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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대한 가르침
마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21-35 / [용서의 교훈]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다. `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어라.' 23) [무자비한 사람의 비유] 하늘나라는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정해진 날에 셈을 맞춰 보는 것에 비할 수 있다. 24) 셈을 하는 중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 나왔다. 25) 그가 빚을 갚을 돈이 없음을 알자 왕은 그의 아내와 자녀들과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는 왕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제발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놓아 보내며 빚도 탕감해 주었다. 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사람을 만나자 멱살을 잡고 당장에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29) 그 사람이 엎드려 조금만 시간 여유를 달라고 빌었으나 30) 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용서해 주었던 그를 불러서 말하였다. `이 악독하고 뻔뻔한 놈아! 네가 애걸하기에 불쌍히 여겨 내가 그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남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왕은 몹시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보내고 마지막 한푼까지 다 갚게 하였다. 35) 그러므로 만일 너희가 진심으로 네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용서와 관련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연히 용서의 생활을 하기 마련입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21-22)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 물었습니다. 용서가 중요한 주제가 될 만한 베드로의 사정이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욕망에서든지 누구나 고민할 만한 실제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횟수를 묻는 베드로에 예수님도 횟수로 대답하십니다. 490번이지만 사실상 계속해서 무한정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유를 통해 이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은혜를 모르는 악한 종의 비유(23-34) 어떤 임금이 결산하려 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한 종을 데리고 왔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당시의 관례대로 주인은 그 종의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빚을 갚도록 명했습니다. 빚 때문에 인생이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 상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빚진 종은 엎드려서 주인에게 긍휼을 구하고 구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은혜를 입고 모든 빛을 탕감받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특사로 풀려나는 것 같은 은혜와 무한한 해방감과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약 500여만원 정도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자 그를 가혹하게 대합니다. 애걸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옥에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동료들에 의해 주인에게 보고됩니다. 주인은 노하여 무자비한 악한 종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는 종의 큰 빚 때문이 아니라 그 종의 사악함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도 이같이 하라(35)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이 비유 속의 빚은 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는 일만 달란트 빚과 같은 엄청난 죄로 우리 힘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분량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아는 사람, 그래서 죄 용서의 기쁨과 자유, 평화를 누리는 사람은 마땅히 형제가 지은 100데나리온 가치의 조그마한 죄는 무조건 용서해 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적 용 : 우리는 형제를 얼마나 많이 용서해야 할 까요? 예수님이 들려주신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우리가 형제를 용서해야할 진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느 한 소년은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문스러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접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천국이 좋을 것 같지 않아요.” “너는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재미있니? 무엇이 그렇지?” “예, 저는 꽃도, 음악도, 비, 빵, 사탕…. 아휴, 너무나 많아서 다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도 이렇게 많은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천국을 재미없게 만들어 놓으셨겠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천국에 관한 소망이 너무도 적은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즐거움이 ‘하나’라고 말한다면 천국에서의 즐거움은 ‘수 천, 수 억’이라고 말해야 적당할 것입니다.
< 설 교 >
몇 번이나 용서하며 주리이까?
우리 사회는 한번 잘못한 사람이나 눈 밖에 난 사람은 되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매장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들이 더 큰소리치면서 정계를 뒤흔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의 사회는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마저도 용서할 줄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은 용서의 문제, 화해의 문제를 가지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다 한 교회에 속하여 있으며 함께 신앙 생활하는데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좋아하고 모두가 밀어주고 이끌어주면 이상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사랑의 봄 동산을 이루고 형제애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몇몇 사람들만 사귀고 친하게 오고가고, 가까이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만을 꼬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교회가 거의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교우들은 다 사랑할 사람이요, 사랑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 영주교회는 사랑할 사람들만 있지, 미워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은 감격을 가지고 나아가서 우리 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럽고 추한 죄와 허물로 본질적으로 죽어야 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여야 합니다. 관용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람은 참으로 이기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지만 당신은 철저하게 혼을 나봐야 할 사람이라고 단정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다 관대하게 봐줄 수 있지만, 당신이 그런 일을 한다고 하면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일관합니다. 실제로 교인들 사이에서 주고받는 말을 들어보면 "세상에..어떻게 되어서 교회 안에 저런 사람이 들어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망신시키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다 죄인이요, 서로 용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죄인이기에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아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사상과 신앙을 이어받고 그 분이 살아가신 발자취를 따라 간다고 말하는 우리들은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이해하시고 관용하시는 정신을 그대로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으시면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은 용서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당신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무자비하게 내려치고 핍박하는 사람들, 십자가에 매달고 못을 박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인데,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귀한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용서하라는 말씀을 수없이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냐?고 물어올 때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할 때에 용서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용서와 사랑을 언제나 함께 따라다니고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화해의 악수"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미국 부통령을 역임한 험프리 의원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미망인의 옆자리에는 놀랍게도 평생의 정적(政敵)이었던 닉슨 대통령이 앉아 있었습니다. 험프리 상원의원은 평소에 닉슨 대통령을 가장 괴롭힌 정치인이었습니다. 험프리 의원은 죽기 사흘 전에 잭슨 목사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목사님, 죽기 전에 닉슨 대통령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어요" 닉슨 대통령은 잭슨 목사님을 통하여 이런 소식을 듣고 급히 비행기로 달려와 손을 마주잡고 화해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사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다가 채로 죽을 사람들이 아주 많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는 파트너십이 부족합니다. 우리 민족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하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사랑할 사람, 미워할 사람이 정해져 있습니다. 미워할 사람들 중에서 잘한 사람이 나와도 '어쩌다 그런 사람도 있지'라고 합니다. 사랑할 사람들 중에 잘못한 사람이 있어도 '어쩌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합니다. 참으로 편가르기를 잘 하고 있습니다.
미움이라는 것은 암 덩어리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미움이라는 덩어리를 가지고 있으면 온갖 질병이 발생합니다. 정서적인 질병이나 신경 정신적인의 질병들은 거의 다 이 갈등과 미움과 증오로 인하여 생기는 질병입니다.
잠10:12에 보면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욥5:2에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에게 이러한 미움과 분노가 쌓이게 되면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고 인간관계를 해치고,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살인으로 이어집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3:15)고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형제에게 욕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할 때에는 미움의 포로가 되어 사단에게 속하게 되고 마침내 지옥에 떨어질 수 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용서는 어떤 약보다 건강에 유익하다]라는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난 99년 유고의 세르비아계 사람들이 보스니아의 이스람교도를 인종 청소할 때에 미국이 코소보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때 세르비아 군에게 미군 세 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 중의 한 명인 크리스토퍼 소토운이란 사람은 그가 석방될 때에 자기를 무자비하게 감옥에 가두고 보초를 섰던 유고의 군인을 위하여 꼭 기도해주고 떠나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 감옥으로 돌아가 보초에게 가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용서하는 기도와 그가 잘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냥 분노와 원한을 품고 떠날 수도 있었으나 축복의 기도를 해주고 떠난 크리스토퍼 스토운이란 군인은 건강과 마음의 안정을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용서는 건강을 되찾아줍니다. 이것은 용서와 건강의 관계를 40년 동안 연구해온 북캘리포니아의 [태도치유 연구센터]가 내린 결론입니다. 사람들이 분노와 배신감, 상한 마음을 해결하지 못할 때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을 불러옵니다. 용서는 세상의 어떤 약보다도 건강에 유익합니다. 예수님은 평생 용서를 말씀하셨고 사랑을 강조하시다가 죽으실 때에도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생활을 보고 은혜를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정신과 사상은 사랑과 용서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찾아와 용서를 구하면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죄와 허물을 무한정 용서해주면 사람이 잘못되고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아주 크게 인심을 쓰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용서의 한계는 세 번이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철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암1:3)고 합니다. "서너 가지"라고 하여 유대인들의 전승에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으니 랍비들의 한계를 적용하여 사랑과 용서를 말하면 부족할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넉넉하게 일곱 번쯤이면 될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일곱 번으로 그치지 않고,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일곱의 일흔이라고 하면 490 번이라는 수치를 가지지만, 이 말씀의 원래의 뜻은 얼마든지, 또한 끝까지 용서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정리해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은 용서할 수 있는 사항이고, 어떤 것은 도무지 용서할 없다는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나 조건을 묻고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용서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려고 합니다. 용서하는데 한계를 정하고 용서하는데 조건을 달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되지 못합니다. 조건 없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입니다. 한계를 초월한 용서가 진정한 용서입니다. 앞으로 몇 번까지만 용서해주겠다고 한계를 정해놓고 있으면 지금 몇 번 용서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기다려보고 있는 것이요, 진정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하고 그것을 나의 신념으로 만들었기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 같지만 그냥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고 용서가 다른 용서를 낳은 것을 체험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윤리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악하게 나오면 나도 악하게 나가려고 하며, 상대방이 선하게 나오면 나도 선하게 나가는 것이 인간관계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종속적인 윤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속하여 있다는 것이요, 다른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나도 행동하게 되는 그런 윤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윤리가 있습니다. 바로 기독교회의 윤리는 상대적인 윤리가 아니라, 절대적인 윤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 말씀이요 영생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같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절대 윤리 속에서 살아가려고 힘써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말하니 조석으로 변하는 것은 성도들 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이 땅을 말하지 않고 천국을 말씀하려고 합니다. 천국을 말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도 천국을 경험하고 천국을 말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고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살면 그는 천국에서 사는 사람이요, 그가 천국 백성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연습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연습하는 장소가 바로 교회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정성스럽게 드려야 합니다. 정성스럽게 드리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서도 정성스럽게 드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재정을 결산할 때가 되어서 신하들을 부르는 중에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신하 중의 한 사람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돈은 사실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어떤 학자는 우리나라 돈 3조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만 달란트라는 돈은 상징적인 돈입니다. 1달란트라는 돈은 6000데나리온으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국민 육천만 명이 하루를 일한 것을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하루 노동자가 5만원 정도 받을 수 있다면 3조원에 해당하는 말이 됩니다.
이 신하가 왕 앞에 불려나와 섰습니다. 왕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네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아라"고 했습니다. 종은 왕에게 엎드려 절하면서 "조금만 참아주시면 다 갚겠습니다"라고 구구절절이 사정 드렸습니다. 이 신하가 노예로 팔리고 되고 아내나 자식들이 노예로 팔려간다고 해도 다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돈이기에 왕은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놓아보내며, 일만 달란트를 갚지 않아도 좋다고 탕감하여 보냈습니다.
이 신하가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 한 동료를 만났습니다. 이 동료는 100데나리온의 빚을 갚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는 가다가 100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자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었습니다. 역시 노동자가 하루에 5만원을 받는다고 하면 5백만 원입니다. 그는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의 목을 휘어잡았습니다. "빚을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조금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참으로 애절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전혀 요동치 않았습니다. 말미를 주지 않고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몰인정한 신하였습니다. 자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금액을 탕감 받았는데, 너무나 잔인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다른 신하들이 왕에게 진정하였습니다. 돈을 갚지 못하여 감옥에 갇히는 동료를 보고 몹시 딱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긴 신하들이 왕에게 알려드린 것입니다. 왕이 신하를 불러다가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이 노하여 자기에게 빚진 것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기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런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의 빚진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빚들도 용서하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 아주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들이 자기에게 빚진 자를 진정 용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용서를 모델로 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용서하였기에 과연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크고 놀랍기에 우리는 사소한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입니다.
마태가 생활하던 공동체에는 용서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앞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장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보다 앞선다고 주장하는 그룹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기도를 깊이 음미해보면 구약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면제하여야 하는 규례를 봅니다. 신15:1-3에 보면 "매 칠년 끝에는 면제하라. 면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그의 이웃에게 꾸어준 모든 채주는 그것을 면제하고 그의 이웃에게나 그 형제에게 독촉하지 말지니 이는 여호와를 위하여 면제를 선포하였음이라. 이방인에게는 네가 독촉하려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준 것은 네 손에서 면제하라"고 하셨습니다. 곧 채권자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채무자를 면제해야만 하는 강압적인 명령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안식년이 되면 싫든 좋든 면제하고 해방하고 탕감해야만 합니다. 주기도문의 용서에 대한 탄원은 인간의 용서가 하나님의 용서에 앞선다고 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용서는 불가피한 법적인 상황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연세대학의 서중석 교수가 주기도문의 용서의 부분을 재구성한 것을 옮겨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율법의 해방법 때문에 싫어도 우리끼리는 마땅히 탕감하고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의 빚들을 내키지 않으시더라도 꼭 용서하시고 탕감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문장에 강조점이 있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허물과 죄는 당연히 용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받기 위한다면 다른 이웃 사람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우리 예수님을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임금과 신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죄의 용서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탕감을 받은 죄악은 일만 달란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죄악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사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죄를 살펴보면 일백 데나리온 정도의 성질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와 허물을 용서받았는데,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주 적은 죄와 허물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시면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것으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왕에게 있어서 엄청난 손실을 감안하면서 탕감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용서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희생이 들어 있는 사랑이요, 은혜였습니다. 그 희생은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게 하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아픔과 희생이 있는 탕감이요 면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탕감을 받았다는 감격이 넘쳐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감격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까? 100데나리온 받을 것이 있다고 자랑하실 것입니까? 하나님의 용서하심 속에는 나에게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다 탕감하는 것을 포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용서에는 한 생명을 살리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용서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용서보다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명약은 없습니다.
화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를 이루셨기에 여기에 응답하는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의 크신 구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화해와 평화의 사역자로 세상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화해를 이루시는 예수님,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