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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문 화 재
1. 운봉 4개 읍면의 문화재 개관
운성(무산현) 지역은 청동기시대 지석묘를 시작으로 삼한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걸쳐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운봉읍, 아영면, 산내면, 동면을 포함하는 지리산 서북권지역은 과거부터 지리적 특수성에 따른 역사의 전개와 그로 인한 유적의 분포가 타 지역에 비하여 현저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특히 섬진강 수계(水系)인 남원 요천과 낙동강 수계인 운봉고원 사이에 높은 분지벽이 형성되어 언어와 생활의 차이는 물론 일찌기 신라와 백제의 국경 분쟁지역으로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유서깊은 전란의 역사를 간직하여 왔다. 유적 분야에서는 지정문화재 외에 사적(史蹟)인 의미를 갖는 지석묘, 유물산포지, 고분군, 산성, 봉수, 도요지, 장승, 비, 불상, 전적지, 절터, 석대, 정자, 탑, 유물, 당산, 단유, 경치, 제각 등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가능한 과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물과 유적, 행적 등을 모두 조사하여 수록하였다. 주로 1994년에 발간된 「남원지」와 1987년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간된 「남원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를- 토대로하여 정리하였으며 가능한 여러 문헌을 참고하였다.
아영․동면 분지에 넓게 펼쳐진 광평 들녁을 풍천이 남북으로 길게 가로질러 흐르면서 옛부터 아영면과 동면의 행정구획의 경계선을 일찌기 그어 놓았다. 그 경계선을 따라 북쪽 매치에서 황산 북쪽 명석치를 지나 여원치로 주요 도로가 형성되었고 이 도로는 1920년대 신장로가 개설될때까지 운봉고원의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운봉 4개 읍면 지역의 지석묘(고인돌)의 위치는 바로 이 길을 따라 분포하고 있다. 북쪽 청계리 고인마을에 4기, 중간 지점인 갈계마을 지역에 7기, 남쪽 봉대마을에 1기로 총 12기 모두가 아영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표 8-1>, <표 8-2> <표 8-3>, <표 8-4>.
유물산포지는 ‘남원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1987)’에 의하면 7지역을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표 8-5>. 분포지역 역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서정이, 밤골, 봉대, 아곡, 신기, 점촌 그리고 멀리 달궁에까지 이어진다. 출토되는 토기는 아영면 지역의 밤골, 봉대, 아곡 지역에서 가야계 토기가 출토되고 그밖에 산포지에서는 삼국시대 토기가 발견된다.
고분의 분포지역은 지석묘의 분포와는 달이 아영면과 동면지역에 집중해 있지 않고 운봉읍과 산내지역까지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다. <표 8-6>. 그러나 고분군 역시 아영면과 동면지역에서 가야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이곳이 운봉고원의 최초 거주지역임을 짐작하게 한다. 아영면은 신라의 영토이므로 함양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국가 군장들의 무덤이었을 것이다. 고분에 묻힐 수 있는 신분은 선사시대에 올라갈수록 극히 제한되어 부족장 이상의 인물이던 것이, 삼한시대, 삼국시대에 내려오면서 차차 그 범위가 확대되어 지방의 장도 무덤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성곽과 봉수(1991)’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산성은 주로 삼국시대에 축성하였으며, 축성의 재료에 따라 목책성, 토성, 토석혼축성, 토석성, 석성, 전축성으로 구분한다고 하였다. 축성의 위치로는 중요한 길목의 큰 산줄기 또는 요충지나 도성, 기타 중요한 산이나 고을의 산, 국경, 해안 또는 강안에 쌓아 지리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적을 효과적으로 수비하였다. 또한 우리나라의 산성 축성 목적은 중국과는 달리 유사시에 성안에 주변의 주민들을 모두 수용하여 공생공사하는 것이었다.
성안에 필수적으로 설치되는 시설로는 우물, 취사와 숙소시설, 창고, 훈련장, 장대, 망대, 사찰, 봉수대 등이며 이러한 흔적은 산성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운봉 지역의 산성 역시 축성 시기를 삼국시대로 추정되며, 산성의 분포는 남원 요천과 운봉분지 사이의 분지벽을 경계로 덕치산성에서 북쪽 봉화산에 이르기까지 13개의 산성이 분포하고, 운봉 분지 전역에 분포하는 석성과 토성은 모두 17개로 과거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의 국경 접경지대로 군사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표 8-7>.
봉수란 햇불과 연기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던 고대 통신방법으로 높은 산에 위치하였다. 우리나라의 봉수 역시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10리마다 1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었으며 1895년 봉수군(烽燧軍)이 폐지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운봉의 봉수는 구상리 봉화산과 덕치산성에 2개정도 확인할 수 있으며, 성격상 경봉수와 연봉수를 연결하던 내지봉수로 짐작된다. <표 8-8>. 또한 삼국시대는 호국불교의 영향으로 성 안과 밖에 사찰이 있어 평상시에 수도하던 승려가 유사시에 승병으로 전장에 나가 싸웠다. 따라서 운봉 4개 읍면의 산성터 안팍에는 절터가 발견되고 사찰의 흔적으로 보이는 기와가 출토되기도 한다.
도요지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생활도구인 그릇을 생산하던 곳인만큼 인간이 거주하는 곳은 어디서나 쉽게 발견되는 흔적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지역마다 그릇을 굽던 마을의 유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운봉지역에는 준향리 도요지와 수철리 도요지를 들 수 있다. <표 8-9>.
장승은 마을이나 절의 입구에 세우며 목장승과 석장승이 있다. 장승의 역할은 지역간의 경계나 이정표, 마을의 수호신 또은 허한 곳을 막아 액땜을 하는 비보(裨補) 구실을 하며 대개 남녀로 쌍을 이룬다. 남원지역에는 석장승이 총 16기가 있는데 그 중 15기가 운봉 4개 읍면에 분포한다. 즉 권포마을에 4기, 북천마을에 2기, 서천리에 2기, 유곡마을에 2기, 의지리 개암마을에 2기, 입석리에 3기가 그것이다. 최근에 여원치 정상에 1기와 성산마을 입구에 2기가 새로 세워졌다. <표 8-10>.
비(碑)는 <표 8-11>과 같이 역사적 의미를 가진 10개의 사적비(史蹟碑)가 있고, 정려비로는 현재 38개가 확인되었다. <표 8-12>. 운봉 4개읍면에서 1922년까지 정려를 받은 사람은 12명으로 남자가 9명, 여자가 3명이다. 현재까지 정려비 건립 현황을 보면 운봉 9개, 동면 10개, 아영면 16개, 산내 3개 등 38개와 기타비 67개가 조사 되었다. <표 8-13>.
석불은 정령치와 여원치 두 지역에 분포한다. <표 8-14>.
전적지로는 신라와 백제가 치열한 지역분쟁을 벌였던 아막성, 고려시대 왜구를 토벌했던 황산대첩비지, 임진왜란때 왜적을 격퇴했던 팔랑치합미성, 1728년 무신난 때 반란군과 대치하던 매치와팔랑치, 동학혁명 접전지 방어치와 관음치, 6․25 당시 공비토벌의 격전지 지리산을 들 수 있다. <표 8-16>.
과거 절터의 분포는 호국불교의 영향으로 산성이 위치하던 지역과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분포지역은 <표 8-17>와 같다.
석대와 정자는 옛 선비들이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석대와 정자가 많다는 것은 학풍을 중시하던 고매한 선비들이 많았음을 의미하며, 문풍(文風)을 숭상하던 순수한 선현들의 마음이 지리산의 뛰어난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일치하여 왔음을 짐작케 한다. <표 8-18>, <표 8-19>, <표 8-20>.
마을 주변의 산이나 언덕에는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당산이 있다. 이는 엣날 사람들이 마을의 산이나 언덕, 고개 등에 외경심을 가지고 마을을 지켜주는 신(神)이 존재한다는 강한 믿음에서 생겨난 원초적인 토착신앙의 하나이다. 따라서 당산에 이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생겨난 것이다. 당산은 사당을 짓기도 하고 큰 돌이나 누석단 또는 고목나무의 형태를 가진다. 현재 4개 읍면에는 사당은 없고 돌이나 고목나무(당목) 형태로 13개가 조사되었다. <표 8-21>.
단유로는 사직단과 여제단 그리고 성황단이 운성지에 기록되고 있으나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경치는 성격상 지리편에 수록해야 할 것이나 지리산의 수려한 경관이 옛부터 4개읍면의 특성으로 문헌에 소개되고 있어 역사적인 견지에서 소개하고자 하였다. 운성지의 기록에 의하면 운성의 10경과 인월 8경, 열락제 8경 외에도 산수가 뛰어난 폭포와 기암절벽, 깊은 쏘가 어우려져 엮어내는 운성의 절경은 옛부터 가히 자랑할만 하였다.
1994년 발간된 남원지에 수록한 운봉 4개 읍면의 유적 목록에는 성터가 4곳, 절터는 한곳도 없으며, 비는 4개로 현재 실제 조사한 내용과는 크게 차이가 나고 있다.
운봉 4개읍면의 지정문화재와 유적 유물 현황 역시 실제 내용과 차이가 크다. <표 8-13>, <표 8-23>, <표 8-24>, <표 8-25>.
2. 유적(遺跡)
가. 고인돌
1) 봉대마을 고인돌(1기)
아영면 봉대마을에서 88고속도로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약 20m 떨어진 야산 기슭 밭에 있다. 두께는 알 수 없으나 지석의 장축 방향은 남-북이고 7개의 성혈이 있다. 다른 1개의 개석의 장축 방향은 동-서이고, 장축 길이 285cm 단축길이 20cm 두께 170cm인데 지석 1개가 밖으로 보인다.
<표 8-1>
위 치 | 축조시기 | 수량 | 구 조 | 특 징 |
봉대 마을 북쪽 20m | 청동기시대 | 1기 | 무지석식. 남북길이 : 150cm. 폭 : 130cm | 표면에 7개의 성혈 |
2) 고인마을 고인돌(4기)
아영면(阿英面) 청계리 고인마을 주위에 3개의 고인돌이 있으나 유래나 전설은 알 수 없다. 고인돌(支石墓) 3개는 약 70m 간격으로 직삼각형을 형성하고, 고인돌의 규격은 폭 2~2.5m의 장방형이며 높이는 1~3m이고 밑에 있는 돌은 타원형의 인공을 가공시킨 돌이다. 개석에는 7개의 성혈이 있으며 남방계통의 유형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 유물로 부족장의 묘지로 추정하고 있으며 주위에 더 많은 지석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표 8-2>
위 치 | 축조시기 | 수량 | 장축방향 | 장축 | 단축 | 두께 | 지석 |
고인 마을 어귀 | 청동기시대 | 1기 | 남 북 | 250 | 175 | 125 | 4 |
고인 마을 논 | 청동기시대 | 1기 | 동북-서남 | 270 | 190 | 150 | 4 |
고인 박일규씨 집 뒤 | 청동기시대 | 1기 | 동서 | 348 | 245 | 165 | 1 |
고인 윤순근씨 집 뒤 | 청동기시대 | 1기 | 남북 | 210 | 140 | ? | ? |
3) 갈계마을 고인돌(A)
아영면 갈계마을 북쪽 끝에 5기의 지석묘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5기 중 4기는 밭에 있으며 1기는 도로에 인접한 집마당에 있다. 밭에 있는 지석묘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은 ‘호석바위’라 불리고 개석의 표면에는 8개의 성혈이 있다. 김재열씨 뒷마당 것은 개석의 표면에 13개의 성혈이 있다고 하였다. 개석 아래에 2개의 지석이 있고 전체적으로 집쪽으로 기울었다. 제원은 위의 <표-3>과 같다.
<표 8-3>
위 치 | 축조시기 | 수량 | 구 조 | 특 징 |
갈계부락 북쪽어귀 밭 | 청동기시대 | 4기 | 지석식.무지석식 | |
갈계 김재열씨 집 마당 | 청동기시대 | 1기 | 지석 2개 | 두께 160cm 표면에 13개 성혈 |
4) 갈계마을 고인돌(B)
갈계마을 옆 도로변에 도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10m 사이를 두고 각각 1기씩 2기가 있다. 제원은 <표-4>와 같다.
<표 8-4>
위 치 | 축조시기 | 수량 | 장축 | 단축 | 두께 | 지석 | 특 징 |
갈계마을 좌측 | 청동기시대 | 1기 | 420cm | 280cm | 160cm | 2개 | 11개 성혈 |
갈계마을 우측 | 청동기시대 | 1기 | 285cm | 200cm | 170cm | 1개 |
나. 유물산포지
1) 신기마을 유물산포지
운봉읍 신기마을에 있는 토성과는 별도로 낮은 구릉에 토기편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토성이 있는 신기마을의 북쪽 야산의 서쪽지역으로, 산의 남쪽 사면(斜面)을 일부 파괴하고 마련된 논의 경계면에 주로 무문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2) 점촌유물산포지
운봉읍 매요리 점촌 마을 저수지의 서쪽 50m 내외 지점에 있는 야산과 논의 경계 부분에서 야산 쪽으로 토기편(土器片)과 와편(瓦片)이 수습되었다. 이 곳은 점촌 마을에서 북쪽으로 100m 남짓한 곳이며 석탑리라고도 불리며 주변 야산에서도 토기편이 수습된다고 하였다. 기와 조각이 집중 출토되는 곳은 70~50m 범위 내외이며 초석으로 여겨지는 석재도 산재하고 있어 절터의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와편과 삼국시대의 토기가 함께 출토되어 시대와 유물의 성격이 명확하지 않다.
3) 봉대마을 유물 산포지
아영면 봉대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700여m 지점에 있는 야산에 가야계 토기편(土器片)이 산포되어 있다. 이 지역은 88 고속도로의 지리산휴게소에서 동으로 2km 남짓한 곳의 남쪽에 있는 야산으로 주민들에 의하면 고속도로 공사 때 많은 토기가 나왔고 석곽분으로 여겨지는 유구가 노출되었다고 하였다. 현재는 밭과 과수원으로 되어 있는데 유구를 확인할 수 없고 파편만이 수습되었다.
4) 아곡마을 유물산포지
봉대마을 유물산포지에서 88고속도로 건너 야산에 해당되며 장수군과의 접경을 이루는 산의 남쪽 경사면에 해당된다. 주민들에 의하면 주변 저수지를 만들 때 많은 토기편과 석곽묘가 파괴되었다고 하는데 고분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다만 가야계의 토기편이 수습되었다고 하였다.
5) 밤골 유물산포지
아영면 밤골에서 개암주 마을로 가는 산길을 따라서 자리하고 있는 야산에 위치하며 이 야산은 88고속도로에 의하여 일부가 잘려나갔다. 유물은 예비군 훈련장의 남쪽 지역 서쪽 경사면에서 주로 출토되며 가야계의 토기편이 다수 수습되었다 하였다.
6) 서정이 유물산포지
아영면 의지리 서정이 마을에서 밤골 쪽으로 자리하고 있는 낮은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와편과 토기편이 출토되며 토기편 중에는 고려시대와 삼국시대의 것이 섞여 있어 절터로 짐작되기도 한다. 고분의 존재도 예상되나 유구를 파악할 수 없다.
7) 달궁 유물산포지
산내면 덕동리 달궁마을 관광 시설 중 제 3 주차장이 들어선 곳에 인접하여 달궁의 유적이 인접하고 있다. 궁터로전해지는 곳은 서쪽으로 만복대에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높게 자리하고 동으로 계곡에서 흘러내린 개천 사이에 동서 90m 남북 70m 평탄한 대지가 있다. 이곳 궁터의 동편으로는 반선-심원간의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북쪽으로 한단 낮은 밭이 있으며 남쪽으로 제3 주차장이다. 이 유적 내에서는 약간의 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되며 토기편 중에는 삼국시대 것이 혼입되어 있다. 또한 돌담과 초석으로 보이는 자연 석괴도 있다. 그러나 이 곳은 궁터라기보다는 산쪽으로 퇴적이 두꺼워 산에서 흘러내린 유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표 8-5> 지역별 유물산포지 현황
순 | 산 포 지 명 | 소 재 지 | 출 토 유 물 | 특 징 |
1 | 신기유물산포지 | 운봉읍 신기리 | 무문토기 | |
2 | 점촌유물산포지 | 운봉읍 매요리 점촌 | 삼국시대토기 | 절터 가능성 |
3 | 봉대유물산포지 | 아영면 봉대리 | 가야계토기 | |
4 | 아곡유물산포지 | 아영면 아곡리 | 가야계토기 | 석곽묘 가능 |
5 | 밤골유물산포지 | 아영면 의지리 밤골 | 가야계토기 | 성격 불분명 |
6 | 서정이유물산포지 | 아영면 의지리 서정이 | 삼국시대토기 | 절터 가능성 |
7 | 달궁유물산포지 | 산내면 덕동리 달궁 | 삼국시대토기 | 궁터 |
다. 고 분
1) 연동고분군
운봉읍 장교리 연동마을 갈마지기 정태길씨 농장 북쪽 두번째 야산에 소재. 현재 초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초지 조성 당시 포크레인 작업으로 많은 토기가 출토 되었다 한다. 현재 20도 동으로 기운 북에서 남으로 장축을 두고 있으며 일부 천정석과 측벽이 있는 석실로 짐작된다.
2) 권포고분군
임리마을과 경계를 이루는 권포마을 북동쪽 산구릉이며, 권포저수지의 북쪽 산에 소재한다. 다수의 가야계 토기편이 수습되었으며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많은 냇돌이 산재하고 있어 석곽묘로 추정된다.
3) 임리고분군
운봉읍 임리 마을 서쪽 500여 m 지점의 야산에 소재한다. 이 야산은 낮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으로 되어 있으며 이 구릉의 능선을 따라 고분들이 약 150여 m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이 중 약 50여기는 봉토가 있는 석곽분으로 되어 있다. 특히 야산의 정상부의 봉토분은 정상 자체를 이용하여 봉분을 마련 하였으며 직경 8m 내외의 비교적 거대한 봉토를 가지고 있다. 이 고분군 주위에는 가야시대의 토기들이 다수 혼재하고 있으며 비교적 파괴가 덜 된 고분에 속한다.
4) 매요고분군
운봉읍 매요마을 남쪽 1km 야산에 소재한다. 남북으로 뻗어내리는 야산 구릉의 폭이 넓은 곳에만 분포하고 봉분은 거의 깍여내려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석곽무덤으로 추정되며 유물산포도 대단히 많다. 지표 부근에 가야시대 토기들이 수습되며 능선을 따라 길이 250여 m, 폭 100여 m의 범위에 약 100여 기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5) 신기고분군
운봉읍 신기마을 동북쪽 600m 남짓한 곳의 야산의 구릉에 소재한다. 동동쪽으로 뻗은 산의 8부 능선을 따라서 폭 50m, 동서 길이 100m 정도의 범위에서 약 2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고분은 도굴되었으며 석실의 장축길이 2.6m 북쪽의 폭 0.6m인데 남으로 넓어지고 있어 연도의 가능성도 추측된다. 봉분의 크기가 심하여 봉분의 규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6) 행정고분군
행정마을의 서북쪽 야산에 위치하며 도굴에 의한 훼손이 심하다. 30여 기의 삼국시대 석곽묘군으로 비교적 큰 할석괴를 3~5장 덮고 있다. 길이에 비하여 폭이 넓은 편이며 봉분의 존재는 분명치 않다.
7) 비전고분군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황산대첩비지의 건물 바로 뒷산에 소재한다. 도굴된 10여기의 고분은 형태 파악이 어려우며 어휘각 쪽의 1기는 장축 8m, 단축 5m에 높이 2m 내외의 봉분이 남아 있다.
8) 청계고분군
아영면 청계리 청계마을 북쪽 뒷산에 소재하며 이미 발굴 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 이 고분군은 동서방향으로 150여 m에 걸쳐 현재 10여 기가 남아 있으나 도굴로 파괴된 상태이다. 드러난 유규를 보면 서남-동북 방향으로 장축을 두고 있다. 장축은 5.5m, 단축1.2m 내외, 높이 0.6m의 석곽묘이며 능선을 따라 월산리 고분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9) 월산고분군
아영면 월산리에 소재하며 가야계통의 5~6세기 고분으로, 모두 9기의 고총고분(高塚古墳)이 있었으나 현재는 거의 도굴 훼손되었다.
10) 부동고분군
아영면 일대리 부동 마을 동편 야산에 위치하며 가야토기편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가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봉토분으로 30여 기가 확인되었으며 야산의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200여 m로 분포하고 있다. 산을 밭으로 일부 개간하면서 많은 고분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11) 두락리(斗洛里) 고분군(古墳群)
두락리 고분군의 위치는 동면 유곡리 성내(城內)마을이 등지고 있는 길쭉한 언덕 동쪽 일대를 차지하고 있다. 이 언덕의 능선 북쪽은 두락리(斗洛里)인데 서쪽 끝 우산봉(右山峰)은 해발 404m이다. 이 고분군은 우일봉 서쪽 중앙부의 남․북 두 경사면에 산재하는데 직경 5~6m 높이 4m 내외의 봉분(封墳) 20여 기가 있었으나 개간과 도굴 등으로 원형을 잃어 버렸다.
고분의 내부 석실구조는 조사 미비로 분명하지 않으나 두락리 일대에는 평지에 석곽기(石槨基), 옹관기(甕棺基) 등이 산재하고 있다.
석곽기는 길이 1.8m, 폭 60cm 내외의 네벽을 석축하고, 내부에는 장항호(長頸壺), 고배호(高杯壺) 등이 쇠낫(鐵鎌), 쇠갈쿠리(鐵鋒), 마구(馬具), 재갈 등과 함께 출토되어 그 연대는 5~6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옹관은 김해식(金海式) 연질토기옹(軟質土器甕)을 수평으로 놓고 대형 환저호(丸底壺) 두개를 합친 것으로서 주옹(主甕)은 길이 60cm, 구경(口徑) 46cm에 기복(器腹)에는 전면적으로 타형문(打型紋)이 있고 두개의 젖무늬 띠를 나타내고 있다. 높이 33cm, 구경(口徑) 24.5cm, 복판의 직경은 38cm이다.
이옹관 안에서는 격자문(格子紋)이 새겨진 붉은색 완형토기(椀型土器) 일점이 있었다. 이 옹관의 연대는 김해식 토기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늦어도 3~4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12) 성내고분군(A)
아영면 두락리 성내마을에서 의지리로 가는 농로의 중간에 위치하며 주변에는 성혈이 있는 150cm×110cm 크기의 1개 판상석이 있다. 남북으로 장축 방향을 두고 있는 삼국시대의 봉토분이다.
13) 성내고분군(B)
동면 유곡리 성내마을에 연비산 쪽으로 가다보면 토성이 있는 낮은 야산이 있고 이 토성의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봉분의 존재는 명확하지 않다. 가야계의 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가야계 석곽묘군으로 일부 유구가 드러난 바에 의하면 판상의 할석으로 측벽을 만들고 할석괴 4매 내외로 천정을 덮고 있다 하였다. 길이에 비하여 폭이 넓은 편이며 50여 기가 산재해 있다.
14) 내건고분군
동면 내건마을의 지산초등학교 동쪽에 있는 야산에 200여 기의 석곽묘군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거의 야산 전면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데 주로 산의 남쪽 경사면에 보다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1988년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중 봉분의 확인이 가능한 것은 50여기라 하였다. 기본적으로 할석으로 측벽을 쌓거나 만들고 위에는 할석괴로 천정을 덮고있다.
15) 외건고분군
동면 건지리 외건마을 서쪽 야산의 남쪽사 사면에 위치한다. 다량의 가야계 토기가 출또되어 5~6세기 가야시대 고분으로 보고 있다. 야산의 전면에 동서로 300여 m에 걸쳐 100여 기의 석곽묘가 분포하고 있으나 도굴로 훼손이 심하고 봉분의 존재 여부도 불분명하다.
16) 자래고분군
동면자래리 자래마을 북쪽 야산에 분포한다. 야산은 동서로 길고 가파른데 동서로 250m 남북으로 150m에 걸쳐 분포한다. 100여 기 이상의 석곽묘가 있는 유적으로 도굴에 의하여 주변에 많은 가야계 토기편이 산재해 있다. 1987년 발간된 <남원지방문화재지표조사서>에 의하면 복원이 가능한 토기 5점이 수습되었다고 하였다.
17) 성산(A)고분군
동면 성산리 성산마을과 경남 함양군 함양읍의 경계를 이루는 동쪽 능선을 따라 50여 m에 위치한다. 40여 개의 석곽묘군으로 그 중 1기는 가장 높은 곳에 장축 방향이 남북으로 10.9 ~ 10.6 m 내외 크기로 거의 원형의 대형 봉분이 있다.
18) 성산(B)고분군
동면 성산리 성산마을에서 인월쪽으로 1km 지점되는 곳의 도로 우측 언덕의 야산에 위치한다. 즉 신틀바위가 있는 논의 바로 맞은편 야산이 된다. 삼국시대 토기편이 출토되며 60여 기가 산재해 있다.
19) 백장고분군
산내면 대정리 백장마을 백장휴계소가 들어선 산이 약간 완만한 경사를 보이는 곳에 2기의 백제계 석실분이 위치하는데 그 중 1기는 유구의 돌이 거의 소멸된 상태라 하였다. 이 파괴분의 300여 m 서남쪽에 비교적 유구를 알 수 있는 다른 고분이 있다.
<표 8-6> 4개읍면 고분군 분포 현황
번호 | 고 분 명 | 소 재 지 | 축조시기 (출토유물) | 수량(추정) | 장축 (m) | 폭 (m) | 높이 (m) | 지역구분 |
1 | 연동고분군 | 운봉읍연동리 | ? | 5기 | 운 봉 읍 | |||
2 | 권포고분군 | 운봉읍권포리 | 가야시대 | 5기 | ||||
3 | 임리고분군 | 운봉읍 임리 | 삼국시대 | 50기 | ||||
4 | 매요고분군 | 운봉읍매요리 | 삼국시대 | 100기 | ||||
5 | 신기고분군 | 운봉읍신기리 | 삼국시대 | 20기 | 2.6 | 0.6 | ||
6 | 행정고분군 | 운봉읍행정리 | 삼국시대 | 30기 | ||||
7 | 비전고분군 | 운봉읍비전리 | ? | 10기 | 8 | 5 | 2 |
8 | 청계고분군 | 아영면청계리 | ? | 10기 | 5.5 | 1.2 | 0.6 | 아 영 면 |
9 | 월산고분군 | 아영면월산리 | 가야시대 | 9기 | 20 | 20 | 2 | |
10 | 부동고분군 | 아영면부동리 | 가야시대 | 30기 | ||||
11 | 유곡․두락 | 아영면두락리 | 삼국시대 | 20기 | 6 | 6 | 4 | |
12 | 성내(A)군 | 동면성내마을 | 삼국시대 | 5기 | 11.3 | 8.1 | 1.5 | 동 면 |
13 | 성내(B)군 | 동면성내마을 | 삼국시대 | 50기 | ||||
14 | 내건고분군 | 동면내건리 | 가야시대 | 200기 | 1.6 | 0.5 | ||
15 | 외건고분군 | 동면 외건리 | 가야시대 | 100기 | ||||
16 | 자래고분군 | 동면자래리 | 가야시대 | 100기 | 3.5 | 0.9 | 0.9 | |
17 | 성산(A) | 동면성산리 | 가야시대 | 40기 | 10.8 | 10.6 | ||
18 | 성산(B) | 동면성산리 | 삼국시대 | 60기 | 2 | 0.6 | ||
19 | 백장고분군 | 산내면백장리 | 백제시대 | 2기 | 3.2 | 0.8 | 산내 |
* 가야시대 : 5 - 6 세기
3. 산성(山城) 및 봉수(烽燧)
가. 산성
1) 장교산성(長橋山城)
일명 할미성, 합민성, 합미성이라 부른다. 또한 남원시 이백면 주민들은 방학산성이라 한다. <남원지>에 ‘재장교리 후 나제시고루(在長橋里 後 羅濟時古壘〉’라 하였고, ‘합민성은 석축으로 주위 약 200간(약 360m)이며 산정에 있다’고 하였다.
성내 최고봉은 645m다. 성곽은 능선을 따라 서남 방향으로 누에고치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주위는 319.6m이다. 성곽의 서남각(西南角)에 우루(隅樓)를 세워 폭(幅) 6m, 길이 8m의 돌출된 적대(適臺)가 있고, 그 동편에 남문, 북편에 우루대 서북각에 서문 등 세 군데의 성문 유지(遺址)가 있고 서북편 중앙에 샘터(正戶址)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다수의 기와조각, 토기조각등 삼국시대의 유물이 채집 되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1894년 동학혁명 때 남원 동학군의 공격을 막는 박봉양의 민보군이 식량을 저장하고 주둔하였던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성의 북쪽 방아치와 관음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패배하였다.
2) 가산산성(佳山山城)
운봉읍 가산리 북쪽산의 정상부 618m에 위치하는 테머리식 삼국시대 석성(石城)으로 산사면에 붙여서 축성하였다. 이 곳은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와 동면 봉대리 및 가산리의 경계로 운봉 고원에서 요천강에 이르는 산맥 방어 선상의 요지다. 현재 성의 북쪽으로는 88고속도로가 번암면에서 아영면으로 진입하는 사치(모래재)가 있고 서쪽으로는 운봉읍으로 진입하는 유치가 있으며 남동쪽으로는 아영면 봉대리로 통하는 명석치(울도치)가 있다. 즉, 주변 교통로를 감시할 수 있는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칭합미성 석축 주위 2백간 요산정(稱合米城 石築 周圍 二百間 繞山頂)’이라 기록되어 있고 <남원지에는> ‘가산산성 재가산리 후 나제고루(佳山山城 在佳山里後 羅濟古壘)’라 하였다. 성의 주위는 217m로 서북 쪽에 서문터가 있고 남쪽 중앙에 남문터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판상의 자연석에 가까운 할석을 이용하여 모로 쌓았으며 삼국시대 토기와 와편이 다수 출토되었다. 성 아래에서는 청자와 백자조각도 발견되었다고 하였다.
3) 황산토성
일명 군화동 토성. 운봉읍 가산마을의 남쪽에 있는 황산 북서쪽 사면에 10m 정도의 토성이 최고 2.5m 남짓한 높이로 남아 있다. 이 지역은 과거 경지정리 작업으로 대부분의 유구가 파괴되었다. 성안에서는 돌도끼가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산의 남쪽 사면에서 돌화살과 무문토기, 삼국시대 토기가 수습되었다고 하였다.
4) 신기토성
운봉읍 신기리 토성은 신기 마을을 중심으로 북쪽 야산 구릉을 따라 위치하고 있다. 성은 급사면을 이루는 남쪽의 협곡에는 축성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파괴가 심하여 50m 정도가 확인된다. 1960년대 홍수 때 축성 시기를 알 수 있는 지석이 발견되었는데, 건융 13년(1748) 2월 24일 보맥유림만대(補脈有林萬代)의 뜻으로 사주(仕主) 장준대(張俊大)와 별좌(別座) 정태우(鄭太右)의 주관으로 길이 50여m 폭 3m 높이 1.5m의 흙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토기편과 고분군 그리고 무문토기편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축성되 토성이 1748년에 마을의 보맥(補脈)으로 다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5) 고남산성
운봉읍 권포리 고남산에 위치하며 현재 길이는 50m 높이 3~4m로 축성시기는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해발 846.4m의 고남산 8부 능선에 남쪽 사면을 중심으로 축성되었고 북쪽 사면은 축성을 하지 않았다. 현재 성벽은 6단 정도의 석축이 남아 있는데 본래는 이보다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고남산에는 현재 중계탑이 자리하고 있으며 산의 북쪽은 경사가 심하고 남쪽은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동학혁명 때 축성하였다고 전해지나 수습된 와편이나 토기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본래는 동쪽 골짜기 너머 산등성이까지 석성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중계탑을 세우면서 거의 파괴되고 그 석재는 새마을 사업에 이용하였다고 전한다. 주민들의 말대로라면 포곡식 산성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남산 북쪽을 따라 오르면 중간 높이에 평지가 있는데 그 곳에 절터로 보이는 돌담이 보이고 그 곳에서 위쪽 7부 능선 서편 경사면에서 석성의 흔적이 확인 되었다.
6)준향 음지산성
운봉읍 준향리 남쪽산 정상에 위치하는 음지성은 준향리 뒷산에 위치하여 준향산성이라고 불리어 왔다. 산봉형(蒜峯形)이면서 반테머리식 산성인데 산의 서쪽면은 급경사면으로 그 자연적인 사면을 이용하고 동쪽을 중심으로 축성하였다.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동학혁명 때 쌓았다고 전하나 축성방법이나 출토된 토기 그리고 주변 유적들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쌓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운봉 민보군이 실제 주둔한 사실을 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7) 준향 양지산성
양지산성 역시 음지성과 함께 준향리산성이라고 불린다. 테머리산성으로 음지성에서 500 ~600m 지점에 있다. 남쪽 봉우리로 동쪽면에서부터 사면까지 축성하였는데 200m 가량이 남아있다. 남쪽 건너 수정산성과 함께 갓바래재를 지키기 위해 쌓은 성이다. 갓바래재는 이백면 과립리에서 운봉읍 준향리를 연결하는 고개로써 과거 운봉현 남면지역에서 남원으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길목이다. 과거 운봉 사람들이 남원으로 넘나들 때 여원치와 함께 가장 많이 이용했던 고개였다. 역시 축성 시기를 동학혁명 때라고 전하고 있으나 그 이전에 축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8) 노치산성(蘆峙山城)
일명 수정산성이라 한다. 운봉(雲峰)고원 서남단 주천면(朱川面) 구룡폭포 협곡으로 빠지는 통로와 이백면(二白面)으로 넘어가는 노치(갈재)의 북쪽, 이곳은 이백 운봉 주천의 3면 경계를 이루는 해발 740m 고지 위에 위치한다. 남쪽 능선을 따라 덕치산성과 연결되고 지맥은 동쪽 고리봉과 이어진다.
이 성은 테머리산성으로 옛날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국경방어 요지로 백제가 쌓은 것이라 한다. 운봉고원인 동쪽 비탈은 해발 약 200m에 불과하나 서쪽은 이백면 소재지인 효기리(孝基里)까지 약 540m 높이의 경사진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성안에 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며 운봉읍에 축성된 산성 중에서 장교산성(방학산성) 다음가는 규모이다. <고적조사>에 의하면 “노치 한미성(翰米城)은 돌로 쌓았는데 돌레 약 100칸(180m쯤)인바 산 봉우리에 있다.”고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말 약해진 국세를 틈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전라․경상지방이 피해가 막심하여 그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산성이라고도 하나 백제가 신라에 대비하여 쌓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그러나 주천면 덕치리(德峙里)지방이 왜구의 침입로가 된 것은 전남에서 이곳을 거쳐 황산에 이르고, 또 대구 지방까지 연결되는 요지이기 때문이다. 당시 왜구가 침입 하였을 때 남원쪽과 대구방면에서 각각 공동 전략을 세워 싸울것을 의논하여 남원을 방어하기 위해 노치를 중심으로 산 주위를 삥 둘러 큰 돌을 날라다 쌓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녀자들까지 치마폭에 돌을 날라다 쌓았다고 하며, 곳곳에 굴을 파놓아 대피할 장소도 마련한 흔적이 있다. 또한 바위를 새끼로 묶어 큰 나무에 매어 적군이 산을 기어 오를 때 줄을 풀어 바위가 굴러가 적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9) 수미성(輸未城)
일명 성산성(城山城). 잿뫼산성. <한국의 성곽과 봉수, 1991>에는 수미성을 ‘운봉읍 북천리 구읍내리에 위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소형토루지가 있으며 태반이 붕괴되었다’고 하였고, <문화유적총람>에는 ‘유래 미상의 석성으로 석축 주위가 약 1,100m정도 였으나 대부분 붕괴되었다’고 하였다. 주위가 1,100m 규모라면 주변 산성에 비하여 가장 큰 성이며 읍성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구읍내리라고 하면 과거 객사를 비롯한 관청 대부분이 북천리에 소재하였으므로 수미성의 위치는 북천리 지역이나 250m 떨어진 북쪽 성산에 위치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0) 덕치산성(德峙山城)
인근 주민들은 칠봉산성. 할미산성이라 부른다. 노치산성 남쪽으로 주천면과 이백면의 경계를 이루는 덕음봉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봉화대로 보이는 직경 10여 m의 원형 석축이 있고, 다시 남쪽으로 200여 m 되는 곳에 주위 250여 m 되는 비교적 소규모의 석성이다. 북쪽 능선에 잇대어 토축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고 삼국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하였다. 일명 칠봉산이라 불리는 맥이 이어지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사방 급경사를 이용하여 석축을 쌓았다. 북문지와 남문지가 남아 있다. 축성시기를 조선시대로 보고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실제 위치는 주천면 덕치리에 속한다.
11) 성리산성
일명 아막산성. 아막성. <용성지>에 ‘재성리후 나제시고루(在城里後 羅濟時古壘)’라 하였다. 해발 919m의 봉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해발 660m 산 정산에 있는 석성으로 성지의 서쪽은 현 장수군 번암면 대론리이고, 경남 함양에서 매치를 지나 성 아래 복성치를 지나 남원으로 연결되는 옛날부터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영고원은 운봉고원과 황산의 산줄기를 가운데로 하여 둘로 나누어져 있으며 모산성, 아막성 등으로 불리며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지역 쟁탈전을 벌이던 곳이었다. 이 곳은 본래 가야의 강역이었으나 신라의 영토로 귀속된 후 여러차례에 걸쳐 백제의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현재 파악할 수 있는 성의 규모는, 둘레 623.8m이고 북쪽에 수구(水口)와 북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서쪽의 중앙지에 서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의 주변에서는 기와조각과 백제의 토기편들을 습득할 수 있다. 현재 북문지와 수구가 있었던 곳으로 보이는 동쪽에는 직경 1.5m의 원형 석축으로 된 정호지(井戶址)가 있다. 성 내(內)에는 운성암(雲城庵)이 있으며 40년 전에 폐사(廢寺)된 도선암 자리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삼국시대 호국사찰로 짐작된다. 전북지방 기념물로 제38호로 지정 보존되어 오고 있다.
12) 지치토성
일명 짓재리토성. 지치토성은 아영면 설리 지치에 소재하며 토석혼축이며 현존 길이는 500m이다. 서편은 장수군 번암면으로 남원과 장수를 연결하는 요천강 상류이며, 아영고원의 서쪽 능선과 봉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해발 661m의 산 정산 사이에 있는 고개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길게 축성된 토성이다.
판상의 자연석을 3~4 단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형태로 서쪽에 면을 맞추고 있으며 이 유구의 외부는 급한 사면을 이룬다. 유구의 동쪽은 2~3m 정도 넓이로 평평하며, 500m 내외의 길이가 확인되고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6․25 때까지도 약 1.5m 높이의 성벽이 있었다고 하며 이 토성은 봉화산에서 시루봉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포곡형의 토루시설로 추정하고 있다.
13) 시루봉(증봉) 산성
일명 청계산성으로「남원지」에 표기되어 있다. 아영면 성리 산성 남쪽 약 1.8km되는 지점 시루봉 정산에 테머리식 산성으로 삼국시대 석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북쪽으로 성리 산성을 거쳐 짓재토성과 봉화산으로 연결되고 남쪽으로는 황산토성과 가산산성으로 연결되는 능선상의 최고봉이다. 성곽은 대부분 붕괴된 석축으로 동면이 직선을 이룬 3각형에 가까운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동남우각(隅角)에는 공호(空濠)를 파고 서문과 북문이 있다. 주위 166.1m의 소규모 산성이라고 <남원지, 1992>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답사 결과 정상에 조그만 봉수 규모의 붕괴된 석축 흔적과 주변에 헬리콥터 이착륙장으로 조성된 평지만을 확인하였다.
14) 성내토성
해발 573m의 연비산 줄기가 서쪽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도장마을을 거쳐 성내마을 사이에 우뚝 돌기하듯이 야산이 형성되있는데 그 정상에 주변이 성처럼 둘러싸인 평지가 있다. 동남쪽 유곡리 쪽으로 성문처럼 터져 있어 마치 요새와 같은 지형을 하고 있다. 파괴가 심하나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삼국시대의 신라가 백제를 수비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산줄기 윗쪽에는 망루터라는 곳이 두 군데 있다.
15) 팔랑치 산성
일명 할미산성. 성산리산성. 합민성. 팔랑치산성이라고 부른다. 성산마을 동쪽 해발 800m 내외의 산 위에 있으며, 이 지역은 팔랑치에서 상산으로 이어지는 산구릉 가운데 중간 봉우리에 해당된다. 성을 중심으로 동쪽은 경남 함양읍에 속하며, 팔랑치쪽에는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성은 양쪽을 자연석으로 폭 8.2m, 높이 3.2m로 쌓아 만든 테머리식 산성인데 현재는 대부분 파괴되어 있다. 성에는 4곳에 문지(門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성안에는 현재 민가의 밭이 있다. 축성시기를 삼국시대로 보고 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조방장 이복남과 운봉 현감 남간이 새로 성을 쌓고 수비군을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일명 노고성(老姑城)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우리말로 할미성이란 뜻이다.
16) 정령치 차단성
산성 사이의 능선을 따라 방어력을 보강하는 긴 성벽을 축조하는 것을 차단성이라고 하였다. 산내면 덕동리와 주천면 고기리 사이의 정령치에는 달궁 역사와 함께 정장군이 지키던 궁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방어 시설로 산성을 쌓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산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 관광도로 건너 산불 감시소까지의 토축성벽은 거의 무너졌고 7~8m 구간에서 높이 2m의 축성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도로 신축시 가야계, 삼국시대 토기나 기와조각이 많이 수습되었다. - <성곽의 추적 연구>한병옥. 1997
<표 8-7> 지역별 산성 분포
번호 | 성지(城址)명 | 위치 | 시기 | 축성형태 | 특 징 | 지역구분 |
1 | 가산산성 | 가산리 | 삼국 | 석축.테뫼식 | 둘레 217.0m 북면:400m | 운 봉 읍 |
2 | 황산토성 | 가산리 | 삼국 | 토축 | 길이 10m.높이 2.5m | |
3 | 신기토성 | 신기리 | 삼국 | 토축 | 길이 50m. 폭3m | |
4 | 고남산성 | 권포리 | 삼국 | 석축.포곡식 | 현재길이 50m .4m | |
5 | 장교산성 | 장교리 | 삼국 | 석축.테뫼식 | 둘레 319.6m 북면:500m | |
6 | 준향음지산성 | 준향리 | 삼국 | 석축.테뫼식 | 둘레 200m | |
7 | 준향양지산성 | 준향리 | 삼국 | 석축.테뫼식 | 2 중 둘레 200m | |
8 | 노치산성 | 주촌리 | 삼국 | 석축.테뫼식 | 250m | |
9 | 수미성 | 북천리 | 삼국 | 석축 | 둘레 1100m | |
10 | 덕치산성 | 덕치리 | 삼국 | 석축.테뫼식 | 200m | |
11 | 성리산성 | 성 리 | 삼국 | 석축.퇴뫼식 | 둘레 632.8m | 아영면 |
12 | 지치토성 | 짓재리 | ? | 포곡형토루 | 석축 혼용.길이 500m | |
13 | 시루봉산성 | 청계리 | 삼국 | 석축.테뫼식 | 해발 1800m.둘레166.1m | |
14 | 성내토성 | 유곡리 | 삼국 | 토축흔적 | 성내 야산(망루터) | 동 면 |
15 | 팔랑치합미성 | 성산리 | 삼국 | 석축.테뫼식 | 토성과 혼재 | |
16 | 정령치차단성 | 덕동리 | 삼한 | 토축흔적 | 토성과 석성 연결 | 산내 |
나. 봉수
1) 구동봉수
봉수대는 아영면(阿英面)의 최북단이며 장수군 번암면(幡岩面) 동화리(洞花里)와의 접경 지역인, 해발 919m의 봉화산(烽火山) 정상에 있다.
고적조사 자료에 의하면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 주 140간 석축 남원 함양계(蟠岩面 泂花里 長安山 周140間 石築 南原 咸陽界)’라 기록되어 있다. 즉 봉수대는 번암면 동화리 장안산에 있고, 대의 둘레는 약 140칸(약 252m)이 되는데 이것을 돌로 쌓았다. 남원과 함양간의 경계선이 된다.
장안산과 봉화산은 동일한 산으로 추정된다. 규모면에서 봉화대 둘레가 250m나 된다면 이는 봉화대의 규모로서 대단히 넓은 편이다. 이 봉수대는 이조시대에 이미 소멸되고, 고려시대에도 폐지된것 같다. 대체로 통일 신라 이후부터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어느 때에 봉수대 역할을 하였는가? 그것은 마한과 진한의 분쟁 시기인 삼한시대나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를 이루었던 삼국시대가 아닌가 한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들어서서 백제와 신라는 국경분쟁이 잦았다. 두 나라는 잠시도 국경 수비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국경 분쟁의 첨단이 운봉과 아영 부근이어서 이곳에 상대방의 기습을 감시하고 유사시에 신속히 본진으로 신호를 보내는 시설이 절실하게 필요 하였으므로 신라는 이 봉수대를 큰 규모로 석축하였을 것이다.
주위 250m의 석축으로 된 봉수대라면 주변의 보통 산성규모이며, 몇 사람이 올라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100여 명 이상의 부대가 주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덕치봉수
노치산성 남쪽으로 주천면과 이백면의 경계를 이루는 덕음봉 남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칠봉산에 봉화대로 보이는 직경 10여m의 원형 석축이 있다. 축성시기를 조선시대로 보고 있으나 분명하지는 않다. 실제 위치는 주천면 덕치리에 속한다.
4. 도요지
가. 준향리 도요지
준향마을에서 축산고등학교로 가는 길의 남쪽편 야산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마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조사된 바에 의하면 등요로의 길이가 7m 내외이며 동서로 길게 자리한다. 주변에 이같은 요가 몇 개 더 있을 것으로 보이며 토기 산포 범위는 동서 20m 내외, 남북 30m 내외이다. 가야시대 토기가 출토되며 시기는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나. 수철리 도요지
수철마을에서 지금은 없어진 산내면으로 가는 옛 도로를 따라 약 2km 남짓한 학생교육원 부근에 위치한다. 옛날 집터로 주변에 감나무가 있어 구분이 가능하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야영장 부근이다. 등요로 추정되며 조선초기의 분청자기가 출토된다. 범위는 동서 30m, 남북 40m 내외가 확인되었다.
<표 8-9> 도요지 현황
번호 | 유 적 명 | 유 적 소 재 지 | 지 역 구 분 |
1 | 준 향 리 도 요 지 | 준 향 리 | 운 봉 읍 |
2 | 수 철 리 도 요 지 | 공 안 리 수 철 부 락 | |
3 | 점 촌 도 요 지 | 매 요 리 팔 반 | |
4 | 당 동 도 요 지 | 아 곡 리 당 동 마 을 | 아 영 면 |
5 | 연 실 도 요 지 | 자 래 리 연 실 마 을 | 동 면 |
5.장승
가. 서천리 장승
서천리 장승은 서천리 서림숲(선두숲) 당산거리 도로 양쪽에 남북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원래는 운봉이 배의 형국이라 배를 움직이는 짐대도 같이 있었으나 현재는 장승만이 남아 있다.
남쪽에는 남자를 상징하는 2.4m의 방어대장군이 있고 북쪽에는 여자를 상징하는 2.1m의 진서대장군이 서 있다. 석질은 화강암으로 귀면귀수형이다. 여상인 진서대장군은 목이 부러져 철근을 이용하여 붙이고 도장한 흔적이 있는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두 장승 부부가 심하게 싸우다가 부러졌다고 한다. 1989년 6월 16일 두 장승을 도난당한 적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수소문하여 인천에 가서 목이 부러진 채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전에는 제를 지낸 후 목에 문종이를 끼운 금줄을 쳐 놓곤 하였다. 또한 여러 장정이 들 수 있는 큰 짐대가 오리 형상의 새 세 마리를 이고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오리가 물에 사는 동물이라 마을의 화재를 막아 주는데서 연유한다. 현재 서림 숲은 여원치에서 팔랑치로 부는 바람의 통로가 되어 운봉면에서 가장 지세가 허한 곳이다. 따라서 석장승과 짐대는 숲과 함께 비보 및 액막이, 방제 등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목장승은 없고 2기의 석장승은 1970년 5월 20일 지방민속자료 제 20호로 지정되었다. 건립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산제는 매년 음력 1월 2일에 제관을 선정하여 지낸다. 큰당산과 작은 당산인 날당산 그리고 제주(祭主)의 집에 금줄을 쳐 부정을 막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나. 북천리 장승
운봉읍에서 인월로 가는 국도에서 신기리 쪽으로 50m 떨어진 길옆에 2기가 서 있다. 짐대는 변전소 옆에 세워졌으나 6․25 이후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북천리 사람들은 이곳을 짐대거리라고 부른다. 동쪽 장승이 남장승으로 동방축귀대장군, 서쪽 장승이 여장승으로 서방축귀대장군이란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남장승이 1.38m, 여장승이 1.95m로 여장승이 더 큰 이유는 해방 때 잘려진 것을 다시 세웠기 때문이라 한다. 짐대 역시 오리를 앉혔는데 마을의 화재를 막기 위한 것이라 한다. 당산제는 매년 음력 1월 3일 마을에서 제관을 선정하여 지낸다.
다. 권포리 장승
권포마을 장승은 모두 4기인데 마을 입구 바깥쪽에 1쌍과 안쪽에 1쌍이 조산(돌무더기)과 함께 있다.
화강암 석질로 되어 있는 이들 장승은 모두가 마을 앞이 확 트인 곳에 서 있어 마을의 허한 곳을 막아주는 비보장승으로 짐작된다. 바깥 장승 중 마을로 들어가는 왼쪽 장승은 남장승으로 콘크리트 기단을 만들어 세웠는데 크기가 1.75m이며 몸통에는 ‘갑자원월’이란 명문이 있어 건립연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갑자년이라 하지만 60년 만에 돌아오는 어느 갑자년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실상사 장승과 같은 시기로 보아 1744년으로 보고있다. 오른쪽 장승은 명문이 없고 여장승이며 크기가 1.50m로 조금 작다. 명문은 풍화가 심해 알 수 없으나 가동마을에 거주하는 최상촌씨의 말에 의하면 콘크리트 기단에 묻힌 장승 하부에 가정(嘉靖) 2년이란 명문이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가정이란 명나라 12대 황제 세종의 연호로써 1521년 등극하였다 따라서 중종 18년(1523)에 건립한 셈이다.
마을 안쪽 장승은 바깥장승보다 작다. 서쪽 장승은 1.28m, 동쪽 장승은 1.06m로 모두 명문이 없다. 길 서쪽에 자연석으로 쌓은 1기의 조산이 있는데 높이 2m 정도이다. 과거 음력 1월 15일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지내지 않는다.
라. 유곡리 장승
장승은 마을 입구에 1쌍이 남북으로 서로 마주하고 서 있다. 남쪽 장승은 크기가 2.06m로 이마에 둥근 점이 튀어나와 있고 이빨은 5개의 이빨이 빗살처럼 양각되었다. 북쪽의 장승은 크기가 2.0m이며 남북장승 모두 천하대장군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마을 뒤 연비산에 절이 있었던 점으로 보아 사찰장승으로 추정된다. 현재 장승과 관련된 제의식이나 당산제는 없다.
마. 개암리 장승
장승은 개암마을 입구에 1쌍이 남북으로 마주보고 서 있다. 북쪽 장승은 크기가 1.5m로 남상(男像), 남쪽 장승은 1.47m로 여상(女像)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승의 본래 위치는 마을 안쪽 우물의 뒤쪽 집앞에 양쪽으로 마주 세워져 있었는데 1992년경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매년 정월이 되면 아기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들이 음식을 장승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1쌍 모두 명문이 없고 자연석에 단순하게 얼굴 형상을 음각한 것이 특징이다. 마을이 배의 형국이어서 마을 입구의 포풀러가 돗대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건립연대 역시 확실히 알 수 없고 주민들은 벅수 혹은 돌비석이라 부르고 있다. 마을 입구가 허한 곳이라 비보(裨補)장승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바. 실상사 장승
실상사 장승 2기는 실상사 입구 해탈교를 사이에 두고 실상사 쪽에 1쌍, 동수마을 쪽에 1기가 있다. 실상사 장승은 1969년 12월 15일에, 동수장승은 1987년 7월 3일에 민속자료 제15호로 지정되었다. 전남의 도압사, 보림사, 쌍계사, 경남의 통도사, 서울의 봉은사 등 우리나라 사찰입구에 세워진 장승 중의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이다. 장승은 보통 남녀 한쌍으로 세우는 법인데 실상사 장승은 외모로 보나 몸에 음각된 문자로 보나 어느것이 여성인지를 판별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남성의 장승을 절 앞으로 흐르는 냇가 두 곳에 도합 4개를 세운 것은 특이한 점이다.
동수 장승 중에 북쪽에 서 있던 것은 아깝게도 병자년(1936년) 홍수때 떠 내려 갔다고 한다. 남쪽에 남아 있는 것은 키(지상에서 노출부분)가 2.9m이며, 몸의 둘레는 1.85m나 된다. 머리에는 차양이 달린 상부가 좁아진 모자를 썼으며, 두 눈과 코는 매우 크다. 눈은 주위를 파서 입체감을 나타내었고 코에는 양 날개가 크게 달랐다. 이빨이 새겨져 있다. 귀도 크고 긴 편(18×39cm)이며 턱 밑에는 수염이 있고, 가슴에는 ‘옹호금사 축혼장군’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었다.
몸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약간 좁아져서 날씬한 느낌이나 물체에 비해서는 얼굴의 비율이 너무 크다. 얼굴의 전체적인 인상은 귀신을 쫓으려는 험상궂은 것이 아니라 어디인가 익살을 떠는 듯한 해학이 느껴진다. 실상사 장승은 해탈교를 건너면 다리 입구에 남북으로한쌍이 서 있다. 남쪽 나무 밑의 장승은 북쪽 장승에 비하여 이마에 혹이 달리고 턱 밑의 수염이 조금 더 강조되었다. 그리고 귀의 크기가 약간 작아졌을 뿐 대체적인 모습은 아주 흡사하다. 몸에는 대장군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었다. 북쪽에 세워진 장승은 크기가 2.53m, 둘레 1.68m로 눈, 코, 귀 등이 앞의 대장군과 꼭 같다. 다만 이마에 있던 혹이 양미간으로 내려오고 수염의 표현이 없는 점이 다를 뿐이다. 몸에는 ‘상원주장군’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었다. 이처럼 얼굴이나 기타의 특징이 서로 비슷한 양식으로 표현된 것을 보면 이들은 모두 한 사람에 의해서 제작되었거나 어느 하나를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실상사 쪽으로 내를 건너서 우측으로 약 50여 m의 지점에 높이 2.40m, 둘레 1.70m 의 입석이 서 있다.
<표 8-10> 지역별 장승 현황
순 | 장승명칭 | 위치 | 명 문 | 연 대 | 크기(m) | 기 능 | 비 고 | 지 역 |
1 | 서천남장승 | 서천 | 진서대장군 | 조선 | 2.40(남) | 비보장승 | 민속자료20호 | 운봉읍 |
2 | 서천여장승 | 서천 | 방어대장군 | 조선 | 2.10(여) | 비보장승 | ||
3 | 북천남장승 | 북천 | 동방축귀대장군 | 미상 | 1.38(남) | 수호장승 | ||
4 | 북천여장승 | 북천 | 서방축귀대장군 | 미상 | 1.95(여) | 수호장승 | ||
5 | 권포외남장승 | 권포 | 갑자원월 | 1523 | 1.75(남) | 비보장승 | ||
6 | 권포외여장승 | 권포 | 없음 | 1523 | 1.50(여) | 비보장승 | ||
7 | 권포내남장승 | 권포 | 없음 | 미상 | 1.28(남) | 수호장승 | ||
8 | 권포내여장승 | 권포 | 없음 | 미상 | 1.06(여) | 수호장승 | ||
9 | 유곡남장승 | 유곡 | 천하대장군 | 미상 | 2.06(남) | 사찰장승 | 동 면 | |
10 | 유곡여장승 | 유곡 | 천하대장군 | 미상 | 2.00(여) | 사찰장승 | ||
11 | 개암남장승 | 개암 | 없음 | 미상 | 1.50(남) | 비보장승 | 아영면 | |
12 | 개암여장승 | 개암 | 없음 | 미상 | 1.47(여) | 비보장승 | ||
13 | 동수장승 | 백일 | 옹호금사축귀대장군 | 미상 | 2.90 | 사찰장승 | 민속자료15호 | 산내면 |
14 | 실상사남장승 | 입석 | 상원주장군 | 1731 | 2.53(남) | 사찰장승 | ||
15 | 실상사여장승 | 입석 | 대장군 | 1725 | 2.53(여) | 사찰장승 |
* 운성대장군( 여원치 정상, 1기, 1992), 성산리 장승(성산마을 입구, 2기, 1994)
6. 비(碑)
가. 사적비(事蹟碑)
비(碑)란 고인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그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문장을 새겨 넣은 돌이다. 이는 우리 선현들의 높은 언행과 사상을 이어 받기를 바라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행적이다.
운봉 4개 읍면에 비의 현황을 사적비, 효열비, 일반비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사적비로는 운봉지역에 7개 동면지역에 3개가 분포하고 있다.
황산대첩비는 고려 우왕 6년 (1380) 인월역에 침입한 왜구를 이성계 장군이 황산에서 격퇴시킨 대첩을 기리기 위해 1577년 운봉 현감 박광옥이 도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장계를 올려 건립한 기념비이다.
축산고등학교 교정 서편에 세워진 ‘절도사손공충어난비’는 영조 4년(1728) 이인좌, 정희랑 등이 일으킨 난을 운봉 좌영장 손명대가 좌영군과 지역 의병들과 함께 매치와 팔랑치에서 대치하다가 함양으로 진격하여 함양위수 최존서를 사로잡아 운봉 관아에서 처형함으로써 호남 지역 난을 평정한 공로를 문중에서 기록하여 세운 사적비이다.
<표 8-11> 사적비(事蹟碑)
지역 | 순 | 분류 | 소 재 | 건립년 | 비 명(碑名) |
운 봉 읍 | 1 | 사적비 | 비전마을 | 1577 | 황산대첩지비(荒山大捷之碑). 1957년 중건. |
2 | 사적비 | 축산고 | 1808(?) | 절도사손공구충어난비(節度使孫公舊忠禦難碑) | |
3 | 사적비 | 서천서림 |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 | ||
4 | 신도비 | 불선재 | 추만선생신도비(秋巒先生神道碑). | ||
5 | 사적비 | 비전마을 | 1958 | 황산대첩사적비 | |
6 | 충혼비 | 서천서림 | 1954 | 충혼탑(忠魂塔) - 6.25 군경 추모비, 1993년 중건 | |
7 | 기념비 | 비전마을 | 1973 | 황산대첩기념비 | |
동면 | 8 | 사적비 | 계암마을 | 1942(?) | 호은김공창의사적비(湖隱金公倡義事蹟碑) |
9 | 사적비 | 취암마을 | 만은김공창의사적비(晩隱金公倡義事蹟碑) | ||
10 | 신도비 | 서무마을 | 1948 | 숭정대부정평공죽헌오선생신도비(靖平公竹軒吳先生神道碑) | |
산내 | 11 | 충혼비 | 내령마을 | 1977 | 순국경찰관합동지묘 |
12 | 충혼비 | 대정마을 | 1995 | 충혼비 |
서천리 서림 숲에 세워진 갑오토비사적비는 1894년 갑오동학혁명 당시 남원 동학군이 운봉으로 진출하려 하자 박봉양이 운봉의 민보군과 함양 등지에서 보내온 지원병과 합세하여 방아치와 관음치 전투에서 격퇴시켜 운봉을 지킨 공로로 문중에서 세운 사적비이다. 본래 비의 위치는 운봉초등학교 교문 앞 민가에 있었으나 어느 땐가 현 위치에 옮겨 방치하다가 1993년경 비석의 좌대(비좌)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 건립연대는 비문이 훼손되어 해독할 수 없다.
추만선생 신도비는 고남산 북쪽 기슭 권포리 정씨 선산인 불선재에 위치하고 있다. 추만 선생의 이름은 지운(之雲)이다. 학식이 뛰어나 일찌기 <천명도설>을 저술하고 1514년 퇴계선생과 강론하는 등 천지 조화의 이치를 연구하였다. 선조는 사후 예조판서를 추증하였으며 경기도 고양시 칠현사에 배향된 인물이다. 추만 선생의 묘소는 고양시에 있으며, 정씨 문중에서 부인인 해주 최씨의 묘소가 있는 현 위치에 신도비를 세웠다. 역사적인 사건의 흔적과는 거리가 다소 멀다하겠으나 우리 문향의 고을을 대표하는 출중한 인물로 죽헌(竹軒) 오승(吳陞)과 함께 사적비로 분류하였다.
황산대첩사적비와 기념비는 사적지 경내에 위치하며, 충혼탑비는 6․25 당시 지리산 공비 토벌 때 순국한 군인 42위와 경찰 72위 등 총 114위의 위령비로 1954년 8월 15일 당시 면장 박원용(朴元鏞)씨가 주축이 되어 건립하였다. 그 후 1993년 박영휘 면장이 주축이되어 서림 숲에 재건립하였다.
호은과 만은 사적비는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창의한 호은(湖隱) 김율(金溧)과 동생 만은(晩隱) 김결(金潔)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오선생신도비는 죽헌(竹軒) 오승(吳陞)의 신도비이다. 세종조에 한성부윤, 대제학, 판중추원사를 역임한 오승은 사촌 아우 충의 아들 오계종(吳繼宗)을 양자로 삼았다. 오계종은 집현전 학사로 뽑혔다가 단종이 세조에게 양위하자 운봉읍 산덕리로 내려와 여생을 마쳤다. 원래 인월중학교 앞에 세워졌던 것을 1981년 현 위치로 옮겼다.
내령리에 있는 순국경찰관합동묘비는 1951년 아영면 성리에서 민봉식 경감 외 경찰관 다섯명이 순국하여 1977년 갈계리에 다섯 위의 합동묘를 만들었으나 1977년 운성계원들이 현위치로 이장한 뒤 1985년 다른 순국경찰관 28위와 무연고 유골 17위 등 40위를 모아 순국경찰관 합동묘를 만들었다. 전사한 경찰관은 경무관 1, 경감 1, 경위 11, 순경 2, 경사 8, 무연고 17 등 40명이다.
나. 정려비(旌閭碑)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라 하였다. 그것은 사랑에서 비롯되며, 자식으로서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모없는 자식이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부모의 생사에 관계없이 자식으로서의 사랑을 다해야 한다. 효열 또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자 여인의 고난사이다. 그들은 가장 어려운 환경에서, 가장 열악한 가정에서 끈끈한 생을 포기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보다 시부모와 자식을 위해서 한 생을 바친 여인들의 고귀한 삶의 흔적을 그 후손들은 잊지 않고 기리고자 노력해 왔다. 그것은 곧 살아계실 때 뜻과 몸을 잘 받들고 돌아가신 후에는 부모를 잊지 않고 자신의 생이 다할 때까지 부모를 추모하며 혼신의 정성을 다 기우리는 이유이다. 이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고결하고도 자랑스런 이야기들이다. 지리산 자락에서 영산의 지기를 받아 우리 고장의 선인들 중 많은 효자 효부가 나왔다. 그 행적을 표시한 정려비를 찾아 정리하였다. 정려를 받고 비를 건립하지 않았거나, 훼손되었거나, 발견되지 않았거나, 효성을 다하였으나 겸손하여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효자 효부가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38기의 정려비를 정리 기록하였음을 양해바란다. 정려는 먼저 고을의 선비들이 고을 수령에게 천장(薦狀)을 올리면(향천-鄕薦) 다시 도(道)의 유림들이 관찰사에게 천장을 올려(도천-道薦) 그 천장을 관찰사가 예조에 올려 정려를 명 받게된다. 우리 고을에서 문헌상으로 예조로부터 실제 정려를 명받은(命旌) 사람은 현재까지 13명(효자 11명, 효열 2명)의 기록을 확인하였다.
<표 8-12> 정려비(旌閭비)
지역 | 순 | 분 류 | 마을 | 건립 | 비 명(碑面) |
운 봉 읍 (9) | 1 | 효자 | 임리 | 1760 | 효자충의장서일지비(孝子忠義張瑞逸之碑) |
2 | 효자 | 권포 | 효자경주정동실기적지려(孝子慶州鄭東實紀蹟之閭) | ||
3 | 효자 | 장동 | 1980 | 효자김해김순두기적비(孝子金海金淳斗行蹟碑) | |
4 | 효자 | 유평 | 1981 | 경은이천서공치동효행기적비(耕隱利川徐公致同孝行紀蹟碑) | |
? | 효자 | 행정 | 1889 | 효자동몽교관(童蒙敎官)조봉대부조석상지려(曺錫祥之呂) |
운 봉 읍 (9) | 5 | 효자 | 준향 | 연정풍산유공동규효행비(豊山柳公東奎遺墟碑) | |
6 | 열녀 | 양지 | 1615 | 조봉대부함양오공사종지처숙부인여흥민씨정려 | |
7 | 열녀 | 장동 | 1938 | 효열부밀양박씨기적비(孝婦密陽朴氏紀蹟碑) | |
8 | 열녀 | 가동 | 1937 | 효부이씨표려기(孝婦李氏表閭記) | |
9 | 열녀 | 장동 | 1980 | 효부밀양박씨기적비(孝婦密陽朴氏紀蹟碑) | |
동 면 (10) | 10 | 효자 | 자래 | 1883 | 효자통정대부현풍곽공기치려(孝子通政大夫玄風郭公期致閭) |
11 | 효자 | 구인월 | 1979 | 효자함평모공민환기행비(孝子咸平牟公玟煥紀行碑) | |
12 | 효자 | 인월 | 1945 | 효자박공노년실적비(朴公魯年實蹟碑) | |
13 | 효자 | 유곡 | 1946 | 효자사재영천이공유행비(孝子寧川思齋李公遺行碑) | |
14 | 효자 | 외건 | 1976 | 후릉참봉동복오공효행비(厚陵參奉同福吳公孝行碑) | |
15 | 열녀 | 상우 | 1966 | 평강채씨열부기적비 | |
16 | 열녀 | 인월 | 1979 | 정부인진양강씨(貞夫人晋陽姜氏)효행비 | |
17 | 열녀 | 상우 | 1878 | 효부나주라씨기적비(孝婦羅州羅氏紀蹟碑) | |
18 | 열녀 | 유곡 | 계묘 | 유인풍천노씨(孺人豐川盧氏)효열비 | |
19 | 열녀 | 건지 | 1992 | 효열부청주한씨기적비(孝烈婦淸州韓氏記蹟碑) | |
아영 (16) | 20 | 효자 | 서갈 | 1899 | 효자증동몽교관(贈童蒙敎官)조봉대부박문식(朴文植)지려 |
21 | 효자 | 일대 | 1869 | 달성서씨양대정려(達城徐氏兩代旌閭) | |
22 | 효자 | 율동 | 1878 | 효자증조봉대부호조좌랑경주김공남중(南重)지려 | |
아 영 면 (16) | 23 | 효자 | 외인 | 1988 | 효동함양오천복(吳天福)기적비 |
24 | 효자 | 봉대 | 1960 | 효자서산정공민사적비(孝子瑞山鄭公珉事蹟碑) | |
25 | 효자 | 봉대 | 1960 | 효손서산정공규용(圭龍)사적비 | |
26 | 효자 | 지치 | 1891 | 효자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오달환(吳達煥)지려 | |
27 | 효자 | 일대 | 1912 | 효자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양공계상지려 | |
28 | 효자 | 서갈 | 기묘 | 효자가선대부동돈령(同敦寧)함양박공원호(源灝)지비 | |
29 | 효자 | 부동 | 1985 | 운곡남원양공문옥(文玉)효자비 | |
30 | 열녀 | 서갈 | 1818 | 증절부인청송심씨(靑松沈氏)지려 | |
31 | 열녀 | 지치 | 1892 | 열녀증숙인오달환지처흥성장씨(興城張氏)지려 | |
32 | 열녀 | 인풍 | 1963 | 유인청도김씨효열기적비 | |
33 | 열녀 | 봉대 | 1980 | 풍산유씨효열기적비 | |
34 | 열녀 | 서갈 | 1970 | 이봉수여사 기념비 | |
35 | 열녀 | 율동 | 1993 | 김옥순(玉順)여효열찬양비 | |
산내면 (3) | 36 | 열녀 | 삼화 | 1945 | 학생김봉태(奉泰)처평강채씨(平康菜氏)효열실적비 |
37 | 열녀 | 내령 | ? | 김병호의 처 여흥민씨 열행비(烈行碑) | |
38 | 열녀 | 대정 | ? | 임동화처 오씨(도로확장공사로 훼손) |
* 정상․박조․양종복의 효자비는 미확인
<효자>
1) 곽기치 효자비
효자 통정대부 현풍 곽공기치려(孝子通政大夫玄風郭公期致閭).
곽기치 효자는 80여세의 부모와 눈이 먼 큰형 그리고 여동생 다섯이 한집안에서 살았다. 그런데 부모의 노병이 날로 심해지고 거동이 불편한 큰형을 함께 모시게 되었다. 이에 곽효자는 음식과 의복을 몸소 주선하여 똑같이 행하였으며 집안의 화목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점촌(연실)에서 태어나고 본디 글자를 알지 못하고 배운바 없으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는 행실은 독서하는 군자도 가히 행하기 어려운 바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가 내렸다(운성지). 1883년 효자비가 건립되었다가, 1979년 자래마을 주민의 성금으로 보수하였다.
2) 장서일 효자비
효자충의장서일지비(孝子忠義張瑞逸之碑).
본관이 흥성인 장서일(長瑞逸)은 본래 타고난 효성이 있어 어릴 때부터 부모를 섬김에 온힘을 기울이고, 성인이 되어서는 좋은 음식과 평안한 거처를 마련하는데 효성을 다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평소에도 그의 이름을 장효자로 불렀다. 부친이 병환이 심하여 민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말하자 한 겨울인데도 냇가로 나가 얼음을 두드리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자 정성에 감동한 물고기가 스스로 얼음을 깨고 튀어 나왔으며, 곰고기를 먹고 싶다고 말하면 스님이 짊어져 갖다 주었다. 끝내 부친의 병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드렸다. 임종 후 부모의 초상에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일이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원래 운봉초등학교 앞에 목조 효자문을 세웠으나 해방 후 관리의 어려움으로 마을 입구로 이전 하였다가 1983년 석조로 개조하였다. 1758년에 발간된 운성지 효자편에 기재되어 있다.
3) 조석상 효자비
효자 동몽교관(童蒙敎官) 조봉대부 조석상(曺錫祥) 지려.
경홍(敬洪) 조석상(曺錫祥) 본관은 창령이며, 효빈(效彬)의 11세손으로 1826년 준향리에서 출생하였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고 부친이 지병으로 여러 해를 고생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왼쪽 허벅지 살을 베어 육회를 만들어 올린 후 회생하였다. 또한 모친의 병환을 보살피는데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고 매일 안색을 살피고 똥맛을 보아 병증세를 살피어 완쾌하니 그 지극한 효성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일이 알려져 고종 23년(1886) 증직과 정려를 받고 고종 26년(1889)에 비를 건립하였다.
4) 박문식 효자비
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박문식지려(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朴文植之閭).
호 갈포(葛圃). 함양 사람.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났으며, 새벽으로 묘소를 찾아가면 범이 그를 보호하여 인도하였고, 저물녁에 돌아와 영전에 주과를 올릴 때면 귀신이 불을 밝혀 주었다고 한다. 1890년에 정려를 받고 1899년 비를 건립하였다.
5) 양계상 효자비
효자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양공계상지려(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梁公啓相之閭)
남원 사람으로 8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의 병환이 위중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드렸고, 이어 허벅지의 살을 베어 부친에게 드리자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도유(道儒)의 추천으로 윤허를 얻어 정려를 받았다. 1912년 일대 마을 입구에 비를 건립하였다.
6) 김남중(金南重) 효자비
효자증조봉대부호조좌랑경주김공남중(南重)지려.
호 신묵재(愼黙齋), 본관 경주. 지극한 효심으로 부모를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으로 앓아 눕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드렸으며, 시묘살이를 3년 하였었는데 도깨비불이 그의 앞 길을 인도하여 주었고 범이 보호하여 주었다. 노년에 백운산 아래에 거처하였는데 사림(士林)의 의논으로 조정에 이 사실이 알려져 조봉대부 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 이어 경오년(1870)에 정려(旌閭)를 윤허 받았다.
동치(同治) 9년(1870) 8월 아영면 율동마을에 정려비를 세웠는데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이조판서 판의금부사지 경연사 이의익(李宜翼)이 짓고,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조성교(趙性敎)가 지었다.
7) 오달환(吳達煥) 효자비
효자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오달환(吳達煥)지려.
본관 나주. 나주군 양평공 자치(羅城君 襄平公 自治)의 후예. 효행으로써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에 추증함. 고종 28년(1891) 8월에 정려를 받았다. 아영면 지치마을 입구에 부인과 함께 정려비를 세웠다.
8) 박노년(朴魯年) 효자비
효자박공노년실적비(朴公魯年實蹟碑).
본관 밀양. 타고난 바탕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웠는데,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부인 김씨와 함께 90노모를 모시면서 밭갈이와 길쌈질, 그리고 쌀을 구해 오며 고기잡이를 하면서 부모님의 뜻과 몸을 잘 받들었다. 어려서는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다. 모친이 우연히 병이 들어 위독하였을 때 밤마다 하늘에 축원하여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하였다. 어느날 밤 한 노인이 그를 불러 말하기를 “너의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병을 낫게 해 줄것이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 이튿날 아침 완쾌되어 천수(天壽)를 누렸다. 1945년 동면 인월마을에 그의 비를 세웠다.
9) 정동실 효자비
효자경주정동실기적지려(孝子慶州鄭東實紀蹟之閭).
호 이암(梨庵). 본관 경주. 추만 지운의 후예. 어려서부터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알고서 문안드리고 맛있는 음식으로 받들기를 정성으로 다하였고,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말씀드린 이후에 행하였다. 부친이 학질을 앓았을 적에 하늘에 축원하며 똥맛을 보았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하루를 회생시켰으며, 초상을 당하여서는 지극히 슬퍼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를 추천하여 정려를 세워 주었다.
10) 오치영 효자비
후릉참봉(厚陵參奉) 동복(同福) 오공(吳公) 치영(致泳) 효행비.
지암(芝庵) 오치영(吳致泳)은 동복, 창진(昌鎭)의 아들로 철종 1년(1850)에 출생하였다. 어려서 효성이 깊어 모친이 젖통이 아파 젖을 빨지 아니하였고, 성장하여 부친의 창저증(瘡疽症)에 그 농을 입으로 빨아 치료하였고, 모친의 지병에 뱀이 효험이 있다는 의원의 말에 한겨울에도 소리내어 통곡하며 사방을 찾아 헤메니 큰 뱀이 나타나 치료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자 효심을 다하여 삼년상을 치루고 홀어머니 모시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광무 2년(1898) 후릉참봉직과 1926년 경기대학장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976년 건지리에 비를 건립하였다.
11) 모민환 효자비
효자함평모공민환기행비(孝子咸平牟公玟煥紀行碑).
사복정(司僕正-궁중의 승여,마필, 목장을 관리하던 관청의 정3품 관직) 득홍(得弘)의 현손 상원(相原)의 아들 모민환(牟玟煥)은 성품이 순실하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수년간 모친의 병을 지성으로 돌보며 임종에 이르러 손가락에 피를 내어 마시게 하여(裂指注血) 3일간 연명케하는 효심을 보였다. 이로 인하여 1979년 운봉향교의 유림들의 추천으로 성균관 모성회(慕聖會)의 표창을 받았다. 동년 우씨 문중에서 마을 입구에 비를 검립하였다.
12) 달성서씨 양대정려(達城徐氏 兩代旌閭)
유학자 서유경(徐有敬)과 그의 아들 서한보(徐漢輔)의 효행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서유경은 민계공 침(黽溪公 沈)의 17대손이다. 양친을 효성으로 섬기어 부모의 뜻과 몸을 잘 받들어 효자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한보(漢輔)는 부친의 유지를 이어 효성을 다하였다. 그의 어버이가 오랜 동안 이름 모를 병환으로 앓아 눕자, 하늘에 기도하여 대신 죽기를 원하였고, 똥을 맛보며 병세를 증험하였다. 또한 밤낮으로 피를 내어 드리며 그 정성을 다하였다. 초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고종 6년(1869) 기사에 유학자 이병주(李炳柱) 등이 장계를 올려, 증 교관 정려(贈敎官旌閭)를 하사하였고,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의 기문(記文)이 있다.
13) 유동규 효자비
풍산유공동규(柳公東奎)유허비.
호 연정(烟汀). 본관 풍산. 이조참판 권(權)의 13세손. 타고난 천성이 온화하고 유순하였다. 효도를 극진히 다하여 맛있는 음식을 올려 인륜을 밝히는데 공로가 있어 향교유림의 표창이 있었다. 유씨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
14) 효동함양오천복(吳天福)기적비
함양 오씨 첨정공의 10대손 오상대(吳相大)가 부친의 제사에 쓸 천어를 잡으러 장수 식천 용추에 나갔다가 실족하여 물에 빠지자 15세 장남 오천복이 달려가 구하려다 함께 익사하였다. 남은 가족은 아영으로 이주하여 그 후손들이 효훈삼아 천복의 효동비를 아영 인풍에 세웠다.
< 효열 >
1) 오사종의 처 여흥 민씨 열녀비
열녀 조봉대부 함양오공 사종지처(嗣宗之妻) 숙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정려.
참봉 효원의 딸 민씨는 천성이 정숙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출가하여 조강지처의 덕을 다하고 시부모에 지극정성하니 집안이 두루 화목하였다. 또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정성으로 모시고 자녀교육을 의(義)로 하고 노비 거느림을 은혜로 하였다. 정유재란 때 남편이 창의하여 의병으로 순절하자 가정보존의 어려움을 알고 지리산으로 피난 도중 실상동(산내면 입석리) 부연(釜淵)이란 쏘 옆에서 왜적을 만났다. 그 때 민씨는 6살 된 남아를 데리고 있어 달려드는 적군을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급기야 어린 아이를 땅에 놓아두고 연못 바위 끝으로 나아가 아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를 위해 산다해도 차마 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모자의 사랑을 끊고 자결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달려드는 왜적을 향하여 꾸짖기를 ‘내가 남자 못되어 너희들의 목을베어 원수갚지 못함이 한스러울 뿐이다.’ 하며 부연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망연실색하던 왜적의 무리들이 감탄하고 성씨를 물어 ‘민씨투연(閔氏投淵)’이라 쓰고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한다. 이 일이 알려져 광해군 7년(1615)에 정려가 내렸졌으며 <속삼강행실>에 기재되어 있다.
2) 진양강씨(晋陽姜氏)효행비
가선대부 함평 모상원(牟相原)의 처 정부인 진양강씨(晋陽姜氏) 효행비.
강씨는 철종 11년(1860)에 출생하여 사복정(司僕正 - 궁중의 어가(御駕), 마필, 목장 등을 관리하던 관청의 정3품 관직) 득홍(得弘)의 현손 상원(相原)의 처로써 어려서부터 효순부모하고 현숙하였다. 출가하여 집안이 비록 가난하나 효성으로 시부모를 받들고 병구환을 하였으며 자손의 교육에 소홀함이 없어 모씨일문(牟氏一門)이 번창하였다. 모성회(慕聖會)의 표창을 받았다.
3) 청송심씨 효열비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이조 때 사람으로 결혼 3개월 만에 괴질을 앓던 부군과 사별 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위독한 시부모 생명을 소생케한 훌륭한 효부열녀라 전해지고 있다. 1818년 비를 건립하였다.
4) 풍천노씨 열녀비
영천 이회근(李會根)의 아내. 풍천 송재공의 후예. 광후의 딸.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하였고 돌아가신 분을 예절에 따라 극진을 다하였으며, 부군을 공경으로 섬겼다. 부군의 병환이 위독하였을 때 하늘에 기도하여 대신 죽기를 원하였고, 손가락의 피를 내어 주었다. 효도와 정열을 모두 갖추어 유림의 추천장이 있다.
5) 숙인 장씨 열녀비
열녀증숙인오달환지처흥성장씨(興城張氏)지려.
통정대부 나주 오달환(吳達煥)의 아내. 흥성 장흥조의 딸. 고종 29년(1892) 4월에 정려를 명하였다. 지치마을 입구에 남편과 함께 정려비를 세웠다.
6) 밀양박씨 열녀비
전주 이강임(李康任)의 아내. 밀성 박규위의 딸로 타고남 성품이 단아(端雅)하고 행동이 비범하였다. 출가하여 부군이 병이들자 하늘에 기도하여 대신 죽기를 기도하였고, 부군이 죽자 함께 죽기를 원하였으나 시부모와 어린 아이를 양육하고자 3년 상을 치루고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이에 1938년 장동 입구에 정려비가 세워졌다.
7) 김병호(金炳灝)의 처 여흥민씨 열행비(烈行碑)
글을 익힌 민씨는 부연골 김진사 집으로 출가하여 평소 예의범절을 잘 지켰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탄금대에서 전사하였다. 민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것을 단념하고 남편의 원한을 풀고자 남복(男服)을 하여 전쟁터에 나갔다가 자신도 남편을 따라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민씨의 충절을 높이 기려 정려를 하사하였다. 후에 마을사람들과 후손들에 의하여 산내면 영대마을에 비를 건립하였다.
8) 오씨(吳氏) 열녀비
양인 임동화(良人 林東華)의 아내. 임진왜란을 당하여 남편이 왜적에게 해를 당하자, 절개를 굽히지 않고 무덤 곁을 파고 따라 죽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흠앙(欽仰)하여 석벽에 이에 관한 사적을 기록하여 바위에 새겼다. 이는 산내면 대정리 배쏘(舟沼) 위에 있다. 지금은 도로 확장 공사로 훼손되어 확인할 수 없다.
9) 김봉태(奉泰)의 처 평강채씨(平康菜氏) 효열실적비
채씨는 남편 김봉태가 허리와 허벅지의 염증으로 고생하자, 병의 완쾌를 빌며 약초를 찾아 산과 들을 헤메며, 손수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는 등 온갖 고생을 감수하며 4개월 동안 정성을 다하였으나 보람도 없이 남편은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러나 28세의 젊은 미망인이 된 채씨는 노환으로 고통받는 시어머니를 위해 매일 품팔이를 하여 따뜻한 음식을 나르고, 대소변을 받아내는 등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러한 효행 사실을 후손에 길이 전하고자 운봉 향교의 주선으로 아들 김상엽씨가 삼화마을 입구에 1945년에 건립하였다.
10) 오윤재의 처 평강채씨 열부기적비(동면 상우리 183)
성품이 온후하고 효심이 극진한 채씨는 16세에 아영 당동에서 동면 상우리로 출가하였다가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뜨자 28세의 미망인이 되었다. 곧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남편의 혈육을 양육하여 대를 잇는 것이 도라 여기고 중위의 유혹을 떨치고 시부모님을 정성으로 모시며 열행을 다하였다. 그후 성균관 및 운봉향교의 포양(褒揚)으로 1966년 6월 아들 오세택이 동년 집앞에 비를 건립하였다.
11) 효부나주라씨기적비(孝婦羅州羅氏紀蹟碑)
최필요(崔弼龍)의 처 나씨는 시부모님을 지성으로 공양하다가 시부모님이 병을 얻어 고생하자 병간호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단지수혈로 5일을 연명케 하여 효부로써 최선을 다하였다. 그 후 유림들의 추천으로 운봉향교의 표창이 있었다. 1878년 후손들에 의하여 동면 상우리에 비를 건립하였다.
12) 풍산유씨효열기적비
유씨는 남원양씨 문중에 출가하여 술을 좋아하는 시아버지와 허약한 시어머니를 정성으로 모셨으며 시부모가 모두 돌아간 뒤에 남편이 지병으로 수년 동안 병간호를 하며 천지신명에게 빌었으나 끝내 남편은 회복하지 못하였다. 유씨 또한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어린 두딸을 양육하는데 정열을 쏟아 훌륭하게 성장시키고 지역개발에도 앞장서왔다. 1980년 1월 성균관장의 효행표창을 받아 그해 11월 아영 면민의 성금으로 효열비가 건립되었다.
13) 유인청도김씨효열기적비
김씨는 가사를 돌보지 않고 풍유를 즐기는 남편응 대신하여 집안 가사를 혼자 도맡아 꾸려나갔다.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앓아 눕자 3년간 병간호를 하였으며 별세하자 몹씨 슬펴하며 3년상을 치루었다. 남편 또한 괴질에 걸리자 정성을 다하여 병간호를 하였으나 끝내 사망하였다. 그후 김씨는 절망과 온갖 어려운 속에서 자녀를 훌륭히 양육하였다. 그 정절과 효열을 기리기 위해 1958년 8월 성균관장의 표창과 1959년 3월 전북향교재단 이사장 표창을 받아 1963년 4월 4일 박씨 문중에서 비를 건립하였다.
14) 이봉수여사 기념비
이씨는 정재진의 처로 정씨 문중에 출가하였으나, 시부모가 함께 병석에 눕자 산과 들을 찾아 약초를 구해 달여 봉양하였다. 그러나 백약이 무효하여 시부모 모두 끝내 별세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남편은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눕고 말았다. 이씨는 10년간을 온갖 병간호로 쾌유를 빌었으나 남편마저 빈곤한 가정만을 남긴채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이씨는 남은 자녀에게 마지막 도리를 다하고자 교육에 힘써 자녀를 훌륭히 키웠다. 이에 그 효열과 장한 모성애를 기리고자 1970년 10월 전군수(최봉채)와 국회의원(유광현)이 주체가 되어 아영면 월산리 구지마을 앞에 비를 세웠다.
다. 일반비
은둔의 개념은 학문과 행정능력을 갖춘 인물로서 때를 만나지 못한 불우했던 인물들로 이는 재야학자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아름다운 풍속으로 지칭되는 가운데 하나는 온나라의 사람들이 거의 시 한 수를 읊을 정도의 시인들이었으며, 그들은 곳곳에다 서재를 마련하고 그 누구 알아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독서와 교육과 삶을 추구했던 문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세상이 무도하였을 때 홀로 조촐히 몸을 지키는 독선기신(獨善其身)이었다. 그들은 혼탁한 세상에 나아가 몸을 더럽히며 사는 것보다는 뜻을 이루지 못할 망정 고상한 뜻으로 생을 마친 고결한 인물들이었다. 이분들은 운봉의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일구던 자신들의 작은 전기를 비(碑)에 새겨 남겼다.
이는 구름 속에 쌓인 지리산 자락의 신비한 정기에 의해 나타난 인물들임과 동시에 훌륭한 선현들이 많음으로써 그에 감화된 자제들이 그 흔적을 기록하고자 노력하는 효행으로 보아야 한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했던가. 그 비(碑)의 허실을 따지지 않고 여기에 수록함을 이해해야 한다.
<표 8-13> 지역별 일반비(碑) 현황 * ( ) 안은 추정년대.
지역 | 순 | 분 류 | 소 재 | 건 립 | 비 명(碑名) |
운 봉 읍 (23) | 1 | 유허비 | 장교마을 | (1840) | 강운김공유허비(岡雲金公遺墟碑) |
2 | 선덕비 | 서천서림 | 1638 | 어사심공동신선덕불망비(禦使沈公東臣善德不忘碑) | |
3 | 선정비 | 서천서림 | 1711 | 겸좌영장이영공석보무휼군졸선정비(碩輔憮恤軍卒善政碑) | |
4 | 불망비 | 서천서림 | (1700) | 비문훼손 해독불가, 좌영장의 비로 추정 | |
5 | 선정비 | 서천서림 | 1845 | 현감허후윤청덕선정비(縣監許候潤淸德善政碑) | |
6 | 불망비 | 서천서림 | 1904 | 행군수정후환종영세불망비(行郡守鄭候煥琮永世不忘碑) | |
7 | 흥학비 | 운봉향교 | 1823 | 현감이(李)후두현(斗鉉)청임흥학비 | |
8 | 불망비 | ″ | 1848 | 군수정(鄭)후종근(鍾根)청덕불망비 | |
9 | 불망비 | ″ | 1857 | 군수임(林)공진섭(震燮)모성불망비 | |
10 | 송공비 | ″ | 1877 | 군수배(裵)후석린(錫麟)청정립망영세송공비 | |
11 | 공적비 | ″ | 1914 | 전전교춘파박봉래공적비 | |
12 | 공적비 | ″ | 1914 | 유도회장정재김기대공적비 | |
13 | 기적비 | ″ | 1966 | 운봉향교도로이설기적비 | |
14 | 중수비 | ″ | 1973 | 운봉향교중수기 | |
15 | 공적비 | 행정마을 | 1978 | 송남박원용(松南朴元鏞)선생공적기념비 | |
16 | 공덕비 | 1993 | 전지사최용복(前知事崔容福) | ||
17 | 공적비 | 1996 | 전전교김종인․유도회장김용채 | ||
18 | 기적비 | ″ | 1978 | 전전교덕제서경원기적비 | |
19 | 기적비 | ″ | 유도회장춘원서상철기적비 | ||
20 | 기적비 | ″ | 1981 | 운봉향교명륜당중건기적비 | |
21 | 기적비 | ″ | 1984 | 대성전중건기적비 | |
22 | 생가터 | 비전마을 | 송흥록선생생가터비 | ||
23 | 자은비 | 엄계마을 | 1987 | 열녀나주임씨판례(判禮)여사자은비(慈恩碑) | |
24 | 자은비 | 엄계마을 | 1987 | 열녀전주이씨봉순(鳳順)여사자은비(慈恩碑) | |
25 | 친화비 | 연동마을 | 1990 | 연동친화비(蓮洞親和碑) | |
26 | 사탑비 | 군화마을 | 1990 | 남무대각세존석가모니불(남무대각세존석가모尼佛) | |
동 면 (13) | 27 | 선정비 | 인월마을 | 1866 | 현감강후우진청덕선정비(縣監康候祐鎭淸德善政碑) |
28 | 유혜비 | 서무마을 | 1904 | 박봉양궁휼유혜비(朴鳳陽窮恤遺惠碑) | |
29 | 불망비 | 월평마을 | 1934 | 중추원의관종이품가선대부박공중길(重吉)송덕불망비 | |
30 | 불망비 | 내건마을 | 1932 | 전교관조공병규선덕불망비(前敎官趙公丙奎善德不忘碑) | |
31 | 기념비 | 면사무소 | 1937 | 김창선치적기념비 | |
32 | 기적비 | 월평마을 | 계축 | 정은박옹봉민(靜隱朴翁琫玟)기적비 |
동 면 (13) | 33 | 기적비 | 월평마을 | 임술 | 영월정기적비 |
34 | 계원비 | 월평마을 | 1973 | 풍영계비 | |
35 | 공적비 | 성산마을 | 1987 | 달성서공정록공적비 | |
36 | 송덕비 | 건지마을 | 1983 | 동강동복오공재순송덕비(東岡同福吳公在純頌德碑) | |
37 | 불망비 | 명석치 | ? | 현감남후□□영세불망비 | |
38 | 유적비 | 인월중고 | 1985 | 동강오재순선생유적비 | |
39 | 공적비 | 인월고교 | 1976 | 오재순선생공적비 | |
40 | 공적비 | 용동폭포 | 1926 | 운강동복오공병길씨사성(雲岡同福吳公炳佶氏社成)공적비 | |
41 | 행적비 | 인월교옆 | 고하사박윤기행적(故下士朴允基行積)비 | ||
42 | 로타리탑 | 팔랑치 | 1990 | 국제로타리3670지구남원함양지리산로타리 | |
아 영 면 (23) | 43 | 계원비 | 아곡리 | 1975 | 아곡수양전진계(修養前進稧)기적비 |
44 | 불망비 | 매산부락 | (1800) | 전승지박공정규(前丞旨朴公定圭)불망비 | |
45 | 불망비 | 외인마을 | 1911 | 죽포(竹圃)양공주칠(柱七)시은(施恩)불망비 | |
46 | 유허비 | 아곡마을 | 계거오공유허비(溪居吳公遺墟碑) | ||
47 | 유거비 | 아곡마을 | 지소유거비(止巢幽居碑) | ||
48 | 공적비 | 내인마을 | 1973 | 화운(華雲)오공정주(珵注),운사(雲蓑)박공경래(慶來)기념비 | |
49 | 추모비 | 봉대마을 | 1987 | 열락재창계(悅樂齋創契)공적추모비 | |
50 | 공적비 | 아곡마을 | 1975 | 전계장두산재령이공두현(斗鉉)공적비 | |
51 | 계원비 | 봉대리 | 1977 | 백수계비 | |
52 | 추모비 | 고인마을 | ? | 죽헌(竹軒)송선생(청계서원터) | |
53 | 추모비 | 고인마을 | ? | 제안제(濟安齊)형선생(청계서원터) | |
54 | 불망비 | 서갈마을 | 신사년 | 희종모선보종(喜宗慕先補宗)불망비 : 박문환 비 | |
55 | 시혜비 | 서갈마을 | 계해년 | 신사박문환(文煥)시혜비 | |
56 | 공적비 | 서갈마을 | 경진년 | 계석(溪石)박공문환(文煥)공적비 | |
57 | 실적비 | 서갈마을 | 신사년 | 계석족인(族人)문환모선보종실적비족 | |
58 | 불망비 | 서갈마을 | 임신년 | 박공장환(丈煥)선덕불망비 | |
59 | 공적비 | 서갈마을 | 경진년 | 우석(友石)박공장환공적비 | |
60 | 실적비 | 서갈마을 | 신사년 | 우석족장환모선보종실적비 | |
61 | 불망비 | 서갈마을 | 갑인년 | 전의관(議官)박공용근(容根)시혜불망비 | |
62 | 유적비 | 고인마을 | 1983 | 세진대(洗塵臺)계원유적비 | |
63 | 불망비 | 일대마을 | 임신년 | 전주사양공교식(敎植)선덕불망비 | |
64 | 시혜비 | 일대입구 | 1910 | 면장김윤한(允漢)시혜비 | |
65 | 공적비 | 자래마을 | 1947 | 박봉래공적불망비(朴琫來功蹟不忘碑) | |
66 | 공적비 | 봉대마을 | 1985 | 청도김공선생정재․기대공적비 | |
67 | 공적비 | 아곡마을 | 1987 | 재령이공선생동호수홍공적비 | |
68 | 유거비 | 일대마을 | (1800) | 임운초유거(林雲樵幽居) | |
69 | 공적비 | 아영초교 | 1989 | 동복오공동강오재순공적비-아영초등학교 60주년기념사업 | |
산내 | 70 | 시혜비 | 실상사입구 | 부인박정연(朴淨蓮)시혜비 |
7. 불상과 석탑
4개 읍면에 현존하는 오래된 석불은 정령치 마애여래상군과 여원치 마애여래입상을 들 수 있다. 불상으로는 실상사 목조 아미타불상, 실상사 금동여래좌상, 실상사 관세음보살입상, 실상사철조약사여래가 있으며 석탑은 여러곳에 산재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도난당하고 그 터만이 조사되고 있을 뿐이다.
<표 8-14> 불상 현황
순 | 유 적 명 | 유 적 소 재 지 | 지 역 구 분 |
1 | 정령치 마애여래상군 | 덕동리 정령치 | 산 내 면 |
2 | 실상사 목조 아미타불상 | 입석리 실상사 | |
3 | 실상사 금동여래좌상 | 입석리 실상사 | |
4 | 실상사 관세음보살입상 | 입석리 실상사 | |
5 |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 입석리 실상사 | |
6 | 여원치 마애여래 입상 | 양가리 여원치 | 이 백 면 |
<표 8-15> 석탑현황
순 | 유 적 명 | 소 재 지 | 비 고 | 지 역 |
1 | 탑골 3층 석탑 | 권포마을 고남산 탑골 | 지대석 현존 | 운봉읍 |
2 | 탑시기 석탑 | 가산리 점촌마을 북쪽 | 훼손 | |
3 | 아곡리 4층 석탑 | 아곡마을 앞 탑거리 | 일제 때 도난 | 아영면 |
1) 정령치 마애여래상군
정령치 고개 정상에서 동쪽으로 비껴 100m 정도 고리봉 쪽으로 가면 단면이 삼각형으로 된 두 개의 바위가 붙어 있는데 이 바위의 남면에 불상이 양각되어 있다. 두 바위 사이에는 골이 나 있으며 그 골에는 관목이 자라고 있다. 이 바위에는 6구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서편 바위에 가장 큰 마애여래입상이 양각되어 있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나발에 큼직한 육계를 얻고 있으며 이마의 점(백호)은 5cm 정도 돌출하였고 양쪽 눈과 눈썹은 희미한 편이다. 목은 짧으나 3도가 조각되었고 어깨는 수평으로 처리하여 경직감을 준다. 법의는 통견으로 하였으나 수인과 의문은 확실치 않다. 현재 오른쪽 오른쪽 허리 부분 부터 아래로 바위가 크게 떨어져나간 상태이다. 실측치는 머리높이 1.25m, 어깨넓이 1.5m이다.
동편의 불상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두부의 길이에 비하여 신체의 길이가 짧아 균형이 깨져 있고 어깨도 좁은 편이다. 실측치는 머리높이 1.4m, 어깨넓이 1.5m, 총 높이 4.15m이다.
불상의 왼편에는 자경 20cm의 크기로 월지불(月智佛) 또는 명월지불(明月智佛)이라는 명기가 새겨졌다.
두 구의 불상 하단에 4구의 조그마한 여래좌상이 새겨져 있으며 이 두개의 바위 외에 위쪽으로 이어진 바위들이 있는데 이 바위에서도 희미하나 3개의 불상이 양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불상 모두가 독존으로 새겨져 있고 모두가 여래상이다. 따라서 이 여래상들은 총체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의미로 새겨졌다고 보고 있다.
불상의 조각 연대는 신라말과 고려 초보다 약간 떨어지는 후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원지, 1994>
2) 실상사 목조 아미타불상
실상사 극락전은 지방유형문화재 45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84년에 중건한 것이다. 이 건물 안에는 현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으로 앉은 키 116cm, 어깨넓이 53cm, 슬폭 85cm의 불상으로 두부에는 큼직한 육계가 얹혀 있고 백호가 있다. 귀는 보통 크기이며 상호의 윤곽이 뚜렷하다.
목에는 3도가 처리되었고, 조각 연대는 극락전의 중창연대와 동일 시기로 추정된다. 후불탱화는 금은을 써서 가는 선을 써서 그린 탱화로서 특색이 있다. 이 탱화는 274×244cm로서 건륭 14년 경오월이라 명기되어 있다.
3) 실상사 금동여래좌상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여래좌상은 총 높이 135cm 어깨넓이 75cm, 무릅넓이 88cm, 두부 45cm의 형태이다. 머리는 육계와 나발 및 3도 처리가 되었다. 법의는 통견의이고 가슴 바로 밑부분에 조식된 연꽃잎이 무릅으로 흘러 내렸으며 결과부좌하고 있다.
4) 실상사 관세음보살 입상
총 높이 147cm, 어깨폭 41cm, 두부 41cm인 관세음보살입상은 조선시대 작품이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목에는 3도 처리가 되어 있다. 수인상의 왼손은 가슴 위로 들어 올리고 오른손은 내려서 옆으로 나온 옷자락을 쥐고 있으며, 옷자락 밑으로 발바닥이 보인다.
5) 실상사철제 여래좌상(實相寺鐵製 如來坐像)
신라 흥덕왕 3년(829년)에 처음 절을 지어 실상사 극락전 내에 안치된 불상으로서 다른 불상과는 달리 쇠로 만들어진 여래 좌상으로 높이 2.69m에 이르는 아주 빼어난 작품이며 쇠로 만들어 졌기에 수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화재에도 견뎌 내었고 실상사파의 2대조(二代祖)인 수철 국사가 석탑(실상사 내)과 함께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 여래좌상은 4천근의 철로 만들어진 아주 큰 불상으로 그 양식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6) 여원치 마애여래입상(女院峙 磨崖如來立像)
남원(南原)에서 운봉(雲峰)간 여원치(女院峙) 도로(道路) 밑 남쪽으로 향한 바위 위에 새겨진 여래상(如來像)이다. 이 암면(岩面)은 폭(幅) 6.0m 높이(高) 3.0m이다. 불상(佛像)의 무릎부분 아래가 매몰되어 있어 그 상태를 알 수 없다. 드러나 있는 불상의 높이는2.42m, 머리높이(頭高) 0.91m, 어깨폭 1.09m, 두광폭(頭光幅) 1.1m이다. 머리에는 두광(頭光)을 음각(陰刻)하였고, 두상(頭上)은 소발(素髮)로써 육계가 넓으며 두 귀는 크게 쳐져 어깨에 닿았으며, 턱의 윤곽이 뚜렷하여 그 밑에 삼도(三道)가 있다.
어깨는 넓고 강건하며, 법의(法衣)는 통견(通肩)으로 두텁게 표현하였고, 의습(衣褶)은 앞가슴에서 반전(反轉)된 의단(衣端) 아래에 나란히 음각하였는데 두 팔에도 옷의 무늬를 새겼다. 각선(刻線)은 밑으로 내려 올수록 흐려져서 복부(腹部) 아래는 매우 희미하여 좌상(坐像)인지 입상(立像)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오른 팔은 안으로 굽혀 가슴에 대고 내장(內掌)하였는데 몸에 비하여 작은 편이며, 왼쪽 팔은 팔꿈치 아래에서 절단되어 분명치 않다. 바위에서 1.41m 떨어진 전면 좌우에 쌍주(雙柱)가 서 있고, 그 중간 전면에는 상석(上席)이 놓여 있다.
쌍주는 현재 높이 0.94m이며 3단(段)으로 다듬어져 있는데 방형지대석(方形地臺石)위에 높이(高) 0.35m, 한변의 폭(一邊幅) 0.4m의 방형석주(方形石柱)를 다듬고 그 윗 부분은 높이(高) 0.58m, 한변의 폭 0.16m의 8각주(八角柱)를 이루고 있다. 쌍주는 거의 같은 형태를 하고 있으나 방형주(方形柱) 부분에는 서로 마주 보는 내측면(內側面)과 암석을 향한 후측면(後側面)에 깊이 3.5cm, 넓이 10×15cm의 네모난 구멍이 있어 이는 쌍주와 함께 산신각을 건립한 흔적으로 보인다. 마애여래상은 산신령이라는 전설이 있다. 암벽에 산신각의 건립 내용을 새긴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릇 이 산의 조상은 덕유산으로 지리산에 산맥이 이어졌다. 여원이라 함은 무슨 뜻에서 취한 것인가. 길가 돌에 여자 형상을 조각해 두고 또 집을 지어 이를 기렸으나 뒤가 파괴되고 주추돌이 아직 남아 있다. 이것 때문에 지명을 여원이라 지었는가? 그렇다면 누구의 형상인가? 운성지를 고찰하건대 기사년(고려 공민왕) 우리 조선 시조 어른 이성계께서 왜구 정벌 대장의 직책을 받고 동쪽 일본의 적을 정벌할 즈음 이 고개 오른쪽 길가에 할머니가 있어 대승리의 날짜를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이는 진실로 산신이 나타나심이 뚜렸하다. 그런 까닭에 형상을 새겨두고 집을 지어 산신을 받들었다. 이는 틀림없이 우러러 사모하는 사적이 되었다. 옛 어른들의 전해오는 이야기가 오백년에 이르러도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즉 집은 무너지고 다만 그 형상만 남아서 비바람의 침노를 면치 못하고 이끼가 끼었다.
내가 여기를 찾아보니 감정이 일어나 이를 자세히 살피고 씻어내보니 완연히 산신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공장(工匠)을 불러 다듬고 옛 주춧돌 따라 기둥을 세우고 대들보를 걸치니 새로 보는 기쁨이 있구나. 광무 5년(1901) 운봉현감 박귀진(朴貴鎭) 기(記)」- 전라일보(1989. 8. 23)
즉, 마애여래상은 산신의 형상이며 고려조에 이성계장군의 황산대첩을 계시한 전설을 담고 있다. 옛 산신각을 1901년 운봉현감 박귀진이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8. 전적지
삼국시대부터 6.25 동란에 이르기까지 운성지역의 전적지는 다음과 같다.
<표 8-16> 전적지 현황
순 | 유 적 명 | 소 재 지 | 전 투 내 용 | 지역 |
1 | 황산대첩비 | 인월리 황산 일대 | 고려 우왕 6년 왜구격퇴 | 운봉읍 |
2 | 방어치 | 장교산성 북쪽 | 1894년 동학군 전투 | |
3 | 관음치 | 가동 - 부동 고개 | 1894년 동학군 전투 | |
4 | 아막성 | 성리 상성마을 | 신라와 백제전투 | 아영면 |
5 | 팔랑치합미성 | 성산마을 동쪽 | 임진왜란 때 왜적 격퇴 | 동 면 |
6 | 지리산전적비 | 부운리 반선 | 국군과 빨치산 전투 | 산내면 |
9. 절터
삼국시대의 사찰은 호국불교의 영향으로 주로 산성의 안팎에 위치하였다. 그 곳에서 수도하던 승려들은 유사시에 승병이 되어 나라를 위하여 싸웠다. 그래서 운봉 4개 읍면지역에 위치했던 절터는 산성 주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어 삼국시대 축성된 산성의 위치와 일치하고 있다.
<표 8-17> 지역별 절터 현황
번호 | 사 지 명 | 소 재 지 | 지 역 |
1 | 여원치 절터(마애여래상) | 여원치 병막동 | 운 봉 읍 (9) |
2 | 탑동 절터 | 권포리 탑골 | |
3 | 탑석골 절터 | 가산리 점촌 | |
4 | 황산 절터 | 가산리 황산 | |
5 | 가장 뒷산 절터 | 가장리 | |
6 | 옥림사지 | 산덕리 | |
7 | 장계암터 | 산덕리 | |
8 | 고남산 절터 | 고남산성 내 북쪽 | |
9 | 중상골 절터 | 장교리 중상골 |
* 표은암 터 : 운봉읍 산덕리 향교 뒷산(진사 오상복 건립)
* 원수사 터(미확인)
10 | 토골 절터 | 아곡리 아곡 | 아 영 면 (6) |
11 | 뒷골 절터 | 갈계리 | |
12 | 부동 절터 | 일대리 부동마을 점터골 | |
13 | 매산 절터 | 인풍리 매산마을 뒷산 | |
14 | 터골 절터 | 월산리 신지마을 터골 | |
15 | 이화사 절터 | 두락리 두류봉부처골 | |
16 | 연비산 작은 절터 | 유곡리 연비산 작은 절골 | 동 면(9) |
17 | 연비산 큰 절터 | 유곡리 연비산 큰 절골 | |
18 | 백련암터 | 중군리 덕두봉 돌재 | |
19 | 수성암터 | 중군리 덕두봉 불당골 | |
20 | 상우절터 | 상우리 솔밭거리 | |
21 | 구인월 절터 | 덕두봉 아래 구인월 쪽 | |
22 | 매봉골 절터 | 취암리 매봉골 남쪽 | |
23 | 선암 절터 | 성산리 상여바위 아래 | |
24 | 장자동 절터 | 중군리 장자동 | |
25 | 정령치 절터(마애여래상) | 정령치 북쪽 골짜기 | 산내면 (13) |
26 | 청련암터 | 백일리 백운산 | |
27 | 내원암터 | 부운리 반야봉 | |
28 | 죽천사터 | 내령마을 | |
29 | 정각사터 | 덕동마을(삼국시대) | |
30 | 병인암터 | 백일리 백운산 골짜기 | |
31 | 배암사터 | 반선(전적기념관터) | |
32 | 만복대절터 | 만복대 샘골 절터 | |
33 | 삼봉산절터 | 상황리 삼봉산에 위치 | |
34 | 남산절터 | 입석리 실상사 남쪽 | |
35 | 백운사터 | 이동마을 마목대 | |
36 | 묘향암터 | 부운리 반야봉 | |
37 | 원수사터 | 원천리 |
10. 정자
옛사람들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은 자연의 산수 속에서 인성(人性)을 함양하고 강학(講學)의 수양을 통해서 보다 여유있는 생활을 향유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개인의 누정이라 할지라도 공공적으로 사용되어 모든 이의 소유물과 다름없이 공유되어 되었다. 이는 오늘날 개인 별장의 소유 개념과 너무 다른 것이어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운성지>
<표 8-18> 정자 현황
순 | 정 자 명 | 소 재 | 존립시기 | 설립자 | 지역 |
1 | 칠 송 정 | 산덕리 삼산(추정) | 1633년대 | 강극서 | 운 봉 읍 |
2 | 백 화 정 | 산덕리 삼산. 칠송정 터에 건립 | 1700년대 | 오시하 | |
3 | 운 악 정 | 신기리 구암 | 1961년 소멸 | 박봉규 |
4 | 수 석 정 | 청계리 청계대 아래 | 1900년대 | ? | 아영면 |
5 | 회 운 정 | 일대리 | 1922년대 | 임병찬 | |
6 | 도 탄 정 | 삼화마을(추정) | 1590년대 | 변사정 | 산 내 면 |
7 | 운 제 정 | 도탄정 아래 | 1590년대 | 노형필 | |
8 | 몽 유 정 | 운제정 아래 | 1700년대 | 이해창 | |
9 | 월 탄 정 | 산내동 | 1700년대 | 변희영 | |
10 | 퇴 수 정 | 대정리 매동 | 현존 | 박치기 후손 |
가. 문헌상에 나타난 누정 - 운성지
칠송정(七松亭) : 고을 남쪽 5리에 있는데 만력 계유(1633)년간에 서울 사람 강극서(姜克恕)가 이곳에 머물면서 집 주위에 일곱 그루 소나무를 심고 시로써 스스로 즐기고 살았으며 취선이라는 기생이 있었는데 거문고와 시에 능하였다.
백화정(百花亭) : 칠송정 옛터에 고을 사람 오시하(吳始厦)가 누대(정자)를 세우고 꽃을 심으며 시를 읊으며 거처하였다.
도탄정(桃灘亭) : 고을의 동쪽 산내면에 있는데 증장령 변사정(贈掌令邊士貞)이 은거한 곳이다. 남원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여울가에 복숭아 나무를 심고 스스로 아호를 삼았다.
운제정(雲堤亭) : 도탄정 아래에 있었으며 사부 노형필(師傅盧亨弼)이 거처하던 곳이다. 함양에서 이곳에 와 살면서 소요하며 자호를 삼았다.
몽유정(夢遊亭) : 운제정 아래에 있는데 사간 이해창(李海昌)이 귀양살이 하면서 지은 곳이다.
월탄정(月灘亭) : 산내동에 있는데 옛 몽유정 터에 그 고을사람 변희영(卞希瑛)이 거처했던 곳이며 아래에 깊은 연못과 맑은 여울물이 있어 달이 뜨면 더욱 아름다와 그 이름을 월탄정이라 하였다.
회운정(晦雲亭) : 아영면 일대마을에 있었다. 그 고을 운초(雲樵) 임병찬(林炳讚)이 지었다.
운악정(雲岳亭) : 운봉면 신기마을 앞 구암(현재 초봉) 위에 있었다. 승지(承旨) 박봉규(朴奉圭)가 지은 정자. 그의 아호는 난사(蘭史)이다. 정자의 동편 석벽 위에서 시모임을 가져 왔는데, 계원 49인의 이름이 석벽에 새겨져 있다. 당시 정자는 1960년 경 이백면 양가리 장씨 제각 재목으로 팔렸다.
수석정(漱石亭): 돌은 스스로 돌이라 이름할 수 없다. 돌이라는 이름을 부친 것은 사람들에 의한 것이다. 옛적에 석만경(石曼卿)은 석(石)으로 성씨를 삼았고, 사안석(謝安石)은 석(石)으로 이름을 삼은 바 있다. 청계대(淸溪臺) 아래, 좌우에 널찍한 반석이 있는데, 길가는 나무꾼과 시인 묵객들이 머물 만한 곳이었다. 한산 박인엽(瀚汕 朴仁燁), 김봉규(金奉奎), 구태봉(具泰奉) 등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시냇물에 귀를 씻고 돌로써 자신들의 노년의 나이를 격려하였으니 어찌 옛적 손초(孫楚)만이 그 아름다움을 독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 하나의 정자를 세워 ‘수석(漱石)’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나. 현존 누정-정자
1) 영월정(迎月亭)
소재 : 남원시 동면 인월리
건립 : 1957년(동면, 아영면, 산내면 주민 75명이 발기하여 건립.
초대회장 : 박봉문(朴琫玟)
계답 : 10두락
행사 : 년 2회 총회 개최(봄․여름)
2) 여원정(女院亭)
소재 : 여원재
구조 : 육각기와지붕. 2평. 14계단.
3) 퇴수정(退修亭)
소 재 :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652 매동. 반선대 남쪽.
건 립 : 1927년 관찰사 원계관(元寬繼)이 창건.
내 용 :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의 자손들이 그 선조의 유적을 추모하여 그곳에 정자를 건축, 사모의 정을 표하였다. 정자의 이름은 당시 은퇴의 뜻을 천명하여 퇴수(退修)라고 명명하였다. 그 집안의 박완경(朴完卿), 완산 이명상(李明翔), 안동 권도용(權道溶), 풍천 노보현(盧普鉉)의 기문(記文)이 있고, 월성 이규남(李圭南)의 상량문이 있음. 1922년봄 고을의 모든 선비들이 의논하여 그 해 4월 15일 처음으로 선비들의 계모임을 열고 협소한 퇴수정의 좌편을 가리어 관선재 4칸을 더 증축하였다. 정자를 비추는 밝은 달, 들보에 스쳐가는 맑고 시원한 바람, 서늘한 툇마루와 아늑한 집은 주위의 시냇물과 암석과 경관을 다 조망할 수 있다.
4) 봉래정(蓬萊亭)
소재 : 아영면 자래리 이평.
건립 ; 박봉래(朴琒來)
5) 용복정(龍伏亭)
소재 : 남원시 동면 유곡리 산 266 - 1 번지
건립 : 건지․유곡․성내․자래․인월 일원에 거주하는 104명 계원이 1997년 건립.
다. 마을 정자
<표 8-19> 지역별 현존 마을 정자
* 정자명이 없는 경우 마을 이름을 붙여 < >로 묶어 표기하였다.
순 | 정자명 | 건립년도 | 위치 및 규모 | 지역구분 |
1 | 구룡정(龜龍亭) | 1985 | 운봉읍 장교마을 노인정 | 운봉읍 |
2 | 덕운정(德雲亭) | 1990 | 산덕마을(팔각형, 10평) | |
3 | <공안정> | 1995 | 공안마을 | |
4 | <권포정> | 1989(개축) | 권포마을(사각콘크리트, 7평) | |
5 | 영풍정 | 1979 | 신마을 동편(양기상씨 건립) | |
6 | <용산정> | 1980 | 용산마을(팔각형, 4평) | |
7 | <장동정> | ? | 장동마을 | |
8 | 향화정(香化亭) | 1993 | 준향마을 중앙(팔각기와) | |
9 | <소석정> | 1976 | 소석마을(사각정자, 3평) | |
10 | <전촌정> | 1993 | 전촌마을(사각정자, 3평) | |
11 | 지산정(芝山亭) | 1980 | 내건마을 앞 | 동 면 |
12 | 영지정(榮芝亭) | 1988 | 외건마을 회관 우측 | |
13 | 계암정(桂岩亭) | 1994 | 계암마을 앞(11평) | |
14 | 인월정(引月亭) | 1993 | 신인월 풍천변 | |
15 | 월광정(月光亭) | 1994 | 월평마을 앞 | |
16 | 사진정(思陣亭) | 1989 | 중군마을 (10평 목조) | |
17 | 흥부각(興夫閣) | 1996 | 성산마을 방죽 | |
18 | 성산정(城山亭) | 1996 | 성산마을(5평 목조) | |
19 | 취비정(鷲飛亭) | 1988 | 취암마을 입구(목조) | |
20 | 농월정(弄月亭) | 1981 | 서갈마을 | 아영면 |
21 | <두락정> | 1996 | 두락마을 | |
22 | 계림정(鷄林亭) | 1975 | 유곡리 146(계유생 5인 건립) | |
23 | <율동정> | 1995 | 율동마을(5평 목조) |
24 | <의지정> | 1980 | 의지마을(5평 목조) | 아영면 |
25 | 벽송정(碧松亭) | 1997 | 인풍리 551-2 | |
26 | 매림정(梅林亭) | 1995 | 매산마을 | |
27 | 경모정(敬慕亭) | 1978 | 청계리 230. 고인마을 입구 | |
28 | 아용정(阿容亭) | 1996 | 아곡마을 | |
29 | 선유정(仙遊亭) | 1989 | 일대리 337번지 | |
30 | <외지정> | 1977 | 외지마을(사각 기와지붕) | |
31 | 대운정(大運亭) | 1990 | 대정마을 앞 천변(7평 목조) | 산내면 |
32 | 매향정(梅香亭) | 1988 | 대정리-445 매동(10평 목조) | |
33 | 선유정(仙遊亭) | 1995 | 중기마을 입구(3평 목조) | |
34 | 선학정(仙學亭) | 1995 | 백일마을(6평) | |
35 | 삼화(三花)노인정 | 1994 | 삼화마을 | |
36 | 사선정(思仙亭) | 1992 | 장항마을 동편(15평 목조) | |
37 | 황강정(黃岡亭) | 1992 | 하황마을 서편(3평 목조) |
11. 석대(石臺)
계(契)는 삼한시대부터 전해오던 우리 선조들의 오랜 관습으로 상호부조라는 주된 목적아래 취미 또는 생활 양식의 공통분야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공동유희․제례․회음(會飮) 등으로 널리 성행하며 전래되던 상부상조의 민간협동체였다. 시대가 흐르면서 계는 그 성격이 다양해졌다. 각종 사업을 운영해가는 공공재단으로, 두레와 같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영리 목적으로, 상호친목을 도모하는 등 현재에도 각종 계모임이 성행하여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계원들은 풍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 그곳 석대에서 즐겨 모임을 갖곤하였는데, 계의 결속을 다지는 의미에서 그곳 암벽에 계의 이름은 물론 계원의 이름을 바위에 새겨 후손에게까지 그 전통을 이어받기를 바랬다.
운봉 4개 읍면 곳곳에는 이러한 석대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온후한 우리 선조들이 상부상조와 안빈낙도를 추구하는 흔적을 찾아 소개하였다.
<표-20> 지역별 석대 현황
번 호 | 유 적 명 | 소 재 지 | 지역구분 |
1 | 엄거대(嚴居臺) | 행정리 엄계 마을 | 운 봉 읍(2) |
2 | 수청대(水淸臺) | 화수리 황산 아래 | |
3 | 청계대(淸溪臺) | 청계리 | 아 영 면(6) |
4 | 양영대(養英臺) | 봉대리 봉대 부락 | |
5 | 읍청대(挹淸臺) | 인풍리 내인풍 | |
6 | 봉암대(蜂巖臺) | 아곡리 아곡 | |
7 | 기암대(機巖臺) | 아곡리 천황봉 | |
8 | 세진대(洗塵坮) | 청계리 | |
9 | 조대(釣坮) | 일대리 | |
10 | 방고대(榜告臺) | 아곡리 방현 |
11 | 영월대(迎月臺) | 인월리 | 동 면(2) |
12 | 양진대(養眞臺) | 인월리 용계 부락 | |
13 | 용복대(龍伏臺) | 유곡리 산 266-1 | |
14 | 도위대(道偉臺) | 유곡리 도장 | |
15 | 천보암대(天寶岩臺) | 황산국도변 혈암 옆 | |
16 | 반선대(伴仙臺) | 대정리 매동 | 산 내 면(9) |
17 | 방선대(訪仙臺) | 대정리 매동 | |
18 | 소년대(少年臺) | 대정리 매동 | |
19 | 삼선대(三仙臺) | 대정리 매동 | |
20 | 세진대(洗塵臺) | 대정리 매동 | |
21 | 노인암(老人巖) | 대정리 매동 | |
22 | 세심대(洗心臺) | 대정리 매동 | |
23 | 지방암(智方巖) | 장항리 | |
24 | 황강대(黃江臺) | 대정리 중기 부락 | |
25 | 영귀대(詠歸臺) | 대정리 원백일 | |
26 | 황강대(黃岡臺) | 백일리 동수 | |
27 | 귀령대(龜鴒臺) | 백일리 하황 | |
28 | 의은대(疑銀臺) | 입석리 삼화마을 소동폭포 | |
29 | 관란대(觀瀾臺) | 대정리 매동 반선대 아래 |
1957년 발간된 <운성지>에 기록된 석대를 옮겨 적는다.
엄거대(嚴居臺) : ‘고을 남쪽 2리에 너럭바위가 누대를 이루고 앞에는 7리의 맑은 시냈물이 감싸 흐르고 있다.’고 적고 있다. 정확한 위치는 고증할 수 없지만, 엄계마을에 과거 명암(銘巖)이라 불리고, 임진왜란 때 의병 서식(徐湜)이 거처했다는 현재 낚시바위로 추정되고 있다.
청계대(淸溪臺) : 과거 아영의 명승지로 운성지에 의하면 청계도사(淸溪道士) 가 머물렀다 한다. 좌우 널따란 반석 위에는 수백 사람이 앉을 만 하고, 또한 한 줄기 폭포수는 금강산 구룡폭포에 비하여 손색이 없을만큼 경관이 뛰어났다. 오뉴월 무더위에 한 주발 냉수를 마시고 한 차례 목욕을 하면 고질병까지도 치유되어 사람들은 이를 약수폭포, 또는 탕곡약수라 하였다. 1939년 청계저수지가 축조되고 나서 수량이 줄고 주변 경관이 훼손되었다.
양영대(養英臺) : 봉대리 마을 뒤쪽 개울 제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산림이 깊고 전망이 아름답다. 유학자 취방재 김헌(醉放齋 金獻)이 머물던 곳이며, 그의 현손 농은 김동열(農隱 金同烈)이 ‘양영대’ 세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
봉암대(蜂巖臺) : 아곡마을 앞에 있다. 기암절벽의 절경들이 마치 벌떼들이 오가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인 이수봉(李壽奉), 오형철(吳瀅澈) 등이 수계(修契)하여 105명이 이곳에서 노닐며 시를 읊었다.
기 암(機 巖) : 아영면 아곡리 천황산 옥녀봉 위에 있다. 운성지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바위만은 우뚝 서 있다. 둥근 덮개가 덮여 있는데, 그 넓이는 백 사람이 앉을 정도이다. 검인암(釰刃岩), 직립암(直立岩)의 높이는 100척이 넘는데 바위틈 사위를 사다리로 올라가니 참으로 절경이다. 높다란 절벽에 처마를 이루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무진장한 허공의 맑은 햇살과 폭풍과 소낙비에도 젖지 않는다. 이 바위는 이처럼 아름답고 기이하다. 머지않아 해외 먼 곳까지 이 명성이 알려져 발전할 날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빼어난 명승지를 역사에 올려야 할 것이며, 영원히 묻어 둘 수 없다.
이 때문에 유학자 오재휴(吳在畦) 외 21명의 계원이 하나의 두레를 결성하여 시를 읊은 장소로 삼았고, 이를 명명하여 ‘기암사(機岩社)’라 하였다.
방고대(榜告臺) : 일명 대방정(待榜亭) 또는 대고대(待告臺)라 한다. 아곡리 방현(榜峴) 기슭에 있다. 정재 오정원(正齋 吳廷源)이 나무를 심어 정자를 삼고 바위에 그 이름을 새겼다. 계거(溪居) 오상귀(吳相龜), 춘와(春窩) 오상룡(吳相龍), 지소(止巢) 오상봉(吳相鳳) 3형제가 머물렀던 곳이며 대대로 휴식을 취했던 곳이다.
영월대(迎月臺) : 인월리 월평 앞 구인월교 북쪽 하천에 위치한다. 운성지에는 반월형의 아래에 수석이 아름다우며, 그 경치가 수려하다. 물 가운데에 널따란 바위가 있어 수백 사람이 앉을 만 하다고 기록하였다.
그 고을 이희경(李熙景) 외 26인이 이곳에서 계(契)를 모아 노닐고 시를 읊었으며 영월대(迎月臺)라는 석각을 남겼다
양진대(養眞臺) : 용계마을 위 흥암(嶼岩)에 있다. 유학자 청구 오원상(靑邱 吳元相)이 은거한 곳이다. 이 대(臺)에서 문장을 지은 선비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반선대(伴仙臺) : 산내면 퇴수정 아래 야박담(夜泊潭) 위에 있다. 돌이 깨끗하게 펼쳐 있고 봉우리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반선대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줄기가 잠시 이곳에 머물어 못을 이루고 있다. 맑은 물은 거울과 같고, 세차게 흐르는 물은 여울을 이루어 물거품이 용솟음치고 있다. 참판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가 이곳에 거처하면서 암벽에다가 시를 썼다.
방선대(訪仙臺) : 매동의 아래에 주소의 위에 있다. 큰 바위가 깎아지른 듯 하고 연기와 안개가 땅에 널려 있어 마치 신선이 사는 곳과 같다. 유학자 양동섭(梁東燮)이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모여 술을 마시고 손님들을 맞이하여 이곳에 올라 여흥을 즐겼다.
지방암(智方巖) : 중군 하류 양쪽에 있다. 탱석(撑石) 위에 반석이 있는데 수십 사람이 앉을 만 하며 그 아래에도 8~9사람이 앉을 만하다. 동서 봉우리들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기암괴석들은 마치 용과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힘차며, 그 가운데 맑은 물줄기가 쏟아지는 폭포수가 있는데 옥을 부은 듯 맑은 소리가 난다. 물방울이 날려 마치 천둥소리에 눈이 날리는 듯 하며, 하류의 맑은 시냇물에는 물고기들이 놀고 있어 낚시와 그물질하며 쉴만한 경치이다.
유학자 김창선(金昌先) 등이 시를 읊으면서 세상사를 잊고 흥취를 돋구어 늙은 줄조차 몰랐다. 이를 지방암이라 하고 두레를 구노사(九老社)라 하였다. 그들의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
황강대(黃岡臺) : 산내면 백일동에 있다. 큰 바위가 석대를 이루었고 그 아래에는 깊은 물이 있으며 맑은 모래가 있고 물이 차고 맑으니 쉴만한 장소이다. 유학자 지강 김영수(止岡 金泳壽), 농암 박영진(農嵒 朴永鎭), 춘포 김광순(春圃 金光純), 운서 조기환(雲捿 趙奇煥) 등이 뜻이 같고 나이가 같아 갑계를 맺었다. 그곳에서 시를 읊고 석각을 남겼다.
영귀대(詠歸臺) : 산내 황강대(黃崗臺) 위, 황강대(黃江臺) 아래에 있다. 기암괴석과 옥처럼 깨끗한 자갈과 은빛 모래가 널려 있고, 짙푸른 소나무 그늘이 있어 물고기와 새들이 자유롭게 노닐어 참으로 은둔하기 좋은 곳이라 하였다. 방호사원(方壺社員) 36인이 이곳에서 놀면서 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황강대(黃江臺) : 산내 중기(中基)의 아래, 황강의 위에 있다. 큰 바윗돌이 널찍하게 석대를 이루어 수십 명이 앉을 만 하며, 그 아래에는 깊은 연못이 있는데, 넘실대는 맑은 물은 목욕할 만한 곳이다. 운강 양동섭(雲岡 梁東燮)이 술을 가지고 손님들과 함께 시를 읊었다. 황강대 위에 정자가 있는데 이 또한 운강이 지은 누대이다.
귀령대(龜鴒臺) : 산내 하황 동구 밖 산기슭이 끊어진 곳에 있다. 큰 바위가 깎아지르듯 서 있고, 층층한 바위들은 수십 길이 되는데 대를 이루어 이곳에서 노닐 만하다. 그곳에 사는 지강 김영수가 그의 아우 세 사람과 함께 봄 가을로 꽃을 즐기고 시를 주고 받으며 술을 즐겼다는 말이 전래되고 있다.
의은대(疑銀臺) : 만수동 아래에 있다. 소동폭포 위에 반석이 널찍하고 은처럼 깨끗이 다듬어져 있다. 폭포는 수십 길이나 되며 물거품에 연기가 어린 듯하니 운봉 제1의 절경이라 하였다. 율포 박상호(栗圃 朴相湖), 통덕랑 연포 박동한(蓮浦 朴東漢), 삼은 박상래(三隱 朴翔來), 춘강 김창순(春崗 金昌珣) 등이 터를 다듬어 집을 짓고 두레를 마련하여 춘추로 시를 읊은 장소로 활용하였다.
삼선대(三仙臺) : 노인암의 남쪽에 있는데 기암이 첩첩이 쌓여 있고 맑은 시냇물이 그 아래로 쏟아져 흐르니 참으로 별경이라 하였다. 연포 박동한의 삼선대 원운이 석각되어 있다.
노인암(老人巖) : 소년대 위에 있는데 병계 윤봉구 감사의 글씨가 있다.
세심대(洗心臺) : 삼선대 아래에 있으며 폭포수가 있다.
세진대(洗塵臺) : 퇴수정 아래 폭포가 있고 그 물 가운데 100여 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넓은 바위.
소년대(少年臺) : 반선대 동쪽에 기둥처럼 생긴 큰 바위가 반석 위에 3~4m 높이이다. 바위 위에 흙이 쌓여 소나무 한 그루가 수려한 경관을 이루었다. 철종 때 사람 처사 안
<그림 8-11> 운봉 4개읍면의 석대분포
용이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철종조) 전라감사 윤봉구가 소년대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용복대(龍伏臺) : 동면 유곡리 산 266-1번지에 위치하며 건지, 유곡, 성내, 자래리 일원에 거주하는 계원 64명의 방명(芳名)이 석각되어 있다.
천보암대(天寶岩臺) : 황산 국도변 혈암 옆에 위치. 1902년 임인생(壬寅生) 갑계원 23명 이름을 석각하였다.
12. 당산
<표 8-21> 지역별 당산 현황 - <남원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1987.
지역 | 당산명 | 제명 | 제일(祭日:음) | 당산수 | 소 재 | 기타 |
운봉읍 | 장교 당산 | 당산제 | 1월 3일 | 2 | 장교마을 입구 | |
서천 당산 | ″ | 1월 2일 | 1 | 서천리 서림 | ||
동상 당산 | ″ | 1월 2일 | 1 | 동상동 | ||
신기 당산 | ″ | 1월 2일 | 2 | 신기리 마을 뒷산 | ||
동면 | 서무 당산 | ″ | 1월 14일 | 1 | 서무마을 | |
성산 당산 | ″ | 1월 14일 | 2 | 성산마을 방죽안 | ||
아영면 | 율동 당산 | ″ | 12월 31일 | 1 | 율동 마을 | |
일대 당산 | ″ | 1월 1일 | 2 | 일대마을 | 거리제 겸함 | |
갈계 당산 | ″ | 10월3일, 1월3일 | 1 | 갈계마을 | 일년에 두차례 | |
봉대 당산 | ″ | 1월 2일 | 2 | 봉대 마을 | ||
산내면 | 장항 당산 | ″ | 11월 2일 | 3 | 장항 마을 | 산제와같이 지냄 |
매동 당산 | ″ | 1월 3일 | 3 | 매동마을 | ||
소년대 당산 | ″ | 1월 3일 | 1 | 대정리소년대 마을 |
13. 단유
사직단(社稷壇) : 본래 국토의 신과 곡식의 신(穀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으나 주로 국가나 조정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서천리 서쪽 야제당에 있었다.
성황단(城황壇) : 토지의 부락(富樂)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시던 곳으로 동천리 동편에 위치하였다. 서낭당이라고도 하는데 서낭신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제사하는 단을
서낭단, 단유를 서낭 서단, 제사하고 굿할 때 차려놓은 서낭상, 그 제사를 서낭제라 한다. 서낭당은 고개마루․길가․동구․절의 어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그 표시로는 작은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나무가지를 꺾어 놓았거나 돈․짚신․5색의 헝겁을 달아 놓았다. 길가는 사람은 대개 돌을 주워 올려놓고 침을 뱉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하나씩 두고 간다. 이는 토지 수호신이 서낭신에게 재액을 없애고 복을 부르며 여행의 피로를 풀고 소원성취 해주기를 바라는 곳이다..
여제단(廬祭壇) : 돌림병으로 죽은 귀신이나, 떠도는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북천리 성산 아래 임리마을로 가는 길 옆에 위치하였다.
14. 제각
선조의 산소를 수호하고 아울러 제사를 올리며, 더 나아가서는 후손의 회합과 강독 및 강론의 학습 장소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 건물들이다. 그 오늘의 현황을 기록하였다.
<표 8-22> 지역별 제각 현황
1 | 감모재(感慕齋) | 전주이씨 영해군파 | 장동마을 중고개 | 1928 | 운 봉 읍 | |
2 | 첨모재(瞻慕齋) | 밀양박씨 | 목조 | 장동마을 기린동(1993 재건) | 1949 | |
3 | 김해김씨 | 목조 3칸 | 장동마을 남쪽 | 1985 | ||
4 | 원모재(遠慕齋) | 김해김씨 | 장교마을 새모실 | |||
5 | 영모재(永慕齋) | 전주이씨 효령대군 | 장교마을 동편 | 1989 | ||
6 | 원모재(遠慕齋) | 경주정씨 | 권포마을 봉락동 | |||
7 | 춘계사(春系祠) | 서산유씨 삼성당공파 | 목조 | 가산마을 | ||
8 | 화포재(華圃齋) | 함양오씨 두암공파 | 목조3칸 | 방현마을 | ||
9 | 명석재(鳴石齋) | 파평윤씨 | 목조 3칸 | 명석치 | ||
10 | 영모재(永慕齋) | 김해김씨 | 목조 3칸 | 가동마을 복지설 | 1928 | |
11 | 막모재(幕慕齋) | 전주최씨 | 목조3칸 | 가동마을 막골 | 1976 | |
12 | 원모재(遠慕齋) | 강씨 | 목조 3칸 | 가동마을 엄지새 | 1976 | |
13 | 경주정씨 | 권포마을 전업 | ||||
14 | 경주정씨 | 권포마을 뒷골 | ||||
15 | 경주정씨 | 권포마을 초봉골 | ||||
16 | 경주정씨 | 목조 3칸 | 권포마을 탑골 | 1974 | ||
17 | 헌성재(獻誠齋) | 동복오씨 귀은공파 | 목조 3칸 | 덕산리산 514 | ||
18 | 운성재(雲聖齋) | 동복오씨 귀은공파 | 목조 4칸 | 산덕리 산 67 | 1984 | |
19 | 영모재(永慕齋) | 동복오씨 약산공파 | 목조 4칸 | 산덕리 381 | 1992 | |
20 | 영호재(靈湖齋) | 달성서씨 판서공파 | 목조 4칸 | 산덕리 383 | 1981 | |
21 | 영사재(永思齋) | 협천이씨 삼지공파 | 목조 4칸 | 산덕리 산 21 | ||
22 | 운계재(雲溪齋) | 광산김씨 퇴촌공파 | 목조 4칸 | 산덕리 531 | 1990 | |
23 | 영운재(永雲齋) | 함양박씨 | 목조 4칸 | 유평마을 | 1995 | |
24 | 흥성장씨 | 목조 | 임리마을 | 1993 | ||
25 | 인위재(仁爲齋) | 달성서씨 감찰공파 | 목조 4칸 | 준향마을 | 1987 | |
26 | 영모재(永慕齋) | 밀양박씨 | 목조 3칸 | 준향마을 | 1864 |
29 | 모선재(慕先齋) | 경주김씨정한공파 | 목조 3칸 | 취암리 334 | 1776 | |
30 | 무림재(懋林齋) | 동복오씨 | 목조 3간 | 서무마을 | ||
31 | 영모재(永慕齋) | 경주김씨 | 목조 4칸 | 서무리 계암마을 | 1997 | |
32 | 영모재(永慕齋) | 달성서씨헌감공파 | 목조 3칸 | 성산리 52 | 1935 | |
33 | 정암재 | 영천이씨 대명공파 | 목조 3칸 | 유곡(옛 봉서재) | 1971 | |
34 | 반월재(半月齋) | 김해김씨 삼현공파 | 목조 4칸 | 인월리 310 | 1994 | |
35 | 영승재(永承齋) | 동복오씨귀은공파 | 목조 3칸 | 동면인월리 310 | 1918 | |
36 | 김해김씨 | 인월마을 | ||||
37 | 매사재(梅史齋) | 김해김씨 삼현공파 | 목조 4칸 | 중군마을 1991-1 | 1994 | |
38 | 영모재(永慕齋) | 전주최씨 판서공파 | 목조 4칸 | 중군리 61 | 1996 | |
39 | 모월재(慕月齋) | 하빈이씨 월담공파 | 목조 3칸 | 중군리 84-7 | 1994 | |
40 | 정씨 | 동무마을 | 1975 | |||
41 | 영창재(永昌齋) | 함양박씨 첨모당공파 | 와가 4칸 | 갈계리 596 | 갑자년 | 아 영 면 |
42 | 첨모재(瞻慕齋) | 김해김씨 삼현공파 | 목조 3칸 | 송리마을 | 1925 | |
43 | 영사재(永思齋) | 경주이씨 국당공파 | 3칸 와가 | 두락마을 | 1932 | |
44 | 순령재(順寧齋) | 재령이씨 | 목조 4칸 | 아곡마을 | 1919 | |
45 | 양진재(養眞齋) | 함양오씨 사암공파 | 목조 5칸 | 아곡마을 740 | ||
46 | 추모재(追慕齋) | 연안이씨 정령공파 | 목조 3칸 | 아곡마을 632번지 | ||
47 | 영모재(永慕齋) | 서산정씨 판관공파 | 목조 3칸 | 아곡마을 569 | 1965 | |
48 | 영화재(永和齋) | 청도김씨 판서공파 | 목조 4칸 | 봉대마을 515 | 1959 | |
49 | 옥천재(玉川齋) | 경주김씨 | 율동마을 | |||
50 | 경주김씨 | 의지마을 | ||||
51 | 추모재 | 밀양박씨 | 내인(옛 구사재) | 1975 | ||
52 | 지헌재(智軒齋) | 동복오씨 귀은공파 | 외지마을 | 1986 | ||
53 | 경모재(景慕齋) | 동복오씨 귀은공파 | 목조 3칸 | 대정리 | 산 내 면 | |
54 | 관선재(觀善齋) | 밀양박씨 은산군파 | 목조 4칸 | 대정리 653 | 1937 | |
55 | 효우재(孝友齋) | 밀양박씨 향산공파 | 목조 4칸 | 대정리 403 | 1996 | |
56 | 남양재(南陽齋) | 남양홍씨 내령파 | 목조 3칸 | 내령리 산 115-1 | 1935 | |
57 | 전주최씨 | 내령마을 | ||||
58 | 함양박씨 | 삼화마을 | ||||
59 | 밀양박씨 | 삼화마을 | ||||
60 | 김해김씨 | 원천마을 | ||||
61 | 파평윤씨 집유공파 | 목조 4칸 | 중황리 | 1936 | ||
62 | 함안조씨 학공파 | 목조4칸 | 중황리 산 64 | 1996 | ||
63 | 김씨 | 하황마을 |
15. 경치
가. 운성 10경(운성지 전편에 수록)
1) 병암망월(幷巖望月) : 가산병풍암에서 바라보는 달.
2) 여원낙조(女院落照) : 여원치에서 바라보는 석양.
3) 두류청람(頭流晴嵐) : 이른 봄날 지리산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4) 적산만하(赤山晩霞) : 고남산의 저녁노을.
5) 황산석정(荒山石井) : 황산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
6) 옥계청류(玉溪淸流) : 옥계동의 맑은 시내물.
7) 월강서학(月崗棲鶴) : 월강의 백합 무리.
8) 광탄면로(廣灘眠鷺) : 신기리 들녁에 잠자는 해오라기.
9) 발악월경(鉢岳月磬) : 바래봉의 달빛 아래 들려오는 독경의 경쇠소리.
10) 상산조욱(霜山朝旭) : 동면 서리산에 떠오르는 아침 해.
나. 인월 8경
정유편(1957) <운성지>에 인월촌 앞에 영월대가 있는데 반월형의 아래에 수석이 아름다우며, 그 경치가 밝고 물 가운데에 널따란 바위가 있어 수백 사람이 앉을 만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8경이 있다 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1) 황강폭포(荒崗瀑沛) : 황산에서 흘러내리는 폭포수.
2) 고역연풍(古驛烟嵐) : 옛 역참의 아지랑이.
3) 층층괴석(層層怪石) : 층층이 쌓여 이룬 기괴한 바위.
4) 뢰뢰반암(磊磊盤岩) : 드넓은 반암
5) 풍천어적(楓川漁笛) : 풍천의 고기잡이 노래소리.
6) 월평농가(月坪農歌) : 월평농부의 노래가락.
7) 삼봉낙조(三峰落照) : 삼봉의 석양 빛.
8) 백장효종(百丈曉鐘) : 백장암의 새벽종소리.
다. 열락제 8경
열락재는 아영면 봉대리에 전해온 서당이다. 옛 선비들이 이 곳에서 배우고 익히며 열락재 8경을 지정하여 전해 내려왔다.
1) 연치조양(鳶峙朝陽) : 연비산의 아침 햇살.
2) 록동사양(鹿洞斜陽) : 당동의 저녁노을.
3) 정치명월(鼎峙明月) : 사창마을 앞산 고개에 떠오른 밝은 보름달.
4) 증수청풍(甑岫淸風) : 시리봉의 맑고 시원한 바람.
5) 황잠숙운(荒岑宿雲) : 황산의 검은 구름.
6) 지산부운(智山浮雲) : 지리산의 운해.
7) 전교목적(前郊牧笛) : 봉대 앞들의 소치는 아이의 갈대 피리소리.
라. 용동 8경
1) 용동폭포(龍洞瀑布) : 용동계곡의 시원한 폭포.
2) 성산낙조(城山洛照) : 성리산성의 저녁노을.
3) 지산모연(之山慕烟) : 건지산의 산안개.
4) 동곡택정(東谷澤艇) : 동곡저수지의 작은 고기잡이배.
5) 연산청람(鳶山晴嵐) : 연비산의 맑고 시원한 바람.
6) 웅치귀운(熊峙歸雲) : 곰실재를 넘어오는 높은 구름.
7) 갈계효종(渴溪曉鍾) : 갈계리 뒷골 절에서 들려오는 새벽 종소리.
8) 서정야월(西亭夜月) : 서정리 정자에 어우러지는 보름달.
마. 폭포
1) 운정(雲亭) : 삼걸산(三傑山) 동구(洞口) 공안촌(孔安村) 위에 있다. 운성지 기록에 의하면 층층으로 쌓인 바위들이 높다랗게 서 있고 폭포가 쏟아져 이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을 잊게 한다고 하였다.
2) 비룡폭포(飛龍瀑布) : 용산리 뒷산 월천(月川) 위에 있다. 월천은 현재의 용산천으로 추정된다. 덕두봉(德斗峰) 골짜기에 깎아지른 절벽에서 거꾸로 흐르는 물줄기는 30여 자가 되며 아래에는 깊은 연못이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곳에서 목욕하면 효험이 있었다고 한다.
3) 탱석폭포(撑石瀑布) : 산내 중황(中黃) 마을 뒤에 있다. 석벽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마치 사람 인(人) 자의 모습과 같으며 그 가운데 10자 높이의 폭포수가 있다. 폭포에서 쏟아지는 소리는 마치 천둥이 치는 것과 같고 아래에는 맑은 연못의 물거품이 마치 옥을 부어놓은 것과 같다. 큰 바위들이 층층이 쌓여 10여 발이나 되는 높은 석대(石臺)를 이루고 있는데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다. 농암 박영진(農岩 朴永鎭)이 이곳에서 시를 읊었고 석각(石刻)을 남겼다.
4) 옥계청류(玉溪淸流) : 옥계동(玉溪洞)에 있다. 큰 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언덕이 길게 연결되어 있다. 맑은 시냇물이 절경을 이루면서 바위로 된 연못이 있는데 이는 마치 무릉도원과 같다. 운성 10경의 하나이다. 현재는 저수지를 축조하고 ‘옥계타운’ 등 숙박업소가 들어서며 경관이 훼손되어 옛모습을 찾을 수 없다.
5) 탕곡약수(湯谷藥水) : 아영면 청계촌 뒤에 있다. 수백척(尺) 되는 반석 위에 맑은 물이 쏟아져 사이사이로 폭포를 이루고 있다. 목욕하면 효험이 있다 하여 과거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6) 소동폭포 : 산내면 삼화마을 남쪽에 위치한다. 과거 의은대가 있었으며 도탄 변사정이 은거하던 곳이다. 뱀사골 계곡물이 몇만년을 흐르며 깍아 놓은 바위들이 마치 조각해 놓은 것처럼 절묘하다. 그 바위 사이를 헤쳐 흐르는 물보라가 햇빛에 은빛으로 빛난다. 소동폭포(蘇東瀑布)라 석각된 동편 절벽 아래에 숙박시설이 들어서고 있다.
바. 쏘
1)용추(龍湫)
동면 용계촌(龍溪村) 앞쪽 피바위 아래에 있다. 수심은 100여 자가 된다. 사방에 반석이 널려 있으며,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용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일명 용쏘라고 한다. 지금은 하천 바닥이 메워져 5~ 6 자 깊이도 되지 않으며, 2년 전에 홍수의 우려로 군(郡)에서 경관을 무시한 채 주변 나무를 베어 냈다.
2) 배쏘 : 대정리에 위치한다. 마을이 배의 형국이라 하여 이곳을 배쏘라고 부른다.
3) 저연(猪淵) :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있는 내원암 동천 상류이다. <운성지> 전편에 의하면 옛날 저연에는 ‘가사어’라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큰 것은 몇 자가 되고 작은 것은 한 자쯤 되었다. 물고기의 바늘이 마치 승려의 가사처럼 생긴 데에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 물고기의 맛은 매우 좋으며 겨울에는 상류에서 놀고 여름에는 함양군 마천면 송전리 모전동 용유담에서 서식한다고 하였다. 용유담에 사는 80세 노인의 말에 의하면 과거 어떤 무관(武官)이 가사어를 많이 잡고자 독약을 풀어 이 때문에 이곳 가사어가 멸종되었다고 전한다. 어떤이는 가사어는 인적이 없는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자연발생한다고 하였다. 저연이란 명칭은 과거부터 지리산의 영험을 얻고자 봄․가을로 많은 무당과 신도들이 몰려 들어 기우제나 산신제를 지냈는데 그 때 제물로 사용한 돼지를 이곳에 던져 넣곤 하여 ‘돼지쏘’란 의미로 저연(猪淵)이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4) 부연(釜淵) : 산내면과 함양군 마천면 경계에 있는데 민씨가 순절한 곳이다. 이에 대한 서식(徐湜)의 시는 다음과 같다.
아름답다 민씨 절개여 / 백대의 인륜 짊어지셨네 / 제자리를 얻어 죽음까지도 가벼히 여기고 / 굳은 정절로 목숨을 아끼지 않았네 / 남자에게 비하여도 그 마음 거룩하고 / 왜적을 꾸짖은 기개 더욱 강하여라 / 예로부터 부연이 있으니 / 길이길이 물줄기 넘실되리.
산내면 백일리 주민들은 이 곳을 둔부쏘라 부르는데 이 곳에 만명이 먹을 수 있는 큰 가마솥을 담가 두었다는 데서 유래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언제가 새 세상을 여는 의로운 장수가 나타날 것이라 하는데 그때 장수를 따르는 군사들이 밥을 해먹을 솥을 제조하여 만개의 수저와 함께 이 쏘에 넣었다고 전한다. 그 솥은 남원시 산동면 부동(가마솥을 제조하였다) 마을에서 제조하여 수많은 주민들이 힘을 합쳐 이곳까지 운반하였다고 전한다.
5) 황산석정(荒山石井) : 일명 장군수(將軍水)이라 하였는데 8부 능선 큰 암벽 황산대(荒山臺) 아래에 있다. 물맛이 약처럼 달콤하여 과거에는 이 약수를 마시기 위하여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사. 기타
1) 피바위 : 고려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때 참수된 왜구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전한다. <지봉유설>에 의하면 임진년(1592)에 이 바위에서 저절로 피가 흘렀다고 하였다.
2) 기 암 : 아영면 아곡리 천황산 옥녀봉 기암사(機巖寺) 위에 있다. 운성지 기록에 의하면 산은 그다지 높지 않으나 바위만은 우뚝 서 있으며 둥근 덮개가 덮여 있고 그 넓이는 백 사람이 앉을 정도라고 하였다. 검인암(釰刃岩), 직립암(直立岩)의 높이는 100척이 넘는데 바위 틈 사이를 사다리로 올라는데 경치가 참으로 절경이라 하였다.
3) 상사바위 : 고남산 동북쪽 남원군 산동면과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높이 솟은 암벽이다. 옛날 상사병에 걸린 처녀가 이 바위 위에 올라가 떨어져 죽은 뒤 큰 지네가 되어 갈대 숲을 헤치고 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4) 주지암 : 주지암(住智庵)은 신라 때부터 있어 오던 암자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이산(智異山)의 줄기가 이곳에 멈춰 이루어졌다 하여 산의 이름을 주지봉(住智峰)이라 하였다. 지이영봉(智異靈峰) 영향 때문인지 산신의 영험이 높았다.
우리의 옛 풍속에 소원이 있으면 명산에 빌고, 딸․아들 점지는 산신에 빌었다. 이곳 주지봉은 남원시에서 멀지 않아 예로부터 삶에 아쉬움이 있는 군민들은 이곳 주지봉에 빌어 바라는 바를 이루었다. 그래서 가뭄이 들때는 주지봉 정산에 기우제를 올려 효험을 보는 일이 많았으므로 관․민 할것 없이 남원군민의 기도단으로서 유래가 깊다.
이곳 기도단에 처음으로 암자를 세운 이는 김세평(金世平) 부사인데 김부사는 숙종(肅宗) 20년(1694)에 남원부사로 도임하여 군민들이 영험을 본 기도단을 그대로 둘 수 없다 하여 여러 사람들과 뜻을 합해 이듬해 암자를 세워 주지암(住智庵)이라 하였다.
김세평 부사는 선원사를 중창한 것으로도 이름이 전하고 있지만 그는 이밖에도 향리에 남긴 일이 많다.
그후 주지암은 1912년 이혜능(李蕙能) 주지가 크게 수리하였는데, 이때 불상을 충청도 홍산에 있는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셔왔다. 그런데 수년 전에 이 절이 주지의 부주위로 촛불이 넘어져 불당이 모두 타 버렸다가, 1978년 김양선(金良璇) 주지의 정성어린 노력으로 불당이 재건되었다.
동쪽에는 백여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암굴이 있어 옛부터 기도소로 유명하다. 정상에서는 날씨가 맑을 때 멀리 남원시와 곡성지방까지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암벽 정상에는 가로 세로 1m 크기의 평평한 바위가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날 산신들이 이곳에 내려와 바둑을 두며 놀았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봉화대 역할로 깃발을 꼿아 남원과 운봉을 잇는 신호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남쪽으로 50m지점에서 주지암(住智庵)이라 새긴 창건 당시의 표시판이 근년에 발견되기도하였다.
5) 아영고지(阿英古址)
아곡은 일명 아실이라 속칭하며 아영면(阿英面)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기록을 보면 신라시대에 권농병마사(勸農兵馬使)가 있었으며 위로 아막산성(阿莫山城)이 있고 남서로 미성(米城)이 있으니 이는 당시 군영(軍營)의 본거지(本據地)로 추정된다. 마을 앞 탑거리에는 삼국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이 서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도난당하고, 그 곳에 건립시기를 알 수 없는 아영고지(阿英古址)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1972년 봄 그 비석마져 도난 당하자 1973년 마을 주민들이 새마을 사업을 전개하면서 다시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6) 달궁계곡
달궁계곡은 흔히 심원계곡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심원은 전남 구례와의 도계에 위치하며 반선에서 도계인 심원까지의 7km를 심원계곡이라 불리기도 한다. 달궁계곡은 기원 초 삼한시대 때 마한의 별궁이 있었다고 해서 달궁이라 부른다. 마한시대에 황씨 성(黃氏姓)과 정씨 성(鄭氏姓)을 가진 두 장군이 왕의 명을 받아 현재의 정령치와 황령치에 성을 쌓고 적의 침입을 막았다. 달궁계곡에는 풍치가 절경인 쟁기쏘와 하늘 아래 첫 동네인 심원마을에 위치하며 여기서 노고단, 반야봉, 천은사, 화엄사로 통하며,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45km의 지리산 종주능선이 된다.
반선에서의 등산코스는 1박 2일의 경우가 반선 - 뱀사골산장(12) - 반야봉(4) - 임걸령(5.5) - 노고단(4) - 화엄사(10)로 가는 35.5의 코스이다. 2박 3일의 경우는 반선 - 뱀사골산장(12) - 연하천(8) - 벽소령(6) - 세석평전(6) - 장터목(6) - 천왕봉(3) - 중산리(9)의 총 54코스이다.
3박 4일의 경우 반선 - 달궁(5) - 성삼사(9) - 노고단(3) - 임걸령(4) - 반야봉(5.5) - 뱀사골 산장(4) - 토끼봉(2) - 연하천(6) - 세석평전(16) - 장터목(6) - 천왕봉(3) - 법계사(6) - 중산리의 총 72.5km 코스가 된다.
7) 옥터
(1) 형옥터 : 동천리 운봉초등학교 남동쪽 주택지
(2) 옥터 : 공안마을 앞 옛 공안림 터에 있었으며 기와조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3) 옥터거리 : 인월마을 입구 옛 죄인을 수감하던 ‘터거리’의 이름이 전한다.
<표 8-23> 운봉지역 일반 문화재(유적) 목록(1997)
종류별 \ 지역별 | 고인돌 | 유물산포지 | 고분지점 | 성지 | 봉수 | 도요지 | 장승 | 사적비 | 충혼비 | 신도비 | 정려비 |
운봉읍 | 2 | 7 | 10 | 1 | 2 | 8 | 4 | 1 | 1 | 9 | |
동 면 | 7 | 3 | 2 | 2 | 1 | 10 | |||||
아영면 | 11 | 4 | 4 | 3 | 1 | 2 | 1 | 16 | |||
산내면 | 1 | 1 | 1 | 3 | 1 | 3 | |||||
계 | 11 | 7 | 19 | 17 | 2 | 2 | 15 | 7 | 2 | 2 | 38 |
기타비 | 불상 | 석탑 | 전적지 | 절터 | 정자 | 석대 | 당산 | 제각 | 기타석조 | 계 |
24 | 1 | 2 | 3 | 8 | 3 | 1 | 4 | 9 | ||
10 | 1 | 8 | 2 | 2 | ||||||
20 | 1 | 6 | 2 | 6 | 4 | 1 | ||||
5 | 1 | 1 | 11 | 5 | 9 | 3 | 12 | |||
54 | 6 | 3 | 6 | 33 | 10 | 18 | 13 | 22 |
* 여원치 마애여래상과 등구치의 추만선생 신도비는 운봉읍지역에 포함하였다.
* 기타비 : 선정비․불망비․기적비․공적비․기념비․시혜비․송덕비․시혜비 등이며 묘비는 제외하였다.
16. 지정문화재
가. 실상사(實相寺) 문화재
1)실상사 문화재 사적지 309호
전라북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에 위치한 고찰 실상사(實相寺)는 9산선문의 하나로 우리나라 선종(禪宗) 사찰 중 가장 먼저 건립되어 선풍(禪風)을 널리 펼쳤던 고찰(古刹)이었던 만큼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유명한 절이다.
불교에는 교(敎)와 선(禪)의 양대파가 있다. 교는 경문에 의하여 점차 도를 닦음이요, 선은 문자를 통함이 없이 좌선(坐禪)을 하여 문득 도를 깨닫는 것이다.
신라 교종에는 5종이 있었는데 그는 열반종(涅般宗), 계율종(戒律宗), 법성종(法性宗), 화엄종(華嚴宗), 법상종(法相宗)이 이것이다.
선종(禪宗)에는 남원의 실상사(實相寺), 장흥(長興) 가지산(迦智山)의 보림사(寶林寺), 곡성(谷城) 동리산(桐裡山)의 대안사(大安寺), 삼가리(三嘉里)의 굴산사(堀山寺), 창원(昌原) 봉림산(鳳林山)의 봉림사, 영월(寧越) 사자산(獅子山)의 흥녕사(興寧寺), 문경(聞慶) 의양산(曦陽山)의 봉암사(鳳岩寺), 보녕(保寧) 성주산(聖住山)의 성주사(聖住寺) 및 해주(海州) 수미산(須彌山)의 황희사(黃熙寺)등 구산 선종이 있으니 위의 교와 선을 합하여 범칭 5교(五敎) 구산(九山)이라 일컫는다. 그러면 구산의 선종은 어떻게 해서 전하게 되었는가?
선종은 일명 달마종(達磨宗) 또는 조계종(曹溪宗)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이것을 처음 가져온 이는 신라 36대 혜공왕(惠恭王:765~779)의 고승 신행 대사(神行大師)가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오면서 들여 왔지만 이 때의 신행 선종은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그후 도의(道義)라는 명승이 헌덕왕(憲德王) 13년(서기 821) 당나라 선종을 다시 배워와 폈으나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홍척(洪陟)은 남원출신 고승으로 신라에 선종을 펴게 한 시조가 되므로 일명 남한조사(南漢祖師)의 칭을 받았으며, 오랜 동안 지리산에 들어가 도를 닦았으므로 남악(南岳:남악은 지리산의 별칭)의 홍척이라 칭한다.
도의(道義)가 선덕왕(宣德王) 5년(784) 당나라를 들어 갈 때 홍척도 함께 입당하였다.
당나라에 건너간 홍척은 도의(道義)와는 달리 지장대사(智藏大師)에게서 선종의 심법(心法)을 익혀 도를 깨달은 후 흥덕왕(興德王) 원년(826) 귀국하는 길로 남악(지리산)에 들어가 불법을 폈다.
그의 선종은 깊고도 오묘하여 어느덧 흥덕왕을 불법에 귀의(歸依)케 하였고, 이어 선광태자(宣光太子)도 귀의케 하니 그의 명성은 신라 조야에 떨치게 되었다. 마침내 홍척은 실상사를 크게 중수하고 이곳에 머물러 지장대사의 선풍(禪風)을 펴니 이 후로 선종이 널리 보급되는 한편 선종 구산의 하나인 실상산파(實相山派)를 이룩하게 되었다.
한편 홍척에 이어 선종을 당나라에서 배워온 이가 7명이 있었는데 그들이 제각각 9산의 선종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홍척은 흥덕왕의 총애를 받은지라 홍척의 실상산파는 9산 선종 중에서도 대종을 이루었다. 왕은 홍척에게 증각대사(證覺大師)의 존호를 내리니 이 무렵 증각 대사의 실상사에는 고명한 제자들이 많았다. 기록에 따르면 흥덕왕 3년(828) 실상사를 처음 창건되었으며, 그 후 실상사에서는 수철대사(秀澈大師)와 편운대사(片雲大師)가 모두 실상사에서 배출되었다. 이 무렵에 선종의 불법은 크게 번성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다.
왜군이 침입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나라 안의 모든 절들이 화를 입은 것과 마찬가지로 실상사도 당시 폐허가 되어 많은 승려들은 백장암(百丈庵)으로 옮겨가 100여 년 동안 기거하게 되었다. 그 후 숙종 때에 이르러 300여 명의 백장암 승려들이 실상사(實相寺)를 재건을 위한 상소를 임금께 올리게 된다. 그러나 현 실상사 절터가 동복 오씨(同福吳氏)의 소유가 되어 있어 토지문제로 시일만 끌어 오다가 결국 조정에서는 실상사의 중요함을 알고 승려들이 요구하는 옛 절터의 반만을 찾아주어 숙종(肅宗) 26년(1700)에야 비로소 크고 작은 36채의 절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고종(高宗) 19년(1882)에 커다란 화재가 발생하여 어렵게 세운 절이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1902년 운봉 영장(정3품)에 부임한 정환종(鄭煥琮)이 재임중에 절을 다시 건축하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승려들의 노력만으로 현재 규모의 실상사(實相寺) 절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찰 내에는 수철화상릉가보월탑(秀澈和尙楞伽寶月塔:보물33호), 수철화상릉가 보월탑비(碑) (보물34호), 석등(보물35호), 부도(浮屠:보물36호), 3층석탑(三層石塔:보물37호), 증각대사 응료탑(證覺大師凝蓼塔:보물38호), 증각대사 응료탑비(보물39호), 철제여래좌상(鐵製如來座像:보물41호), 백장암 석탑(百丈庵石塔:보물40), 백장암3층석탑(국보10호)등 보물급 문화재들이 즐비하다. 또한 사찰 내에는 보광전(普光殿), 약사전(藥師殿), 극락전(極樂殿), 동탑(東塔), 서탑(西塔) 등이 있으며 보광전안에는 홍척(洪陟), 수철(秀澈) 두 대사의 영정이 걸려 있고 극락전에는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협시불(脇侍佛)인 두 보살(菩薩)이 목각금박입상(木彫金箔立像)으로 우아하게 서 있다.
2)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實相寺 百丈庵 三層石塔) 국보 제10호
기단구조(基壇構造)와 각 부분의 장식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으로 처리한 형이 매우 색다른 석탑이다. 탑의 기단부(基壇部)는 네모형의 돌(方形臺石)로 처리했으며 그 뒤에 다른 네모형의 탑의 몸통 받침을 얹고 네모형 삼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받고 있다. 옥신(屋身)은 1층과 2층 3층과의 높이의 감축율이 적고 옥개석(屋蓋石)은 층별로 받침이 없이 앙화문(仰花文) 받침으로 경사처리를 하였다. 상륜부(相輪部)는 일부 소실(燒失)된 부분도 있으나 로반(露盤), 복체(覆體), 보개(寶蓋), 수연(水煉)이 찰주(擦柱)에 완전히 육중하게 놓여 있음은 희귀한 본보기라 하겠다. 이 탑은 구조가 이와같이 특이할 뿐만 아니라 전면에 화려한 조각을 한 대표적인 공예탑(工藝塔)이다. 탑의 각층 옥신 하단에는 전자형(田字形) 난초의 조각을 돌려 새겨 장식하였고 상단에는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네모형 지붕을 받치고 있는 형으로 새겼으며, 일층옥신 네 면에는 보살상과 신장상(神將像) 2구(軀)씩을, 2층 네면에는 악기를 다루는 천인상(奏樂天人像) 2구씩을, 3층 네면에는 1구씩의 천인좌상(天人坐像)이 각각 있어 면마다 조화를 이루어 새김 새김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이 탑은 조각의 노력이 탑신부에 주로 가하여졌고 어떠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형을 취한 점에서 한국 탑파상(塔婆上) 희귀한 공예탑의 하나이며 신라 후반기를 대표하는 미탑(美塔)의 하나이다.
3)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實相寺 秀澈和尙 楞枷寶月塔)
- 보물 제33호 -
신라선종 9산(新羅禪宗九山)의 하나인 실상사 제2대조 수철화상의 부도탑(浮屠塔)으로서 극락전 옆에 탑비(塔碑)와 함께 서 있는데 팔각원당(八角圓當)을 기본 형식으로 옛사람의 시문(詩文)을 원안으로 하여 이리저리 고친 전형적인 석조묘탑(石造墓塔)이다.
위의 부분만 네모진 형으로 다듬은 지대석(支臺石)위에 팔각으로 다듬은 3단의 하대석(下臺石)이 차례 차례로 놓여져 있다.
최하단(最下段)은 팔면에 용이 날아가는 형을 연속해서 조각하였고 중단석(中段石)은 팔각면에 꾸며 새겨진 것은 없고 상면에 상단석을 받치기 위한 팔각형 받침을 새겼다.
상단석은 상면에 약간 좁혀서 측면이 모퉁이 기둥과 동자형(童子形) 사이기둥을 새겨 난간형(欄干形)을 본떠 제작하였다. 중대석은 석등받침 돌처럼 부피가 좁혀진 팔각기둥으로 모퉁이 기둥 모양 만을 새겨 놓고 있다.
상대석은 석등 대석처럼 위로 향한 연꽃 무늬를 두르고 있는데 연변(蓮辨)은 단변(單辨) 16 잎사귀를 세겹으로 조각하고 밑면 중심에는 팔각형 중석받침이 새겨져 있다. 그위의 탑신은 상․하 2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랫돌은 팔각형의 비교적 높은 탑신 받침으로 각 모퉁이에는 3개의 지주 동자형(童子形)과 주형(柱形)을 새겨 난간 동자기둥을 본떠 새긴 것이고, 상면의 상탑신에 접하는 둘레에도 연꽃 무늬로 장식되어져 있다. 상탑신은 낮은 편이며 너비도 하석(下石)보다 비례적으로 좁혀져 있다. 각지어진 면에는 문비(門扉)와 사천왕립상(四天王立像)이 차례로 바뀌어져서 볼록 튀어나게 새기어 있는데 문비는 상부가 아취형을 이루고 중앙에는 자물쇠 있는 문과 2개의 고리가 표현되었다. 옥개석은 매우 사실적으로 목조와즙팔각(木造瓦葺八角) 지붕을 번각(飜刻)하였다. 꼭대기 부분에는 팔각형의 상륜(相輪)은 옥상 팔각 받침위에 꽃무늬가 편구형(扁球形)으로 크고 작은것 2륜(二輪)을 조각하여 얹어놓고 그 위에 보배로운 것을 얹었다.
신라 후반기에 이르러 선종(禪宗)이 유행하자 종파를 과시하기 위해서 불탑보다는 역대 조사(祖師)의 부도탑(浮屠塔) 건립에 치중하여 이를 신앙업상(信仰業象)으로 삼았기 때문에 예술적 기교를 기울여 목탑(木塔)의 섬세한 건축 방식을 본떠 새긴 것이다.
수철화상은 진성왕(眞聖王) 8년(894)에 입적(入寂) 하였으나 이 작품이 만들어진 연대는 오히려 10세기초에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4)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實相寺 秀澈和尙 楞枷寶月塔碑) - 보물 제34호 -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는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 50번지 실상사 서편 수철화상 능가보월탑과 사잇길을 두고 떨어져 북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수철화상은 신라 선종(禪宗) 9산(九山)의 하나인 실상사(實相寺)를 창건한 2대조(二代祖)이다.
비(碑)의 제액(題額)은 전서체(篆書體)의 글자로 능가보월탑기(楞枷寶月塔記)라 쓰여져 있다. 비의 첫줄은 ‘ □□ 신라국양주심원사 □국사수철화상 □탑비명 서(□□新羅國良州深源寺 □國師秀澈和尙 □塔碑銘 書)’로 시작되는데 수철화상(秀澈和尙)은 양주(良州:지금의 양산) 심원사(深源寺)에서 이곳에 이주하여 절을 세운 두번째의 개조(開祖)가 되었으며 이곳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수철화상은 신라말의 선종(禪宗)의 승려로서 동원경(東原京:지금 경주) 복천사(福泉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윤법대덕(潤法大德)에게 받고, 지리산 지실사(智實寺)에 있었는데 이때의 왕이었던 경문왕(景文王)과 헌강왕(憲康王)은 모두 불도에 깊이 귀의하여 이에 화상을 초청하여 심원사에 머물게 하였다. 화상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진성여왕(眞盛女王) 7년(서기893년) 5월에 77세로 입적하자 왕은「수철」이란 시호(諡號)를 내리고, 탑의 이름을 ‘능가보월(楞枷寶月)’이라 하였다.
비문을 지은이나 비문의 글씨를 쓴 이는 알 수 없지만 뒷면에 ‘강희 53년 갑오 4월일중건(康熙53年 甲午 4月日重建)’의 한줄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아 조선 숙종(肅宗) 40년(1714년)에 이 비를 다시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이 비의 최초 건립 년대는 신라 효공왕(孝恭王 : 897-912) 때로 추정되며 비에 새겨진 글씨체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구양순(歐陽筍)체의 약자체로 되어 있다.
이 비는 네모형의 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비머리)를 올려놓고 있는데 재료는 모두 푸른빛이 나는 돌로 만들어져 있으며 비의 총 높이는 2.9m이고 비신의 높이는 1.68m이며 폭은 1.12m이다.
이 받침돌은 땅속에 있는 지대석(支臺石)과 같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지대석의 넓이는 1.64m이고 형태는 긴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으면서 윗부분으로 올라올수록 약간씩 좁혀 대석부분에 와서는 한개의 받침이 있다. 대석의 형태는 가운데 부분에 테를 두르고 아랫부분에는 앞면에 각각 2개, 좌우면에 각각 1개씩의 눈의 형태를 음각하였다. 그러나 우주(隅柱)나 탱주(撑柱)의 모각(模刻)은 없다. 윗 부분의 비석을 앉히는 곳의 둘레에 받침 1단이 있고 윗 부분으로부터 옆면 부분의 윗 부분에는 연꽃 모양을 부각하여 놓았다.
연화문은 종판으로 되어 있고 앞 뒷면에 각각 4잎, 옆면에 각각 2잎, 모서리 부분에 1잎씩 모두 16잎을 새겨 놓고 있다. 이같은 대석의 조형 형식은 그 당시의 것 중에서 매우 희귀한 양식의 것으로 이수의 형식적인 변화와 전각 수법은 장엄하게 꾸미도록 새기는 방식에서 약식으로 조각하는 경향으로 변화해감을 알 수 있다.
이수는 긴 네모형의 1개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앞면의 가운데 부분에 여의주를 새겨 놓았고, 그보다 약간 낮추어서 용머리를 좌우 대칭이 되게 1개씩 새겨 놓았다.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 아취형의 귀획을 양각으로 새겨 놓았고 비의 제액을 음각하여 놓고 있다.
기타의 나머지 공간에는 빈틈없이 용이 구름을 타고 날고 있는 모양을 양각하여 놓았다.
비문은 화상의 출생에서부터 수계(修戒), 득도(得道), 교화(敎化), 입적(入寂)과 탑을 만들기까지의 경위를 기록하여 놓고 있다.
현재는 비문의 손상이 심하여 판독하기가 어렵다.
5) 실상사(實相寺) 석등(石燈) - 보물 제35호 -
실상사 석등은 대웅전 앞뜰의 본래 위치에 그대로 세워져 있다. 재료는 화강석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 5m, 하대석의 폭은 1.49m나 되는 대형으로 각 부분이 결실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 상대(上臺)와 불을 켜는 화사석(火舍石) 화사석을 덮는 옥개석(屋蓋石) 등은 통일신라의 기본형식인 8각을 이루고 있으나, 옥개석 위에 또 하나의 소형 옥개모양의 보개(寶蓋)를 얹은 것과 간석(竿石)이 원형으로서 특이한 양식을 이룬 점등은 일반적인 신라 석등과는 구분이 되고 있다.
지대석(地臺石)은 8각으로 각 면에 가늘고 긴 안상(眼象)을 음각(陰刻)하였으며 그 상연(上緣)에는 일단의 받침을 각출(刻出)하여 하대석을 받치고 있다. 하대석은 윗면에 부각된 2단의 원형받침을 새기고 이를 중심으로 상면에 걸쳐 겹꽃잎을 나타내는 복변(複辨) 8엽을 꽃들이 밑부분을 향하는 복련문으로 새겨 놓았다. 복련은 측면의 모서리에다 복판의 정 중앙선이 되게 하고서 꽃 1엽씩을 배치하였으며 그 중앙모서리 하단에도 꽃잎을 새겨 장식하였다.
간주석(竿柱石)은 원통형으로 상․중․하부에 북모양의 튀어나온 띠[고형돌대(鼓形突臺)]를 새겼다. 그 중앙은 지름을 좁히고 중간에 1줄의 튀어나온 띠를 두르고 다시 튀어나온 띠 위에 4장의 연화문(蓮花紋)을 각각 8개씩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상부의 하단에는 연꽃 무늬가 하늘을 향하는 앙연문(仰蓮紋)을, 아랫부분에는 상단에 복연문(伏蓮紋)을, 중간에는 복연문과 앙연문을 새겼는데 연화는 복판(複瓣) 16엽(葉)이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대칭으로 그 아랫부분 간석과 접합되는 부분에 2단의 받침을 새겨 놓았고 받침을 중심으로 하면에서 측면에 걸쳐 앙연문을 새겨 놓았다. 앙연은 단판(홑꽃잎) 8엽으로서 각 꽃잎내에는 중심에 1개씩의 작은 꽃무늬를 양각(陽刻)하였으며 연꽃 둘레에는 2중으로 윤곽(輪廓)을 긋고 그 상측면은 각 연꽃 중심을 각으로 하는 8각테를 둘렀다.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각 8면의 상부에 불구멍을 뚫었으며 장방형 불구멍 주위에는 2중의 테를 둘렀다.
옥개석은 하면의 화사석에 맞춘 낮은 괴암이 각출되었고 각 전각(轉刻)에는 약간의 반전(反轉)이 있으며 그 위에 하대석과 같은 귀꽃을 새겨 놓았다.
이와같이 화려한 양식을 나타내면서도 거대한 석등은 임실군(任實郡) 용암리(龍岩里) 석등(보물267號), 담양(潭陽) 개선사(開仙寺) 석등(보물 제111호)등과 계통을 같이 하는 것인데 현존 유물로 보아 주로 호남지방에서 조성된 신라말기 석조물이다.
6) 실상사부도(實相寺浮屠) - 보물 제36호 -
화강석으로 된 높이 3.2m의 팔각 원당형(圓堂形) 부도로서 실상사 서남쪽 모퉁이 절 밖의 잔디밭에 건립되어 있다. 팔각형 지대석이 놓였고 그 위의 하대석은 팔각형으로 하단은 8각 면을 이루고, 그 위를 약간 축소시킨 다음 복부에 와운문(渦雲紋)을 양각하였다. 그 상부는 폭을 좁힌 3단의 팔각형의 가운데 받침돌(竿石)이 나오게 새겨져 있고 간석(竿石)은 높이가 낮은 무늬가 없는 팔각 기둥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의 상대석은 거의 반구형에 가깝게 되어 있다.
간석의 측면에는 위로 향한 연꽃 무늬를 양각하였으며 앙연석(仰蓮石) 하면에는 간석 받침 일단이 있고 윗면에도 이단(二段)의 탑신 받침이 있다. 탑은 팔각 기둥이나 간석보다는 넓고 한쪽 면에만 문짝모양이 조각되어 있을 뿐이다. 지붕의 하부 중앙에 팔각 받침이 있고 지붕의 안쪽에는 세부 장식이 간소화 된 대신 약간 휘어진 모양으로 면을 팽창하시켰다. 옥상의 경사는 급하고 기와 골은 약해지고 끝 부분만 내려와 추녀 끝에 커다란 귀꽃 장식이 달려있다. 그 위에는 하반에 꽃무늬 조각을 가한 보주석(寶珠石)이 얹혀 있는데 절두 원추형(截頭圓錐形)으로 그 위에 보주(寶珠) 한개를 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의 형태는 실상사 수철화상탑이 섬세하게 흐른데 반하여 간결하면서 높게 튀어 나왔으며 단정하게 표현되었고 귀꽃이 표현이 이지러지게 보인다. 이 부도는 통일 신라말기 혹은 고려 초의 작품으로 보인다.
7) 실상사 삼층석탑(實相寺三層石塔) - 보물 제37호 -
실상사 삼층석탑은 보물 제37호로 1934년 8월 27일 제정되었으며 실상사 보광전(普光殿)의 앞뜰에 세워진 화강석으로 만든 동․서 쌍탑(雙塔)으로서 2중 기단(基壇) 위에 3층의 사각형 탑으로 신라 석탑의 일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동․서가 같은 규모로 모두 탑의 수연 밑 아홉 층의 청동 원료인 상륜부(相輪部)까지 완전하게 남아있다. 양 탑은 각각 넓게 장대석(長臺石)으로 구획된 사각형의 탑구(塔區) 안에 장대석(長臺石)을 맞추어 사각형 지대석을 이루고 그 위의 하층 기단은 하대석과 중대석을 조각한 넉장의 장대석으로 짜고 중대석 각 면에는 건물의 모퉁이에 세운 기둥인 우주(隅柱)와 받침 기둥인 탱주(撑柱) 하나가 정본인 사본을 본뜬 간각으로 모각(模刻)되었다. 돌 위에 다시 포개어 얹는 납작한 돌인 갑석(甲石)은 윗면이 옥개석 모양으로 경사지고 윗층 기단 중석과의 닿는 면은 활의 모양 받침이 뚜렷하다. 윗층 기단 중간 돌을 넉장으로 만들어 졌는데 각면에 우주와 탱주를 뚜렷하게 모각하였다. 상층 갑석도 기본 형식에 있어서 하층 갑석과 같이 윗면은 옥개형 경사가 있어 얼핏 보기에도 4층탑 처럼 보이나 탑신 옥개석에 비하면 얇고 편편하며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게 되어 있다.
추녀밑 중앙에는 중석 받침이 윗면에는 이중의 이층 탑신 괴임이 있다. 탑신부는 옥개석과 옥신석을 연결하는 옥신(屋身)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옥신에는 네 우주만이 모각되었을 뿐이며 일층은 높은 편이고 이․삼층은 그다지 체감율이 크지 않다. 옥개석 추녀는 수평이고 옥개 경사는 급하나 낙수면의 전각은 경쾌하다. 추녀 밑은 넉장의 받침이나 추녀면은 넓고 수평이다.
실상사는 828년(흥덕왕3년)에 홍척국사(洪陟國師)에 의해서 개창된 것으로 조탑(造塔) 연대를 신라말로 짐작할 수 있다.
8)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
- 보물 제38호 -
증각대사(證覺大師) 응료탑(凝蓼塔)은 1934년 8월 27일 보물 제38호로 지정되었으며, 실상사 서편 극락전 남쪽 탑비 반대편에 세워져 있으며 높이가 2.42m인데 옥개석(탑신을 덮는돌) 윗부분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원형은 더 높았을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의 둥근 형으로 같은 경내의 수철화상탑(秀澈和尙塔)(註:탑신은 팔각형. 전면은 문호형, 사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됨)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다. 땅 위에 팔각의 받침돌을 놓고 윗 부분으로 갈수록 폭을 약간씩 좁혔으며, 그 위에는 8각형의 받침이 있으나 표면 둘레에는 거치른 구름과 용 그리고 사자등이 새겨져 있으며 8각의 모서리는 아직 남아 있으나, 비바람에 씻겨 이그러짐이 심하다. 측면과 상면의 연결부분도 뚜렷이 남아 있으며 이 받침돌 위에는 다시 폭을 좁힌 가운데 받침돌이 따로 끼워져 있는데 역시 아래와의 연결 부분은 8각의 받침돌이 있고 그 위는 차츰 직경이 좁혀 지면에서 둥근형을 이룬 측면에 아래 받침 돌과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들은 높이가 낮은 팔각형의 돌기둥으로 매우 너비가 좁아졌으며, 그 위의 받침돌(上臺石)은 아래도 역시 8각형의 가운데 받침돌 직경에 맞추어 3단으로 연결되었다. 측면은 원형으로 다듬어 연꽃무늬 잎을 16장씩 3중으로 양각(볼록 튀어나오게 새긴것) 하였으며, 윗면에도 8각형 2개의 받침돌에 새겨져 있다.
이 탑은 실상사 개창조(開創祖) 홍척국사의 묘탑으로써 새긴 형태는 균형이 잡혀 잘 어울리며 석재를 잘 선택하여 우아하고 윤택한 기품을 보여주고 있다. 홍척국사의 실상사 개창은 흥덕왕 3년(828)이므로 그의 입산연대를 고려한다면 9세기 후반경의 작품으로 측정된다.
9)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實相寺 證覺大師 凝蓼塔碑)
- 보물 제39호 -
본 탑비는 보물 제39호로써 실상사 서편, 탑이 서 있는 극락전 앞 뜰에 위치하며, 현재 뿔없는 용의 서린 모양을 새긴 이수와 거북이 형상의 귀부(龜趺)만 남아 있을 뿐, 비신(碑身)은 상실되었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洪陟國師), 남한조사(南漢祖師)로서 선종구산(禪宗九山)의 하나인 이곳 실상사를 처음 일으켜 세운 고승이었다. 신라 헌덕왕(憲德王:809-825) 때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흥덕왕(興德王) 원년(826)에 귀국하여 남악(南岳:지이산)에서 선풍(禪風)을 일으켰으며, 흥덕왕과 선광태자(宣光太子)를 귀의케 하였다. 귀부(龜趺)는 큰 돌 하나로 된 폭 1.61m의 방형지대(方形地臺) 위에 거북을 부각한 것인데, 형상은 매우 사실적이며, 특히 당대에 이미 일반화된 용머리를 모양한 것이 아니라 거북이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조각한 것은 희귀한 기법이다.
귀체(龜體)의 높이도 과장되지 아니하고 네 다리도 원형을 잘 표현하였다. 귀갑(龜甲)의 6각문(六角紋)은 부각되었고, 중앙에 일단 높고 확장한 장방형 비신 받침이 있으며, 이 받침 둘레에는 복 연화문(伏蓮花紋) 장식이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선명치 못하다. 이수는 상변 양각을 둥글게 부각한 방형이며 전후 양측에 지붕형 5각면을 구획하고, 내면에 「증각탑비(證覺塔碑)」의 글씨가 전서체(篆書體)로 음각(陰刻)되고 주위는 운용문(雲龍紋)을 아래 부위에 옆으로 여의 두장 운문(如意 頭狀 雲紋)이 양각되어 있다. 이러한 이수의 조형도 부여에 있는 당나라 유인원(劉仁願) 기공비의 계통을 따른 것이며, 이보다 200년을 앞선 경주의 태종 무열왕 비와도 같은 계열의 것이다. 이 비는 9세기 중엽무렵의 것으로서 규모는 강렬하지 않으나 과장되지 않은 고전적인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10) 실상사 백장암석등(實相寺 百丈庵石燈) - 보물 제40호 -
보물 40호로 지정된 백장암(百丈庵) 경내의 석등은 3층 석탑 앞에 상대석 화사석 옥개석의 상반부가 사각형의 큰 돌 위에 놓여 있고, 등의 주석과 하대석은 석탑 북편에 존재하고 있다. 석탑 북쪽의 돌로 된 낮은 축대 위에는 수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으므로 이곳이 본래 백장암의 부처를 모신 대청 자리이고 석등과 석탑이 세워졌던 곳으로 보인다. 따라서 석등과 석탑과 축대 중간인 현재 하대석이 있는 곳이 원위치로 추정된다. 하대석은 방형대석(方形臺石) 위에 중이 쓰는 나무로 대접같이 만들어서 안팎에 칠을 한 그릇을 엎어 놓은것 같은 형(覆鉢形)으로 윗부분에 큼직한 8개의 연꽃을 거꾸로 조각하였고, 그 판을 중심부에 4개의 잎이 조각되었으며 정면에는 1단의 높은 8각 받침을 조각하여 간주를 받치고 있다. 이 받침 둘레에는 입화형 연화문을 조각하여 화사한 받침대를 이루고 있다. 등주는 8각으로서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꼭대기에는 상대석 하면에 만든 구멍에 끼워 뒷 받침대를 고정시키기 위한 단형 돌기가 있다. 각 부분이 8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를 갖추고 있으나 상하대의 조각은 화문양식(花紋樣式) 수법이다.
상대옆의 윗부분의 난간등의 장식은 바로 옆에 있는 석탑의 각 부분 장식과 동일하여 만들어진 연대도 석탑과 같은 시기인 9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11) 실상사철제 여래좌상(實相寺鐵製 如來坐像) - 보물 제41호 -
신라 흥덕왕 3년(829년)에 처음 절을 지어 실상사 극락전 내에 안치된 불상으로서 다른 불상과는 달리 쇠로 만들어진 여래 좌상으로 높이 2.69m에 이르는 아주 빼어난 작품이며 쇠로 만들어 졌기에 수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화재에도 견뎌 내었다. 실상사파의 2대조(二代祖)인 수철 국사가 석탑(실상사 내)과 함께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 여래좌상은 4천근의 철로 만들어진 아주 큰 불상으로 그 양식은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이다. 따라서 신라시대의 불상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모습을 살피면 먼저 두부(머리부분)는 9세기 경에 유행하던 나상(螺狀)으로 된 부처의 두발에다 육계는 얇아서 불분명 해졌으며 귀는 긴 편이다. 목의 삼도는 간격이 좁혀져 있다. 얼굴의 형상은 원만하고 탄력이 있으며, 얼굴의 길이는 비교적 짧으나 눈썹과 눈이 시원스럽게 길고 부처의 눈썹 사이에 난 터럭으로서 광명을 무량세계에 바친다는 백호가 뚜렷하여 전체의 표정은 근엄하게 묘사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당시 유행하던 얼굴 형상으로 점차 격식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깨의 선은 부드럽고 가슴도 풍만하게 처리되어 굴곡있는 표현이지만 너무 둔하고 무거운 느낌과 상체의 중심이 앞으로 기운듯한 부자연스런 모습을 풍겨주기도 한다.
배면(背面)은 구멍이 뚫려 있었으나 지금은 나무로 막았으며 팔 부분은 나무로 보수한 것으로서 원래의 모습은 아니다. 불상 전체의 부분 부분에 철흔이 나타나 있으며 특이하게 쇠로써 만들어진 불상으로 당시 널리 유행하던 불상의 양식을 따른 작품이다.
12) 백장암 청동은 입사향로(百丈庵 靑銅銀 入絲香爐)
- 보물 제420호 -
실상사에 있는 백장암 청동 은입사 향로는 1965년 7월 16일자 보물 42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전주 시립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 향로는 청동 밑 바탕에 은실로 상감한 향로로써 구연면(口緣面)이 넓은 완형(椀形)과 아래받침(下臺)이 나팔형으로 퍼진 높은 받침을 단 일반적인 향완(香椀)이다. 완부(椀部)와 대부(臺部)는 따로 따로 만들어 연결 시켰는데 정교하고 세밀하며 치밀하게 은실로 상감한 수법(銀絲象嵌手法)으로 새겨져 있는 글이 특징이다. 이 새겨져 있는 글(銘文)은 구연면(口緣面)의 안쪽에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운봉백장사 은사향 완대 시주 윤권득 김소혜□□□, 이세한천국가현 영방종국 유방국국삼국가변 만력 12년 갑신 3월 주성 화주 묘정 김중구 근반(雲峰百丈寺 銀糸香 椀大 施主 尹權得 金 笑惠口口 李世閑天國假玄 靈方宗國 維方國國 三國可變 萬曆 十二年 甲申三月 鑄成 化主 妙正 金重九 斤半)’이라 기록되어 있다.
※註:萬曆 12年은 조선선조(朝鮮宣祖) 17年(1584)에 해당한다.
대부(臺部)를 보면 나팔 모양으로 넓어진 아랫 받침의 밑면에 가늘고 둥근모양의 받침이 있고 그위에 말각(抹角)된 굵고 둥근 모양의 받침이 있으며, 둥근 통으로 좁혀진 윗끝에도 가늘고 굵은 두겹으로 우뚝 나온 둥근 띠(帶) 받침이 있다. 그 위에는 완부(椀部)를 얹어 놓았는데 완부의 밑면에도 넓고 둥근 받침이 있어 완부를 받치고 있다. 은실(銀絲)로 꾸민 상감(象嵌)은 완복부(椀腹部)의 바깥 부분에 가는 선을 두겹으로 둥글게 배열하고, 안쪽 부분에는 경쾌한 꽃 무늬를 둘렀으며 다시 가는 선으로 두겹을 둥글게 둘렀다. 이 둥근 부분의 안쪽 가운데 다시 작은 원(圓)을 두른 다음, 이것을 중심으로 위 아래 좌우(上下左右)에 네개의 크기가 같은 작은 원(圓)을 배치하고 그 작은 원에는 범(梵)자 글자를 새겼다. 완부(椀部)의 저연(底緣)에는 가는 선으로 두 줄에 16개의 꽃잎 무늬가 있는데 각 꽃잎 안에도 장식을 하였다. 그 이외의 완복부(椀腹部) 사이에는 덩굴풀이 뻗어 나가는 모양을 그린 무늬로 가득 새겨져 있다.
평대상 구연부(平帶狀 口緣部)의 윗 면에는 주연(周緣)에 둥근 모양의 우뚝 솟은 띠(帶)를 두르고 두 겹의 가는 선으로 둥근모양(二重細線圓圈)을 배열한 다음, 이 둥근 모양에 쌍구문으로 범(梵)자의 글자를 새겼으며, 문지(門地)에는 역시 덩굴 풀이 뻗어가는 모양의 무늬(唐草紋)가 가득 새겨져 있다.
완저원반(椀底圓盤) 받침과 접한 하대(下臺) 상연(上緣) 받침에는 각각 둘레의 네곳이 바람에 날리어 둥실 둥실 떠 내려가는 구름 모습의 무늬(飛雲紋)가 새겨져 있다.
하대간부(下臺竿部)에는 방패모양(盾形)의 8개의 연꽃잎 무늬가 새겨지고 꽃잎 안에도 꽃무늬가 장식 되었으며 그 아래의 주위에는 연당초문(蓮唐草紋)을 채웠다.
이처럼 향완(香椀) 전면(全面)에 가는 은실(銀絲細線)이 박혀(入絲)있는데 그 솜씨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하면서도 활달하고 우수한 작품이다.
13) 실상사 약수암 목조탱화(實相寺 藥水庵 木彫撑畵)
- 보물 제421호 -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 뒤 약수암에 네모진 나무 판 위에다 주존불(主尊佛)을 중심으로 8보살(菩薩)과 두 존자(尊子)가 아래 두단으로 튀어나게 새겨져 있다. 하단 중앙의 주존불은 나무판에서 약간 튀어 나와 앉아있고 밑에다 받침을 마련하였다. 주존불은 높은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좌상이다. 무릎 아래 옷 무늬를 길게 물결같이 늘어지게 표현한 것은 매우 색다른 것이다.
불신(佛身)과 법의(法衣)의 표현은 조선조 불상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뒷쪽 판면에 새겨진 아취형 거신광(擧身光) 뒤 둘레에는 3중의 연꽃 장식이 조각되었는데 광배 꼭대기에는 커다란 연꽃이 있고 그위 간주 위에는 앙련대에 앉은 좌상, 그 위에 입상, 다시 위에 접한 꼭대기에 역시 앙련대(仰蓮臺)에 앉은 좌상등, 도합 3구의 화불을 수직으로 배열하였다. 주존 좌우에는 오른쪽에 보현(普賢), 왼쪽에 문수(文殊), 그 위측에는 오른쪽, 왼쪽 관음의 4보살로 하단을 메웠다. 이들은 모두 높은 앙련(仰蓮) 또는 복련대 위의 입상으로서 머리 위에 화관을 쓰고 보병(寶甁) 꽃가지 등을 들었고, 사이 사이에는 연뢰(蓮雷)가 각출(刻出)되어 있다. 상단은 오른쪽 중앙으로부터 아난 존자(阿難尊者)와 월광 지장(月光 地藏) 두 보살을, 왼쪽은 중앙으로 부터 가엽 존자(迦葉 尊者)와 일광(日光), 미륵(彌勒) 보살을 각각 배열 시켰는데 모두 앙련 위의 입상이다. 두 존자는 머리 위에 육계(肉계)가 있고 지장(地欌)은 보관(寶冠)이 없는 깎은 머리인데 나머지 보살들은 화관을 쓰고 있다.
오른쪽 지장은 석장(錫杖)을 들고 왼쪽 미륵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왼손은 구부리고 있으나 나머지 입상은 합장을 하고 있다. 입상 뒤쪽의 간지(間地)에는 연뢰(蓮雷)와 화불(化佛) 등이 조각되었다. 이 불탱(佛撑)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어 1782년 (正祖6년)에 제작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건릉47년 임인 11월 방장산 실상사□□□ 제불 □□□ 정(乾隆四十七年 壬寅十一月 方丈山 實相寺 □□□ 諸佛 □□□ 幀”
지금까지 알려진 목조 불탱의 예로는 문경(聞慶) 대승사(大乘寺), 상주(尙州) 남장사(南長寺), 서울 경국사에 있는 것 등인데, 실상사 불탱은 대작은 아니나 유례가 드문 목각 불탱의 한 예로서 한장의 목판에 조각한 것도 색다르다.
14) 실상사극락전(極樂殿) 지방유형문화재 - 제45호 -
실상사 극락전은 서편 증각대사(證覺大師) 응료탑비(凝蓼塔碑)가 서 있는 후방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사적기(寺跡記:절의 역사를 적은 책)에 조선 순조31년(서기1831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곧 조선 말기에 건축된 것으로 비교적 규모가 작고 간략화된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정면은 3칸, 측면은 2칸으로 되어 오량(五梁) 맛배 지붕의 주심포(柱心包) 양식인데 둥근 기둥의 높이는 269m, 정면의 길이는 6.55m, 측면은 4.88m, 정간의 너비는 3.5m이고, 2개의 분합문(分閤門)을 달고 좌우칸은 너비 1.70m로 정간보다 좁으며 한쪽에 합문(閤門)을 달았다.
기둥의 맨 꼭대기에는 평방(平枋)을 지르고 그 위에 외일출목(外一出目)의 주심포(柱心包)를 짜서 내목(內目) 도리와 외목(外目) 도리를 받쳤는데, 살미 끝은 길게 뻗어지게 한 소 혓바닥형인 우설형(牛舌型)을 이루고, 이제공(二諸工)은 이보다 짧게 살미 끝이 위로 돌려 앙설형(仰舌形)으로 되어 있다. 정간 주심포 사이에 극락전(極樂殿)이란 현판을 달았다. 측면은 3개의 평주를 세워 기둥 위에 대들보를 자르고 그 위에 2개의 용자루를 세워 중종보를 받치고 중종보 중간에 동자주(童子柱)로 대공을 세워 용마루 도리를 받고 있다. 기둥높이 이상의 윗 부분에 해당하는 곳의 측면은 아랫변이 직선으로 된 바람막이 판자를 대어 놓고 있다.
내부를 보면 중간에 고주(高柱)를 세워 놓고 앞뒤에 퇴보를 걸고 안기둥에 닿은 부분에 불단을 짜고, 불단의 윗 부분에 중종 보를 붙여 우물 천장을 달았다. 불단에는 아미타 여래(阿彌陀如來)의 좌상이 안치 되었는데 수년 전까지만 해도 그 좌우에 0.60m 정도의 정교하게 조각된 목조 보살 입상이 보처불(補處佛:본부처를 모시는 부처)로 아미타 여래불을 모시고 있으나 현재는 행방 불명이 되었다.
나.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 사적지 104호-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서쪽 해발 화수산(반월산) 남쪽에 우왕 6년(1380)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섬멸한 황산대첩을 기리기 위하여 비를 건립한 곳이다.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는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 장군이 인월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선조 10년(1577)년 8월 당시 전라도 관찰사 박계현이 고려사와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고증하여 조정에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아 호조판서 김귀영이 글을 짓고 운봉현감 박광옥이 모든 공사를 담당하여 비를 세웠다.
건립 당시에는 전각 3칸, 전문 1칸, 수직료 5칸, 직사 3칸이 있었고, 승장 1명과 의승이 1개월씩 번갈아 가면서 관리하였다.
지금도 그 때 비각 지주 초석이 남아 있다. 대첩비는 높이 4.25m에 용각한 이수(용두관석-龍頭冠石)를 얹고 약 1.20m 높이의 귀부 위에 세웠다. 서쪽에 어휘각이 있는데 <운성지> 전편에 의하면 암벽에 ‘‘동고록(同苦錄)’’과 ‘‘정왜경신이신(征倭庚申李神)’’이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당시 전투를 같이 했던 8원수와 4종사의 이름이 새겨졌다고 전하나 나머지 글자는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1945년 1월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에 따라 남원경찰은 소방대를 동원하여 이 비를 폭파한 뒤 비문 각자를 말소시켜 버렸다.
1956년에 거국적으로 이의 복구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정부의 적극적인 협력과 보조로 그 이듬해 1957년(정유) 10월 27일에 옛 제도대로 마련하였다.
건국 후 1958년 비(碑)를 비지(碑址)로 사적 104호로 지정하고 당시 200만 환의 국고보조로 파괴된 귀부를 다시 맞추고 그 위에다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을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다가 정화계획에 의하여 단장되었다.
1991년 남원 문화원에서 발간한 <황산대첩과 유적>이란 책자를 참고하여 황산대첩비지 연혁을 정리하였다.
선조 10년(1577) 8월 운봉현감 박광옥의 공사 담당으로 화수산에 비건립.
현종 8년(1667) 10월 운봉현감 허제가 관찰사 민진원의 장계로 황산비각 건립.
고종 19년(1882) 운봉현감 이두현이 어휘각을 건립하였다.
1944년 7월 15일 남원 경찰은 소방대를 동원하여 전각과 대첩비, 어휘각의 8원수 4종사가 석각된 바위를 파괴하였다.
1957년 10월 황산대첩비 복구위원회에 의해 대첩비 중건.
1958년 5월 대첩비지 경역 9,375평을 사적 104호로 지정. 황산대첩사적비 건립.
1971년 화수천 제방 및 교량 가설.
1973년 어휘각 건립 및 경내 조경과 황산대첩기념비 건립.
1977년 폭파된 파괴비를 안치할 파비각 건립.
1982년 비각 4동 및 부속건물 일체의 번안 공사와 안내판 이전 설치.
1986년 11월 1일 운봉애향회 주관으로 황산대첩제 행사 실시.
1989년 4월 남원 문화원에서 황산대첩과 피바위 표석 건립.
<표 8-24> 운봉지역의 지정 문화재 현황(1990.7 현재) - 남원지(1994)
종류별 지역별 | 국 가 지 정 문 화 재 | ||||||
국보 | 보물 | 사적 | 천연기념물 | 민속자료 | 중요무형 | 계 | |
운봉읍 | 1 | 1 | 2 | ||||
동 면 | |||||||
아영면 | |||||||
산내면 | 1 | 11 | 1 | 1 | 14 | ||
계 | 1 | 11 | 2 | 2 | 16 | ||
남원시 | 1 | 21 | 5 | 1 | 3 | 1 | 32 |
전 북 | 3 | 61 | 20 | 17 | 12 | 2 | 115 |
도 지 정 문 화 재 | 총계 | ||||
유형 | 기념물 | 민속자료 | 문화재자료 | 계 | |
1 | 1 | 3 | |||
1 | 1 | 1 | |||
1 | 1 | 1 | |||
2 | 2 | 16 | |||
2 | 2 | 1 | 5 | 26 | |
15 | 7 | 3 | 19 | 44 | 76 |
100 | 62 | 17 | 106 | 285 | 400 |
<표 8-25> 지 정 문 화 재 목 록 (1997년 현재)
종별 | 지정번호 | 명 칭 | 수량 | 소유자 | 소 재 지 | 지정년월일 | ||
국보 | 10 | 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 | 1기 | 백장암 | 산내,대정 975 | 62.12.20 | ||
보물 | 33 | 실상사 수철화상능가 보월탑 | 1기 | 실상사 | 산내,입석50 | 63.1.21 | ||
″ | 34 | 실상사 수철화상능가 비 | 1기 | 실상사 | ″ | ″ | ||
″ | 35 | 실상사 석등 | ″ | ″ | ″ | ″ | ||
″ | 36 | 실상사 부도 | ″ | ″ | ″ | ″ | ||
″ | 37 | 실상사 3층석탑 | 2기 | ″ | ″ | ″ | ||
″ | 38 |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비 | 1기 | ″ | ″ | ″ | ||
″ | 39 | 실상사 증각대사 응료탑 | ″ | ″ | ″ | ″ | ||
″ | 40 | 실상사 백장암석등 | ″ | 백장암 | 산내면 대정리 | ″ | ||
″ | 41 | 실상사 철제여래좌상 | ″ | 실상사 | 산내면 입석 50 | ″ | ||
″ | 420 | 백장암 청동은 입사향료 | ″ | 실상사 | 전주시립박물관 | 65.7.16 | ||
″ | 421 | 실상사 약수암 목조탱화 | ″ | 약수암 | 산내,대정 산 15 | 65.7.16 | ||
사적 | 104 | 황산대첩비지 | 7,121평 | 남원시 | 운봉읍 화수리 | 63.1.21 | ||
309 | 실상사 일원 | 89,486m² | 실상사 | 산내면 입석 50 | 84.10.19 | |||
주요 민속 자료 | 5 | 실상사 석장승 | 2기 | 실상사 | 산내 입석 | 69.12.15 | ||
5 | 실상사 석정승 | 1기 | 실상사 | 산내 입석 | 87.7.3 | |||
20 | 서천리 당산 | 2기 | 국유 | 운봉 서천 348-1 | 70.5.20 | |||
도 유형 | 45 | 실상사 극락전 | 1동 | 실상사 | 산내 입석 50 | 74.9.27 | ||
88 | 실상사 위토개량성책(토지대장) | 1책 | 실상사 | 산내 입석 50 | 79.12.27 | |||
138 | 실상사보광전 범종 | 1기 | 실상사 | 산내 입석 50 | ||||
도지정기념물 | 10 | 유곡 및 두락리 고분군 | 1원 | 남원시 | 아영 두락 산 28 동면 유곡 746 | 73.6.23 | ||
38 | 아막성 | 1원 | 사유 | 아영 성리 83 | 77.12.31 |
제9장 민속
1. 개관
운봉읍, 동면, 아영면, 산내면으로 구성된 이 지역의 일상적인 생활은 6․25이후 전통적인 농업에 기초한 생활이 커다란 변화를 겪어 왔다. 도시의 영향을 받은 점도 있고 학교에서 과거 민속신앙을 미신이라고 가르치고 교회가 확산되어 과거에서부터 내려오는 민속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늘었으며 또한 많은 젊은층들이 도시로 진출하여 인구가 줄게됨으로써 전통적 생활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전통적 생활은 대부분 전통적인 논농사에 의존하는 것으로 간단한 농기구와 소 그리고 사람의 손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생겼던 각종 조직이나 생활관습도 경운기, 이앙기, 탈곡기 등의 다양한 농기계 등장하고 제초제와 비료 등의 사용이 급증하면서 공동노동의 필요성이 급감하면서 두레나 술맥이 또는 공동체적인 마을신앙이 없어지거나 약화되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제초제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면서 공동으로 제초작업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따라서 두레를 더 이상 조직해야할 필요도 없어졌다. 물론 이전부터 두레가 없어진 마을도 있지만 제초제의 등장으로 두레작업이 아주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공동으로 모를 내고 풀을 매는 공동노동조직이 사라졌을지라도 아직도 많이 약화된 상태로 마을의 소수가 참여하지만 마을공동의 신앙형태가 여러가지로 지속되고 있다.
60년대 이후 젊은층이 대대적으로 도시로 이주하면서 마을내의 공동체적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장년 이상과 노인들이 생활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청장년들이 참여하고 주도했던 4H구락부나 새마을운동도 정부정책의 변화와 함께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그대신 도시에 거주하는 여러 자식과 친척들과의 접촉이 크게 증가하였고, 교통이 발달하여 남원이나 전주 또는 서울에의 방문이나 또는 상품구매가 크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도시적 가치관을 주로 반영하는 학교교육과 방송매체(특히 텔레비젼)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에 따라 도시적 사고방식, 즉 개인주의 그리고 돈을 벌어서 잘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나 농촌이 도시보다 낙후되었다는 생각이 증가하였다.
2. 1970년대의 마을생활
문화재관리국에서 1971년 출간된 ��전북민속종합보고서��에 윤근섭교수(전북대 사회학과)가 東面 西茂里 西茂部落에 대한 마을생활을 조사한 것이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여기에 싣는다. 시대상활을 고려하여 문장과 단어 등에 몇가지 첨삭을 가하였다.
서무부락은 동면 서무리의 한 자연부락으로 지리산록 해발 470m의 고원에 위치한 산간부락이다. 동으로는 경남 함양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서로는 운봉을 지나 28km의 거리를 두고 남원시소재지가 있다. 농산물로는 쌀과 연초재배 및 양잠을 주로 하는 혼작지대이며 이 고장의 특산물로는 목기가 유명하다.
원래 서무리는 朝鮮初 南原府 雲峰縣 引月驛에 속하던 하나의 里로써 일제시 군읍면의 개편에 따라 동면 서무리라 개칭되었다. 서무리는 4개의 자연부락- 西茂, 桂岩, 新村, 社創부락-으로 나누어 졌으며, 20여호를 기준으로 9개반으로 편성되었다. 이러한 행정조직은 행정상 필요로 하는 것이고, 4개부락이 하나의 통일적 조직을 가지고 리를 움직이며, 합동작업을 하고 있다. 합동을 하는 경우에는 서무부락이 지도적 지위를 점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주민의 인구나 호수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서무리는 1971년 243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 중 서무부락이 91호를 차지하고 있다. 서무리에는 里長과 參事가 있으며, 4개의 자연부락에는 각각 자치회장과 반장이 있다. 이장은 명예직으로서 里를 대표하고 里의 업무를 총괄하며, 參事는 이장의 지휘 감독하에 里內의 행정사무를 전담하고 있다. 그러나 부락수준에서의 실제의 모든 사무는 무보수인 자치회장이 맡고 있다. 자치회장은 里參事로부터 도로작업구역을 배정받아 4개반에 그 구역을 할당하며, 면과의 행정사무를 연락하고 부락사업을 위한 출역 등을 명하고 각종 회비를 책정하여 각 가구에 할당하고 있다.
따라서, 里는 행정단위의 역할을 담당할 뿐, 촌락내의 인간관계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里단위보다 오히려 부락을 단위로 결속되는 것이 보통으로, 촌락이 내부적으로도 뚜렷한 전통과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서무부락은 씨족 구성을 보면 91호 중 同福 吳氏가 18호, 海州 吳氏가 17호, 咸陽 朴氏가 8호, 東來 鄭氏가 12호, 金海 金氏가 5호, 全州 李氏가 4호, 達城 徐氏가 3호, 密陽 朴氏, 羅州 林氏, 長水 黃氏, 慶州 金氏, 南原 梁氏, 靈光 柳氏, 漢陽 趙氏가 각각 2호, 邢氏, 崔氏, 韓氏, 尹氏, 張氏, 金氏가 각각 1호로 혼성부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부락의 형성은 지금부터 약 300년전 전북 운봉읍 덕산리에 거주하던 同福 吳氏(吳弘俊)가 처음 정주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후 점차 동래 정씨와 함양 박씨, 해주 오씨가 입주하면서 호수가 증가하였다. 91戶에 주민 680명을 가진 이 부락은 과거에는 班村으로 행세하였으며, 4-5년 전만 하더라도 4가구의 常民이 남아 있어 齊直이와 동네 하인노릇을 하고 있었고, 이들에 대한 하대는 언행과 결혼에서 뚜렷하였다.
동네 하인은 부락 입구에 있는 부락회관 근처에 3間집에 거주하면서 동네논 4마지기를 경작하여 부락 내의 심부름과 婚喪時에 잡역을 도맡았고, 부락의 일이 없을 때는 타부락의 일을 품삯을 받고 해주었다. 하인의 職은 대개 당대에 그쳤지만 부락민으로부터 하대를 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면 타지로 전출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전에 동네 하인을 지냈던 이성팔(남, 55세)씨가 대표적인 예로 그는 71년에는 남원시내에서 도로보수 등 잡역에 종사하고 있는데, 부모의 묘가 서무부락에 있기 때문에 몇 년에 한번씩 오지만 촌로들은 그를 하대하는 말투로 대하고 있다. 2대를 무당을 지냈던 박길용(사망) 박운용(남, 67세)형제도 자기들의 신분이 잘 알려지지 않은 就岩부락으로 이사를 갔지만 이들 형제의 아들들은 동네사람들의 하대때문에 고향을 찾아오지 않고 객지로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이러한 常賤에 대한 하대는 해방이후 민주주의 도입에 따라 班常에 대한 관념이 변하고 부락내의 젊은이들이 군대를 경험하고, 학교교육의 영향을 받아 약화되었지만 아직 상민출신들은 상민끼리 객지 혼인을 하고 있었다.
인구 구성에 있어서 이 부락의 성비는 여자 100에 남자는 100.58로 거의 같은 수이다. 5세단위로 봤을 때, 20-24세, 50-54세, 60-64세의 연령집단에서만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 많고 나머지는 남자가 여자보다 조금 많다. 그리고 연령별 인구구성에 있어서 한가지 특징은 비생산년령에 속하는 15세이하와 55세이상의 인구가 전부락의 인구중 54.4%(370명)나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자원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10살 단위의 인구구성은 다음과 같다. 0-9세(남 108명, 여 101명), 10-19세(남 87명, 여 81명), 20-29세(남 47명, 여 41명), 30-39세(남 28명, 여 32명), 40-49세(남 33명, 여 28명), 50-59세(남 21명, 여 29명), 60세 이상(남 27명, 여 24명).
주민의 교육정도는 국민학교 교육을 받았거나 현재 다니고 있는 사람이 전체인구 중 44.7%이며, 중학교와 고등하교 이상 과정이 각각 8.38%, 2.34%를 차지하고 미취학이나 불취학(한문공부나 국문해독)이 33%, 문맹률은 16.53%를 차지하고 있다. 서무부락이 산간부락으로서 지리산록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은 것은 부업으로서 목기제수입이 많아 생활수준이 높고 국민학교와 중학교가 부락에서 800m 떨어진 서무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민들의 직업은 시장의 중개업 1, 행상 2, 노점 1, 상업 10, 공무원 1, 목공 1, 도정기술자 1, 무직 1을 제외하고는 모두 농업이며 부업으로 양잠을 하고 있었다. 2년전만 하더라도 이 부락은 운봉면, 산내면과 함께 전국적으로 유명한 목기생산지였기 때문에 목기행상을 하는 가구가 12호나 되었으니 다 없어졌다.
해발 470m의 산간부락이지만 이 부락은 분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논 150,312평, 밭 57,867평의 경지면적과 임야 1,312,500평을 가지고 있다. 경지면적별 농가호수를 보면 5단보(1,500평)미만이 32호, 5단-1정보(3,000평)가 20호, 1정보-2정보가 15호, 2정보이상이 10호로 5단보미만의 농가가 전체농가의 41.6%이며 1정보미만까지 합하면 67.6%나 되어 대부분이 영세농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산간지대의 경지면적이 평야촌보다 넓은 것이 보통인데 이 부락의 호당 평균경지면적은 2,703평으로 1967년도 전국 농가 호당 평균경지면적 2,924평보다 적은 면적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는 쌀, 보리가 주산물이며 숫, 모밀, 감자, 고구마, 면화, 대마, 들깨, 무우, 배추, 마늘, 파, 외, 호박, 쑥갓, 山菜, 고사리와 환금작물로 담배를 재배하고 있다. 이중 주식을 제외한 기타 농산물은 자가소비에 대부분 충당하고 있다. 특히 담배는 일베시에는 강제로 재배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약 50호가 경작하였으나 지금은 2-3호만이 재배하여 연초수납장에 팔고 있었다.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외에 얻는 수입으로는 가내수공업으로서 목기제조의 수입, 가족들의 품삯, 양축수입, 양잠수입, 산림수입(나무장사 포함)이 있다. 이중 목기제조는 약 40년 전부터 내려온 서무부락의 중요한 부수입원으로 그 제조과정은 다음과 같다.
목기의 재료는 지리산 중턱과 상봉에 분포되어 있는 거자수, 오리나무, 피나무, 들나무인데 이들 원목을 토막으로 만든 다음(乾木) 模型을 바로 잡고(초갈이) 이를 건조시킨 후 갈이틀에 넣어 재갈이를 한 다음 칠을 칠하고 칠이 고르도록 샌드페퍼로 문지름 다음에 물걸레와 마른 걸레로 손질을 하고 재차 삼차 칠을 한다. 옷칠이나 카라이트칠을 마지막으로 입힌 후 그늘이나 방에 말린다. 원목에서 칠을 입혀 목기가 나오기까지는 대략 2개월정도 걸리며 목기제조에 사용되는 도구로는 갈이틀, 칼대, 망치, 곡자 등인데 이 부락에서 생산되는 목기로는 쟁반, 밥통, 찬합, 찻판, 대전, 재털이, 제기, 나무접시, 외동, 술병, 등잔대 등이다.
서무부락은 처음에는 산내면과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목기를 사다가 옷칠만 입힌 후 팔았으나 별로 수지가 맞이 낳아 갈이틀을 구입하여 직접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목기제조업이 성할 때는 부락 내에 개인공장이 4개, 깎는 공장이 2개나 있어 년생산량이 3천만원에 이르기도 하였다. 숙련공이 만들어 내는 목기는 뱅반이나 찬합과 같은 것은 1일에 15개, 작은 제품은 100여 개에 이른다. 숙련공이 되려면 대개 1년 정도 걸리는데 이 기간 중에는 주인집에서 침식을 제공한다. 숙련공이 된 후에는 목기 1개를 깎는데 20-25원의 보수를 받는다.
1936년경 양문재(남, 54세), 정운영(남, 53세), 이재홍(남, 50세)씨 등이 목공술을 배워 숙련공을 양성시킨 후 부락의 유일한 특산물이 된 목기는 2년 전부터 공장의 폐쇄와 함께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의 중요한 원인은 지리산 도벌사건 이후 산림보호의 엄격한 법규때문에 벌목허가를 얻을 수 없어서 원목을 구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근래에 값이 싸고 모양이 좋은 플라스틱제품이 대량생산되어 목기의 수요가 격감하게 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오정민씨(자치회장, 34세)는 지적하고 있다.
서무부락의 농가는 평야촌의 다른 농가들과 마찬가지로 자기가족의 농업노동력이 부족하거나 없을 경우에는 가족이외의 타인노동을 투입하여 농사를 짓고 있다. 이러한 노동에는 교환노동인 품앗이와 공동부역 및 고용노동이 있다.
품앗이는 1대1의 교환노동으로서 자기집의 노동만으로 부족한 경우 서로 노동력을 교환하여 고용비용을 절약하는 것이다. 품앗이를 신청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개는 이에 응하고 품앗이를 짠다. 대개 5-6명이 짜고 크면 10명 정도까지 짜고 있다.
품앗이로 하는 노동은 농사전반에 걸쳐 있으며 특히 못자리, 퇴비용 풀을 벨 때, 모내기나 김매기, 8, 9월의 추수, 지붕에 볏집으로 이엉을 만들어 올릴 때 많이 한다. 특히 이 부락에는 부녀자로만 된 품앗이가 있는데 주로 밭갈이나 풀베기(보리풀), 삼을 째고 삼을 때 많이 짠다.
품앗이는 노임을 지불하는 일이 없고, 다만 일을 해 받는 집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보통 점심과 저녁의 두끼를 내고 간식으로 아침과 저녁, 새때에 줄을 내고 있다. 남자의 간식은 술이지만 여자의 경우는 국수와 감자를 삶아 두차례 내고 있다.
품앗이는 자기가 이용하는 다른 사람의 노동에 대하여 직접 자기의 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남자 1일노동은 남자 1일노동으로, 여자 1일노동은 여자 1일노동으로 서로 노동능력이 비슷한 사람기로 1대1로 교환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품앗이 자체가 완전히 몇사람의 교환노동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신뢰를 전제로 한 인간관계이므로 노도의 종류나 능력, 시간에 관하여서는 어느 정도 過不足을 서로 용인하고 있다.
품앗이에는 비록 인간의 노동력만이 아니고, 소나 농기구 같은 것도 이에 참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무부락에도 인간과 축력과의 교환인 환고지가 지금도 있다. 이것은 생산수단으로서의 농우를 가지고 있지 않은 농가가 다른 사람의 役牛를 1일 사역하는 대신 그집에 가서 하루동안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통 환고지의 경우 소-사람1일 논갈이에 대하여 한 사람이 3일간의 노동을 제공하거나, 3일의 노동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에는 이에 해당하는 품삯(가래삯이라고 함)을 제공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지만, 이 마을에서는 역우(役牛)와 인간노동력이 1대1로 교환되고 있다.
생산의 주가 되고 있는 농업과 관련된 노동형태로는 공동노동으로서의 추수기의 운력이 있다. 등짐이라고 불리우는 이 운반작업은 술과 밥만 접대받고 논에서 앞마당까지 부락내의 장정들이 지게질로 벼짚단을 운반하는 무보수의 작업이다.
고용노동은 年雇로서 머슴노동과 季節雇, 日雇가 있는데 서무부락에는 계절고가 없다. 머슴은 정월에서 섣달까지 1년동안을 기간으로 농가에 고용되어 주인집에 숙식을 하면서 주인의 지시에 따라 모든 농업에 필요한 노동을 제공하는 남자노동자로서 77호의 농가중 20호에서 27인의 머슴을 고용하고 있다.
머슴의 하는 일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풀을 베다가 토비를 장만하거나 경지를 돌보고, 낮에는 논과 밭에 나가서 들일을 해야 하며, 밤이 길어지면 머슴방에서 밤늦도록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고 농구를 손질해야 하는 일은 옛날과 마찬가지 이다. 특히 중요한 농사일은 역시 논농사인 移秧, 除草, 收穫, 運搬 및 打租 등의 일이고 농기계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일에 많은 육체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머슴들은 대개 청장년층이 많다.
머슴은 머슴살이를 한 대가로서 주인집에서 숙식을 제공받고 새경(1년연봉)과 철에 따라 옷 세벌, 고무신과 담배를 지급받는다. 상 머슴의 새경은 쌀 16가마, 중머슴의 새경은 쌀 12-14가마 정도다.
日雇노동에는 품팔이가 있다. 서무부락에서는 가족노동 또는 품앗이로서도 소요되는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는 경우에는 필요한 경우마다 품팔이 노동은 고용한다. 남자의 품을 사는 경우에는 주로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농사일을 거두는 경우인데 점심과 저녁을 제공하고 200원을 지급하며, 품을 파는 사람이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에는 1일 400원을 지급하고 있다. 여자들은 밭갈이, 이앙, 추구, 길쌈과 가마니를 짜는 때에 대개 품을 팔고 있다.
서무부락의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장은 일월장과 경남의 함양장이다. 인월장은 부락에서 약 1km 떨어진 면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매 3일과 8일에 서고, 함양장은 2일과 7일장이다. 인월장이 서기 전까지는 남원장과 함양장을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소를 구입한다든가 혼수감을 장만하는 특수한 경우랄지, 장사군이 상품을 사기 위하여 가는 경우 이외에는 대부분의 부락민들은 인월잘을 이용하고 있다. 인월장은 3일과 8일에만 열리는 정기시장이므로 장날 이외에는 덮개가 되어있는 장옥은 텅텅비어 있어 물건을 구입하려면 면소재에 있는 각 점포까지 가야한다. 도로연변에 잡화를 늘어놓고 파는 점포가 13개가 있다.
부락민이 시장에 파는 물건으로는 쌀, 콩, 판, 소, 돼지, 채소, 山菜, 누에고치, 大麻, 달걀, 곶감 등이고, 사는 물건으로는 농기구, 씨앗, 비료, 생선, 건어물, 육류, 소금, 옷감, 석유, 고무신, 성냥, 비누 등 일상생활필수품이다. 시장에 가는 사람은 부락에서 보통 2-3인씩 짝을 지어가며 자기집 물건뿐만 아니라, 동네집 심부름을 의로받고 가는 경우도 많다. 많이 가는 집은 월 5-6회 정도이며 적게 가는 집은 1-2회 정도이다. 장을 보러가는 사람은 주로 남자들인데 여름철 농번기에는 여자가 많이 다닌다.
시장은 우리나라 농촌에서는 유일한 교역기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상거래가 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 부락에는 봄과 가을철에 많은 도붓장수가 내왕하여 곡물과 상품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봄철에 오는 도붓장수는 주로 죽물과 부녀자의 화장품을 가지고 마을을 순회하며, 가을철에는 양말과 옷감, 쉐타 등을 가지고 호호방문 하는데 주로 남원, 담양, 대구지방에서 온다.
더욱이 장이 서는 인월에는 면사무소, 지서, 국민학교와 중학교, 농촌지도소, 우체국, 농협지소, 각종 신문지국, 병원과 약국, 다방과 음식점이 있고, 남원과 함양, 산내면으로 통하는 버스터미날이 있기 때문에 시장은 교역기관이라는 경제적 기능 이외에도 부락민에 대하여 외부세계와 접촉토록하는 장소가 되며 문물의 소개 및 전파, 외부의 뉴스원, 사교장, 오락장, 위생기관 등의 경제외적 기능도 수행하고 있다.
부락내에 있는 사회조직으로는 제 집단과 단체, 기관 및 부락회의가 있는데 부락의 사회적 연대는 이러한 여러가지 사회조직을 통해서 잘 표현되고 있는 바를 이를 대별하면 형식적인 조직과 비형식적인 조직으로 나눌 수 있다.
형식적인 조직으로서는 이미 설명한 행정단위로서의 리와 20세 이상의 성년으로 구성된 자연부락단위의 자치회, 개발계, 협동조합 등이 이에 속한다. 부락전체를 포함하는 개발계를 살펴보면 개발계는 부락내의 제반 사업운영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시하며 이를 종합평가함으로써 자조자립정신을 함양하고저 조직된 것으로 매월1일 전계원(전세대주)이 회의에 참가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수시로 임시총회를 소집한다. 의결기관으로서 총회가 있고 집행기관에는 계장 1인과 서기 1인, 감독기관으로서는 평의원회가 있다. 개발계의 산하에는 청년회, 부인회, 4H클럽, 유치원, 지역사회학원이 있다. 청년회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31-41세까지의 남자면 누구나 가입되며, 농사개량, 4H클럽지도, 유치원과 지역사회학원의 후원, 부락내의 풍기단속, 부락민의 응급치료 등의 활동르 하고 있다. 회장, 부회장, 총무, 체육부장, 위생부장 등이 각 1명씩 있다.
비형식조직에는 품앗이와 두레, 계 등이 있다. 품앗이는 이미 설명하였으며 두레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서무부락에는 1963녀까지 두레가 있었다. 이 두레는 사적인 노동인 품앗이에 대한 공적인 공동노동협업조직으로 부락내의 전농민이 부락내의 경작지에 대해서 自他의 구별없이 대단히 조직적으로 일제히 집단작업을 하는 조직이며, 각호의 경지면적과 노동력에 따라서 나중에 그 차액만ㄴ을 삯으로 수수하는 것으로서 흔히 農社라는 조직 밑에서 실시된다. 그런데 이러한 農社에는 부락내에 있는 모든 장정들이 참가하는 것이 원칙으로서 서무부락에서는 남자가 15세에 달하면 두레의 최고책임자인 行首의 결재에 의하여 정식으로 두레에 참가하게 된다. 측 行首는 완전한 사람의 몫의 노동을 할 수 있음을 공인해 주는 것이다.
두레의 규모는 매가구마다 1명씩 의무적으로 出役하기 때문에 70-80명으로 조직되었으며 부락입구의 사랑방에서 짰었다. 두레는 벼 모종 때부터 수확시까지 여러번 조직되었고, 보통 2-3일간 지속되었다. 이앙과 추수뿐만 아니라 이 부락에서는 논매기 전에 토비를 장만하기 위해서라도 두레를 조직하였다.
두레에는 行首와 上座, 公員, 司令 등의 간부와 졸병이 있는데 行首는 두레의 최고책임자로서 작업의 순서를 정하고 座上과 公員은 년노한 사람 중에서 통솔력이 있는 사람이 선출되었는데, 이들이 하는 일은 작업개시와 휴식의 令을 내리는 일이며, 司令은 주로 농사 일을 감독하고 작업을 태만히 하는 자에게 笞罰을 가하였다. 그러나 이들 간부들의 기능은 절대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두레의 간부들이 그들의 직분을 완수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졸병들이 간부들에게 논물을 먹여 곤욕을 치르게 하였기 때문이다.
작업은 보통 아침 일찍부터 저녁가지 계속되지만 휴식과 식사, 午睡, 奏樂시간을 제외하면 1일 8시간 정도였다. 특이하게도 일을 하게된 농가에서는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 각자 해결하도록 하였지만 술은 1마지기 당 막걸리 2되를 내어 3-4차의 휴식시간에 마시도록 하였다.
이 부락의 두레에는 농기와 농악이 따랐다. 농기에는 큰 기(숨령기)와 작은 기(암령기) 두개가 있는데, 큰 기의 깃대는 6-7m, 가폭의 모양은 폭의 길이가 3-4m 정도이고 그 폭의 가로는 1m쯤의 크기인데, 그 가운데에 「農者天下之大本也」라고 대서하고 옆에 작은 글시로 「西茂農廳」이라고 써 졌는데 이를 작업하는 논두렁에 꽂아 두었다. 농기의 권위는 대단하여 농기가 꽂혀 있는 논두렁은 제 아무리 양반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만 하였다.
농악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 장비로는 징 1, 꽹과리 3, 장고 1, 북 2, 소고 10, 벙거지 3, 고깔 및 색복 10여벌이 있다. 요즈음도 농사를 짓는 경우나, 정월보름에서 2월초까지는 농악을 치는데 주로 부락의 공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마당밟이를 할 때는 부자는 쌀 1말, 보통정도의 생활을 하면 2-5되 쯤 내야한다.
서무부락에는 여러 계가 있다. 위친계, 친목계, 화친계, 향우계, 칠성계, 노인계, 중추계, 산림계가 그것이다. 대부분 친목과 婚喪時의 부조를 목적으로 조직되었고 돈을 모으려는 목적은 없다. 이중 향우계는 청년회의 별칭으로 33명으로 조직되어 있고, 기타의 계원수는 15명 내외이다. 따라서, 계원은 2중3중으로 중첩되어 있다. 중추계는 동답과 부락제를 관리하는 계로 契長 1인, 총무 1인, 有司 2인이 있는데 총무는 금전관리 및 경리사무를 맡고, 유사는 연락과 동원, 제물의 준비를 책임지고 있다.
이상의 계는 대부분 성인남자가 가입하고 있는데 반하여, 동네의 부녀자들은 친목보다도 주로 위친계, 혼인계 등 가족생활과 관련된 계와 그릇계, 찬장계, 광목계와 같은 생활개선과 관계가 있는 계에 많이 가입하고 있다. 즉 이 부락의 주부 41명중 계에 가입한 사람은 30명이고, 1개 가입이 16명, 2개이상 가입이 14명으로 전체의 약 73%가 계에 가입하고 있는 셈이다.
산림계는 부락내에 소재하는 산림의 소유자와 부락에 거주하는 가구주로 구성되는데 산립법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不正林産林物의 단속, 사방사업, 조림과 벌목의 신청이 계의 주요기능인데 총회와 간사회가 있고 계장 1명, 부계장 1명, 간사 4명, 감사 1명을 총회에서 선출하는데 그들의 임기는 2년이다.
부락민의 화목을 도모하고 공동의식과 일체감을 갖게하는것으로 部落祭와 洞會를 들 수 있다. 동회는 1년에 몇 차례 소집되는데 음력 7월백중날에는 중간보고와 함께 도로보수를 위하여 임식총회가 열리고, 음력 정월보름날에는 총결산을 하고, 부락태의 각종집단의 임원개선을 하기 위하여 정기총회가 열린다. 특히 정기총회시에은 전일에 거행되었던 부락제의 제물을 전부락민이 한곳에 모여서 먹고 놀 수 있기 때문에 부락민에게는 더 없는 축제의 날이 되기도 한다.
부락제(1970년에 정운룡, 남, 49세가 祭官으로 선출되었다)는 매년 음력 정월 14일에 올린다. 당산은 부락의 서편 약 200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에 높이 5m, 둘레가 한아름 반이 넘는 神木인 소나무가 서있다. 祭神은 당산할머니(마귀할머니라고 주민들이 부름)인데 이 당산할머니에게 부락의 평나과 부락민의 無事 無病 및 농사의 풍년을 빈다. 제관으로서는 제관 2명(생기가 맞는 내외), 축관 1명으로 세명인데 이들 제관은 동회에서 선출한다. 제관은 喪主가 아니어야 하고, 一家에 임신한 사람이 없어야 하며, 또 월경이 없는 여자야만 된다. 제일 1주일 전부터 선출된 제관은 3일간 沐浴齊戒하고 근신하고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하여 제관 집의 문밖의 공동우물 주의 네곳에 황토를 쌓아 놓는다. 祭需감을 場보기 하는 有司와 祝官을 제외한 부락민들은 금기가 되어 있는 이곳을 결코 방문하지 않는다.
祭祀 전날에는 神木의 주위 10여평에 금줄을 치고 안밖을 청소한다. 부락제에는 제관과 축관 등 3명만 참가하는데 그 순서는 陳設 -> 焚香 -> 獻酌 -> 拜禮 -> 祝文朗讀 -> 燒紙燒却의 순서이다. 진설과 헌작은 제관이 하고 축관은 분향과 축문을 낭독한다. 여자제관은 有司가 장에서 사온 물건으로 祭需床을 차리고 제지를 소각하는 일을 맡고 있다. 제수상에는 三色果實, 탕, 생선, 건포, 밥, 나물, 육류, 닭, 술이 오른다.
단산에서의 제식이 끝나면 3명의 제관은 제물을 들고 동네로 내려와 공동우물 앞에 차려놓고 재차 이상과 같은 순서로 제를 지낸다. 정원 14일밤 12시에서 다음날 새벽 3시경까지 부락제가 진행되면 제물은 보름날 동회가 열릴 때 부락민이 나누어 먹는다.
부락제의 경비는 당산제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밭 280평의 임대료에서 주로 충당하고, 술과 떡은 부락의 각호에서 거출한 성금을 가지고 만드는데 총경비는 2,000여원 정도가 든다.
한편, 서무부락이 가지고 있는 공유재산으로서는 논 3,835평, 밭 3,671평, 임야 37정보 6반, 대나무밭 1,406평의 토지와 도정공장, 문화관, 洞廳, 창고 등의 건물, 그리고 농악기, 사모관대, 차일막, 저울, 풍구 등이다. 특히 토지와 도정공장에서 나오는 이익금으로는 매년 7집씩 순차적으로 씨멘트 기와로 지붕을 개량하고 있다. 사모관대와 차일막은 계원에게는 무료로 빌려주지만 기타의 사람이 사용하는 경우 200원씩 사용료를 받아 부락의 수입으로 하고 있다.
부락민이 즐기는 오락으로는 윷놀이, 고니, 장기, 골패, 농악, 음주 등이 있는데, 이중 부락민전체가 하는 것은 농악과 음주다. 음주는 9월9일, 10월 모날, 동지와 섣달을 제외하고는 매월 하루씩 부락전체가 일손을 멈추고 술을 먹고 논다. 여기에는 항시 농악이 따른다. 특히 7월 백중날에는 써써레시세가 있다. 마지막 김매기도 끝나서 금년에는 써레를 다시 쓸 필요가 없어서 잘 씻어 둔다는 써레시세는 부락민에게는 다시 없는 歡宴의 날이 아닐 수 없다.
백중날과 8월 추석날에는 인월에서 부락과 군 대항의 씨름대회가 열린다. 이전에는 우승자에게 송아지를 주었으나 근래에는 광목이나 쌀 등을 상품으로 준다. 난장판은 벌어지지 않지만 부락에서 뽑힌 장사들의 용모를 보기 위하여 수백명의 관객이 사방에서 모인다.
서무부락은 이전부터 반촌으로 행세하여 왔기 때문에 아직도 경노사상이 짙고 도시의 풍조와는 달리 남녀의 유별이 분명하고, 아직도 대부분 중매결혼을 하고 있어 자유결혼을 하는 사람들을 극히 백안시하고 있다.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부락에서는 부모에 불효하거나, 부도덕적 행위를 한 사람에게는 부락민들이 전체 모인 곳에서 멍석머리(멍석)에 넣고 동네 매를 때림으로써 반촌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통제 내지 제재수단은 근래에 와서 극히 완하되었지만, 부락의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청년회에서 소환을 하여 훈계하고 타이른다.
3. 1990년대 후반의 마을생활
가. 마을생활
1) 일반
마을의 위치는 대부분 배산임수형으로 마을 뒤에는 산 그리고 앞에는 들판과 하천이 있는 경우가 많다. 마을의 크기는 면소재지를 제외하고는 보통 30-100여 호정도가 모여 살고 있으나 가구수는 대부분 계속 줄고 있다.
마을은 행정적으로 이장을 통해 면사무소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각 마을에는 반장이나 이장이라 불리는 사람이 마을을 대표하고 있다.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을의 주도권은 마을내에서 토지를 많이 가진 어른들에 있었다. 마을의 어른들이 마을일들을 좌지우지하고 마을일에 비협조적이거나 도둑질 등을 한 사람 등은 멍석에 말아서 패거나 심한 경우 추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마을내의 여러가지 일들이 상당히 폐쇄적이며 자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는 물론 마을내의 어른의 성격에 따라 독재적이고 일방적으로 마을일이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 마을에서 이장직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른이라기보다는 실질적인 일을 하는 장년층인 경우가 많고 따라서 이들은 나이든 어른들이 가진 권위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보다는 행정기관의 중개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마을내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이나 마을일에 비협조적인 사람에 대해서 이장이 특별히 벌을 줄 수 있는 힘은 없다. 마을사람들이 수근거리거나 또는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정도이다.
마을내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행정조직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없어진 것들이 많아. 예를 들어 4-H 클럽이 유명무실해졌다. 47년 농촌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농촌청년운동단체로 출범한 4-H크럽은 80년대만 해도 남원지역의 회원수가 1만여명에 이르는 등 농촌의 주춧돌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농현상으로 농촌인구가 계속 줄고 있는데다 이들에 대한 각종 지원이 축소되어 현재는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을내의 단합과 조직은 과거에 더욱 잘 되어 있었다. 청년회 등이 존재하여 청년들끼리 청소년의 군기를 잡으면서 마을일에 잘 협동하고 부모와 노인을 공경하게 하였고 어른들에게 불손한 행동을 하는 경우 단체로 패기도 하였다. 특히 정월대보름에는 다른 마을들과 횃불을 들고 가서 싸움을 하다가 서로 다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현재 정월대보름에 소나무를 높이 쌓고 망월불놀이를 하는 마을은 없다.
새마을지도자, 영농후계자, 부녀회, 청년회, 개발위원회 등이 존재하여 여러가지 활동을 하는 마을도 있고 유명무실한 경우도 있다. 부녀회의 역할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전에는 쌀을 모아 마을 기금을 만들기도 하고 또 다달이 돈을 걷어 잔치를 하든지 관광을 가든지 한다. 관광을 갈 때는 개인당 돈을 내고 간다. 어느 집에 큰 일이 있으면 회원들이 모두 나서서 그 집일을 도와준다. 특히 음식장만을 하고 뒤치닥거리를 하는데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년회는 보통 35-45세 사이에 있는 사람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을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칠월백중 등에 체육회를 주관하기도 한다. 한국노인협의회 소속으로 되어 있는 노인정(또는 경노당) 등이 있다. 여기에는 주로 할아버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지만 간혹 할머니들이 가입한 경우도 있다. 부녀회, 청년회, 노인회는 계의 형식으로 운영되어 회장, 부회장, 총무, 재무, 감사 등으로 구성되어 돈을 모아 같이 식사를 하거나 또는 어디에 놀러가는 경우가 많았다. 노인정의 경우 회비를 받는 것 이외에 면에서 연료비 등을 지원받으며 때로는 노인정에 속하는 토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어 여기에서 받은 소작료를 경비에 쓰기도 한다.
마을에 따라 여러가지 계가 존재하는 데 상여계, 상부계, 위친계는 거의 모든 마을에 존재한다. 이들은 다달이 모은 쌀이나 돈으로(갈수록 돈을 걷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상을 치루는 집을 도와준다. 또한 계원은 직접 가서 부고를 전달하고 상여를 매고 묘를 파는 등 직접 일을 해주어야 한다. 마을사람이 모두 참여하는 대동계, 동갑인 사람들이 마을을 넘어 면지역이나 학교동창이 모여 만든 갑계나 동창계, 그리고 이외에도 자식들의 결혼을 위한 혼인계, 아니면 특정 물품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는 계들이 존재한다. 돈을 모으기 위한 쌀계나 돈계도 있으나 옛날에 비해 그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1년에 한 번정도 관광을 가서 회포를 풀고 마을사람들이 단합도 도모하는 관광계는 늘어나고 있다. 특히 부녀회와 관련되거나 또는 여자들만 참여하는 경우도 많다. 옛날에는 쌀을 내서 이를 장리를 주고 불리는 방식으로 계를 운영하면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음식장만을 해서 잔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돈을 거둬 회원에게 빌려주던지 또는 은행에 넣어두며 잔치도 식당에 가서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기금이 많이 모여봐야 관리하기가 골치 아프기 때문에 필요할 때 돈으로 걷는 경우가 크게 늘어났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을 하기 위해 마을재산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일정한 면적의 논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당산제를 지낸다든지 또는 마을일에 들어가는 돈으로 충당하고 있다. 또한 마을회관을 지을 때는 또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마을사람이나 마을출신 사람들로부터 개별적으로 성금을 받아 해결한다. 특히 도시로 나간 사람들이나 마을내에서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낸다. 아영면 성리 상성마을의 경우 회관을 건립하는데 희사한 이 동네 출신 외지사람들은 서울, 부산, 인천, 진주, 안양, 마산, 진해, 이리 등 전국에 분포하고 있다. 마을에서 참여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마을회관 건립에 희사금을 냈다.
갑계 등도 마을을 넘어서 면단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을 넘어서는 다른 사적 조직들이 형성되고 있다. 동면에서 1997년 동면발전협의회도 그러한 단체 중의 하나다. 영농단체나 작목반 등도 마을단위를 넘어서서 서로 협동하고 있다. 반관반민 단체인 농업협동조합도 면단위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
2) 경제생활
경제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벼농사이다. 과거에는 음력 3월 곡우가 되면 못자리를 하기 위해 볍씨를 소금물에 넣어 선별한 다음 농약을 풀은 물에 담궜다. 옛날에는 볍씨가 부정타면 싹이 틔지 않아 농사를 망치게 되기 때문에, 상가에 조문을 하였거나 출산부를 보았거나 하면 집안에 들어오기 전에 대문밖에서 불을 놓아 잡귀를 쫒고, 집안에 들어와서도 볍씨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볍시를 고를 때 논도 2-3번 갈아주어야 한다. 4월초에는 못자리를 만들고 5월경에는 손으로 모내기를 한다. 6-7월에는 마을사람이 모두 나서 논에서 김을 매는 작업을 하며 음력 8월말부터 수확하기 시작한다. 낫으로 베서 훌태를 이용해 낱알을 떨어낸 다음 디딜방아, 정미소를 이용해 벼를 정미하였다. 정미소가 널리 사용되기 전인 왜정때만 하더라도 많은 디딜방아나 연자방아를 사용하였고 있었고 집에서도 날마다 절구질을하여 볏껍질을 벗겨야 했다. 이렇게 논농사를 지으면 일년내내 몇몇절기를 제외하고는 쉴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겨울에도 방아일을 하고 나무를 하고 새끼를 꼬거나 길쌈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지금보다는 할 일이 많았다. 이렇게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옛날에는 마지기 당 쌀 2가마가 많았고 흉년때는 1가마니 수확하기도 힘들었다.
현재는 농사일이 전보다 10일정도씩은 빨라졌고 농약을 사용하여 전보다 병충해가 적어졌고, 화학비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퇴비를 만들기 위해 풀을 계속 해오고 돼지나 소를 꼭 키워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가장 많은 노동력이 들던 모내기, 김매기, 수확, 정미를 이앙기, 제초제, 콤바인, 정미기가 대신 해주기 때문에 손으로 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공동노동력을 조직해거나 또는 몇십일을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 허비하는 일도 없어졌다. 그 대신 각종 비료나 농약을 면을 통하거나 시장에 가서 구입하고, 농기계를 구입하여 직접 운영하든지 또는 농기계를 가진 다른 사람을 고용하든지의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따. 가령 사람을 불러 기계로 논을 갈아달라고 하면 마지기 당 15,000원씩 주면 된다. 사람의 손을 사용해 농사를 지으면 지금은 완전히 적자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전에는 사람을 하루 고용하면 쌀 한두되 정도 주면 되었지만 지금은 두말 정도 주어야 되어 전보다 10배는 인건비가 비싸졌다. 화학비료, 농약, 기계를 사용하여 농사를 지면 전에는 1년에 100일이상 논일에 매달렸지만 지금은 50일도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쌀 생산은 더욱 늘어 한 마지기에 보통 3.5-4가마씩 생산하고 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임금도 올르고 쌀 생산량도 늘어서 전보다 생활하기는 아주 편해졌다. 특히 할머니들은 길쌈이나 방아일을 할 필요가 없어 지금은 옛날에 비하면 생활하기가 너무 좋다고 말하고 있다.
논농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고 현금을 보다 많이 만질 수 있는 원예농업이나 부업에 손을 대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이곳은 다른 지역보다 높은 지역이라 고냉지채소로 널리 알려져 있어 배추, 감자, 무우, 고추 등을 심고 있다. 고랭지채소나 감자는 주로 도시에서 온 상인들에게 밭떼기로 팔아버린다. 안팔리면 밭에 그대로 썪히거나 또는 밭채로 구매한 상인들도 비용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경우 밭에 그대로 놔두고 썩힌다. 옛날에는 부업으로 양잠을 많이 하였으나 시세가 나빠져서 더 이상 안 키운다. 이들 밭농사는 아직 전혀 기계화가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성장하는 기간동안에는 날마다 밭에 가서 일을 하여야 한다. 특히 밭일은 여자들이 하여야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해 밭농사를 하는 동안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힘들게 일하고 있다.
인월이나 산내면이 관광지로 변하면서 민박을 하거나 식당이나 다른 장사를 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 또한 관광객에게 특산품을 팔기 위해 여러가지 특산품들을 생산하고 파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인월 같은 곳에는 농공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그곳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농기계를 사거나, 집을 개축하기 위해 정부에서 많은 돈을 빌리고 있다. 봄에 빌리고 가을에 갚고를 순환한다. 거의 모든 가구가 800-1000만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 대개 농기계와 농업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한 돈이다. 농협, 신용금고, 마을금고 등에서 돈을 빌릴 수 있는 기회가 크게 늘어 개인에게서 돈을 빌리는 경우가 전보다 많이 줄어들고 있지만 신용평가를 해야한다든지 또는 각종 서류를 준비하고 보증을 세우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돈을 빌리는 경우가 아직 많으며 개인에게 빌리는 경우 이자는 보통 월 2부다. 돈이 필요하면 보통 도시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나 형제가 도와주는 경우가 많다.
3) 신분관계
마을내에서의 신분차별은 과거에는 아주 심하였다고 한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머슴이 있었으며 산지기 등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많이 존재했으며 6․25때까지도 집안에 하인을 두는 경우도 많았다. 마을내에서도 지주와 소작을 하는 사람과의 상하관계는 엄격하였다. 따라서 땅을 많이가지고 양반인 집안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아도 하대하였다.
타성받이가 처음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사람들이 그 사람을 하대하고 마을조직이나 공동일에서 소외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사 마을들은 성씨들간에 그리고 같은 친족이라 하더라도 전통과 토지를 가진 면적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서로 달랐다. 이러한 관계로 다른 친족들이 서로 얼마나 자신들이 양반인가를 자랑하고 또는 다른 사람을 하대하여 자신의 위치를 높이려다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옥집을 크게 짓는다든지, 비석이나 효자각을 세우고 이를 과시한다든지, 재실을 세우는 등의 노력도 계속 행하여졌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
마을주민들이 60년대 이후 크게 도시로 진출하여 마을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농사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점차 장년층으로 이동하며 이들이 새로운 농기계나 시장상황을 잘 알고 있어 노인들의 권위가 감소하면서 친족들 사이의 사회적 차별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 특히 머슴, 산지기, 소작인, 당골 등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해나간 경우가 많고 또한 지위가 낮더라도 마을내에서 농사를 열심히 지어 경제적 생활이 주요 친족들에 못지않게 상승되어 경제적 격차가 줄어들어 서로 보다 동등한 지위에서 마을일을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신분이 낮은 집안도 자식들이 도시에 진출하여 성공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과거와 경제적 지위가 역전도 경우도 많이 나타나 과거 신분적 차이가 사회적 활동에서는 크게 작동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마을내에서 서로간에 어느 집의 가문이 훌륭하고 또는 뼈대가 있는 집안인가를 서로 이야기하고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것이 사회적 차별 또는 하대하는 것으로 까지 나가고 있지 않다. 특히 과거에 뼈대있는 가문이었다고 다른 사람을 하대하면 다른 사람들이 심하게 반발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따라서 하대를 하지는 않더라도 신분적 차이가 지위의 차이가 기억에 남아 있고 특히 노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신분이나 지위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도 많이 하고 이러한 관계에 따라 관계를 맺거나 회피하는 경우도 아직 많이 존재하고 있다.
4) 장
조선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지역의 중심이 되는 마을에서 5일마다 장이 섰다. 운봉이나 인월에는 이러한 장이 서는 장옥이라는 건물이 서있다. 장옥안에는 여러개의 커다란 건물이 있어 그 안에서 수십개의 임시가게가 들어선다. 옷, 신발, 농기구, 씨앗, 곡물, 채소, 잡화 등을 파는 상인들이 주변의 장터를 일정에 따라 돌아다니면 물건을 팔고 있다. 물론 인근에서 자기집에 있던 곡물이나 채소, 나물을 가지고 나와서 팔기도 한다. 과거에는 또한 장터에 나오면 인근지역의 소식을 들을 수 있고 또한 이웃주민들과 혼사를 맺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장터는 국가 땅으로 면사무소나 읍사무소에서 그날 장을 펼친 사람에게서 세를 받거나 또는 장옥을 일정한 돈을 받고 임대해주기도 한다. 갈수록 전보다 장사가 안되기 때문에 많은 장옥들이 임대되지 못하고 빈채로 남아 있다.
장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꼭 물건을 사지 않더라도 구경을 하러 나왔으며 싸움이나 투전꾼 등으로 각종 놀이를 행하고 물건을 사고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아 사람들이 서로 밀리고 시끌벅적하여 활력이 높았다. 전보다 사람들이 적게 오고 빨리 빠져 나가기 때문에 물건을 파는 시간이 줄어들어 이제 아침나절 2시간 정도만 장이 서는 정도로 활력이 크게 떨어졌다. 특히 교통이 발달하여 쉽게 남원 등지로 물건을 사러갈 수 있고 또한 지역에 각종 수퍼들이 들어서서 언제고 물건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장날에만 물건을 사야할 이유가 많이 줄어들었다.
3일과 8일로 끝나는 날 장이 서는 인월장의 경우 300여평에 100칸이 넘는 장옥을 갖추고 있다. 경남 함양군, 남원의 운봉, 동면, 아영, 산내 사람들이 모여 운봉보다 큰 장을 형성하였었다. 따라서 장날이면 주변 사람들이 약초나 산나물을 들고 오고, 남원 등지에서 옷, 그릇, 잡안용기, 농기구와 같은 공산품을 싣고 오고, 멀리서 어물을 들고 오는 상인들도 있어 지역에서 가장 구색을 갖춘 장이 형성되었다. 물론 지금은 차에다 공산품을 싣고 여기 저기서 온다. 또한 인월장은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국적인 목기의 유통중심지였다. 그러나 점차 운봉목기(남원목기)가 직판장(실상사 앞의 목기백화점이나 또는 남운특산품전시장 등)을 통해서 유통되거나 또는 중간상인을 통해 대도시로 바로 팔려 나가 장에서의 거래가 급감하고 있다. 운봉에서는 1일과 6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서는데 주로 운봉과 주천에서 많이 오며 각종 잡화, 곡물, 옷 등이 주로 팔리며 과거에는 목기와 곶감거래로 유명하였다. 전체적으로 남원시와 버스로 쉽게 연결되고 있고 인월과 운봉에 수퍼나 농협판매장이 매일 문을 열고 있어 갈수록 장은 침체되고 있다.
1일과 6일은 운봉장이고 2일과 7일은 함양장, 3일과 8일은 함양장, 4일과 9일은 남원장이고, 5일과 10일은 마천장이어서 각종 장사들이 이 지역의 장터를 빙빙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따라서 이 지역은 장을 매개로 넓은 지역이 서로 물자와 사람 그리고 각종 소식을 전하며 하나의 지역 경제권을 형성하였었다. 따라서 마을 사람들의 외지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는 장에 나가야 했다.
가축을 거래하기 위한 가축시장은 조선시대에도 발달하여 왔는데 이 지역에도 동면에 인월가축시장, 그리고 운봉읍에는 운봉가축시장이 형성되었다. 특히 지리산지역을 타고 한우, 젖소, 돼지의 사육이 활발하여 이들을 파는 가축시장이 장이 서는 날 같이 섰다. 그러나 각종 고기를 수입하여 국내가축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자 이곳에서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가축시장이 쇠퇴하고 있다.
나. 가족생활
지금은 대부분의 가족들이 핵가족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 50년전만 하더라도 자식들을 낳으면 대부분의 아들들은 그 마을에서 부모와 함께 살며 농사를 짓는다. 큰아들은 결혼해도 부모와 같이 살며 작은 아들이나 삼춘들도 결혼하면 일정한 기간을 같이 살다 주변으로 분가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보통 큰 아들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기 때문에 분가한 작은 아들들은 큰 형을 도우며 주변에 분가한 집을 짓고 산다. 따라서 집안에는 삼춘이나 고모들도 함께 살고 삼춘이나 작은 아들들도 결혼한 후 1년 정도 같이 살다 분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직계 3-4대뿐 아니라 방계도 같이 사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산아제한을 통해 자식의 수도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자식들이 도시로 진출해 나갔기 때문에 늙은 부모들이 따로 사는 경우가 많다. 이들 노부부들 중에서도 한쪽이 먼저 돌아가면, 특히 할아버지들이 먼저 돌아가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혼자사는 집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자식들이 지역에 남아 있는 경우에 한 아들만 같이 살고 나머지는 대부분 결혼하자 마자 독립하여 분가한다. 한 아들만 지역에 남아 있다할지라도 분가해서 사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옛날처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자신의 가문의 풍습에 맞추기 위해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며 또한 재산권을 거머쥐고 일일이 며느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관하는 경우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오히려 며느리들이 시어머니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았고 또한 자신들의 권한을 충분히 확보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어머니들이 며느리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핵가족화되면서 며느리들이 집안에서 돈을 쓰고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경우가 많다. 남자들은 돈을 구해오거나 곡식을 언제 얼마나 팔 것이며 논에 무엇을 심을 것인지 등의 보다 큰 문제와 대외적인 문제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결정권은 옛날에는 집안의 할아버지가 결정하였으나 점차 이러한 결정권이 아들로 넘어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로 진출한 가족성원들이 많아져 도시가족들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도시로 진출한 자식들이 설날이나 추석에 부모를 뵙고 차례를 지내러 오는 것은 일반화되었으며 또한 농촌에 계신 부모들에게 각종 용돈을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드리는 경우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농촌에서 집을 짓거나 논을 사거나 다른 큰 일이 있을 때는 도시에 있는 자식들이 목돈을 보내주기도 한다. 농촌에 사는 부모들이 쌀이나 곡식을 보내거나 또는 가끔 반찬거리들을 싸가지고 가져다 준다. 자식들이 집을 사거나 목돈이 들어가는 큰 일이 있을 때는 가지고 있는 논을 팔아 보내주기도 한다. 이렇게 도시에 나간 여러자식들이나 친족들과 관계가 긴밀해지다 보니 마을내에서의 이웃관계는 옛날보다 약해졌다. 옛날에는 무조건 이웃이나 지역에 있는 친척에 의존하여야 했지만 지금은 서울, 부산, 남원, 전주 등지에 나가 있는 친족들에 의존하여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다보니 이웃기리 도와야 하는 또는 왕래해야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농촌에 살면서도 이웃끼리 별로 왕래를 하지 않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결혼을 하거나 환갑잔치를 하거나 돌잔치를 하거나 또는 장례식을 할 때 마을사람 대부분이 참석하고 있어 아직 농촌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30년전에만 하더라도 중매혼이 아직 일반적이어서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가문, 집안의 위세가 자신의 집안과 어느 정도 일치하여야 하며 또한 사주단자를 살펴봐서 궁합이 맞아야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자식들이 대부분 도시로 진출하면서 도시에서 자신의 배우자를 만나는 경우가 많아 부모들이 상대편의 가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쩔수 없이 결혼을 시키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지금은 자식들이 이미 대부분 결혼해 나갔으며 젊은부부들인 경우 자신들이 중매혼을 했더라도 연애혼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식들이 알아서 결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대부분 자식들이 선택한 배우자를 부모들이 추인하는 식으로 결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일단 남원이나 또는 아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결혼을 하면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 농촌에 살고 있는 부모님에게 인사를 하고는 바로 자신들이 거주할 도시로 돌아가서 신혼살림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과거처럼 가문의 전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이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단 결혼을 한 자식들은 전과 달리 夫系쪽 뿐만 아니라 妻系쪽과도 밀접한 관련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딸들이 결혼하여 나갔다고 하여 30-40년처럼 출가외인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이제 거의 없다. 그 대신 딸들이 임신을 하면 애기를 낳고 몸을 풀기위해 친정집에 와서 지내거나 또는 친정어머니가 딸집에 가서 지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전처럼 아이들 성이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만 다른 생활 구석구석에서는 처가쪽의 영향력과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 많은 신혼부부들의 경우 시부모쪽보다 처가쪽을 더 자주 방문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는데 운봉지역에서도 일년에 한두번씩 딸가족이 방문해오는 경우가 많아 전반적으로 父系사회를 중심축으로 하고 있지만 점차 兩系사회적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 문중
친족조직 즉 대문중이나 문중에 대한 참여도나 기억의 정도는 개인차가 아주 심했는데 대체로 명문이었거나 지주였던 사람들의 후손은 보다 적극적으로 문중일과 시제에 참여하고 이었다. 이들은 문중을 중심으로 친족들과 넓은 연계를 가지고 있어 남원시내나 다른 면, 함양과 장수 등 인근지역뿐만 아니라 용인이나 서울 등 전국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종친회는 남원, 전주, 또는 서울 등의 도시에 있으므로 친족들이 전국적인 연계망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언제 어느 곳에서 시제를 지내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자기의 조상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지를 비교적 잘 기억하고 있고 족보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특히 조선시대 벼슬을 한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자랑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문중일에도 참여하고 족보도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잘 알지 못한다면서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자신의 본과 파, 그리고 어느 곳에서 자신의 중시조나 몇대조상의 시제를 지내는지 조금씩은 알고 있었다. 특히 노인들은 자신 개인보다도 무슨 문중의 일원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또한 어느 문중의 일원으로 지역에서 대접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본관, 파, 문중은 자신을 드러내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젊은 사람들은 자기 개인을 보다 앞세우고 또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상대방을 파악하기 때문에 문중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옛날에 비하여 종손의 권한이 많이 축소되었고 대신 문중의 역할이 크게 강화되었다. 문중에는 대체로 회장, 부회장, 총무(또는 유사), 재무, 감사 등의 체제로 형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40년전에도 문중의 재산은 종손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문중어른 여러명의 공동 명의로 등재되어 있던지 또는 문중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곳이 많았다. 동면의 작은 문중의 종손은 문중의 일이 문중조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종손은 이제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할 뿐이고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들 문중은 선산, 재실, 문중답, 기금을 가지고 사업을 해나가고 있었다. 사업은 주로 묘지와 시제와 관련된 행사이거나 족보를 발행하는 것이다. 위토답은 전에는 성씨가 다른 낮은 지위의 사람들이 제지기로서 농사를 지었으나 제지기에 대한 사회적 천대도 줄어들었고 또한 이왕이면 문중성원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여 대체로 후손들에게 소작형식으로 맡기고 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음력 10월에 지낸다. 4대조까지는 방안 제사를 지내지만 5대조가 되면 시제로 넘어간다. 시조나 중시조의 시제가 이루어지 때는 전국 각지에서 그 후손이 모여 1-200명이 두루마기를 입고 와서 참석하기도 한다. 5대조 등은 친족의 범위가 좁기 때문에 때로는 10명도 되지 않는 친족들이 모여 시제를 지낸다. 시제를 지내면 제물을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시제를 지낼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가는 그 문중의 위세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도록 하고 있으나 시제에 참여하는 사람은 노인과 일부 장년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 수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문중의 상징이며 또한 자신의 친족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재실을 새로 신축하는 현상이 운봉, 동면, 아영면, 산내면 등 이 지역 전체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재실에서는 시제에 필요로 하는 각종 제사도구 - 목기, 상, 향로 -나 족보 등을 가지고 있다. 재실을 지키는 재지기가 있는 곳에서는 재지기가 재실과 위토답을 관리하면서 제사에 필요한 음식 등을 장만하고 묘소에 운반하여 준다.
문중은 시제를 지내고 문중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재산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문중성원 중에 재산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기부하도록 하여 기금이나 토지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기금에 많이 거출한 사람은 문중내에서도 많은 발언권을 가진다. 대부분 도시에 나가 사업에 성공한 사람이나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내도록 하며 기타 문중성원들에게는 일인당 일정한 정도의 돈을 내게 하는 경우가 많다.
문중은 전에는 문장, 유사, 재무, 감사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지금은 회장, 부회장, 총무, 재무, 감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중이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이들 임원진은 문중총회를 소집하고 문중과 관련하여 묘소와 관련된 일, 시제와 관련된 일, 재실과 관련된 일, 족보와 관련된 일, 그리고 기금을 관리하고 연락을 하는 일들을 처리한다.
동족촌락에서도 사람들이 점차 이주를 많이 해나가고 타성받이가 들어오더라도 전처럼 차별을 심하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타성들이 동족촌락에 들어가서 살기가 전보다 아주 나아졌다. 따라서 동족촌락의 경우 대부분이 大姓이 마을에서 점유하는 비율이 떨어지고 있다. 따라서 소문중들의 지역적 집중도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친족의 세에 따라 지역에서 행사하는 힘이 달랐고 강한 문중의 성원들은 문중토지를 경작하든지 또는 친족의 토지를 소작을 얻어 생활할 수 있는 등 친족사이의 협동이 아주 강하였고 따라서 친족사이의 공동유대감도 강하였다. 이를 기초로 중시조 등의 조상을 중심으로 한 각종 조직과 규율이 널리 발달하였다. 그러나 문중은 현재 전과 같은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문중을 중심으로 한 조직들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작은 규모의 친족이나 가족내의 협동이 전보다 크게 강화되고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많은 집들이 도시로 나간 가까운 친족들과 찍은 사진들을 액자에 담아 안방에 걸어두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혈육이나 가까운 친족이 이곳에 없어도 시각적으로 그러한 관계를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진들은 부모들이 늙어서 농촌에 따로 남아 있는 현실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족원들의 지속적인 유대, 그리고 대친족(대문중)의 약화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제사나 시제에서도 나타나는데 갈수록 주관로부터 먼 친척은 점차적으로 나오지 않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라. 일생의례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의례를 겪는데 크게 출생의례, 혼인의례, 죽음의례의 네가지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사모관대를 하는 성인의례가 있었고 요즈음에도 직장이나 학교에서 20살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 성인식을 해주지만 마을수준에서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제외하였다.
1) 출생의례
출생의례는 크게 祈子儀禮, 出産儀禮, 그리고 育兒儀禮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는 부계사회이고 아들을 통해 대를 잇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젊은세대에 내려갈수록 반드시 아들을 나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줄고 있지만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들을 반드시 낳아서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요즈음은 아이가 들지 않는 경우 한약방에 가서 한약을 해먹는 경우도 있고 또는 병원에 가서 여러가지 진찰과 치료를 받도록 하고 있지만 또한 여러가지 대상에게 치성을 드리는 경우도 많다. 이 지역에서는 특히 당산제를 주관하면서 아이를 낳아달라고 비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는 주부가 혼자 당산목이나 입석, 장승, 조산무더기에 가서 날마다 절을 하고 치성을 드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절에 가서 칠성각·산신각이나 부처님에게 또는 산에 커다랗게 튀어나와 있는 기자바위 등에 가서 그 앞에서 또는 미륵불이라고 알려진 바위 앞에 가서 백일동안 빌기도 한다. 당골을 불러 각종과일과 떡, 음식, 술, 촛불을 밝히고 당골이 징과 꽹과리를 치면서 아이 낳기를 비는 경우도 있다. 또는 집안에서 삼신할머니가 나가버렸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당골에 가서 삼신할머니가 있는 곳을 알아 그곳의 나무가지를 꺽어다 집에다 걸어두면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요즈음은 젊은 부부들이 지역에 적어 아이를 낳는 경우가 전보다 줄었고 생각 또한 바뀌어 옛날처럼 치성드리는 것이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많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것이 남녀의 문제라고 생각하여 한방병원과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고 이들의 말을 따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이를 출산할 달이 되면 전에는 집에서 주변의 산파나 이웃이 와서 애기를 받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두 병원에 가서 애기를 낳고 몇일 지내다가 집에 돌아온다. 딸들이 이 지역으로 내려와서 아기를 낳고 친정어머니의 도움으로 산후조리를 하고 한달 정도 머물다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또는 친정어머니가 도시에 있는 딸의 집에 가서 산후조리를 도와주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렇게 병원에서 애기를 낳기 때문에 애기를 낳는 과정에서 특별한 의례를 행하는 것은 줄어들고 있다. 의례는 행해지 않더라도 애기를 낳기 전에는 아기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미리 준비한다든지 또는 출산 후 산모를 돌보기 위해 필요한 것들, 즉 미역이나 한약 등을 준비하는 것은 여전하다. 과거에 집에서 애기를 낳을 때는 조산을 많이 해본 이웃할머니나 시어머니가 애기를 받는다. 애기는 주로 안방에서 낳는데 임산부가 산기를 보이면 아랫목에 짚을 깔고 걸레를 준비하고 가위와 실을 준비한다. 짚을 까는 이유는 아이가 짚자리에서 낳아야 복을 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벼농사에 주로 의존하여 생활해왔던 과거의 생활습속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웃목에는 삼신상을 차려 놓는다. 산실로 들어갈 때 산모는 신발을 꺼꾸로 돌려 밖으로 향하게 놓는데 애기를 낳는 과정에서 산모나 애기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거에 집에서 애기를 낳는 경우 전국적으로 산모가 10명 중에 한명 정도는 죽었기 때문에 애기를 낳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애기가 태어나면 미리 준비해둔 실로 태를 묶고 가위로 태를 자른다. 태는 대개 작은 단지에 담고 뚜겅을 닫은 후 집 주변의 땅속에 묻거나 불에 태운다. 특히 장손의 경우 태를 단지에 담아 집주변에 묻어두는 경우가 많으나 대부분의 집에서는 태를 짚으로 사서 삼일째 되는날 불태운다. 일부에서는 태를 약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아기를 낳으면 바로 대문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매단다. 이 새끼에는 아들이면 고추나 숯, 여자면 솔가기와 숯을 꽂아 놓는 경우가 많다. 금줄은 상주 등 부정한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며 또한 가족들도 부정한 곳에 가지 말라는 뜻이다.
육아의례는 아이를 키우면서 행하는 의례인데 세이레나 일곱이레가 지나면 대개 금줄을 걷어 태운다. 아기가 태어난지 첫이레(7일째)가 되면 산모들이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보통 세이레가 지나면 사람들이 아기를 볼 수 있다. 아기를 낳은 후 산모들에게는 미역국을 많이 먹인다. 미역국을 먹이는 풍습은 지금도 널리 지켜지고 있다. 아기를 낳은지 첫이레가 되면 이름을 짓기 시작하며 집에 따라서는 임시 이름으로 부르다가 몇년지나서 정식 이름을 짓기도 한다. 보통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항렬에 다라 이름을 짓는다. 아이가 태어난지 백일이 되면 이웃과 친척을 초대해 백일잔치를 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었으나 대부분 떡을 해먹는 정도이며 갈수록 백일잔치는 없어지고 있다. 1년이 되면 애기에게 돐상를 차려주는데 돐상 위에는 살, 실, 노트, 연필, 만년필 등을 올려 놓고 아이가 무엇을 집는가 본다. 아이가 쌀을 집으면 부자로 잘살겠다고 생각하고, 실을 집으면 오래 산다고 생각하고, 노트나 연필 등을 집으면 커서 공부를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돐잔치는 지금도 널리 행해지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도 점차 음식점에서 돐잔치를 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이외의 육아의례는 오래 전부터 모두 사라져서 기억되고 있는 것이 없었다.
2) 혼인의례
혼인은 과거에서부터 人倫之大事로 불려와서 많은 복잡한 의례과정을 거친다. 과거에는 전적으로 중매혼만 이루어졌으며 연애혼을 하는 경우에는 그 동네나 지역에서 손가락질을 받기 때문에 하층민이 아니면 연애혼을 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렇게 중매혼을 하기 위해서는 중매장이가 양쪽 집안을 오가면 집안내력, 학식, 생년월일 등을 알려주면서 혼담을 진행시킨다. 가문의 지체나 인품 등 양가의 조건이 합당하여 어느 정도 결혼하기로 합의가 되면 남자측은 옷감과 사주를 넣은 ‘사주단자’를 먼저 신부집에 보내 정식으로 청혼을 한다. 여자측에서도 결혼날자와 시간을 적어 보낸다. 양가가 결혼날짜를 합의해 정해지면 신랑은 당일에 上客(신랑의 할아버지나 숙부)과 함진애비(함진애비는 결혼 전날에 가기도 한다)을 수행하고 신부댁 마을에 간다. 신부마을에 도착하면 사모관대로 갈아 입는다. 신부댁 上客이 마을 입구에 나와 신랑측을 접대하여 신부집 가까운 집에 머무르게 한다. 신부집 마당에서 전통혼례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먼저 함진애비가 신부집에 들어가 ‘함사시요’라고 실랑이를 하면 신부측에서는 함을 받아 놓는다. 신랑은 사모관대를 하고 가마를 타고 신부의 집에 들어가는데 이때 몸에 묻어온 잡귀를 쫒는다고 통을 뿌리기도 한다. 신랑은 전안상에 기러기를 올려놓고 절을 한다. 그 다음에 정식 혼례가 시작되어 서로 절을 주고 받으며 그 다음 술잔을 주고 받아 남녀가 하나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선포한다. 신부는 이 때 원삼에 족두리를 하고 연지를 찍는 등 특별한 모습을 한다. 이후 신랑, 신부가 큰 상을 받고 저녁이 되면 신랑과 신부가 한방에 들어가 함께 잔다. 이 때는 마을사람들이 신방의 문구멍을 뚤어 엿볼 수 있다. 다음날 신부와 신랑이 상객 등과 함께 신랑집으로 돌아와 신랑집에서 시부모와 시가친척에게 큰 절을 올린다. 이 때는 신부집에서 만들어온 닭, 대추, 밤으로 폐백을 만들어 올린다. 또한 시가댁의 여러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고 사당 등에 가서 조상에게도 예를 올린다. 3일정도 지나면 신랑과 신부가 다시 신부의 집으로 인사를 갔다 3일정도 머무르면서 신부측의 친척들에게 인사를 한다. 이 때는 신랑의 발을 때리는 등 그 동네 청년들이 나서서 신랑을 다루는 풍습이 있다. 이것을 마치고 다시 신랑의 집으로 돌아오면 결혼식의 절차가 끝난다. 일단 시집으로 돌아오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여자들이 친청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이러한 구식결혼식은 20여년전부터 별로 행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는 대부분 남자와 여자들이 연애를 하든지 또는 중매를 해서 결혼이 결정되면 도시의 예식장을 골라 그곳에서 신랑과 신부의 친척이나 친구들이 모여 결혼식을 올리고 예식장안에서 폐백을 올리며 손님들은 음식을 먹고 헤어진다. 신랑신부는 신혼여행을 3-4일 떠나며 신혼여행을 다녀온 다음 신부댁과 신랑댁을 다녀온 다음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 생활을 시작하면 모든 결혼식이 끝나는 셈이다. 따라서 결혼하면 반드시 시부모와 영원히 또는 일정기간 살아야 했던 옛날과는 달리 결혼하고 요즈음에는 처음부터 분가하여 따로 사는 경우가 아주 많다.
3) 망자의례(亡者儀禮)
죽음의례는 크게 사람이 돌아가면 행하는 상례와 그 후에 행하는 제례로 나눌 수 있다. 상례를 할 때는 동네에서 위친계나 상여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고 또한 일정한 양의 쌀이나 돈을 준다. 동네사람들이나 계원들이 고생을 하니까 노제를 할 때 일정한 돈을 내서 일한 사람들이 같이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한다. 상례의 순선느 다음과 같다.
집안 어른이 운명할 때가 가까워 오면 안방에 모시고 가족들이 주위에 둘러 앉아 임종을 지켜본다. 숨을 거두게 되면 큰 소리로 곡을 하게 되는데 이웃과 저세상에 상레가 났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특히 망자가 생기면 이를 저세상에 미리 알려야 보다 쉽게 길을 찾아 구천에 갈 수 있다고 믿어진다. 마을 사람 중 상례의 절차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먼저 와서 코나 눈동자를 확인하여 죽음을 확인한다. 숨을 거둔 것이 확인되면 맨먼저 코와 입 그리고 항문과 귀를 솜으로 막고, 반듯하게 눕힌 다음 백지로 팔다리를 묶어 단정하게 펴 놓는다. 이때 팔은 배위로 올려 있게 한다. 무릎과 어깨도 가지런히 맨다. 홑이불 등으로 亡者를 덥은 뒤 병풍을 치고 상주는 곡을 하면서 손님을 맞는다. 이것이 끝나면 큰아들은 망자가 입었던 적삼을 흔들면서 마당에서 북쪽을 향해(망자가 가야하는 북망산이 북쪽에 있기 때문에 북쪽을 향한다) 주소와 성명을 대고 複, 複, 複하고 외친다. 그후 적삼을 지붕위로 던진다. 이는 혼이 돌아와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행하는 것이다. 지붕에 던졌던 의복은 입관시 내려 불태운다. 복이 끝나면 짚신 세켤레와 밥 세그릇, 노자돈을 올려 놓는 사장상을 차린다. 이는 혼을 데리고 가는 저승사자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여비를 주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후 칠성판을 준비하여 밑에 깔고 시신을 그 위에 올려 놓는다.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 머리, 허리, 다리를 적당한 나무로 고인다. 이제 동네사람들이나 위친계나 상여계를 같이 하는 계원들이 부고를 돌린다. 그동안 준비한 하얀옷을 입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왼쪽 소매를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른쪽 소매를 껴내 입는다. 보통 출상하기 하루전날 襲을 하고 입관을 한다. 습을 할 때는 망인을 묶어두었던 곳을 풀고향물과 쑥물을 사용하여 몸을 깨끗하게 씻는다. 그리고 나서 손톱이나 발톱 그리고 머리카락을 잘라 다섯개의 주머니에 담아 놓고 수의를 입힌다. 습을 한 다음 간단하게 제상을 차려 술잔을 올리며 곡을 한다. 마지막으로 저승갈식량과 노잣돈이라 하여 버드나무 가지로 “천석이요 만석이요” 외치면서 입에 쌀을 세번 넣어준다. 그런 후에 망자를 관에 넣고 흔들리지 않도록 망인이 입었던 옷이나 솜으로 관을 채운다. 이 때 다섯개 주머니는 손, 발, 머리 옆에 놓아둔다. 그리고 관을 天蓋로 닫는데 이제 망인을 다시 볼 수 없기 때문에 상주 등이 구슬프게 곡을 한다. 그리고 나서 관직이 없는 남자는 學生某貫某公之櫃, 여자는 孺人某貫某氏지櫃라 쓴 命旌으로 관을 덮는다. 그리고 마루 한쪽에 혼백을 모시는 靈座를 설치하고 상복을 입는 데 삼베옷을 입고 여자들은 머리를 풀거나 짚으로 둥그런 띠를 만들어 머리에 쓰며 남자들은 삼베로 만든 건을 쓴다. 그리고 문상객이 올 때나 아침저녁으로 대나무 지팡이를 집고 곡을 한다. 시체가 마지막으로 집을 떠나는 의식인 발인은 보통 5일이나 3일째 이루어지나 거의 3일째 하고 있다. 발인하기 전 날, 상가집에서 상여가가는 예행연습에 해당하는 ‘상여놀이’를 하기도 한다. 관을 방에서 꺼내 상여 앞에 안치하고 술·과일 등을 상에 올려 놓고 발인제를 지낸 다음 상여를 꾸민 다음 장례행렬이 집밖으로 나간다. 상여 앞에는 方相, 만장, 혼백, 명정, 공포 등이 나가고 상여 뒤에는 상주, 친척, 조문객이 따른다. 동네 출구나 다리를 건널 떄 노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 때 葬地는 미리 풍수에 맞추어 골라놓고 開土祭나 山神祭를 지내고 땅을 알맞게 파 논 상태이다. 갈수록 묘소를 길거리에 가깝제 쓸려고 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방향과 시간을 맞추어 관을 땅속에 내린다. 관을 명정으로 덮고흙으로 덮는데 상주 등이 크게 곡을 한다. 이어 墳을 만들고 나면 平土祭를 지낸다. 혼백을 모시고 집에 돌아와서 喪廳에 모신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그리고 식사시간에 술이나 밥을 올리고 향을 피우며 곡을 한다. 그리고 매월 초하루, 보름 그리고 명절이나 망인의 생일에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것은 집에 따라 7주, 100일, 1년(소상), 또는 2년(대상)까지 계속 되는데 이 기간 동안에 망자는 죽었지만 살아 있는 노인으로 취급받지만 이 기간이 지나면 탈상을 한다. 이 때는 상청을 철거하며 방안에서 제사가 이루어져 망인이 명실상부한 조상신으로 대접받는다. 상청은 갈수록 짧게 모시거나 아예 모시지 않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또한 병원에서 돌아가시 거나 또는 죽은 뒤 병원에 亡者를 안치하고 보다 간소한 형태로 병원의 절차에 따라 상례를 행하는 경우도 계속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상여놀이 할 때, 또는 상여나갈 때 소리를 잘하는 소리꾼을 다른 동네에서라도 사오는 경우가 많다. 특히 애달프게 잘 뽑아야 가는 사람의 혼을 잘 달랠 수 있다. 그래서 진양조 가락을 하는 사람이 주로 소리를 한다고 한다. 이 때 행하는 소리의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산내면 장항리 장항에서 상여전 날 상여놀이에서 하던 소리)
앞: 관아 나아모 뒷: 관아 나아모
앞: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내 아들 며느리 손주들 잘 있거라 뒷: 반복
앞: 잘 있거라 잘 있거라 내 딸 사우아 잘 있거라 뒷: 반복
앞: 잘 있거라 잘 있거라 일가 친척들도 잘 있거라 뒷: 반복
앞: 닭아 닭아 우지마라 네가 울어 날이 새면 나는 영영 돌아간다 뒷: 반복
(장항에서 상여나갈 때 하는 소리)
뒷: 어노 어화노 어화리 넘자 어화노
앞: 언제나 올라요 언제나 올라요 올라든 날짜나 일러주소 뒷: 반복
앞: 인제 가면 언제 오냐 명년 요때는 오실둥말둥 뒷: 반복
앞: 가네 가네 나는 가네 동네 어른들 인사나 드리고 나는 가오 뒷: 반복
앞: 하직이로다 하직이로다 장항리 통제를 하직이로다 인사나 드리고 나는 가오 뒷:반복
앞: 땅속을 집을 삼고 칠성단을 이불 삼어 뒷: 반복
앞: 가신이던 떼작을 언저신지 모래 흙덩어리 밥을 삼고 뒷: 반복
(동면 취암리 덕실에서 상여나갈 때)
관아 안버이 보살 관아 소리가 웬소린고 관아 안버이 보살 관아 소리가 워디서 난고
관아 안버이 보살 줄을 걸러 어깨다 실세 관아 안버이 보살
앞: 허노 허허노 어이가리 넘차 너화농 세상천지 만물중에 사람밖에 또 있는가
뒷: 허노 허허노 어이가리 넘차 너화농
앞: 여보시오 시주님네 이세상에 나온 사람 누구 덕으로 나왔을까 뒷: 반복
앞: 하느님전 은덕으로 아버님전에 배를 빌어 뒷: 반복
앞: 어머님전 살을 빌고 칠성님전 명을 빌어 뒷: 반복
앞: 칠성님전 복을 빌어 이내 일신 탄생허니 한두살에 철을 몰라 부모은공 갚을쏜가 뒷: 반복
앞: 헤헤 헤이야 여보시오 시주님네 목마른디 쉬어가세 쉬어가자 애결한들 들은치도 아니하네
뒷: 반복
앞: 정신차려 살펴보니 약탕관을 벌여두고 지성호구 극진한들 죽을 내 목숨 살릴쏜가
옛 늙은이 말 들으니 저승길이 머다드만 오늘 내기에 당도혔네
절통허고도 원통하다 절통허고도 원통하네 뒷: 반복
앞: 부르나니 어머니요 찿나니 냉수로다 어찌갈꼬 어찌가리 북망산천을 어찌갈꼬
북망산천 돌아갈 적 심심하고 약한 몸이 태산같은 병이 드니 어찌할고 어찌하랴
이 세상을 하직허니 절통허고 원통하다 뒷: 반복
(상여내려 놓을 때)
앞: 허-허 허이농 어이가리 넘차 너화농 다 도였다 다 도였다 극락세계가 다 도였네
이렁저렁 여러날에 극락세기 당도했다 뒷: 허이허이 허이야 어이가리 넘차 너화농
(아영면 월산리에서 상여나갈 때)
가나~ 암묘~ 가나~ 아묘~ 북만산천 머다드니
문턱밑이 북만이네 아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북만이 어디라고 그리쉽게 가시는고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가기는 가셨지만 잘가셨는가 모르겼네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지성차사 강님도령 부디부디 잘모시소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인지가면 언제온고 올날이나 알려주어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준령태산이 펑지가 되거던 오실라요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대천지 한바다가 육지가되며는 오실라요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그림에 기린닭이 울음을울면 오실라요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연연이 묵은고목 새순이나면 오실라요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심심산곡 홀로누워 과거지사를 생각하니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옛날이 그립구나
어농 어허농 어나리농차 어허농
산내면 장항마을의 경우 대부분 땅을 파서 묻는 것이 장례법이지만 옛날에는 시체를 솔가지로 덮었다가 살이 육탈되면 그때 묻는 초분형태의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어린아이가 죽는 경우 옹기에 담아 가까운 산에 얕게 묻거나 솔나무 등에 걸어놓기도 하고 또는 집에서 육탈을 시킨 다음 묻기도 하였다. 특히 손님에 걸려 죽은 아기들은 짚으로 엮어 나무에 매다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의 무덤은 깊게 파지 않기 때문에 빨리 없어지며 얼마 지나면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처녀가 죽는 경우 산에다 묻지 않고 엎어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묻기도 하였다. 사람이 많이 다녀 원한에 찬 처녀귀신이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는 어린아이나 처녀가 죽더라도 절차를 간단히 하여 그냥 산에 봉분을 만들어 간단히 묻는다고 한다.
祭祀는 크게 忌祭와 時祭로 구분할 수 있다. 기제는 4대조까지의 조상이 죽은 날 방안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상에 祭物을 진설하는 것은 집집마다 그리고 세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순서는 대부분 똑 같다. 降神 -> 參神 -> 初獻 -> 讀祝 -> 亞獻 -> 終獻 -> 添酌 -> 揷匙 -> 閤門 -> 啓門 -> 獻茶 -> 撤匙覆飯 -> 辭神 -> 飮福 -> 撤床의 순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전국적으로 동일하고 대부분의 제례에 대한 책에 나와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설명을 하지 않겠다. 이 순서에서 몇가지씩 빼고 제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특히 현재는 독축을 하는 집은 아주 드물어 대부분의 집에서는 축 없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전에는 강신의 경우 대문밖까지 깨끗하게 청소하고 제주가 호롱불을 들고 나가 조상신을 맞이하여 안으로 모셔 오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는 집은 거의 없다고 한다. 또한 전에는 부부이더라도 죽은 날자에 따로 따로 제사를 지냈지만 2대조에서 4대조까지는 부부를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는 집이 늘고 있다. 보통 부모의 제사는 각각 모신다. 일부 집에서는 4대조까지 모시지 않고 2대조나 3대조가지 모시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는 남성들만 제사에 참석하여 조상신에게 절을 했지만 딸 등도 술을 올리지는 않더라도 전체가 재배를 할 때 같이 절하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시제는 보통 음력 10월에 날을 받아 5대조이상의 선조묘에 가서 묘지 앞에서 삼색과실, 떡, 술, 음식을 진열하고 제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보통 하루에 선조묘를 다 찾아 다니며 지내는데 묘가 많은 경우 이틀이나 삼일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10월에는 많은 남자어른들이 두루마기를 입고 지게에 제수를 지고 산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문중에 따라 3월에 지내는 집도 있지만 대부분 10월에 지내고 있다. 종손이 祭主로 初獻官을 한다. 亞獻官이나 終獻官은 문중에서 나이가 든 유지가 맡는 경우가 많고 종헌 이후에도 계속 술잔을 올리기도 한다. 순서는 방안제사와 같다. 일부 문중에서는 묘제를 지내기에 앞서 山神祭를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산신제를 지내는 경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큰 문중은 100여 명이 넘는 어른들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보통 10명에서 50명정도 참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제가 이렇게 지역 문중들의 관심사가 되는 이유는 시제가 자기집안이 훌륭하고 품위가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좀더 훌륭한 집안으로 지역에서 대접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중에 훌륭한 조상이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그 조상과 자손과의 관계를 입증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자신의 조상을 잘 모시겠다는 효사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문중이 예를 다하고 뼈대있는 집안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문중이 훌륭한 조상을 가지지 못하거나 또는 시제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면 지역에서 그 위세가 하락한다. 이를 통해서 각 문중은 자기들 문중 성원에게도 우리가 이렇게 훌륭한 조상을 모시고 있으니 더욱 행동을 조심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훌륭한 조상을 본받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문중성원이 이렇게 합심하여 문중의 위세를 올려야 자신의 위세도 올라갔던 것이다.
마. 세시풍속
과거에는 주변에 여러가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농사, 질병, 가정관계, 마을내 화목, 풍요 등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들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모시고 또한 때에 맞추어 영농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각 시기마다 해야할 많은 풍습들이 존재하였다. 과거에 농촌의 모든 생활과 영농이 음력에 기초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과거에부터 존재하던 세시퐁속은 모두 음력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서 적은 날자도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이러한 세시풍습들은 1960년대 이후 현격히 약화되어 현재는 설날과 추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행해지지 않거나 또는 소수의 사람들만 간단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
<1월>
옛날에는 설날전날이 섣달 그믐날부터 밤새 집안을 환히 밝히고 잠을 자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이 때 잠을 자면 눈이 희어진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설날이 밝기 전에 이른 새벽에 조리를 사 문 위에 걸어두면 하해에 복이 많다고 하여 복조리를 사서 걸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복조리를 살 때는 값을 묻지 않고 거스름돈도 돌려 받지 않으며 일찍 살수록 좋다고 하여 사람들이 ‘복조리 사세요’ 외치고 다니면 주부들이 먼저 나와서 사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복조리를 팔러 다니거나 또는 이를 걸어놓는 경우는 없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삼재를 면하기 위해 세마리 매를 그린 그림을 안방 문위에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삼재란 세가지 불길한 재앙을 말하는데 수재·화재·풍재를 의미하기도 하고 병난·질연·기근을 같이 의미하기도 한다. 삼재 드는 해가 자기가 태어난 해에 따라 달라지는데, 巳·酉·丑 해에 태어난 사람은 亥·子·丑 해에 삼재가 드는 식으로 모든 사람이 십이간지에 따라 삼재가 들기 때문에 9년에 한번씩은 삼재에 든다고 한다. 이를 쫒아버리기 위해 세머리를 가진 부적을 집에 붙이는데 지금도 이러한 부적을 붙인 집이 있다.
설날 아침에는 설빔, 즉 새옷을 차려입고 큰 집에 모여 차례를 지낸다. 차례에서는 장손의 4대조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방을 모시고 제사의 순서에 맞춰서 향을 피고 술을 올리고 절을 하고 철상을 한다. 떡국을 먹고 일가친척 어른들이나 동네어른들에 세배를 다니며 성묘를 다닌다. 20여년전만 하더라도 보통 동네 어른 모두에게 돌아다니며 세배를 했고 따라서 집집마다 손님을 치루기 위해 한과, 술, 과일, 고기를 장만하였으며 윷놀이나 화투, 그네, 널뛰기 등의 놀이를 즐기고 마을사람들이 나서 풍물을 하면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잡귀를 쫒아내주기도 하였다. 지금은 도시에서 돌아온 자식들이 자신들과 가까운 친척들만 세배다니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으며 집안에서 가족끼리 화투나 윷놀이를 하는 정도이고 풍물 등의 공동체적 놀이는 대부분 행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어린이들이 세배를 하면 현금으로 세뱃돈을 주는 풍속이 일반화되고 있다. 따라서 도시에서 돌아온 자식들로 각 집안이 왁자지껄하니 활기에 차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나 도시에서 돌아오지 않는 집에서는 노인들만이 쓸쓸하게 설날을 지내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운봉지역뿐만 아니라 한국 농촌전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습속이다.
정월이튿날부터 보름 사이에 대부분의 마을에서 당산제를 지내고 마을 총회를 한다. 특히 정월초나 14일에 당산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다. 당산제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제사음식을 같이 나눠먹는데 이는 堂神에 올린 음식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마을사람들이 초자연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함을 의미한다.
정월대보름에는 찰밥이나 오곡밥을 해먹기도 했으며 무우나물, 무우탕, 콩나물, 두부지짐 나물을 많이 만들어 먹는다. 연태우기, 동정태우기, 달집태우기, 지신밟기, 쥐불놀이, 풍물이 행해졌다. 낮에는 풍물과 굿을 하기도 하는데 특히 전날 당산제를 지내는 경우 마을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굿에 참여한다. 풍물을 치면서 각 집을 돌아다니면 마당, 우물, 장독에서 굿을 치고 지신밟기를 함으로써 일년내내 그 집이 평안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특히 마을 뒷산이나 앞산에 올라가 커다랗게 나무틀을 쌓고 그사이 사이에 솔가지를 쟁여 달이 떠오를 때 불을 붙이면 멀리서도 보여 여기 저기 산위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다. 또한 달이 떠오를 때 달무리가 흐리면 가뭄이 들거라고 생각하고 달무리가 깨끗하면 풍년이 들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때는 겨울동안 날렸던 연에다 자신의 주소, 이름, 생년월일시를 쓰고 달집에 매어서 달집을 태울 때 같이 태운다. 달집이 활활 타오르면 달집을 향해 절을 하며 자신의 소원을 말호고 어떤 사람은 자기 옷의 동정을 태우기도 하며 백지에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적어 태우기도 한다. 달집이 타고 나면 여기에 콩을 볶아 먹기도 한다.
달맞이를 하고나면 꼬마들은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기도 하고 논두럼에 쥐불을 놓고 쥐불놀이를 하기도 한다. 또한 청년들은 횃불을 만들어 다른 동네사람들과 격렬하게 횃불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다. 횃불싸움을 할 때에는 대나무, 사리, 수수 등으로 둥글게 홰를 만들어 횃불을 들고 상대편에 고함을 치고 약을 올리고 욕을 하다가 상대편 마을로 쳐들어가서 횃불을 휘두르고 던지기도 하고 찌르기도 하며 주먹으로 패기도 한다. 심하게 다치는 경우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횃불싸움이나 석전(청년들이 서로 돌을 던지고 싸우는 것)이 행해지는 이유는 개인소유자가 없는 물과 풀등의 이용권을 누가 확보하는가를 미리 결정하기 위한 것이다. 승리한 마을은 진 마을에 비해 먼저 물을 댈 수도 있고 퇴비나 가축의 먹이로 사용하는 풀도 먼저 벨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물과 풀처럼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용권의 순서를 미리 그래도 덜 험악한 민속풍습을 이용해 해결하려는 지혜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전에 이런 풍습도 사라졌다.
대보름에는 가가호호 가지고 나온 짚으로 줄을 만들었다가 마을사람들을 두편으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정월에는 대나무나 소나무로 볏가릿대(禾竿, 또는 稻竿)를 세우고 새끼를 매달아 그곳에 벼, 조, 기장, 수수 등의 이삭을 꿰어 안방 처마 끝에 세워놓기도 하였다. 보통 그 높이까지 오곡들이 수확되어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풍습으로 정월보름에 만들어 세워 놓은 뒤 2월1일까지 세워 두었다.
<2월>
2월 초하루는 콩을 볶아 먹는 날로 콩에 다른 잡곡들을 섞어 볶아 목는다. 또한 영등할머니(바람神)이 내려오는 날이라고 믿어 온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다. 그리고 영등할머니를 맞기위해 황토를 마당이나 문 앞에 뿌리고 나무가지에 오색헝겊을 달아놓기도 한다. 초하루에 바람이 불면 한해동안 바람이 많이 불 것으로 생각하고 비가 오면 물이 많아 풍년이 들거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비가 오면 며느리를 데리고 오고 바람이 불면 딸을 데리고 오는 것이라고 한다. 영등할머니를 부엌에 모시며 물을 올리기도 한다. 이날 쑥떡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리고 볏가릿대를 세운 집에서는 이날 볏가릿대를 불태운다. 또는 영등제에 입안 식구수대로 한지에 주소 이름을 써서 부엌 설겆이 하는데다 매달아 놓고 제상을 차려놓고 기원을 한다. 거기에서 자기식구의 금년 운세가 좋으라고 빌면서 소지를 한다. 소지맞이라고 하여 제상에 차린 떡, 인절미, 시루떡, 고기, 밥을 이웃과 나눠먹기도 한다.
동지로부터 105일째가 되는 날이 한식으로 2월말이나 3월초이다. 이 때는 조상의 묘를 돌보는 날이며 또한 떡, 과일, 술을 간단히 장만하여 묘소 앞에 차려놓고 <한식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이날에는 미리 해논 음식만 사용하고 음식을 조리하지 않았었다. 지금은 한식에 성묘를 하는 사람은 없다.
<3월>
3월3일은 삼짓날이라고 불리는 데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다. 이날은 부녀자들이 집에서 나물과 밥 그리고 미역국과 떡을 준비해서 방죽이나 제방에 작은 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검고 윤기가 흐른다고 머리를 감기도 한다. 지금은 삼짓날에 특별한 풍습을 행하는 경우는 없다.
삼월에는 또한 진달래가 많이 피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이 산에가서 진달래꽃잎을 따서 쌀가루에 버물러 전을 부쳐 먹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화전놀이라고 부르는데 지금도 음식을 미리 장만하거나 또는 산에 가서 만들어 먹으며 노는 경우도 드물지만 있다고 한다.
<4월>
초파일은 지금도 널리 행해지는 풍습이다. 4월8일인 초파일 부처님의 탄생일로 불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절기이다. 운봉4개면 지역에도 많은 사람들이 절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초파일에는 절에 연등을 하고 또 부처님에게 예불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로 절이나 암자들이 아주 빠쁘다. 그리고 불교를 믿지 않는 많은 동네부녀자들이 이날은 절에가서 불공을 드리는 관습이 있다. 예불이 끝나면 탑을 돌면서 여러가지 소원을 빈다. 실상사와 같이 큰 절은 초파일날에는 연등과 예불을 드리고 탑을 도는 모습으로 절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딴 곳에서 횡사하여 죽은 날을 모르는 사람은 초파일에 제사를 지내준다.
초파일에는 남원시내에서 춘향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춘향제를 구경하러 가는 사람이 많다.
<5월>
단오절은 정월대보름이나 추석 못지 않은 명절이었으나 지금의 일부사람들만 행하는 풍속이다. 과거에는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면 머리가 윤기가 흐르며 피부병 등이 없어지거나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부녀자들이 하천으로 머리 감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풍속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적으로 행해졌던 풍속이다. 그리고 나물, 약초나 찔레꽃 등을 넣어서 떡을 만들어 먹으면 일년내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어져 왔다. 또한 약쑥과 익모초를 뜯어서 문지방에 매달아 놓으면 악귀가 집안에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여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단오에는 또한 많은 놀이가 행해지는데 마을에서 그네를 매달아 그네를 타고 남자들은 여러동네들이 모여 씨름대회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옛날에는 운봉지역에서도 씨름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송아지를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단오에는 밥을 해서 웃목에다 차려놓고 조상에 봉사하는 집안도 있다.
<6월>
6월15일을 流頭日로 농가에서 농신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옛날에는 보통 부녀자들이 자기집에서 떡을 해가지고 자기가 농사를 짓고 있는 논에 가서 논두렁이나 물꼬에 물이 새지 ㅇ낳고 농사가 잘되라고 고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단오처럼 이때도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으면 일년동안 윤기가 있다고 하여 머리를 감기도 한다고 한다.
삼복은 대개 6월중순부터 7월중순에 걸쳐 있다. 하지로부터 셋째 경일을 초복이라 하고, 넷째 경일을 중복이라 하며, 입추로부터 첫째 경일을 말복이라고 한다. 이때가 일년중 가장 더운날로 인식되며 더위를 이기기 위해 냇가나 계곡의 시원한 곳으로 가서 개를 잡아 먹는다. 또는 닭을 잡아 백숙을 해먹기도 한다. 이렇게 해야 영양을 보충하고 더위를 이길 수 있다고 한다. 지금도 삼복과 관련된 풍습은 널리 지켜지고 있다. 꼭 삼복날이 아니더라도 삼복이 끼여 있을 때는 적당한 날을 잡아 마을사람들이나 가족친족들이 같이 하천이나 계곡으로 놀러가는 경우가 많다.
<7월>
6월 중순에서 7월초까지는 논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데 일손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마을사람 전체가 공동으로 두레를 조직하여 작업을 한다. 두레가 나서 이동할 때 풍물을 앞세우고 이동하는 데, 다른 동네 두레패에 마주치면 서로 나팔과 징을 더 우렁차게 불고나 치고 싸움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싸울 때는 사람을 패고 잡아가거나 또는 옷이나 영기 등을 빼앗아 가기도 한다. 보통 튼 동네의 두레패가 이기게 된다. 작은 동네 두레패는 큰 동네 두레기에 절을 하고 스스로 자신들이 약하다는 것을 자인하기도 한다. 이를 기세배라고 한다. 동네의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에 쉽게 다른 두레패에게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두레작업이 끝나면 보통 칠석(7월 7일)이나 백중(7월 15일)에 마을입구에 農旗를 내세우는데 이 농기앞에 술동이와 고기를 차려놓고 여름동안 농사를 돌봐주고 아무탈 없이 해준 농신에게 제사를 올린 뒤 ‘술멕이’를 시작한다. 논을 매어서 받은 돈으로 소나 돼지값을 하고, 마을에서 머슴을 둔 농가에서 낸 머슴술과 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낸 마지기술을 가지고 음식을 장만하여 걸판지게 논다. 이때는 술을 마냥 마실 수가 있어 이를 ‘술멕이’라고 부른다. 마을에서 돼지나 소를 잡아 커다란 잔치를 벌린다. 마을 일꾼들이 모두 참여하며 풍믈도 모두 동원되어 거나하게 춤을 추며 논다. 이때 그동안 마을에서 가장 일을 잘하는 머슴을 뽑기도 하는데 주인은 풍물패와 마을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많은 술을 내며 질펀하게 놀게한다. 장원으로 뽑힌 머슴은 마을사람들의 무등을 타고 흥겹게 놀게 된다.
이 때 하루나 이틀동안 지신밟기를 하는 마을이 많았다. 지신밟기를 할 때는 농악패를 구성하여 각 집을 돌며 지신을 밟아 복을 축원해준다. 농악패는 상쇠·부쇠·종쇠·징·북·장구·소고 등을 치는 사람과 놀이를 하는 사람,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기를 드는 사람 등으로 구성되어 당산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을의 큰 골목과 우물을 돌고서 각 집집마다 다니며 풍장을 친다. 집주인들은 대문을 열어주고 농악패들은 마당, 부엌, 장독대, 헛간, 광 등을 돌면 집안 곳곳을 돌며 지신을 밟는다. 각 집에서는 이곳에 물·살·돈을 마련하여 상위에 놓으며 상쇠가 축원을 한다. 지신밟기가 끝나면 그 집에서 마련한 음식과 술을 마을사람들과 같이 먹는다. 어떤 마을에서는 씨름하여 장사를 뽑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날에는 샘물이 잘나오라고 샘물을 퍼올리고 깨끗이 청소하고 고사를 지내기도 하며 마을의 도로를 청소하기도 하였다.
두레는 5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에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백중에 술을 마시는 것은 두레가 없어지면서 없어진 마을도 있고 그후에도 계속 되거나 나중에 다시 부활한 마을도 있다.
이외에도 7월 7일인 칠석에는 주부들이 간단한 제상을 차려 칠성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날은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1년만에 만나는 날이다. 까치들과 까마귀가 와서 오작교를 놓아주면 이를 건너가 만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7월 15일은 백중에는 동네에서 술멕이를 하지 않는 경우에도 각 집마다 풋고추·애호박·솔 을 가지고 전을 부쳐 먹는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하여 <호미씻기>를 행하는 경우도 있다. 김매기가 다 끝나 이제 호미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하여 호미를 씻어 보관하게 된다. 머슴들끼리 냇가나 계곡에 가서 하루를 놀기도 한다. 또는 여러동네가 씨름대회를 하여 장원에게는 소나 송아지를 주기도 했다. 지금도 이때를 맞아 면에서 체육대회를 하기도 한다.
<8월>
8월추석은 설날과 함께 가장 커다란 명절이다. 원래 수확을 기념하여 조상에게 감사드리는 날이어서 햅쌀로 음식을 장만하여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조상의 묘소를 찾아가 성묘를 하는 날이다. 물론 묘소는 이에 앞서 벌초를 미리 해놓아야 한다. 묘소가 아주 멀리 있는 경우에도 추석전에는 대개 벌초를 한다.
각종 햇과일, 곡식이 나오기 때문에 햇곡식으로 떡과 음식을 장만하고 햇과일을 올려 아침에 차례를 지낸다. 이러한 관습은 지금도 지켜지고 있으며 특히 추석에는 현재 삼일이 국경일로 쉴 수가 있어 전국의 도시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각종 선물을 사들고 마을에 돌아오는 오랜만에 같이 지내는 날이기도 하다. 각 집안과 마을이 돌아온 자식들과 차례음식, 그리고 각종 놀이와 이야기로 마을 전체가 시끌벅적하다.
그리고 벼가 어느 정도 익으면 이것을 잘라 솥에 쪄 <올기쌀>을 만들어 밥과 떡을 하여 집안에 성주·조왕·천룡 등의 신에 작은 제상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각종 신들에게 농사가 잘되어 감사하고 또한 집안에 무사무병하여 감사는 마음을 표하는 것이며 또한 내년에도 올해처럼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다. 또는 농사가 잘못되거나 집안에 사고가 있으면 이들이 내년에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신들에게 비는 것이다. 이러한 풍습은 지금은 행해지고 있지 않다.
<9월>
9월 9일은 9자가 겹쳐서 重九節이라고도 하고 9가 陽이 가장 큰 수이기 때문에 重陽節이라고도 한다. 이 때에도 햇곡식과 햇과일로 제상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이때부터는 이제 논일이 다 끝났음을 의미한다. 현재는 이 절기는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지금은 중구절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세시풍속이 없는 달이다.
<10월>
초닷새에 ‘都神’에, 즉 집안의 모든 신에게 과일, 술, 고기 등을 상에 차려놓고 빈다. 보통 장독대에서 천룡에게 빈 다음 안방에 성주, 삼신, 조상(또는 조령)상을 차리고 가장이 재배하고 나머지 식구가 따라서 재배한다. 다음 지신에게 상을 차리고 재배한다. 이를 도신신앙이라 하는데 보통 10월 중에 택일하여 하는데 5일경에 많이 한다.
10월은 상달이라 불리는데 추수가 완전히 끝나고 선산을 손질하고 시제를 지내는 경우가 많다. 보통 5대조 이상을 시제로 모시는데 날짜는 각 문중의 사정에 따라 잡는다. 요즈음에는 도시에서 문중성원들이 많이 내려오게 하기 위해 일요일로 잡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도시에 진출해 있는 젊은이들이 오는 경우가 드물어 시제는 대부분 나이가 든 장년이나 노인들만 참석하여 지내는 경우가 많다.
<11월>
11월에는 팥죽을 끓여먹는 동짓날이 있다. 이 날에는 참쌀로 만든 새알을 넣어 팥죽을 쑤어 먹는다. 조상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또는 액과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팥죽(빨간색이라 귀신을 쫒아내는 효과가 있다)을 사당, 각 방, 마루, 광에 한 그릇씩 담아놓고, 집 주변에 뿌리기도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리고 새알시미를 많이 먹으면 나이를 더 먹는다고 하여 꼬마들이 이를 일부러 많이 먹기도 한다. 또 이날에는 스님이나 당골 등에게서 부적을 얻어다 안방의 문지방 위에다 붙이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악귀들이 들어오지 못한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도 대부분 없어졌지만 안방 문지방 위에 부적을 붙이는 관습은 지금도 가끔 찾아볼 수 있다.
<12월>
이곳도 기독교가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어서 예수님의 탄생일인 성탄절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물론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젊은 사람들은 일년을 보내는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날이 성탄절이기 때문에 성탄절을 전후하여 망년회 등을 한다. 특히 텔레비젼이 연말분위기를 북돋우고 많은 성탄절 기념 특집 프로그램을 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성탄절에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연말분위기를 느낀다.
섣달 그믐날 밤에는 마당, 방, 부엌, 변소 등 모든 것을 밝혀놓고 잡귀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한다.
<윤달>
윤달은 탈없는 달이기 때문에 집을 개축하거나 이장하기에 좋은 달이다.
바. 물질문화
이곳의 농가구조는 일자형이 많고 ㄱ자형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난한 농부의 경우 부엌과 방한간이 있는 초가지붕흙집에 거너편에 광이나 헛간이 있는 작은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생활이 조금 나으면 부엌에 방이 두세개 붙은 나무 기둥으로 보다 번듯하게 지은 집을 가지고 맞은 편에는 사랑방, 외양간, 광, 헛간, 변소가 있는 건물을 가지고 있다. 이들 사이에 마당이 있어 집안잔치를 한다든지 또는 농사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벼나 깨를 말리거나 훌태질을 한다든지)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안방의 뒷편으로는 여성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우물이나 또는 장독이 있었다.
이 지역에서 과거에 특이하게 많이 나타나고 있던 집의 한 형태는 쌔집이다. 지리산지역에서 널리 행해졌던 억새풀로 지붕을 올리던 풍습으로 운봉4개면 지역에서도 널리 행해졌으나 현재는 거의 사라졌다. 현재 쌔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집이 주천면 회덕마을에 한 집만 남아 있다. 백여평에 달하는 이 집은 부엌, 헛간, 행랑채 등 3채로 구성되어 있어 전통초가집과 비슷하다. 억새풀로 지붕을 이어 보온효과가 더 좋다고 한다. 지붕을 엮는 재료인 억새는 수분이 다 빠지는 11월에 채취하는데 지붕 하나를 엮으려면 일꾼이 20여명으로 30-50짐(지게)을 해와야 한다. 지붕을 이는데만도 1개월정도가 소요된다. 삼국시대에 기원한 것으로 알려진 쌔집은 한번 이면 6-10년이상 버틸 수 있다. 2번이면 20년, 세번째는 60년까지도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지붕을 엮을 때마다 내구연한이 늘어나는 것은 지붕위 썩은 억새풀을 벗기지 않고 새로운 억새줄기를 그 위에 덧 씌워 엮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집마다 사용하던 베틀이나 풍구, 훌태, 등잔 등도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으며 일부 맷돌, 학독, 연자방아들이 눈에 띄고 있다. 그대신 도시에서 구입한 새로운 물품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이 트럭, 농기계, 그리고 텔레비젼이다.
새로 짓는 집들은 형태가 많이 바뀌어 시멘트와 벽돌을 사용하여 양옥식으로 집을 짓는 경우가 늘고 있다. 부엌을 집안으로 들여 입식으로 만들고 화장실과 마루도 미닫이 안으로 들이고 또는 보일러시설을 해 석유를 때는 경우도 크게 늘고 있다. 재실 등에도 마루 앞에 유리창을 단 미닫이을 하여 전통적인 재실의 맛이 사라진 경우도 있다. 창틀도 모두 나무나 알루미늄 사시로 만든 미닫이 유리창이어서 전통한옥에서 창이 없는 상태로 집을 짓던지 또는 창호지를 붙여 만든 들창을 다는 형식과는 전혀 달라지고 있다.
흙벽으로 초가지붕을 잇는 집은 너무 불편해서 사용하기가 안 좋아 더 이상 지어지지 않으며 나무로 전통한옥을 짓는 것은 콘크리트로 집을 짓는 것보다 돈이 많이 들고 또한 이런 집을 짓는 사람을 구하기가 힘들어 이미 양옥이나 콘크리이트 건물들이 많이 들어선 면소재지나 상업지역 이외에도 과거형식의 한옥집들은 앞으로 더욱 더 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사. 여가생활
원래부터 이곳에 존재하는 설화나 이야기들이 많아 할머니들이 손주들에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주는 경우가 많았으나 자식들이 모두 도시를 이주해갔을 뿐만 아니라 이주해가지 않은 경우에도 저녁마다 텔레비젼을 시청하기 때문에 과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생각하고 들려달라거나 또는 이야기하는 경우가 없어졌다. 그래서 농사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대부분 저녁내내 텔레비젼을 시청하다가 잠이 든다. 일부 청소년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라디오나 카세트를 통해 최신유행가요을 같이 듣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부모들이 연속극을 주로 시청하는 것과는 달리 학교에서 요즈음 유행하는 유행가와 춤을 자랑하고 이를 보여주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연속극보다는 스포츠, 특히 농구나 야구를 즐겨 시청하기 때문에 이들 선수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현하고 있고 특정 선수를 아주 좋아하는 속칭 오빠부대 현상이 운봉지역에서도 일부 학생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노인들은 주로 노인정에 모여서 같이 장기를 두거나 소일거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노인들뿐 아니라 마을주민들이 돈을 거둬 일년에 한번정도씩 놀러가는 관광계 등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 대부분은 오동도, 해남, 민속촌, 속리산 등 인근 지리산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명승지나 온천을 다녀온 경우가 많았다. 보통 계를 통해 돈을 모으거나 또는 놀러가기 전에 각 집에서 돈을 내서 버스를 대절하여 놀러가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마을내의 유지나 외부에서 돈을 번 사람이 일부 10-50만원의 목돈을 기부하여 마을노인들이 돈을 내지 않고 놀로가기도 한다. 왜 놀러가느냐는 놀음에 기분전환도 하고 세상이 돌아가는 것도 구경하니까 놀러 갔다오면 기분도 좋아진다고 말했다.
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전에는 집집마다 돌아가며 식사를 했으나 이제 식당에서 계모임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름이 되면 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이 같이 천렵을 가거나 가까운 하천이나 산에 놀러 가는 경우도 자주 나타나고 있다. 이웃주민이나 직장, 친구들이 만나 저녁에 술을 마시는 경우도 많다. 특히 관광지의 발달로 술집과 노래방이 많아져 이곳 사람들도 같이 식사하고 술을 마시며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이 이제 농촌이나 소읍의 생활이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지역주민들도 여러가지 체육대회를 행하기도 하는데 특히 노인들은 볼을 쳐서 쇠창구멍에 넣는 게이트볼 시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운봉지역 체련장에서 노인들이 자주 이러한 게임을 하였다. 힘도 들지 않아 노인들이 하기에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배드민턴 등을 부녀자들이 나와서 하기도 한다. 청소년층들은 축구나 배구, 농구를 학교운동장에서 하기도 하나 일부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자주 하는 편은 아니지만 조기축구회나 또는 면민체육대회에서 축구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각종 면민체육대회나 축제에의 참여도 중요한 여가의 하나이다. 이곡지역의 주민들은 대부분 춘향제를 구경하려 남원에 간 적이 있으며 남원시민의 날에 행해지는 흥부제에는 아영면 성리와 동면 성산리 마을주민 전체가 참여하여 남원시내에서 행진을 하기도 하였다. 운봉읍에서는 지역주민을 두편으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하기도 한다.
운봉에서 음력 정월 대보름날 이곳에서 世居하던 운봉박씨들이 친목을 목적으로 행하는 놀이였는데 운봉읍의 놀이로 발전하였다. 섣달부터 짚을 거두어 큰 동아줄을 만드는데 그 길이가 운봉교에서 시장을 거쳐 장대의 옛터에 이를 정도여서 500m가 넘으며 굵기는 어른의 한 아름이 된다. 여기에 중간줄, 새끼줄을 이어 많은 사람들이 잡아 당길 수 있게 만든다. 줄이 완성되면 보름날 운봉박씨들이 사는 위치에 따라 동편박씨와 서편박씨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한다. 이 때는 운봉뿐만 아니라 운봉4개면, 그리고 함양, 남원, 진주 등 외지의 운봉박씨들도 연고만 있으면 참여할 수 있었다. 이때에는 수백통의 막걸리를 마련 술을 마시며 힘을 돋웠다. 줄다리기 승부가 결정되면 지는 쪽에서 술값을 낸다. 현재는 마을대항의 행사로 바뀌어 운봉읍민이 두편으로 갈려 줄다리기를 한다.
매년 11월 첫주에 운봉애향회에서 개최하는 이 황산대첩축제는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면하고 면민의 단합과 발전을 도모하는 축제의 장이다. 남원시민의 날인 10월에 행해지는 흥부제에는 아영면 성리사람들과 동면 성산리 사람들이 다 참가한다.
매년 11월 첫주에 운봉애향회에서 개최하는 이 축제는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면하고 면민의 단합과 발전을 도모하는 축제의 장이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철쭉축제, 국악축제 등도 행해지는데 이들은 이곳 면민들이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다.
4.. 특산품
가. 목기
승려가 3천명이 넘었다는 실상사의 스님들로부터 바라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하여 시작된 것으로 지금도 실상사 앞 산내면 백일리를 중심으로 운봉읍, 동면에서도 많이 제작되고 있다. 조선조 500년동안 왕실에 진상하는 목기도 계속 뱀사골에서 만들어 왔다. 이러한 목기는 과거에 실상사 지역이 운봉현에 속했기 때문에 운봉목기로 많이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전국적으로 남원목기로 통칭되고 있다.
옻을 칠한 목기는 인체에 해가 없고 뜨거운 음식을 올려놔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시간이 갈수록 칠 색깔이 발갛게 피어나 은은한 멋을 풍김다. 남원 산내면 실상사의 스님들에게 바리때(나무로 만든 식기)를 만들어 공급하면서 유래된 남원목기는 지리산의 풍부한 산림자원을 바탕으로 수백년동안 전국 최고의 명성을 유지해왔다. 일제시대에는 산내초등학교 목공과, 해방후에는 전라공업기술학교에서 남운의 전통적 목공예기술이 전수됐다.
현재 남원에 100여곳의 목공예업체가 잇으며 이곳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1,000여명이 넘고 도지지어 무형문화재도 4명이나 된다. 또 대전 광주 경기지역의 장인들 대부분이 남원출신이다. 남원시는 최근 운봉·어현동·조산동에 목기단지를 조성하고 이중 어현동에 목공예연구소를 개관, 교육과 디자인 개발을 통해 질 좋은 제품을 생산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남원목기는 연 매출액이 200억원대로 전국 제기류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일반생활용품의 절반이 남원산이다.
목기는 원목을 잘 말린 다음 제품모양에 따라 원목을 깎아 약 보름동안 다시 말린다. 이어 좀 더 정교하게 원목을 깎은 뒤 6-7차례 칠을 해서 응달에 말리면 제품이 완성된다. 원목을 처음 깎을 때부터 완성품이 나오기까지 석달이상이 걸린다. 목기의 생명은 내구성에 있는데 이는 원목이 재질, 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목은 지리산주변에서 많이나는 물푸레나무, 고로쇠나무, 버드나무, 오리나무 등이 쓰여 그 향이 뛰어나다.
남원시 운봉읍 장교목기공단에서 3대 46년간 목기를 만들고 있는 배동복(67, 이조운봉공예사대표)씨는 ��지리산이 71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나무가 부족해 경상남도나 강원도에서 가져오고 있다��며 ��최근 중국산이 범람해 타격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배씨는 그러나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위생적이고 반영구적인 목기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 생산규모가 커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나. 흑돼지
운봉지역에는 장수나 다른 산간지역과 마찬가지로 변소와 돼지우리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2층변소에서 똥을 싸면 아래에서 돼지가 와서 똥을 먹는다. 집에 따라서는 변소와 구분되어 따로 돼지우리에서 키워 돼지를 음식찌꺼기와 사료로만 키우는 경우도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음식물찌거기나 사료도 먹인다. 집집마다 한두마리씩 이런 흑돼지를 키우고 있다. 이 흑돼지는 한국 토종의 흑색 돼지로 외래종처럼 살이 찌지 못하기 때문에 상업적 목적으로는 키우기 어렵다. 따라서 상업적인 목적보다는 집안과 마을에서 행하는 잔치를 위해 그리고 부수물로 돼지머리를 고사상에 올리기 위해 키워왔다고 볼 수 있다.
이 흑돼지는 고기가 연하고 부드러워 아주 맛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어 보통돼지보다 비싸다. 외지에서 이 돼지고기를 먹으로 운봉지역으로 오는 사람들도 많고 또한 흑돼지를 사다가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과거에는 돼지를 키워서 집에서 혼인이나 환갑잔치 등을 할 때 잡아서 요긴하게 손님들을 접대할 수 있었다. 남는 고기는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에 들려서 보냈다. 그리고 마을에서는 동제를 지내거나 두레를 마치고 백중놀이 등을 할 때도 돼지를 잡아 먹었다.
다. 안개꽃
97년 5월 18일 경기도 고양시의 세계꽃 박람회에서 마원시 운봉에서 생산된 안개꽃이 절화부문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다. 세계 20개국에서 출품된 80여점의 작품들을 물리치고 최고의 영예를 차지한 것이다. 이번에 금메달을 차지한 운봉의 안개꽃은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많은 고랭지에서 생산돼 선명한 꽃색깔을 자랑한다. 운봉 안개꽃이 세계최고로 인정받기까지는 이 지역 재배농민들의 남다른 정성과 노력이 숨어 있었다. 현재 운봉에서 안개꽃을 재배하고 있는 농가는 17가구. 이들은 자체적으로 ‘화훼연구모임’을 만들어 매월 한번 이상씩 모여 재배기술에 관해 함께 토론하고 새로운 정보도 주고 받는다. 또 공동으로 저온 저장고를 건립하고 저온 수송차량 등을 이용, 원거리 수송때에도 꽃의 신선도 유지 등 상품성을 높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매년 5월만 되면 어린이날·어버이날 등이 겹쳐 최대성수기가 되면서 꽃들이 홍수처럼 출하돼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재배를 포기하는 오가까지 속출한다. 그러나 이 지역 농민들은 서로 꽃 증식시기를 달리해 출하시기를 조벌, 무문별한 덤핑출하를 방지한다. 특히 안개꽃은 다른 곷에 비해 일손이 적게들고 고랭지의 기상조건을 적절히만 이용하면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고소득 작물이다. 특히 운봉의 안개꽃은 고산지대에서 재배되기 때문에 꽃잎이 선명한 순백색을 지니고 수명도 길어 각광을 받고 있다. 운봉읍 주촌 화훼시범단지는 6월에 캐나다에 안개꽃을 수출하였다. 백합도 전국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으나 백합종구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조직배양을 통한 종구의 자체해결이 시도하고 있다.
라. 고로쇠
고로쇠 약수 채취작업이 지리산 뱀사골주변인 산내면 덕동리 달궁마을 등 고산지대를 중심으로 2월20일경부터 시작한다. 우수·경칩을 전후해 약 1개원 채취되는 고로쇠 약수는 지리산 반야봉 주변해발 6백m 이상 고산지대에서만 서식하는 단풍나무과에 속하는 고로쇠나무에서 채취되고 있는데 옛부터 신경통과 관절염·위장변·고혈압·변비에 특효가 있고 임신부들의 산호조리에도 좋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로쇠 약수는 또 이뇨작용이 뛰어나 이를 마시고 한증을 하면 몸속에 쌓인 노폐물이 모두 빠져나와 성인병 예방에 큰 효과가 있으며 하루 20리터 이상을 마셔도 설사나 배앓이를 하지 않느다고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매년 2월말이면 약수를 마시려는 외지인들로 크게 붐비며 곧 바로 채취한 약수를 맛보기 위해 관광버스까지 빌려 이곳에 몰려오고 있다.
고로쇠와 관련된 전설도 많은데, 백제와 신라군이 전쟁을 하고 있을 때, 화살이 꽂힌 나무에서 물이 흘러나와 한 병사가 마셔보고 부상병에게도 멱여 보았더니 갈증과 성처의 고통에서 벗어나 이 수액에 특효가 있음을 알았다고 한다. 또 지리산 반야봉 아래서 범과 곰이 살았는데 사냥꾼이 쏜 화살에 곰이 맞아 죽게되자 산신령이 나타나 골리수나무 표피를 상처에 바르고 그 물을 마시면 상처가 아물거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거뜬히 나았다고 하며, 변강쇠가 몸이 쇠약해 뱀사골에 와 골리수수액을 마시고 건강을 되찾아 그 곳에서 들독을 들었다고 해서 들독골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온다.
고로쇠나무는 밤에 수분을 흡수, 저장해다가 이튿날 햇살이 비치면 목피의 인공상처를 통해 수분을 체외로 흘리는데 이 수액이 바로 고로쇠 약수다. 채취방법은 고로쇠나무의 지상 1m 위치에 V자형으로 목피에 홈을 파고 뽀족한 부분에 호스를 연결, 플라스틱 통으로 흘러 내리게하면 하루 평균 한 그루에서 4리터 정도의 약수를 채취할 수 있다. 달궁계속을 중심으로 내령·외령·덕동·반선 등 6개마을 1백여 가구 주민들은 고로쇠나무에서 약수를 채취, 20리터들이 한통에 5만언에 팔고 있는데 올해는 6백여톤의 약수를 채취해 6억원의 소득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45년동안 약수를 채취한 김태곤(산내면, 60)은 “하루 40리터의 약수를 받아내고 있는데 약수를 마시려는 관광객이 늘면서 채취하기가 바쁘게 팔려 나가고 있다”며 “올해는 고로쇠 약수의 공급이 수요를 못따라갈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산내면에서는 고로쇠약수가 많이 채취되고 신비스러운 약효가 발휘되기를 기원하는 고로쇠 약수제를 지리산 산신제와 함께 매년 우수에 개최하고 있다. 제례는 유교식 절차를 따르고 있다. 제수를 장만하고 제상을 진설하여 초헌, 아헌, 종헌 순으로 술을 올리고 소지를 올리는 식이다. 기관장들의 인사말이 있고 도중에 축을 읽고 끝나면 음복을 한다.
마. 기타
이외에도 운봉지역에서 여러가지 특산물이 나오고 있다. 특히 지형이 높아 고냉지 감자와 채소가 널리 재배되고 있다. 이러한 채소는 가격의 등락이 심해 가격이 폭락할 때는 밭에 그대로 썩히기도 한다. 1996년에는 배추가격이 폭락하여 많은 밭에서 배추가 썩어갔다. 또한 산골이기 때문에 토종꿀을 많이 생산하고 있는데 특히 산내면 일대에 많은 한봉이 있어 전국적으로 유명한 토종꿀을 생산하고 있다.
5. 관광산업
가. 흥부민속촌
흥부전의 실제 무대인 동면, 아영면 일원에 민속촌과 소공원 조성을 위한 「흥부문화권」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남원시에 따르면 장단기적으로 2010년까지 흥부출생지인 동면성산마을과 흥부발복지인 아영면 성리마을에 3백71억원을 투입, 전통민속문화의 맥을 잇기위한 흥부민속촌과 소공원을 조성하여 지리산과 광한루를 연계한 흥부문화권을 조성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시는 단기적으로 98년까지 45억원을 들여 동면과 아영면에 각각 6천여평 규모의 소공원을 만드는데 올해에는 마을입구에 돌장승과 목장승을 시설 형상화하고 흥부상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의 마을 단장을 완료하고 2억5천만원을 들여 소공우너부지 1만2천평을 매입할 예정미ㅕ, 97년부터는 흥부, 놀부집, 전통민가집, 편익시설 등을 년차적으로 완공할 계획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민자유치를 적극 추진하여 97년부터 2010년까지 3백33억원을 들여 남부지방의 생활상을 재현한 교육문화시설과 운동, 오락, 휴양, 숙박시설 등 전반적인 이용시설을 갖춘 13만평규모의 흥부민속촌을 동면과 아영면 중간지점에 조성할 계획이다.
지난 92년 경희대학교 민속학연구소에 의해 문헌조사, 현지소자 및 면담조사로 흥부전의 실제부태돌 밝혀진 동면과 아영면에 흥부전의 배경부대가 조성됨에 따라 이곳이 흥부에 관련된 유적이 정비 복우너되고 지리산과 춘향문화권을 연계한 관광상품으로 개발돼 이지역의 관상산업에 크게 이바지할 전망이다.
동면 성산리에서는 매년 3월 삼짓날 제비가 돌아오면 마을 앞산에 있는 박첨지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흥부제가 남원시민의 날과 통합되어 흥부제를 지내므로 시민의 날에 시장 등이 참석하여
또 제사를 지낸다.
나. 지리산 여름국악무대
해마다 여름이면 지리산을 찾아온 피서객들을 우리음악의 신명과 멋의 무대로 안내하는 지리산 여름 국악무대가 열린다. 96년에는 8월1일과 2일 남원시 산내면 달궁야영장에서 열렸다. 남원 국립민속국악원이 마련하는 지리산 여름국악무대는 해마다 열려오면서 이곳을 찾은 관객들에게ㅔ 호평을 받아온 무대다. 국악원 중심의 공연활동에서 대중을 찾아 나선 야외 무대로 우리 음악의 대중화와 이해를 높이는 새로운 문화운동으로 자리잡은 이 국악무대는 올해에도 춤과 소리, 풍물에 이르는 다양한 내용으로 관객들을 끌어모았다.
사물놀이팀의 「사물놀이 앉은반」과 「사물놀이 선반」, 국립미속국악원 연두단의 기악합주 「남도굿거리」, 신정옥 나승희 하선영씨의 「가야금병창-춘향가 중 사람가와 화초타령」, 최용화씨의 「장고춤」, 유영애․신정옥․박은선․나승희․하선영․허은선․하영․양은주씨의 「남도민요-성주풀이 남원산성 진도아리랑」 등이 공연되었다.
국립민속국악원 이번 공연을 위해 지리산 달궁야영장에 임시무대를 설치하고 조명·음향설비를 갖추어 야간공연의 새로운 분위기를 피서객들에게 선사할 수 있도록 했다. 무료. 풍물단과 완객들이 서로 어울려 춤을 추고 놀았다.
다. 바래봉철쭉제.
운봉국립종축장(전 면양목장)에서 산등을 타고 1시간 30분정도 오르면 바래봉(1165m)가 나오는데 이 산등에 중순이 되면 군락을 이룬 철쭉이 붉게 피어 산 능선이 온통 불꽃이 타오르듯 붉은 철쭉꽃의 향연이다. 전체가 붉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중에는 붉은색, 노란색, 연분홍, 흰색 등 다양한 철쭉이 어울려져 장관을 이룬다. 이 철쭉제는 95년부터 열렸는데 이른 봄에 지리산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계획되었으며 기간 중에 5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찾아와서 철쭉을 즐기고 갔다.
라. 뱀사골
뱀사골은 뱀이 죽은 골짜기라는 전설에서 나온 이름이다. 뱀사골 입구에 있는 지금의 전적기념관 쯤에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절에는 칠월백중날에 신선대에 올라가 기도하면 신선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이를 괴이하게 여긴 한 大師가 신선대에 올라 기도를 하려는 스님의 가사장삼에 몰래 명주실과 돌을 매달아 두었더니 다음날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큰 뱀)가 뱀소부근에서 죽어 있었다고 한다. 신선이 되지 못해 죽은 스님들을 기리기 위해 반절쯤 신선이 되었다 하여 뱀사골 입구의 동네를 半仙이라 하였다. 더 올라가면 용의 모양을 한 30m높이의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곳이 바로 용이 승천하려고 머리를 흔들면 몸부림쳤다는 오룡대이며, 뱀사골 중간 지점에 이르면 길이 30m, 수심이 20m에 이른다는 뱀쏘가 있어 뱀과 얽힌 전설들이 보여준다.
달궁마을에서 반선을 거쳐 내령으로 빠지는 계곡을 달궁계곡이라고도 한다. 하늘을 가릴 만큼 두성한 원시림속에 짙은 이끼 내음이 물씬하여 자연 그대로의 계곡미를 보여준다.
그리고 일명 용호계곡으로 알려진 구룡계곡은 해마다 음력 4월초파일 아홉마리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아홉군데 폭포에서 노닐다 승천하다는 전설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주민들 이야기로는 실제로는 9곡이 아니라 12곡이라고 한다. 구룡계곡은 계곡이 깊고 흑ㄹ이나 모래가 없이 온통 바위와 돌로만 이루어졌으며 나무와 암벽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속에 물이 티없이 맑아 선경을 연상시킨다.
또 폭포 뒤에 있는 옥녀봉 어귀 반석뒤에는 이 고장 유림들이 4벽여년전에 풍류를 즐겼다는 육모정이 있는데 지금도 한여름에는 계곡에 발을 담그고 춘향가 한 대목을 지리산 자락에 실려보내는 어른들이 많다.
이러한 많은 쏘와 폭포 그리고 원시림이 절경을 이루고 봄의 진달래, 철쭉, 여름에는 15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 시원한 계곡과 숲, 그리고 가을에는 붉은 단풍이 가득하고 겨울에 원시림에 쌓인 흰눈이 광활한 운치를 보여주고 있어 사철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한 여름에는 총 수십만명이 넘는 인파가 전국에서 몰려들기도 한다.
마. 뱀사골 단풍제
해발 1915m 천왕봉에서부터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지리산 단풍이 10월 25(금)-26(토)일 주말에는 전지역으로 확산 단풍행락객들이 산에 들어찬다. 노고단·토끼봉·반야봉 등 산봉우리 정상에는 일찍부터 단풍이 곱게 물들어 전국의 단풍객들이 몰려온다. 또한 지리산 최대의 단풍 군락지인 뱀사골도 25일께 최절정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남원시는 96년부터 제1회 뱀사골 단풍제를 개최하여 달궁주차장에서 각종 문화축제를 선사하고 있다. 단풍제는 전국 여행사에 널리 알려졌으며 등반대회, 노래자랑, 연예인초청공연, 행운권추첨 등이 행해졌다. 가을에 가장 늦게 단풍철을 맞볼 수 있는 산으로 약 10만명에 가까운 인파들이 모여든다.
바. 정령치 활공장
주천면과 산내면의 경계에 있는 정령치 활공장(1080m, 실고도 600m)는 최고의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손 꼽히고 있다. 정령치 활공장은 높은 고도를 유지하면서 하루 8시간의 비행이 가능하고 국내 최장 비행거리(장거리 70km, 삼각비행50km)를 유지하고 있어 국내외 대회 유치가 가능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이 호라공장은 지리산 일주도로와 인접해 교통이 편리하고 활고시 지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조망할 수 있어 단풍관광철인 9-10월동안 전국각지에서 수천며의 활공인들이 찾아들고 있다. 96년 11월에는 제11회 공군참조총장배 쟁탈 행글라이딩대회를 유치하였고 앞으로 남원시장배 전국 행·페러 글라이딩대회도 개최할 계획이다. 한국 최고의 행글라이딩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사. 국립운봉목장
지리산 바래봉 기슭의 운본목장을 대규모 관광단지로 조셩해야 한다는 말이 많다. 운봉목장은 국립공원 지리산 줄기에 자리잡은 약 7백ha의 대규모단지로써 고도와 지형, 지세 등이 특출나 오래전부터 레저타운개발에 필요한 최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따라서 남원시가 운봉읍 용산리 일원 「운봉목장」 부지를 지리산권 전천후 리조트로 개발키위해 부지를 매입하여 개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운봉목장은 지난 71년 한호면양목장을 설치한다는 정부시책에 따라 지역주민들이 적극호응, 2백만여평의 부지를 제공했는데 당초의 의도가 상실된 채 지금은 한우·산양 사육경영연구 및 조사료 생산에 관한 조사연구를 위해 축산기술연구소 남원지소가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소 기능에 비해 지나치게 방대한 면적을 보유하고 있어 지역개발의 저해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하면 당초 기대했던 지역발전과 소득증대 등 지역축산 농가에 대한 직접적인 수헤효과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시는 기능이 유사한 대관령연구소아 통합관리를 요구하는 등 소관부처와 접촉을 벌여 남원시로 이관, 글프장을 비롯한 스키장과 눈설매장, 청소년 수련시설, 가족호텔 등을 유치해 관광명소로 개발할 방침이다. 이지역은 특히 국립공원 지리산의 바래봉 기슭에 위치, 천혜의 철쭉군락지로서 경관이 빼어날뿐 아니라 국도 및 고속도로변에 자리하고 있어 접근성이 매우 양호한 지역이다.
아. 동면 중군리 관광농원
전통한옥을 소재로 한 1천여평의 관광농원을 조성하여 물레방아간, 전통식품 제조 및 판매를 마을 공동으로 운녕하고 있다. 자연부락을 활용하여 생활모습을 그대로 불 수 있으며 마을 내에서 민박도 가능하다.
자. 민박
지리산에는 1년에 백만명이 사람이 오고 있기 때문에 이산을 끼고 있는 산내면에서는 민박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오는 여름철에는 내령마을, 부운마을, 덕동마을, 달궁마을, 춴천마을, 반선마을이 민박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차기도 한다. 이들과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각종 향토식품, 특히 산채백반, 더덕, 송이버섯, 토종꿀, 도토리묵, 매운탕, 오미자주, 다래주가 발달하여 관광철에는 이지역 식당에 손님이 끊이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남원지편찬위원회
1992 남원지. 남원시
문화재관리국
1971 한국민속종합보고서: 전라북도 편. 문화재관리국.
전라북도
1990 전북의 전통민속. 대흥정판사.
전북대학교 박물관
1987 남원지방문화재지표조사보고서. 전북대학교 박물관
오종근
1997 남원지방 민간신앙연구. 남원시.
주강현
1996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한겨레신문사.
한국민속박물관, 전라북도
1994 전북지방 장승·솟대신앙. 국립민속박물관 보고서 제 14호.
남원신문, 전북일보 등 각종신문* 현지 주민들의 면담과「고도 남원의 얼」「남원지」등 여러 문헌을 참고로 운봉 4개 읍면의 전설을 수집하여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