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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이세혁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이 되어 꽂힌다.
“그, 그렇다면... 네놈의 목적은 이 나 뿐만 아니라... 공주마마까지...”
“거기에 금의위 대원 하나만 남겨둔, 모두의 목이 필요하다. 여진족이 이 나라의 대
영반과 공주를 살해했다는 걸 알려줘야 할 생존자 정도는 있어야 하니까.”
이세혁의 안면이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한다. 주은비에다가 금의위를 학살하겠다니, 그
야말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솟아오른 것이다.
“후후, 거기다 마지막으로 홍무극의 머리까지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볼만한 전쟁
이 일어날 테지. 대영반 나리,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 쓰레기만도 못한 환상은, 내가 접어주지.”
이세혁이 검을 쥐고 싸늘하게 식은 두 눈으로 흑령의 시선을 맞받아친다. 흑령은 흑도
를 거머쥔 우수를 서서히 움직여 공격자세로 전환한다.
“네놈이 흘릴 피는, 우리 몽고가 다시 한번 중원을 지배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흘리게
되는 성스런 피가 될 것이다.”
“네놈의 목을 잘라, 대명제국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바치겠다.”
이세혁의 말에 흑령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엷어지더니 어느 순간에 소리 없이 지
워진다. 대신 천지를 뒤흔들 것만 같은 살기가 흑도를 타고 흘러넘친다.
“늙은이, 네놈 다음은 표연공주다.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만,
요령껏 피해 보시지!”
말을 끝맺은 흑령이 천천히 허리를 숙인다. 그러자 흑령의 신형은 삽시간에 그곳에서
지워진다. 하지만 이세혁은 당황하지 않고 노성(怒聲)을 지르며 맞대응한다.
“열혈수라!”
이세혁의 검에서 피어오르는 검경(劍勁)이 한 마리 아수라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리
고 자신을 향해 맹렬하게 돌격해오는 흑령의 심장을 향해 열혈수라를 전개시킨다.
불타오르는 한 마리 아수라가 날아드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 섬뜩하기 그지없다
. 전신이 주황색을 띤 채로 섬뜩하게 비상하는 한 마리의 아수라가 흑령을 숯불구이로
만들려던 순간이다.
“흑마도법!”
흑령의 흑도에서 일어난 묵섬(墨閃)이, 섬뜩하게만 비치던 열혈수라를 양분시켜 버린
다. 그리고 재차 흑도를 뻗어 이세혁의 목을 노리고 도약한다.
“그 정도쯤이야!!”
이세혁의 입에서 일갈이 터지더니, 흑령의 흑도를 자신의 검으로 받아친다. 두 개의
병기가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주변에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이 자, 나이를 결코 헛먹은 게 아니다. 절기가 단박에 깨졌는데도 당황하는 기색이
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흑령이 이세혁의 고강함에 내심 찬사를 지르면서도 공격할 때의 날카로움은 더더욱 살
려서, 최대한 자신의 싸움으로 이끌어 내려고 힘쓴다.
중(重)과 쾌(快)를 겸비하고 있는 흑령의 공격은 점차 이세혁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
다. 공격횟수보다 방어횟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 자의 흐름에 휩싸이고 만다. 그렇다면...!’
흑령의 공격을 또 한번 차단해 낸 이세혁은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라 자신 최강
의 절기를 거리낌 없이 펼쳐낸다.
“유령쾌검!”
만일 타인이 이들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면 분명히 이세혁의 공격이 눈에 띄게 느
려졌다고 혀를 찰 것이다. 하지만 흑령은 그 느리게만 보이는 움직임이 실로 자신이
봐왔던 어떤 초식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채고 황급히 몸을 빼 뒤로 신형을
날린다.
어느새 둘의 거리는 4장으로 늘어나있다. 숨 돌릴 틈은 가지게 된 것이다.
“늙은이, 나이를 결코 헛먹지는 않았군.”
흑령이 중얼거린 말에 이세혁은 한숨을 내쉬고는 간단히 대꾸한다.
“젊은이가 무공 성취도가 대단하군.”
서로에게 칭찬을 늘어놓은 두 사람은 달아오른 몸을 잠시 식힌다.
“다시 덤벼라. 이번엔 확실하게 저승으로 보내주마.”
이세혁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내고는 다시 공격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흑령은 싸
울 생각이 없다는 듯, 흑도를 원래 자리에 꽂는다.
“빠른 시일 내로 승부를 가리게 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재촉하지 마라,
늙은이.”
그 말만 남기고, 흑령은 공격해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서서히 지워진다. 이세
혁은 잠시 얼떨떠한 얼굴로 서 있다가 우루루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듣고는 뒤쪽으
로 고개를 돌린다.
“나리!”
“대영반!!!”
황보성과 주은비가 대원들을 이끌고 달려오고 있다. 그제야 흑령이 물러난 이유를 알
겠다는 듯, 이세혁이 검집에 검을 꽂는다.
‘후... 흑령, 실로 가공할 만한 솜씨를 지닌 자다. 유령쾌검을 그렇게 완벽하게 피해
낸 사람은 사 대인밖에 없었는데, 흑령도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잘 피해냈다.’
흑령 자신이 말했듯이, 분명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소리 소문
없이 신형을 감추고 하던 흑령을 떠올리자, 이세혁의 안색이 다시 한번 어둡게 물든다
.
“대영반,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공주마마께오서 무사하셔서 다행이옵니다.”
이세혁이 황송하다는 듯이 포권을 하고는 몸을 돌려 깜깜하기만 한 허공을 바라본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는 의도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주은비에게 걱정하는 자신의 모습
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그래, 난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공주마마 만이라도... 얼른 폐하의 품으로 돌려보
내드릴 수만 있다면.’
명, 건주여진, 몽고 이 3국이 휩쓸려버린 분쟁이 이제야 막이 올랐다는 걸 알게 된 이
세혁은 그저 불안하기만 하다.
“영감님, 궁금한 게 있어요.”
이세혁의 상념을 깨트린 이는 모용화운이다.
“궁금한 것? 어떤 거요, 모용 소저?”
이세혁의 얼굴이 돌아가더니 모용화운 쪽에서 멈춘다. 의아함이 내제되어 있는 잔잔한
모용화운의 눈빛은, 이세혁의 답변을 갈망하고 있다.
“영감님은 분명 주 소저에게는 공격이 없을 거라고 하고 갔어요.”
“그렇소.”
“한데 왜... 방금 기습한 여진 놈들은, 주 소저를 노렸던 거죠?”
모용화운의 질문은 안 그래도 심란하기 그지없는 이세혁의 머릿속을 아예 헤집어버린
다. 이세혁의 노안이 한차례 떨리자, 모용화운은 다시금 의아한 목소리로 재촉한다.
“말씀을 해 주셔야 방책이라도 세울 것 아닌가요?”
“... 사연이 좀 복잡하게 돼가고 있소.”
한층 무거워진 이세혁의 목소리가 좌중에 잔잔하게 번져간다.
“홍무극이란 여진족 놈이 여기 있다는 거예요?”
“아니오. 그보다 훨씬 골치 아픈 녀석이 우리를 맡은 듯하오.”
“홍무극이 없으면, 이쪽이 유리한 거 아니었어요?”
모용화운이 눈썹을 치켜 올리자, 이세혁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내젓고는 탄식한다.
“허허... 노부가 보기엔, 홍무극이 그 자의 아래요. 게다가 노리는 건 나뿐만이 아니
오.”
“홍무극보다 위라고요? 거기에 영감님만 노리는 게 아니라면...?”
“현재 여기 있는 우리 모두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자가 있소. 그 자의 이름은 흑령
. 중요한 건 흑령은 건주여진 출신이 아닌 몽고의 찰합이부족 출신이란 거요.”
몽고가 거론되자 모용화운의 얼굴에는 이해가 안 된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야기가
점점 희한한 방향으로 꼬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필시 이해하기 힘들 것이오. 우리 명과 건주여진의 싸움에 몽고가 거론된 게 말이오
.”
“솔직히... 그래요.”
“후우... 몽고는, 나와 공주마마를 살해해서 폐하의 분노를 살 작정이오.”
“!!”
처음으로 모용화운의 안색이 변한다.
“공주마마는 폐하께오서도 무척이나 아끼시는 분이오. 지금 이 시점에서, 흑령이 자
객을 보내 공주마마와 나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받게 되시면... 어떻게 될 것 같소?”
“... 필시 건주여진을 공격하려고 하겠죠.”
“몽고가 노리는 것... 흑령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요.
건주여진은 아직 여진족을 모두 통합하지 못했기에, 분명 우리 명이 유리한 전쟁을 하
게 될 거요. 허나!”
언제부터 대원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이세혁의 말을 듣고 있다.
“... 우리 명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될 것이오. 몽고는 그 틈을 타서 중원정복을
꾀하고 있는 거고 말이오.”
이세혁의 기나긴 독백이 멎는다. 곧이어 모두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한결같은
목소리로 술렁이기 시작한다.
“영수님 말씀대로라면...”
“건주여진뿐만 아니라, 몽고까지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건가?!”
모용화운은 이세혁의 말을 가만히 곱씹으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다.
‘건주여진의 누르하치. 결코 만만한 세력이 아냐. 저 영감님 말씀대로, 지금 당장은
명이 더 셀지는 몰라도, 그건 단 10년 후면 뒤집어질 확률이 높으니까.
거기에 몽고 찰합이부족의 임단한. 역시 만만찮은 야심가지. 실력까지 겸비한 능력자
이기도 하고. 오죽하면 누르하치가 지금 유일하게 건드리지 못하는 세력이 바로 막북
의 찰합이부족과 명이란 말이 떠돌 정도겠어.’
모용화운이 생각을 접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이세혁이 조용히 다가와 모용화운에
게 묻는다.
“모용 소저의 생각은 어떻소? 모용 소저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그들을 더 잘 알고 있
다고 알고 있소만.”
이세혁의 질문에 모용화운은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는 역시 조용히 대꾸한다.
“후우... 영감님 말씀대로예요. 영감님이 말씀하신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명이 건주
여진을 공격할 확률은 거의 9할 이상이라 봐도 무방하겠지요. 그리고 건주여진 정벌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이 명이 몽고의 말발굽 아래 쓰러질 확률 역시 9할 이
상이라 보면 되겠고요.”
모용화운의 답변에, 이세혁의 안색이 다시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 무슨 일이 있더라도, 흑령의 뜻을 저지해야만 하오. 이 나라의 만백성을 위해서
, 그리고 죽을 필요 전혀 없는 인명(人命)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이세혁의 단호한 의지에 모용화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 황보성이 지친 몸
을 이끌고 이세혁에게 다가온다.
“보고 드리겠습니다, 나리. 팔기군의 전사자는 정확히 83명, 우리 금의위의 전사자는
30명입니다.”
“여기서만 30명인가, 아니면 여태까지 쌓인 전사자가 30명인가?”
“물론 누적된 수치입니다. 그리고 덤으로 말씀드리자면, 부상자는 13명입니다.”
황보성의 눈은 답변을 바라고 있다. 그 답변이 뭣인지를 아는 이세혁이기에, 괴로운
심경이다.
‘벌써 30명이나 죽다니... 이제 70명밖에 안 남았다는 말인가.’
이제 전면전은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된 것이다. 비록 팔기군을 많이 쓰러트렸다고는
하지만, 팔기군은 적어도 150명 이상이 살아있으니 감당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게다가 부상자들... 모두 한솥밥을 먹으며 지내온 이들인데, 부상당했다고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부상자들까지 모두 데려간다면, 분명 전진속도가 느려질 것은 뻔한 일이다. 한
시라도 빨리 북경에 입성(入城)해야 하는 이세혁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대영반... 준비는 끝난 듯한데, 언제 출발하죠?”
주은비의 음성에 이세혁이 퍼뜩 정신을 차린다. 고개를 들어 우수(憂愁)에 잠긴 눈으
로 주변을 둘러보니, 몰골이 많이 변해버린 금의위 대원들이 눈에 들어온다.
“... 황보성.”
미미하게 떨리는 이세혁의 목소리가 황보성을 부른다. 그를 눈치 채지 못한 황보성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뚜벅뚜벅 이세혁의 앞으로 다가온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 잠깐 나를 따라오도록.”
이세혁이 먼저 걷기 시작하자, 황보성은 얼떨결에 이세혁의 뒤를 따른다.
대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야 발걸음을 멈춘 이세혁에게, 황보성은 천천히 말을 붙
인다.
“저, 나리. 갑자기 무슨 일로...”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묻겠네. 부상자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
이세혁의 질문에 황보성의 안색이 급변한다. 그리고 황보성이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이세혁의 냉정한 목소리가 이어진다.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네. 괴롭지만 부상자들을 버리고 가는가, 늦어지더라도 부상자
들을 다 데리고 가느냐.
저들을 이끄는 나로서는,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네.”
주먹을 꽉 움켜쥔 이세혁의 왼손에서는 이미 핏방울이 맺히고 있다. 손톱이 피부를 뚫
고 살로 파고든 것이다. 선택해야하는 자신의 운명이 서러워서, 자신의 수하들인데 버
리고 가야할 상황인데도 자신은 아무런 선택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방황하고 있어야만
하는 현실이 원망스러워설까?
“저... 저는... 아, 아무리 부상자라 하더라도, 동룐데... 당연히 부축해서라도 데리
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부상자들을 모두 데리고 가려다가, 여기 있는 전원이 포위당할 수도 있다는 걸 잊어
선 안 된다.”
“그, 그래도... 아무리 부상자라 하더라도, 그들은 우리 금의위 대원들입니다. 그 중
에서도, 나리와 저기 공주마마를 호위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 금의위 대원들이란 말
입니다.
금의위는 공동체, 절대로 개인이 아닙니다. 죽은 동료들이야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
, 살아있는 동료들까지 팽개치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건 저 혼자의 뜻이 아니라,
금의위 전체의 뜻이란 걸 알아주십시오.”
낮지만 굳건한 어조의 확답에, 이세혁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는 별들
을 바라본다. 하나하나 빛을 반짝이는 별들... 그 별들을 바라보던 이세혁은 결국 황
보성의 말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고개를 돌려 금의위 대원들에게 소리친다.
“북경까지 일찍 도착하기 위해, 부상당한 대원들을 버리고 가겠다는데 반대하는 자
있나? 있으면 당당하게 손을 들어 보도록!”
이세혁의 말에 일순간 금의위 대원들의 눈에서 묘한 의구심이 일어난다. 그러더니 얼
마 안 지나 하나둘씩 손을 들어올린다.
“반대합니다, 영수님!”
“늦게 도착해도 상관없습니다!”
웅성거리던 금의위 대원들은, 언제부터 전원이 손을 들고 고함을 지르고 있다. 이세혁
의 명령이라면, 이세혁의 말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따르던 이들이 지금 반대를 하고 나
선 것이다.
“영수님, 절대 짐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이미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지 오랩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을 수 있
도록 해 주십시오!!”
이세혁에게는 이들이 질러대는 함성이 화살이 되어 박힌다. 마치 명치끝을 송곳으로
찌른 듯한, 심장 한구석을 도려낸 듯한 통증이 이세혁에게 엄습한다.
어느새 이세혁의 두 눈에서는 가는 물줄기가 떨어지고 있다. 비록 한때긴 하지만, 저
들을 버리고 가자고 생각했던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워서다.
“... 울면 안 됩니다, 나리. 이제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저 친구들은 나라를 위
해 살아가는 친구들이란 걸 말입니다...”
하지만 이세혁을 위로하는 황보성의 눈에도 이미 보석(寶石)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
고 있다. 황보성은, 예전과는 달리 마음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는 이세혁의 태도에
마음이 저려오는 걸 느낀다. 자신이 유일하게 존경하는 사람인데,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는 최고로 자상한 사람인데 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주은비의 눈에서도 이미 눈물이 고여 있다. 모용화운은 콧등이 찡한 듯, 이 진풍경을
바라보며 코를 몇 번 어루만진다.
“느리게 가더라도 전원 모두 데리고 가겠다! 우리 대명제국의 수호자(守護者), 금의
위 대원들이여!”
“옛!!!”
금의위 대원들 전부 옷깃으로 눈물을 훔치며, 우렁차게 소리친다. 절대 쓰러지지 않겠
다는 듯이, 목숨을 나라에 바치고야 말겠다는 듯이 소리치는 이들의 얼굴에는 두려움
이란 게 없다. 조건 없는 충성...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주은비와 이세혁을 북경의 자금
성까지는 모셔다 놓고야 말겠다는 생각뿐이다.
다시 하루라는 시간이 흘렀다. 말은 모두 지쳐버려 모두들 걷고 있는 중이다. 다만 거
동하기 힘든 부상자들만 말에 드러누워 있는 상황이다.
‘강 소협이나 사 대인,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복귀한다면 금의위 사기라도 올라갈 터
인데...’
애초에 이세혁이 노린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둘 중 한 사람만 복귀하더라도,
분명 모든 이들의 사기가 거의 폭발적으로 증대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기 그지없다. 두 사람 중에서 단 한 사람도 현재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모용화운과 주은비는 함께 걸으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으며, 금의위
대원들 역시 점차 피로가 누적되어 사기가 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북경까지는 약 이틀 정도 남은 것 같다. 문제는, 그 사이 분명 흑령이 공격해 올 거
란 사실...’
흑령의 모습을 떠올리자니, 저절로 이세혁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냉혹한
눈매, 그리고 그 눈에서 쏟아져 나오던, 가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살기(殺氣).
‘철저하게 무사로만 길러진 자다. 그런 자를 적으로 둔 이상, 상대가 쓰러지기 전까
지는 결코... 물러서기 힘들 테지...’
이세혁의 얼굴에 허탈한 미소가 번진다. 하지만 바로 그때, 모용화운이 곁으로 다가온
다.
“영감님, 여기서 무사히 북경까지 귀환할 수 있다면... 뭘 하실 거예요?”
모용화운이 갑작스레 질문을 던진 탓일까? 이세혁이 잠깐 흠칫하더니 얼굴을 굳히며
반문한다.
“허허... 그걸 묻는 모용 소저의 의도를 알고 싶구려.”
“먼저 질문한 사람은 저 아닌가요?”
모용화운의 반문은 이세혁을 그야말로 허탈하게 만든다. 잠시 고개를 숙이며 걷던 이
세혁은 생각을 정리하고 곧바로 재차 입을 연다.
“일단은... 그래, 나라 안의 충신들을 모으고 싶소. 훌륭한 군대를 양성해서... 장차
건주여진이 침입해 올 때 쓰고 싶소.”
“흐흠.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 나라의 부흥을 위해서군요?”
“바로 맞추셨소. 이 나라는 말이오, 벌써 250여 년 전에 태조 주원장 폐하께서 몽고
족을 몰아내시고 세운 나라요. 지금 와서, 제3자인 여진족에게 이 나라를 내어줄 수는
없는 일이오.”
이세혁의 애국심에 감탄을 해선지 모용화운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
인다.
“그럼... 모용 소저는, 여기서 살아나간 다음에 뭘 하실 생각이오?”
“음, 북해빙궁을... 재건하고 싶어요. 옛 가신들을 모아서, 우리 북해빙궁을 궤멸시
킨 건주여진을 작살내고 말거예요.”
단호한 기색이 배어있는 모용화운의 목소리에, 이세혁은 묵묵하게 모용화운의 말을 귀
담아 새겨듣는다.
“물론, 북해빙궁 재건을 하려면... 일단, 중원무림부터 통일시켜놓고 봐야겠지만 말
예요.”
“중원무림 통일이라... 쉽지만은 않은 일일 텐데 말이오.”
“호호,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하지만 왠지 모르게 말예요, 우
리 주군 곁에 있으면... 그런 걱정은 언제 했나 싶을 정도로 불안감이 사라지게 돼요.
”
이세혁은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심 모용화운의 말에 동조한다.
‘그래, 모용 소저의 말은 사실이다. 왠지 모르게 강한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니까.’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만사에 최선을 다하는 사문도를 떠올리며, 이세혁은 주먹을 굳게
움켜쥔다.
‘그래. 묵묵히 최선을 다 하는 게 현재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적의 숫자가 아무리
많다고는 하지만, 현재 여기 있는 금의위 대원들은... 금의위 중에서도 가리고 가려서
뽑아 만든 군대니까...’
기합이 들어가 있는 이세혁을 보고서야 모용화운은 조용히 이세혁의 곁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내심 활짝 웃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걸로 됐어. 이걸로... 당분간, 저 영감님의 의지는 꺾이지 않을 거야.
이 나라를 부흥시키겠다는 의지... 그리고 주 소저를 무사히 귀환시키고 말겠다는 의
지를.’
[귀거래혜] 25.대명제국(大明帝國)의 적을 멸하는 존재
금의위, 이들에게 휴식이란 없었다.
며칠 전, 천진의 선착장에서 자모연환탄 세례를 받은 이후로 계속 이 모양이다. 물론
때때로 식사 시간마다의 휴식 정도야 있었지만, 그 이외로는 자는 시간도 거의 반납하
다시피하고 걸어야만 했다.
“후우, 후우... 후우...”
부상자들은 머리끝까지 전해져오는 고통을 눌러 참으며 뚜벅뚜벅 걷고 있다. 붕대를
감아둔 자리엔 상처가 채 아물지도 못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증명시켜주는, 붉은 피도
장이 여기저기 찍혀 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금의위 대원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남몰래 냉소(冷笑)를 짓고
있는 사람이 있다.
“달탄기, 저들이 어떻게 보이느냐?”
“큭큭, 툭 건드리기만 해도 와장창 무너질 것만 같습니다. 이젠 그만 공격해도 괜찮
을 듯 보입니다만...”
달탄기와 흑령, 바로 그들이다.
“... 좋다. 한 시진 후에 공격이다. 분명히 말해두겠지만, 금의위만 적당하게 궤멸시
켜 놓도록. 아직 우리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데다, 저들은 사기까지 바닥으로 뚝 떨
어져 있어서 아마 쉽사리 뚫릴 거라 믿는다.”
“맡겨만 주십시오.”
“그리고, 저기 모용화운인가 뭔가 하는 계집은... 웬만하면 상대하지 말고 그냥 적당
하게 피하도록. 네 상대가 아니다. 약관도 안 된 듯하지만, 실력이 수준급이다.”
흑령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리한 안광이 모용화운의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간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자모연환탄으로 연락하겠다. 별동대(別動隊) 지휘 정도야 잘 해내리라
믿겠다.”
“존명!”
낮게 대답하는 달탄기의 믿음직한 모습을 본 흑령은 입가 끝에 한줄기 실낱같은 미소
를 지으며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다.
그리고 흑령이 증발해 버리듯 사라지자, 달탄기는 고개를 들어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별동대 지휘 정도는 삼척동자(三尺童子)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지.
어디, 그럼 나도 이만 떨어져 볼까. 여진족의 팔기군이 아닌, 몽고 찰합이부족 막강
철기군(鐵騎軍)의 힘을 보여줘야 할 테니까. 큭큭큭...”
달탄기도 괴소를 지으며 금의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이들과 멀어져간다. 삽시간에 흑
령과 달탄기, 이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는 괴괴한 적막감이 감돈다.
‘몽고의 무궁(無窮)한 영광을 위하여!’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고 있는 달탄기와 흑령의 눈은, 분명히 이렇게 소리치고 있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기나 하듯, 하늘의 별들은 깜빡거리며 이들의 모습을 내려
다본다.
어느덧 한 시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앞장서서 홀로 터덜터덜 걷고 있던 이세혁은, 문
득 전신이 오싹해질 정도의 살기를 느끼고 퍼뜩 고개를 들어 주변을 이리저리 훑어본
다.
‘대단한 살기다... 이만한 살기를 뿜어낼 수 있는 자라면, 분명 그...!!’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세혁은 반사적으로 뒤쪽을 향해 소리친다.
“전원, 전투 태...”
하지만 이세혁의 음성은, 막 터져 나온 폭음에 아예 매장돼버린다. 화광(火光)이 번뜩
이는 숲길, 그리고 고막을 터트릴 것만 같은 폭음이 금의위 대원들을 공포의 수렁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폭음이 가라앉기 무섭게, 이세혁이 미처 대처하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숲에서는 철갑(
鐵甲)으로 무장한 한 떼의 병사들이 쏟아져 나온다.
“도륙(屠戮)하라!”
“말살(抹殺)시켜라!!”
마상(馬上)에 있는 병사들만 철갑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까지도 철갑을
씌울 수 있는 부분까지는 모두 씌워져 있다. 철갑이 달빛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이세
혁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낀다.
“전원, 반격하라!”
이세혁의 고함을 시작으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금의위 대원들은 금세 무기를 움켜
쥐고 재빠르게 반격에 나선다. 하지만, 철갑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벌써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다.
“말을 공격해라! 상대는 철기군이다! 훈련했던 대로, 말 위에 있는 졸개들은 그냥 두
고 말을 공격해라!!”
황보성의 고함소리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은 금의위 대원들이 반격을 개시한다.
하지만 상대 숫자는 100이 넘어가고, 이세혁의 뒤를 따르고 있는 금의위는 겨우 30여
명이라 수적으로 한참 열세다.
“파앗! 유령쾌검!!”
이세혁의 입에서 터지는 일갈. 그 일갈이 터지기가 무섭게, 철기군 세 명이 말 위에서
뚝뚝 떨어진다.
“크아악!!”
떨어진 철기군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동료의 말발굽에 밟혀 이승에서 하직한다.
하지만 그들은 주춤거리는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점차 간격을 줄여가며 이세혁
하나만 노리고 있다.
‘이들은 팔기군이 아니다. 건주여진의 팔기군이 아니라... 몽고 찰합이부족의 철기군
이 틀림없어!’
흑령의 치밀한 준비에 이세혁은 내심 치를 떤다. 그러나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잔인하리라 여겨질 정도로 섬뜩한 얼굴을 하며 계속해서 철기군을 도륙해 나간다.
(황보성!)
“!!”
황보성은 별안간 들려오는 이세혁의 전음에 말 한 마리를 베어 넘기며 고개를 이리저
리 돌린다.
(넌 여기 남아 날 도와라. 다른 나머지 대원들에게는, 한시라도 빨리 공주마마가 계신
본대로 합류하라고 전하고!)
연이어 들려오는 전음을 모두 들은 황보성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이세혁과 마찬가
지로 전음으로 동료들에게 전음을 쓴다.
(전원, 공주마마께오서 계신 본대로 합류하라는 나리의 명령이시다! 저 자식들에게 눈
치 채이지 말고, 조용히 여기서 빠져나가는 거다!)
황보성이 전음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금의위 대원들이 하나둘씩 전장에서 사라지기 시
작한다. 별로 없던 숫자인지라, 그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데 눈치 챌 틈이라도 있었겠
는가?
대원들이 사라지는 것을 하나 둘씩 흘끔흘끔 보던 이세혁은 내심 마음을 놓으며 맹렬
하게 공격해 들어간다. 한 마리 호랑이가 토끼를 노리는 듯한 기세, 그리고 살기가 뿜
어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철기군들은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무시하는 건지 오히려
그런 이세혁에게 거리낌 없이 달려들고 있다.
‘이들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본대와 합류해야 한다. 분명 그쪽도 지금은 위험한 상황
일 터이니...’
순간적으로 모용화운의 얼굴이 이세혁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간다. 차가운 용모를 지
닌, 그리고 그에 걸맞게 한없이 차갑기만 한 기술들만 갖고 있는 모용화운이 말이다.
현재 유일하게 자신과 맞먹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소유자가 바로 모용화운이다. 황보
성도 높은 경지에 다다라 있긴 하지만, 지난 군웅대회 때를 기억해보라. 모용화운이
압도적으로 위다.
‘모용 소저가 있는 한, 공주마마는 일단 안전하겠지. 허허... 그렇게 믿고 싶어지는
군.’
말 한 마리를 베어 넘기면서도 이세혁은 방심하는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황
보성은 이세혁의 바로 뒤에서, 자신과 이세혁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팔기군들을 줄
기차게 베는 중이다.
둘은 한껏 도륙하면서 마음속으로 소리친다. 제발, 제발 주은비만은 무사하게 해달라
고. 대명제국은, 주은비는 바로 우리 금의위가 지키고 말 거라고.
같은 시각, 주은비 쪽 역시 아수라장이다.
죽고, 죽이고를 반복하는 이들. 하지만 이들이 상대를 죽이는 건 자신의 생존을, 자신
의 꿈을 위해서인 것이다. 말똥 위에서 구를지언정 이승이 좋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
이겠는가?
“빙백신장!!”
모용화운의 입에서는 5초 간격으로 어김없이 일갈이 터진다. 그리고 그때마다 한 필의
인마(人馬)가 얼음덩어리가 되어 자리에 굳어버린다.
“주 소저, 소저는 구석에서 절대 빠져나오지 마요. 허튼 짓하다가 다치면, 나중에 영
감님께 들을 해코지 감당이 안 되니까요!!”
아까부터 뛰어드려는 주은비를 막아서는 모용화운의 목소리는 잘 벼려둔 칼처럼 날카
롭기 그지없다. 주은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도 안절부절하고 있다.
“일국 공주의 손에, 어떻게 피를 묻혀요! 얌전히, 가만히 여기 있어요! 빙백신장!!!
”
모용화운의 행동력은 가히 신(神)적이다. 빗발치는 공격을 모조리 다 피해내면서도 주
은비에게 할 말은 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
모용화운이 파리 목숨처럼 날려버린 목숨 숫자는 벌써 서른을 넘기고 있다. 날카로우
면서도 인정사정없는 공격이 원래 철기군의 모습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빨리 좀 상대해 봐요! 이대로 가다가는...!!”
다시 한번 모용화운의 옷소매가 펄럭이더니, 한 쌍의 섬섬옥수에서 얼음만치 새하얀
기류가 쏟아져 나온다.
세상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극빙지기(極氷之氣)의 기류, 빙백신장은 철갑군을 철갑
째로 얼려버리는 일등공신이다.
“모두 뼈도 못 추리게 된단 말예요! 여기서 죽기 싫으면, 좀 더 빨리 움직이라고요!!
”
피가 튀고 살이 튀고 뼈가 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이곳에 별안간 수
십 명의 인원이 접근해온다. 모용화운이 적인가 싶어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돌아보니,
뜻밖에도 지원군이다.
“공주마마를 호위하라!”
“오랑캐 놈들을 박멸하자!”
수적으로 절대적 우세인데도 불과하고 밀리기를 거듭하던 철기군은, 때마침 금의위 지
원군까지 오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금의위 대원들은 이틈을 타서 전력으로 밀
어붙인다.
철기군이 방심한 탓인지, 쓰러진 철기군의 숫자는 상당히 많지만, 금의위 숫자는 손가
락으로도 셀 수 있을 정도다. 전장을 이리저리 휩쓸고 있는 달탄기의 얼굴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강하다... 정말 강하다. 우리 철기군이 힘도 제대로 못쓰고, 여기까지 무너지다니..
.!!’
150명이 넘어가던 철기군은, 어느새 80도 채 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탄기는
눈을 부릅뜨면서 부하들을 격려한다.
“무조건 금의위를 전멸시켜야 한다! 조금만 있으면 우리에게도 지원군이 올 것이니,
당황하지 말고 꿋꿋하게 맞서 싸워라!”
하지만 죽음을 각오하면서 싸우는 금의위와, 상대를 처리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싸우는 철기군과의 차이는 이미 상당히 크다.
철기군은 이미 자신들 본연의 힘을 마음껏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금의위는 수
적 열세에도 불과하고 자신들의 지위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전운(戰雲) 역시 점차 고조되어 간다. 싸우고 싶어 하지 않는
주은비의 간절한 마음은 알아주지도 않는 시간은, 그렇제 점차 잔잔하게 흘러간다.
한동안 말도 안 되는 숫자를 상대하고 있던 이세혁과 황보성은 점차 지쳐가는 몸을 감
지하고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른다.
‘여기서 버티다가 개죽음을 당한다. 나 하나 죽어도 상관없다. 나리만 구할 수 있다
면...!!’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있으며, 두 팔은 검을 너무 많이 휘둘러 잔잔하
게 경련이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황보성은 계속 검을 휘두르고 있다. ‘금의위’라
는, 자신이 목숨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친위대 소속이기 때문이다.
‘죽어도 좋다. 나리와 공주마마만 구할 수 있다면... 내 한 목숨쯤은 아깝지도 않아!
!’
황보성이 죽음을 불사하고 계속해서 정신없이 검을 놀린다. 그리고 검을 피하기 위해
잠시 공중으로 도약하는 찰나에, 이세혁의 전음이 머릿속에 박힌다.
(황보성, 후퇴한다. 여기서 이들을 상대하다가는, 우리 둘 다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본대랑 합류해서, 이들을 요격하도록 한다! 공주마마의 호위는 모용 소저와 네게 맡길
테니 말이다!)
(... 존명!!)
황보성은 속으로 부르짖고 즉시 본대 쪽으로 한줄기 빛처럼 신형을 날린다. 동시에 이
세혁도 공중으로 도약한 뒤 전력으로 본대 쪽으로 경공술을 펼쳐나간다.
“놓치지 마라!”
한 병사의 소리가 터지기가 무섭게, 팔기군들은 형형한 눈빛으로 요란하게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간다. 말을 몰고 있는 이들의 추격은, 그야말로 쏜살만치 재빠르다.
얼마 뒤에, 이세혁, 황보성이 서있던 자리에 흑령이 나타난다. 그리고 주변에 쓰러져
있는 시체의 숫자를 세면서 고개를 내젓는다.
“... 이세혁, 생각보다 위험한 자다. 지쳐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모르는 뭔가가 계
속 그자에게 힘을 불어넣고 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흑령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본다. 구름이 전신으로 감싸고 있
어 희미하게 보이고 있긴 하지만, 흑령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자모연환탄... 이제 하나 남았군. 큭큭.’
무슨 생각을 해설까? 흑령의 입에 걸려 있는 섬뜩한 미소는 지워질 생각을 않고 있다.
오히려 밤하늘에 꽂혀있는 별이 뿜어내는 별빛처럼 더더욱 짙어지고만 있을 뿐이다.
‘강천비란 놈도, 사문도란 놈도 끝내 합류하지 않았다.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 찰합이부족의 명예를 걸고... 내 기필코 네놈을 깨끗하게
매장시켜 주마!’
어느새 흑령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다. 흑령이 서있던 자리 주변에는 사지 중 한
부분이 깨끗하게 절단된 시체들만 바닥을 뒹굴 뿐이다.
끝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지긋지긋하게만 생각해 온, 금의위와의 결투를. 진드기처
럼 생각해온, 금의위 전군의 궤멸을!
30대 60. 이들이 절묘한 대치를 이루며 전장의 광기 속에 휘말려 있을 때다.
별안간 북쪽 길에서 두 명의 사내가 부리나케 달려온다. 너무 힘들이며 달려와선지 그
들의 머리카락은 바람결에 사정없이 휘날리고 있다. 눈살을 찌푸리며 달려오고 있는
사내 둘의 정체는 이세혁과 황보성이다.
“죽어버려라, 오랑캐 놈들아!”
황보성의 함성을 시작으로, 이세혁 역시 독수리만치 날카로운 눈초리를 하고 공격을
감행한다.
“영수님께서 오셨다!”
“조금만 더 힘내자!”
전장 여기저기서 서로를 격려하는 금의위 대원들의 소리가 퍼져나간다. 그러자 다 쓰
러져가던 금의위 대원들의 얼굴에서 희망의 꽃이 피어난다. 그리고 그 희망의 꽃은,
대원들 하나하나의 가슴에 ‘금의위’란 이름을 가진 군대가 내세우는 신념을 살린다.
“대명제국의 금의위! 우리 금의위가 하는 일은?!”
이세혁의 기세 좋은 함성을 황보성이 받는다. 물론, 검은 여전히 요란하게 움직이면서
말이다.
“대명제국의 적을 멸하는 것입니다, 나리!”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검을 치켜들며 황보성이 소리친다. 살기 탓인지 붉게 충혈된
황보성의 눈을 본 철기군들은 감히 황보성에게 덤벼들 생각을 못하고 있다.
“준비된 군대의 힘을 보여주자! 전원, 돌격!”
다시 이세혁의 함성이 이어진다. 그러자 대원들은 한결같이 무기를 다시 쥐고는 번개
처럼 철기군에게로 날아든다.
“히히히힝!”
말이 비명을 내지르자, 동시에 발이 뚝 쓰러지면서 위에 승마하고 있던 철기군이 바닥
에 뚝 떨어진다.
“죽어라, 오랑캐 놈들아!”
황보성은 잔인하게 달려들어 그 철기군 병사의 목을 전력으로 내리친다. 곧이어, 비명
도 없이 깨끗하게 뻗어버린 병사의 목이 바닥에 뒹굴뒹굴 굴러다닌다.
“죽이지 못하면 우리가 죽는다! 우리도 맞서 싸워야 한다!”
달탄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부하들을 격려한다. 하지만 떨어진 사기란 게 좀처
럼 회복하기 힘든 것이다. 이미 사기는 바닥을 설설 기고 있다. 형형하게 뿜어내던 철
기군들의 안광도 이미 수그러든지 오래다.
“주공께서 보시면 뭐라고 하시겠느냐?!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달탄기가 광기에 젖은 눈으로 전장을 둘러보며 소리를 지른다.
“죽어야 할 것은 네놈이다, 오랑캐 자식아!”
한 금의위 병사가 달탄기에게 달려든다. 필살 공격인데다가, 누가 보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는 공격이다.
“죽어야 할 것은 네놈이다, 한족 놈아!”
달탄기의 광기가 더욱 짙어진다 싶더니, 쥐고 있는 검에서 아지랑이 비슷한 것이 꾸역
꾸역 올라온다. 검경(劍勁)이 피어오르는 것으로 봐서, 이미 검에 일가견이 있는 자라
는 증거다.
동시에 터진 일갈은 달탄기의 살기마저 증폭시킨다. 달탄기의 검이 섬전처럼 움직이더
니, 금의위 병사의 머리에 떨어진다. 그 병사는 몸이 머리가 반으로 쪼개진 채 7공(七
孔)으로 피를 쏟아내며 즉사해 버린다.
“철기군은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무적군대다. 여기서 무너진다면, 우리의 앞날은
뻔한 거다.
게다가, 전투경력도 거의 없는 금의위가 어떻게 실전으로 다져진 우리 군대를 당해낼
수 있겠느냔 말이다!! 크하하!!”
앙천대소(仰天大笑)를 터트리는 달탄기의 주변으로 철기군이 몰려든다. 그리고 달탄기
를 중심으로 남은 인원으로 다시 공격을 재개하려던 순간이다.
(달탄기, 조용히 거기서 물러서라. 내가 깨끗하게 청소하겠다.)
“!!”
난데없이 퍼지는 흑령의 목소리에 달탄기가 웃음을 멈추고는 황급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다. 저 뒤쪽에서 먼지가 뽀얗게 올라오고 있다. 흑령이 지휘하던 철기군 본대가
합류한 것이다.
“주공께서 오셨다!”
“주공께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드리지 마라!”
꺼져가던 철기군의 사기도 불을 지피기라도 한 듯 다시 되살아난다. 그리고 선두에 서
있던 별동대 철기군 병사들이 달려들려는 순간이다.
“크아악!”
“으악!”
별안간 10여 명이 입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낙마(落馬)한다. 허나 하반신은 말에 그대
로 붙어있다. 상반신만 깨끗하게 절단된 것이다. 덕택에 창자를 쏟으며 죽은 그들의
시신은 그야말로 섬뜩하기 그지없다.
“내 명령 없이 괜히 분위기를 선동하지 마라.”
흑령이 싸늘한 눈초리로 시선을 한번 노려보며 뱉은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하나같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흑령의 얼굴을 힐끗힐끗 돌아본다.
“주, 주공!! 언제...”
하지만 흑령은 달탄기의 말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주은비와 이세혁을 번갈아 노려본
다.
“흐흐.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오래까지 버티는군. 정말 대단한 군대야.”
말을 마친 흑령이 흑도 끝에 대롱대롱 맺혀 있는 핏방울을 핥는다. 모용화운은 이 모
습을 보고는 심장 한구석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뭐, 뭐야... 저 놈은. 대체 언제 나타난 거야?!’
한창 빙백신장을 쏘던 판국에, 별안간 귓가를 메우는 비명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저
기 있는 흑의사내가 흑도 끝에 맺힌 핏방울을 혀로 핥고 있으니 섬뜩한 건 당연한 심
사다.
주은비는 아예 새파랗게 질린 채로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다. 흑령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사, 사람의 눈이 아냐... 사람의 눈이...”
흑령이 혓바닥으로 입술을 다시자 입 주변에 피가 번져 새빨갛게 변한다. 하지만 그런
흑령의 입가에 걸려있는 웃음은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하얗다. 그 하얀 웃음은 모두
의 가슴 속에 두려움이라는 씨앗을 심어버린다.
“보여 주지... 찰합이부족 철기군의 힘을.”
흑령이 왼손을 부드럽게 앞으로 내젓자, 달탄기를 비롯한 30여 명의 철기군이 앞에 있
는 금의위 부대에게로 달려간다.
“척살령이다!”
“찰합이부족 철기군을 얕보지 못하게 해 주자!”
철기군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자, 이세혁은 다급하게 손을 내저으며 소리친다.
“황보성이 앞장서라! 그리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자, 열 명만
황보성의 뒤를 따르라! 나머지 대원들은 공주마마를 호위한다!”
“존명!!”
이세혁이 입을 닫기가 무섭게 황보성을 비롯한 열 명이 폭풍처럼 철기군 앞으로 달려
간다.
“덤벼라, 몽고 오랑캐 놈들아!”
황보성이 전력으로 검을 들어올려 달려오는 달탄기의 면전에 내리친다.
“어림없는 짓!”
달탄기가 냉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올려, 떨어지는 황보성의 검을 막아낸다. 검끼리 맞
부딪치는 바람에 불똥이 두 사람의 면전으로 확 튄다.
“이것도 막을 수 있는지 보자, 오랑캐 놈아!”
황보성이 재차 검을 휘두르자, 달탄기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손을 뻗어 황보성의 검을
퉁겨낸다.
‘이 자식 봐라? 다른 철기군 자식들과는 틀린 놈이었다니. 말을 안 타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내심 당황하기는 달탄기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금의위 놈들과는 틀리다. 방금 내리친 공격 때문에, 팔이 아직까지 저리다니..
.!’
두 사람 전부 속으로는 상대를 칭찬하면서도 속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한
순간 몸이 굳었다가는 그대로 즉사할 거란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클클, 간만에 재밌는 놈이 나왔군. 저승에서 누가 죽였냐고 염라대왕이 물어보거든,
찰합이부족의 달탄기가 보내주더라고 일러라!”
“누가 할 소리를! 네놈이 공주마마와 나리를 노렸다는 이유만으로도, 넌 이미 여기서
죽어 마땅한 놈이란 걸 잊지 말라고!!”
황보성의 현란한 칼부림이 전장을 황홀한 달빛으로 물들인다. 이따금씩 허를 찌르는
달탄기의 검술 역시 보통 실력이 아니다.
‘힘내라 황보성. 네가 쓰러지면 장차 금의위를 이끌 만한 장수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
다!’
하지만 이세혁에 비해 흑령은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게다가 시선은 달탄기가 아
닌, 이세혁의 미간에 꽂혀 있다.
(큭큭, 이세혁. 초조한 모양이로구나.)
난데없이 들려오는 흑령의 목소리에, 이세혁이 퍼뜩 황보성에게서 시선을 돌려 흑령에
게로 고정한다.
(네놈이 그토록 지켜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죽는 모습은 보기 싫겠지?)
이세혁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흑령의 얼굴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다. 대답할 필요
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의 일전은 아직 잊지 않았겠지?)
전음이 끊김과 동시에 흑령의 모습이 흐물거린다 싶더니, 삽시간에 그곳에서 깨끗하게
사라진다. 동시에, 이세혁과 불과 3장 떨어진 거리에서 흑도를 거머쥔 채 달려들고
있는 흑령의 모습이 들어온다.
“여, 영수님!”
“조심하셔야...!!”
그러나 이세혁은 대원들의 염려와는 달리,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흑령의 공격을 검으
로 차단한다. 이미 두 사람의 시선은 바로 코앞에서 얽히고 있다.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흑령. 대명제국의 부흥을 위해서, 무궁한 번영을 위
해서 노부가 네놈을 처단하 말 테니 말이다!”
“흐흐, 글쎄. 그딴 명분은 일단 집어치우고, 열나게 몸이나 풀어 보자. 네놈과 마주
칠 때마다, 왠지 모르게 끓어오르는 피를 식힐 수가 없으니까!”
흑령이 흑도에 힘을 넣어 이세혁의 검을 밀어내고 살짝 뒤로 물러선다. 놀랍게도, 바
닥에 발을 딛지도 않으며 곧장 반격해온다.
“흑마도법!”
“열혈수라!!”
두 개의 절기가 충돌하면서 기괴한 음향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그들
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눈치를 챘을 것이다. 각자가, 아직 실력을 더 숨기
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큭큭, 과연 대단한 늙은이다. 벌써부터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군.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늙은이!”
다시 한번 흑령의 절기인 흑마도법이 펼쳐진다. 하지만 방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 담겨 있다.
‘큭, 귀찮게 됐군!’
이세혁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역시 내공을 끌어올려 열혈수라를 전개한다.
“전신을 새빨갛게 익혀주마. 마음껏 덤벼라!!”
12성 공력을 불어넣은 열혈수라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열기를 내뿜으며 흑령의 흑마
도법을 박살내기 위해 날아든다. 그러나 이때, 다시 한번 흑령의 절기가 이세혁의 눈
앞에 펼쳐진다.
“아수라멸도(阿修羅滅刀)!”
12성 공력을 투입해서 열혈수라를 펼치던 이세혁은 눈을 부릅뜬 채로 눈앞에 펼쳐지는
, 실로 믿기 힘든 광경을 바라본다. 흑령의 흑도에서 일어난 아수라멸도가, 흑마도법
은 물론 이세혁 자신의 절기인 열혈수라까지 그대로 꿰뚫은 채로 날아오고 있기 때문
이다.
이세혁은 황급히 검을 고쳐 쥐고는 금의위의 영수만이 쓸 수 있다는 최강의 절기, 유
령쾌검을 빛살처럼 전개시킨다.
“유령쾌검!!”
이번 공세에는 8성 공력만 불어넣는다. 하지만 그 정도 공세로도 흑령의 아수라멸도를
막아내기에는 아무런 부담이 없는 듯하다.
이 둘의 접전을, 그야말로 숨 막히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주은비와 모용
화운, 그리고 주은비를 호위하고 있는 금의위 대원들과 대기 중인 철기군 병졸들이 바
로 그들이다.
“주, 주공께서 저렇게까지 싸우시는 건... 정말 처음 보는군.”
“역시, 큰 나라의 인재(人才) 실력은 놀라워. 자모연환탄을 안 쓴다면 제아무리 주공
께서라도 쉽사리 우위를 점하기가 힘들 듯한데, 이거?”
“주공의 실력을 얕보지 말라고! 주공께서는 분명, 아직 전력을 다 안 쓰고 계시고 있
잖은가?”
“하긴. 주군께서 전력으로 밀어붙이신다면 우리 족장님 말고 당해낼 자가 있겠는가?
”
철기군이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고 있을 때, 금의위 대원들 역시 몇몇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중얼거리고 있다.
“저,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영수님과 싸우면서도 한 치도 밀림이 없다니...”
“저 나이에 저 정도까지의 무공 성취를 이룩해 내기란... 과히 쉬운 일이 아닌데...!
!”
“만약 영수님께서 깨지신다면, 그야말로 우린 전멸이겠지?”
“그런 상상은 꿈자리에서도 하지 말게나! 우린 결코 안 질 테니까!!”
서로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세혁과 흑령, 이 둘의 어깨는 결코 가벼울 리가
없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위해서... 이들은 그
결과가 나타날 때까지 싸움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 시진 동안의 접전 속에서도 결판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의 열기만 가속화될
뿐이다.
황보성이 지휘하던 금의위와 달탄기가 지휘하던 철기군은 금의위 대원 여덟명 전사,
철기군 스물 다섯명 전사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남김으로서 종결됐다. 달탄기가 흑령의
전음을 받고 속히 후퇴했던 탓이다.
“열혈... 수라!!”
“어림없다!”
이세혁이 온 신경을 기울여 가며 날린 열헐수라를, 흑령은 가벼운 몸동작으로 피해내
며 공격을 이어간다.
“흑마도법!”
이세혁에 비해서는 너무 노력하면서도 날카로운 공격이다. 이세혁은 숨을 거칠게 몰아
쉬면서도 공중으로 도약해 흑령의 공격을 무위로 돌리고는, 겁 없는 황소처럼 다시 흑
령에게 달려든다.
“유령쾌검!”
분명 섬전처럼 빠른 공격이긴 하지만, 흑령은 긴장한 얼굴은커녕 비웃는 듯한 얼굴이
다. 이세혁이 검의 흑령의 목을 동강내려는 순간, 흑령은 흑도를 쥔 우수를 움직여 가
볍게 떨쳐낸다.
놀랍게도, 이세혁의 공격이 그대로 퉁겨버린다. 그러나 이세혁은 튕기면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몇 장 떨어진 곳에 가볍게 착지한 뒤에 숨을 몰아쉬며 검을 똑바로 움켜쥔다.
“안됐군, 이세혁. 체력이 다 된 모양이야?”
“헉... 헉... 닥쳐라, 애송이 놈아!”
이미 둘은 한 시진 이상을 뒤섞여 싸웠다. 아무래도 늙은 이세혁의 체력이 빨리 떨어
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이세혁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처지가 아닌가?
그에 비해 흑령의 처지는 이세혁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그저 추격자의 입장에서 이
세혁의 뒤를 쫓았다는 것 말고는 그리 큰 부담감도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 두 사람의 병기가 부딪쳤다. 중요한 건 이세혁은 쌍수(雙手) 모두 사용해
검을 휘두른 반면에, 흑령은 우수 하나만 이용해서 공격을 막았다는 것이다. 둘의 체
력차를 절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이제 이 지긋지긋한 접전은 끝마치도록 하지. 방금 전 네놈의 공격으로 뼈저리
게 깨달았거든. 이미 내 몸에서 끓어오르던 무사로서의 투지는 차갑게 식어버렸다는
것을 말이다!”
흑령이 일갈을 내지르자 이세혁은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목석처럼 자리에서 꼼짝도 않
고 있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순 없다. 부하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내
분에 넘치는 직위에 앉아있었던 게 아니란 걸 증명하기 전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
어!’
이미 흑령은 어설프게 본다손 치더라도 정상이 아니다. 폭탄 터지듯 터져 나오고 있는
, 전신에 소름이 쫙 돋게 만들 정도의 살기는 이미 인간의 정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아수라멸도를 12성 공력으로 전개시키면 과연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벌써부터 궁
금해지는군. 큭큭...”
흑령의 우수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흑도를 쥔 손을 뻗어 이세혁의 앞으로 내민다. 숨
겨뒀던 최후의 내력까지도 모조리 끌어올리기로 결심한 듯, 여태까지 보여주던 모습과
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손에 땀을 흥건히 쥔 채 이를 지켜보던 황보성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서서
는 소리를 내지른다.
“나, 나리! 피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이세혁은 여전히 투지를 불사르며 응전태세를 취하고만 있을 뿐이다.
황보성은 낮게 욕설을 내뱉고는 이세혁을 끌고 오려는 듯 도약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바로 그때, 이세혁의 대답이 황보성의 귓전을 때린다.
“끼어들지 마라! 이 싸움은 내 싸움이다. 게다가 난, 여기서 몽고 살수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어수룩한 녀석이 아니니까 절대적으로 안심해도 좋다!”
이세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서울 정도로 번쩍이는 섬광이 흑령에게서 일어난다.
아수라멸도를 12성 공력으로 전개시킨 결과다.
“막아볼 수 있으면 막아 보시지, 늙은이! 몽고의 힘을 보여주마!!”
아수라멸도를 12성 공력으로 전개시키자,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정도의 살기가 이세혁
의 전신을 옭아맨다. 이젠 흑령의 공격만 남은 것이다.
“아수라... 멸도!!”
말을 마친 흑령은 한줄기 묵섬(墨閃)을 일으키며 빛이 되어 이세혁에게 달려간다. 아
니, 날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정도로 흑령의 속도는 무시무시할 정도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는군.’
굳은 각오를 한 듯, 이세혁의 눈이 덤덤하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그 눈 속에는 수만
가지의 복잡한 심정이 얽힐 수 있는 데까지는 얽힌 상태다.
흑령이 1장여 정도까지 다가온 것을 본 이세혁은, 눈을 감고 검을 쥔 손에 끌어올릴
수 있는 데까지의 공력을 끌어올리며 소리를 지른다.
“유령쾌검!!”
이세혁의 심장을 갈라놓기 위해 기세 좋게 달려들던 흑령은, 별안간 이세혁에게서 일
어나는 투지를 읽고는 공력을 더더욱 끌어올린다. 깨끗하게 끝내버리기 위해서다.
“가소롭기 그지없군! 아수라멸도의 고혼(孤魂)으로 사라져라!”
다시 한번, 장내에는 대낮과도 견줄 정도의 빛이 몸서리를 치고 지나간다.
“으윽!”
“누, 눈이!!”
삽시간에 전장이 대낮같이 밝아지자, 모든 이들은 들고 있던 병기를 떨어트리며 눈을
감싸 쥔다. 흡사 태양을 바라볼 때와 같은 느낌이 눈에 전달됐기 때문이다.
곧이어 두 개의 거대한 기류가 부딪히고 있는 이세혁과 흑령 사이에서는, 광풍(狂風)
인지 태풍(颱風)인지 분간도 제대로 안 될 정도의 바람이 몰아친다.
그들 주변에 있던 잡초들이 허공에서 휘날린다. 돌멩이들은 이미 멀리로 튕겨버리고
주변에는 먼지 한 모금 정도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 차앗!!”
흑령이 혼신의 일격을 가하자, 결국 철벽같이 느껴지던 이세혁도 조금씩 허물어진다.
그렇게 전세가 조금씩 변형되고 있을 때, 흑령은 젖 먹던 힘까지 불어넣어 기류를 뚫
어 헤치고 이세혁의 뒤로 비켜간다.
‘묵직한 느낌이 느껴졌다. 분명, 숨이 끊어졌거나 헤어나기 힘든 중상 중 하나일 터.
..’
얼마 뒤에 전장을 몰아치던 빛이 가라앉자, 몇몇 이들이 떨어트린 병기를 쥐고는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이세혁과 흑령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는 순간, 그대로
시선이 굳어버린다.
“주, 주공!!”
“영수님!? 괘, 괜찮으십니까?”
흑령의 왼쪽 팔꿈치 아래로 옷이 싹둑 베어져 있다. 물론 팔에는 검이 스쳐 지나간 흔
적이 절실하게 남아있다. 피가 한두 줄기씩 흑령의 팔에서 맺히고 있다는 것이 결정적
인 증거다.
“... 크으윽!!”
하지만 바로 그때, 이세혁이 입에서 무거운 신음을 내뱉으며 입에서 울컥 한모금의 핏
줄기를 토해낸다. 동시에 금의위 대원들과 주은비, 모용화운의 얼굴은 흙빛으로 물든
다.
“대, 대영반!!”
주은비의 애탄 부름에도 불과하고 이세혁은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검을 좌수로 바꿔 쥐더니 오른손으로 심장 부근을 짚는다.
“큭... 정말, 놀라운 공격이었다. 그 정도까지의 내력을 숨겨두고 있었을 줄은...”
“늙은이야말로 대단하군. 필살(必殺)을 목표로 전개한 아수라멸도를 이렇게까지 막아
낼 수 있다니.”
흑령의 상태는 이세혁에 비해서는 그나마 엄청나게 양호한 편이란 건 세 살 먹은 꼬마
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흑령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계속해서 모두의 귓전을 때린다
.
“정말 질렸다. 네놈을 여기까지 쫓는 짓거리도, 이제 여기서 집어치워야 되겠어.”
언제부턴가, 흑령의 우수에는 사과만한 크기의 자모연환탄 하나가 뎅그러니 쥐어져 있
다. 자모연환탄을 주시하고 있는 모두의 안색이 천천히 굳어간다.
“큭큭... 약속했지, 이세혁? 네놈의 피로 몽고사에 길이 남을 성전의 축제를 장식하
겠다고.”
흥분으로 달아있던 흑령의 눈은,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싸늘하게
식어간다.
“네놈만 죽는다고 너무 서러워할 필요는 없다. 네놈이 지켜주고자 했던 이들도... 모
조리 저승으로 보내줄 테니까. 저승에서라도 관수 잘 하라고, 늙은이!”
흑령의 발언에 황보성이 검을 움켜쥔 손을 부르르 떤다. 하지만 이세혁마저 격파시킨
자를, 자신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유언이라도 남겨라. 어차피 곧 저승에서 만날 몸들이라지만, 유언이란 건 그래도 네
놈의 저승길을 덜 외롭게 할 테니까.”
흑령이 몸을 돌려 이를 으스러져라 깨물고 있는 황보성을 흘낏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이세혁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이세혁에게서 떨어질 말을 기다린다.
“...”
이세혁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 하지만 이세혁의 눈은 소리치고 있다.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끝까지 모두들에게 정성을 베풀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소리치고 있다.
(황보성... 들리고 있으리라 믿는다.)
“!?”
신들린 듯한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던 황보성은 별안간 들려오는 이세혁의 전음에 정신
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를 이세혁에게 돌린다.
(허허... 네가 금의위에 처음 입대할 때가 생각나는구나.)
“나, 나리!!!”
황보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지르자, 흑령은 입가에 묘한 웃음
을 짓는다.
“호오, 전음술을 쓰고 있는 모양이로군. 뭐, 유언을 그렇게 남겨도 상관은 없다만.”
시시각각 심장을 베인 자신의 목숨이 꺼져가고 있다는 걸 느끼며, 이세혁은 혼신의 힘
을 다해 계속해서 전음을 날린다.
(그때가 정말 좋을 때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됐다. 죽음에 임박해서야... 지금의 네
모습과, 그때의 네 모습을 비교해 보고서야 말이다.)
“아닙니다, 나리! 나리는 지금 돌아가실 분이 아닙니다! 대명제국의... 우리나라의
기둥이 기둥이신데...”
(천명은 거역할 수 없는 법이다. 난... 이미 틀렸어. 심장을 다쳐서, 이대로는 1각도
못 버틴다.)
이미 황보성의 눈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다.
뒤돌아 있는 이세혁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억울할 뿐이다. 금의위에 입단한 이
래로 단 한 차례도 울지 않았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울고 있는데도, 자신의 얼굴을 봐
주지 않는 이세혁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이제부터는 아무 말 말고 잘 듣거라.
금의위의 영수직은 곧바로 네가 이어주기 바란다. 공주마마의 신변은 이제부터 네가
지켜라.)
“!!”
벼락이라도 맞은 듯, 황보성이 전신을 푸들푸들 떨며 이세혁의 뒷모습을 찢어져라 바
라본다.
(허허, 사 대인이나 강 소협이 여기 있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을...
대명제국의 존망을 한 치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게 억울할 따름이로다.)
한탄을 하던 이세혁이 꾸역꾸역 피가 새어나오는 왼쪽 가슴을 짚고는 천천히 몸을 돌
려 금의위 대원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출혈과다로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질끈 깨물며
크게 소리를 지른다.
“우리 대명제국의 금의위! 우리 금의위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더냐!”
피로 떡칠을 하고 있는 이세혁의 옷깃을 보고는, 금의위 전원의 눈꼬리에 소리 없이
눈물이 맺힌다. 그러나 그런 눈물을 애써 눌러 참으며, 이세혁이 원하는 답변을 소리
친다.
“대명제국의 적을 멸하기 위해섭니다, 영수님!!”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는 대원들의 모습을 본 이세혁의 눈가에도 잔잔하게 눈물이 맺힌
다.
“공주마마만큼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 금의위의 이름을 걸고, 대명제국의 존망을 위
해서 한목숨 기꺼이 바쳐주기 바란다! 그것이 너희들이 이뤄야 할 사명이다!!”
회광반조(回光返照) 현상 탓인지, 이세혁의 눈은 한없이 맑고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
만 그 맑디맑은 눈동자에서 그 진의를 읽어낸 자는 아무도 없는 듯하다.
별안간 이세혁의 심장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던 핏줄기가 바닥을 드러낸다. 이세혁은 그
순간을 노린 듯, 번개같이 검을 고쳐 쥐고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힘을 쏟아 부으며 절
기를 펼쳐낸다.
“유령쾌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공격이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을 결의하고 달려든 이세혁의
기세기에, 흑령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확실히 못 움직이게 됐으리라 믿고 1장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계속 서 있었던 것이다.
(공주마마... 마마를 끝까지 호위하지 못하는 신(臣)을 용서해 주소서.)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을 주은비에게 남긴 이세혁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떨어져 저만치
뒤에 떨어진다. 마음을 비우고 흑령에게 달려드는 이세혁은, 이 순간 몸이 한없이 편
해지는 것을 느낀다.
“흑마도법!”
방어를 위해 흑령은 흑마도법을 펼친다. 하지만 바람처럼 날아드는 이세혁의 검을 모
두 막아내기는 힘들었던 탓일까.
“... 크윽!”
흑령이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이세혁의 심장에 전력으로 흑도를 내리긋는다. 그러자
이세혁의 검이 부러지면서 자잘한 파편이 허공으로 튄다. 그 파편들은 허공의 달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빛줄기를 토해낸다.
흑령이 달빛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비치는 검의 파편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동귀
어진을 노린 이세혁의 심장에서는 피분수가 뿜어져 나와 흑령의 옷 여기저기에 묻어난
다.
이세혁이 뿜은 피를 보고 정신을 차린 흑령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곁에 쓰러져 있는
이세혁을 노려본다. 흑도로 툭 쳐보자 반응은커녕 숨쉬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이다.
죽으면서까지 나라를 위해 싸우고자 했던 노영웅. 죽음을 목전(目前)에 두고도 자신의
맡은 바 소임을 다 하고자 노력했던 철죽장군 이세혁의 죽음은 금의위 전원들의 가슴
에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킨다.
“여, 영수님...”
“이럴 리가 없다. 영수님께서... 영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리가...!!”
설원(雪原)의 칼바람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봄바람만치 따뜻한 사람이었던 자신들의
지도자, 이세혁을 떠올리며 금의위 대원들은 눈물을 뚝뚝 떨군다.
“대, 대영반... 대영반...!!”
이세혁의 죽음을 인정하기가 두려워설까. 주은비가 이건 아니라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
설레 내저으며 고사리 같은 주먹을 꼭 움켜쥔다.
모용화운은 그런 주은비의 얼굴을 자신의 품에 묻는다. 모용화운 역시 꼭 쥐고 있는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북경으로 귀환한 뒤 한잔하기로 약속했으면서... 이렇게 떠나기에요, 영감님...?’
평소 이세혁의 모습을 생각하던 모용화운은 이세혁 다운 죽음이라 생각하며, 눈물을
참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화운의 뺨에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
진다.
황보성은 봇물 터져 나오듯 쏟아지는 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원들을 둘러보며 소
리를 내지른다.
“대명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자신이 있는 대원, 열다섯만 여기 남아 방어진을 형성
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공주마마를 호위하고, 북경까지 귀환이닷!”
황보성의 외침에 너도나도 방어진을 형성한 금의위 대원 열다섯이 결사항전 태세를 취
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황보성의 지휘 하에 신속하게 북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한다.
흑령은 흑도를 왼손으로 바꿔 쥐려다가 느껴지는 통증에 처음으로 얼굴을 찌푸린다.
강천비에게 당했던 상처가 이세혁 덕택에 다시 재발된 것이다.
‘빌어먹을, 이래서야 제대로 싸우기도 힘들겠군!!’
왼팔을 한번 내려다보고 흑령이 이맛살을 찌푸린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달탄기가 다가
와 염려스런 얼굴로 묻는다.
“주공, 다치기라도 하셨습니까?”
“네 얼굴에서 근심을 지워라. 네 얼굴에 근심이 일어나면, 우리 군의 사기가 떨어진
다.”
달탄기의 말에는 대답할 생각도 않고, 흑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바닥에 떨
어트린 자모연환탄을 바라본다.
“저걸 좀 주워다오.”
달탄기가 허리를 숙여 자모연환탄을 조심스레 들자, 흑령은 흑도를 거칠게 허리춤으로
밀어 넣으며 오른손으로 자모연환탄을 낚아챈다.
“주공... 저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달탄기가 냉소를 지으며 묻자, 흑령은 달탄기가 원하는 답변을 내리면서 뒤돌아선다.
“모조리 척살하라. 그리고 척살이 끝나는 대로, 도망간 쥐새끼들의 뒤를 쫓는다.”
“존명!”
이세혁도 쓰러졌겠다, 사문도와 강천비도 없겠다... 다만 염려되는 사람은 모용화운과
황보성, 단 두 사람뿐이기에 흑령은 다소 여유로운 얼굴이다.
‘이제 승부는 끝났다. 1차 목표 달성 후에, 홍무극만 잡아다가 처단한다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다!’
금의위에게 달려드는 철기군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흑령의 얼굴에는, 묘한 심정이
뒤섞여 복잡한 얼굴을 만들어내고 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듣고는, 흑령은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자모연환탄을
쥔 채 사라진다.
자신의 꿈을 이룩하기 위해서. 자신이 맡은 바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흑령 자신이 꿈꾸는... 자신만의 이상세계를 위해서...
금의위 열다섯이 철기군 100을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최선
을 다했다. 금의위 대원들의 숫자는 열다섯이었지만 그들이 쓰러트린 철기군의 숫자는
서른이다. 그 많은 인원들과 싸우면서도 1인당 두명씩은 잡아 죽였다는 뜻이다.
“그들은 말도 타지 못한 상태인데다가 한참 지쳐있는 상태라 얼마 못 갔을 것이다.
무조건 잡아 죽여야만 한다!!”
“오오!! 찰합이부족의 영광을 위해!”
달탄기의 고함은 찰합이부족의 최정예부대인 철기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달탄기가
말을 질풍처럼 몰면서 질주하자, 철기군 전원은 앞을 다투어 달탄기의 뒤를 쫓아간다.
철기군이 모두 사라지고, 전장에 남은 건 피[血]와 시체, 그리고 버려진 병기들이다.
속이 메스꺼울 정도의 혈향(血香)이 비릿하게 전장을 메우고 있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왼손을 지혈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흑령, 그다.
“큭큭큭... 표연공주, 네가 지키고자 했던 이세혁도 여기서 목숨이 끊어졌고... 금의
위도 이제 반 이상이 전사했다.
이젠 전부 끝났다. 이 승부는, 우리 몽고의 승리다. 건주여진의 승리도 아니고, 명의
승리도 아닌... 우리 몽고의 승리다!!”
말을 마친 흑령은 걸터앉아 있던 나무를 슥 훑고는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걸어본다.
살기가 은은히 뿜어져 나오는 그의 얼굴과 실처럼 가느다랗기만 한 그 미소와는 너무
도 대조적이다.
‘이제 간다. 마지막 마무리, 모용화운과 주인을 지키는 개들을 학살하러!’
이세혁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주은비는 놀랍게도 전혀 당황하거나 놀란 기색이 아니다
. 눈물만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을 뿐, 얼굴에는 처연한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
아내기 힘들다.
(그렇게 잘 참아내요. 여기서 주 소저마저 오열하고 만다면, 금의위 대원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질 게 뻔해요.
나중에 무사히 귀환한 뒤에 실컷 울어도 상관없으니까, 지금만큼은 제발 슬픈 얼굴을
하지 말라고요!)
모용화운에게서 받은 전음은 주은비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이세혁의 죽음을 접하기가
무섭게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던 모습과는 상판 반대로, 얼굴에는 분노의 감정도, 슬픔
의 감정도 보이지 않고 있다.
모용화운은 그런 주은비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전력으
로 달린다. 자신이 주은비를 위로하긴 했으나, 주은비의 마음이 여리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부탁해야만 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워서기도 하다.
‘주군이랑 천비는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영감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안 돌아
오셨단 말야...!!’
마음속으로 그 둘을 한탄하며 주은비의 팔을 꽉 잡은 채로 달리던 모용화운은, 문득
한 대원이 소리치는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다.
“공주마마, 뒤에서 먼지가 일어나고 있는 걸로 봐서는 추격이 오고 있는 모양이옵니
다!!”
주은비의 굳어진 얼굴은 점차 납덩이처럼 되어간다. 모용화운은 다급한 얼굴로 그런
주은비의 팔을 더 세게 잡아끌면서 소리를 지른다.
“속도를 조금 더 올려야 해요! 이대로 가다가는, 북경은 구경도 못하고 전부 전멸하
고 만다고요!!”
“... 그게 힘든 일이오, 모용 소저! 지금 우리 대원들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은 채로 이렇게 밤공기를 마시며 달려왔소이다. 이젠... 이젠 거의
체력도 한계에 가까운데 속도를 더 올리라니...”
황보성의 힘겨운 말대답에 모용화운은 입술을 꽉 깨물며 주변을 둘러본다. 하나같이
녹초가 돼 있는 금의위 대원들을 보자니, 모용화운은 자신마저도 전신에서 힘이 쭉 빠
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조금 무리했어. 내공을 1갑자 이상을 날려버리다니...!’
사실 모용화운이 이세혁 다음으로 가장 힘쓴 사람이다. 황보성도 비록 많은 철기군을
죽였다고는 하지만, 모용화운의 빙백신장은 그보다도 많은 철기군을 얼음조각으로 만
들어버렸다.
홀로 죽인 철기군 숫자만 해도 50이 넘는다. 철기군들을 죽이는 데 쓴 내공과, 지금까
지 이렇게 버틸 수 있었던 내공을 모두 포함하면, 1갑자는커녕 2갑자에 가까울 지경이
다.
‘최소한 천비라도 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은 안 해도 될 터인데...!!’
강천비가 그때 습격했던 암수에게 당했을 거라는 생각은 물론 해봤다. 하지만 모용화
운은 주은비를 봐서라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황보 형님! 저기, 추격대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엔 다른 대원이 황급히 질러대는 소리에, 황보성은 고개를 힐끗 돌려 흙먼지가 날
리는 뒤쪽으로 최대한 고개를 젖힌다. 과연 그 대원의 말대로, 흙먼지가 뽀얗게 날리
고 있는 가운데엔 여러 명의 기마병이 보기조차 섬뜩한 미소를 지은 채로 무기를 휘두
르며 달려오고 있다.
“게 섰거라, 도망자들아!”
“순순히 목숨을 바쳐라!!”
30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던 그들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10장으로 거리가 줄어든다.
추격대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철기군의 모습은 달빛에 번쩍거리고 있어 묘한 기운을
풍겨내고 있다.
“치잇! 더럽게도 빨리 쫓아오는군, 빌어먹을 놈들!!”
모용화운이 욕을 내뱉고는 주은비의 손을 스르르 놓는다.
“주 소저, 그렇게 절대 슬픈 표정을 짓지 마요! 약속한 거예요!”
“모, 모용 소저!”
“잠깐 쟤들 손 좀 봐주고 올 테니까, 따라오지 말고 먼저 가요!”
주은비를 남겨둔 채, 모용화운은 자리에 멈춰 선다. 그리고 숨을 한번 돌리고는 내공
을 살짝 끌어올려 쌍수를 앞으로 쫙 뻗는다.
“빙백신장!!”
모용화운의 손은 무척이나 곱다. 하지만 그 곱디고운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빙백신장
의 기류만큼은 그야말로 잔인하기 그지없다.
“흐윽, 젠장!”
빙백신장을 쓴 모용화운은 조금 전부터 손에 얼음을 올려놓는 듯한 느낌에 주먹을 꽉
쥔다. 그리고 황급히 다시 한번 빙백신장을 뿜으려는 듯 심호흡을 한다.
“저승사자 마중이나 해라, 이 몽고 놈들아!”
얼음덩어리가 된 동료의 시신을 이리 부수고 저리 부수며 달려오는 철기군들에게, 다
시 한번 모용화운의 빙백신장이 떨어진다. 그러나 이 놀라우리만큼 정확한 명중률과
살기에도 불과하고 철기군들은 사기가 한껏 오른 상태인지라 사기를 꺾기가 무척이나
힘든 상태다.
‘저런 돼먹지 못한 놈들, 그만 순순히 물러나 줘도 되잖아! 이러다가 정말, 북해빙궁
재건도 못해보고 저세상으로 가 버리는 거 아냐?!’
모용화운이 다시 빙백신장을 쓰려고 쌍수를 가슴 앞으로 모은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은비가 먼저 가고 있는 뒤쪽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크아악!!”
“!!”
모용화운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다. 달려오는 쪽을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뒤로 달려가 그 비명소리의 정체를 파악할 것인가를 잠깐 고민하던 모용화운은 결국
후자를 선택하고 황급히 신형을 날린다.
“상대가 누구건, 무조건 잡아 죽여라-!!”
여기저기서 철기군 병사들이 질러대는 목소리는 모용화운의 속을 벅벅 긁어놓는다. 하
지만 모용화운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서둘러 비명소리가 들린 곳으로 전력
질주한다.
“!!”
그러나 모용화운은 모퉁이 하나를 돌자마자 눈앞에 펼쳐져 있는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 흐, 흑령!!”
흑령, 그가 어느새 자신을 추월하고 주은비의 곁으로 파고들고 있다. 황보성이 막는답
시고 흑령을 상대하고 있으나, 흑령은 공격하는 입장이고 황보성은 막기에 급급한 입
장이다.
“귀신같은 자식, 언제 거기까지 파고 든 거야?!”
모용화운이 황급히 황보성을 지원하기 위해 붙자, 흑령은 모용화운을 흘낏 바라보다가
혀를 한번 차고는 황보성의 곁에서 바람처럼 물러선다.
“이거 의외로군. 네년이 철통같이 지키던 표연공주의 곁에서 떨어졌던 것도 의외고,
무엇보다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다.”
“네놈의 손에서 주 소저를 구할 수만 있다면, 어딘들 못 가겠어?!
여기서 손떼라. 북해빙궁의 이름 아래, 내 손에 의해 고혼이 되고 싶지 않다면!!”
모용화운이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지만, 흑령은 괴소를 지으며 모용화운의 눈을 노려본
다.
“큭큭, 글쎄. 그건 내가 할 소리 같은데? 죽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여기 있는 모
든 자들이겠지.”
어느새 금의위 대원들의 뒤에는 철기군들이 목석같은 얼굴을 한 채로 철통처럼 포위망
을 치고 있다. 정말 올 수 있는 데까지는 온 것이다.
모용화운과 황보성은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이 숨막히는 듯한 긴장감을 먼저
깬 사람은 그 둘이 아니라, 왼팔을 다쳐 아직까지 피를 쏟아내고 있는 흑령이다.
“중원의 한족 놈들은 억척같이 질긴 녀석들이야. 여기 있는 놈들도 그렇고, 모용화운
네년도 그렇고.
그리고 전에 달려들던 질풍귀 강천비란 무림인도 그렇고.”
“!!”
‘강천비’란 이름이 거론되자 설움으로 떨고 있던 주은비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간
다. 그 반응을 보이는 건 모용화운과 황보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 그럼... 그때, 군선을 습격한 건...”
“그래, 나다. 그때 엔간하면 그 늙은이의 숨통을 끊어버리려고 했었는데, 그 강천빈
가 뭔가 하는 놈 덕택에 실패했거든.”
“강 소협을 죽였느냐?”
황보성이 초췌해진 얼굴을 들어올려 흑령을 노려보며 묻는다.
“글쎄. 어떻게 했을 거라 생각하는지는 내가 오히려 더 궁금한 걸?”
“빌어먹을 새끼, 죽어버려라!”
모용화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싶더니, 뼛속까지 얼릴 듯한 냉기가 모용화운의 쌍수에
서 뿜어져 나온다. 분노로 인해 내공이 남아있는 정도는 생각하고 있지도 않고 있다.
“호오, 빙백신장과는... 조금 다른 구석이 있는 기술이로군. 북해빙궁에 이런 기술이
있다는 소식은 아직 못 들어 봤는데?”
하지만 흑령은 특유의 경공술을 이용해 모용화운의 기술을 모조리 피해낸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모용화운은 쉴 새 없이 기술을 펼쳐낸다.
“모용 소저, 그만 하시오! 내공을 최대한 아껴야 하오!!”
황보성의 만류에도 불과하고 모용화운은 좀처럼 화를 식히지 못하고 있다.
“놔, 이거 놔요! 저놈을... 저 새끼를 죽여 버리고 말 거예요!”
“그만 진정하세요, 모용 소저.”
주은비의 떨리는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모용화운은 별안간 고개를 떨구더니 차갑게만
느껴지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없이 울음을 터트린다.
“그럴 리가 없어... 흑... 천비가... 절대 죽었을 리가 없어...!!”
여태까지 용케 참아왔던 분노와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한 탓에, 모용화운은 흐
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다. 그저 울고 싶을 뿐이다.
강천비가 누군가. 자신이 중원으로 건너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누님이라 부르
며 사문도와 함께 중원에 대한 인식을 심어준 소년이 아닌가?
“... 큭큭, 정말 웃긴 년이로군. 낸 내 입으로 강천비란 녀석을 죽였다고 말한 적은.
..”
하지만 바로 이때, 이번에는 철기군의 포위망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크아아악!”
“으악!”
삽시간에 세 명의 철기군 병사가 몸이 횡단(橫斷)되더니, 핏줄기를 쏟으며 절명한다.
덕분에 울음을 터트리던 모용화운까지 잠시 울음을 멈추고 비명성이 울려 퍼진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주, 주공!!”
포위망을 짜고 있던 달탄기가 포위망을 부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황급히 소리를
내지른다.
“소년입니다! 백의를 입고 있고... 큰 도(刀)를 휘두르고 있는 걸로 봐서는...!”
“강천비, 그놈이다. 큭큭...”
흑령의 입가에 섬뜩한 웃음이 번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기대어린 얼굴로 바뀐다.
모용화운은 흑령이 중얼거린 말을 듣고 주먹을 꼭 움켜쥐더니 혹시나 하는 얼굴로, 조
마조마한 심정으로 비명성이 들려온 곳을 바라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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