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투본강의 뱃사공들은 왜 한국 유행가를 부르는가?
7,8년 전에 베트남에 다녀온 친구가 ‘한국군의 학살을 고발하는 증오비가 100여 곳에 있으며 그 내용이 후손 대대로 한국인의 만행을 전하며 결코 원한을 잊지 말라’는 내용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을 때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원한에 사무친 죽은 자와 산자의 피에 젖은 얼굴이 떠올랐고 가해자의 후손으로서 양심의 가책과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따이한’의 스토리도 양심을 찔렀다. 그래서 내 마음 한 구석에는 베트남에 대한 미안감과 죄책감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턴가 “메이드 인 베트남”의 제품이 부쩍 늘었고 우리 작은 고향 동네에 베트남 아가씨가 시집을 왔다. 순식간에 어디를 가든지 한국 남성과 결혼한 베트남 여성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베트남 이미지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베트남인들의 반한감정이 여전할 것이라는 생각, 고엽제로 황량해진 산과 들, 전쟁의 그늘로 가난한 거리와 사람들 그리고 배타적이고 경직되고 부자유하고 불편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난생 처음 발을 디딘 다낭 인근의 산과 들은 푸르고 도시나 시골이나 할 것 없이 거리와 사람들은 깨끗하고 예상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절하고 중국 거리에 그 흔한 공산당 선전 구호와 경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심 충격을 받았는데 가이드가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인을 좋아하며 일본이나 미국보다 한국에 가는 것을 더 선호하며 1년에 3모작이 가능하나 쌀값의 하락을 막기 위하여 2모작만 허용한다는 멘트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구가 이미 1억을 돌파하였고 다낭시 인구의 평균 연령은 23.6살이며 작년의 경제 성장률이 6%였다고 하였다. 듣는 말마다 생소하여 나의 선입관과 편견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워 머리가 혼란에 빠졌다.
치열한 이념전쟁을 치르고 사회주의 이념으로 통합된 국가로 세워진 베트남의 도시는 무언가 달라야한다는 생각을 해서일까? 인구 120만여 명의 다낭시가 그저 흔한 도시, 남지나해 해변을 끼고서 관광과 휴양산업을 추구하는 활기차고 자유로운 도시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사회주의 얼굴과 냄새 그런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고 세계의 유명한 호텔들이 장원처럼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명품 관광의 깃발을 날리고 있는 다낭의 모습이 실감이 되지 않았다.
베트남은 1986년 개혁과 개방의 골자로 하는 도이모이정책으로 달라졌고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는데 나는 옛날 베트남의 뼈다귀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호이안 가는 길에 투본강에 들려서 바구니 배를 탔다. 커다란 반구형 형태의 바구니 중심에 널빤지를 박아서 두 사람이 앉을 수 있게 되어 있는 놀이배로 일반 나룻배처럼 사공들이 앞에서 노를 저었다. 키가 작고 체구가 왜소한 사공들이 노를 저으며 쉬지 않고 흥겹게 부르는 노랫가락이 귀에 너무 익숙하였다. 여러 명의 사공들이 동시에 노래를 부르니 비록 강 위이기는 하지만 신명이 났고 우리들 모두가 열창을 하니 강이 흔들렸다.
“이야 야야 ~ 세월아 비켜라 ~ 내 나이가 어때서 ~ 사랑에 나이가 있나요 ~ 마음은 하나 요 느낌도 하나 요 ~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내 귀를 의심하였지만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가 분명하였다.
사공들이 한국의 유행가를 부른다는 사실 그것도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도 모르게 그들의 노래를 따라 열심히 박수를 쳤다. 노래가 끝나면 구호가 이어 나왔다. 리더가 선창하면 나머지 모두가 함께 소리를 질러서 화답하였다.
“언니~ 이뻐요! 오빠~ 최고~ 오리 꽥꽥 돼지 꿀꿀 병아리 삐약삐약 강아지 멍멍~ 언니 이뻐요~ 오빠 최고~ 코리아 넘버원 ~ 아싸 가오리 ~ 아싸 가오리~ 아싸 가오리~”
사공들의 구호와 열창이 나에게 파도처럼 많은 생각을 일으키며 번민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몇 몇 생각에 골몰하게 만들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을 용서하였는가? 잊었는가?
베트남 사람들은 라이따이한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용서하였는가? 잊었는가?
퐁니, 퐁넛의 위령비와 하미마을 위령비 앞에서 멍하니 서서 용서를 빌며 질문을 던졌다.
유족들이, 베트남 전 국민들이 가해자들과 가해자의 나라를 진정으로 용서하였을까?
베트남 사람들의 반한감정은 사라진 것 일까?
우리는 일본과 일본군의 만행을 지금도 잊지 않고 외치며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데 베트남 사람들은 그런 절차도 없이 한국군과 한국의 가해자들을 용서하였을까?
나의 궁금증에 대하여 뜻밖에도 현지에서 13년 째 살고 계시는 가이드가 대답을 하였다. 그의 이해와 설명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지만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들은 대로 정리해본다.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국과 한국군의 월남 전 참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근본적으로 베트남전쟁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민족통일전쟁이고 이념적으로는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미국과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소련의 대리전쟁이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외국인으로 베트남 국정에 개입한 미국의 몫이지 가난한 나라로서 생존을 위하여 남베트남을 지원한 한국은 미국의 부름에 참여한 용병이므로 전쟁에 책임을 지거나 배상할 이유가 없으며 적대국으로 배척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베트남은 승전국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하였다. 베트남은 전쟁에 참여해서 패전한 작은 나라에게 피해 보상이나 사죄를 요청할 정도로 자존심이 없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죄하면 ‘무엇을 사죄하느냐?’고 반문한다고 하였다. 전쟁에서 진 나라가 이긴 나라를 향해 사죄 운운하는 것은 승전국의 체모와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개방과 개혁을 주장하며 도이모이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베트남의 지도자들이 새로운 변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과거를 뛰어넘어 전쟁으로 적대국이 되었던 나라들과 수교하며 새로운 관계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기로 대대적인 결단을 하였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전쟁의 승리로 통일 베트남을 이루고 미국을 상대로 이긴 자존심이 한없이 높아졌으나 세계에서 열외의 나라가 된 것에 대한 성찰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사실을 인식하며 문호를 개방하였다. 특별히 그들은 한국전쟁으로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 월남전에 용병으로 왔던 나라인 한국의 발전과 새마을운동을 주목하였으며 1992년 12월 드디어 적대국이었던 한국과 수교하면서 자국의 이익과 발전, 화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베트남 지도자들은 마을에 세워진 증오비를 철거하거나 위령비로 바꾸도록 권장한다고 하였다.
대략 이 세 가지 이유와 흐름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의 한국인에 반한감정이 약해지고 호감도가 높아졌다고 하니 경제의 활성화 없이는 사상도 이념도 공염불에 불과한 세계의 흐름을 호지명의 후예들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이다.
가이드가 여담으로 대우의 김우중 회장과 박항서 축구 감독이 베트남의 변화와 현대화에 대한 기여도가 높다고 하였다. 사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호지명 다음으로 대우의 김우중 회장을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하였다.
김우중 회장이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 이전부터 베트남 지도자들과 함께 베트남의 미래에 대한 구상과 구체적인 기획을 하였고 그것이 기초가 되어 오늘의 베트남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17년에서 2023년까지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서 선수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훈련시켜 동남아아시안게임의 승자가 되게 만든 이야기는 베트남인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며 끝없이 회자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진정으로 베트남인들의 사랑을 받는 영웅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가이드는 베트남 여성들의 한국 남성과의 결혼 또한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한국을 선호하고 좋아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을 ‘사위의 나라’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아주 묘하였다.
현재 한국 남성이 국제결혼 대상으로 가장 많이 찾는 나라는 신부의 33.5%를 차지하고 있는 베트남이라고 한다.
아직도 내 귀에는 투본강에서 들었던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와 “코리아 넘버원! 아싸 가오리!” 소리가 쟁쟁하다.
도이모이정책으로 국가의 방향을 대대적으로 전환한 베트남의 지도자들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쉽게 자살골을 선택한 것인지는 역사가 밝혀줄 것이다.
2024년 12월 1일 해시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