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도 써도 마음에 들지 않는, 영 풀리지 않는 글을 쓰다가,
마침내 지치게 되면 영화를 봅니다.
이번에도 전쟁영화.
물론 전쟁을 반대하지만, 전쟁영화를 통해 배우는 그 시대의 역사가 재미있어 선택하게 되었지요.
잉그리드와 군나르, 그의 아들 올레. 그리고 시아버지와 평화로이 살던 나르비크.
독일군과 연합군의 이 항구를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고
군나르는 노르웨이 군으로 참전하고
잉그리드는 호텔에서 일을 합니다.
독일어를 한다는 이유로 독일 영사의 통역을 맡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영국을 돕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아들이 폭격에 의해 큰 상처를 입고 죽어가는데 의사가 필요했고,
늘 통역을 해주던 독일 영사에게 그 대가로 영국 영사를 숨겨주었던 곳을 알려줌) 독일을 돕기도 합니다.
결국 아들을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죠.
군대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가 무사히 살아난 군나르는
마침내 나르비크 항구를 탈환하고 집에 돌아오지만,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그의 아내 잉그리드가 배신자라는 것.
그는 분개하지만 결국 가족의 편에 섭니다.
나르비크 항을 차지하기 위해 들어온 독일,
그것을 지키기 위해 왔던 영국과 프랑스.
그들은 모두 자국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요.
중립국을 선언했던 노르웨이의 의사는 아무 상관 없이 그들 나라는 마음대로 들어왔다,
아무 통보도 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버리고,
결국 완전 폐허가 된 나르비크.
노르웨이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지요.
전쟁으로 인한 선택에 관한 영화.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
잉그리드는 순간순간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그것이 뭇매를 맞지만.
이번 영화를 통해 노르웨이 '나르비크'라는 도시를 알게 되어서 기쁩니다.
나르비크는 노르웨이 북부 놀란(Nordland)주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청동기시대(기원전 3200~600)부터 인류의 정착지였고 8~11세기 바이킹들이 살던 곳이다. 서울의 3배가 넘는 방대한 면적을 갖고 있다. 북극권 220km 안쪽에 위치한 세계 최북단 도시 중 하나로 백야와 극야가 있다. 높은 산과 피오르, 호수가 많아 알파인 스키(alpine ski)와 산악트레킹, 낚시의 명소다.
나르비크는 일년 내내 얼지 않는 부동항(ice free port)으로 스웨덴의 키루나(Kiruna)와 옐리바레(Gällivare) 철광산의 철광석 수송을 위해 개발된 도시이다. 1870년대 스웨덴은 풍부한 매장량을 가진 키루나 철광산의 철광석을 수송할 적당한 항만이 스웨덴에 없어 노르웨이의 나르비크항구를 선택했다. 이를 위해 스웨덴은 398km의 철광석철로(Iron Ore Line)인 말름바난(Malmbanan)선을 노르웨이와 접경인 릭스그렌센(Riksgränsen)까지 놓았고, 나르비크까지 노르웨이 구간에 43km의 오포트바넨(Ofotbanen)선을 깔았다. 스웨덴 광산회사인 LKAB는 현재도 이 철도를 통해 철광석 등을 나르비크로 수송한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초기 나르비크 항구는 전쟁물자인 철광석의 확보를 둘러싼 전략적인 요충지로 연합군과 독일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939년 독일은 스웨덴의 최대 철광산인 키루나와 마름베르게트(Malmberget)의 철광석을 공급받아 전쟁물자를 생산하고 있었다. 여름에는 발트해(Baltic Sea)의 가장 안쪽 보트니아만(Gulf of Bothnia)의 스웨덴항구 룰레오(Luleå)를 이용했고 겨울에는 나르비크항구를 이용했다.
당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1940년 겨울 나르비크항구를 통제할 수 있으면 독일로의 철광석 공급을 차단해 연합군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전쟁 후반에는 독일 잠수함과 전함이 나르비크항에 정박하기도 했다. 처칠은 나르비크 항구에 수중 기뢰를 매설하는 방법이나 연합군이 항구를 점령하는 두 가지 안 중 하나를 실행에 옮길 것을 제안했다.
두 안 모두 노르웨이의 중립성과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1940년 4월 영국 해군본부는 '윌프레드작전(Operation Wilfred)'을 개시해 노르웨이 나르비크 해역에 기뢰를 매설하였고 독일군은 다음날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이때 독일군은 각각 200명의 보병을 태운 구축함 10척으로 침공을 시도하면서 이에 맞서던 낡은 노르웨이 군함을 격침시켰다.
영국 해군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전함들을 급파해 구축함을 비롯한 독일 배를 침몰시키면서 나르비크 연안을 장악했다. 며칠 뒤 영국군 소장 피어스 조셉 맥커시(Pierse Joseph Mackesy)는 병력을 이끌고 나르비크로 향했다.
영국 해군본부는 함포사격을 앞세워 나르비크에 상륙을 지시했지만 맥커시장군은 독일군의 해안방어선이 워낙 강력하고 노르웨이 민간인이 살상될 수 있음을 들어 이를 거부했다. 대신 그는 부대를 나르비크 인근에 상륙시킨 다음 눈이 녹기를 기다려 나르비크로 진군하는 전략을 택했다.
1940년 5월 노르웨이의 카를 구스타브 플라이셰르(Carl Gustav Fleischer)장군이 이끄는 연합군(노르웨이, 프랑스, 폴란드, 영국 연합)은 나르비크를 탈환했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보병 연합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프랑스 전선에서 밀리면서 프랑스의 덩케르크(Dunkirk)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1940년 6월 나르비크에 힘들게 진격했던 부대는 취약해진 다른 전선을 향해 이곳에서 철수했다.
연합군이 빠지면서 독일군이 나르비크를 점령했고 전함과 잠수함(U보트) 기지 운영에 중요한 오포피오르도 장악했다. 노르웨이군은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전쟁은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나르비크 [Narvik] (유럽지명사전 : 노르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