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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 아카데미상 최다 수상 실패자(7차례)였던 명우 피터 오툴 ]
가장 영국적인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우습게도 피터 오툴은 아일랜드 출신입니다. <키드네피드>라는,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영화에 조연의 조연의 조연으로 출연한 피터 오툴을 데이비드 린은 사막으로 데려와 로렌스 대령 역을 맡겨버렸습니다.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은 할리우드 대작에 걸맞는 스타캐스팅을 기대한 스튜디오들은 경악했음이 틀림없으나, 영화는 다행히 성공했고, 피터 오툴은 스타가 되었죠.
스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터 오툴은 뭔가 불안한 배우였습니다. 스튜디오들은 그에게 얼른 흥행물의 주연을 주기 꺼려했고, 여배우들은 섹슈얼한 매력 대신 불안정한 매너로 무장한 오툴과 연기하는 데 앙상블이 잘 나오지 않아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피터 오툴이 가장 빛을 발할 때는 <백만 달러의 사랑>에서 오드리 헵번의 상대역이 아니라 <겨울 사자>에서 차가운 캐서린 헵번과 맞부딪치거나 <마지막 황제>에서 멸망해 가는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뒤로하고 본국으로 떠날 때였습니다.
그는 이상하게도 영화 속에서 자신이 태어난 세계에서 소수로 취급받고 아랍이나 중국처럼 새롭게 에그조틱한 세계에 매혹되지만, 역시 그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는 시시한 탐정 영화에 출연하다가 느닷없이 사막의 영웅이 되었지만 할리우드의 영웅이 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죠.
그는 무지막지한 음주 습관으로도 유명했습니다. 1975년 건강 문제로 술을 끊었지만 말썽쟁이와 무법자 이미지는 그를 수십 년간 따라다녔습니다. 연극무대와 스크린에서 우상으로 활약하던 오툴은 아카데미상과 관련해서는 7차례나 고배를 마신 ‘불운의 스타’이기도 했습니다.
* 2003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수상식에서... 뭔가 무척 아쉬움이 담긴 표정입니다
1962년 출세작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처음 아카데미상에 후보로 지명된 이래 2006년 <비너스>로 여덟 번째 추천을 받았으나 끝내 본상 수상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는 수상에 7번 실패하고 난 뒤 2003년 공로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주인공은 못 되고 늘 들러리만 섰네요”라며 진한 아쉬움을 표했다고 하네요.
당시 71세였던 오툴은 상을 받기 전 “아직 활동 중이니 80세가 될 때까지 공로상을 미뤄달라”며 수상을 사실상 거절했으나 주최 측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상을 받았습니다. 오툴이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한 것은 ‘오스카의 실수’로 꼽히기도 합니다.
* <트로이>에서 트로이왕 프리아모스로 분한 오툴
오툴에게는 ‘아카데미상 최다 수상 실패 배우’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으나 네 차례의 골든글로브상과 한 차례의 에미상을 받았습니다.
한 세대를 장식하였던 위대한 배우 피터 오툴, 그는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런던에 있는 웰링턴 병원에서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습니다.
* 오툴의 마지막 영화 <비너스>
[ 대표작 소개 <아라비아의 로렌스> ]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서사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영화가 실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요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차대전 당시 터키인과 맞서 싸웠던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인 영국군 장교 T.E. 로렌스의 삶을 바탕으로 만든 이 작품은 여러 개의 오스카상을 거머쥐며 야심만만하다는 말의 의미를 철저히 보여주었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조지 루카스와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수많은 감독에게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특히 스필버그와 역시 이 영화의 열광적인 팬인 마틴 스콜세지는 나중에 함께 이 작품을 원작의 길이(216분)로 복원하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모리스 자르의 휩쓸어가는 듯한 주제곡과 로버트 볼트의 문학적인 대본, 사막에서 이루어진 프레디 영의 매혹적인 촬영, 거기다 수천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꼭 영화관의 대형 화면으로 보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70㎜ 필름으로 촬영된 형식은 주인공 피터 오툴의 푸른 눈동자부터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사막의 모래를 내리비추는 햇빛에 이르기까지 정밀한 세부표현을 가능하게 했지요. 사막의 신기루에서 나오는 오마 샤리프,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불붙인 성냥을 비추어보는 장면과 경탄스러운 아카바 공격 등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장관을 빚어냅니다. 컴퓨터 특수효과가 생겨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더욱 그러하죠.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촬영상, 편집상, 주제곡상, 음향상 등 7개 부분에 걸쳐 상을 받았지만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다. 남우 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피터 오툴의 탈락은 이후 8회에 걸쳐 후보에 오르고 끝내 수상을 못하는 불운(?)의 전주곡이기도 했죠(그해에 남우주연상은 <앵무새 죽이기, 일명 알라바마에서 생긴 일>의 그레고리 펙이 수상했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제작 자체가 기적인 영화입니다. 오마 샤리프가 언급했듯이 당시까지는 무명이었던 출연 배우들, 액션 장면도 거의 없고 여배우와의 로맨스도 없는 그러나 상영시간은 거의 4시간에 달하는 영화를, 그것도 사막에서 찍기 위해 엄청난 제작비가 소요된다는 말을 듣고도 돈을 투자한 제작자에게는 정말이지 존경심이 들 정도입니다.
아무리 감독이 데이비드 린이라고 해도 말이지요.
영화의 주인공인 T.E.로렌스는 실제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아랍 민족을 자극하여 독립 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여러 개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적인 인물이자 당시에는 터부시되었던 동성애자였으며 아랍 문명을 사랑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의 제국주의를 도와줄 수 밖에 없었던 모순적인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영화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드라마틱한 인물이지요.
영화 초반의 로렌스의 죽음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데이비드 린이 굳이 로렌스의 죽음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이 영화가 기본적으로 실패에 대한 영화이기 때문이죠. 오토바이를 타고 엄청난 스피드로 달리다 속도를 통제하지 못해 사고로 사망한 로렌스는 그의 일생 역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어 상처입고 실패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영웅의 몰락을 그리고 있죠.
하지만 제목이 무색하게도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로렌스가 아니라 사막 그 자체입니다. 실제 사막에서 로케이션으로 촬영된 화면은 관객들에게 경이로운 대리 체험을 경험하게 합니다. 4시간짜리 영화라고 하지만 스토리는 간결합니다.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광활한 사막의 모래바람과 태양, 그 사이에 존재하는 베두인들입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의 현란한 편집이 난무하는 영화들은 발끝도 따라오지 못할 거대한 이상이 구현되는 장면들도 모두 사막 장면들입니다.
로렌스(피터 오툴)가 알리(오마 샤리프)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한번 보죠. 사막의 우물에서 물을 길던 로렌스와 안내인은 멀리 무언가를 보지만 관객들에게 보이는 건 머나먼 지평선입니다. 롱테이크(한 장면을 길게 찍는 영화기법)로 찍은 이 장면에서 지평선은 높은 사막의 온도로 아지랑이까지 겹치며 작은 점은 점점 커져 낙타를 탄 사람의 형상으로 변합니다.
이렇게 사막의 위력을 영화 초반에 선보이고 중반에 로렌스가 네푸드 사막을 건너다 낙오한 카심을 구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돌아올 때 좀 더 스펙터클하게 반복합니다. 이 2개의 장면은 반드시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본래 감독이 의도했던 시각적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영화는 크게 2개의 이야기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 로렌스는 영국군 장교로 당시 터키의 지배에 반발하는 아랍 부족에게 파견되죠. 단순한 영국군의 일부로 아랍 부족을 편입시키려는 상관에게 반발해 파이잘 왕자(알렉 기네스)와 협상해 알리와 50명의 베두인들을 이끌고 네푸드 사막을 가로질러 전략적 요충지인 아카바를 점령합니다.
후반부에서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터키군과 싸우며 신문 기사를 통해 얻은 명성을 이용해 다마스커스를 점령 후 아랍의 독립을 염원하지만 결국 제국주의의 덫을 피하지 못하고 본국으로 귀환길에 오르죠.
전반부의 아카바 공략은 그야말로 시청각적 성찬입니다. 앞서 언급한 알리와 카심과의 사막에서의 조우 장면은 모두 전반부에 이루어지죠. 전반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막 횡단입니다. 로렌스와 안내인이 파이잘 왕자를 찾아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가는 장면, 파이잘 왕자와의 짧은 만남 후 네푸드 사막을 횡단하는데 140분을 모두 써버리죠.
대사도 그리 많지 않고 특별한 액션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습니다. 영상으로 표현된 사막은 숨막히게 아름답죠. 마치 관객 스스로 사방이 모래로 덮힌 광활한 사막의 여정에 함께 동참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강한 정서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전반부가 로렌스와 아랍 부족의 영광을 노래했다면 후반부는 절정에 달했던 로렌스의 성공이 열강의 힘의 논리에 의해 부서지는 영웅의 좌절이자 몰락이야기입니다. 시원스러웠던 전반부의 진행에 비해 후반부는 로렌스의 심경을 반영하듯 혼란스럽습니다.
중요한 이벤트였던 다마스커스 공격도 아카바 공략과는 달리 간단하게 처리되고 오히려 다마스커스 정복 후 영국군과의 대립에 대해 더 큰 비중으로 소개되죠. 이상주의자였던 로렌스의 접근법은 그의 조국이기도 했던 노회한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하기에는 순진했습니다.
아랍 부족과 영국 모두에게 배신당한 이 젊은 낭만주의자는 결국 자신의 몸을 돌려 본국으로의 귀환길에 오르게 되죠.
피터 오툴이 영화의 타이틀 롤을 맡는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했습니다.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영화의 주연이 알려지지 않는 무명 배우에게 돌아갔으니 그럴만도 하지요. 물론 나중에 우리는 피터 오툴이 얼마나 뛰어난 배우인지 잘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무명의 배우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로렌스는 배우가 연기하기가 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그러나 피터 오툴은 놀라운 통제력으로 로렌스 역할을 100% 이상 소화해 냅니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의 말투, 몸짓 모두에서 로렌스가 동성애자임을 강하게 암시하죠.
기차 습격 성공 후 탈선된 기차 위에서 마치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던 그의 모습을 보시죠. 어린 하인 파리지와의 관계도 연인처럼 느껴집니다. 성정체성 외에도 로렌스의 마조히스트적인 면모에 괴로워하는 부분도 명연기 중 하나입니다. 촌락을 습격했던 터키군을 몰살시킬 때의 광기 어린 로렌스의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뛰어난 감독의 영감을 스크린에 구현한 이상적인 영화입니다. 문학적인 향취와 스펙터클한 영상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보기 드문 영화이기도 하죠. 영화에서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믿는 부류와 활동사진으로서의 영상미가 중요하다고 믿는 부류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입니다.
“누구나 꿈을 꾼다. 그러나 그 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다. 밤에 꿈을 꾸는 사람은 밝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 그 꿈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는다. 반면에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몹시 위험하다. 그런 사람은 눈을 활짝 뜬 채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고 행동한다.
그렇다. 나는 낮에 꿈을 꾸었다.”
T. E. 로렌스의 저서 <지혜의 일곱 기둥> 머리말에서...
[ 제1차 세계대전과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
*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투르크는 꺼져가던 제국의 부활을 위해, 독일과 동맹을 맺습니다. 이에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아라비아의 '하심'가(家)와 협정을 맺고, 아랍인들이 독립운동에 나서면, 적극 지원하기로 약속하지요.
1916년 6월, 마침내 하심가의 후세인이 오스만 투르크를 상대로 독립을 선언하자, 영국군 정보장교 토머스 로렌스(1888~1935)가 중동에 투입됩니다.
옥스퍼드대학 재학 중 이미 중동을 여행한 바 있었던 로렌스는, 대학 졸업 후 3년반 동안, 고고학자로써, 중동지역 이곳 저곳을 여행했던 중동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아라비아인으로 분장하고, 사막의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유격대를 지휘하여, 철도 폭파 및 게릴라 활동을 벌였으며, 1917년에는 홍해의 요충지 아카바를 기습,점령합니다.
로렌스는 오스만 투르크군이 전혀 예상치 않았던 방향으로, 기습작전을 감행했습니다. 50여명의 아랍군을 이끌고, 6주 만에 1,000km나 되는 사막을 가로질러, 배후를 친 것이었습니다. 이 기습으로 적군의 사상자와 포로가 1,200명에 달했지만, 아랍군의 희생자는 단 2명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오스만군에 체포된 그는, 탈출에 성공한 뒤, 1918년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등 세칭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로 그 이름을 떨칩니다. 로렌스는 특히 게릴라전에 능해, 79차례나 철도를 폭파하는 탁월한 전과를 거뒀습니다.
*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그러나 그 싸움은 결국 그만의 고독한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중동지역을 분할 통치하기로 협정을 맺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랍을 독립시켜 주겠다는 그의 꿈이 날아가 버린 것이죠.
전쟁이 끝나고, 로렌스가 아라비아를 떠날 때, 그의 몸에는 9군데의 총상, 33번의 골절상 등으로 상처투성이었지만, 정작 그를 괴롭힌 것은, 이권앞에서는 약속도 저버리는 제국주의 강대국의 탐욕이었습니다.
그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했고, 1921년 아랍문제 고문으로서, 아라비아의 독립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중동정책 및 전후의 처리 문제에 불만을 품고, 1922년 고문직을 사임했습니다.
그 뒤 가명으로 영국 전차대 및 공군의 병사로 복무하다가 1935년에 제대한 로렌스는 1935년 5월 19일,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 이상을 꿈꿨던 몽상가와 제국주의의 영웅이라는 평가 사이에서 ]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20세기 가장 특별한 괴짜이자 영웅이었습니다. 그의 영웅적인 행위는 결국 제국주의에 이바지하고 말았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이상을 꿈꾼 몽상의 결과였죠.
그의 회고록 <지혜의 일곱 기둥>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지만, 그 회고록은 자신이 결코 영웅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도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것은 아랍 운동의 역사가 아니라, 그 운동에 참여했던 나의 역사이다. 일상생활과 사소한 사건들과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어떤 교훈도 담겨 있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 만한 놀라운 폭로도 없다.”
그랬습니다. 이렇듯 그는 자기 자신의 업적에 대해 사실상 냉소적이었습니다.
*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그러나 그가 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었으며 그의 내면에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예전의 로렌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지만, 그는 다시 제국주의 군대에 입대하여 식민지 인도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래도 ‘아라비아의 로렌스’ 신화가 날조되었다는 주장은 과합니다. 그러나 아랍 독립전쟁에서 로렌스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된 면은 있습니다. 서구 중심의 역사관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었죠.
로렌스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랍의 혁명을 이끌어낸 주체는 당연히 아랍인이었습니다. 조력자였다 해서 영웅이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겁니다. 로렌스의 뜻은 고귀했고, 그는 괴짜였지만, 아니 괴짜였기에 영웅이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