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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씨 중앙 종친회 종보
(2012년 6월 7일)
한국 기록원 삼신인 탄생
창성 최고기록 인증서 수여식
양 입모 : 011-512-9403 = 양 구석 : 051-518-9921 消息(소식)
재단 연혁
지금부터 약 4300여년전 삼성시조(탐라국시조) 삼성혈에서 용출(탄강)하시다. | ||
2013 | 1. 15 | 홍화각(弘化閣) 현판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지정 |
2012 | 10. | 재난방재(CCTV 12개소, 불꽃감지기 5개소, 옥외소화전 9개소, 기존소화전 철거 등) 구축사업 완료 |
2011 | 5. 9 | 김정(金 亻政) 목사가 세웠던 ‘三射石碑’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5호 지정 |
2010 | 8. | 삼성사 상표등록 신청 |
2009 | 10. 22 | 혼인지 사당(착공 4월 3일, 팔작지붕, 면적 52.48㎡) 준공 |
2007 | 12. 10 | 삼성하나로아파트(28평형 11세대, 25평형 1세대) 준공 |
2001 | 2. 23 | 전시관 77.26평 건립 (전시실 57평, 영상실 20.26평) |
12. 10 | 전시관 개관 | |
2000 | 9. 27 | 전사청 중건(2000년 6월 13일 착공 동년 9월 16일 준공, 팔작지붕으로 21.56평) |
1998 | 7. 27 | 삼사석에 표석 건립.(三射石址)(삼성혈 관련유적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 |
1997 | 9. 25 | 삼사석비(서기 1735년 英祖 11년 牧使 金 이 세움) 발굴. |
1995 | 1. 1 | 탐라문화상 제정(문화,예술,효행 3개 부문).1997년 문화예술상과 효행상으로 변경 |
6. 9 | 총무청(摠務廳) [지하24.6평, 1층 31.85평]을 건립. | |
1992 | 3. 20 | 혼인지 표석 및 삼공주 추원비 건립.(삼성혈 관련유적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7호) |
3. 29 | 연혼포 표석 건립.(삼성혈 관련유적) | |
1982 | 9. 20 | 봉시청(奉侍廳) 건립. |
1981 | 7. 1 | 장학사업 발족. |
1977 | 10. 10 | 고정효(髙禎孝), 삼성사 입구에 홍살문(紅箭門) 건립 헌납. |
1971 | 8. 10 | 건시문(乾時門) 및 혈단문(穴壇門)등을 복원함. |
1969 | 4. 10 | 고여규(髙女奎), 모성각(慕聖閣) 헌납(獻納). |
1964 | 6. 10 | 국가지정문화재(國家指定文化財) 사적(史蹟) 제 134호로 지정. |
1962 | 12. 10 | 정기 총회 결의에 의하여 종전의 재단법인 삼성시조제사재단(財團法人 三姓始祖祭祀財團)을 재단법인 고(髙)·양(梁)·부(夫) 삼성사재단으로 명칭을 변경 등기하고, 이사(理事) 정원을 15인으로 증원하여 대표권제(理事長制)를 채택.(1966년 이사정원 9인으로 변경) |
1927 | 1월 17일 특별 연고삼림(緣故森林)의 양여원(讓與願)을 제출하여 동년 1월 29일부로 제주삼성사(濟州三姓祠)로 받음. | |
1921 | 11. 10 | 종(宗) 87호로 삼성시조제사재단 법인설립 인가를 대표 고명우(髙命瑀), 양상룡(梁翔龍), 부지환(夫智渙), 재산명의 관리인 부성찬(夫聖贊)으로 받음. |
12. 2 | 초대 삼성대표 이사에 고석종(髙碩鐘), 양상룡(梁翔龍), 부성찬(夫聖贊) | |
1785 | 正祖 9年 | 양경천(梁擎天)의 주청(奏請)이 가납되어 조정에서 액호(額號)를 삼성사(三姓祠)라 선액(宣額)하고 예관(禮官)으로 교리(校理) 고택겸(髙宅謙)을 보내어 봉제(奉祭). |
1772 | 英祖 48年 | 목사 양세현(梁世絢), 외장(外墻)을 축조하고 소나무를 식재함.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향청(鄕廳)으로 하여금 매년 동지(冬至)후 상정(上丁)에 혈단향(穴壇享)을 모시되 모우(牡牛) 삼두(三頭)를 희생(犧牲)하여 제수. |
1771 | 英祖 47年 | 방어사 양세현(梁世絢), 전사청(典祀廳) 건립(建立) |
1740 | 英祖 16年 | 목사 안경운(安慶運), 삼성의 후손중에서 유식자(有識者) 각10명씩 30여명을 뽑아 삼성묘재생(三姓廟齋生)으로 삼음. |
1526 | 中宗 21年 | 목사 이수동(李壽童),모흥단(毛興壇)을 두른 280여척의 담장(牆垣)을 쌓고 홍전문(紅箭門)과 혈비(穴碑)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짐. |
재단 임원
삼종문회
공지사항
게 시 판
원본 보기 http://www.samsunghyeol.or.kr/sub/?p=4_board
■제주고씨는
제주고씨는 삼성혈(三性穴)에서 용출했다는 고을라를 시조로 한다. 탐라국 개국설화에 따르면, 삼성혈에서 양을라(良乙那)·고을라·부을라(夫乙那)의 세 신인이 출현하였고, 그중 고을라가 둘째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세 신인은 동쪽 바다에서 떠내려 온 세 미녀, 오곡 종자, 가축을 가지고 활을 쏘아 정착지를 나눈 후 각각 나라를 개국했다고 전하고 있다.
제주고씨는 탐라국 개국설화에 나오는 고을라가 시조 - 세계일보
제주도 삼성혈의 미스터리(시리즈 24-세계문화 읽기) : 네이버 블로그
국악성가 & 하늘나라 | 제주 삼성혈 - 4300년 전 탐라개국시조의 전설을 ... 아래를 크릭
50년 싸움 제주 삼성혈 고양부 합의 ‘결렬’
삼성사재단, 법원 합의 단호히 거절...양씨종친회 여론조사까지 내밀어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법원조차 50년간 이어진 고양부 싸움에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자 법의 잣대를 들이대 소송전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제주지방법원 제2민사부(재판장 안동범)는 18일 오후 2시 양씨중앙종친회가 제주도와 재단법인 고․양․부 삼성사재단을 상대로 제기한 이사회결의 무효확인 소송의 결심공판을 진행했다.
직전 2차 공판에서 재판부는 “굳이 고양부 삼성사재단 명칭에서 고양부 또는 양고부 서열을 표기해야 하냐”며 원고와 피고의 합의를 당부했으나 재단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소송 내용의 발단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초 고양부 삼성사재단의 명칭은 ‘삼성시조제사재단’이었다. 1962년 재단은 기존 재단법인 명칭을 ‘고양부 삼성사재단’으로 변경했다.
재단은 3년후 ‘고양부 삼성사재단’ 명칭을 법원에 정식 등기했다. 문제는 재단 명칭 앞에 붙여진 성씨의 서열 즉 순서다. 논쟁은 부씨를 제외한 고씨와 양씨 종친회 사이에 벌어졌다.
각종 역사서적에 고양부가 아닌 양고부 서열이 확인되자 양씨종친회가 발끈했다. 1986년에는 ‘고양부 삼성사재단’ 명칭 등록을 취소해달라며 제주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패소 후 잠잠하던 논쟁은 지난해 4월 재단 이사회에서 다시 불거졌다. 이사회가 “한국기록원의 인증서에는 양고부 순서로 표기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며 인증 취소를 결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양씨 종친회는 지난해 8월 제주도와 재단을 상대로 이사회 결의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취지는 ‘고양부 삼성사재단’의 명칭에서 성씨를 빼고 ‘삼성시조제사재단’으로 하자는 내용이다.
재판과정서 법원은 양측의 합의를 요구했으나 재단은 “이제 와서 역사적 논쟁을 거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양씨종친회”라며 수용 불가의사를 내비쳤다.
고창실 삼성사재단 이사장은 “도민 모두 고양부 삼성사 재단으로 알고 있다. 50년간 이어진 역사를 바꾸면 혼란을 야기한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갑자기 양씨종친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고 반발했다.
재판부는 이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 아닌 것 같다. 굳이 재단 명칭에 성씨를 붙여야 하느냐. 합의점을 찾을 생각이 없냐. 재단 이사 9명 모두 이사장과 같은 생각이냐”고 물었다.
고 이사장은 이에 “양씨 이사 3명이 찬성하더라도 고씨 3명이 반대하고 부씨 3명 이사는 기권을 할 것으로 본다. 결국 이사회에 안건을 올려도 처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맞섰다.
양씨종친회는 이에 “삼성혈 내 제단 위패의 순서도 양고부로 돼 있다. 고씨가 먼저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 과거 재단 명칭은 고양부가 아닌 양고부 순서로도 표기돼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변호인측은 제주도민 120명을 상대로 조사한 여론조사를 결과를 증거로 제출했다. 조사 결과는 상당수 도민들이 삼성사재단 명칭에서 서열을 제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양씨종친회의 예상치 못한 여론조사 결과 제출에 재단측은 “신뢰도에 의심이 가는 결과”라며 대응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에 “합의를 위해 시간을 줬는데 노력을 하지 않은 것 같다. 과거만 얘기하기 보다 후손의 화합을 위한 미래를 논의하길 바랐다. 합의가 안되니 법의 판단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선고는 8월29일 열린다.<제주의소리>
제주의 소리
http://www.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132049
제주의소리:제주 삼성혈 고양부 누가 먼저냐? 법원 판단은…
http://blog.daum.net/sun105/13756823
삼성혈(三姓穴)
삼성혈(三姓穴)은 제주시의 제주 칼 호텔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사이의 송림 가운데에 위치한 3개의 구멍이다. 1964년 6월 10일 사적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모흥혈'이라고도 한다. 탐라국 개국의 전설이 있는 유명한 곳이다. 태고 시대에 양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의 3신이 이 세 웅덩이에서 태어나 사자(使者)가 데려온 3처녀를 배필로 맞아 살면서 탐라국을 세워 제주도의 개조가 되었다 한다. 현재도 3웅덩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사당(祠堂)·비석이 있다. 1526년 제주목사 이수동이 양·고·부씨의 후손들에게 혈제를 지내게 하면서 치제가 시작되었다. 1698년 삼을나묘를, 1827년 전사청을, 1849년 숭보당을 세웠다.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나니 그들은 바로 을라 삼형제이었으니 화살을 쏘아 떨어지는 곳을 도읍으로 정하기로 하고, 맏이를 양을나, 버금을 고을나,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세사람은 거친 들판을 돌아 다니며 사냥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나가서 열어 보니 그 안에 또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한 사람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명과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 씨앗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벽랑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세 왕녀를 낳고 이르되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명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 왕녀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 3명은 나이 차례로 나누어 배필을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하니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
東國通鑑(동국통감)
東國通鑑(동국통감)은 성종15년(1484) 간행되어 長曰良(장왈양)이라 하고 長爲良說(장위양설)이 굳어졌으며, 이후에도 살펴보면 효종4년(1654)에 李元鎭(이원진)牧使(목사)도 三姓穴條(삼성혈조)에 良高夫(양고부)라고 썼고 숙종29년(1703)에 李衡祥(이형상)牧使(목사) 역시 三姓祠 上樑門(삼성사 상량문)에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순위를 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사적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한 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었다.
王朝實錄(왕조실록 42~P.163)
王朝實錄(왕조실록 42~P.163)에 의하면 영조5년(1771)에 高漢俊(고한준)등이 主上(주상)께 奏請(주청)하는 상소문에도 良高夫(양고부)로 썼다. 또한 李丙燾(이병도)著의 韓國史(한국사)에도 良高夫(양고부)요, 金泰能(김태능)著의 濟州島史論攷(제주도사논고)에도 良高夫(양고부)라 했으며 國史大事典(국사대사전)•한국사대사전 등에도 良高夫(양고부)라고 기록하였으며, 玄容駿(현용준)著 「濟州島神記(제주도신기)」에도 良高夫(양고부)라 수록이 되어 있다.
"제주목(濟州牧)" 본주(本州)는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그 주(州)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태초(太初)에는 사람과 물건이 없었는데, 신선[神人]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지금도 주산(主山) 북쪽 기슭에 ‘모흥(毛興)’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곳이다. 맏을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세째를 ‘부을나(夫乙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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