 양떼를 파괴하고 괴롭히거나 거만하게 짓밟는다 하더라도 자기 이스라엘을 그들이 어느 곳에 흩어져 있든지 모두 함께 모으시는 특수한 임무를 가지신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는 점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포로'라는 단어에는 악인들이 제멋대로 교회의 모든 올바르고 합법적인 질서를 타도할 때 그것이 바벨론이나 애굽으로 변하고 만다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거룩한 백성의 기쁨을 그들의 구출시기까지 지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출에 대한 위로의 기대가 우리 슬픔을 완화시킬 뿐만 아니라 거기에 기쁨을 섞어 한층 더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