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유공자, 그들은 누구인가
2021.12.30
“황하가 다 마르고, 태산이 갈아엎어져도, 한 왕실의 종묘가 이어지는 한, 너희는 대가 끊어지는 일이 없으리라.”
중국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왕조를 세운 유방이 창업공신들에게 제후 직첩과 봉토를 나눠주며 내린 단서철권(丹書鐵券; 왕조시대 공신을 표창하던 문권과 쇠로 만든 표지)의 요지입니다. 특권층 증서이자 국가유공자 자격증입니다.
붉은 글씨로 쓰고 옥새를 찍은 철판을 반으로 잘라, 하나는 종묘에 보관하고 하나는 공신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처음 철권을 받은 공신은 100여 명에 이르렀으나 100년이 지난 후까지 작위를 보전한 자는 겨우 5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법을 어겨 목숨을 잃었거나 나라(제후국)가 망해 대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유방의 단서철권은 관직이나 땅을 나누어준다는 의미일 뿐, 죄를 지으면 죗값은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수(隋)·당(唐)대에 이르러서는 잘못을 저질러도 조상의 공적을 감안해 목은 치지 않는 면죄부 기능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단서철권에 비견할 제도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내린 호성(扈聖)공신 86명, 선무(宣武)공신 18명, 청난(淸難)공신 5명이 대표적입니다. 역성혁명 이후 개국공신, 정난(靖難)공신들처럼 전답과 노비를 받았습니다. 왕을 위한 공로로.
을사늑약(乙巳勒約;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조약)을 주도한 을사오적도 일제가 주는 작위와 포상금을 받았습니다. 학부 이완용(후작), 군부 이근택(자작), 내부 이지용(백작), 외부 박제순(자작), 농상공부 권중현(자작) 대신들입니다. 100년 저쪽 메이지(明治) 치세를 확장한 공로로.
# 국가유공자를 왜 광주시장이 정하나
왕조시대도 아닌데 한국은 현대판 단서철권의 데자뷔를 보고 겪고 있습니다. 올 1월 5일 시행된 5·18민주화운동특별법(5·18왜곡 처벌법)이 지난주 처음 발동됐습니다. 광주경찰청은 지난 22일 5·18을 왜곡한 혐의가 있다는 네티즌 11명을 검찰에 송치했습니다. 혐의 내용은 5·18을 ‘폭동’ 또는 ‘반란’으로 규정하거나, ‘북한군 개입설’ 등을 주장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 법은 5·18의 왜곡, 허위사실 유포 등에 대해서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습니다.
사태 발생 40주년이 지난 일을 새삼 들추는 것은 5·18의 성격을 규명하자는 게 아니라 5·18유공자 수와 공적이 궁금해서입니다. 알려진 바로는 5·18 사망자 수는 육군본부 발표(1981년) 189명, 김영삼 정부 발표(1995년) 195명, 김대중 정부 발표(2001년) 195명(군인 23, 경찰관 4명 제외) 등 200명 안팎입니다.
그런데 유공자는 사망자의 30배나 되는 6,000명에 육박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어떤 경위로 유공자가 되었는지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보훈처 아닌 광주시장이 정한다는 사실 외엔.
유공자(有功者)란 ‘국가나 사회·조직에 공로가 있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공로(功勞)는 ‘어떤 일에 애쓰고 이바지한 공적’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일정한 혜택을 주는 것을 국민은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행적을 상찬하고, 후대에까지 기리려고 합니다. 독재자가 일방적으로 선정한 유공자가 아닌 이상.
유독 5·18 유공자만이 대상이 누구이며, 몇 명에 이르는지, 어떤 공로 공적이 있는지, 왜 국고로 지급하는 배상 대상을 광주시장이 전결하는지 공개하지 않는 것은 민주정치의 모순입니다.
# 유공자 명단, 공적 밝혀야 대통합 길 트여
되새겨 보면 벼슬·토지·포상 등 혁명세력의 논공행상은 참수·유배·몰수로 그것을 빼앗긴 자들의 권리·소유의 자리바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빼앗고 빼앗긴 자들끼리의 제로섬(zero sum)게임입니다.
혁명이라는 기치 아래 불나비처럼 뛰어들어 부화뇌동한 '가붕게'들이나 강 건너 불구경만 한 장삼이사들은 절규의 열매를 맛보거나 새 세상의 햇살을 쬐지도 못하고 스러지기 일쑤입니다.
시대에 역행하는 사람이 적어야 시대정신이 정당성을 가지듯, 합의(合意)의 크기가 커질수록 신천지는 더욱 맑고 밝아집니다.
우리가 5·18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정치인들이 제 조상 신주보다 더 떠받드는 ‘국민’이기에, 헌법이 보장하는 ‘알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고 싶습니다. 한국정치를 쥐락펴락하는 5·18 유공자 가운데는 사태 때 광주에 가보지도 않은 사람, 당시 서울의 여고생, 심지어 현 야당 중진도 있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나요?
그것을 알아야 유공자와 아픔을 나누고 그들과 민주화의 길을 함께 닦아 나가는 대통합의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 이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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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홍묵
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