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도 목사, 그는 김일성의 양아버지였고, 하나님의 참제자였다.
하나님 사랑의 실천을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에게 돌려 주고자 목숨을 바치신 분이다.>
그는 목사로써, 서울 정동교회에서 유관순을 길러냈고, 동대문 교회 담임 목사를 하면서는 김상옥 열사를 길러냈다.
그리고, 그는 또 한명의 항일투사 김일성을 길러냈다.
손정도 목사는 강서의 무덤으로 유명한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그는 숭실학교와 평양신학을 나와 합방되던 해, 만주지역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김일성의 부친 김형직 (金亨稷, 1894 ~ 1926)과는 숭실 학교 때, 부터 아주 친한 친구로 지냈다.
김형직이 나이 36살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이유도 모르게 죽게 되었을 때, 자기 부인인 강반석에게 만주의 손목사를 찾아가 의탁하라고 부탁하고 죽는다.
그래서,가산이라고 할 것도 없는 짐을 챙겨 만주로 향하여, 손정도목사 한테 가서 몸을 의탁한다.
이때, 손목사의 아들이 원일이라고 있었는 데, 성주와 나이가 비슷하여 늘 붙어 다녔다,
그리고 초등학교, 길림 육문중학교도 같이 다녔다.
그리고 그 밑에 원태는 성주를 형~,형`,하고 따라 다녔고, 인숙이는 오빠,오빠~,하며 따랐다.
그러니까, 손정도는 목사가 아니라도 의리상 친구 가족을 돌보아야 했는데, 목사 특유의 인정으로 양 아버지 역할을 하였다.
1912년 만주지역과 한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독립운동과 목회활동을 하던 그는 일경에 의해 일본 가츠라총리 암살사건과 조선인무관학교 무기 공급혐의로 체포되어, 전남 진도에서 1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지에서 조차 동료들과 진도 주민들에게 민족계몽과 복음을 전하여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수 십리 밖에 있던 많은 주민들이 손 목사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몰려들 정도였고, 일본 형사들도 자발적으로 찾아와 그의 가르침에 감동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으면 유배지였던 진도에 살던 9살 소년 정경옥이 그의 영향을 받아 훗날 장성하여 미국유학을 마치고 독립운동가로서 또는 한국 감리교 신학계의 거목이 되기까지했겠는가?
1919년 3.1운동 사건에 직접 개입하고 상해로 망명한다.
1920년 목사였던 그는 말로만 가지고는 안된다고, 항일무장 단체인 의용단을 창설 함.
의정원 의장(국회의장), 국무위원(교통부장관), 대한적십자회장, 노병회, 의용단, 대한교육회, 인성학교교장등 수많은 독립운동단체를 설립하거나 가입하며 맹활약을 하였고 길림에 돌아와서는 안창호 선생과 함께 농민운동사업과 항일운동을 열정적으로 병행하였다.
1931투옥 중에 받은 심한 고문독과 지병으로 1931년 2월 29일에 이역만리 중국길림의 한 병원에서 피를 토하며 생애를 마감하며 순국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하였으나 그의 유해는 중국문화 혁명으로 인한 묘역 파괴로 인해 찾을 수 가 없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찾아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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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사는 김성주가 왜경에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도 그 옥바라지를 해 주었고, 그의 장남 손원일 제독은 한국 해군의 창설자로, 6,25 때는 그렇게 친했던 친구 김일성과 적이 되어 싸웠다.
차남은 손원태 박사는 재미 의사였고, 대한 YMCA 연합회 회장을 지낸 차녀 손인실씨는 이화여대 부총장 문병기 박사의 부인이다.
손원태 박사는 김일성 생존시 호형호재하며, 찾아 갔었고, 그의 묘지도 의열사 묘역에 있다고 들었다.
손목사님이 항상 주장하는 것은 "세상의 걸레가 되라~"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걸레 역활을 했을 때, 세상은 비로소 깨긋해 집니다.
<그러므로 김일성의 정신적 아버지는 김형직이 아니라, 손정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