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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평화시대의 무사도, 47인 사무라이의 충신들
아코성 주군의 복수사건(1704년)
그때 세계는
1694년 : 조선, 노론에 의한 남인 몰락(갑술사옥)
1701년 : 프로이센 왕국 성립
1704년 실제 일어난 47명 사무라이의 복수를 그린 추신구라(忠臣藏, 충신장).
일본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고전작품이다.
에도시대에 들어와 평화가 오래 되고 전투의 실전경험이 있는 세대가 사라지면서, 무술연마는 실제적 전투능력이 아니라
무사적 기질을 창조하기 위한 행동지침으로 권장되었다. 더불어 충실 · 복종 · 근엄 · 질박 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무사도가 평화의 시기에 맞게 잘 다듬어지기는 했지만, 전쟁이 일어나던 사회체제나 윤리체계에 부합하는 것이었지, 평화와 질서가 자리잡은 복잡한 사회와 정치구조의 정신윤리로서는 부족했다.
막부는 통치자로서 인민과 무사를 다스리기 위해 보다 폭넓은 이데올로기가 필요했고, 주자학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에 따라 전쟁터에서 무사들의 삶을 생생하게 반영하면서 이룩된 무사의 도덕은 유교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무사계급의 모든 성원은 가족이나 주군, 사회에 대해 의무감을 갖도록, 그리고 신분에 따른 의무에 맞추어 살아가야
한다는 교육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리'와 '수치(羞恥)'라는 관념이 발달하였다.
유교는 주군에게서 입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배반하지 않고 충성해야 한다는 근거, '의리'의 관념을 제공했다.
또한 의무감에서 나오는 어떤 심(心)의 상태랄지 행동하게 하는 힘인 추행력(推行力)을 발달시켰다.
일본인은 자기의 특정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치욕을 면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하고, 사회가 자기에게 기대하는
만큼 그 보다 더하지는 못할 망정 기대하는 만큼의 일을 성취해서 명예를 얻어야 했다.
에도 막부시대 유학의 수용에 의해 의리와 수치, 예민한 의무감, 명예의식이 전란의 시대보다 훨씬 보편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것은 무사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에게 파급되었으며, 오늘의 일본사회에서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발견된다.
여기서 의무감, 명예의식, 의리, 수치를 느끼는 대상은 주군이지만, 더 넓게 말하면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외부에서 존재하는 집단이지, 진리는 아니다.
에도시대 1704년에 실제 일어났던 47인의 사무라이가 주군의 원수를 갚는 복수사건을 보면, 에도시대 발전시켰던 의리
등의 관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1704년 에도시대에 아코성의 성주 아사노 나가노리는 참근교대제도에 따라 자신의 성을 떠나 쇼군이 사는 에도에 기거
하고 있었다.
아사노는 막부고관인 기라 요시나카의 지휘 아래서 일하고 있었으나, 기라와의 의견 충돌로 싸움 끝에 기라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법도에 따라 성안에서 칼을 뽑은 무사는 자결하라는 엄명을 받고,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다. 에도시대는 무사들의 과잉된 전투정신을 억누르기 위해 성 안에서 칼을 뽑는 것을 금하고 있었고, 칼을 뽑을 경우 할복
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오이시 구라노스케를 비롯한 아사노의 부하들은 주군을 잃고 일자리도 없는 낭인이 되었다.
하지만 주군의 복수를 맹세한 뒤 때를 기다리며 흩어져 살며 가난과 외로움을 견디면서 복수의 날을 기다린다.
구라노스케는 주색에 빠진 폐인처럼 생활하여 감시의 눈을 피했고, 다른 부하들도 역경을 견디면서 때를 기다렸다.
드디어 약속했던 날 주군을 죽게 한 기라의 목을 베어 주군의 무덤 앞에 바치고 향을 피운다.
그리고 나서 47인의 사무라이들 역시 막부의 할복하라는 명령을 받고 모두 할복하였다.
4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는 당시 에도시대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이끌었고, 실제로 막부 관료조차도 그들의 의리를
칭찬하며 구명을 주장했을 정도로 여파가 대단했다.
1704년이라면 전란의 시대가 끝난 지 100여 년이 지났고,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전투의 경험이 전무한 채로, 전란의 시대를 살았던 무사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말로만 듣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정의감으로 단결하여 온갖 고난을 이겨내며 뜻을 이루는 강렬한 충의가, 에도사람들의 온갖 감수성을 자극시켰던 것이다.
이것은 '추신구라(忠臣藏, 충신장)'라는 이름으로 작품화되어 1748년 초연 당시부터 공전의 대인기를 누렸고, 지금까지도
공연만 하면 언제라도 대성황을 이루기 때문에 극단 기사회생의 특효약이라 불리울 정도이다.
모진 어려움 속에서도 47명이 함께 이루어내는 강렬한 의리가 일본인의 마음을 촉촉히 적시게 하는 것이다.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그 감동을 기대하면서 극장에 가는 것이다.
여기서 일본인들의 충의와 의리는 주군과 신하 사이의 약속에 집중되어 있다.
주군이 얼마나 옳은지 그른지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에도시대 유학의 수용을 통해서 발전시켰던 의무감, 명예의식, 의리, 수치라는 관념은 보편적인 진리이기보다 집단 속에서 존재하는 윤리였다.
일본의 석학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말처럼 일본의 정치가나 경제인들은 자신의 회사, 국가와 같은 집단을 위해
죽어간 사람은 많지만, 진리와 정의로 충만하여 죽어간 사람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50. 조카마치의 번영과 도시민의 생활
도시와 상업의 발달(17세기 중 · 후반)
그때 세계는
1651년 : 조선, 윤선도, 〈어부사시사〉를 지음
1651년 : 영국, 크롬웰의 항해조례
가나자와성의 원경과 성 아래 거리 즉 조카마치의 모습
에도시대에 접어들어 수많은 도시가 형성되었다.
쇼군과 다이묘의 거성에 형성된 계획도시인 조카마치(城下町)를 비롯하여 역참도시, 광산도시, 항구도시 등 다양한 성격의 도시들이 존재했다.
조카마치는 전국시대 이래 다이묘의 거성 주위에 무사와 상공업자가 밀집하여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을 이루어왔기 때문에 각지에 번영하였다. 이 가운데 삼도(三都)로 불리워지는 에도, 오사카, 교토는 도쿠가와 시대를 대표하는 3대 도시였다.
쇼군이 거주하는 에도는 최대의 조카마치로서 18세기 초에 인구가 약 100만으로 당시의 세계 최대도시였다.
무엇보다 에도는 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무사와 그 가족들이 생활하였는데, 이들은 절대적인 소비층이었다.
신흥도시 에도는 점차 정치 · 군사 · 경제상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어, 일본 최대 소비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천하의 부엌이라 불리워지는 오사카(大阪)는 전국적인 상업 중심지로 가장 번영했다.
오사카에는 번이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쌀과 특산품을 저장하는 창고가 100채나 있었다.
전국의 주요 상품이 오사카에 집하된 후, 에도를 비롯한 각지로 보내졌다. 17세기 말 오사카 인구는 34만 5천 명이었다.
교토는 천황가와 공가(公家), 유서 깊은 사원의 본산과 전통 있는 신사가 다수 집중된 도시였다.
이에 따라 견직물, 미술공예 등 전통산업이 발달하였고, 사원과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교토
에서 생산된 제품들을 사서 돌아갔다. 교토의 인구는 17세기 말 40만에 달하였다.
지방에서는 조카마치가 번영을 누렸다. 조카마치는 영주가 거주하는 성곽, 무사 거주지, 사원과 신사, 도시민의 거주지로
구분되어 있었다. 소비층이 집중되어 수공업자와 상인이 모여들어 상품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업의 발달로 상인은 도매상(問屋, 도이야), 중개인(仲買, 나카가이) 소매상(小賣, 고우리)으로 분화하였다.
도매상, 중개인 가운데 나카마(仲間)라고 하는 동업조합을 조직하여 영업을 독점하고 이익을 챙기는 자도 나타났다.
막부는 처음에 일부의 업종을 제외하고는 동업조합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18세기 초 상공업의 통제와 물가정책을 위해
영업세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상인과 직인의 동업조합(仲間, 나카마)를 공인하고 영업의 독점권을 허락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정된 영업 독점권을 가진 동업조합을 가부나카마(株仲間)라고 한다.
에도, 오사카의 대소비지에는 조닌(町人, 상인)이 매입한 상품, 번들이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연공미와 특산물이 대량
으로 집적되었으며, 각종 주요 상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시장이 발달하였다.
거액의 이익을 챙긴 호상들은 무사들에게 연공미를 담보로 고리로 대부해 주기도 하여 무사의 경제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 최상층 대상인 가운데 일부는 재력이 다이묘를 능가하기도 했고, 이들 중에서는 무사들의 특권인 성(姓)과 칼차는
것(帶刀)을 허용받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조닌의 대부분은 직인, 도제, 자영상인과 그 고용인들이었으며, 행상인이나 날품팔이 노동자들이었다.
거대상인이 거액의 금전을 막부, 제번에 빌려주어 재정적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지배자에 저항하는 힘은 약했다.
막부는 1681년 에도의 호상 이시카와 로쿠베(石川六兵衛)를 짓밟고, 단지 신분에 벗어난 사치를 한다는 이유로 그 재산을
몰수한 경우도 있었다. 막부에 짓밟히거나 대명에 대한 채권을 박탈당해 파산한 호상은 수십 가에 달한다.
조닌의 정치세력은 약하여 상공업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수 없었다.
에도나 기타 도시는 물론이고, 상인의 도시 오사카나 교토에서조차도 시민의 자치권이 전혀 없었다.
막부의 직할도시에서는 무사들이 입법, 사법, 행정, 경찰의 전권을 장악했고, 조닌은 도시의 정치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도 없었다.
17세기 말 상업과 금융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신흥상인들이 출현하였다.
이들 신흥 상인들은 주로 포목업, 목재업, 양조업, 금융업에 종사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 시기에 출현한 대표적 신흥 상인 가문으로는 미쓰이(三井), 고노이케(鴻池), 스미토모(住友) 등을 들 수 있다.
오늘날에도 미쓰이와 스미토모는 건재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51. 인간의 본능을 대담하게 긍정한 조닌 문화
에도시대 상인문화(17세기 말 ~ 18세기 초)
그때 세계는
1701년 : 조선, 장희빈 사사
1701년 : 스페인 계승전쟁(~1714년)
겐로쿠 시대(元祿時代)라고 하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막부 정치가 안정되고 전국 각지에 눈부신 경제 발전이 이루어
지면서 도시가 성장했다.
조닌(町人, 상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경제적인 주도권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했다.
조닌은 대부분 읽고 쓸 수 있었고, 이런 능력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양이 되었다.
그렇지만 조닌은 당시 에도시대의 신분 질서, 즉 사농공상 가운데 최하위에 위치하여 도시의 자치권을 갖지 못했고 사무
라이의 정치적 지배와 간섭에 무력했다.
에도시대는 비로소 서민이 경제적 ·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문화 창조와 보급의 중요한 담당자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시대이다.
에도시대 이전에는 많은 문화가 서민 문화에 연원을 두고 있었다 하더라도, 지배 계급인 사무라이의 후원 아래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문화의 소비자 역시 사무라이와 귀족이었다.
그러나 에도시대에 들어 비로소 처음으로 서민이 창조하고 유행시키고 소비하는 시대, 조닌이 시대 문화를 전면적으로
이끄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조닌 문화는 처음에는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소설, 하이쿠(俳句, 일본의 단시), 가부키(歌舞伎), 인형극, 우키요에(浮世繪) 등의 분야에서 창조 활동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후 19세기 초 · 중반에 이르러 에도를 중심으로 도시민의 응집된 문화가 나타난다.
전자의 문화, 즉 교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조닌 문화를 '겐로쿠 문화'라 부르고, 후자의 문화, 즉 에도를 중심으로 한
문화를 '분카분세이 문화(文化文政文化)'라 부른다.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천황과 귀족이 사는 교토가 여전히 문화의 중심지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건재한다는 사실이다. 교토 옆에 자리 잡은 오사카는 이 시대에 전국적인 상업 중심지로 번성했다.
조닌 문화를 '우키요(浮世)'라 표현하는데, 우키요라는 단어는 '덧없는 세상에서 현실을 즐기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닌 문화는 우키요라고 하는 철저히 세속적인 문화였던 만큼 향락적인 관능의 세계였고, 유흥가의 유녀들은 조닌 문화
에서 주로 다루는 중심인물이었다.
교토의 시마바라(島原)와 기온(祇園), 오사카의 신마치(新町), 에도의 요시하라(吉原)는 에도시대의 3대 유곽지로서 불야성을 이루며 번성했다.
전국의 도시와 역참에서도 매춘 환락가가 일본 역사상 전에 없던 번영을 누렸다.
에도의 요시하라의 유녀 수는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목욕탕, 음식점, 극장, 찻집 등 다양한 곳에서 매춘이 이루어졌으며, 여러 매춘의 형태가 유행처럼 지나가고 새로운 흥미를 위해 다시 창조되곤 했다.
유락가는 당시 매우 엄격하고 숨 막히는 사회에서 벗어나 무거운 의무를 잊고 휴식하며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어떠한 사회적 지위나 신분보다도 돈이 좌우하는 세계여서, 사무라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돈 많은 조닌은 이곳에서 정치적 무력감에서 벗어나 금전으로 자유와 해방감을 마음껏 누렸다.
유녀들은 다양한 매춘과 성적 쾌락을 제공했고, 에도시대의 많은 남성은 이들의 고혹적인 자극을 즐기면서, 유락가는 조닌 문화에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조닌 문화는 유락가를 중심으로 태어나고 발전되었다.
소설 형식의 산문인 〈우키요 조시(浮世草子)〉에서는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라는 유명한 작가가 조닌 세계를 그렸다. 사이카쿠는 오사카 상인 출신으로, 조닌의 주요 관심사인 돈 버는 일과 성적 쾌락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의 처녀작인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1682)은 애욕에 인생을 건 요노스케라는 주인공의, 7살부터 60살까지 성적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다.
요노스케는 3,742명의 여자, 725명의 남자와 성적 관계를 하고, "이 세상의 유녀는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았다"고 할 정도
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60세에 모든 영약, 강장제를 가지고 '호색호'라는 배를 만들어 여인만 사는 섬을 찾아 항해에 나선다.
호색일대남.
주인공 요노스케가 7세부터 60세까지 3,742명의 여자, 725명의 남자와 겪은 성적 경험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사이카쿠는 이 작품에서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내용으로, 유교도 불교도 어떤 도덕도 구속받지 않는 철저한 쾌락주의를
묘사한다.
〈호색일대남〉은 화류계를 중심으로 한 대중 소설의 시대를 알리는 기념비가 되었다.
이키가 성에 대하여 대단히 상징적인 미의식을 담고 있다면, 성에 대한 노골적인 태도를 그린 〈호색일대남〉은 또 다른
일본 사회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일본은 성애를 구속하는 종교나 철학이 거의 없는 나라이다.
헤이안 시대 불교 진언종 일파는 오히려 성애와 종교적 최고 경지와의 일치를 이야기하며, 애욕적 도취 속에 보살의 경지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모든 일본의 불교가 성애를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될 것으로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무척 관대했다.
헤이안 시대 이래 귀족의 이상형은 호색가이며, 수많은 문학 작품 속에서 호색을 긍정한다.
14세기의 대표적인 수필집 《도연초(徒然草)》에서는 "모든 일에 훌륭해도 색을 좋아하지 않는 사내는 재미가 없어, 밑 빠진 옥배 같다"고 할 정도이다.
또한 당나라 의학서 100여 권을 참고해 탈고한 《의심방》(984)이란 책에서는 금욕으로 기를 막는 것이 만병의 근원이라
진단한다.
그러고는 남성은 많은 여성과 차례로 접해 활력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며 11명을 성적 상대로 하여 매일 다른 여성을 상대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 책은 10세기 이래 조닌 문화가 등장하는 17세기까지 많은 사람이 애독하고 지지했다.
성을 즐기는 종류도 다양하여 특히 오랜 사무라이 사회를 거치면서 남색도 자연스러웠다.
미소년이나 젊은 남자와의 성애도 대단히 즐겼으며, 문헌에도 그런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1420년 조선 세종의 명령에 따라 2개월간 교토에 머물던 강희맹은 눈썹을 밀고 주홍빛 화장을 한 채 쇼군을 시중드는 소년을 목격했다.
일본 지배자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남색을 목도하고 놀라워한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기록에는 남색 취향, 남녀 혼욕, 성적인 개방이란 대목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갔을 때의 모습.
멀리 후지산이 보이며, 앞의 행렬에는 청도(淸道)라고 쓴 깃발이 보인다.
이하라 사이카쿠는 이외에도 〈호색일대녀(好色一代女)〉, 〈남색대감(男色大鑑)〉을 썼으며, 〈일본영대장(日本永代藏)〉, 〈세간의 속셈(世間胸算用)〉 등에서는 조닌의 경제생활을 소재로 하여 '돈의 힘이라면 수천만 년 동안 즐거움과 축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축재를 찬미했다.
사이카쿠의 책은 대단히 인기가 많아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사이카쿠는 현대도 아닌 17세기 봉건사회에서 글로만 먹고산 전업 작가였던 것이다.
52. 세계적인 문화유산, 우키요에
고흐가 동경한 대량생산된 판화(17세기 ~ 18세기)
그때 세계는
1718년 : 영국 · 에스파냐 전쟁(~1720년)
1720년 : 청, 티베트를 속령화 함
우키요에(浮世繪)는 글자 그대로 우키요(浮世), 즉 속세의 모습을 목판에 새겨 찍어낸 그림을 말한다.
우키요에는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일본인의 감각은 그림에서 뛰어나게 표출되어 있다.
눈처럼 흩날리는 벚꽃, 기모노를 입은 여성, 분홍 · 보라색 등 파스텔조의 환상적인 색깔······. 오늘날 일본화에 자주 등장
하는 장면으로, 대단히 일본적 정취를 느끼게 해준다.
일본은 이미 10세기에 벚꽃, 달, 눈과 같은 일본의 독특한 자연을 그렸다.
이어 11, 12세기에는 〈겐지모노가타리〉에서 각 장면을 마치 영화처럼 농염한 색채로 두루마리 형태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15세기 자연을 박력있게 묘사함으로써 일본적인 수묵화를 창조한 셋슈(雪舟)의 그림은 세계적으로 평가 받고 있다.
당연히 목판화 우키요에에는 이러한 일본 그림의 전통이 녹아들었지만, 민중의 정서와 꿈이 보다 진솔하고 생생하게 표현
되어 있다.
우키요에는 처음에는 〈호색일대남〉 같은 이야기책의 삽화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인기를 끌면서 감상용 판화로 독립적으로 제작되었다.
판화 기술은 처음에는 단순한 색으로 처리하는 데에 불과했으나, 차츰 미묘한 음영과 다양한 색채를 지닌 인쇄 기법을 고안해냈다.
이러한 다색 판화는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 목판을 새기는 사람, 목판에 물감을 칠하여 찍어내는 사람이라는 3사람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목판화도 그림인 이상 화가가 가장 중요시되며, 실제로 완성된 판화에는 화가 이름만 나타난다.
그러나 아름다운 우키요에는 밑그림을 그리고, 목판을 파고 물감을 칠하여 찍어 내는 기술자의 협력 없이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
하나의 밑그림에 수십 개의 판목으로 나누어 색채와 음영을 채워서 완성된 작품을 찍어내기까지, 고난도의 기술적 숙련
없이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우키요에는 총기획을 담당하고 흥행의 최종 책임을 맡는 발행인도 있었다.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미인도'.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판화로 대량 찍어냈기 때문에 대중도 쉽게 구입할 정도로 저렴했다.
도시로 여행 왔던 지방 사람이 우키요에를 선물로 가져가 전국 곳곳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키요는 당대 풍속을 의미하지만, 실상 그 풍속의 중심은 단적으로 말하면 호색이었다.
그래서 우키요에는 성적 결합을 그린 춘화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렵다.
초창기 우키요에를 대표하는 화가,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의 경우, 그의 전 작품의 3할 정도가 춘화일 정도이다.
다양한 체위의 남녀 자태를 육감적으로 그렸는데, 육감적인 것을 넘어 음란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춘화는 대단한 인기였고, 춘화첩은 시집가는 딸의 혼숫감으로 넣어줄 정도였다.
그 외에도 히시카와는 가부키 극장과 유녀의 거리 등 유락가를 즐겨 그렸고, 행락지에 모이는 많은 사람의 모습을 생생
하게 그렸다.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 1753?~1806)는 전성기에 유녀나 찻집의 여인 등 실제의 미녀를 모델로 하여 수많은
여성을 그려 미인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여인의 표정에서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여 그렸으며, 미인화 시리즈를 발표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육감적인 묘사에 주력하여 퇴폐미를 지닌 미인을 주로 그렸다.
도슈사이 샤라쿠(東洲齊寫樂)는 수수께끼 인물이다.
그는 1794년 5월부터 다음 해 1월 사이에 공연된 가부키의 등장 배우와 당시 스모 선수의 모습을 소재로 우키요에를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그 후, 갑자기 활동을 접고 홀연 종적을 감춰버린다.
샤라쿠의 작품은 얼굴 모양을 대담하게 재구성하여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되어 있지만 심리묘사가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이 같이 전례 없이 개성 있는 작품으로 '우키요에의 귀재', '천재 화가'로 추앙받고 있다.
그런데 '샤라쿠가 누군가?'라는 의문에 수많은 설이 떠돌았는데, 그가 김홍도라는 설도 있다.
화풍이 김홍도의 것과 비슷하고 김홍도가 어느 시기에 행방불명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김홍도가 조선통신사행의 일환으로 비밀리에 일본을 방문하여 활약하다가 조선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이다.
샤라쿠는 아직도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1797~1858)는 풍경화의 대가이다.
히로시게는 가부키 배우 그림, 미인도 등을 그렸으나 빛을 못 보다가 37세에 〈동해도오십삼차(東海道五十三次)〉에서
자신의 독자적이고 서정적인 풍경화를 그려 기록적인 판매 부수를 올리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히로시게의 풍경화는 계절, 날씨, 시간 등 자연의 모습이 여러 가지 다른 설정으로 변화되며, 동일한 비오는 장면이라
해도 다양한 상황들을 표현한다.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 1760~1849)도 특수한 묘사법을 사용한 풍경화의 대가이다.
그의 대표작은 〈부악삼십육경(富嶽三十六景)〉이 있다.
호쿠사이의 명성은 서양에서 드높아 프랑스 작가 에드몽 드 공쿠르는 1896년 그의 기상천외한 발상에 존경을 나타내면서 〈호쿠사이 연구서〉를 발간했으며, 유명한 작곡가 드뷔시는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에 영감을 얻어
자신의 작품 〈바다〉를 완성했다고 고백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후지산'.
우키요에는 당시 서양에 수출되던 도자기 포장지로 사용되다가, 높은 예술성에 경탄한 유럽 미술상에 의해 서양에 소개
되었다고 한다.
모네는 방 안을 우키요에로 가득 채울 정도로 열렬한 수집광이었으며, 고흐는 우키요에와 똑같은 작품을 만들며 우키요에의 나라 일본을 평생 동경했다.
당시 유럽의 회화는 주제와 상관없이 원근법과 명암으로 그대로 따라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에 유럽 회화계는 또 다른 가능성을 찾고 있었는데, 우키요에가 보여준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 과감한 시점과 구성은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경탄을 자아냈다.
우키요에는 특히 인상파에게 영향을 끼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들을 존재케 한 원천이라 할 수 있다.
많은 한국 사람은, 어려서부터 따라 배우고 존경해 마지않던 고흐, 마네 같은 인상파가 우키요에에 숭배에 가까운 경의를
나타냈다는 점, 또 우리가 대단하게 여기던 인상파 그림이 실상은 일본 화풍을 모방했다는 점을 뒤늦게 알고는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세계 문화 구도를 얼마나 서양 패권 중심주의 시각으로 보아왔는지, 또 부지불식간에 우리가 얼마나 서양 문화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말해 준다.
외견상 별 볼일 없이 보여도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도저히 흉내 내기 어려운, 자신만의 색깔이 있고 장점이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볼품없어 보이는 문화라도 그 땅의 풍토에서만 빚어낼 수 있는 독특한 빛깔과 그 빛깔만의 독보적인 문화 분야가 있다.
우키요에는 똑같은 일본적 특성을 표현하면서도, 다른 어떤 분야의 일본 문화도 줄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일본 문화는 도덕적 속박에 구애되지 않는 거침없는 상상력을 갖고서, 세속적 세계의 특수한 장면을 포착해 내는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
우키요에는 그러한 일본 문화를 가장 잘 표현한다.
일본 문화의 정수를 표현해 낸 우키요에가, 서양 문화의 하나의 흐름에 불과한 인상파를 압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키요에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53. 형식미의 세계, 분라쿠와 가부키
일본전통예능의 정수(17세기 ~ 18세기)
그때 세계는
1721년 : 영국, 최초의 책임내각제인 월폴 내각 성립
1724년 : 조선, 영조 즉위
에도시대의 극장.
가부키 등을 상연했던 에도시대의 극장 내부 모습이다.
분라쿠(文樂)는 일종의 인형극인데, 처음에는 인형 조루리(人形淨瑠璃)라 불렸지만, 에도 말기 인형극단 분라쿠좌(文樂座)가 흥행에 성공하면서부터 극단의 이름을 따서 분라쿠라 불리게 되었다.
분라쿠는 배우에 해당하는 인형과 인형 조정자, 인형의 대사와 극의 내용을 노래로 전개하는 다유(太夫), 그리고 사미센
(三味線)으로 배경 음악을 연주하는 사미센 연주자, 그렇게 3자의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인형극이다.
'인형극'하면 어린이극이라 생각되고, '유치한 것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라는 선입견을 갖기 쉽다.
그러다 막상 보게 되면 얼마나 인간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늠름한 장수의 기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사랑하며 기다리는 애틋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더 여성스럽게 나타낸다.
인형이기 때문에 하늘을 나는 등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동작들을 자유자재로 표현하여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도 준다.
분라쿠의 주제도 흥미롭다. 나라 · 헤이안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극이 주류를 이루지만, 대도시
항간에 일어난 정사 사건이나 치정에 얽힌 살인 사건을 사건 발생 며칠 만에 무대화하여 보여준다. 치카마츠 몬자에몬의 〈소나자키 정사〉는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예이다.
호화로운 의상을 입은 인형이, 화려한 무대에서 은은하게 흐르는 사미센의 음악소리를 배경으로 다유의 대사와 노래에
맞추어서 연극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매료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8세기 중반 분라쿠는 전례 없는 황금기를 맞이했고, 극장 앞에 상인들은 줄을 이었다.
인형극에 불과한 분라쿠가 어떻게 인간 못지않은 섬세한 감정과 동작의 표현이 가능할까?
그것은 바로 숙련된 인형 조정자에게 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단역은 한 사람이 인형을 조정하지만, 주요 인물은 하나의 인형에 세 사람이 매달려 조정한다.
보통의 인형극과 다르게 세 명의 인형 조정자는 검은색 옷을 입고 검은색 헝겊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와서 인형을 직접 들고 조정한다.
한 사람은 인형의 두 발을 조정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인형의 왼손을, 또 나머지 한 사람은 인형의 얼굴과 오른 손을 담당한다. 인형의 한 동작을 세 사람이 붙어서 조정하는 것으로,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동작 하나하나가 매끄럽게 이어져 생명력 있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관중들은 분라쿠 작품의 내용과 줄거리보다도 표현 방식을 즐긴다.
과장된 표현과 기교, 양식화된 연출, 화려한 무대를 보면서 아름다워하고 몰입한다.
어려운 표현, 예를 들어 아리따운 아가씨를 한순간에 요상한 여우로 둔갑시키는, 일순간에 아주 대조적인 얼굴로 변신시키는 장면은 대단히 재미있기도 하지만, 어려운 장면을 소화해 낸 조정자들의 숙련된 경지를 음미하고 존경하면서 열광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일류 인형 조정자의 얼굴을 무척 보고 싶어한다.
관객의 요구에 응하여 일류 인형 조정자는 검은 헝겊을 벗어 얼굴을 드러낸 채 인형을 조정한다.
가부키(歌舞伎)라는 말은 원래 가타무쿠(傾く), 즉 '평평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서, 정상
궤도에서 일탈한 모든 행동을 가리킨다.
특히 호색의 의미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가부키는 노래(歌) · 춤(舞) · 연기(演技)로 구성되어 있는 종합 연극으로 후지산과 스시, 기모노, 스모와 함께 일본의 5대 국가 상징물에 포함될 정도로 일본이 자랑하는 전통 문화이다.
가부키는 상인 문화 속에서 발전되었다. 가부키는 무녀(巫女) 오쿠니(御國)가 여성 극단을 데리고 다니며 춤추고 노골적인 촌극을 한 데서 시작했다.
1603년, 오쿠니는 이즈모(出雲) 지방의 큰 신사(神社)인 이즈모 대사(出雲大社) 무녀였는데, 신사 중축을 위한 모금을 하기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며 춤과 촌극을 했다.
오쿠니는 신사의 가설무대에서 염불에 맞추어 관능적인 춤을 추었다.
오쿠니의 모금 운동은 종교적 춤이었지만 대단한 흥행을 거두었다. 눈부신 미녀들이 추는 관능적인 춤과 정사 장면은 수많은 사람들을 단숨에 매료시켰다.
이후 오쿠니를 본뜬 여성 중심의 극단이 많이 생겨나 각지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며 흥행에 대성공했다.
자연히 여자 배우는 매춘을 겸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당시 가부키가 '유녀 가부키'라 불릴 정도로 풍기문란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도쿠가와 막부는 여성이 가부키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다.
여자 가부키가 금지되자 생계가 막막해진 가부키 관계자와 가부키를 찾는 애호가들은 공연 허가를 요청했다.
이에 막부는 여자 배우 대신 남자 배우만 무대에 세운다는 조건으로 가부키 공연을 허락했다.
그래서 가부키에 여자 대신 12~15세 정도의 미소년들이 여장을 하고, 중세부터 전해 오던 가면극 노(能), 희극 교겐(狂言)을 각색하고 연출한 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부터 남자가 여자 배역을 하는 온나가타(女方, 여장 남자 배우)가 생겨 가부키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소년 가부키도 관객에게 아름다운 미모와 성적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소년 가부키 역시 귀족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거나 남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652년 막부는 가부키의 전면적인 공연 금지령을 내렸다.
어떻게 해서든지 가부키를 부활시키고자 고심한 가부키 관계자들은 남색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배우는 소년티가 나지
않게 청년의 차림새로 머리 모양이나 복장을 할 것과 내용은 인간사로 할 것 등 두 조건을 걸고, 1653년에 다시 공연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가부키계는 여자가 없다는 치명적인 결함 속에서 재출발했다.
그러나 가부키 배우들은 믿기지 않을 만치 기적적으로 여성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온나가타 배우는 여성 표현을 과업으로 여기고, 평생 철저하게 '여성'으로 사는 법을 실천했다.
여성의 심리와 거동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무대에서 '가장 여성답게 보일 수 있는 위치'를 찾아서 연기화하고, 여성도 채 깨닫지 못한 여성다움을 날카롭고 적절하게 표출하여 그것을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아름답게 강조했다.
여성의 재현은 가부키가 다시금 살아남을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온나가타들의 상상할 수 없는 혼신의 노력은 치명적인 결함을 최대의 경쟁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가부키는 온나가타로 재기한 후, 장대한 줄거리의 장막극을 창작하고 분라쿠의 인기 작품을 가부키로 각색하여 공연 목록을 확충했다. 분라쿠와 마찬가지로, 가부키의 내용도 역사물을 다룬 시대극이나 시중에서 일어난 극 등을 다양하게 다루었다. 주제가 다양하게 발전하기는 했지만, 가부키에 있어 줄거리는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가부키는 '형(形)의 예술'이라 불릴 만큼 내용보다는 형식과 양식미가 추구되었다.
언어, 동작, 연기, 음악 등 모든 부분에서 고도의 형식과 양식미를 발전시켰다.
가부키 배우의 연기에는 일정한 약속이 전승되어, 모든 연기에는 우는 법, 웃는 법, 먹는 법 등 일정한 형식을 만들어
관객의 흥미를 끌기 위해 노력했다.
무대에서는 대표적으로 하나미치(花道)와 회전 무대를 창안했다.
하나미치는 관람석을 건너질러 무대와 연결된 마루 통로이다.
하나미치를 통해 배우들이 나오고 들어가고 연기하는 무대로 활용하여, 관객 속에서 연기하는 효과를 내어 즐거움을
주었다.
극 무대 좌우에는 가부키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이 있는데, 쓸쓸한 장면이나 신나는 장면, 또는 애틋한 장면을 나타내는
음악을 연주하고, 새 우는 소리나 벌레 울음소리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효과음을 냈다.
하나미치와 회전 무대는 이후 서양 연극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마도 무대 설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앞선 극장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가부키는 고도로 양식화된 연기, 하나미치와 회전 무대 등을 이용한 기동력 있는 무대, 그리고 화려한 의상이
어우러진 극으로 발전하여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18세기 후반부터 가부키는 분라쿠의 인기를 압도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54. 보편자의 결여, 일본유학의 세계
일본 주자학에서 고학에 이르기까지(16세기 ~ 18세기)
그때 세계는
1773년 : 미국, 보스턴 차 사건
1776년 : 미국, 독립선언
에도시대는 전란이 끝나고 일본의 사무라이 정권 400년 만에 최초로 맞이하는 평화 시대였다.
이제 일본 사무라이 정권도 평화의 시대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 기술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일본에서 주자학은 평화의 시대를 통치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도입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주자학 도입은 조선과 깊은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고, 초기 내용은 퇴계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 주자학을 창도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는 원래 선승이었다.
그는 1590년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온 종사관 허성(許筬, 1548~1612)을 만나 주자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 후지와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가져간 《퇴계전서》 등 조선의 주자학 서적을 보면서 내용을 익혔고, 포로로
데려 간 강항(姜沆, 1567~1618)과 접촉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 주자학을 창도하게 되었다.
후지와라는 제자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을 막부에 추천했고, 하야시는 막부의 공인 유학자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하야시 가(家)는 직책이 세습되는 일본의 전통에 따라, 대를 이어 막부의 공인 유학자 직을 계승했다.
일본의 유명한 주자학자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 1618~1682)는 퇴계를 주자 이래 최고의 학자로 극찬하며 퇴계를
가미(神)로 숭배할 정도로, 초기 일본 주자학은 퇴계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일본의 학자들은 주자학을 통해서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을 얻고자 했다.
조선 주자학과 달리, 일본학자들은 천리(天理)가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야마자키 안사이는 퇴계의 경(敬)을 중심 사상으로 삼았지만, 퇴계와는 달랐다.
원래 퇴계학의 경(敬)은 하늘과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한 수양법이었다.
경(敬)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외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집중하여,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천리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으로 퇴계학에서는 경(敬) 공부를 실천 덕목으로 겸하기도 했다.
퇴계학의 경우, 경(敬) 공부를 많이 하여 마음이 하늘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남을 공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강해지게
되므로, 경(敬)을 실천 덕목으로서도 겸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야마자키 안사이는 퇴계의 경(敬)에서 '천리' 회복은 제거하고, 실천 덕목으로만 이해했다.
야마자키는 경(敬)을 타인에 대한 실천 윤리인 오륜으로서 변용했다.
야마자키는 실천 윤리와 연결되어 있던 천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즉 야마자키에게 오륜은 그저 인간관계의 기본일 뿐이다. 부모에게 효하고, 임금에게 충하는 등 오륜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며 실천 덕목에 지나지 않는다. 야마자키에게 오륜은 진리와는 무관하다.
부모에게 효하는 것, 그것은 윤리 차원을 넘어서 진리와 맞닿으면서 효는 깊어진다. 더욱 절실해진다.
조선의 주자학은 그 진리(천리)를 강하게 믿었다. 그래서 조선은 '오륜'이 윤리 차원을 뛰어넘어 진리와 연결되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었다.
진리 없는 윤리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조선 주자학에게 거의 본능에 가까운 확신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야마자키는 "윤리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윤리인 것이지, 어떻게 진리일 수 있느냐?"고 의문을 품은 것이다.
이런 경향은 야마자키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천리는 양명학과 고학(중국, 조선에서는 실학)에서 더욱 이탈하고 소멸되어 나타난다.
원래 양명학과 고학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중국이나 조선에서도 모두 주자학이 지니는 지나친 관념성의 폐단을 지적하며
나온 학문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주자학이 조선 왕조 500년의 정신적 근거로서 발달했기 때문에 그 폐단이 더욱 심했다.
정치적 억압이 하늘을 빌미로 정당화되기도 하고, 주자학적 명분이 정권 유지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경험적 현실이 주자학의 지나친 사변주의로 인해 무시되었다.
그렇지만 중국과 조선의 경우, 변하지 않는 본래의 세계인 '이(理, 天理)'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본의 양명학과 고학은 주자학의 사변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확실하게 천리를 탈락시키는 과정으로
일관한다.
양명학자 구마자와 반잔(熊澤蕃山, 1619~1691)은 인간 존재의 근본으로 육체적 요소를 제시한다.
그리고 천리를 하늘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한다.
결국 하늘(천리)처럼 섬겨야 할 대상을 임금과 부모로 구체화하고, 오륜(五倫, 군신유의, 장유유서, 부부유별, 붕우유신)을 최고의 가치로 격상하였다.
고학은 말 그대로 주자학을 부정하고 공맹의 고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한 학문이다.
고학자들은 양명학자들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천리를 분명히 부정한다.
고학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齊, 1627~1705)는 "만물은 천지 사이에 저절로 생물이 생겨나는 것이지, 천리라고 하는
것이 먼저 있어서 작용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토에게 퇴계학의 경(敬)은 타인을 공경하는 윤리학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학자들은 인간의 열정과 욕망, 현실을 강력하게 인정하게 된다.
야마카 소코(山鹿素行)에 따르면 "인간의 열정과 욕망은 증오되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 사람의 욕망을 없애버리면
이미 사람이 아니며, 마치 기왓장이나 돌과 같다"고 한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에 이르면 천리는 완전히 제거되고, 성인의 도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리가 제거된 성인의 도란 어떤 것인가?
오규에게 성인은 무언가를 만든 자이며, 결국 현실의 정치 지배자, 도쿠가와 쇼군이 성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천리가 제거되고 나면 현실이 강하게 대두하는 것이다.
오규 소라이.
유학자인 오규는 천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천리가 제거되면 현실이 강하게 대두한다.
그의 사상은 보편자가 탈락하는 일본유학의 세계를 명백하게 알게 해준다.
일본에서 양명학으로부터 고학에 이르는 발전 과정에는 사실 주자학에 의해 지나치게 무시되던 욕망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 있었다.
이는 중국과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은 천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천리가 제거되어, 욕망과 현실이 강하게 나왔고, 오규 소라이에 이르러서는 성인을 현실의 지배자인
쇼군이라 간주했다.
일본 주자학에서 양명학, 고학에 이르기까지 일본 유학은 천리가 소멸 · 탈락되는 과정을 거쳤음을 보였다.
이는 불교가 신도 속에 흡수되면서 불교의 철학성이 탈락되어, 하나의 마법적 신으로 수용된 것과 비슷하다.
일본은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 우주 만물의 궁극적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 관심이 적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이 낳은 대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는 "일본은 절대자, 보편자 등이 있는 외래 사상을 용납 못하고, 일본적으로 변용시킨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일본에는 무엇인가 집요하게 저음으로 흐르면서 절대자, 보편자 등과 같은 외래 사상을 부서뜨린다.
마루야마는 집요하게 흐르는 그것을 '집요 저음'이라 불렀다.
55. 위기와 다양한 개혁들
교호개혁과 다누마의 정치(1716년 ~ 1786년)
그때 세계는
1783년 : 조선, 박지원, 〈열하일기〉 지음
1784년 : 조선, 이승훈, 연경에서 세례 받음
18세기 초 상품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막부와 번의 지출이 증가하여 재정은 점차 궁핍하여 갔다.
무사의 경제 기반은 주로 농촌에서 수취한 연공이었고, 원칙적으로 농업이나 상업과 같은 생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때문에 무사의 수입액은 연공수입 이외에 추가수입은 거의 없었다.
반면 농민은 농업 생산성의 증가와 상품 작물의 경작을 통해 수입을 증대할 기회를 가졌고 상인은 상업과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무사들은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쌀값이 떨어져 오히려 소득이 감소했다.
게다가 무사 계급의 소비생활이 더욱 증가하면서 무사들은 재정적 위기에 내몰렸다.
이 때문에 막부는 화폐를 재주조하여 화폐의 질을 낮추어 그 차익으로 재정을 보충하려 했고, 독점적 조합 가부나카마(株仲間)를 인정하는 대가로 상인으로부터 헌금을 징수하는 등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막부의 악화된 재정은 회복되지 않았다.
막부뿐만 아니라 번들도 재정난에 고통을 받았다. 번들은 참근교대에 따른 비용, 생활의 사치, 곡물 생산의 변동 등으로
재정이 궁핍해졌다.
하급 무사들의 경우 생활난은 더욱 심각하여 부업을 하거나, 봉록미를 담보로 고리대금업자로부터 돈을 차용했으며,
유복한 상인의 양자로 들어가 무사신분을 팔기도 했다.
상인이 무사의 양자가 된 후, 무사 본인은 은거시키고 양자가 무사 행세하는 경우도 있다.
1716년 8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는 이에야스의 시대를 이상적 사회로 인식해 사회 체제의 변혁을 모색하였다. 요시무네는 30년에 걸친 재위 기간을 통해 각종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를 총체적으로 '교호(享保)개혁'이라 한다.
우선 문란해진 무사의 풍토를 쇄신하기 위해 무술을 장려했다.
또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검약령을 실시해 지출을 줄여 나가는 한편, 세금 수입의 증대를 꾀했다.
이어서 공직자들의 부정을 철저히 적발하고, 풍작과 흉작에 관계없이 일정액의 연공미를 징수하는 정면법(定免法)을
실시해 수입안정을 도모했다.
상인 자본을 빌려 새로운 농토개발을 추진하고 쌀의 증산을 장려했다.
또한 고구마 · 사탕수수 · 조선인삼 등 상품 작물에 대한 재배도 장려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조치로 막부령의 석고는 10% 이상 증가하였고 연공 수입도 증가로 돌아섰으며 막부재정은 점차 회복
될 기미를 보였다.
그렇지만 농촌의 현저한 변화는 막번체제를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농촌에는 상품작물의 재배가 활발해지며 농민들 사이에서 빈부의 격차가 생기고, 토지의 저당과 매각을 통해 몰락하거나
혹은 지주가 되는 경우가 생겨 농민의 계층분화가 나타나서 봉건적 지배체제의 기초가 흔들렸다.
요시무네.
요시무네는 에도막부의 중흥에 힘 쓴 쇼군이었다.
쌀값 안정을 위해 애썼으므로 당시 에도시대 서민들은 그를 '쌀장군(米將軍, 고메 쇼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쇼군 요시무네의 뒤를 이어 9대 이에시게(家重)가 쇼군직에 오르자, 측용인(側用人)을 겸한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가
막정의 실권을 잡았다.
오키쓰구는 10대 쇼군 이에하루(家治)의 시대에 행정의 수반인 노중(老中)으로 승진하여 막강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의 20년간 막부 정치를 담당하였던 시기를 그의 이름을 따서 '다누마(田沼) 시대'라고 한다.
오키쓰구는 당시 명문가 출신이 아니라 쇼군 옆에서 보좌하다가 신임을 받아 출세가도를 달린 일종의 벼락출세한 사람이다. 오키쓰구는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정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교호개혁에 의한 성과는 일시적인데 그치고 쌀값의 하락으로 막부의 재정은 또 다시 위기에 빠졌다.
다누마 오키쓰구는 요시무네의 긴축 정책과는 반대로 상인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타개하고자 했다.
각지에서 발전하고 있던 상품 생산과 유통이 가져오는 이익에 착안하여, 이를 막부 재정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이용했다. 오키쓰구는 우선 재원을 적극적으로 확보할 목적으로 대규모 신전개발을 계획하고 오사카, 에도 거상들을 끌어들여 이
사업을 추진하였다.
또 동 · 철 · 황동 · 인삼 등의 특산물을 전매제로 하여 상인에게 전매권을 주고 대신 영업세를 징수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독점동업조합의 결성을 공인해 주는 대가로도 영업세를 걷어 들였다.
다누마의 정치는 상인들의 경제력을 이용해서 상품경제가 가져온 이익을 얻어 재원을 확보하려 했지만, 결국 개혁은
하지 못하고 상업자본의 이익을 증가시켰을 뿐이었다.
게다가 다누마 시대에는 뇌물이 횡행해서 기강이 문란해졌다. 결국 다누마 오키쓰구는 실각하고 만다.
56. 농민소요의 격증과 오시오의 난
에도막부의 동요(19세기)
그때 세계는
1789년 : 프랑스 대혁명
1811년 : 조선, 평안도 농민전쟁(홍경래의 난)
'구민'의 깃발을 들고 진격하는 오시오의 군대.
전직관리 출신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제자 20여 명, 농민 약 300명을 이끌고 무장했다.
막부와 제번의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오히려 그러한 타격은 농민에게 미쳐 조세 부담이 늘었으며, 기본적인 생활조차도
압박을 받아 궁핍해졌다.
게다가 상업자본이 급속하게 침투하면서 농촌에서 빈부의 차가 심해졌으며, 농민층의 해체가 진행되었다.
농민들은 토지를 매각하거나 저당을 잡혀 돈을 빌리게 되었고, 이후에 갚지 못하게 되자 토지를 상실하여 소작인으로
전락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농민은 생활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연공 감면 등을 요구하는 농민의 저항과 봉기가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전의 농민 봉기는 영주에게 연공의 감면을 요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직소하거나 도망하는 등의 형태가 주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광범한 농민이 참가하여 집단의 힘으로 영주에게 압력을 넣는 일이 많았다.
막부와 번들은 지도자를 엄벌에 처하면서도 농민의 요구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 연공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에도시대를 통해서 농민의 잇키는 3200여 건에 이르는데, 대부분 18세기 초반 이래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또 시대가 내려올수록 그 규모가 커지며 상인의 유통상의 독점에 반대하는 농민 잇키도 나타났다.
몰락한 농민 중에는 부랑인이 되어 도시에 유입된 자도 적지 않았다.
도시에서도 쌀값 폭등으로 일반서민의 생활은 어려워졌으며 빈민이 미곡상과 고리대 등을 습격하여 약탈 · 파괴하는
일이 에도, 오사카를 비롯한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농민 잇키와 약탈행위는 조직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빈발함에 따라 막번체제의 기초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더욱 상황이 험악해졌다. 극심한 흉작이 계속되었고 농촌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났다.
낙태는 물론 두세 명 이상의 자식이 태어나자마자 즉시 살해해버리는 비참한 일이 전국에 퍼졌다.
농민이 도산하여 농촌은 황폐해졌고 농민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농촌의 분위기는 도시에도 파급되어 미곡상과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한 폭동이 격화되었다.
오사카에서도 빈사자가 줄을 이었다. 부상들이 쌀을 매점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었는데도 막부는 구제책을 마련하지 않고
빈민들을 방치하였다. 오히려 오사카의 쌀을 에도로 송출하려고 했고, 호상들은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1837년 막부의 전직 관리였던 오시오 헤이하치로(大塩平八郞)가 난을 일으켰다.
유명한 양명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대기근으로 고통을 받는 오사카 근교 민중들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여 막부관리에게
빈민구제를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장서를 팔아서라도 빈민을 구제하려고 했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역부족임을 통감하고 있었다.
이때, 막부의 담당 관리는 빈민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특권 상인이 미곡을 매점매석하는 것에 대해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격분한 오시오 헤이하치로는 제자와 농민, 도시 빈민 등 약 300명과 함께 호상을 습격하고 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줄 계획을 세웠다.
오시오의 반란은 겨우 몇 시간 만에 진압되었고, 오시오는 한 달 넘게 도피 생활을 하다가 체포망이 좁혀지자 자결하였다. 오시오 헤이하치로 난은 하루 만에 진압되었지만, 막부 전직 관리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는 점에서 막부와 제번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난리로 오사카 시내는 불탔지만, 이 난리로 집이 불탄 사람들조차 오시오를 원망하기는커녕 그를 신처럼 받들었다.
오사카는 사통팔달로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어서 반란의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에치고(越後)의 가시와자키(柏崎)에서는 국학자였던 이쿠타 요로즈(生田萬)가 오시오의 제자임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다른 지방에서도 오시오의 제자를 자칭하는 자들이 연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사회는 불안정해져갔다. 막번체제의 기초는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57. 막부재건의 마지막 몸부림
덴포개혁의 좌절과 웅번의 대두(1833년 ~ 1843년)
그때 세계는
1812년 : 프랑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1814년 : 빈 회의(~1815년)
대규모의 흉작과 기근, 오시오의 난과 그에 따른 사회불안, 심각한 재정난으로 막부는 위기에 처했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졌다는 소식은 충격이었다.
막부는 막번체제를 동요시키는 내외 우환에 대해 본격적인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1841년 노중(老中)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를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1841년은 연호로 덴포(天保)기에 해당하므로 이를 '덴포개혁'이라 한다.
타다쿠니는 교호 시대의 개혁을 이상으로 하였다. 그의 개혁 방향은 상업자본을 억제하여 농업의 자연경제로 복귀시킬
것을 목표로 했다. 그 중심은 다음의 네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첫째, 모든 계층에 대한 검약령과 엄격한 풍속 통제를 단행하였다. 에도의 가부키극장에 대해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전시켰으며, 배우가 도시를 걸어 다닐 때에는 삿갓을 쓰도록 했다.
둘째, 에도의 인구를 줄이고 농촌의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농민이 농촌을 떠나 에도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본업
이외에 집을 떠나 타지방에서 일정 기간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영주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셋째, 물가를 안정시킬 대책을 강구하였다. 물가가 폭등한 것은 독점동업조합(가부나카마)이 상품의 유통을 독점하고
물가의 부정 조작을 일삼는 것이 원인이라 여겼다. 때문에 독점동업조합의 해산을 명령하고 상인들의 자유로운 거래를
인정하여 에도와 오사카에 유입하는 물자가 늘어나도록 했다.
그렇지만 정책효과는 발휘하지 못하고 유통시장의 혼란이 가중되어 도리어 물가가 상승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넷째, 막부 재정의 확대를 위해 연공률을 조사하고 황무지의 재경작을 시도했으며 에도, 오사카 주변의 영지를 막부의
직할지로 만드는 몰수령을 내렸다.
이상 막부의 덴포개혁은 너무나도 급격하고 막부 중심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사회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다이묘, 상인, 농민층의 반발을 받아 개혁의 효과는 거의 거둘 수 없었다.
덴포개혁의 실패는 막부의 권위 실추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막부의 덴포개혁을 전후하여 여러 번들도 개혁을 추진하였다. 각 번도 막부와 마찬가지로 재정의 궁핍과 농민봉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연공을 증수하고, 식산흥업을 추진했다.
또 전매제도를 강화하여 재정난을 타개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밖에도 농민층의 분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막부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 서남쪽에 위치한 번들은 개혁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사쓰마번(薩摩藩)에서는 하급 무사인 주쇼 히로사토(調所廣鄕)를 등용해 개혁에 착수하였다.
사쓰마번에서는 번 재정이 심각하여 교토, 오사카, 에도 상인에게 빌린 채무가 500만 엔이 넘었다.
히로사토는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여 다액의 빚을 거의 해결하였다.
또 흑설탕 등의 전매를 실시하여 재정난을 타개하였다.
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는 가고시마(鹿兒島)에 조선소와 유리 제조소를 건설하는 등 공업을 일으켰다.
또 사쓰마번에서는 서양식 포술 등을 활용하여 군사력 강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조슈번(長州藩)에서는 다이묘 모리 타카치카(毛利敬親)가 하급무사 출신인 무라타 세이후(村田淸風)를 등용하여 개혁을
착수했다. 무라타 세이후는 장기에 걸쳐 분할해 변제하는 분할상환제도를 실시하여 번의 부채를 정리하였다.
또 강한 비판을 받고 있었던 종이와 밀랍의 전매제를 완화했으며 식산흥업정책을 실시했다.
또 세토나이카이 통과 선박을 대상으로 화물을 저당 잡아 자금을 대부하거나 상품의 위탁 판매 등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고, 이를 조슈번의 재원으로 활용하였다. 게다가 하급무사들을 등용하여 서양식 군비의 정비에 노력하였다.
도사번(土佐藩)에서는 긴축재정을 실시해 재정을 확보하려 했다. 히젠번(肥前藩)에서는 번주 나베시마 나오마사(鍋島直正)가 하급무사를 등용하여 번정개혁에 착수, 농촌부흥책을 꾀하여 농민증의 분해를 방지하고자 했으며 도자기 등의 식산흥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대포 제조소를 설치해 서양식의 군사력으로 전환을 모색하였다.
슈세이칸(集成館)의 대포유적.
부국강병책을 취한 사쓰마번의 다이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별저에 서양식 공장들을 설치했다.
용광로, 유리, 도자기 제조소 등이 있었다. 사진은 대포생산의 유적.
서남지역 번에서는 하급무사를 등용하여 개혁에 성공하자, 유능한 하급 무사가 번정에 참여하는 길이 열리고 하급무사들의 세력이 커졌다. 또 막부가 재건에 실패한 것과 정반대로 경제재건에 성공함으로써 이후 정국을 주도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