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천사’와 함께 민주주의의 ‘금(金)실’을 잇자
주 윤 정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지난 두 주는 재난을 넘어 파국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의 천사’가 날개를 펼친 시간이기도 했다. 법의 사회학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훗날 여러분이 부모가 되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이 시기를 배우며 ‘엄마, 아빠는 그때 뭐 했어?’라고 물을 테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현재를 기억하라”고 말했다.
탄핵에 반대했던 정치인들의 SNS 계정에는 “당신의 행위는 역사에 박제될 것”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역사의 기억은 단순한 의식과 기록의 차원을 넘어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기억이다. 이는 철학자 베르그손이 말하는 순수 기억으로, 역사의 지속(durée) 속에 남는 혁명의 기억과 같은 것이다.
파국의 시간, ‘역사의 천사’가 날개를
이번 사태로 인해 과거 계엄과 국가폭력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의 어머니는 박정희 사망 후 계엄령이 내려졌을 때 집이 풍비박산 났던 기억을 떠올리셨고, 4.3 사건의 기억을 가진 지인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70년대 유신 독재와 80년대 서울의 봄에 맞서 싸웠던 장년층은 체포의 기억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와 트라우마는 과거의 직접 경험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계엄의 공포를 미디어로 접한 청년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학생들은 며칠 밤을 새우며 뉴스를 확인했고, 자취하는 학생들은 서로 모여 상황실처럼 노트북을 켜고 정보를 나눴다. 계엄의 공포는 세대를 넘어선 공통의 경험이었다.
재난 이후 사회적 트라우마와 회복을 연구하며, 나는 회복력의 핵심 요인을 계속 찾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집합 기억, 인지적 유연성, 민첩성, 집합적 효능감 등이 공동체의 회복력을 높이는 요소로 꼽힌다.
나는 현재 인도네시아 아체를 연구 중이다. 아체는 장기적 내전과 2004년 진도 9.3, 30미터 높이의 쓰나미라는 충격적 재난으로 13만 명 이상이 사망한 지역이지만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쓰나미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지만, 100여 년 전의 기억이 전승된 섬에서는 ‘스몽’이라는 단어를 통해 쓰나미의 공포를 미리 인지하고 있었고, 그 섬만은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쓰나미 이후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절박하게 노력했다. 그 결과, 내전과 쓰나미의 충격 이후에도 아체는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번 12월 3일 이후 한국 민주주의는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국민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을 유연하고 민첩하게 파악하기 위해 뉴스 속보에 집중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던 여고생 딸은 모든 정치인과 군 지휘관의 이름을 외우며 상황을 따라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시민들은 국회 앞으로 몰려가 계엄군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민주주의 사회의 상속자인 우리 군인들도 시민을 적대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의 불복종과 비적극적 태도를 보이며 임무를 수행했다. 민주주의의 기억과 가치가 체화된 정치인과 시민들은 민첩하게 대응했다. 계엄 가능성을 인지한 국정원과 군 출신 국회의원들과 민주당 지도부는 빠르게 대비했고, 국회의장은 몸에 밴 의회 민주주의의 원칙과 절차를 통해 계엄 해제를 신속하게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은 아체의 공동체가 집합 기억을 통해 충격을 최소화한 것처럼, 민주주의의 기억과 가치를 체화한 시민과 정치인들이 절박하게 그리고 민첩하게 각자의 역할을 다했기에 가능했다.
집합 기억 속에 작동한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
모두의 광장에서는 노래방 도우미도, 퀴어 시민도, 장애인도, 아리셀 유족도, 동자동 주민도, 노동자도, 농민도, 종교인도, 20대~30대 여성도 나라가 어두울 때 자신이 가진 가장 밝은 걸, 귀한 걸 기꺼이 내어놓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리고 탄핵의 순간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지드래곤의 ‘삐딱하게’가 울려 퍼졌을 때, 광장의 시민들,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을 하던 이들은 우리 모두 함께라면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엄청난 효능감을 경험했다.
그러나 이제 윤석열과 그 일당은 11%의 지지율을 기반으로 가짜뉴스와 선동을 통해 내전 상황을 이어가려 할 것이다. 2016년 촛불 이후 좌절된 사회 개혁과 광장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파국의 사이클이 고착되지 않고, 적폐와 싸우다 스스로 적폐의 귀신에 빙의된 빌런의 재등장을 어떻게 막을지 숙제를 해야 한다. 모두의 광장이 모두의 정치로 이어질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도 필요하다. 일상으로 간신히 돌아온 오늘 정신없이 지나간 역사의 시간을 차분히 복기하며, 우리는 모두의 민주주의를 위해 폭력의 기억과 작별하지 않고, 한강 작가가 말한 ‘심지에서 심지로, 심장에서 심장으로 이어지는 금(金)실’을 차근차근 잇기 위한 각자의 숙제를 찾아보면 어떨까.
글쓴이 / 주 윤 정
- 부산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저서]
『보이지 않은 역사 : 한국시각장애인의 저항과 연대』, 들녘출판사, 2020.
『동물의 품 안에서 : 인간-동물 관계 연구』(공저), 포도밭출판사, 2022.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국제 연대』(공저), 한울아카데미, 20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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