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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점순 헬레나(서울대교구 용산본당)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대대로 찬미와 영광을 올립니다.”
인생의 향기를 가득 실은 기차가 칙칙폭폭 달려간다. 들녘엔 벚꽃이 휘날린다. 내일이 김 토마스 시아버님의 기일에 7남매 형제들이 모이는 날이다. 문경은 선조들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옹기를 구워 팔아 생활을 했던 곳이다.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신 시아버지는 윗대 어른들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아 자식들과 함께 사셨다. 손바닥만 한 구리 십자가를 벽에 걸어 놓고 가족들이 기도드리던 것은 조선 시대에 외국인 신부님이 선물로 주셨다고 했다.
문경 가은이 우리나라 3대 석탄광산이라 땅속에 무연탄을 개발하였다. 사람들이 등 따시게 살았었고 외국 수출도 일등공신이었다. 시골 가는 기차에서 그날의 기억으로 걸어 들어갔다.
“형님, 저, 기차 탔어요.”
큰동서는 내가 온다는 문자를 받고 유모차를 끌고 역전으로 나왔다. 도회지로 흩어졌던 형제들도 모두 도착했다. 장성한 조카와 손녀들이 넙죽넙죽 절을 했다. 고희를 넘긴 자매 같은 다섯 동서가 반가운 재회를 했다. 점심은 팔도 산해진미로 솜씨 발휘를 했다. 큰형님이 가꾸어 놓은 텃밭에서 냉이와 달래를 캐어 된장국도 끓였다. 대가족이 대청마루에 둘러앉아 모처럼 만에 한솥밥을 맛있게 먹고 성당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옛날에는 성당으로 가는 길이 구불구불한 논둑길이었다. 지금은 고속도로처럼 뚫려 차들이 씽씽 달린다. 성당 마당에는 변함없이 성모상과 제대 위에 예수님의 십자고상을 모셔놓았다. 수녀님이 낯선 손님들 방문에 깜짝 놀라시며 반가워하셨다. 예수님이 잃어버렸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환하게 웃으시는 성화에서 시아버지의 얼굴이 겹쳤다. 시아버지는 멀고도 가까운 이웃들을 평생 형제자매로 섬기며 사셨다. 고향 산천의 풍경들과 향수가 서려 있는 기차역, 기와집들, 단골 미용실이 말을 걸어왔다.
그 옛날 7남매 형제들이 번성하여 후손들이 40~50명은 족히 넘을 것 같다. 당시에 시아버지는 주일이 되면 하던 일손을 멈추었다. 온 가족이 주일 교중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으로 향했다. 그분은 증조할머니를 바소쿠리에 짊어지고 앞장을 섰다. 뒤를 따라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손자들로 줄이 이어졌다. 비가 오면 찰흙이 검정고무신에 달라붙어 걸음을 뗄 수가 없었고, 풀숲에 숨어 있던 독사에게 물렸던 아픈 기억도 아렸다. 제일 앞자리에 담요를 깔고 증조할머님을 앉혀드렸다. 혹시 자식들이 빠진 사람이 있나 일일이 인원 파악을 하셨다.
이런 우리 집안 분위기를 동네 사람들은 무척 부러워했다. 대가족이 화목하게 사는 비법이 있는지 물으면 “천주님 덕분”이라고 하셨다. 탄광촌에 취직하러 온 뜨내기 사람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여 대부도 서 주고 영세를 시켰다. 젊은 부부들이 너도나도 아기를 안고 업고 몰려드니 성당 안은 콩나물시루가 되었다. 내가 미사 중에 꾸벅꾸벅 졸면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 돌아보면 시아버님이 빙그레 웃으셔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기도 했다. 시댁 가족들은 위계질서를 존중하며 신앙생활을 하며 화목하게 살았다. 겸손한 자세로 성실하게 사는 일상이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라고 배웠다. 이런 문화를 보고 불교 신자 부모 밑에서 성장한 내가 천주교에 대해 좋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마음의 자세도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이 시나브로 젖어들었다.
1980년 12월에 서울로 이사를 왔다. 딸은 다섯 살, 아들은 10개월이었다. 1960~70년대에 남편은 군대에 가서 특수 작전 수행 중 돌이킬 수 없는 큰 사고를 당했다. 전쟁의 기억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 속으로 함몰되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부모님의 가슴 위에 다듬잇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무겁고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남편이 20대에 운동신경이 발달해서 국가대표 사이클 선수였던 프라이버시도 허물어졌다. 매일 아픈 다리와 씨름하는 날들이 힘겨워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보다 못한 가족들이 환경을 좀 바꿔보자고 권유를 했다. 마침 막내 시동생이 중장비 회사에 다녔기에 도움을 받아 서울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시아버지는 우리가 서울로 이사 간다는 말을 듣고 불안해서 괴나리봇짐을 걸머지고 버스에 올라타셨다. 다음날 제일 먼저 경로당에 가서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장소를 알아 오셨다. “새 아가, 새 아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라. 저기, 산꼭대기에 성당이 하나 있다고 한다. 아기들 데리고 꼭 찾아가거라. 주님께서 반드시 너희 앞날에 축복을 주실 것이다. 내 말 잘 알아들었지?” 당부하셨다.
긴 겨울이 꼬리를 감추고 봄바람이 훈훈하게 불었다. 아들은 업고 딸을 걸려서 산꼭대기에서 찾은 성당은 무덤들이 즐비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언덕 밑에 71위 무덤에 묘비가 새겨져 있었다. 영어로 출생지, 나이, 이름, 사망한 날짜가 적혀 있었다. 풍선처럼 부푼 내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낡은 성당 천장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참 후에 신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한국 천주교회 초석을 놓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묘지였다. 평생 한국인들의 영혼 구령을 위해 살다가 돌아가신 후에 이곳에 묻혔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선교사들의 일생을 곰곰이 마음속에 되새김질했다. 만약에, 어디엔가 천국이 있다면 이곳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시골 출신이라 서울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웃들을 내 마음처럼 믿어주고 받아주었지만, 오히려 순진한 나를 이용만 했다.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이방인처럼 30대 중반에 세끼 밥을 먹기도 어려운 현실은 아득했다.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에 무엇이 제일 중요한가? 돈을 많이 벌어 부귀영화를 꿈꾸어 볼까? 아니면, 가난하게 살아도 자식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으로 신앙을 물려 줄 것인가?
긴 장고 끝에 내 발걸음은 선교사들의 무덤으로 향했다. 이국땅에서 평생을 헌신한 삶이 여기서 안식을 누리고 있었다. 무덤 잔디 사이의 잡풀을 뽑아주며 인생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니 자기중심적인 욕망들은 떨어졌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우선순위는 첫째 자식들을 위해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사나, 주민등록도 옮기지 않기로 했다. 둘째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 위해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기로 했다. 나는 성경 창세기를 공부하는 중이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신부를 데려오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신뢰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느꼈다. 내 가족의 꿈을 실현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믿고 그곳을 바라보며 달동네에 눌러살았다.
서울에는 박해하던 친정엄마도 없고, 남편도 서서히 모르핀에서 빠져나왔다. 직장에서 자주 이직을 하였으나 들어오는 수입으로 입에 풀칠은 했다. 토요일에는 아이들과 손을 잡고 어린이 미사를 드리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혼할 때 관면 혼배를 했지만, 신앙에 대한 교리는 잘 몰랐다. 딸은 시골에서 유아 영세를 시켰고, 아들은 내가 교리를 받고 영세할 때에 나란히 유아세례를 받았다. 내 생에 이런 날이 다 있다니, 혹시 꿈은 아닌지 볼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주일학교 어린이 미사에 몇 년 동안 다니다가 딸과 아들이 첫영성체를 했다. 그 날의 의젓한 모습은 온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뻤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감사노래를 불렀다. 내 믿음은 봄볕을 받은 새싹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찼다. 매일 새벽 미사 드리며 성체를 모실 수 있었고 복음 말씀도 가슴에 새겼다. 남들 보기에 우리 사는 형편이 기쁘거나 즐거울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어느새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아버지의 품은 항상 따사롭고 든든했다.
내가 선천적으로 단순, 순박해서 주님께서 지혜와 용기를 주셨다고 생각되었다. 달동네에 말뚝을 깊게 박고 어린아이처럼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주님께 의탁 드렸다. 이런 선택이 내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하늘과 가까운 판자촌에는 놀이터가 없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넓은 성당 마당이 있었고 주일학교 친구도 많이 생겼다. 딸과 아들이 무럭무럭 성장해서 3, 4학년에 올라갔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주일학교 자모회 봉사활동, 구역장, 군종후원회 지회장,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하고 성령 세미나를 몇 번 받은 후에는 변화되었다. 특히 지인의 추천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회개하는 삶과 영성적인 면에 감동받았다.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 3회원으로 입회를 했다. 양성교육을 받고 1년 후에 유기 서약을 받게 되니 수도자가 된 기분이었다. 세속에 살면서 ‘복음에서 삶으로, 삶에서 복음으로’ 여정으로 매일 시간 전례를 바치고 프란치스칸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산비탈 미끄러운 골목길에 꼬마들이 연탄재로 툭툭 공차기를 했다. 이웃 사람들이 누구네 집 밥그릇 숟가락이 몇 개인지 훤하게 알았다. 대문을 열어놓아도 도둑이 가져갈 것이 없었다. “주님, 당신은 제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 가족을 사랑하시고, 제가 우리 형편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요? 아이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축복해주십시오”라는 한 가지 청원만 드렸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내 처지만,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건강한 몸이 큰 재산이었다. “주님, 제 노동력을 봉헌합니다. 받아 주십시오.” 매일 제대 청소와 제의방 성물들을 닦고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밥을 해주었다. 엄마가 성당에서 일하는 동안 딸, 아들을 넓은 마당에 풀어놓았다. 또래 친구들과 성직자 묘지 봉분 사이로 숨바꼭질하며 놀았다. 간식이란 말은 모르기 때문에 배가 고프면 밥 달라고 달려왔다. 아침에 준비해 간 전기밥솥을 꽂아 놓고 점심, 저녁을 먹이는 동안 3학년에 올라가서 아들이 첫영성체를 한 후에 복사를 섰다.
긴 복사 옷을 입고 아들이 미소를 지으며 신부님 뒤를 촐랑촐랑 따랐다. 제대 뒤에 앉아 양손을 모으고 바들바들 떨었다. 중3 때까지 복사를 서다가 졸업을 했다. 친구 20명과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예신학교에 입학을 했다. 예신 고3에 올라갔을 때에는 친구들은 모두 떠나고 아들 혼자 남았다. 그리고 성당 전례부에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봉사했다. 고슴도치 엄마는 자식이 복사 서는 모습만 보아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40대에 부인병인 종양이 생겨서 종합병원에서 큰 수술 후에 퇴원했다. 아침까지 온몸에 약 기운이 퍼져 비몽사몽 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소리, 아들이 새벽 미사에 읽을 성경 말씀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내가 평소에도 가끔 들었지만, 수술용 마취에 취해 필름이 붙었다가 끊겼다가 했다. 예수님께서 고향 마을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펴시고 읽으셨던 대목이다. 이사야 예언서 61장 1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아들이 이 성경 구절을 읽는 순간 큐피드의 화살처럼 가슴에 꽂혔다. 수십만 개의 은하수가 한꺼번에 머리 위로 쏟아지고 귀가 뻥 뚫렸다. 이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가?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났단 말인가? 청량하게 낯익은 목소리는 아들 방에서 또박또박 들렸다. 배에 수술한 부위가 실밥에 당겨 일어서지도 못하고 무릎을 질질 끌며 배밀이로 방문에 귀를 대고 들었다. “주님, 이 복음 말씀을 평생 들을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제게 이루어지시길 믿습니다.” 얼마 후에 아들은 예신학교 3년을 졸업하고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사랑하는 아들을, 당신께 봉헌 드립니다.”
아들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친구와 어깨동무하고 교리실로 들어갔다. 나는 성모상 앞에서 입학 시간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이던 중이었다. 그때 아들 친구 한 명이 달려와서 안절부절못했다. 내가 “무슨 일이야, 어서 말해봐!” “어머니, 큰일 났어요” 했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듯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러 명이 학사님 축하 헹가래를 하다가 땅에 떨어졌다”고 했다.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시던 상황을 재현해놓은 듯, 흰 와이셔츠와 검은 양복 위로 장미꽃처럼 검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맑게 웃었건만 얼굴이 백지장같이 엄마 발 앞에 푹 쓰러졌다. 나는 고장 난 형광등처럼 번뜩번뜩 떠오르는 화살기도로, “주님, 이 고통을 당신께 의탁합니다.” 김OO 베드로 형제님의 도움으로 차에 태워 가까운 병원으로 달려갔다. 찢어진 머리를 몇십 바늘을 꿰매고 아랍인 양머리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입학식장에 10시까지 도착했다. 입학식을 마치고 다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뇌 손상을 지켜보자”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 수많은 검사는 피를 말리며 죽음의 문턱까지 들락거렸다.
‘복은 홀로 오고 고통은 쌍으로 온다’는 말처럼, 남편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병이 재발했다. 현실적인 어려움과 육신을 갉아먹는 통증에 희망을 잃고 온종일 벽만 바라보았다. 나는 일상을 접고 성당에 홀로 앉아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 그이는 결혼할 당시에 성격도 좋고 누구보다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보훈처에서 상이군인들에게 지원해주는 혜택으로는 부족했다. 수시로 후유증에 시달리며 전쟁 같은 날이 이어졌다. 온몸에 박힌 파편들이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힘들게 했다. 수족을 절단해야 하는 위기에 내몰려 모르핀을 맞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 내 생에 죄가 있다면 친정엄마의 반대에도 천주교 신자인 남편과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서울 올라와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행복한데도 친정엄마를 뵐 면목이 없어 결혼한 후 10년 동안 발길을 끊었다. 비단이 씨실과 날실이 직조되듯이, 삶의 여정도 때로는 명암이 엇갈리고 고통과 기쁨이 직조되어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 같다.
거미열차 앞에 가족들이 모였다. 고향 방문 기념으로 조카가 ‘문경 석탄박물관’ 입장표를 사주었다. 폐광을 개발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거미열차를 운영하며 탄광 굴속으로 안내했다. 표를 받아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추억문을 열었다. 45년 전에 시아버지는 약혼한 나를 성당으로 데리고 갔다. 대자, 대모를 세우고 남편과 관면혼배를 시키셨다. 주례 신부님이 신랑 신부에게 혼인 서약과 사랑의 증표로 반지를 교환하고 혼배 미사를 올렸다. 1년 후에 딸이 태어났고 3년 후에 아들이 태어났다. 시아버지는 손자 이름을 밝을 명(明)으로 짓고 해와 달처럼 비추라는 뜻이라고 하셨다. 내게는 천주교 미사 전례가 낯설었다. 시집살이하는 동안 신앙과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가족들을 따라 성당에 다녔다. 어릴 적 친정엄마에게 예수 믿는다고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기억이 옹이처럼 박혀 있었다.
신앙이란 무엇일까? 지난 역사가 말해준다. 박해를 받을수록 신자들은 목숨을 바쳐 순교의 꽃을 피우며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지금도 유년시절에 즐겁게 예배당에 다녔던 그리움을 간직하고 산다. 친정 동네 언덕배기에 작은 예배당이 하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예배당 신자들이었다. 성탄절에 또래 친구들을 따라가면 돌사탕과 라면땅을 주었다. 그러나 큰오빠가 결혼한 후 집안 분위기가 완전히 살벌하게 바뀌었다. 도회지에서 선생님을 하던 올케는 열렬한 개신교 신자였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문전옥답을 한 떼기씩 팔아 십일조와 감사 헌금을 내면서부터 탄탄했던 살림살이가 거덜이 났다. 그 후에 올케는 큰오빠와 대구로 이사하였고 시부모님 집에는 오지도 않고 소식이 끊겼다. 그때부터 친정엄마는 가족 중에 누구라도 예수를 믿는다는 말만 들어도 입에 거품을 물고 경기를 했다.
“이 때려죽일 년, 너, 예배당에 또 갈거야. 대답해.”
내게는 친정엄마가 가혹한 박해자였다. 나이가 어려도 예수님을 믿으면 평화가 온다는 것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서슬 퍼렇게 다그쳐도 나는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을 했다. 대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날벼락을 쳤다. 양동이의 얼음물을 머리에 덮어씌우고 밖으로 쫓아냈다. 딸이라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다음날 성경과 찬송가를 소죽 끓이는 아궁이에 불살라 버렸다. 엄마의 오랜 박해는 시간이 갈수록 모질어졌다. 동지섣달 문밖에서 추위에 떨다가 손발이 동상에 걸리면 콩비지로 부기를 뺐다. 모녀는 갈등의 골이 나날이 깊어졌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남편을 알게 되어 사귀다가 결혼하기로 했다. 딸이 예수 귀신에게 홀렸다며 무당을 불렀다. 무당은 바가지를 대문 앞에 엎어놓고 예수 귀신 쫓아낸다면서 “예수 귀신 썩 물러가라”고 말을 하며 칼을 던져서 꽂아 놓았다.
거미열차는 벌집같이 구멍이 숭숭 뚫린 내 마음을 끌고 캄캄한 터널로 향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굴속을 들락거리며 관광객들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 시절 광부들의 생활상을 재현해놓은 얼굴에 탄가루로 분칠한 모습이 펼쳐졌다. 갱 바닥에 앉아 양은 도시락으로 허기를 달래며 석탄을 캐내는 과정은 코끝이 쨍했다. 비좁은 양쪽 벽에는 모형 왕거미들이 까만 눈알을 빤짝거리며 꼼지락, 꼼지락 “투 둑, 투 둑” 소름이 확 돋았다. 광부들의 생활상을 해설하는 방송은 흐릿하게 들리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어린 시절 엄마의 박해가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굴곡진 내 인생을 반영하듯이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다. “주님, 살려주세요.” 발버둥 칠수록 깊은 수렁으로 빨려들었다. 순간, 어디선가 빛의 속도로 내 몸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남편의 홀벌이로는 네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했다. 학원을 보내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다. 대신에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좋은 환경을 제공하는 안내자 역할을 하기로 하고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될 신앙교육을 골고루 접할 기회를 주었다. 주보에 나오는 어린이 피정 프로그램을 잘 활용해서 여름 방학, 겨울 방학에 몇 군데를 신청했다. 비용은 적게 들이고 교육의 효과는 최고로 얻을 수 있었다. 결국은 우리 아이들의 인성교육은 교리 선생님들이나, 피정을 지도하시는 선생님 덕분이었다. 그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에 힘입어 구김살 없이 정서적으로 잘 자랄 수 있었다. 주님의 선하신 은총으로 아이들은 도시 환경에 적응을 잘했다. 하지만 남편이 수시로 발병을 하니 회사에 오랫동안 근무를 못 하고 자주 이직을 하게 되어 안정적인 생활을 못 했다.
내가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 인형 눈을 붙이기, 전자부품 끼우기, 시장에 물건 나르기 등등 일거리를 찾아서 밤낮으로 열심히 했다. 억척 똑순이로 살다 보니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쨍하고 해 뜨는 날이 찾아왔다. 1980년대 성령 세미나가 유행처럼 번졌다. 지인의 권유로 남편과 나는 OO대학 마리아홀에서 아이린 조지 여사의 세미나에 참석했다. 미사 중에 신자들의 뜨거운 환성이 터져 나왔다. 남편도 온몸에 신비한 변화가 느껴진다고 했다. 그날 성령의 은혜로 영적, 육적 치유를 받았고 세상을 다 얻은 듯이 만사형통이 될 듯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대로 두 마리 토끼는 잡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의 말과 행동이 180도로 돌변했다. 불같은 열정으로 성당에 봉사와 직장 동료, 친척들, 지인들 아기 돌잔치까지 뛰어다니며 챙겼다. 특히 어려운 직원들이 부모상을 당하면 월급봉투를 통째로 불우이웃돕기라며 기부를 했다. 남편은 새 생명을 다시 얻었다는 감사함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솔선수범했다. 그러나 월급 수입이 1000원이면 지출은 3000원을 쓰고도 모자랐다. 과도한 씀씀이 때문에 가계에 주름이 생기고 부부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오늘 걱정은 오늘만 하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는 말씀을 읽어보지 못했느냐?” 성경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나는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형편에 맞게 정도껏 해야지. 그이는 내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퍼주고 쏟아주며 수십 년을 살았다.
우리 집을 덮었던 먹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안도의 숨을 쉬는 중이었다. 여름 방학을 앞두고 아들이 신학교 1, 2학기에 연극을 했다. 열광하는 관객들 앞에서 무대 뒤 난간으로 떨어져서 허벅지가 부러졌다. 깁스한 다리에 목발을 짚고 신학생 세 명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을 열었다. 이를 어쩌나, 주님 이를 어쩝니까? 방학 동안 엄마 어깨에 부축하고 병원을 오가며 물리 치료를 다녔다. 학교로 복학을 한 후에 부러진 다리가 덜 낳은 상태로 군에 입대했다. 자식이 고된 훈련을 어떻게 견디는지 기도만이 숨 쉴 수 있었다. 마침 내가 군종후원회 지회장 10년 만에 군종교구장 정명조 주교님을 모시고 전방에 위문 방문을 갔다. 대대장 뒤에 까까머리에 군복을 입고 씩씩하게 걸어왔다. 낯익은 모습을 보니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먼저 엄마를 발견한 아들이 입은 귀에 걸고 눈을 찡긋했다. “주님, 당신은 저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시고 잘 돌보십니다. 감사합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자랑스럽게 제대했다. 주님의 은혜로 복학한 후 4, 5학년에 독서직, 시종직, 부제품을 받았다.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아들이 주님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9년 만에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사제품을 받기 위한 준비를 했다. 동기 사제 26명과 주님의 뜻대로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땅에 엎드려 있다. 추기경님과 주교님들, 수백 명 선배 신부님들, 새 신부님들, 부모ㆍ형제 지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엄숙한 사제 서품식을 했다. 그동안 지도 교수님들과 본당 신자들, 지인들, 학교 선후배 선생님들의 한결같은 사랑과 기도 덕분이었다. 나는 신부 부모님 석에 앉아 장엄한 광경을 바라보며 주님, 감사합니다. 저는 당신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온갖 허물로 누벼놓은 부끄러운 삶을 살았음을 고백하고 회개를 했다. 주님께서는 제 남은 인생을 더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기도하라고 큰 선물을 주셨음을 감사를 드렸다.
아들 신부가 강남에 있는 성당에 첫 발령을 받았다. 출가한 몸이라 부모가 아무리 보고 싶어도 얼굴 한번 볼 기회가 없었다. 엄마 손으로 따끈한 밥 한 끼를 해 먹이지 못하는 마음은 늘 안타까웠다. 어느 주일 날, 몰래 그 성당에 찾아가서 기둥 뒤에 숨어서 미사를 드렸다. 치마 입은 남자가 되어 수단 자락을 휘날리며 뜨거운 열정으로 강론하는 모습에 꽂혔다. 내 삶 속에 밀려드는 고통이나 슬픔, 기쁨이나 행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미사를 드리다가 갑자기 몸과 마음이 사시나무 떨리더니 깊은 심연 속으로 몰입되었다. 성모님이 사촌 엘리사벳을 방문한 후에 불렀던 마니피캇이 은은하게 성전 안을 가득히 채웠다. 한 참 후에 정신을 차렸다. 아들 신부가 미사 중에 기둥 뒤에 숨어 있는 엄마를 알아보았다. 신자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점심을 사주었다. 밥맛이 꿀맛 같았던 기억은 언제나 생생하다.
보좌 신부 2년을 마치고 소임을 받고 새 부임지로 갔다. 사제 아들을 둔 엄마의 새가슴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자나 깨나 조마조마했다. 시집살이 어디 다른 데가 있을까? 새벽에 전화벨이 길게 울렸다. 허둥지둥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신부님 어머님이세요? 네, 여기 OO성당인데요. OOO 신부님이 장례 미사를 드리다가 쓰러졌어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지진에 직격탄을 맞은 듯이 혼줄을 놓아버렸다.
“주님이시여, 주님이시여, 제가 무엇을, 더 어디까지 해야 합니까?”
남편이 “여보, 누구 전화야?” “잘못 걸린 전화에요.” 남편을 평소처럼 출근을 시켰다. 사제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사는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혼 구령을 위해 사람들을 섬기라는 사제직이다. 주님, 이 고통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저는 주님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이번에도 주님의 뜻이 있을 거야.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천사들을 부르며 어둠을 몰아냈다. 모심기하던 아낙네같이 부스스한 몰골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실 문에 걸린 팻말에는 절대 금식, 절대 안정이라고 적혀있었다. 문을 살짝 열었다. 아들은 고열에 시달리다가 실눈을 떴다. “괜찮니? 엄마다. 엄마. 모두가 내 기도가 부족한 탓이다.” 아기처럼 엄마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거듭되는 시련 앞에 사제 엄마의 수천, 수만 번의 주모경은 골수를 녹여내는 기도로도 역부족이었다. 그날 이후 사제, 성직자들은 많은 신자의 기도로 살아간다는 말이 뼛속까지 느껴졌다. 벌써, 사제품을 받은 햇수가 15년 차를 넘기고 보니 초심을 잃지 않도록 간절한 엄마의 기도는 다시 첩첩산중으로 향한다.
어느 해인가. 친정엄마가 85세가 되었을 때 치매로 서울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평생 불교 신자였던 엄마가 천주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확신이 섰기에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서울로 모시고 온 다음 날부터 체중 85㎏인 엄마를 껴안고 모녀는 예비자 교리를 받기 위해 일 년 동안 행복한 동행을 했다. 세례받기 일주일 앞두고 주모경, 영광송, 세례명 ‘마리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외워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본당 보좌 신부님이 아무리 가르쳐드려도 진전이 없었다. 어머님의 신앙 교리를 잘 시켜드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세례를 주셨다.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매일 밤, 잠꼬대는 “제 엄마를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남편도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에 꽃을 꽂은 여자처럼 벽에 걸린 십자가만 보아도 기뻐서 눈물이 쏟아졌다. 나를 그토록 박해했던 엄마가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의 성체를 모시다니…. 주님, 당신은 정말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십니다. 모녀의 50년간 쌓인 앙금을 털어내는 회개는 가슴에 박혔던 옹이도 쏙 빠졌다. 이제 주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엄마와 마주 앉아 옛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첫영성체를 입에 받아 모시고 엄마가 처음 한 말은 “예수님이, 부처님보다 힘이 더 센 것 같다”고 했다.
몇 년 후에 마리아 세례명을 달고 편안한 모습으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지난 수십 년을 돌이켜보니 나를 힘들게 했던 시간들은 모두가 축복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혹독한 신앙의 박해를 통해 기도드리며 예수님께 한 발씩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엄마와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 바친 40년간 기도와 미사, 성사, 성체조배는 영성적으로 성장시켰다. 그 시간들이 밑거름이 되어 주님과의 사랑의 거리를 한 뼘 간격으로 좁힐 수 있었다. 돈이 많은 것이 행복의 조건은 아닌 것 같다. 나의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싶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처럼, 내 딸이 엄마의 반대에도 불교 신자인 사위를 만나 결혼을 했다. 사위 사랑은 장모님이라 했던가? 결혼을 반대했던 마음이 무색할 정도로 겪을수록 정감이 가고 어디다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속이 꽉 찬 사람이었다. 그리고 연년생 외손주들이 삼남매가 태어났다. 나는 맞벌이하는 딸을 대신해서 사랑스러운 손주들을 키웠다. 그 옛날 시어머니가 손주들을 유아 영세시키는 모습이 떠올랐다. 손자들에게 유아 영세와 첫영성체 시키는 일은 내 몫이었다. 불교 신자인 사돈댁의 구원을 위해 몇 년 동안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사돈 내외분을 찾아뵙고 손주들에게 유아 세례를 시킬 수 있도록 동의를 구했다. 손주 3명을 한 번에 유아 세례를 시켰던 벅찬 감동은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다.
몇 년 동안 손주들을 데리고 토요일 저녁 주일 미사를 드렸다. 큰 손녀딸이 3학년에 올라가서 첫영성체를 한 후에 복사를 섰다. 복사 옷을 입고 머리 꽁지를 망으로 씌우니 앙증맞다. 신부님 뒤를 따라 제대 위에 올라갔다. 미사 중에 야무지게 종을 땡, 땡 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글썽거렸다. 오래전에 아들이 복사 섰던 그 날의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어쩌면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마음이 뿌듯했다. 아이들 3명을 태우고 폭설을 뚫고 달리는 도로 빙판은 차바퀴가 찌직, 헛돌았다. 손녀가 복사 시간에 맞추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번갈아 밟으며 힘차게 달려갔다.
거미열차는 탄광 지하 수백㎞를 돌아 나왔다. 시아버지가 손수 지으신 고택에는 서까래가 나팔을 불고 뒤란에는 파란 이끼가 영토를 넓혔다. 사랑채 방문을 여니 어두침침한 방에 흑백사진이 벽에 걸렸다. 추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장독대와 텃밭에는 봄볕을 받아 파랗게 쏙쏙 올라왔다. 마당 한쪽 우물을 덮은 뚜껑 위에는 두레박이 주인처럼 덩그러니 입을 벌리고 있다. 목을 쭉 빼고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파란 하늘이 통째로 들어앉았다. 시아버지의 휘하에 다섯 동서가 손톱이 빠지도록 밭에 돌을 골라냈던 아린 기억들이 찰랑찰랑 속삭였다.
신앙의 거미열차는 객실을 수없이 늘리며 먼 길을 달려왔다. 주님의 섭리 안에 증조할아버지부터, 시아버지와 7남매의 자식들, 아들 손주들까지 5세대를 이어왔다. 김 토마스 시아버지가 신앙의 뿌리를 튼튼하게 심어 주지 않았다면, 내게 오늘 같은 영광스러운 일이 어찌 있었을까? 대대 물려주신 녹슨 구리 십자가는 하느님이 동행해 주셨다는 증거가 되었다. 바통을 물려받은 자식들도 미래를 향해 칙칙폭폭 힘차게 달릴 것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만세 대대로 찬미와 영광 올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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