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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기가(正氣歌)의 해설
춘산명세(春山明世, 하루야마 아키요)124)
근대의 유학자가 평론과 고증에 비중을 두고 심술(心術) 의리(義理)를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는 것은식자(識者)들이 가장 통탄하는 바이다. 말하자면 전시하의 사기앙양을 절규하는 오늘날에 있어서 국민
124) 이명세(李明世)의 창씨명.
이 읽어야 할 서책도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원래 충군(忠君)애국(愛國)을 위하여 몸 바쳐서 강개(慷慨) 열렬한 정신을 함양하는 데는, 항상 충신열사의 유적을 대상으로 하여 그 불굴불효의 기백을 체득하는 것이 가장 첩경이라고 믿으며, 이 정기(正氣)의 노래를 시국 하에 필독의 서책으로 추장(推獎)하고자 한다.
정기(正氣)의 노래는 송(宋)나라 문천상(文天祥)의 창작을 기원으로 하고, 우리나라의 명유(名儒) 후지타 토오코(藤田東湖),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의 여러 선생이 이것을 모방하여 제작한 것이나, 모두천지(天地)로부터 사람에게 품부(稟賦)된 소위 호연의기(浩然之氣)를 중심으로 해서 충신열사의 강의(剛毅) 과감한 정신을 발양(發揚)한 점은 마찬가지이며, 제가 학문이 얕음으로써 해설의 붓을 드는 것은 극히 외람 되는 것이나, 선배대가의 평가를 받기 위하여, 또한 문교보국(文敎報國)의 만의 일이라도 하기 위한 어리석은 충정(衷情)에서 발의(發意)하는 바이다.
제1편 문천상(文天祥), 정기(正氣)의 노래(歌)
天地有正氣 雜然賦流形 下則爲河嶽 上則爲日星 於人曰浩然 沛乎塞蒼溟 皇路當淸夷 含和吐明庭 時窮節乃見 一一垂丹靑
<해설>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의 정기가 있으며, 그 기라는 것은 매우 공명정대해서 만물에게 분포되고 있다.
아래에는 강이나 산이 있으며, 위에는 해나 별이 있다. 사람에게 천부로 주어진 것은 특히 이것을 호연의 기라고 하는 것이다. 이 호연지기는 엄청나게 우주 사이에 가득 채워져 있다.
왕도가 청평(淸平)125)해서 세상이 잘 다스려 질 때는 화기(和氣)가 되어 성명(聖明)한 조정이 발휘되고, 만약에 시운
(時運)이 쇠퇴해서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충신열사의 기백이 나타나며 하나하나 역사상에 불멸의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在齊太史簡, 在晉董狐筆, 在秦張良椎, 在漢蘇武節, 爲嚴將軍頭 爲顔常山舌
<해설>
태사(太史)는 국사(國史)를 기록하는 관청 명으로, 간(簡)은 서책인 것이다. 춘
추시대에 제(齊)나라의 장공(莊公)이 그 신하 최서(崔抒)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을 그때의 태사가 “崔抒弑其君”이라고 정직하게 기록했다.
서(抒)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기록한 것을 분개해서 태사를 죽였으나 태사의 아우가 이어서 그 사실을 기록하여 또 죽임을 당하여 그 다음의 아우 또 이어서 기록했으나 이번에는 서(抒)도 그 사가(史家)의 책임감이 강한 것을 경복(敬服)해서 용서했다는 것이다.
동호(董狐)는 진(晉)나라의 태사였었다. 진의 영공(靈公)은 군덕(君德)이 없어 그의 신하 조순(趙盾)을 죽이려고 함으로써 순(盾)이 달아났다. 그 뒤 순(盾)의 친척인 조천(趙穿)이 영공을 죽이고 순을 맞이했으나, 순이 성공(成公)을 세우고 스스로 국정을 잡게 되었다. 그때의 태사 동호가 “趙盾弑其君”이라고 기록했다.
그러자 순은 “임금을 죽인 것은 천(穿)이며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부정하는데 대하여 호
125) 세상이 조용하고 정치가 잘 되고 있는 것.
(狐)는 “子爲正卿亡不越境, 反不討賊, 非子而誰”라고 문책했다.
장량(張良)은 그의 선조부터 한(韓)나라를 섬기며 재상이 되고 있었으며 진(秦)의 시황이 한(韓)을 멸망시키자, 양(良)은 한(韓)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시황이 동쪽을 순회할 기회에, 창해(滄海)의 역사(力士)로 하여금 무게 20근의 철퇴(鐵槌)를 가지고 시황을 치려고 했으나, 잘 못되어 부차(副車)에 떨어져 그의 소망을 이룰 수 없었으나, 그 뒤 한(漢)의 고조(高祖)를 따라서 드디어 진(秦)을 멸망시켰다.
소무(蘇武)는 한(漢) 무제(武帝)의 사신으로서 절(節)126)을 가지고 흉노(匈奴)나라에 갔었다, 흉노의 주인이 무(武)를 항복시키고자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했으나, 무(武)가 이에 굴복하지 않자, 북해(北海)에 10여 년간 유폐하였으며 온갖 신산(辛酸)을 핥고 있었으나, 한(漢)의 소(昭)가 제위(帝位)에 취임하자, 겨우 돌아 올 수가 있었다. 갈 때는 강장(强壯)했으나, 돌아올 때는 빈발(鬢髮)127)이 하얗게 되어있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 한(漢)의 유비(劉備)가 파군(巴郡)을 습격하여, 태수 엄안(嚴顔)을 생포했다.
한(漢)나라 장군 장비(張飛)가 꾸짖으며 “항복하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엄안이 말하기를, “汝等無道侵奪我州 我州但有斷頭將軍無降將軍”이라고 하며 거절했다.
장비는 크게 화를 내며 머리를 자르려고 했더니 “머리를 자르려면 금세 베라”고 하며 태연자약하고 있음으로써, 장비는 이것을 장하다고 하며 석방했다.
진(晉)의 혜제(惠帝)가 반역자 성도왕(成都王)을 정벌하러 갈 때, 시중(侍中)128) 연소(衍紹)에게 수행을 명령했다.
어떤 자가 소(紹)에게 말하기를 가라사대 “지금 가는 것은 안위(安危)를 짐작하기 어렵다.
좋은 말을 갖고 있는가.” 시중은 의연(毅然)하게 “신하가 폐하의 가마를 따라서 호위하는 것은 생사를 돌볼 까닭이 없다. 좋은 말이 있은들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라고 말하며, 조복(朝服)을 입은 채로 황제의 수레를 타고, 적의 화살을 맞으면서 몸으로써 황제를 지키며 순절(殉節)했다, 시중의 피가 황제 옷에 범벅이 된 것을 주위에서 씻자고 하니, 황제는 그 충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시중의 피를 씻지 말라”라고 거절했다.
당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장순(張巡)이 휴양(睢陽)의 외딴 성을 죽음으로 지키기에 온갖 고생을 했다. 끝내 함락되어 적에게 생포가 되었다. 적장이 “너는 독전(督戰)의 호령을 걸 때, 모두 찢어져서 얼굴이 피투성이며, 이(齒)를 갈아서 모두 깨트렸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느냐.”라고 물었다, 순(巡)이 대답하며 가라사대 “내가 마음먹은 역적을 삼킬 담력이 없을 뿐”이라고 하니까, 적장은 화가 나서 칼로 이것을 도려내고 보아하건대 남은 이는 겨우 3, 4개에 지나지 않았다. 순(巡)은 더욱이 “우리 임금과 아버지를 위하여 죽을 뿐이다, 적에게 붙는 너는 즉 개똥인 것이다, 오래도록 편하기를 바랄쏘냐.”고 장언(壯言)을 하며 끝내 굴하지 않았다.
당나라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상산(常山) 태수 안고(顔杲)경(卿)이 적과 고전 끝에 드디어 성이 락되고 생포되었다.
고(杲) 경이 녹산을 나무라며 가라사대 “천자가 너를 발탁하여 3도의 절도사로 삼은 것은, 참으로 영광이었는데 왜 폐하를 배반했는가, 우리 대대로 당조(唐朝)의 신하로, 녹과 지위가 모두 당나라의 것이다. 내가 어찌하여 너를 따라서 폐하를 배반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나라를 위하여
126) 절이란 깃발을 말함-원문.
127) 귀 밑털과 머리털.
128) 侍從官.
적을 치고, 너를 베지 못함을 한으로 삼는다, 왜 속히 나를 죽이지 않는가.”라고 입을 모아서 나무랐다,
녹산은 크게 화내며 고(杲) 경을 묶고 그의 살을 도려냈으나 고경은 죽음에 이르러서도 입은 더욱 나무람을 그치지 않았음으로 적은 드디어 그의 혀를 갈퀴로 끄집어 낸 사실이 있는 것이다.
或爲遼東帽淸操厲氷雪 或爲出師表鬼神泣壯烈 或爲渡江楫慷慨呑胡羯 或爲擊敵笏逆堅頭破裂,
<해설>
요동모(遼東帽)라고 하는 것은, 한(漢)나라 말(末) 관녕(管寧)이 난을 피해서 요동에 있으며, 시서(詩書)를 음영(吟詠)하여 도덕을 닦음으로써 한(漢)나라 신하인 절(節)을 다하고, 항상 검은 색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빙설(氷雪)보다도 독하다고 평을 한 것은, 즉 인격이 고결했다는 것이다.
출사표는 한(漢)의 제갈공명이 위(魏)의 조비(曺丕)를 토벌하기 위하여 출정할 때, 뒤를 이은 임금에게 주상(奏上), 군주에게 받친 문장인 것이다. 그 글 뜻은 충직하고 간곡함을 다하고, 귀신이라고 하더라도 그 장렬함을 느껴서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진(晉)의 의사(義士) 조적(祖逖)이 적(賊) 석륵(石勒)을 치고자 강을 건너서 즙(楫)을 치면서 마음속에 굳게 맹세하며 가라사대 “중원을 맑히지 않으면 복구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기(士氣)를 진흥한 사실이 있다.
(호갈(胡羯129))은 북방의 이족(夷族)을 말한다. 즉 석륵을 일컬은 것이다.)
당나라 덕종(德宗) 때 주체(朱泚)가 반란을 일으켜 대중을 이끌고 스스로를 임금이라고 말하고자 논의 했는데, 때마침 단수실(段秀實)이 결연하게 일어나서, 체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광적(狂賊), 내가 너를 베고 만단(萬段)을 기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라고 나무라며, 손에 잡고 있던 홀(笏)(홀이란신사가 쥐는 ‘주걱’을 말한다.)로 체의 이마를 쳐서, 선혈이 땅에 쏟아지며 수실(秀實)은 그 자리에서 죽게 된 사실인 것이다.
是其所磅碍 凜烈萬古存, 當其貰日月 生死安足論, 地維預以立, 天柱賴以尊, 三綱實繫命, 道義爲之根
<해설>
이러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충만한 곳은, 늠열(凜烈)130)해서 불멸(不滅)불후(不朽)인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정기(正氣)가 강성(强盛)을 발(發)함으로써 해와 달을 꿰뚫듯 하는 경우에는 생사를 논할 것도 없는 것이다,
땅을 유지하는 줄(綱)도 하늘을 지탱하는 기둥도, 정기에 의해서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군신, 부자, 부부의 삼강도, 실로 이 정기에 의하여 있는 것이며, 원래 정기의 진상은 다른 것이 아니며, 정기의 근본은 즉 오로지 이것이 도의(道義)인 것이다. (방애(磅碍)는 넓게 길을 막는 것)131)
嗟予遘陽九, 隸也實不力, 楚囚纓其冠, 傅車送窮北 鼎鑊甘如飴, 求之不可得, 陰房閱鬼火, 春園閱天黑
<해설>
아아! 내가 위난을 만나서, 군국을 위하여 노력하는 바도 없고, 죽어서도 더욱 여죄가 있다는 것을
129) 오랑캐.
130) 몹시 한기가 드는 모양.
131) 원문에 있는 내용임. 이하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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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있다, 만약에 적들의 손에 잡힐지라도, 군국의 일은 잊지 않고 신이 된 절개는 중히 여기고 있다,이제야 역마차에 실려서 극북(極北)으로 실려 갔다. 정확(鼎鑊)에 삶아 지는 것은 아무런 고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달기가 엿과 같은 것이다. 저는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으며, 옥사에서 죽은 사람의 영화(靈火)는 외롭게, 봄 햇빛이 방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워서 기분이나쁘다.
(양구(陽九)는 액운을 말하며, 靈寶天地運度經에 天厄謂之陽九地虧謂之百六이라는 문구로부터
나온 이야기다.) (예(隸)는 노예의 뜻으로 스스로를 비하(卑下)해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전국책(戰國策)에 楚公子微服過宋, 門者難之, 其僕操箠而罵曰隸也不力, 門者出之라고 하는 문구로부터 나온이야기다.) (초수(楚囚)는 초나라의 죄수를 말하며, 초의 종의(鍾儀)가 진(晉)나라의 포로로서 유폐되었을 때, 남쪽의 관(冠) 즉 초나라의 의관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있다.) (정확(鼎鑊)은 커다란 솥으로 죄인을 삶는 형틀이다.)
牛驥同一皁, 雞柶鳳凰食, 一朝蒙霧露, 分作溝中瘠, 如此再寒暑, 百袗自辟易, 哀哉沮洳場, 爲我安樂國.
<해설>
내가 지금 사로잡혀서 이 흙방에 있는 것은 마치 천리마가 소와 그릇을 함께하고, 봉황이 닭 집에서 키워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내가 하루아침에 병을 얻으면 원래 시궁창에서 여위는 것을 각오하고, 추호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나는 이와 같이 하여 추위와 더위를 지내기를 두 해, 악기(惡氣)와 재앙이 스스로 놀라 두려워해서 감히 나를 해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습지에서 내가 안락원(安樂園)을 삼는 심정은 불쌍한 것이다. (조(皁)는 여물통, 몽무로(蒙霧露)는 병이드는 것, 구중척(溝中瘠)은 개죽음 하는 것, 백진(百袗)은 여러 가지 악기(惡氣), 저여장(沮洳場)은 물이 침투하는 곳 벽역(辟易)은 놀라서 물러나는 것)
豈有他繑巧, 陰陽不能賊, 顧此耿耿在, 仰觀浮雲白, 悠悠我心憂, 蒼天葛有極, 哲人日己遠, 典型在夙昔,風簷展書讀, 古道照眼色.
<해설>
내가 이 옥사에 있어서 2년을 잘 넘겼으나, 이것은 굳이 다른 교묘한 수단이 있은 것은 아니었다.
기후도 적 못지않은 내 신세여, 되돌아보면서 이 기구한 현상을 생각하면, 실로 적적한 정기가 있음을자랑 삼지 않을 수 없다. 우러러 뜬 구름이 흰 것을 봄으로써 즐겁게 지내고 있다.
그러나 유유(悠悠)한 내 마음의 걱정은, 실로 푸른 하늘에 끝이 없는 것 같다.
오호라! 성현들은 가고, 이미 긴 세월이 지났다, 그래도 사람이 취해야 할 법은, 밟아야 할 길은 어제와 같이 가까이 있는 것이다.
처마 끝에서 책을 열고 읽으면, 철인의 길은 명백하게 내 얼굴을 비치는 것을 느낀다.(교교(繑巧)는 면밀해서 교묘한 것,
적적(耿耿)은 명백한 것)
<출전 : 春山明世, 「正氣歌の解說」, '儒道' 제6호, 朝鮮儒道聯合會, 1944년 4월 1일, 63~68쪽>
3) 박상준(朴相駿)
(1) 적개심의 앙양(권두언)
회장 박택상준(朴澤相駿, 호우사와)
적개심의 앙양에 관해서는 이전부터 무척 누누이 강조되어 왔다.
현재 먹느냐 먹히느냐의 일대결전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당면한 적에 대하여, 이제 새삼스럽게 적개심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무척 정신이 빠진 이야기가 되지만, 포로들을 보고서 “불쌍하게도”라고 하는 잘못된 동정을 주는 자가 가령 일부
에라도 있다면, 아직도 적개심의 앙양이 국민전부에 파급되지 않고 있는 증좌인 것이다.
빛나는 커다란 대 전과 덕택으로 조금 기분에 여유가 생긴 탓이겠지만, 다년간에 걸쳐서 수단을 바꾸고 물질을 바꾸는 적의 문화적인 모략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안으로 배양된 미영사상의 잔재가 아직도 속에 배어서 미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지는 않을까.
미국은 이제야 그 세계 제일을 장담하는 물자력과 생산력을 최고도에 발휘하여, 오고야 말 대 생산전쟁, 대 소모전쟁에 승리하고자 기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적개심을 가장 깊숙하게, 가장 강하게 몰고 가서 증오와 복수의 정신전에서도 승리를 차지하고자 열심히 획책 중인 것이다.
이러한 때를 맞이하여, 적국의 정체를 똑바로 보지 않고, 미국은 물질만능으로 타락한 국민임으로, 도저히 장기전이
나 섬멸전의 곤궁과 결핍에는 견딜 수 있는 자가 아니며, 결국은 전쟁 도중에서 국내의 인심이 동요를가져와서, 루즈벨트 일파의 인기도 실추하여, 드디어 이것을 내던질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에 빠지는자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사고방식은 단순히 자기만족론일 뿐만 아니라, 매우 무서운 적국의 모략에 걸려들 우려가 다분히 있을 뿐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적보다 몇 배의 적개심을 앙양할것을 역설하고, 1억 국민의 몸 부딪힘으로 이번 성전을 이겨내야 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
전쟁 전까지 일본에 있었던 미국대사 그루는, 귀국 후에 열심히 강연 행각을 하면서, 일본내부의 결속이 강함을 이야기하며, 항상 미국 국민의 자기만족적인 낙관을 주의하고 있는데, 지난 3월 어떤 만찬회의 석상에서의 연설 중에도,
“현재의 총력전에서는 전선과 후방의 구별도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의 희생과 헌신이 있을 뿐인 것이다.
독일인은 미국인의 퇴폐를 당연시하고 있고, 일본인은 미국인을 전쟁의 중압에 견디지 못하는 국민으로 간주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야 적의 공격의 정면에 서 있는 것이다. 국민의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시간 벌기의 군인이라거나, 임시 애국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미국 사람의 경계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면에 우리의 미영에 대한 적개심은 과연 어떠한가.
심한 자들은 아직도 미영적인 잔재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나라를 통틀어 먹느냐 먹히느냐의 일대 결전의 한 가운데서, 그러한 국민이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본국민으로서 일본국민이 아닌것이다.
전선의 장병이 천황의 방패로서 혀에서 불을 뿜으면서 사투를 계속하고 있는 오늘날, 조용히 후방국민의 적개심을 볼 때에, 참으로 한심한 느낌이 든다. 이러한 점이 하나도 남김없이 전 국민에게 지금 조금이라도 적개심을 불타오르게 하라는 절규를 하는 사유인 것이다.
◇
태평양 5천 마일의 일본으로부터, 과거의 인상이나 감상으로써 미국을 논한다면, 혹시 미국 사람은전쟁의 중압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국민이라거나, 혹은 총력전에 전력을 집중 할 수 없는 국민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나, 현재 미국에 넘치고 있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라고 하는 것은 훨씬 우리의 상상이상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적국으로부터 교환선에 의하여 귀국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도, 미국의 일본에 대한 증오와 적의(敵意)가 심각한 것은, 일본인이 미국에 대한 그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또 심각한 것이라는 것도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패전(敗戰) 3년을 맞이한 미국은 이제야 불타는 것처럼 적개심의 앙양에 의하여 오고야 말 1944년의 대 반공(反攻)을 달성하고자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시국은, 비단양말을 잃은 미국 부인들이 전쟁을 반대했다거나, 크리스마스 경기에 들떠서 미국 국민의 전쟁 기분이 엷어졌다고 하는 것과 같은 흥미본위의 기사를 재미있고 우습게 읽고있을 시대는 아니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화(烈火)와 같이 불타는 적개심을 강조하고 넘치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미국의 내년도(금년 7월부터 내년 6월까지) 예산액은 지난번에 양원에서 1천9십억 불, 이 안에 군사비는 1천억 불이라고 루즈벨트는 발표했다. 바로 천문학적인 방대한 예산으로서, 그들의 계산에 의하면 이러한 전비(戰費)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교전국의 전비를 전부 합친 합계보다도 훨씬 많은 액수라고말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 군수품의 생산은 금년 말까지에 18만5천 대의 비행기, 십2만 대의 탱크, 5만5천 대의 고사포, 천백만 톤의 선박을 건조하고, 이런 것에 의하여 지구상으로부터 일본을 말살하고자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방대한 예산과 강대한 군수품 생산량에 반드시 현기증을 내는 것이 아니나, 아무튼 미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방대한 군수생산공장이 각지에 신설된 것도 사실인 만큼, 그들이 발표한 천문학적이고 거대한 숫자가 과연 실현되자 마자는 별개로 하고, 그 생산능력의 심상치 않음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결전은 오늘도 또 내일도, 여기는 유빙(流氷)이 가로막는 아류샨 군도로부터, 남쪽으로는 불타는 듯한 솔로몬 군도의 끝까지, 넓기로 수만 마일의 바다에 육지에 하늘로 전개되고 있으나, 적이 호언하고 있는 대 반공(反攻)이 드디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으로, 국민의 전의앙양은 현재의 급선무인 것이다.
◇
대동아전쟁 발발 이래, 계속되는 패전에 이전에는 미국도 무척이나 의기소침 한 일이 있으나, 현재는 점차로 냉정을 되찾아 전쟁 지도방침도 세월의 경과와 더불어 점차로 자주적인 방책을 수립했다.
즉 전쟁목적을 민주주의 방위를 위하여 싸우고 또는 자유를 위하여 싸운다고 하는 한편, 그 지도방침에있어서도, 중경(重慶)132)을 채찍질해서 일본을, 소련을 고무(鼓舞)해서 독일과 이태리를 각각 견제시킴으로써 추축(樞軸) 측의 전력을 소모시켜서 전쟁을 장기화하고 지구전으로 이끌어가서, 그러는 사이에 다른 나라에 극도의 희생을 요구하고, 자국은 소위 데모크라시의 병기창으로서 후방병참의 임무를 부담하여, 병기와 자재를 팔아서 커다란 이익을 차지하며, 전후에도 착취를 계속하여 전 세계로 하여금 미국화 시키고자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사람 중에는 미국을 위하여, 혹은 루즈벨트를 위하여 한 생명을 바치겠다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을지 모르나, 세계 제일이라고 자칭하는 물질적인 번영과 생활적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국민을 통틀어서 미국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는 충분히 넘치고 있는 것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루즈벨트의 소위 “생존전쟁”이라는 것도 필경은 고매한 전쟁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며,“만약에 이 전쟁에 진다고 한다면, 오늘날 세계 제일을 자랑하는 미국의 생활도 행복도 한꺼번에 잃으며, 또다시 이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수백 년이 필요할 것이야”라고 위협해서 국민의 현실적인 이익과 타산을 선동해 온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패전 1년 반의 미국은 이룰 수 있을 것인지 이미 휘발유를 비롯하여 중요물자의 통제가 실시되어 자동차, 전기축음기 등 미국식 생활의 필수품은 그 모든 것이 작년 봄부터 제조금지가 되어, 현실적으로 차분히 그 위기를 신변 가까이에 체험한 국민은 지금 와서는 역효과적으로 “더 본격적으로 하지 않으면 미국문명은 원금도 이자도 놓치고 말 것이다.”라고 선동되어서, 더욱 더 전의의 앙양에 박차를 걸고 있는 현 실정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미국은 이미 벌써 동아 신질서의 건설을 방해할 것이라고 말한 간단한 것이 아니며, 추축국 타도, 특히 동양으로부터 일본을 말살하여, 이것에 의하여 미국 세계정복의 야망을 달성하고자 필사적으로 적개심의 앙양강조에 힘쓰고 있는 것이다.
◇
결국은 이 나라를 통틀어서 일대 결전도, 그 전쟁터가 만리 파도를 넘은 해외에 있기 때문에, 한 발의 폭탄도, 한 발의 포성도 우리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후방의 국민을 자극하여 흥분시키고 일어나게 하지 않음은 일본 나라의 고마움이지만, 한 편으로 볼 때는 국민들의 적개심 앙양 상 몹시유감으로 여기는 바인 것이다.
고금의 역사를 펼쳐 볼 때에도 전쟁은 항상 의지와 의지와의 싸움이며,결국은 마지막까지 전의(戰意)가 왕성했던 쪽이 최후의 승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적국이 호언하는 대 반공시기를 눈앞에 맞이하는데 이르렀으며, 더욱 더 한 층전의의 앙양과 적개심의 강조를 희구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5월 1일 씀)
<출전 : 朴澤相駿(會長), 「敵愾心の昻揚」(卷頭言), '儒道' 제4호, 朝鮮儒道聯合會, 1943년 8월 1일, 1~4쪽>
4. 조선유도연합회의 활동, 기타
1) '유도(儒道)'의 본회기사 및 지방기사 발췌(1942~1944)
(1) '유도' 1호, 본회기사
1. 본회창립부터 현재까지의 경과개요
1939년 10월 16일 제 1회 전선(全鮮) 유림대회의 결의를 토대로 본회를 창립해 총재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郞) 각하를 추대하고 회장으로는 경학원(經學院) 대제학 자작 윤덕영(尹德榮) 각하가 취임해 간부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본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직망을 완비할 필요가 있다고 인식, 오 무라총재의 지도 하에 윤회장이 몸소 각 도(道)로 출장을 나가 각 도의 유도연합회를 차차 결성하고, 도유도연합회의 하부조직으로서 부군도(府郡島)에 부군도유도회를 조직하여 1939년 중에 강원도를 제외한 지방조직을 완료하였다.
1940년 10월 17일 윤회장이 병으로 서거하셔서 그 후임으로 같은 해 11월 14일 현 회장 박택상준(朴澤相駿) 각하를 맞이하였다.
또한 임원 가운데 부회장 민병석(閔丙奭) 각하는 서거, 하야미 히로시(速水滉) 각하는 내지로 전출되어 결원이 생긴 자리에 1939년 11월 23일 임무수(林茂樹), 유만겸량(兪萬兼兩) 각하가 후임으로 오셨다.
그리고 총무부장 이가원보(李家源甫) 씨가 전북지사로 영전되어 그 후 임으로 1940년 9월 24일 현 총무부장 계광순(桂珖淳) 씨가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사업개요
1) 본회 회원명부 작성
회원명부는 단지 회원의 이름을 기록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회의 창립취지를 □□하고 그것을 철저히 실행할 것을 맹세하는 서약으로, 이것이 완성되면 대성전(大成殿)에 봉고제(奉告祭)를 올리고 차후 가제(加除)해가면서 영구보존하기 위해 현재 조사 중이다.
2) 시국강연회
1940년 말에 박택 회장이 몸소 진두에 나서서 생활개선, 시난(時難) 극복을 목적으로 경성 외 기타 주요도시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여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3) 강습회
1941년 4월 15일 춘계석전(釋奠)제를 기회로 신임경학원강사 및 평의원을 집합하여 3일 동안 경학원명륜당에서 각 방면의 명사를 초빙해 시국인식에 대한 강연강습회를 열 고, 곧 이어서 이 강습을 받은강사 및 평의원을 각 도(道)로 파견하여 각 부 군(府郡)을 순회하며 시국강연회를 개최했는데 각 부군에서도 이에 협력하여 매번 많은 청중이 모였으며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4) 전 조선유림대회
1941년 10월 15일 전선유림대표는 추계석전제에 참석하여 같은 날 오후 3시부터 경회루에서 열린 총독초청연회에 출석하고, 5시부터 조선신궁에서 전몰영령의 명복 및 황국장병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를 거행하였으며, 다음 날인 16일 오전 10시부터경성부민관 대강당에서 아래의 식순(式順)에 따라 대회를 개최하였다.
- 식순 -
(1) 일동착석 (2) 개회사 (3) 궁성요배(宮城遙拜) (4) 묵도 (5) 국가합창 (6) 국민정신진흥에관한 초서봉독(招書奉讀)
(7) 회장 식사 (8) 조선총독 고사(告辭) (9) 본회총재 고사 (10) 축사(조선군사령관, 국민총력연맹사무국 과장)
(11) 선서 및 황군위문문결의 (12) 본회의 회무(會務)보고 (13) 황국신민의 서사제창(誓詞齊唱) (14) 휴식(15)
□사 (16) 의견희망□□ (17) 만세삼창 (18) 폐회사
폐회식에 이어 경성제국대학교수 오타카(尾高□雄) 씨의 강연에서 시국영화 상연회를 개최하였다.
(2) '유도' 3호, 본회기사·지방기사
본회기사
1. 본회 주최 제2회 성지참배단을 조직하여 본회 교육부장 안인식(安寅植)을 단장(團長)으로 해서, 본회 참사(參事) 평산태인(平山泰仁), 화강탁(花岡卓) 및 각 도 유림대표 12명(황해도결원)이 11월 10일 내지를 향해 출발했다.
- 단원이름 -
경기 : 대야 번(大野繁)/ 충북 : 목촌로택(木村魯澤)/ 충남 : 안명원(安銘遠)/ 전북 : 죽산일랑(竹山一郞)/ 전남 : 옥강신길(玉岡新吉)/ 경북 : 대원국영(大原國永)/ 경남 : 대전일부(大田一夫)/ 황해 : 결원(缺員)/ 평남 : 국본안언(國本安彦)/
평북 : 금촌길수(金村吉穗)/ 강원 : 오천의수(烏川義秀)/ 함남 : 청원헌교(淸原憲敎)/ 함북 : 길본영부(吉本榮夫)
2. 각 도 유림의 적성(赤誠)133)으로 마련해 육해군에 헌납한 군용기자금 십 만 삼천 원으로 유림호(儒林號) 군용기가 완성되어, 11월 17일 용산 훈련장에서 다수의 군관민(軍官民)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헌납식을 거행했다.
3. 본회 총무부장 계광순 씨가 강원도 참여관(參與官)으로 영전되어 부장직을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연성(鍊成)과장 죽내준평(竹內俊平) 씨가 11월 26일 취임했다.
133)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
4. 성지순배단 일행은 예정대로 각 지의 신궁신사 참배 및 고적(古蹟)견학을 마치고 11월 29일 무사히 귀국하여 부산에서 해산했다.
5. 전부터 모집하여 심사한 징병제실시축하 한시첩(漢詩帖)편성을 완료하여 각 작자(作者) 및 주요군관민 기관에 배부했다.
지방기사
1. 함경남도 홍원군 유도회총회와 홍원군 유도회 읍면지부 결성식을 10월 15일 오후 1시부터 홍원향교 명륜당에서 개최하였다. 각 읍면대표 유림 250여 명과 관공서 직원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이토 노리유키(伊東範行) 군수가 회장에 취임하였고 성대하면서도 정숙하게 식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식후에는본회에서 파견된 하루야마(春山) 상무이사가 ‘시국하의 유림의 책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한 후 오후 5시에 해산했다.
2. 경상북도 유림연합회총회를 11월 26일 오후 1시부터 도청회의실에서 개최했다.
도내 각 군 유림대표 97명과 관공서 직원 다수가 참석하고, 본회에서는 박택 회장, 이 편찬부장, 안(安) 교육부장이 오셔
서 성황리에 총회를 마쳤다. 또한 식후 안인식 씨의 강연 및 시국영화회 등이 있었고, 밤에는 다카오(高尾) 지사가 박택 회장 일행을 현해로 초대해 간담을 가졌다.
3. 충북청도 진천군 유도회총회가 11월 25일 오후 1시부터 진천국민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군내유림500여 명과 군내 각 관공서 직원 다수가 참여하였고, 도(道)에서 히라마츠(平松) 지사, 본회에서는 박택회장대리로 이경식 편찬부장과 춘산 상무이사 등이 참석해, 안원 유도회장 사회로 식을 진행하였다.
히라마츠 도연합회장의 논어해설을 통한 고사(告辭)는 일반 유림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으며, 폐회식 후 하루야마 이사가 강연을 하고 모임을 마쳤다.
(3) '유도' 4호, 본회기사·지방기사
본회기사
▲ 1942년
1. 12월 14일 오전 11시부터 본정(本町)134)청향원에서 간부회를 개최하여 중요사무를 논의했다.
2. 12월 5일 본부촉탁 마츠하시 키요시(松橋喜代) 씨가 본회 상임이사로 취임했다.
▲ 1943년
1. 2월 19일 명륜전문학교 부교장 시라가미 히사요시(白神壽吉) 씨가 본회 상임이사로 취임했다.
2. 2월 22일 오후 2시부터 경학원에서 간부회를 개최하여 중요사무에 관련된 논의를 했다.
3. 3월 22일 오전 10시부터 명륜당에서 유학(儒學)연구소 수료식을 거행했으며 수료명단은 아래와 같
134) 명동.
다(출석부 순).
양천철주(梁川徹主), 곤산세영(壼山世榮), 유천광위문(柳川光衛門), 금천기팔(金川基八), 안촌병순(安村炳珣),
금전정구(金田庭龜), 신본태신(新本泰信), 금산호성(金山豪成), 조본중화(趙本重和), 금해정수(金海正洙), 송이홍본(松而洪本), 영평□용(鈴平□容), 신천재기(信川在機), 금성무길(金城武吉), 최원재갑(崔原在甲), 덕산조광(德山朝光), 서원제규(瑞源濟奎), 서논언(徐論漹). 안덕원(安悳遠) (이상 19명)
4. 4월 10일 오후 4시부터 부민관강당에서 금계(金鷄)학원장 안강정독(安岡正篤) 씨를 초청해 ‘시대와 유교’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개최, 교육계인사 600여 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5. 4월 13일 오후 5시부터 부민관담화실에서 간부회를 열어 1943년도 예산안을 심의했다.
6. 5월 8일 본회 상임이사 산본권일랑(山本權一郞) 씨가 병으로 서거하셨다. 이에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
지방기사
1. 강릉군 유도회총회
5월 22일 강릉군 유도회총회를 강릉문묘(江陵文廟)에서 개최, 군내의 유림 500여 명이 참석해 키야마(木山) 회장의 사회로 국민의례를 행한 후 아래의 사항을 협의하고 이어서 경학원부제학 공성학(孔聖學) 씨와 본회 상무이사 하루야마 아키요(春山明世) 씨의 강연이 있었다.
- 협의사항 -
1) 국어보급 강화의 건
조선징병제실시에 맞추어 국어가 불가능한 유림층에 대한 응급처지로 작년 9월부터 향교를 중심으로 국어강습회를 개최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으나 앞으로 더욱 보급될 수 있도록 도모할 것.
2) 황도유학 연구에 관한 건
매월 15일 정례적으로 문묘를 중심으로 한 황도유학연구회를 개최할 것.
(1) 국체본의(國體本義) 연구
(2) 내선동원(內鮮同源) 역사와 국민예법 연구
(3) 경전 및 문예 연구
(4) 칙제(勅題)135)영진(詠進) 연구
(5) 유도잡지 종람(縱覽)136)
3) 연성(鍊成)과 근로에 관한 건
종래의 유림층은 유의도식(遊衣徒食)하는 게 전부였다. 그 결과 건강운동이 결여된경향이 있었기에 금후 연성 및 근로정신을 앙양하는 데 일조하고자 아래의 사항을 실시하니 솔선수범할 것.
(1) 농민의 날을 기회로 문묘제전삽앙(文廟齊田揷抰)137)을 실시할 것.
135) 임금이 출제한 시문(詩文)의 제목.
136) 마음대로 봄.
(2) 문묘부근 읍면별로 유림연성반을 설치해 매월 1일 문묘경내정화 및 제내(齊內) 손질작업을 실시할 것.
4) 혼·장례개선에 관한 건
혼·장례는 전시생활체제 확립에 맞추어 보다 간소화할 필요가 있으니 아래의 사항을 실행하는 데힘쓸 것.
(1) 혼례식장은 향교강당으로 하고 최대한 간소화할 것.
(2) 경조(慶弔)를 이유로 빈번하게 왕래하는 일을 삼가고 조위(弔慰)도 영결식 당일 한번만 할 것.
2. 강릉군 유도회 주최 국어강습회
반도의 징병제실시에 감격한 강릉 유림들은 충량한 황민으로서 모범을 보이고자 작년 유도대회 때 당년 71세의 고령자인 옥강홍기(玉岡洪基) 씨의 제의에 따라 1942년 9월부터 강릉문묘에서 국어강습회를 개최했는데, 강습 수강생의 삼분의 이는 노년층으로 김진태 씨의 경우는 7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지팡이를 짚고 일리(一里)가 더 되는 거리를 통학하며 하루 하나의 단어를 익히고자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그 모습은 일반청소년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이미 수료한 자가 100명, 현재 수강하고 있는 사람이 65명으로 앞으로도 계속할 예정이며,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노년층 인사의 결의는 실로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강릉군 유림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3. 옥천군(沃川郡) 유림대회
5월 28일 옥천군 유림대회를 옥천 죽향국민학교에서 개최, 군내 유림대표 200여 명이 집합해 후쿠무라(福村) 회장의 사회로 국민의례를 실시하고 히라마츠(平松) 도지사의 고사가 있은 후 아래의 요망사항을 협의하고 독행자(篤行者)138) 및 효부절부(孝婦節婦) 표창식을 거행하였다. 이어서 명륜전문학교 교수 안인식(安寅植) 씨의 강연을 듣고 해산했다.
<요망사항>
1) 징병제실시와 해군 특별지원병제도실시의 취지 보급에 관한 건
2) 국어보급운동 촉진에 관한 건
3) 저축에 관한 건
4) 국민총력운동추진에 관한 건
5) 식량증산에 관한 건
<독행자 및 효자절부 표창수여자 업적>
1) 독행자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하본겸익(河本兼益)
위 사람은 온후하고 독실하며 자선심이 많아 농촌의 어려움을 동정해 삼천 여원이나 되는 수십 명
137) 삽앙 : 논에 볏모를 심는 일.
138) 인정이 두텁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해 일하는 사람.
의 빚을 탕감해주고 가마니 짜는 원료를 무료로 배부하였으며 소와 돼지를 구입해 무이자로 빌려주는 등 지방개량에 온 정성과 힘을 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나사변 이래로 시국인식, 생업보국, 국방헌금등을 철저하게 시행하고 각종 군수물자공출에 솔선수범을 보이며 부락 내에서 모든 장려사항에 대한 성적이 뛰어나기에 이 상을 수여한다.
2) 효부 -옥천군 군북면 지오리, 금본금례(金本今禮)
여사는 1913년 금본기홍(金本基弘)의 아내가 되어 부군을 도와 시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였고, 70세인 시아버지가 1931년 8월 이후 중풍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만 10년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쾌유를 빌었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1941년에 돌아가셨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간 정성을 다해 제사때에는 시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물을 구해 차리는 등, 그 기특한 효성이 부락민들의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기에 이 상을 수여한다.
3) 절부 -옥천군 안남면 오대리, 서전상주(西田上柱)
여사는 열다섯 살 때 조성복(曺聖福)의 아내가 되어 부군을 내조하여 가난한 가세를일으키며 시부모님을 정성껏 봉양하던 중, 불행하게도 열아홉 살 때 부군과 사별한 후 시부모님도 돌아가시자 예를다해 상을 치르고, 의지할 데 없던 여사는 조씨 집안을 위해 양자를 들여 가업을 이었다. 부군과 사별한후 54년간을 하루 같이 조씨 집안 재건을 위해 헌신하여 마을의 칭송이 자자하기에 이 상을 수여한다.
(4) '유도' 5호, 본회기사·지방기사
본회기사
1. 7월 4일 : 오후 4시부터 부민관 담화실에서 간부회를 개최하여 전부터 계획하여 초고(草稿)중인 유림지도용의 유림독본(가칭)을 발행하기로 결정하고 원고집필자 다카하시(高橋亨) 씨를 그 자리에 초빙하여 내용설명을 들은 후 회의를 마쳤다.
2. 8월 20일 : 각 도의 유림이 응모한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원사(元師)추도 한시 중 가작56수를 선발해 본지에 게재하여 원사의 숭고한 인격과 위대한 공적을 기념하기로 했다.
<군용기 조선유림호 헌납>
지난 1941년 10월 16일 제2회 전선유림대회 석상에서 ‘군용기구헌납에 관한 건’이 결의안으로 상정되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고 또한 같은 날 저녁에 각 도의 대표자가 회동하여 이것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책에 대해 협의를 끝낸 후, 각 도가 일제히 실행에 착수하여 1941년 12월까지 2개월 반이 채되기도 전에 별표(別表)와 같이 회원 각자의 애국지정의 결정(結晶)으로 총 144,769원 77전의 정재(淨財)가 모여, 동년 12월 30일 박택 본회장이 이백만 유림을 대표하여 일금 5만 3천 원을 비행기유림호1호 제작비로 조선군애국부를 통해 육군대신에게, 일금 5만원을 군용비행기제작자금으로 경성주재 해군무관부를 통해 해군대신에게 각각 헌납 수속을 마쳤고, 그 나머지 돈은 비행기헌납 명명식(命名式)비용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시국의 정황상, 이를 그만두고 절약하여 1942년 7월 9일 박택 본회장이 대표로서 금 1,830원(본회 일반경비 1원 57전을 더함)을 조선군애국부에 휼병(恤兵)139) 자금으로 헌금하면서 제 1회의 본건(本件)계획을 전부 달성하였다.
육군에 헌납한 전투기, 애국 제952호(조선유림호)는 제 일선에서 그 용자(勇姿)를 뽐내며 미·영을 격침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 전투기 조선유림호에 대한 해군대신의 감사장은 별도(別圖)와 같다.
지방기사
1. 6월 5일 오전 10시부터 경기도청에서 도내(道內)문묘 금속제기헌납 협의회를 개최, 도내 대표유림10여 명이 출석한 가운데(본회에서는 박택 회장, 이경식, 하루야마 아키요 참석) 도지사 대리 마츠모토 참여관이 취지를 설명하고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이경식, 요시가와 히사시(嘉川久士) 두 사람을 경기도 유림대표로 해군무관부로 파견하여 물품목록을 올리고 헌납수속을 했다.
1) 전라북도 유도연합총회를 6월 15일 오전 10시부터 전북도청 회의실에서 개최하였다. 각 부군(府郡)의 대표유림 480명과 관공서 직원 다수가 출석하였으며, 본회에서는 박택 회장, 하루야마 상무이사가 참석하여 가네무라(金村) 도(道)연합회장, 박택 본회장의 고사를 들은 후, 문묘제기 중 금속제품을헌납하는 일 등을 결의하고 이어서 하루야마 이사의 강연을 듣고 회의를 마쳤다.
2. 6월 18일 오전 11시부터 전라남도 유림대표협의회를 광산군청 회의실에서 개최하였다. 도내 각 부군의 문묘직원 및 장(掌)의 대표 각 한 명이 참석하였고 본회로부터는 박택 회장과 하루야마 상무이사가 참가하여, 무영(武永) 도연합회장과 박택 본회장의 고사를 들은 후 만장일치로 금속제 문묘제기를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이어서 하루야마 이사의 강연을 듣고 회의를 마쳤다.
1) 6월 25일 평북도청 회의실에서 평북유림 좌담회를 개최, 도내 대표유림 40명이 출석하고 도에서는 백석지사 이하 직원이 참석하였으며 본회에서는 와타나베(渡邊) 이사와 히라야마 참사가 참가하여유도진흥책에 대해 격의 없는 의견을 교환했다.
2) 6월 26일 평양부 공회당에서 평남 대표 유림 20명과 본회에서 온 도변 이사와 평산 참사가 모여좌담회를 열고 금속제기 회수와 기타 사항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3) 6월 30일 함북 경성문묘에서 대표유림 50명이 모여 도에서 온 미시마(三州) 내무부장, 본회에서온 유(兪) 부회장과 야스가와(安川) 참사와 함께 유도진흥에 관한 좌담회를 가졌다.
4) 7월 2일 함북 회령문묘에서 유림좌담회를 개최, 본회에서 유 부회장 및 야스가와 참사관이 참석했다.
5) 7월 3일 함북 길주문묘에서 유림좌담회를 개최, 본회에서 유 부회장과 야스가와 참사관이 참가했다.
6) 7월 4일 함남 혜산국민학교에서 혜산군 유림대회를 개최하였다. 군내유림 500명이 집합하여 길지(吉池) 군수의 사회로 엄숙하고 성대하게 식을 마치고, 곧 이어서 유 부회장의 강연이 있었다. 좌담회
139) 금품을 보내어 전장에 나간 병사를 위로함.
에서는 혜산군이 신설된 후 이곳에 문묘가 없기 때문인지 일반 유림이 열성적으로 문묘건설을 희망하며 여러 가지 의견을 진술했다.
7) 7월 5일 함흥 문묘에서 유림대회를 개최, 대표유림 300여 명이 출석하고, 도에서 대산(大山)참여관, 본회에서 유부회장과 야스가와 참사관이 참석하여 성대하게 식을 마치고 이어서 유 부회장이 강연을 한 후 회의를 마쳤다.
8) 7월 6일 함남 안변문묘에서 유림좌담회를 개최하였다. 김지형(金枝亨) 군수 사회로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당일 본회의 유 부회장과 야스가와 참사가 참가하고 출석한 유림이 백 명에 달할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9) 7월 8일 황해도청 회의실에서 해주대표 유림 35명이 모여서 좌담회를 개최하였다.
본회에서 와타나베 이사와 히라야마 참사가 참석해 유도진흥과 관련해 여러 가지 의견을 교환했다.
10) 7월 9일 사리원읍 회의실에서 대표 유림 30여 명이 모여 유도진흥에 관한 좌담회를 개최, 본회에서는 와타나베 이사와 히라야마 참사가 참석했다.
11) 7월 9일 오후 1시부터 청주향교 명륜당에서 청주군 유도회를 개최하였다. 군내 유림270명과 관공서 직원 다수가 출석하고 도에서는 히라마츠(平松) 연합회장이, 본회에서는 박택 회장, 이 편찬부장,마키야마(牧山) 참사가 참석하였으며, 야마자키(山崎) 회장이 사회를 보고 히라마츠 도연합회장, 박택 본회장이 고사를 하였다. 폐회 후 이 편찬부장의 강연을 듣고 회의를 끝냈다.
12) 회산군유도회를 7월 10일 오전 10시부터 회산 무덕관에서 개최. 군내 유림 250명과 관공서직원이 참석하고, 히라마츠 도연합회장, 박택 본회장, 이 편찬부장, 마키야마 참사가 참가하여 금광(金光) 회장의 사회로 박택 회장, 히라마츠 도연합회장이 고사를 한 후 이 편찬부장이 강연을 하고 모임을 마쳤다.
13) 7월 23일 오후 1시부터 강원도 유도연합회총회를 춘천향교 명륜당에서 개최했다. 도내 각 문묘직원 및 유림대표
50여 명이 참석하고, 본회에서는 박택 회장, 안 교육부장, 마키야마 참사가 참가하여 정숙한 가운데 총회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폐회 후 안 교육부장의 강연이 있었다.
14) 8월 8일 오후 1시부터 경서부민관에서 경기도 유도연합회 주최로 징병제실시감사선양(宣揚)대회를 개최하였다. 도내 대표유림 6백 명이 출석하고, 본회에서 오노(大野) 학무국장, 총력연맹에서 하다(波田) 총장이 참석해 고(高) 연합회장과 본회 박택 회장의 고사와 파전 연맹총장 및 금천 매일신보 사장의 축사로 성대하게 식을 마치고, 이어서 박택 회장의 강연이 있은 후 모임을 끝냈다.
15) 8월 9일 충주군 유도회를 충주향교 명륜당에서 개최하였다.
도의 히라마츠 도지사와 군내대표 유림 150명이 참석해 마츠야마 군수의 사회로 식을 진행하였으며 본회 안 교육부장의 강연을 들은 후 회의를 끝냈다.
16) 8월 10일 제천군 유도회를 제천읍내 연무장(練武場)에서 개최, 군내 유림 300명이 모여 가네코(金子) 군수의 사회로 식을 거행하고 이어서 본회 안 교육부장의 강연이 있은 후 산회했다.
17) 8월 11일 단양군 유도회를 단양읍 공회당에서 개최, 군내 유림 250명이 집합해 가즈야마(和山)군수의 사회로 식을 종료한 후, 본회 안 교육부장의 강연이 있었다.
18) 경기도 각 부군 유도회는 관내 유림대회를 아래의 일정대로 개최하여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
사의 결의를 새로이 하고, 폐회 후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모두 성황을 이루었다.
(5) '유도' 6호, 지방기사
1. 9월 7일 오후 1시부터 경남도청 회의실에서 유림대표회합을 개최하였다. 각 부군대표유림 46명이 출석하고 도에서는 오노(大野) 지사가 참석하였으며, 본회에서는 임(林) 부회장, 이산(伊山) 참사가 와서 금속제기헌납에 관한 논의를 한 후 임부회장의 강연을 듣고 모임을 마쳤다.
2. 9월 8일 오후 3시부터 진주(晋州)부청 회의실에서 진주유림회를 개최, 부내 유림 70명이 출석하여 호리오(堀米) 부윤의 사회로 국민의례를 행한 후 임 본회부회장의 강연을 듣고 대회를 마쳤다.
3. 9월 10일 오후 1시부터 대구부청 회의실에서 경북유림대표 60여 명과 도에서 온 고미(高尾) 지사 이하 관민유력인사가 참석하여 국민의례를 실시한 후 임 본회부회장의 강연을 끝으로 모임을 마쳤다.
4. 9월 11일 오전 10시부터 울산군유도회를 군청회의실에서 개최, 군내 대표유림 70여 명이 출석하여 국민의례를 실시한 후 임 본회부회장이 강연을 하고 끝냈다.
5. 9월 13일 오후 1시부터 경주군유도회를 경주세무서 회의실에서 가졌다. 유림대표 80명이 참석하여 고지마(小島) 군수의 사회로 예정된 행사를 마친 후 임 본회부회장의 강연이 있었다.
6. 9월 15일 오후 3시부터 경북 안동군 주최로 안동국민학교 강당에서 유림회를 개최, 군내 유림 200여 명이 참석하여 유마(有馬) 군수의 사회로 행사를 완료한 후 본회 임부회장의 강연으로 성황리에 모임을 마쳤다.
7. 9월 15일 오전 9시부터 16일까지 이틀간 대구문묘 명륜당에서 대구부내 중견유림연성회를 개최,강사로 본회 교육부장 안인식이 초빙되어 약 8시간 동안 황도유학 및 시국인식에 대해 강연을 했다.
8. 11월 25일 충청남도 유도연합총회를 도청회의실에서 개최, 도내 각 군 대표유림 300명이 출석하여 야마모토(山本) 지사의 고사(告辭), 본회 박택 회장의 훈시에 이어진 본회 안 교육부장의 강연을 들은후 모임을 마쳤다.
9. 11월 26일 전북도청 회의실에서 전북 유림회를 개최, 각 군 대표유림 100여 명이 출석하여 박택 회장의 훈시와 안 교육부장의 강연을 듣고 모임을 마쳤다.
10. 전라북도 유도연합회에서는, 결전하의 유림에게 국체관념을 명징하게 하고 황도유학을 진흥함과 동시에 시국인식을 철저케 하여, 황국신민다운 자질을 연성하고 전력증강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으로12월 1일부터 12일까지 아래와 같이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매번 성황을 이루며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제1반 강사 하루야마 아키요(春山明世) : 개최지- 고창, 정읍, 부안, 김제
제2반 강사 유희진(柳熙晋) : 개최지- 남원, 순천, 임실
11. 평안남도 유도연합회에서는 10항의 내용과 동일한 목적으로 12월 6일부터 15일까지 하루야마 본회상무이사를 초빙하여 아래의 각 지역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모두 성황을 이루었다.
개최지-신안주, 안주, 개천, 순천, 승호리, 풍동, 중화
(6) '유도' 7호, 본회기사·지방기사
본회기사
결전시국이 점점 심각해지고 가열해지는 요즈음, 전 조선 200여 만의 유림에게 유교본래의 도의정신을 더욱 앙양하고 살신성인의 적성(赤誠)을 일상생활이나 직장에서 여실히 현현(顯現)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도자의 자질향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하여, 본회와 경학원연합주최로 아래와 같이 계획을 세워 올해 6월 19일부터 연성(練成)을 개시하기로 했다.
1. 수련자 범위
제1조(組)
각 문묘현직에 있는 직원(直員)140) 장의(掌議)총원 2,270여 명에게 별표에 따라 점차 연성을 실행할 것
제2조
각 도부군도 유림관계 사무담당자에게 적당한 시기에 연성을 실행할 것
2. 연성과목
(제1조) 국체본의, 국어, 황도유학, 시국관계, 예법, 수련
(제2조) 국체본의, 황도유학, 이도(吏道), 시국관계 전시생활훈련
3. 연성장소
경학원 명륜당 및 동서제
4. 연성기간
만 5일간
<직원장의 현 인원수 및 연차별 연성인원 조(調)>
-도표-
지방기사
4월 25일 오전 10시부터 강원도청 회의실에서 강원도유림연맹 결성식을 개최, 도내 각 군 대표유림130명이 집합하고 도에서 온 나카하라(中原) 지사 이하 각 부장 및 관내 군수, 읍·면장 다수가 참석하였다.
나카하라 도장(道長)의 식사, 조선유림연합회장의 고사, 내빈객사(辭), 연맹결성보고, 임원발표 등을 한 뒤 식을 마쳤다. 오후 1시부터 본회 안교육부장의 강연이 있었으며, 이어서 4시부터 7시까지 좌담회를 개최해 상당한 효과를 얻었으며 화기애애한 가운데 좌담회를 마쳤다.
강릉군 유도회에서는 미·영격멸 국민총궐기운동실시 주간에 즈음하여 일반 유림을 읍면주최 특별
140) 직원(直員) : 일제 강점기에 향교나 경학원의 임무, 또는 그 직무를 맡아하던 사람.
정신대 강연회에 참석시켜 궐기격려를 촉구함과 동시에 시낭송회를 개최하여 궐기운동에 대한 인식을 한층 더 강화했다.
(이하 한시 생략)
<출전 : 「本會記事」, '儒道' 창간호~7호, 朝鮮儒道聯合會, 1942년 3월~1944년 11월>
2) '조선유림성지순배기(朝鮮儒林聖地巡拜記)'(1943)
1941년 10월 17일부터 11월 4일까지
조선유도연합회
머리말
우리일행 17명이 성지참배단원으로 선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며, 무엇인가 신국(神國)일본의 본연의 모습에 접하고, 황도유학이 유래하는 바의 진수에 접함으로써 조선유림을 분기(奮起)시키고,황도 유학으로 정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을 짊어지게 된 느낌이 어쩐지 들게 된다.
이러한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해마다 반복되어서 조선유도회가 기획한 목적의 열매가 맺어져서 유림층에 팽배한 황도 유학의 정신이 넘쳐서, 우리국체의 본의에 침투할 것을 염원해 마지않는 것이다.
이번에 특히 윗사람의 정성어린 지도와 내지141)의 각 방면의 특별한 주선을 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본 기행문을 드리게 된 것이다. 또 기술과 속기의 책임을 맡은 본 회의 참사 김택동(金澤東) 씨의 노력에 감사한다.
1942년 3월
영전종수(永田種秀, 나가타)142) 적음
중견유림 성지참배단 명부
단장 조선총독부 사무관
조선유도연합회 교화부장 영전종수(永田種秀) 경기도 경성부
간사 경학원 사성
조선유도연합회 이사 죽성제봉(竹城濟鳳) 경기도 부천군
″ 조선유도연합회 상무이사 평산태인(平山泰仁) 경기도 개성부
141) 일본을 말함. 이하 동일함.
142) 김병욱(金秉旭)의 창씨명.
일정 출발지 및 시각 경유지 도착지 및 시각 숙박지 참배 및 시찰처
(생략)
단원 경학원 강사
조선유도연합회 참사 가천구사(嘉川久士)143) 경기도 용인군
″ 경학원 강사
충청북도진천군유도회부회장 남상익(南相翊) 충북 진천군
″ 경학원 강사
조선유도연합회 참사 서촌재극(徐村載克)144) 충남 대전부
″ 경학원 강사
조선유도연합회 참사 안동정회(安東正會) 전북 고창군
″ 경학원 강사
전라남도회의원 윤정현(尹定鉉) 전남 남해군
″ 경학원 강사
경상북도회의원 산가윤(山佳潤) 경북 경주군
″ 경상남도 유도연합회 부회장 정순현(鄭淳賢) 경남 함양군
″ 경학원 의사(議士) 백천훈영(白川壎榮) 황해 황주부
″ 평양부 유도회 상무이사 강본봉훈(康本鳳薰) 평남 평양부
″ 명륜전문학원 평의원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고산경식(高山景植) 평북 선천군
″ 경학원 강사
조선유도연합회 참사 청하달빈(淸河達斌) 함남 안변군
″ 경학원 의사 부산삼(富山森) 함북 청진부
″ 조선유도연합회 참사 김택동(金澤東)
″ 매일신보사 사회부차장 송원이정(松原利貞)
성지참배단 파견일정
143) 조병렬(趙炳烈)의 창씨명.
144) 서재극(徐載克)의 창씨명.
성지참배단 여행지 숙박처 일람
(생략)
10월 17일(금) 맑음
추계 석전(釋奠)제 및 제2회 전선유림대회를 성황리에 지체 없이 끝내고, 우리들 성지참배단일행 16명(17명 중 타카키(竹城) 간사는 사정에 의하여 2일 늦게 출발)은 이 뜻 깊은 행사에 명예로운 제1회 참배자로 선발되어, 가을색이 바야흐로 무르익는 10월 17일, 오후 1시 45분 “노조미”호로 많은 관계자의 환송 속에 장도에 올랐다.
출발에 앞서, 일행은 오전 11시 반부터 반도호텔에서 열린 가나카와(金川) 매일신보 사장의 초대오찬회에 참석했다.
이렇게 모인 자리에는 참배자 일행 외에, 박택(朴澤)145) 대제학·계(桂)146) 사회교육장과 관계직원 등이 열석하고 또 신문사 측으로부터는 가나카와(金川) 사장을 비롯하여 가타오카(片岡)전무, 정(鄭) 편집국장, 마쓰하라(松原) 사회부 차장 등이 참가해서 주객이 서로 화목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었다.
이렇게 화목한 식탁을 둘러싸고, 가나카와(金川)·호우사와(朴澤) 양씨 및 나가타(永田) 단장으로부터는, 보내는 말과 환송을 받는 말이 오고갔다. 그 말들을 대략 여기에 적어 보기로 한다.
매일신보사장 금천성(金川聖, 가나카와)147)씨의 인사말
여러분은 이번에 무사하게 문묘의 추계석전의 의식을 마치셔서 전선(全鮮) 2백만 유림의 대표로서 내지의 성지순배의 장도에 출발하시게 된 것은, 참으로 경하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145) 박택상준(朴澤相俊, 호우사와). 박상준(朴相俊)의 창씨명.
146) 계광순(桂珖淳)을 말함.
147) 이성근(李聖根)의 창씨명.
사실은 이전부터 전선유림대표가 경성에 모이시는 기회를 틈타, 고견을 들어볼 예정이었습니다만,날짜나 장소 기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적어도 성지참배를 하시는 열 분들만이라도 하는 생각에서 오늘과 같은 변변치 않은 찬을 드리며 앞길을 축복할 겸 고견을 듣고자 하는 바입니다.
저는 관계로부터 물러나서, 이번에 생각하지도 않은 매일신보사의 사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관계에 있을 시절과 마찬가지로 친절하신 여러분의 지도가 있으시기 간절하게 바라는 바입니다.
일단 사장의 중임을 맡은 이상은 벅차지만 미력을 다하여 반도의 유일무이한 조선 언문신문을 여러분의 기대에 맞도록, 잘 활용해서 임전태세하의 보도보국에 만전을 기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민중의 지도적인 입장에 계시는 유림대표의 각위께서는 이점을 잘 양해하셔서 끊임없는 협력과 편달을 바라는
바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문사의 운영방침을 종래와는 그것을 달리하여, 과거의 자유경제주의적인 영업방법을 내던지고, 순전한 사회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서 임전하의 보도와 보국에 만유감이 없도록 최선을다할 적정입니다.
그리하여 이 신문은 어디까지나 사회민중의 목탁으로서, 반도민중으로 하여금 하루라도 빨리 황민화할 것에 주력함으로써 생활력의 향상에 노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먼저 하고자 하는것은 독자를 한 사람이라도 많이 획득해야 합니다.
현재의 독자만으로는 이 원대한 목적을 도저히 다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가령 전선의 애국반을 상대로 하여, 한 애국반에 한 독자를 얻을 수 있다고 해도 38만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아서도 현재의 독자 수만으로는 몹시 성에 안 차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특히 이점을 양찰하셔서 협력해 주신다면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협력을 얻어서 백만 독자 획득에 전력을 다하며, 반도민중의 황민화에 박차를 가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러분 장도의 여행에 편안함을 빌면서 인사말씀을 드립니다.
대제학 박택상준(朴澤相駿, 호우사와)148)씨의 인사
쇄국을 하면 나라는 퇴보하고, 개국을 하면 국운이 신장하는 것은 지나간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받아들인 가장 오래된 나라였습니다만, 나라를 닫고 쓸데없이 공리공론에만 치달았기 때문에 유림은 우물바닥의 개구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내지의 유교는 이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이 동경의 사문회(斯文會)를 방문해 보시면 이점을 잘 아시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문회에는 내지의 유교중심을 하는 기관으로서, 1880년에 메이지대제가 내탕금(內帑金)을 특별히 하사하셔서,
일찍이 사문회를 위하여 진념(軫念)하신 것입니다.
사문회로서는 이와 같은 성지에 오로지 감읍(感泣)하며, 더한층 사회(斯會)의 융성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문회는 이와 같은 황공한 성지를 받들어 흥아부(興亞部) 밖에, 현재 조선유도연합회에서 실시하고자 하고 있는 사업 같은 것을 이미 실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지에서는 일찍이 황실의 성지를 받들어 황도유학의 진흥에 노력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유학을 되돌아다 보면, 지금부터 2백년 이전은 그렇다고 하고, 과거 2백 년
148) 박상준(朴相駿)의 창씨명.
동안은 유림은 있었으나 유교는 없었다고 할 만큼 침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지에서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는 말할 것도 없이 또한 기독교는 물론, 일단 일본에 전해지면 일본화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영양분만을 습취하고 찌꺼기는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성지참배를 기회로, 이 “일본에 들어오면 일본화하고, 그 영양분만을 습취하고 찌꺼기를 버린다”라고 하는 그 현묘(玄妙)한 일본정신을 잘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일본유학의 요람이라고 할 사문회도 잘 시찰하셔서 후진을 위하여 커다란 성과를 가져오기를 성지순배의 출발에 즈음하여 부탁말씀을 올리며 환송의 인사에 대신하고자 합니다.
단장 영전종수(永田種秀) 씨의 답사
저는 이번에 중견 유림성지참배단의 단장으로 참가하게 되어, 단원 여러분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내지에 간 것은 과거에 몇 차례에 걸쳐 있었습니다만, 그때마다 새로운 감격을 가졌으나, 이번은 조선유림의 대표로서 성지참배라는 중요임무를 짊어져서 신국(神國)일본의 본연의 모습을 체득할 기회를 얻게 되어 한층 일말의 감격과 기쁨에 차 있는 것입니다. 방금 회장으로부터 이야기가 있은바와 같이, 동경의 사문회(斯文會)나 미토학(水戶學)에 관해서도 가능한대로 시찰연구해서, 황도유학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생각하면, 단장으로서 저의 책무의 무게를 더 한층 강하게 느끼는 바입니다.
우리들 일행은 소기의 목적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돌아올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서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단원여러분은, 요즘여행은 사변 전 사정과 달라서 꽤나 힘든 일이 많기 때문에, 충분히 각오하며 버텨주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자신은 불편하고 불유쾌한 일을 만나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요즘은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임시대제의 직후이기 때문에, 기차 안은 물론 숙소나 혹은 신궁과 신사 또는 시찰장소 등에, 상이군인이나 유가족 장(章)을 가슴에 단 분들을 만날 기회가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하는 것은 물론, 자리를 양보하며 길을 비켜서, 반도인으로서 동포애를 충분히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여러분이 특히 주의를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말과 태도입니다.
조금이라도 내지인에 대해서 다른 모습을 보여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또 세부에 걸친 주의사항은 그 현장에
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원래 배움이 적은 젊은 사람이지만, 명령을 받은 이상은 책임을 갖고 될수 있는 한 뒤를 돌보며, 상사의 기대에 맞도록 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생각합니다.
○
오후 1시 넘어서 매신 사장의 오찬회를 마치고 경성역으로 향한 일행은 매신으로부터 파견된 사진반의 카메라 촬영을 마치고 역까지 일부러 우리 일행을 전송해 주시는 호우사와(朴澤) 회장, 계(桂) 사회교육과장 기타 관계자들의 호의에 감사드리고 홈에 들어가자 이미 열차는 대기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열차 내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발을 딛기에도 어려웠다. “급하지 않는 여행은 삼가라”라고 부르짖어 온 이래 너나할 것 없이 자숙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교통량이 폭주하는 것은 후방국민의 움직임이 그 만큼 활발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일 수밖에 없다. 오후 1시 45분 열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도 연변에는 황금의 벼이삭이 파도를 치며, 기차는 한 없이 계속되는 벼이삭 파도를 누비며 달린다.
이 하나하나의 벼이삭은 전시물자 중에서도 가장 중요성을 지니는 전시식량이 될 것이다.
이것이 병참기지 조선의 유일한 자랑이 아닐까.
올해도 2천 5백만 석 이상의 수확이 예상이 된다고 하니, 오는 미곡연도의 전시식량 문제는 해결이 된 것일 게다.
이것은 오로지 관민이 협력해서 식량증산에 진력한결정(結晶)일 것이다.
우리들로서는 이 일에 생각을 새로이 하고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날은 저물고 열차는 칠흑 같은 들판을 질주를 계속했다. 부산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 15분이었다.
역에 내리니 역장을 대신하여 조역(助役)이 마중을 해 주었다. 일행은 조역의 인도로 관부연락선의 총아 ○○호에 승선, 동○○시○○분에 배는 떠났다. 바람이 자기 때문에 배는 편안하게 달린다.
○ 경부선 차중에서 읊음
車窓走筆賦東遊, 楓菊溪山滿目秋, 纔到嶠南行役苦, 孤雲落照望鄕愁. 가천구사(嘉川久士)
萬里天晴海上秋, 扶桑紅日掛檣頭, 浮生空自忙如此, 羨彼中流泛自鴎. 가천구사(嘉川久士)
儒林聯袂賦南遊, 正是吾儕奮發秋, 如石如金誠意在, 人間事業有何愁. 남상익(南相翊)
仲秋十月向東京, 神國山河總有情, 泰西夷虜休搆事, 一億丹心欽聖明. 강본봉훈(康本鳳薰)
朝發京城抵暮烟, 釜山浮在海中天, 坐思三十年前史, 自此內鮮一境連. 청하달빈(淸河達斌)
○ 관부연락선 배 안에서 읊음
釜山秋海夜無煙, 船客不眠起看天, 人和地理渾然氣, 槿域扶桑一航連. 부산삼(富山森)
10월 18일 (토) 가랑비 뒤 개임
오전 7시 15분에 시모노세키(下關)부두에 상륙했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려서 대지는 어렴풋이 보이며 답답한 아침이었다.
일행은 바다가 조용했던 탓인지 피곤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상요(山陽) 호텔에 들어가서 아침을 들고, 오전 9시 25분 열차의 손님이 되었다. 출발 직전 오사카 아사히(大阪朝日), 캉몽 니치니치(關門日日)의 신문기자들이 찾아왔기 때문에 나가타(永田) 단장이, 우리들은 성지참배를 하고 신국 일본의 본연의 모습에 접하며 겸해서 미토학(水戶學)의 발상지를 방문하여 몸으로써 황도유학의 진수를 연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비는 좀처럼 그치려고 하지 않는다. 기차는 속도를 줄이며 이미 알고 있었던 바와 같이, 천황폐하께서는 오늘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에 참가하셔서 오전 10시 15분에 친히 참배 하시는 것을 알려왔다.
친배(親拜) 정각이 되자 기차는 서서 기적을 울린다. 일동은 공손하게 일어나서 호국의 영령에게 경건한 감사의 묵념을 바쳤다.
오후가 되어서 비는 가늘어지고, 오후 0시 50분에 미야지마(宮島)에 도착하니 비는 그쳤다.
역에 내려서니 역장이 마중해 주었다. 일행은 곧바로 이츠쿠시마(巖島)행 배에 바꾸어 탔다.
미야지마의 선착장은 특이한 건축물로, 청아한 풍취가 있다. 배 위에서 멀리 저쪽에 신도(神島) 이츠쿠시마를 바라보니,
바다 속에 붉은 홍살문149)이 의연하게 솟아 있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참배자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게 한다.
또 신화시대의 숲은 비취색을 적셔 흘리며 그 유현(幽玄)한 풍치는 신의 영역의 존엄을 한층 심각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츠쿠시마에 도착하니 현지의 국민학교 교장 모리타 슈조우(森田修造)씨가 현청의 지시를 받았다는 뜻을 전하며, 친절하게 일행을 맞이해 주었다.
이 이츠쿠시마의 이름에 대해서는 신령을 모치이츠크(持ち齊く)150)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또는 이 치기시마히메(市杵島姬)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도 말하며, 고서에는 존엄(尊嚴)151)의 뜻에서 이름 붙여진 것이라고 전해 내려온 것 같다.
이 섬은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에 전설이많다.
한 예를 보아도 '속(續) 서유기(西遊記)'라고 하는 서적에, “이츠쿠시마는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에, 부정을 특히 탄다, 섬 안의 부녀가 아이를 낳을 때는, 급히 배에 태워서 게이슈(藝州)지방으로 보낸다.
배 안에서 아이를 낳는 수도 있고, 그래도 난산이 없으며, 산후에 병에도 걸리지 않고”라고 적혀 있다.
이와같이 엄격한 전설이 있는 반면에 재미있는 것도 전해지고 있다. 서유잡기(西遊雜記)라는 책에는, “이츠쿠시마 6월 제(祭)는 장이 서서, 전국으로부터 참례자가 엄청나서, 이 근처에 사는 자는 밭도 없는 섬이기 때문에 평생 직업도 없이, 이 장안에서 매매할 때의 구전이나 땅값 혹은 숙박업 또는 자신이 장사를 해서 많은 이익을 얻는 일이다.
더욱이 창가(娼家)도 있으며, 히로시마 시내도 멀지 않기 때문에 유객(遊客)도 끊이지 않고, 전국의 참례자가 원할 때는, 돈 5냥이나 10냥, 15냥, 신분에 맞게 첫 수확금(初穗金)을 내고, 배를 여러 가지 장식을 하고, 신사에 종사하는 사람과 무녀(巫女)를 가득 태우고, 시주(施主)도 같이 타며, 많은 포구와 칠복(七福)신의 신사를 순회하며, 이때 “야부사키”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쌀로 만든 큰 새알을 세 개 만들어서 그릇에 담고 바다에 흘러가게 하는 것이며, 이것을 미산(彌山)으로 부터 새가 날아 와서 물고 돌아가면 명신(明神)이 수납했다고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이츠쿠시마는 신도이며 따라서 전설의 섬인 것이다.
일행은 여장을 숙소에 풀고, 국민학교장의 안내로 이츠쿠시마에 정식으로 참배했다.
참배 후 일행은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신주(御神酒)를 받으며 국가를 진호(鎭護)하는 신들에게 감사함을 받들었다.
일행은 신전을 물러나서 노사카(野坂禰宜) 씨로부터. 이 신사의 설명을 듣기로 하였다.
○
노사카(野坂禰宜) 씨의 말씀
이츠쿠시마 신사는 알다시피 관폐중사(官幣中社)에 속하는 신사입니다.
여러분이 이츠쿠시마 신사에 참배했을 때 맨 먼저 느낀 것은, 큰 홍살문이 바다 속에 있었던 것이 기이하다고 생각하였겠지요.
일본에서는 고래로부터 액땜의 의식이 있는 것은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이 신사에 참배하는 사람들은 바닷물로 액땜을 저절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신궁이나 신사와는 취향을 달리하고 있는점은 낮은 평지에 진좌(鎭坐)해 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말씀드릴 것까지 없이, 이 섬은 신들의 영혼이깃드는 신체(神體)이기 때문에, 신도(神島)에 건립하지 않고 바닷물이 잠기는 곳에 세운 것입니다.
이와
149) 대조거(大鳥居).
150) 신으로서 숭상하다.
151) 이츠쿠시.
같이 사전(社殿)이 바닷물에 잠기고 있는 것이 이츠쿠시마 신사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츠쿠시마 신사의 제신은 이치기시마 히메노미코토(市杵島姬命), 타고리 히메노미코토(田心姬命),타기츠 히메노미코토(湍津姬命)의 세분이며, 이 삼여신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신칙(神勅)을 봉대하고 아시와라(葦原)의 나카츠쿠니(中國)에 강림하셔서, 황실 및 국가의 진호(鎭護)신으로서 상하의 존신(尊信)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츠쿠시마는 삼여신의 영혼이 영원히 어려 있는 신성한 신체(神體)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신성한 섬이기 때문에 중고(中古)시대까지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카마쿠라(鎌倉)중엽부터 비로소 신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주민들이 섬에 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체는 잠깐만이라도 이 신성한 곳에 머물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메이지유신 이전에는 출산도 허락되지 않고, 베 짜기나 논밭의 경작도 허락되지 않을 만큼 금기(禁忌)가 무척 엄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신도의 신성함을 유지하는데 의의가 깊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섬 안의 나무 한그루 돌 한개도 모두 천연기념물로서 보존되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로시마(廣島) 현청에서도, 섬 안의 삼림을 풍치림(風致林)으로 가꾸고자 전력을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국토를 사랑한다는 것은, 일본민족이 정신을 굳히는 데에도 중요한 것입니다.
반대로 서양인들은 어떤 나라를 정복해 버리면 곧바로 자신들의 사정에 맞추어 그 나라의 국토를 망가트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연을 정복했다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연을 귀하게 여기고 자연을 살려나가는 것으로 외국의 방식과는 전연 다른 것입니다.
진무(神武)천황이 휴가(日向)의 나라로부터 동정(東征)하셔서 군흉(群凶)을 토벌을 할 때 병마(兵馬)공총(倥傯)152)할 때에도 이 신도에 체제하게 된 것은, 이 신도는 황실국가의 진호의 신이 살고 있는 섬이기 때문에, 국토를 사랑하시는 어심(御心)에서 체재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수이코(推古)천황께서, 이 섬에 신사의 사전(社殿)을 창건하신 것도 그와 같은 어심의 발로인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사전(社殿)은 이것을 숭경(崇敬)하여 받든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공이 건조한 대로의 규모를 전한 것입니다.
앞서 이 신사는 상하의 존신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으나, 가장 존경해 받들었던 분들은 방금 말씀드린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비롯하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오우슈(奧州)정벌을 할 때 여러 가지 기원(祈願)을 치성한 것입니다. 또 장군 요리쓰네(賴經), 요리쓰쿠(賴嗣) 등이 “적국 항복”을 기원하여 기원문과 칼을 봉납한 것입니다. 이 기원문과 칼은 오늘날 국보로 남겨져 있습니다.
특히 요시타카(義隆)는 그 신앙이 열렬해서 타이라(平) 집안 전래의 “이츠쿠시마 무악(舞樂)”이 오늘날까지 유지가 된 것은 그 분의 비호를 입은 바가 큰 것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신사는 물론, 이 신도는 신성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3, 4백년전 매우 실례천만한 일이나, 오우치(大內) 씨와 모우리(毛利) 씨가 패권을 다투어 대규모의 결전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금기를 엄중하게 하는 이 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일대 불상사라고 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이 싸움이 끝나서 보니 싸움에서 전사한 시체를 섬 밖으로 끌어내어, 피로 물들은 흙은
152) 일이 많아서 바쁨.
깎아서 신도의 더러움을 맑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상세한 설명은 시간관계로 말씀드리기 어려움으로 생략하겠습니다.
또 사전(社殿)내의 설명은 현장에서 다른 사람이 하기로 하고, 매우 단편적이었으나, 이상으로써 제 설명은 마치겠습니다.
○
설명은 다른 신직의 사람이 뒤를 받아 현장을 걸어가며 계속한다.
일행은 신전에서 긴장을 풀며 편한 기분으로 돌아섰다. 여기서 잠깐 경내의 모습을 적어 보겠다.
대궁(大宮) 보전(寶殿)은 중앙에 있으며, 보전 앞에 폐전(幣殿), 폐전 앞에 배전(拜殿)이 있으며, 부정을 막는 전(祓殿 : 하라이덴)은 배전(拜殿) 앞에 있어서, 속된 말로 짜 넣기(組入)라고 하는 것이다.
부정을 막는 전(祓殿) 앞에 높은 무대가 있으며, 좌우에 보통무대가 있다.
연주하는 곳은 보통무대에 이어서 좌우에 두 지붕씩으로 나누어져서, 문객(門客)신사 두 지붕이 연주소(樂屋)와 나란히 좌우에 서 있다.
또 속칭 혀 끝(舌先)이라고 일컬어지는 곽취(廓嘴)는 문객신사보다 앞쪽(서북 향)으로 복도가 되고, 그 끝에 동등(銅燈)농대(籠臺) 한 기(基)가 설치되어 있다. 이들 전각은 바다를 향하여, 사전(社殿)의 기초는 노사카(禰宜野坂)가 말한 것처럼 모두 다 바다가 쑥 들어간 곳(入江)에 세워졌다. 바닷물이 찰 때는 회랑의 바닥판자 밑까지 바다가 된다고 한다.
우리가 보았을 때는 마침 썰물 때였기 때문에 갯벌의 마른 자욱이 보였다.
그리고 크고 작은 지붕과 누각은 꼬부라져 서로를 잇고 있고, 땅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전각의 높고 낮음도 또 제각각이다.
사전(社殿)의 주위의 풍경을 볼 때, 뒤는 비취색 산이 높이 솟고 앞쪽은 푸른 바다를 뒤로하여 자연의 정취가 듬뿍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강산과 자연의 형세에 더하여 인공의 화려와 장엄으로써 조영한 사전(社殿)은 한층 묘취(妙趣)를 느끼게 한다.
그런데, 설명자의 말에 따라 우리가 본대로 적어보면, 이 신사의 회랑은 1백 8칸으로 지어져서 8번 꼬부라져, 기둥과 기둥사이의 칸에 깔아놓은 판자는 8장씩, 또 한 칸마다에 청동의 등이 매달리고 있다.
또 회랑은 앞쪽으로 떨어지기를 70칸 멀리 바다 속에 확실하게 보이는 붉은 홍살문은, 1875년에 중건 된 것이고, 쓰인 재목은 전부 녹나무(樟)라고 한다. 큰 홍살문은 높이가 4장(丈) 4척(尺)(13미터 20)이며, 정수리의 길이는 6장 4척(19미터 20), 기둥과 기둥의 폭은 5칸(약 30미터)이나 되며, 또 큰 홍살문에 걸려 있는 액자는 세로 9척(약 2미터 70)이고 가로 6척(약 1미터 80)이나 되는 것으로, 원래는 고나라(後奈良) 천황의 친필인 것을, 1888년 개수할 때 아리수가와노미야(有栖川宮) 전하의 제자(題字)로 고친 것이라고 하며, 제자는 “엄도신사(嚴島神社)”라고 되어 있다.
다음으로 노우(能)무대가 있으며, 본 궁에서는1월 원단·2일·3일·5일·천장절(천황 탄생일)·5월 18일·음력 6월 5일·10월 15일에 각각 무악이 연주되며, 신능(神能)은 4월 16일부터 동 18일까지 시행된다고 한다. 궁중(宮中) 외에는 지금까지 예부터 전해내려 온대로 무이악(舞以樂)을 연주하는 것은 이곳뿐이라고 한다.
또 객(客)신사 옆에 거울의 못이라고 불리는 작은 연못이 있다. 경지(鏡池)는 한편 천지(泉池)라고도 하며, 이 못은 이츠쿠시마 신사가 진좌(鎭坐)된 밤부터 자연히 생긴 것이라고 전해지며, 썰물이라 할지라도 우물이 저절로 솟아나서 마른 일이 없으며, 그 옛날부터 얕아지지도 않고 깊어지지도 않는 천고의 역사를 몰래 간직하고 있는 청등경(淸燈鏡)과 같이 아름다운 연못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는 박물관에 안내 받았다.
이곳은 1897년 이래, 여러 가지 보물이 점차로 국보에 지정되어, 이제야 그 수가 1백 2십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2, 3가지를 지적해 보자.
먼저 일본에서 최초의 유화인데, 이 유화는 에도시대의 강한(江漢) 사마준(司馬峻)의 손에 의한 것으로 고색창연한 가운데 전아(典雅)한 아름다움이 떠돌고 있다. 다음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미나모토노 타메토모(源爲朝)가 썼던 소앵함(小櫻緘) 갑주가 있으며, 더욱이 미노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가 사용했던 원지화함(夘之花緘) 갑주에는 선혈이 밴 흔적과 화살에 맞은 흔적이 옛날을 말하고 있어서 지난 옛날을 생각나게 한다.
이와 같이 당관에 소장된 백수 십 점은 하나도 남김없이 천고의 고물로서 국보에 지정되고 있다.
일행은 사전(社殿)의 경내로부터 나와서, 또다시 모리타 국민학교장에게 안내를 받았으며, 묘진(明神)이 사랑한다고 하는 신록(神鹿)과 장난치며 섬 안에 있는 명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안내 받은 곳만 적어 보기로 한다.
다보탑(多寶塔)은 일명 이중탑(二重塔)이라고 말하며, 1521년에서 1528년 연간에 건립한 것이다.
처음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안치했으나, 그 후 이것을 다른 곳으로 옮겨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 공의 넋을 모셨다고 한다.
또 히다노 타쿠미(飛騨內匠)의 절세의 일품이라고 말하는 오중탑(五重塔)은 카메이산(龜居山)의 동쪽 끝에 솟아있고 탑의 장려함은 주위의 나무들과 서로 비추서 그 미관은 말로 표현 못한다.
이 탑은 1407년에 건립된 것으로 총 높이가 15칸 남짓, 각 층의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입혔으며, 양식은 당나라 무늬를 주로 한 것이다. 다음으로 오중탑의 바로 옆에 천첩각(千疊閣)이 있다. 이 천첩각은 타이코 히데요시(太閤秀吉)가 전쟁 병사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앙코쿠지(安國寺) 에케이(惠瓊)에게 명령하여 건설한 것으로, 각내(閣內)에는 몇 만을 헤아리는 국자에 전사자의 명복을 비는 글귀를 쓰서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영전(永田) 단장은 일행을 대표해서, 국자에기(祈) 출정황군(出征皇軍) 무운장구(武運長久)라는 글귀를 쓰서 봉납했다. (이 국자는 이 섬의 명산물로, 일청전쟁 때부터 많이 봉납되었다고 하며, 이것은 “적을 잡는다153)”라고 하는 연유인 것 같다.
천첩각(千疊閣)으로부터 멀리 내다보면 강산과 누각이 서로 비추어 주며 무한한 정취가 있다.)
다음으로는 대성원(大聖院)을 안내 받았다. 대성원은 전 이츠쿠시마 신사의 별당사(別當寺)로서, 16세기 후반에 임조법친왕(任助法親王)이 머물렀으며, 여기에서 서거하셨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1885년
메이지대제가 이츠쿠시마에 행차했을 당시에 머문 곳이라고 전하여 진다. 그러나 1888년에 전소(全燒)하는 횡액을 맞아, 지금의 것은 대부분이 1930년대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어수세천(御手洗川)의 맑은 흐름이나 단풍 골 공원의 경치는 지상의 낙원을 방불케 했다.
부근에 흩어져 있는 청아한 건물은 각 전하들이 묵는 곳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미야지마(宮島) 명산에 대해서 한 마디 덧붙이기로 한다. 이 섬에 오게 된 자는 먼저 통신용 국자가 눈에 띌 것이다.
이 국자는 1년 산출이 수십만 엔에 이른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유래는 18세기말 세이신(誓眞)이라고 하는 스님이 이 섬에 적당한 토산물이 없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고, 또 이곳 궁민을 구제할 목적으로 발안하여 창작한 것이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153) めしとる[메시(밥)토루(뺏는다)].
○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묵으며 읊음
海風颯颯一帆秋, 無恙淸晨泊埠頭, 多少紛忙新世界, 閒情問亦水中鷗. 남상익(南相翊)
玄海順風起束獎, 最新活氣滿空腸, 春帆高樓衣舊否, 登臨志士應多忙. 청하달빈(淸河達斌)
下關朝雨理行裝, 萬樹秋光驛路長, 紅柿方濃黃稻熟, 田家穡事㧾紛忙. 부산삼(富山森)
○ 시모노세키를 출발하며 차중에서 읊음
山有森林海有魚, 沿途百里接隣居, 堪羨國民敎育熱, 一人無有不知書. 남상익
○ 야스쿠니 신사 대제 날 읊음
鸞駕淸宸降至京, 宸誠慰滿庶民情, 蒼生多福皇恩重, 萬歲扶桑瑞日明. 가천구사(嘉川久士)
今朝遺族泣東京, 一祀英靈報國情, 天顔軫慮親臨祭, 戰局風雲瑞旭明. 부산삼(富山森)
○ 이츠쿠시마 신사를 참배하며 읊음
社殿晶淸接素秋, 萬千期載護神州, 水明山紫冠三景, 能使遊人一日遊. 남상익
松杉箇箇參天立, 鹿成群甚自由, 到此方知山澤富, 農家漁屋盡名樓. 안동정회(安東正會)
天藏勝地海之東, 古社儼然絶景中, 畵樑粉壁如今造, 千載不渝信仰風. 강본봉훈(康本鳳薰)
儼然巖島海門前, 肇基新宮問幾年, 鳥獸鱉魚皆被化, 好生天理使人傳. 청하달빈(淸河達斌)
巖島秋凉拜社前, 松楸石榻幾千年, 甲衣長釼燦然色, 天壤無窮國寶傳. 부산삼(富山森)
海色山光碧滿前, 杉松古社幾多年, 收藏邦寶神扶護, 幸得居人永世得. 가천구사(嘉川久士)
○ 이츠쿠시마공원
名園泉石似仙鄕, 楓日新晴菊放香, 看過 多奇絶處, 平湖十里又斜陽. 가천구사(嘉川久士)
10월 19일(일) 맑음
귀에 익지 않은 신록(神鹿)의 울음소리에 눈을 떠보니 시원한 아침이다.
한 점의 구름이 없는 가을하늘이다.
일행은 못내 아쉬움을 남기고 신도(神島) 이츠쿠시마에 작별을 고하고 오전 9시 21분발 동경행 열차에 몸을 담고 쿄토로 향했다. 차창에서 연선을 쳐다보니, 눈에 비치는 것 하나도 감격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은 없다.
여기에 두세 가지의 소감을 그려보기로 한다.
어제는 비 때문에 차창이 흐려서 상요(山陽) 본선(本線)의 연선풍경을 충분히 맛 볼 수 없었으나, 오늘은 가을 맑음 덕분으로 연선풍경을 밝고 마음껏 바라볼 수가 있었다.
차창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파랗게 우거진 삼림이다. 내지를 방문한 자들은 입을 맞춘 듯이, 열 사람이면 열사람 모두 이구동성으로 울창한 숲을 칭찬하는데, 내지의 산은 윤택함이 흘러내리는 듯 파랗다.
벌거벗은 산에 익숙한 우리들 눈으로서는, 그렇게 칭찬하는 것은 가식이 없는 착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치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 진 치수나 우물 정(井)자로 구획된 논들은 자연과 잘 조화하여, 문명국으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나타내고 있다. 또 수리도 충분히 잘 되고 있는 것 같아서 밭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철도연선에 도시가 많은 것이다. 아니, 철도연선에 도시가 많다고 하기보다, 기다랗게 완연한 도시 사이를 누비며 기차가 지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직감적인지 모른다. 이러한 증거로서는,번거로울 정도로 정거장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선에 보이는 집들은 일률적으로 미관을 보이며, 또 어느 집을 보더라도 후방생활의 여유로움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선 안에서 철도연선에서 보았던 집들이 잔영으로 떠올라, 그것을 비교하는 것은 말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천양지차인 것이다.
다음으로 신사(神社)나 신사(神祠)가 많은 것이다. 사람집이 있으면 반드시 홍살문이 보이는 데는 놀라겠다.
이만큼 내지인들은 정신적인 신앙심이 풍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상 두 가지 현상으로 보아도,물질에는 여유가 있고, 마음에는 윤택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말에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과 마음을 윤택하게 한다(富潤屋德潤身)”라는 말이 있으나, 철도연선의 풍경을 주마등과 같이 순간에 본 것만으로, 주민들의 생활정도와 문화정도를 느낄 수가 있다.
다음은 철도연선에서 일하는 부인들의 활동상을 두 세 가지 주워 보기로 한다.
내 아들, 내 남편, 내 아버지를 각각 전선에 보내거나 혹은 산업전사로 보내며, 후방에 남겨진 가족은 늙은이나 젊은이도, 남자나 여자도 모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논이나 밭에서 또는 거리에서 잘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생산력 확충이라는 귀중한 사명을 띠고 봉공하고 있는 것이다. 논 가운데서 벼를 베고 있는 여자, 삼태기를 짊어지고 물건을 파는 여자, 자전거에 “리어카”를 매달고 짐을 나르는 여자, … 이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도록 여자들이 빈번히 오고가는 활동상은 참으로 감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일에 나간다는 것은 조선 안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조선에서는 이제야 각 여학교가 분기하여, 후방여성의 연성(鍊成)을 목표로 자전거 타기에 야단들이지만, 내지에서는 이미 여자가 자전거 타기를 하는 것은 실용화된 것이다.
또 삼태기를 짊어지고 물건 팔기에 나온다는 것도 후방여성의 용감한 활동의 한 면일 것이다.
이 밖에도 방공연습에 “몸뻬” 모습의 토나리구미(隣組) 부인들이 잘 눈에 띄나, 조선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내지의 해돋이는 경성보다도 훨씬 빠르다. 그 대신에 해가 저무는 것도 빠르다. 기차가 오사카에 닿을 때는 이미 어두워졌을 즈음이다. 등화관제 훈련 중의 오사카는 어둠에 쌓여 조용했다.
기차가 급행으로 바뀌어졌는지, 오사카에서 단숨에 쿄토에 도착했다. 오후 6시 29분이었다.
역에는 쿄토부 협화회(協和會)의 의천이삼차(衣川利三次) 씨와 토요쿠니(豊國)신사에서 일하고 있는 반도출신의 금본영환(金本英煥) 씨가 맞이해 주었다. 일행은 두 사람의 안내로 대진옥(大津屋) 여관에 들어갔다.
저녁식사 상을 가지런히 하면서, 협화회의 의천(衣川) 씨로부터 쿄토부 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근황에 관하여 설명이 있었다. 이제 그 설명과 그로부터 받은 협화회 관계의 유인물에 따라 조선인의 생활상황을 엿보기로 하자.
작년 12월 말 현재, 쿄토부 내 거주자 수는 67,698명으로 7만 명에 닿으려고 하고 있다. 이들 7만 명이나 되는 반도인은 사변 발발 이래, 시국을 잘 인식하여 남녀노소 구별 없이, 애국의 열의에 불타서, 황군의 무운장구 기원이나 상이군인의 위문 혹은 국방휼병헌금 또는 응소(應召)군인의 가정의 근로봉사등 눈물겨운 활동을 하고 있는 모양으로, 참으로 좋은 일이 되고 있는 듯했다. 지금 그 정성 상황을 2,
3개의 통계로 적시해 보면,
국방휼병헌금 48,221엔 68전
사변국채응모 88,837엔 00전
응소가정 기타 근로봉사 연인원 44,500명
국방애국부인회 가맹 2,329명
군우회(軍友會) 가맹 402명 (작년 9월 말 현재)
다음으로 내선 간의 통혼(通婚) 정황(작년 12월 말 현재)은 내지인을 처로 삼은 것이 2백 4십명, 내지인을 남편으로 삼은 자는 4명으로 합계 2백 4십 4건으로 올라 있었다.
이상과 같은 조선인의 활동의 이면에는 협화회 당사자의 활동도 볼만한 것이 많이 있다. 지금 그 주요한 것을 들어보면,
① 귀향보호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귀향하고자 하는 자 혹은 귀향시키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로서, 그 여비를 자기가 내는데 어려운 자에 대하여 이것을 보충하도록 되어 있다.
② 야간 국어강습회
국어를 해득하지 못하는 자 또는 무교육자에 대해서는 야간강습회를 3개월에 걸쳐 개최하고, 2개월을 가르쳐서 내 보낸다.
③ 보도원강습회
우수한 보도원(輔導員)을 양성하고, 솔선수범하여 회원을 유도시키기 위한 강습회를 3개소에서 개최한다.
④ 강연회
일본정신 및 내선협화의 정신을 보급하며 철저를 기하기 위하여 강연회를 10개소에서 개최한다.
⑤ 중견청년강습회
조선인 청년으로서 장래 보도원 또는 지구내의 중견이 되어야 할 자의 수양 강습회를 2개소에서 개최한다.
⑥ 생활개선지도
내지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특히 부인들의 지도에 주력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국민학교여교사 및 내지의 부인회 등의 협력을 받아, 예법·일본 옷 입는 방법 기타 위생에 관한 강습회를 30곳에서 개최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부인 일상 예법」이라고 하는 소책자를 발행해서, 일반적인 예의 매너의 교시에 노력하고 있다.
지금 그 소책자의 차례에 눈을 돌려보면, 방석을 권유하는 방법·차를 내는 방법으로부터, 앉는 방법·일어서는 법·걷는 법에 이르기까지 정말 세밀하게 쓰여 있다. 참고로 앉는 방법의 페이지를 베껴서 보면, “양발을 가지런히 하고, 양손을 늘어뜨리며 왼쪽이나 오른 발을 조금 당겨, 조용히 그 쪽 무릎을 꿇고, 다음에 다른 쪽의 무릎을 가지런히 하며 조용하게 허리를 잡는다.”와 같이 상세하게 알기 쉽게 쓰여 있다.
⑦ 표창
본회의 사업에 대한 공로가 현저한 자 및 선행자를 표창하는 제도가 있다.
⑧ 합의사항 36항목
합의사항 36항목이 있어서, 해야 할 일, 준수해야 할 사항, 교정해야 할 사항을 각 12세목씩으로 나누고 있다.
이들 36항목은 일상생활에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될 금과옥조가 적혀 있다.
10월 20일 (월) 맑음
오늘은 아침 9시부터 유람버스를 타고 몸야마고료(桃山御陵)를 비롯하여 각 신사에 참배하고 시내를 시찰했다.
쿄토는 칸무(桓武)천황 서기 794년에 천도한 이래 천년 남짓의 옛 수도인 만큼, 여러 곳에 명승고적이 있으며, 명승고적이 많은 것은 전국에 그 유례가 없을 것이다.
오래된 서울 쿄토는 인구 1백13만을 헤아리는 대도회지이지만, 이 도회지의 3분의 2는 산림이 차지하고, 그 나머지인 3분의 1지역에는 벼논과 채소밭이 있으며, 무수한 사적과 명승지를 이루고, 또 1천8백 남짓의 신사와 사찰의 경내가 있고, 정치도시 동경, 경제도시 오사카에 대해서 관광도시의 특이성을 내세우고 있다. 참으로 오래된 고도 쿄토는 역사와 미술의 연총지(淵叢地)인 것이다.
여기에 안내 받은 곳을 순서에 따라 들어보고 기억을 새로이 해 보겠다. 숙소를 출발한 “버스”는 시가지를 꿰뚫고, 존엄의 영기(靈氣)가 넘치는 후시미모모야마(伏見桃山)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려와 상서로운 삼나무 양쪽에 울창하게 우거져 있는 참배하는 길을 걸어가면 돌계단이 있다.
이 돌계단을 하나 둘 하고 세면서 올라가면, 여기가 메이지천황 및 쇼켄(昭憲)황태후의 양위 분의 신령이 영원히 잠드는 능이 동서에 가지런히 안치된 후시미모모야마 능인 것이다. 일행은 능 앞에서 고개를 숙여 대제의 생전의 성덕을 추모해 받들었다. 대제의 성업은 민초가 모두 다 경모해 받드는 곳이나, 이제 대제의 능 앞에 배립(拜立)하여, 대제유신의 홍업(鴻業)을 일으키신 이래, 과거 70여 년간을 공손히 돌아 볼 때, 메이지대제의 시대에는 정청(征淸)·정로(征露)의 양 전쟁을 비롯하여, 동양평화의 기초가 되는 일한병합이 성립하고, 또 앞 천황의 시대는 세계대전의 참전으로 제국의 국위를 사해에 선양했던 것이다.
쇼와(昭和)의 성대가 되어서는 만주국의 탄생·중화민국의 재건을 보고 동아공영권을 확립하며, 또 일·독·이의 삼국동맹 성립으로 세계질서가 건설하는 중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메이지대제의 혜려와 신위의 가호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성은의 무궁함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행의 얼굴에도 그와 같은 감회의 기색이 어려 있었다.
모모야마 능을 물러나서 히가시(東) 능을 참배하고, 쇼켄 황태후의 생전의 유덕을 경모 해 받들었다.
다음은 군신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대장을 모시고 있는 노기(乃木) 신사를 참배했다.
이 신사는 모모야마 능의 참배하는 길 옆에 있다.
경내는 시즈코(靜子) 부인을 모시는 청혼(靑魂)신사가 있으며,특히 모든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은 1904~1905년 전쟁 당시에 여순 공략군 제3군단사령부에 보충되어, 또 대장이 항상 기거한 남만주 유수방(柳秀房)의 민가를 그대로 이건한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의 앞에는 대추나무가 한 그루가 있다.
이 대추나무는, 소학생들이 잘 부르는 노기 대장과 패장 ‘스테셀’과의 회견이라는 역사적인 장면을 있는 그대로 인 채로 대추나무를 분식(分植)한 것이다.
대문 밖에는 대장이 어렸을 때를 생각나게 하는 나가토노쿠니(長門國)쵸후(長府)에 있는 노기 저택의 모조건물이 있으며, 그 방은 살아있을 때 부모자식 세 사람의 상이 있으며, 마레스케 소년이 엄친으로부터 설교 받는 장면을나타내고 있다.
노기신사를 출발한 “버스”는 후시미 이나리(稻荷)신사 앞을 지나서, 토요쿠니(豊國)신사에 도착했다.
이 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공을 제신으로 하는 별격 칸페이샤(官幣社)이다.
이 신사의 창립 유서는,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공이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죽게 되자 유명(遺命)으로
낙동아미타봉(洛東阿彌陀峰)[현재의 토요쿠니묘역(豊國廟域)]에 봉장(奉葬)하고, 그 산기슭에 사전(社殿)을 만들은 것이다. 다음해 1599년 4월 18일 이장이 있었으며, 외람되게도 고요우제이(後陽成) 천황께서 정1위의 신계(神階)와 호우코쿠(豊國) 다이묘징(大明神)의 신호(神號)를 주게 되었으며, 1873년에는 별격 칸페이샤에 참가하게 되었다.
참배 후 일행은 조선신궁의 권(權) 궁사(宮司)였던 이 신사의 궁사 요시다 데이지(吉田貞治) 씨로부터 의미심장한 인사말을 들었다.
요시다(吉田貞治) 씨의 인사말
멀리서 오셔주셨습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매우 죄송합니다만, 저 멀리 조선에서 오신 여러분에게 한 마디 인사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올 2월까지 조선에서 신세를 졌으며, 이번에 이 신사의 궁사를 맡게 된 것입니다.
그 만큼 저도 조선사정은 조금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쪽에 차실이 있습니다만, 이 차도라는 것은 지나154)로부터 조선에 전해지고 조선에서 또다시 일본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얼핏 보아서 형식과 같이 생각되지만, 그러나 이 형식보다 존귀한 일본정신의 한 모서리를 찾아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건물을 보아서도, 그 형식은 조선에서 들어 온 것입니다.
나라(奈良)에 가보면, 그곳의 건물은 연대가 오래 된 만큼 조선의 건물과 흡사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본적인 정취가 배어 있으며 일본화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지만, 조선은 지나의 문물을 받아들여서 문화발전에 커다란 공헌이 있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조선화가 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여러분이 쿄토에 오셔서 감지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지나의 문물을 조선에 의하여 수입하고, 이것을 일본화한 것입니다.
즉, 일본의 피가 되고 살이 된 것이지요.
조선에도 쿄토의 라쿠야키(樂燒)에 필적하는 고려자기와 같이 조선 독특의 예술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까.
마음껏 조선 독특의 문화를 창조함과 함께 일본문화에 도움을 주시고 조장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다음으로 일본문화는 겉으로만 보아서는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이 표면만 보고 비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쿄토의 고쇼(御所)155)를 배관(拜觀)하면서 “매우 작구나”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이러한 것이 일본과 지나가 다른 점입니다.
일본에서는 지나와 같은 대규모의 성벽이 필요하지않는 것입니다.
국민 전부가 성벽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화(和)로써 군민일체(君民一體)가
154) 중국을 뜻함. 이하 동일함.
155) 천황의 거처.
되고 있기 때문에, 지나와 같은 만리장성을 축조해서 사람들에게 위엄을 보일 필요는 추후도 없습니다.
간소한 곳에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이끼가 자라난 뜰이나, 차실도 모두 간소하지만, 청아한 풍모를보이고 있습니다. 녹슨 곳에 여유로움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치를 바라보면서 차를 마시며 마음을 수련한다는 것이 존귀한 것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제가 조선에서 은퇴했다고 해서 조선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쿄토에 와서도 협화회의 일에 참여하고, 조선 출신의 동포를 위하여 힘이 닿는 한 힘을 다 하고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은 저도 여러분과 같이, 이것을 달성하는데 힘을 다 하지않으면 안 됩니다.
○
이상, 길전(吉田) 궁사의 말에 커다란 감명을 받고 일행은 길전 씨와 헤어지며 이 신사의 북쪽 이웃에 있는 대불전(方廣寺)에 참배했다.
이 대불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6년에 나라 동대사(東大寺)의 대불을 본 따서 창건한 것이다. 여기에 도요토미 씨의 멸망이 암시되었다는 “국가안강(國家安康)”이라는 범종이 매달려 있다.
대불전을 나와서 산쥬상겡도우(三十三間堂)(蓮花王院)를 참관했다.
이곳은 전에 고시라카와(後白河) 법황의 고쇼(御所)라고 전해지나, 법황은 불교에 귀의하여, 1169년 타이라노 시게모리(平重盛)에게 칙령을 내려서 불당을 세우고, 관음상 1천1체와 28부중을 안치하게 한것이 본원의 기원이다.
세로길이 66칸, 2칸마다 기둥이 있기 때문에 33칸당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다음은 니시오오타니(西大谷) 북문으로부터 토리베산(鳥辺山)을 바라보면서 키요미즈데라(淸水寺)에이르렀다.
토리베산은 헤이안(平安)조 시대부터 유명한 묘지로서, “버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유명한 폭탄 삼용사의 묘도 이 산에 있다고 한다.
키요미즈야키(淸水燒)를 파는 가게가 죽 늘어선 키요미즈 비탈을 올라가면 붉게 칠한 높은 인왕문에 도달한다.
문을 들어가면 종루, 서문, 삼중탑, 경당, 전촌당(田村堂), 본당, 석가당, 아미타당 및 오쿠노잉(奧之院) 등이 경승지를 차지하여 흩어져 있다.
이것들은 어느 것이나 국보로 지정된 것이다. 특히 본당은 그 양식이 현애조(懸崖造)156)로 앞 쪽에서 좌우에 걸쳐 무대가 낭떠러지에 걸쳐 있고, 139그루의 느티나무 긴 기둥을 줄 세우서 심어놓고 꺾쇠로 이것을굳혀서 못은 한 개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참으로 일대 기관(奇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본당 동쪽을 거쳐서 돌계단을 내려가면, 오토와(音羽)의 폭포가 있다. 3개의 대 홈통(筧)에서 떨어져,단풍이 수려한 한 한경(閑境)에 미관을 나타내고 있다.
키요미즈데라(淸水寺)에서 마루야마(圓山) 공원에 도착했다. 이 공원은 치옹인(知恩院)의 경내 땅에 접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름 높은 능수 벚꽃이 가운데의 조금 높은 원구(圓丘)위에 있어서, 여러 개의지주(支柱)에 지탱되고 있다.
다음은 치옹인에 참배, 여기에서 점심을 들었다. 현재의 절 경내의 여러 법당은 도쿠가와(德川) 씨의 귀의에 의하여 비로소 정비된 것이라고 하며, 삼문(三門), 어영당(御影堂), 집회당, 경장(經藏), 아미타당, 세지당(勢至堂), 당문, 대방장(大方丈), 소방장(小方丈), 종루 등을 구비한 참으로 규모가 굉장한 것
156) 산비탈 또는 낭떠러지 등을 이용하는 건축양식으로 무대조(舞台造)라고도 한다.
이다.
그중에서 어영당은 개조(開祖)인 법연(法然)승의 목상을 안치한 곳으로 1633년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가 건립을 시작하여, 에도(江戶) 초기의 민중적인 불전의 대표적인 유구(遺構)라고 일컬어진다.
본당의 동남쪽에 당산(唐傘)이 꽂혀있으나, 이것은 치옹인의 카라카사(唐傘)라고 말하며 히다리징고로(左甚五郞)가 잊어버리고 놓고 간 것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일행은 어영당에서 참배를 마치고,속되게 센죠지키(千疊敷)라고 부르고, 송경(誦經) 강학(講學) 등 대중 집회의 도장으로 쓰이고 있는 집회당을 보았으며, 여기부터 내부의 소방장에 이르는 “우구이스바리(鶯張)”157)의 복도 가장자리를 걸으면서 대방장을 참관했다.
이 우구이스바리는 발자국마다 꾀꼬리의 울음소리가 영롱하게 울린다.
대방장은 실내를 부처 칸, 비는 칸, 상단 칸, 중단 칸, 하단 칸, 국화 칸, 소나무 칸, 꾀꼬리 칸, 매화칸, 버드나무 칸 등으로 칸을 막고, 각 실에는 장벽(障壁)과 장지문 및 판자문의 그림이 고색창연하게 고상하게 보인다.
그리고 상단 칸은 지존의 칸으로, 가장 장려함을 갖추어 메이지 이후에는 1875년 6월2일, 메이지천황이 오셔서, 주찬을 드신 것을 비롯하여, 영소(英昭)황태후와 쇼켄(昭憲)황태후 양 폐하의 행차, 동궁이었던 금상폐하, 치치부(秩父)궁, 타카마츠(高松)궁, 미카사(三笠)궁 각 전하가 오실 때마다 휴게하신 영광을 입은 것이다.
또 각 실의 장벽과 장지문 및 판자문의 그림은 모두 카노우슈메노스케 나오노부(狩野主馬助尙信), 카노우 노부마사(狩野信政), 흥의(興意), 법교정신(法橋定信) 등의 화필이라고 한다, 대부분은 금박으로 극채색으로 되어 있다.
치옹인에서는 교화사업 외에 흥아 사업에도 일역을 담당하고 있다. 각지에서 시국대강연회의 개최,각종 인쇄물의 간행과 반포, 후방 보육사업 등 외에도 가장 주목해야 할 사업은 몽고청년의 “라마” 교도의 초청훈육이었다.
본원에서는 이미 1938년 5월, 만주국 및 몽고연합자치정부의 원조를 얻어, 청년 “라마” 교도 20명을 초청하여, 훈육 만 2개년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1940년 5월에 귀국시켰으나 그들은 각각 신흥 만몽의 제1선에 서서 활약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제2회의 “라마” 유학생 20명을 훈육중이라고 한다.
다음은 헤이안진구(平安神宮)에 참배했다. 붉고 푸른 큰 홍살문 앞에서 참배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신궁은 캉페이(官幣)대사(大社)로 1895년 쿄토시에서 헤이안(平安) 천도 1,100년 제를 올리는데 즈음하여, 칸무(桓武)천황의 큰 위업을 추모하고, 이 신궁을 창건한 것이다.
제신은 칸무천황과 코오메이(孝明)천황을 봉사(奉祠)하고 있다.
본전(本殿) 뒤에는 신원(神苑)이 있다. 이 신원은 조선 창덕궁의 비원을 연상시키는 곳으로, 큰 못에 물을 채우고 나무와 돌이 청초한 취향 깊으며, 정적한 명원이다.
모래 10월 22일에 시행되는 지다이마츠리(時代祭)는 시를 통틀어 번성하며, 기온(祇園)제 및 아오이(葵)제와 더불어 쿄토의 3대 제전의 하나이며, 이 지다이제는 1895년 이 신궁 창건 때부터 해마다 실시되어, 헤이안시대 처음부터 메이지시대까지 천년 남짓의 문물제도의 변천과 정치 변란의 연혁을 구체화시켜서, 이것을 시대 순으로 가지런히 하여, 신행(神幸)에 받치는 행렬인 것이다.
다음은 헤이안신궁에서 상코(三高)와 제국대학 앞을 지나서 시모카모(下加茂)를 건너 고쇼(御所) 참관으로 향했다.
고쇼는 구 황궁이 있었던 곳으로, 주위 일대는 잔디가 훌륭하며 수목이 우거져 저절로 신성함이 느껴진다.
정면에 건례문(建禮門)이 있고, 안에 자신전(紫宸殿)과 청량전 등이 있다. 이 자신
157) 마룻 널을 까는 방법의 하나. 밟으면 휘파람새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나도록 마룻 널을 깖. 또는 그런 마루.
전은 옛날 국가의 중요한 의식이 시행된 곳으로 다이쇼(大正)천황과 금상천황 양 폐하가 즉위의 대전도여기에서 거행된 것이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전(殿) 위에는 천황이 등극하신 옥좌와 황후의 옥좌였던 어한대(御恨臺)가 있고, 18층의 남쪽 계단 좌우에는 유명한 사콩(左近)의 벚나무와 우콩(右近)의 타치바나(귤) 나무가 있다고 한다.
다음은 키타노텡망구우(北野天滿宮) 앞을 지나서, 금각사(金閣寺)에 갔었다. 금각사는 원래 카마쿠라(鎌倉)시대에는 사이온지 킨츠네(西園寺公經)의 별장이 있었던 곳이었으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滿)가 이것을 양도받아서 사후에 유명(遺命)으로 절로 만들었다고 한다. 금각은 원내의 못에 임해서 세운 누각으로 원래는 주택과 부처절의 절충식으로 건축한 건물이라고 한다. 각은 3층 누각으로, 첫 층과 제3층 사이는 지붕이 없으며, 제3층의 지붕 안은 지금도 금박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또 아래층에는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법체(法體)의 좌상이 있다.
다음은 아라시산(嵐山)에 가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이 산은 해발 375미터에 지나지 않으나, 그 명성은 세상에 높다. 북쪽 기슭을 흐르는 오이가와(大堰川)과 아울러 자연미가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부터 단풍의 명소로서 불려 왔으나, 카메야마(龜山)시대(13세기)에 요시노(吉野)벚꽃을 이식해와서는 꽃의 명소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일행은 대언천의 맑은 흐름에 배를 띄우고 천하의 가승(佳勝)을 감상했다.
여기에서도 기념사진을 찍고 니시홍간지(西本願寺)행은 중지하고 히가시홍간지(東本願寺)앞을 지나서 여관으로 돌아 왔다. 오후 5시가 지났음으로 실로 8시간 남짓이나 걸렸었다.
○ 쿄토 도중에서
別樣山川各樣秋, 遊筇始覺到名州, 看看景物佳如此, 恨小今行一霄留. 가천구사(嘉川久士)
壯觀古都今始知, 徘徊盡日步遲遲, 神社佛堂何事急, 戰時誠祝必勝思. 청하달빈(淸河達斌)
金閣在西淸水東, 儼然豊國社其中, 松石千秋名勝地, 敬神崇佛舊邦風. 부산삼(富山森)
○ 모모야마 고료(桃山 御陵)
遙拜桃山旣有年, 戒心今日謁陵前, 追慕無量先帝德, 恩霑草木又山川. 강본봉훈(康本鳳薰)
慕仰桃山瑞日紅, 東西帝業永無究, 微誠敢碣再三拜. 但願速成興亞功. 청하달빈(淸河達斌)
○ 노기신사(乃木神社)
帝國誰云一等功, 將軍家業卓無究, 忠著千秋超海外, 節高萬丈沖天中. 청하달빈(淸河達斌)
征露凱旋鐵血誠, 風雲際遇大功成, 騎馬讀書餘舊踰, 一家忠烈死猶榮. 부산삼(富山森)
○ 호우코쿠 신사(豊國神社)
追憶當年天下猷, 偉勳赫赫卓千秋, 若使將軍今世在, 西征北伐有何憂. 청하달빈(淸河達斌)
○ 범주(泛舟) 아라시산(嵐山) 아래서 읊음
雙山對翠一江流, 海國風煙最勝頭, 扁舟滿載斜陽去, 岳色波聲萬古秋. 안동정회(安東正會)
10월 21일(화) 맑음 때때로 흐림
하루만의 체재로 쿄토를 떠나는 것은 어쩐지 애석한 느낌이 든다. 오전 9시 24분 쿄토역을 출발하여 우네비(畝傍)로 향했다.
기차는 가을색이 한껏 청려한 야마토(大和)평원을 달려, 동 11시 30분에 우네비에 도착했다. 이 역은 신궁참배객을 상대로 만든 역 답게, 구내는 말끔히 청소가 되어, 건물도 무척 단정하고 우아하다.
여기서부터는 신궁참배 전차로 바꾸어 타고 약 10분만 가면 카시하라(橿原)신궁역에 도착한다.
일행은 역전 식당에 둘러, 짐을 맡기고 점심을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경앙(景仰)하든 카시하라신궁 및 진무(神武)천황 능을 참배하게 된다. 참배 길은 평탄하고 광활하며, 주위는 가을 햇빛에 비단과 같이 한층 아름답고, 신궁의 영역은 삼엄한 기운에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참배 길은 기원 2천 6백년(서기 1940년)의 성전기념사업으로, 신궁의 경지 내와 능의 참배 길을 확장 정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군데군데 부자연스럽고 안정이 안 된 곳이 있었다.
종이 부스러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는 참배길을 신궁을 향하여 가면 왼쪽에 후카다(深田)못이 있고 저 멀리 천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듯이보인다.
이 신궁은 말할 것도 없이, 황조 진무(神武)천황 및 히메타타라이스즈(媛蹈鞴五十鈴)황후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신궁은 1889년 메이지천황의 조칙을 받아 창건한 것이며, 다음 해 1890년 3월20일 궁호(宮號)를 카시하라신궁이라고 정하고, 캉페이 타이샤(官幣大社)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경내와 외원(外苑)이 굉장히 크고 삼엄한 기운에 가득 차 저절로 엄숙함이 감돈다.
지금의 사전(社殿)은1939년에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하며, 나무의 향기가 지금까지도 풍긴다는 사전은 굉대하고 장엄하다. 외원에는 야외 공회당을 비롯하여 대강당·궁도장·건국회관·팔굉(八紘)기숙사·카시하라 문고·야마토
(大和)국사관 및 대운동장 등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성의를 다하여, 정식으로 참배를 마치고, 진무천황의 신령이 조용하게 내리고 계시는 우네비산의 동북능의 참배에 향한다. 이 능은 신궁으로부터 약 4,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능 위에는 서송(瑞松)이 가득한 태고를 이야기 하는 것처럼 울창하고 번성하여, 경내는 광활하고 엄숙하다.
능 앞에 공손하게 선 일행의 얼굴에는 엄숙한 얼굴빛을 확실하게 읽을 수 있었다.
유구한 2천 6백여년의 태곳적을 생각하며, 영겁의 미래에로 이어지는 때의 흐름을 명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끝이 없는 황위(皇威)를 능을 참배하면서 한층 강하게 느꼈다.
그런 후에 일행은 영전(永田) 단장의 선창으로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하고 신전(神前)에서 굳게 맹서의 말을 받쳤다. 신전에서의 제창은 일반의식에서 제창하는 것보다 몇 배되는 감격이 가슴 속을 넘쳐 흘렀다. 신림(神林)에 산울림이 되어 울려 퍼진 여음이, 이제 와서도 어쩐지 그립다.
그리고 참배자는 끊임이 없다. 그중에서도 일행이 이상한 느낌을 가지고 본 것은 5, 6세의 어린애가 엄마를 따라와서 참배하는 태도였었다.
그 어린애가 공손하게 배례를 하고, 합장하며 머리를 숙여 서 있는 모습은 참으로 진지한 태도였다. 물론 개구쟁이기 때문에 몸짓은 단정하지 않지만 이것은 오히려 나무라지 못하는 순진한 것이었다.
좌우간 그 어린애가 합장하며 머리를 숙이고 빌고 있는 것은 천진난만한 태도로 보아서, 신국 일본의 본연의 모습을 보고 또한 소국민까지 경신(敬神)사상이 철저하고 있다는 것을 찾아낸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행은 그 아이의 진지한 참배 모습을 칭찬하면서 능을 사퇴했다.
삼가 되돌아 볼 때, 천자성명(天資聖明)하시고 또한 영무절륜(英武絶倫)하신 황조 진무천황께서,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을 봉승(奉承)하시고, 휴우가(日向)의 나라로부터 멀리 동쪽으로 향하시는 도중 수많은 적들을 평정하셔서 야마토 나라에 도착하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황위는 국내에 떨치고,성덕은 팔방에 빛났음으로, 천황에게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유원(悠遠)하고 숭고한 대이상을 선포하셔서, 우네비(畝傍)산의 동남 카시하라의 땅에 도읍을 정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천진일사(天津日嗣)의 황업을 무궁하게 회홍(恢弘)하셔서, 만대까지 흔들림이 없는 황국의 기초를 세우신 것이다.
즉, 우리가 지금 참배한 신궁의 땅은 천황의 지위의 홍기(鴻基)를 여신 존귀한 황궁의 성적(聖蹟)이었던 것이었다.
이것을 생각하면 회고(懷古)의 느낌이 절실하다.
우리는 오늘 카시하라신궁 및 우네비(畝傍)산 동북능을 참배하고, 엄숙한 황조(皇祖)의 만방(萬邦)에비할 데 없는 홍기를 지어주시는 황모(皇謨)를 사모하며, 아울러 끝없는 성덕을 경모하여, 천양무궁의 황운(皇運)을 부익(扶翼)하고 미영(彌榮)을 빌어 받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감을 더한층 몸에 배어오며 감득했다.
카시하라신궁 및 진무천황 능에 참배한 감격을 가슴에 안고, 일행은 또 고도 나라를 찾기 위하여 오후 2시 52분 우네비(畝傍)를 출발하여 나라로 향했다. 우네비(畝傍)·미미나시(耳成)·카구(香久)의 세산이 정립(鼎立)하는 야마토평원의 가을빛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또 건국 초로부터 50여 조정(朝廷), 1천 5백여 년간 역사가 전개된 이 야마토를 생각하면서 나라에 도착했다. 오후 3시 42분이었다.
7대 70여년의 제도(帝都)로서 화려했던 나라의 도읍도, 오늘날에 와서는 한 고도에 불과한 정적한 작은 도회지이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옛날을 더듬게 하는 사찰이 있으며 탑이 있고 불상이 있어서, 훌륭한 광경을 보이고 있다. 또 나라와 조선은 문화교류가 있었던 곳으로서, 나라에 있는 미술공예의 유품은 아스카(飛鳥)·텐페이(天平) 양 시대의 소산이며, 이 시대에는 조선으로부터 많은 화공(畵工)·와사(瓦師)·불사(佛師)·건축공들이 초청되어 천부의 기예를 발휘했다고 하는 사실(史實)을 증거로 보면,바로 나라의 한 사찰, 한 불상, 한 탑이 하나도 남김없이 조선과는 유서 깊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라는 점점 더 친숙함을 느낀다.
일행은 각각 인력거를 타고 시내의 명소고적을 돌아보기로 했다. 순서대로 설명을 해 보기로 한다.
코우후쿠지(興福寺)는 남도의 7대사 중의 하나로, 이 절의 기원은 후지와라 카마타리(藤原鎌足)가 타이카노카이신(大化改新)의 성취를 몰래 기원해서 만든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을 카마타리의 사후에 부인이 이 삼상을 산카이지(三階寺)에 안치했으나, 그 후 또 다시 우마사카지(廐坂寺)에 옮겨져, 716년헤이죠(平城)천도와 함께 현재지에 옮겨져서 코우후쿠지(興福寺)가 된 것이다. 여기에 있는 오중탑은 사루사와노이케(猿澤池)의 언덕에 있으며, 높이는 165척이나 되며, 쿄토의 토우다이지(東大寺)에 버금가는 높은 탑으로서 우리나라 현존 탑 중에서도 높이가 둘째를 차지한다. 창건은 730년이지만, 그 후 전쟁이나 낙뢰 때문에 몇 번이나 불타고, 현재의 탑은 1426년에 재건하여 무로마치(室町)시대의 복고건
축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또 오중탑의 앞에는 8세기에 만들어진 석등의 기초가 남아있다.
다음은 토우다이지(東大寺)의 대불전에 갔다. 이 절도 남도(南都) 7대사 중의 하나이며, 이 절은 화엄종의 대본산으로 쇼우무(聖武)천황이 국가진무(鎭撫)를 위하여 건조한 대가람이다. 소위 “나라의 대불”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이 대불은 높이 55자 5치(약 17미터), 얼굴길이 16자(약 5미터), 눈길이 3자 9치(약 1미터 20)라고 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것이다. 그리고 이 대불상이 안치되고 있는 대불전도 목조건물로서는 세계 최대라는 자랑을 갖고 있는 건물인 것이다.
다음은 대종루(大鐘樓)를 참관했다. 현존하는 것은 카마쿠라(鎌倉)시대에 재건된 것이다.
양식은 천축(天竺) 무늬에 당 무늬와 일본 무늬를 혼용하여 기법은 매우 자유스럽다.
여기에 매달린 큰 종은 대불전 창건 당초의 것으로서, 직경 9자 1치(약 2미터 70), 길이 13자(약 4미터), 두께 8치(약 24센티)나 된다.
다음으로 니가츠도우(二月堂) 상가츠도우(三月堂)를 보았으며, 와카구사(若草)산 기슭을 지나서 카스가(春日)신사에 참배했다.
이 신사는 카스가산 기슭에 천년의 신목(神木)이 우거진 속에, 단청의 회랑전사(殿社)가 아름다운 색조를 나타내고 있는 곳이다.
이 신사는 769년에 지금의 땅에 창건 된 것으로, 제신은 히타치카시마(常陸鹿島)의 타케미카츠치노미코토(武甕槌命), 시모우사카토리(下總香取)의 이하누시노미코토(伊波比主命), 카와치히라오카(河內枚岡)의 아마츠코야네노미코토(天兒屋根命) 및 히메가미(比賣神)의 네 위의 신을 모시고 있다.
또 이 신사는 후지와라(藤原) 씨의 조상신으로서, 그 집안 절인 코우후쿠지와는 가지런히 순치(脣齒)의 관계를 가지며 항상 그 흥망성쇠를 함께하고 있다고 한다.
이 신사의 신목(神木)은 역사상 유명한 것이나, 신직(神職) 및 코우후쿠지 및 코우후쿠지의 승도(僧徒)가 무엇인가를 강소(强訴)하고자 할 때는, 반드시 신목을 받들어 입락(入洛)했으며, 엔랴쿠지(延曆寺) 승도의 히요시(日吉)의 신여(神輿)와 함께 조정에 대한 압박이었다고 전해져 온다.
나라에 도착한 것이 늦었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충분히 볼 수가 없었다.
카스가신사의 참배가 끝났을 때는 해가 저물어서 어두컴컴해졌다.
숙소는 사루사와(猿澤) 호반에 있는 다이몽지(大文字)이며 오중탑은 바로 앞에 보이고 호반에 채녀사(采女社), 옷걸이버들(衣掛柳)이 보인다.
마지막으로 신록(神鹿)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신록은 옛날 카스가묘진(春日明神)카시마(鹿島)로부터 천좌(遷座)할 때, 사슴에 이끌렸다고 전해오며 신록의 유래는 오래되었다. 현재 사슴의 숫자는 1천수백두에 이르며 해마다 6, 70마리가 태어난다고 하며, 카스가 신사의 참배길 남쪽에 신록사육장이 설치되어 있다.
신록은 낮에는 사육장으로부터 해방되어서 공원 안을 유유히 산보하며 사람들과 친숙하게 지낸다.
사슴 모으기라고 하여, 신록보호회에 신청하면, 나팔을 불어서 사슴을 모은다고 한다.
사슴은 나팔소리를 듣고 금세 모이도록 훈련되고 있다고 한다. 또 가을 사슴뿔 베기도 세상에 알려져, 여러 가지 가공을 해서 토산품을 만들고 있다.
○ 카시하라 신궁(橿原 神宮)
畝傍山下橿原前, 天命昭昭無限年, 八紘爲宇情神發, 六合成都理想傳. 청하달빈(淸河達斌)
○ 카스가 신사(春日 神社)
吉社松杉白日寒, 靈山靈水護神壇, 麋鹿隨人求食餌, 呦呦漻漻惹奇觀. 남상익(南相翊)
春日社前逢昏秋, 盡誠拜客思悠悠, 此地公園何所樂, 長生消息鹿呦呦. 청하달빈(淸河達斌)
○ 대불전(大佛殿)
大佛情神救世先, 儼然在此幾千年, 東洋天地方多事, 神力益揚保四邊. 청하달빈(淸河達斌)
杉木參天佛殿連, 觀音菩薩坐似然, 如雲士女祈冥福, 鍾落斜陽萬樹煙. 부산삼(富山森)
10월 22일(수) 맑음
오늘은 여태까지 절실히 기다리고 있었든 이세진구우(伊勢神宮)의 참배 날이다. 계속되는 좋은 날씨는 오늘도 계속된다. 오전 8시 34분, 나라 역을 출발하여, 카메야마(龜山) 경유 오전 11시 반 넘어서 야마다(山田)에 도착했다. 역전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곧바로 외궁 토요우케(豊受) 대신궁에 참배하러 간다.
야마다역 정면의 전찻길을 따라서 걸으면서 나가기를 약 5분만에 외궁의 신역에 도착한다.
신원의 참배도의 오른 편에는 다이쇼(大正)천황이, 동궁이었을 때 손수 심어 놓은 소나무, 그 외에 일청·일로의 양 전쟁 때의 전리품인 대포나 큰 닻이 있으며, 또 참배도의 왼편에는 청아한 풍치림이 숲을 이루며무성하고, 나무 아래에는 눈과 같이 흰 신계(神鷄)가 모이를 쪼는 것이 보인다. 멀리 정면에 신메이주쿠리(神明造)158)의 엄숙한 첫째 홍살문을 봐왔을 때는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되고, 몸도 마음도 긴장되는 기분이다.
천천히 걸음을 나아가면 오른편에 녹나무(楠)의 노목이 천여 년의 비바람을 쇠고 의연하게서 있다.
우리는 손과 얼굴을 맑히는 곳에서 열성껏 손을 씻고, 입을 헹구고 심신을 맑히며, 옥자갈 소리도 시원하게 참배도를 나아갔다.
한참 만에 오른 쪽의 나무사이에 시라키즈쿠리(白木造)159)의 제전(齊殿)이 있으며, 이것과 지붕이 이어져서 행재소(行在所)가 남서쪽에 있다. 이어서 오른 쪽에 노송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은 일모야즈쿠리(入母屋造)의 카구라덴(神樂殿)과 타이마(大麻)160)수여소가 있으며,여기에서는 신전(神殿)도 가깝고 노송의 판자 담 넘어 정정하게 자란 신삼(神杉)나무 사이로 정전(正殿)의 치기(千木)161)가 보인다. 곧 토요우케 대신궁의 판자울타리 남문 앞에 당도한다.
여기부터 내문으로 들어가, 바깥 옥구슬 울타리 문 앞으로 나아가, 세상에 고마울 데 없는 신덕을 우러러 받들며 흰 비단의 가리개 앞에서 머리 숙여 배례했다.
토요우케 대신궁은 외궁 또는 오타라이노미야(度會宮)이라고도 하며, 제신은 토요우케 오우미카미(豊受姬神)이시며, 아마테라스오우미카미(天照大神)의 명령을 받고 우리 국토를 지키며, 오곡의 풍요를 보호하시는 신인 것이다.
처음에는 단바노쿠니(丹波國) 히지(比治)의 마나이노하라(眞奈井原)에 진좌했
158) 망치와 못을 사용하지 않는 일본의 건축양식.
159) 껍질을 벗긴 나무재료를 쓰는 건축양식.
160) 이세신궁이나 신사로부터 수여하는 패찰.
161) 사전(社殿) 옥상에 장식으로 붙여 놓은 나뭇가지.
으나, 제21대 유우랴쿠(雄略)천황 22년(5세기 후반)부터 1,450여 년 전, 코우타이진구우(皇大神宮) 진좌한 때부터 481년 늦게 현재의 야마다(山田)의 땅에 진좌하신 것이다.
신전의 구조는, 유일한 신메이주쿠리 억새지붕이라고 하는 순 일본풍의 가장 오래된 양식인 건물로, 지붕에는 아홉 가닥의 카츠오기(鰹木)162)와 그 동서의 양끝에는 투각된 치기(千木)가 있다.
외궁 참배를 끝내고, 일행은 버스를 타고 내궁 참배로 향했다. 신궁 앞에서 하차하고 우지바시(宇治橋)로 향하여 나아갔다.
우지바시는 이스즈가와(五十鈴川)에 가설한 모두 노송나무로 만든 순 일본식 다리다.
길이 80미터, 폭 6미터 반이며 그 앞뒤에는 신메이주쿠리의 큰 홍살문이 서 있다.
근대에 와서는 신궁의 천궁(遷宮)163)하는 해에 새롭게 설치하도록 예가 되어 있다. 현재의 다리는 1929년 9월에 놓은 것이라고 한다.
우지바시를 건너 왼쪽 신원(神苑)의 나무 사이에 커다란 포신이 있다.
이것은 일로전쟁 때, 동해의대 해전에서 우리 연합함대가 포획한 적의 전투함 “아리욜”호의 주포인 12인치 포인 것이다.
카미지산(神路山), 츠츠미가타케(鼓之嶽)의 영봉(靈峰)을 바라보면서 시원한 이스즈가와의 청류를 옆으로 속진을 쓸고 닦은 옥 조약돌을 밟으며 참배도를 나간다. 주위는 대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되어 엄숙하고,놓아진 백계(白鷄)가 유유히 모이를 쪼는 광경은 참으로 한적한 정취다.
이스즈가와는 미모스소카와(御裳濯川)라고도 하며 이세(伊勢)의 명승지다.
코우타이진구우를 참배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맑고 투명한 이스즈가와의 흐르는 물에 입을 헹구고 손을 맑히고 신기(神氣)를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스즈가와는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아서 깨끗하다.
바닥에 투명해서 보이는 옥과 같은 조약 돌, 유유히 무리를 이루며 헤엄치는 잉어는 자연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서 영전(永田) 단장으로부터 이세신궁의 유래에 관해서 설명을 들으며, 일행은 이 흐름에 마음의 더러움을 말끔히 씻어 맑힌후, 참배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행은 타이마수여소 앞에서 휴식하고, 평산(平山) 간사는 사무소에 정식참배신청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복장관계로 정식 참배는 할 수 없었다. 카구라덴(神樂殿)을 지나서 왼쪽에 오장전(五丈殿)을 참배하고 나아가니, 참배도를 사이에 두고 하늘을 찌르는 듯 호코스기(鉾杉)의 큰 나무는 높고 엄숙하게 솟고, 밟으며 가는 옥 조약돌 소리도 신비하게 울려서 오로지 엄숙하다. 나아갈수록 참배도는점점 골이 깊고 큰 삼나무는 엄숙해서 어쩐지 신비경에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 동안 나아가니 왼쪽에 큰 돌계단이 있으며, 이끼도 매끄럽게 옛날을 말하는 듯이 보였다.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며, 신전(神殿)을 멀리서 참배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높이 외쳤다.
일행은 다만 신엄(神嚴)숭고함에 기를 빼앗겨, 신우(神佑)를 빌며 신은(神恩)을 사(謝)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황국신민의 서사”의 큰 소리의 여음은 천고영역에 산울림이 되어 울렸다.
코오타이진구우는 오오카미아마테라스를 모시고 있는 대궁으로, 이세님, 이세신궁, 이세 대묘(大廟)라고 하는 별칭이 있으나, 올바른 칭호는 간단히 “신궁”이라고 호칭할 뿐이다. 카시하라신궁, 메이지신궁, 조선신궁 등과 같이 지명 혹은 연호를 위에 붙인 신궁과는 달라서, 이세의 대신궁은 외람되게도 유
162) 신사(神社)나 궁전의 용마루위에 그것과 직각으로 늘어놓은 장식의 나무.
163) 20년마다 새로 지은 궁으로 천궁.
일절대적인 국가최고의 종사(宗祀)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간단히 “신궁”이라고 봉칭(奉稱) 해 왔던 것이다.
우리가 복장 때문에 정식참배가 안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신궁에는 신이 수여한 거울이 받들어져 있다. 사전(社殿)도 태고의 풍모를 지켜서 땅을 파고 기둥을 세우서 조영했기 때문에 오래도록 보존할 수 없다. 그래서 옛날부터 식년(式年)이라고 하여20년 마다 궁을 세우서 천궁 하는 법칙이 되어 있다. 이것이 천궁(遷宮)이며, 신궁에서 가장 엄숙한 제사의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일행은 신전을 물러나서, 카구라전(神樂殿)에서 신악을 봉주(奉奏)하고, 신려(神慮)를 위로하며 받들었다.
이 신악은 태고신이며 전통이라고 하며, 신악을 연주하는 사이에는 야마토마이(倭舞)라고 불리며 소녀가 사카키(榊)
164)의 가지를 갖고 춤추는 것이다. 참으로 숭고하고 엄숙한 느낌이 가슴에 와 닿는다. 이것을 마치고 오늘 일정 마지막 “코스”인 후타미가우라(二見浦)에 도착했다. 어염전(御鹽殿)이 있으며, 또 부부바위가 있기 때문에 이름이 높다. 부부바위는 바닷속에서 마주보며 서 있는데 두 개의 괴상한 바위로 높이가 큰 것은 9미터, 작은 것은 4미터 남짓이어서, 두 바위는 금줄(注連繩)로 이어져 있다.
또 수족관이 있으며 바닷속의 모든 것을 소개하고, 해녀의 실연(實演)도 보이고 있다. 또 “케이블카”를 타고 후타미가우라의 전경을 전망하는 것도 재미있다.
후타미가우라의 구름에 미련을 남기고, 일행은 토바(鳥羽)에 도착했다. 해가 져서 얼마 안 된 어둠빛이 보일 때다. 바다의 향내가 코를 찌르고, 바다는 잿빛으로 조용하다. 여관 대신관(對神館)은 해안을 따라 별장과 같이 적막한 느낌이 든다.
이 지방은 어업지로서 전국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어업법에도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해녀 작업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저녁 식사 후 8시부터 다음에 소개하는 바와 같이 제1회 성지참배감상피로(披露)좌담회를 열었다.
또 각인의 존칭은 생략하고 다만 성씨만 적었다. 양해를 구한다. 또 문장 중에 잘못이 있으면 필자의 책임이다.
○ 이세진구우(伊勢神宮)
伊勢神宮奠海邊, 古杉老檜不知年, 一境莊嚴淸肅地, 人人瞻拜盡誠虔. 남상익(南相翊)
倉山屹立鈴川深, 萬世皇靈一系心, 太和元氣從何出, 神樂時時降福音. 청하달빈(淸河達斌)
高倉山屹海之東, 萬世鴻氣伊勢宮, 仙娥吹樂神宮獻, 草木群生感化中. 부산삼(富山森)
○ 후타미가우라(二見浦)
海雲萬里浪花秋, 無數晴帆落遠洲, 一面靑山如畵裡, 尋常家屋盡名樓. 가천구사(嘉川久士)
今日偶然到別區, 萬千其像盡難圖, 世界名勝無過此, 騷人墨客自成都. 청하달빈(淸河達斌)
碧海如天波始秋, 帆光鷺影落來洲, 魚龍背上望仙界, 更步斜陽紅葉樓. 부산삼(富山森)
164) 비쭈기나무. 예로부터 신성한 나무로서 그가지를 신전(神前)에 올림.
○ 토바(鳥羽) 가는 길에 읊음
樓下平湖湖上山, 楓枯秋色送輕寒, 經營幾日東遊意, 除却千忙糊一閒. 가천구사(嘉川久士)
제1회 좌담회
일시 : 10월 22일 오후 8시부터 9시 반까지
장소 : 토바(鳥羽)해안 거리 대신관(對神館)
○ 영전(永田) 단장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좌담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기탄없이 사양마시고 무엇이든지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발한 이후 가끔 좌담회를 열 작정이었는데, 틈이 없었기 때문에 또 적당한 장소가 없었기에 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해안이기도 하고, 또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임으로, 좌담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성지 참배를 겸해서 내지를 시찰하는것은, 당국에서도 매우 중요시 하는 바이며, 또한 유도연합회로서도 중시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복명서는 여러분이 진술한 것을 기록을 해서, 복명서에 대신할 생각입니다.
성지 참배의 중요성은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것도 없이 중차대한 것입니다. 올봄에, 이 계획을 기안하고 위의 결재를 받을 때에 오노(大野) 정무총감으로부터 주의도 있고 해서 올 봄에 척무성(拓務省)을 비롯하여 각 부, 현청과 연락을 취하기 위하여 담당 계원을 파견했던 것입니다.
또 이러한 종류의 시찰단이 지방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총독부로서 직접 인솔하여 참배를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번 시찰이 장소라든가 내용 등에 관해서 내년부터는 개선을 요하는 점이 없다고 한정할수 없음으로, 이러한 것에 대한 여러분의 요망사항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는 처음으로 성지참배단에 참가하신 분도 있겠으며, 또 종전에 성지 참배를 마친 분도 이번에는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감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감상을 솔직하게 이야기 해 주실 것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얻은 바를 이야기 해 주십시오. 그러면 지금부터 이야기를 진행하기 바랍니다.
○ 윤(尹) 전남 강사(講士) 저는 15, 6년 전에 동경, 쿄토와 기타, 다른 지방을 보고, 그 후에는 이번에 처음 내지에 왔습니다.
그때는 성지참배가 목적이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유림성지참배단에 참가하여, 이세신궁을 비롯해서 각 성지를 참배하게 된 것은 영광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먼저 각 신궁과 신사에 참배하고 느낀 것은, 역사적으로 세계에 비할 데 없는 신국 일본의 존엄함을 터득했습니다.
그리고 또 수천 년의 국가의 안태와 국민의 행복을 향유함은 국체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으로 느낀 것은 철도연변의 민가의 가옥과 전답이 문화적으로 급속히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볼 때에 내지인의 생활상태가 얼마나 풍족한가를 알았습니다.
조선으로 돌아가서는 이점을 농민에게 이야기하며, 서로 손을 잡고 농촌문화향상을 도모하고자 생각합니다.
○ 영전 단장 15, 6년 전에 쿄토에 오셨다고 하는데, 그때에 모모야마 능에도 참배했습니까.
○ 윤 전남 강사 참배했습니다.
○ 영전 단장 그때 참배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저는 이번으로 5번째입니다만, 그때마다 감상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 윤 전남 강사 감상은 일반국민이 메이지대제를 어떻게 경모했느냐, 또 대제가 국민을 얼마만큼 애무했는지를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그때의 감상은 메이지대제의 성덕을 추모하고, 더욱더 충군애국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 고산(高山) 평북 평의원 저는 18년 전에 평북도의원 시대에 모모야마 능에 참배했습니다.
그때의 감상은 메이지대제가 일시동인의 호의 있는 의향으로 일한병합을 하고, 그 끝없는 황위(皇威)가 반도까지 미친 것을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이번 능 참배를 해서 느낀 것은, 참배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카시하라신궁, 이세신궁에서도 참배자가 많은 것을 보고, 시국이 이렇게 긴박하고 또 생산 확충에 여념이 없기 때문에, 신궁 참배는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참배자가 많은 것은 일본국민의 경신사상이 철저하며, 이렇게 하여 단결력이 강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팔굉일우의 대 이상도 국민의 단결과 신의(神意)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우리들도 경신사상을 강하게 가지는 것과 동시에, 신도(臣道)실천, 진충보국의 열성을 받혀서 황국신민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봉공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에 돌아가서도 특히 이점을 강조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 백천(白川) 황해 강사 저는 작년 2천 6백년 기념식전에 초대를 받았으나, 사정에 의하여 참가하지 못했습니다만, 이번 유림성지참배단에 참가하여 처음 내지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은 조선이나 지나에서는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하나의 왕조가 대체로 3백년 길어서 5백년이 계속되느냐 마
느냐 하지만, 기원 2천6백년이라고 하며 한계통의 황실이 어떻게 하여 2천6백년이나 계속되었을까 하고, 남몰래 생각했습니다만, 실제로 내지의 성지를 참배 해 보니, 2천6백년은 말할 것 없이 몇 만 년이라도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국민의 애국심 즉, 국민이 신을 숭상하는 것은 신려(神慮)를 편안하게 받드는 것이며, 이것으로 인하여 신위(神威)의 가호는 일본을 하여금 몇 만 년이라도 계속하게 될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또 연선의 농가를 보았을 때 농민의 부력(富力)이 얼마나 풍부한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 강본(康本) 평남 대표 저는 이번으로 3번째 내지에 왔습니다. 1923년과 금년 기원절 및 이번으로3번째입니다.
1923년에 왔을 때는, 그 목적이 1919년 만세소동 후에 총독부로부터 조선의 중견청년에게 내지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하는 이유로 파견되었기 때문에 오직 내지의 각지를 둘러보고 오면 되었습니다.
아무런 사무적으로 무엇을 보고 오며 복명하라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행동을 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과 관계가 많고 풍속도 볼 것이 많은 큐슈(九州)에 가서 40일간 도시와 촌락을 보고 왔습니다.
그때의 감상을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느낀 것은 지도망이 완성되고 있다는데 놀랐습니다.
일반시민이 단결하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호주 모임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각 집의 호주가 회원이 되어 그 지방에서의 의논은 모두 호주모임을 열어서 결의하는 것입니다.
또 주부모임이 있어서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을 전부 맡아서 하고, 또 청년모임이 있어서 도로 수리나 신사 경내의 청소
같은 작업을 합니다. 또 처녀들은 처녀모임을 설립하여 군마(軍馬)의 사육 같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읍사무소를 방문했더니, 처녀모임에서 와서 차 대접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조선 같으면 자신의 부형의 친구가 와도 처녀가 나와서 대접하는 일이 없으나, 내지의 처녀는 풍속이 다른 40명이나 되는 우리들을 온정을 가지고 대접 해 주었습니다.
이번의 감상은 첫째로 이츠쿠시마는 일본 3경의 하나라고 하기에, 다소 유흥기분이 있는 곳으로 존엄함은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가서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이츠쿠시마신사에 봉사(奉祀)하는 신들의 위덕이 있기 때문에, 주민들의 덕화로 수천 년의 이 섬의 존엄을 지켜온 것입니다.
○ 청하(淸河) 함남 강사 제가 성지참배를 하고 느낀 것은, 전시 하에 일본의 모든 점에 있어서 이만큼 여유가 있을까 하고 마음 든든하게 느꼈습니다.
북지(北支)·중지·남지에 또는 남쪽지방에 몇 십만의 황사(皇師)가 출동하여 5년간이나 전쟁하고 있는 오늘날, 후방국민의 튼튼한 활동상이나 문화적인 시설에 여유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 신위(神威)의 위대함을 생각했습니다.
일청·일로의 양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도 신력(神力)이라고 생각하면, 팔굉일우의 큰 이상도 이 신우(神佑)에 의하여 실현되며 세계의 신질서도 실현되리라고 믿습니다.
○ 가천(嘉川) 경기 강사 제가 내지에 온 것은 이번으로 4번째입니다. 맨 먼저 온 것은 경기도 평의원으로서 1920년에 한 번과 두 번 째는 사용을 겸해서 성지 참배에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것이라고 들 만한 감상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성지 참배에 출발할 당초부터 책임이 중대하다는 것을 자각해서 출발했습니다. 우리들은 오늘날에 와서는 반도인으로서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으며 그 결과로보아서는, 내선일체라고 하는 숭고한 이상 아래에 이번에 창씨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으로서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으나, 제가 실질적으로 황국신민으로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는 완전한 황민으로서 성지참배를 할 수 없는 것이, 내심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미 신정 이래 31년이나 되었는데도,아직 황국신민으로서 손색이 있는 것은 무슨 일인가요. 우리는 내선이라고 하는 감정적인 구별을 근본적으로 뽑아버리고, 총독정치에 만강(滿腔)의 신뢰를 모으고 협력을 아끼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문패에는 가천구사(嘉川久士)라고 훌륭한 황민이 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 문에서 나오는 사람은 조병렬(趙炳烈)이 나온다고 하는 일은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번 성지 참배를 하면서 더 한층 강하게 느꼈습니다.
저는 조선에 돌아가면 경기도 당국자와 타합하여 성지 참배로 얻은 저의 이와 같은 굳은 신념을 강연회 같은 것을 열며 지방인사에게 호소할 작정입니다. 요는 우리는 입으로 말하는 것과 가슴에 담고 있는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탄식하는 것입니다.
○ 부산(富山) 함북 강사 제가 내지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시모노세키에 상륙해서 우선 느낀 것은 산림이 울창하게 욱어지고, 밭이나 제방이 완전히 정비되어 있는 일이나 또 농촌이 미화되어있는 것 무엇을 보아도, 문화적으로 조선보다 훨씬 전진하고 있는 것을 실지로 볼 수 있었던 것을 마음속으로 기뻐했습니다.
또 이츠쿠시마신사를 비롯하여 모모야마능·노기(乃木)신사·카시하라신궁·이세신궁을 참배하고 느낀 것은 참배객이 많았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리고 야마토(大和)민족의 불타는 것과 같은 애국심에는 오직 감격할 뿐이었습니다.
우리들 조선 2백만 유림을 대표하여 성지 참배에 온 이상은, 이와 같이 불타고 있는 것 같은 애국심을 감안하여 유도의 황도화(皇道化)를 도모하고, 그리하여 반도민의 황민화에 분골쇄신해서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서촌(徐村) 충남 강사 저도 처음으로 내지에 왔습니다. 저는 내지에 올 때는, 마음속에서 몰래“자, 내지구경이나 하고 가지”라고 하는 불성실한 마음을 갖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츠쿠시마의 신역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러한 불성실한 생각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과거 60년간은 살아와도 산 보람 없이, 지금까지는 두더지(토룡) 생활을 해 왔으며, 우물 속 개구리 생활을 해 왔구나 하는 것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각했기 때문에, 나이 이미 63세가 됩니다만, 오늘부터는 갱생해서 진충보국을 맹서하고 총독정치에 협력할 것을 여러분 앞에서 굳게 맹서합니다.
○ 안동(安東) 전북 강사 저도 처음으로 내지에 왔습니다.
원래 저는 견문이 좁기 때문에 성지 참배를 다만 내지 시찰로만으로 인식하고 왔습니다. 그러나 각 성지를 참배하면서, 참다운 성지 참배의 의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자각했습니다.
그리고 삼림이 울창하게 우거진 모양이나 하천 정리, 옛날의 우물정자를 생각나게 하는 정연(井然)한 논, 또는 사회질서가 규칙 바르다는 것 등도 보는 것 듣는 것, 오직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맹자에, “五畝之宅樹之以桑五十者可以衣帛矣鷄豚狗彘之畜無失其時七十者可以食肉矣百畝之田勿奪其時數口之家可以無飢矣”라고 있듯이 전국시대라도 이와 같은 왕정을 베풀었다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옛날부터 말하여져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말을 염두에 두고, 내지의 산천초목을 보았을 때, 또 각지의 삼엄한 성역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비로소 우리 일본의 정치는 고래의 천황에게 귀일하는 왕정이며, 제정(祭政)일치의 왕정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 산가(山佳) 경북 강사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감상은 선배 여러분이 말을 다 해버려서 저는 따로 말씀드릴 것은 없으나, 저는 지금부터 35, 6년 전에 소위 한국유학생으로서 무의식적으로 내지생활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는 일로전쟁 직후였기 때문에, 충군애국의 의념이 국민정신에 충만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문을 배우고 충군애국이라는 문구만은 알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충군애국이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었으나, 그때 비로소 충군애국의 참 뜻을 깨달은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의 감상으로서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국민이 상하 남녀노소가 통틀어 조석으로 신단(神壇)에 배례하고, 신궁,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보고, 저것은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지금 생각해 보면 저의 인식부족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시국으로 보아서 여행은 사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만, 귀중한 금전을 소비하여, 소위 지도계급에 있는 중견유림으로서 선발되어, 성지 참배를 단행하신 당국의 후의에 감사하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바입니다.
저는 원래 비재천학하여 당국의 취지에 부응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의문입니다만 제 식견이 미치는 한, 30년 전의 내지 사정을 추억하면서, 시찰이나 또 성지 참배를 하여 일본정신의 존귀한 바를 파악하여, 향리에 돌아가서 민중지도에 부딪히고 보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성지 참배를 한 감상을 이야기하라고 해도, 저는 감격이 넘쳐서 한 마디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감상의 일단을 말씀드리면, 일본은 도의가 병행하는 나라인 것을 감지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저희들이 이츠쿠시마와 나라에 갔을 때 사슴을 보아도, 또 이세신궁을 참배할 때 이스즈가와에서 떼를 지어서 헤엄치는 잉어를 보아도, 그들 동물이 자연적으로 사람과 친숙해 지는 것도 결국 그들 동물에 친숙해지는 국민도 의심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금년 봄의 강연회 때에도 몇 분의 강사가 말한 것처럼, 우리 일본은 도덕국가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다음으로 또 느낀 것은, 아이들까지 정성을 다 하여 신궁에 참배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렇게까지 국민 각 계층에 충군애국·경신숭조의 신념과, 만세일계의 천황을 받드는 국민성이 어울려져 수양되었구나! 하고 감격했습니다. 저는 성지참배라는 중대한 책임을 짊어 진 이상은, 조선에 돌아가서는, 성지에서 감득한 국민적인 자각으로써 내선일체의 구현에 노력할 작정입니다. 조선인이 제국신민으로서 융합된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확고한 제국신민의 자질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점을 특히 강조해 두고자 생각합니다.
○ 정(鄭) 경남 대표 저는 1910년에 내지에 처음 와서, 그 후에는 이번이 5번째입니다.
내지에 올때마다 느낀 곳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떻게 하면 우리 조선도 내지와 같이 될 것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부러운 생각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이번 성지참배를 하면서 내지민중이 경신(敬神)의 신념이 강하다는데 감격했습니다.
우리도 황도정신에 입각한 황도유학을 확립하고, 동아공영권 수립에한 역할을 맡는다는 존귀한 신념을 가지고, 우리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 강본(康本) 평남 대표 저는 오늘 이세신궁의 신전에서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할 때에 눈물이 나오려고 할 만큼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많은 의식에서 국민의례로서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해 왔습니다만, 오늘이야 말로 참다운 황국신민으로서 서사를 제창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라도 맹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실행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통사람에게 무엇을 맹서하면 이것을 실행해야 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물며 절대 존엄한 신 앞에 황국신민이라는 것을 맹서한이상은 아무래도 실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영전 단장 우리들이 이세신궁의 참배를 마치고 신관(神官)으로부터 설명을 들을 때에, 농민이 경건한 태도로 참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초리(草履)165)를 신고 남루한 옷을 입은 70세 이상으로 되어 보이는 노인이, 저 멀리 머나먼 시골에서 코우타이진구우에 참배하러 온 그 정신을 우리들은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밤도 야심해 졌음으로, 오늘 좌담회는 이만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장시간 유익한 이야기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
좌담회 도중 충북강사 남상익 씨는 부인의 병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퇴출했었다.
10월 23일(목) 맑음 한 때 흐림
오늘은 아츠타진구우(熱田神宮)에 참배하고 나고야 성 견학을 마치고, 제도(帝都)로 향할 예정이다.
오전 9시 14분 토바역을 출발하여 오후 1시에 나고야에 도착했다. 일행 17명중 남상익 씨가 부인이 위
독하다는 기별을 받고 귀국했기 때문에 16명으로 줄고, 또 청하달빈(淸河達斌) 씨는 지병이 재발했기
때문에 나고야역 대합실에서 쉬고, 결국 나고야 시내를 견학한 단원은 15명이 되었다.
일본 제일을 자랑하는 나고야역은 과연 굉대했다. 역에는 아이치(愛知)현 사적명승보존회의 주사 오
구리(小栗鐵次郞) 씨가 마중해 주었다.
나고야는 옛날 나고야(那古野)라고 칭했으며, 인연(人烟)이 드문 광야였었다고 한다. 그것이 160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공이 그의 아들 요시나오(義直)를 오와리(尾張)에 전봉(轉封)하고, 제후들
에게 명령하여 나고야 성을 축조시키고 그때부터, 이후 여러 대에 걸쳐 동해의 요충을 맡고, 이제야 일
본의 교육을 비롯하여 산업교통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6대 도시에 포함되게 되었다.
먼저 우리는 나고야 성내로 안내 받았다. 나고야 성은 앞에서 조금 설명을 한 것과 같이, 1606년 도쿠
165) 짚신.
가와 이에야스 공이 마에다(前田), 아사노(淺野) 등 22명의 대 제후에게 명령하여, 카토 키요마사(加藤淸正)를 성문축조 대장으로 정하여 축조시킨 것으로 그 후 약 3백년간 오슈코우(尾州侯)의 거성이었다.
이 성은 언덕의 끝을 이용하여 축조되어, 서쪽과 북쪽의 양면은 높은 석축을 축조하고, 주위에는 수로(濠)166)를 둘렀다.
남쪽과 동쪽에는 빈 수로를 설치하고 있다. 텐슈카쿠(天守閣)는 카토 키요마사가 스스로 자청하여 축조한 것으로, 굉장한 돌계단위에 백벽조(白璧造)의 5층의 누각이 의연하게 솟아 있다.
지붕은 첫 층을 제외하고 구리기와 이응으로 텐슈카쿠(天守閣) 위에는 황금 범고래(鯱)가 놓여 있다.
이 황금 범고래는 황금이기 때문에 도난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5층은 동서 약 7칸(약 12.6미터)이고 남북은 약 9칸(약 16.2미터)나 되며, 시가지의 조망은 물론 멀리 노우미(濃尾)평야를 전망하는데 좋다.
다음은 영령영(英靈永)에 진좌되고 있는 고코쿠(護國)신사에 참배하고, 아츠타진구우에 참배했다.
아츠타진구우는 칸페이타이샤(官幣大社)로, 1893년 이세신궁을 본받아 개축된 신메이주쿠리(神明造)로 쿠사나기노 츠루기(草薙劍)가 받들어 모셔져 있다. 본 궁의 기원은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의비(妃)가 이 곳에 내려서, 신검(神劍)을 봉납한 때로부터 시작되어, 역대천황의 존숭(尊崇)이 두텁고, 무가(武家)에서도 두텁게 존신(尊信)해 받들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에도 바쿠후(幕府) 및 오와리(尾張) 번주(藩主) 등은, 신령(神領)을 기진하여, 봉폐조영(奉幣造營)을 하는 등, 숭경(崇敬)의 정성을 다 했다고 한다.
본궁의 동쪽 옆에 있는 구 도요우덴(土用殿)이 있으며, 1893년까지 신체(神體)를 받들어 모셨던 곳이다.
그리고 히토마샤(一間社) 아제쿠라식(校倉式)의 구조로 지붕은 낙레즈쿠리(流造)167)로 되어 있다.
아츠타신궁의 참배가 끝난 것은 오후 5시 넘어서로 이미 조금 컴컴해졌다. 시내를 충분히 볼 수 없었던것은 유감이었다. 밤 9시 48분발의 기차로 동경하던 제도(帝都)에 들어가게 된다.
10월 24일(금) 맑음
동경에 도착한 것은 오전 6시였다. 역에는 척무성(拓務省) 직원 아오키(靑木寅雄), 츠지카와(土川福雄) 양씨가 마중 해 주었다.
일행의 얼굴에는 동경하던 제도에 한 걸음을 디딘 감격의 색이 무언중에도엿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곧바로 니쥬바시(二重橋)에 가서 큐죠(宮城)의 다이고쇼(大御所)에 지척의 사이를 두고 최경례를 하며,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높이 제창했다.
그때 얻은 감명은 평생 동안 잊을수가 없을 것이다.
조선에서도 매일 아침 7시를 기하여 실시되는 궁성요배(宮城遙拜)는 다만 궁성을 머릿속에 상상하며, 동쪽을 향해서 받들어 요배하는 것만이었으나, 오늘은 성상(聖上)이 계시는 금궐(禁闕)에 용안을 뵈옵는 듯 지척 앞에서 배례를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들 가슴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격이 사무치는 것을 느꼈다.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방공훈련은 동경만이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 때문에 2일간 연기가 되어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일반시민의 방호단과 협력하여 침착하고 또한 민첩하게 활동하는 태도는 제도를 지키는 후방전사로서 의지가 강한 점이 있었다. 새어나온 말을 엿듣는 바에 의하면, 외람되게도
166) 호리.
167) 신사 본전의 한 유형.
궁성 내의 성역에서도 방공훈련이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궁성요배를 마치고 일행은 숙소(神田區 錦町 1-35 今城館)에 들어가, 아침을 들고 오전 9시 넘어서 오늘 예정한 일정에 들어갔다.
척무성의 아오키 담당에게 안내되어 어원(御苑)을 참관하기로 했다.
어원을 참관하는 데는 궁내성(宮內省)의 허가가 필요하나, 우리는 척무성의 교섭으로 참관이 허락된 것이다.
어원에는 커다란 천막이 여러 개 쳐져있었다.
이 천막은 이번 야스쿠니신사 임시대제의 위원, 전몰장병의 유가족 및 기타 관계자 9백여 명을 초대하여 위안회가 개최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어원은 전 나이토(內藤)다이묘(大名)의 저택이었으나, 1868년에 조정이 사들인 것이다.
어원의 면적은 실로 18만 5천 평이나 되며, 프랑스인 기사의 설계로 프랑스식 정원과 일본식 정원으로 나누어져서,
어원 안에는 낙우정(樂羽亭), 상천정(翔天亭)과 같은 단아한 건물도 있고, 대만총독이 헌상했다고 하는양정(凉亭)이 있다. 또 골프장을 만든 잔디는 비단과 같고, 데이지(雛菊)는 예쁘게 색색으로 피어 있고,7개의 연못에는 오리가 한가하게 노닐고 있다. 또 단풍이 된 겹 벚꽃나무가 있으며, 사변 전 까지는 연중행사로서, 4월에 벚꽃 관람회, 11월에 관국회(觀菊會)가 성대하게 개최되고 있으며, 그날은 황공하게도 천황·황후 양 폐하가 각 왕 공족이나 사신·민간 유력자를 초청하는 것이나, 일행 중에는 정순현(鄭淳賢) 씨가 관국회 참가를 지명 받아서 이 영광을 입은 사람으로 그는 황송하고 감격을 새로이 하고있는 모양이었다.
어원의 참관을 마치고 우리는 메이지신궁 참배에 나섰다. 방공훈련의 경보는 끊임없이 울리며, 몇번이나 세워졌다.
신쥬쿠(新宿)에서 쇼센(省線)을 타고 요요기(代代木)에서 내렸다.
넓은 참배도를 양옆에 끼고 양쪽에는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보기만 해도 엄숙하다.
메이지신궁은 관폐대사(官幣大社)로서, 메이지대제·쇼켄(昭憲)황태후의 두 분의 신령을 받들어 모신 것이다.
1915년 10월 지진제(地鎭祭)가 실시되어, 5개년의 세월을 거쳐서 준공 된 것으로, 본전, 배전, 누문 등의 건축양식이 장중하고 내실을 주로 하여 축조된 것이다.
우리는 정식으로 참배하여, “황국신민의 서사”를 공손하게 제창하여 신 앞에 맹서했다. 신궁 참배자는 다른 신궁보다 눈에 띄게 많으며, 문자 그대로 뒤꿈치를 서로 대며 운집한 것을 본다. 이 현상은 국민이 메이지대제의 성덕을 얼마나 경모하며 받들고 있는지를 증거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엄숙한 경내를 사퇴하고, 오후 0시 반부터 척상(拓相) 관저에서 열리는 토고(東鄕) 척무대신 초대 오찬회에 향했다.
정변 직후였기 때문에, 정무에 다망한 척무대신은 출석하지 못하고, 차관 키타지마 켄지로우(北島謙次郞), 관리국장 야마코시(山越道三), 비서과장 후쿠지마(福島四雄三), 행정과장 카시와바라(柏原依郞), 사무관 노구치(野口俊一)의 여러분이 주인을 대신하여 맞이해 주었다.
예를 들어 키타지마 차관의 인사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키타지마(北島) 차관의 인사 말
오늘 조선의 유림단의 성지 참배자 여러분과 함께 일당(一堂)에 모이게 된 것을 참으로 기뻐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듣는 바에 의하면 이조 5백년간에는 유교가 국교라고 하는 전성시대가 있었으며, 국가사회 전반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국민의 인격을 도야하고, 풍교덕화를 도우는 바가 적지 않았다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유교는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수입되고, 국민사상 및 국민도덕의 진전에 기여한 바가 참으로 절대적이었습니다.
현재 우리들도 얼마간의 유학을 수학한 한 사람이며, 또 현재 학교교육에서도 공자의 가르침은 하나의 중대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바입니다.
아마도 유학은 장래 오랫동안 우리 국민도덕의 발전상 가장 중요한 부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유학을 수득하고 공자를 존숭하고 계신다고 하는 것이지만 참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국민이라는 것은. 그 종교나 학문 여하를 불문하고, 항상 천황폐하께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교의 자유나, 학문의 자유라고 말해도, 물론 일본국민다운 본분을 지키는 범위에서만 인정되는 것으로, 만약에 이 본분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일본제국 내에서는 절대로 그 존립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야 내외정세는 참으로 중대해서, 제국은 신동아 건설을 위하여 만난을 배제하고 상하 일치협력,성전 관철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 성전을 종결해서 동아에 있어서 참다운 낙토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이후 얼마만큼의 고난을 견디고, 나아가서 한층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도 조선 내에서 총독부의 지도 아래, 경학(經學)을 강론함으로써 민중의 미풍덕화에 노력하실 것을 간절히 바라는바입니다.
○
이어서 영전 단장으로부터 답사가 있었다.
영전 단장의 답사
우리 일행을 위하여 이와 같은 성대한 오찬회를 열어주셔서, 우리들로서는 분에 넘치는 광영이라고생각하는 바입니다. 일동을 대표하여 깊이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조선유림에 대해서는 신정 이래 역대의 총독각하들께서, 그들이 여러 가지 조치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신중히 고려를 해 주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신정 이래 유림은 민중에게 모범을 보이며, 또는 민중을 솔선하여 총독정치에 성의를 가지고 협력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중에는 총독정치에 반대까지는 하지 않았어도, 내심으로 불복하는 움직임을 품고 있는 유림도 없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향토에는 일부 유림층에 고루하고 완고하며 신시대에 눈뜨지 못한 인사가 있었습니다.
이 영향은 홀로 불평분자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부형에 절대복종을 최선의 신념으로 하는 청소년 자제에 미치는 파문은 상상 외로 큰 것입니다.
진정으로총독정치를 이해하는데 까지 익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중대문제에 관해서는, 당국의 수뇌부 여러분이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한 결과 점차로 그 완고한 사상은 이완되어 왔으나 특히 지나사변을 계기로 해서, 그들 유림은 동아의 신 사태에 눈을 뜨고, 번연히 일어서서, 시국을 잘 인식하고, 간난을 극복하며 용감하게 매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선의 지도적인 입장에 있는 절대다수의 유림이 그와같이 신 사태에 대처하게 된 것은 기쁜 현상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미나미(南) 총독, 오노(大野) 정무총감 각하께서는, 그들의 성의에 부응하여, 전 조선적으로 유림을 통합하겠다는 일대 결의를 가지며, 전 조선 2백만 유림을 하나의 산하에 넣는 조선유도연합회 같은 것을 조직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노 정무총감 각하께서는, 친히 총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유도연합회의 주된 목적은, 미나미 총독각하의 시정방침의 강목(綱目)인 국체 명징(明徵), 내선일체의 구현, 인고(忍苦)단련이라고 하는 삼대 정강을 기조로 하여, 종래의 유교를 황도정신에 입각하는 황도유학을 재정립할 것을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종래의 유림정신을 황도정신에 귀일시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금년 제2회 유림대회는 10월 15일 추계석전제를 마치고, 다음날 16일에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선유림대표가 경성에 모이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음으로, 그중에서 중견유림을 선발해서 성지 참배를 꾀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은, 국체명징, 내선일체의 구현을 촉진하는데 있어서, 내지의 성지를 참배하는 것은, 무척 의의가 깊은 것입니다.
아울러 성지 참배를 하는 한편, 내지의 황도유학의 진수를 연구하고, 조선 내에서의 황도유학의 확립에 역할을 할 작정입니다. 그러나 내지 체류기간이 짧기 때문에 충분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움으로, 내년도 성지 참배 행사를 겸하여 황도유학의 연구를 하도록 바라는 것입니다.
일행은 이츠쿠시마신사를 비롯하여 모모야마능·카시하라신궁·이세신궁을 참배하고, 토바에서 감상을 피로하는 좌담회를 열며, 단원 여러분의 감상을 들었습니다만, 그중에는 몇 차례 내지에 왔던 분도 몇 명이 있었으나, 일본정신의 숭고함을 파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온 분도 다만 일본정신에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감상담을 기록해서 미나미 총독각하에게 복명할 작정입니다.
단원 여러분도 내지의 성지를 참배하여 체득한 일본정신을 자제에게 전하여 이후부터는 일본정신에 살아나가고자 하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양지해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또 오늘은 이렇게 정성어린 성연을 베풀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각하 및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
이와 같이 오찬회는 주객이 서로 터놓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그리고 일행은 척상(拓相) 관저를 물러나서, 의사당을 견학하고, 이왕(李王)전하 저택에 문후를 여쭈었다. 여기에서부터 일행을 대표하여 영전 단장 외 2, 3명은 본부 출장소에 동상(東上) 인사로 가고, 그 외는 숙소로 돌아갔다.
○ 도쿄
疎星汽笛倒東京, 碧樹黃禾千里程, 滿苑菊花香馥馥, 微忱拜向五雲城. 부산삼(富山森)
三十年前遊此邊, 一新面目舊山川, 六合成都興亞日, 二重橋外拜皇天. 청하달빈(淸河達斌)
○ 메이지신궁
一億臣民總一心, 至誠禱拜是何心, 四十八年先帝業, 北支今日繼成心. 청하달빈(淸河達斌)
10월 25일(토) 맑음
오늘은 제도에서 제2일째다. 예정은 유시마(湯島) 성당 참배, 우노(宇野) 박사 강연의 청강과 코마(高麗)신사 참배 등이다.
일행은 오전 9시 넘어서 여관을 나와, 유시마 성당 참배로 향했다. 유시마 성당은, 1632년 오와리(尾張)의 번주(藩主) 도쿠가와 요시나오(德川義直)가 하야시 도슌(林道春, 羅山)으로 하여금 우에노(上野)의 시노부가오카(忍之岡)에 선성전(先聖殿)을 조영한 것이 그 시작이 되었다.
그것이 화재를 만나자 1690년 쇼군(將軍) 츠나요시(綱吉)가 이것을 오늘날의 이곳에 옮겨서 대성전(大成殿)이라고 일컬어지게 된 것이다.
1798년 대성전 및 행단(杏亶), 앙고(仰高), 입덕(入德)의 여러 문을 재건하고, 메이지유신의 즈음에 대학을 이 땅에 두게 되며, 알단 공자 이하의 여러 상을 철거한 일도 있으나 그 후에 복원한 것이다.
건축물은 한동안 동경박물관의 일부로 사용한 일도 있으나,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 때문에 입덕문(入德門) 및 수옥(水屋)168)을 제외하고 남김없이 불탄 것을 1935년 4월 4일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성당에 이르면 먼저 ‘앙고’라는 액자가 걸린 앙고문(仰高門)이 보인다.
이문을 들어가 보면, 입덕문이 있고, 입덕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에 만주국황제폐하의 친배(親拜) 기년수로 심은 비쭈기나무(榊)169)(1940년 4월 13일 식수)가 있으며, 왼쪽에는 사문회(斯文會) 총재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오우(伏見宮博恭) 전하가 손수 심은(1940년 4월 4일) 매화가 있다. 여기서부터 더 계단을 올라가면 행단이 있으며, 대성전은 행단으로부터 들어가서 한층 높은 곳에 있다. 대성전의 오른쪽에는 곡부(曲阜)로부터 이식이 된 해나무(楷)170)와 떡갈나무가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 성상을 비롯하여 좌우에는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사위(四位)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이들 성상은 명나라부터 전해 온 것으로, 제실(帝室)의 소유였던 것을 성당을 복구할 즈음에, 그 도를 권장하라는 말씀
으로써 사문회에 하사한 것이다. 또 성당에는 강당의 설비가 있어서 황도유학의 진흥에 노력한다고 말하며, 황족의 청강석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매월 첫째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11시까지 성감(聖龕)171)을 연다고 한다.
오전11시경 우노 박사의 ‘황도정신에 기초하는 유도’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들었다. (별도 항목 강연요지 참조).
유시마 성당에서 점심을 들고, 오후 1시 넘어 코마(高麗)신사에 향했다. 일행은 전철을 타고 또 이케부쿠로(池袋) 역에서 무사시노(武藏野) 전차에 바꾸어 타고, 드디어 역사의 고장, 내선융화의 정신적인성지, 그리고 출세의 신인 고려신사(코마신사)가 진좌하고 있는 코마무라(高麗村)로 향했다.
이 고려촌(코마무라)은 옛날 고려가 당나라와 싸워서 멸망할 즈음에 그들은 일본정부에 투화(投化)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그들을 우대하여 호의로써 그때의 조정으로부터 내리신 고려군의 중심지이다. 고려의 군령(郡令)에 임명된 고려왕은 마을의 서북 푸른 산을 배경으로, 맑은 흐름을 낀 경승지인
168) 차실.
169) 상록수.
170) 옷과의 낙엽고목, 곡부의 공자묘의 식수.
171) 신주를 모셔두는 곳.
현재의 오우미야(大宮)에 거처를 판단해서 정하여 전 군을 통제한 것이다.
고려왕은 조정으로부터 종5위하에 서품되어, 또한 왕의 성을 받는 등 총우(寵遇)가 매우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부귀영달을 원치않고 일신을 희생하여 한뜻으로 군민의 행복을 도모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이 땅에서 서거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부(慈父)로 사모한 수장 고려왕의 부음을 전해들은 고려군민은 귀천노약 할 것 없이 모두좇아와서 그의 서거를 슬퍼하며 유해를 고려산 승낙사(勝樂寺) 인왕문(仁王門) 곁의 오래된 못가에 장사지낸 것이다.
고백노삼(古柏老杉)의 곳에 있는 이끼가 난 다중탑이 고려왕의 묘소이다.
그리고 고려왕의 신령은 저택 뒤 언덕에 영묘를 건립하여, 여기에 봉사(奉祀)한 것이다.
처음에는 코마묘진(高麗明神)이라고 숭상해 받들었으나, 뒷날 고려신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창건은 멀리 나라조의 옛날, 1천2백 년 전의 일로 참으로 칸토(關東) 유수의 길사(吉社)인 것이다.
고려왕의 자손은 대대로 고려신사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현 사장(社掌) 코마(高麗明津) 씨는 고려왕 58세의 적손(嫡孫)이다.
출세명신의 유래에 대해서 보기로 하자. 고려명신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출세명신, 개운(開運)의 신이라고 말하게 되어, 매일 각지에서 참례자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최근에는 재계 방면, 특히 주식관계자나, 시험지옥을 돌파하고자 원하는 학생 등이 참배하고 있는 것 같다.
정계에서도 고려신사를 참배하여 영진한 분이 많이 있다고 한다.
전 조선총독부의 정무총감이었던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 씨는 1922년 6월 7일 알맞게 고려신사에 참배하자 얼마 안 있어 그달 12일에 카토(加藤)내각이 성립, 미즈노 씨는 곧바로 내무대신에 취임했다고 알려졌으며, 또 와카츠키 레이지로우(若槻禮次郞) 씨는 1925년 9월 13일 그 신사에 참배, 다음 해 1926년 1월 30일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하마구치 오사치(濱口雄幸) 씨,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자작의 양씨도 그 신사에 참배하여 얼마안 있어서 빛나는 재상의 인수(印綬)를 차게 되었다고 한다.
일행은 고려신사를 참배하고, 오후7시 반 경에 숙소에 돌아와서, 매일신보 동경지국장 초청의 만찬회에 출석했다.
○ 유시마(湯島) 성당
東巡聖駕仍東遊, 後學林林敎化中, 瞻仰千秋多感慕, 靑衿蕭杏灑壇風. 가천구사(嘉川久士)
鐵樑銅葺出嚴然, 東儒至誠能感天, 大道情神何處在, 仰高主德雨江前. 청하달빈(淸河達斌)
우노(宇野) 박사 강연 요지[일본정신으로 본 유교, 유시마(湯島) 성당에서]
오늘 조선에 계시는 중견 유림여러분이 멀리 내지에 성지참배의 장도에 오르며, 그 도중에 유시마 성당까지 참배하게 되신 것은 이 길을 위하여 경축해야 할, 의의가 깊은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으면안 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조선의 유림 여러분을 직접 뵈옵게 된 것을 기뻐함과 동시에 마음 든든하게 느끼고 있는 바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적어도 유교를 숭상하고 있는 자는, 이 유시마의 성당을 중심으로, 현재의 혼돈과, 그 귀추를 모르는 세계의 동란에 대응해야 할, 또한 오고야 말 세계의 신 사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전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대한 시기에 와 있는 것으로서,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유교를 숭봉하는 자들은, 적어도 동양의 여러 민족이 향해야할 정신기준을 수립하고, 그들을 지도하고자 하는책임감이 없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동아공영권을 건설하는 국책에 협력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동양 여러 나라의 국민정신에 침투하고 있는 유교로써, 동양 여러 민족의 지도정신으로 삼는 것이 가장 보편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층 단결을 굳게 하여, 불퇴전의 결의로써 유교를 진작함으로써, 세계정세의 변전에 대처할 준비가 없으면 안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중대국면에 처하고 있는 오늘날, 적절하게 이번에 여러분이 이 성당을 참배하게 된 것은단지 우연한 내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후 우리는 더욱더욱 긴밀하게 제휴하여 유도의 선양에 전력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지금 저의 심경은, 공자가 말한 것처럼, ‘有朋自遠方來不亦悅乎’라고 하는 부자(夫子)의 심경과 방불해서 유쾌한 것입니다.
이 기쁨의 나머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에 계시는 동지 제군에게 일본정신으로 본 유교라고 하는 제목을 가지고,
제가 평소부터 생각해 온 바의 소회의 일단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편한 마음으로 잠깐 동안 청청(淸聽)있으시기 바랍니다.
유교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공자의 가르침으로, 사람이 밟고 나가야 할 길을 설명한 가르침입니다.
즉 사람이 사람다운 까닭의 길을 설병한 것으로, 유교에서 말하는 길이라는 것은 하늘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땅의 길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사람이 밟아 나가야할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길이란 무엇인가 하면, 가장 비근한 예를 들면, 대체로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부모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게 됩니다. 즉 이것이 인도(人道)의 처음이며 도덕의 원천입니다.
가족입장에서 이것을 보면 서로 화목하고, 부모에게 효도, 형제의 우애, 부부가 화목하다든가 하는 것이, 사람의 길을 행한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그
러나 사람의 길은 지금 말한 것처럼 한 가족 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넓은 인간생활 전반에 걸쳐, 예를 들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공동생활의 규범이 있습니다.
이것을 사회생활면에 있어서의 사람의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국민은 군주나 통치자의 덕분으로, 평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으로, 군주나 통치자에 대한 충성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것도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의 길의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길을 가족생활·사회생활·국가생활의 세 방면으로 나누어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것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근본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스스로를 수양하고, 완전한 인격자로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수기(修己)라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성을 띠고 있는것입니다.
그러면 기(己)를 수득하고 기(己)의 인격을 완성하면, 이것으로써 만족할 수가 있느냐 하면,결코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양과 같이 개인주의라면 혹시 모르지만, 동양에서는 자기수양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를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나를 잊고 봉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즉 치인(治人)의 길인 것입니다. 유교에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이 즉 이것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사(子思)가 이것을 가장 주장한 것입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중심이 되는 것은, 인(仁)이며, 공자문중의 여러 제자는 모두 인으로써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로 삼은 것입니다.
논어에도 증자(曾子) 왈(曰), “土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己. 不亦遠乎.”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공자문하의 제자(諸子)는 인으로써 인심의 전덕(全德)으로 하고, 신(身)으로써 인을 역행(力行)하기에 임중(任重)하다고 하였으며, 또 죽고 난 후 자기가 인을 체득하기에는 멀다고 했습니다.
이라한 것이 공자문하의 제자(諸子)의 말이며 또한 우리들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인을 구하며 나아가는 목표는 같다고 해도, 그 인을 구하는 수단은 학파에 따라서 다르게 됩니다.
단순히 논어의 해석수단으로 보아도, 주자(朱子)학설, 왕양명(王陽明)학설, 기타 여러 설 등이 있으나, 결국 인을 행하고 인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하는 목표점에 귀착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학파가 달라도 인을 추구하고자 하는 점은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을 추구하고, 덕을 갖추게 되면, 집에서는 제가(齊家), 국가 혹은 사회에서는 자신의 의무를 완전히 다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요는, 사제(師弟)·부모·형제 간에 있는 길을 밀고 나가면서 확대해 가면, 이것이 나라를 통치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교는 이와 같이 충과 효를 중하게 여기지만, 사회도덕은 충실하게 자기 본분을 다하게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사회 사람들은, 경박(經博)에는 사회도덕에 관해서는 관여한 것이 적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으나,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붕우(朋友)의 교섭에 믿음으로써 하라”라고 하는 한마디를 보아도, 이 한 구절이 사회생활에 가장 적절한 도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있는 것입니다.
유교가 사회도덕을 경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붕우에 대한 마음가짐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사회에 미친다면 훌륭한 사회도덕이 되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도 사회생활에 필요한 공덕(公德)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먼 곳에서 고함쳐서는 안된다든가, 사회공중을 현혹해서는 안 된다든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라거나, 혹은 두 사람 사이를 제처서 지나가서는 안 된다든지, 신발이 두 켤레 있는 방에는 들어가서 안 된다든지, 이와 같은 여러가지 잡다한 것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밀고 넓혀 나간다면 충분히 사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도덕은 한마디로 말하면, 대의명분인 것입니다. 이것은 엄연하게 움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공자가 춘추를 편찬한 것도 전국시대에 문란한 대의명분을 명백히 하고, 왕도를 설명하기 위해서지만, 이러한 것을 필생의 사업으로 삼은 것에 비해서는 후세의 우리들로서 찬탄(讚嘆)하지 않을 수 없는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에서는, 아시는 바와 같이 혁명이 거듭 일어나고, 공부자(孔夫子)가 춘추를 편찬한 대 이상은 충분히 발양(發揚)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일본이 천손(天孫)연면하여 황통을 이어 받으며, 대의명분도 일본 국민정신에 투철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토학(水戶學)도 대의명분을 분명이 하기위하여 발생한 학파이기도 하며, 그러한 점을 보아서도, 유교는 일본에 들어와서 비로소 참다운 정신을 발휘할 수가 있었던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래, 아시는 바와 같이, 구미의 문물이 들어오고, 각 방면으로부터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반면에는 매우 위험을 수반하는 사상도 있어서, 국민정신을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심한 사상은 구미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것으로, 일본말은 나쁘기 때문에, 이것을 폐지하여 영어를 가지고 일본국어로 삼기로 주장하는 것도 있고, 혹은 일본인은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구미인과의 혼혈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극론마저 나온 처지였습니다. 또 충과 효라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기 때문에 낡았다 라든가, 공자의 사상은 오늘날에는 쓸모없다고 하여, 완전히 서구화 사상에 물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메이지대제께서는, 이와 같은 걱정스러운 사태를 진념(軫念)하셔서, 간곡한 교육에 관한 칙어를 환발(渙發)172)했던 것입니다.
이 칙어에 의하여 국민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명확하게 제시되었던것입니다.
이 칙어를 보게 되면, 전부가 유교정신과 합치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국민정신이 향해야 할 기준이 교육칙어의 환발에 의하여, 확고부동해 짐으로서, 국민정신의 지도기관인 사문회(斯文會)는 해산해도 될 것이라는 논의가 대두되게 되고, 또 교육칙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는 유교가 필요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문회의 설비는동경제대에 기부하면 어떻겠느냐는 논의도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러하니, 또 구미의 개인주의나 자유주의보다 우수하거나 열등한 공산주의라고 하는 위험한 사상이국민정신을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문회의 책임은 더욱 더 가중되어서, 해산한다는 논의보다도, 내용을 더욱더 충실하게 해서, 젊은 사람들을 많이 넣어서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논의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문회의 설비를 동경제대에 기부하고자 했던 것도 중지하여, 젊은 사람을 많이 넣은 것입니다.
저도 그때 젊은 사람으로서 입회한 것이나, 지금은 보시다시피 노인이 되어버린것입니다.
그래서 유교는 오늘날에 와서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이후도 사상관계는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습니다. 제2차 유럽전쟁이 발발해서, 더욱 세계는 통틀어서 동란의 징조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해서도, 우리는 더한층 정신방향을 선도해서, 국민이 위험사상에 휩쓸리지 않도록 헌신적인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유교정신을 잘 추궁하여, 일본본래의 사상을 북돋우는 것이 긴요하다고 믿는 바입니다.
조잡한 말씀을 드려서 송구합니다. 간단하지만 이상으로서 제 이야기는 끝내겠습니다. (문책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10월 26일(일) 맑음 때때로 흐림
오늘 예정은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비롯하여 각 명소의 견학이다. 우리 일행은 관광 안내소로부터 온 안내계의 소녀에 이끌려 먼저 쿠단사카(九段坂)의 야스쿠니신사로 향했다.
쿠단사카를 소연하게 걸어가면 신기(神氣)가 넘치는 야스쿠니신사 경내에 다다른다.
경내에는 참배도의 양쪽에 전황을 전시한 “파노라마”가 줄지어 있다. 이것은 신 제신의 유족으로서 전국으로부터 모셔져 온 3만 여의 참배자나 다른 일반 참배자에게 황군의 충용 무쌍한 위력을 나타낸 것이다.
이 “파노라마”를 보고, 시원스런 옥 조약돌을 밟으며, 대군의 방패가 되어 꽃처럼 흩어진 용사의 영혼에 영원히모셔지는 사전(社殿)에 숙연히 나아가서 참배했다.
올해도 국화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는 가을, 야스쿠니 임시대제는 15일 밤 초혼제에 뒤이어 앞 뒤 6일
172) 임금의 명령을 세상에 널리 알리던 일.
간에 걸쳐 실시된 것이다.
이번 임시대제에 새로이 합사된 호국영령은 15,013로, 유신 때 권왕의신(勤王義臣)을 비롯하여, 그 후의 전쟁에서 영장용사와 함께, 지금부터 이 신사에 모셔져서 만대에 국가의 수호신이 되어, 국민의 귀감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 새로이 합사된 영령을 합치면 메이지유신 이래 신사에 모셔진 신위는 223,789주가 된다고 한다.
되돌아 보건대, 지나사변 발발 이래 이미 4년 남짓, 그 동안 황군은 능위(稜威) 아래에 혁혁한 대 전과를 올렸으며, 또 우리 제국의 국시인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이상에 입각하여 대동아공영권의 확립에 드디어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은, 이것은 오로지 이들 충렬한 장병의 용전에 있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이것이 유종의 미를 발휘하기까지에는 전도가 아직 요원하며, 거기에다가 더하기를 국제정세는 날이 갈수록 복잡다기해지고, 점점 제국의 진전을 가로 막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야스쿠니신사에 배례하며, 이제 한층 마음가짐을 새로이 하고, 쿠단(九段)에 모셔진 순국의 영령을 위로함과 동시에, 미증유의 국난에 대처하고, 사변 완수를 위하여 용사들의 유지를 이어서 한층 호국의 단심(丹心)
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해서 얻은 숭고한 감격을 가슴 가득히, 사전(社殿)의 옆에 있는 유슈칸(遊就館)과 국방관을 견학했다. 유슈칸에는 군신(軍神) 노기(乃木) 장군의 유품을 비롯하여, 히로세(廣瀨) 중령이 진중에서 쓴 칠생보국(七生報國)의 시 등이 있었으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했다.
또 국방관에는 제국의 무적 육해공군의 정수(精髓)를 전시하고 있다.
우리는 또다시 전철을 타고 요요기(代代木)에서 하차, 메이지신궁 경내에 있는 쇼토쿠(聖德)기념회화관을 참관했다.
본관은 메이지대제가 신으로 모시게 됨으로서, 국민은 대제의 성덕이 고금을 통하여 탁절(卓絶)하고, 그 치적은 광대무변, 혁혁하여 국사 상에 더 한층 빛내게 했다는 것, 또 당시 부도(婦道)의 전형, 인자(仁慈)의 권화(權化)로서 아홉 겹의 깊음에서 잘 성업을 내조하신 쇼켄(昭憲)황태후의 곤덕(坤德)을 기리며 받들어서, 생전의 성덕을 일본식과 양식으로 벽화로서 그려 놨다.
우리는 또다시 전철을 타고 센가쿠지(泉岳寺)에 도착했다. 센가쿠지는 세상에 이름 높은 아코우기시(赤穗義士) 오우이시 요시오(大石良雄) 외 47사(士)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묘는 석옥(石玉) 울타리로 두른 곳에 있으며, 묘석은 은연하게 피어오르는 분향의 연기에 경내는 흐리며, 어쩐지 엄숙하다.
또 묘의 부근에는 유물관과 목상(木像)당 등이 있으며, 또 오시오 요시오(大石良雄)의 동상이 있다.
특히 피로물든 돌과 피로 물든 매화는 보는 사람을 하여금 소연하게 한다.
다음은 진재(震災) 기념당의 참배였다. 이곳은 구 육군성 피복창의 터였었다.
이 피복창이 철거된 뒤 빈터로 되어 있었으나, 갑자기 1923년 9월 1일 뜻하지 않는 지진이 관동을 엄습하고, 수만의 이재민은 이 공터에 피난했으나, 여기에서도 지진이 일어나서 거의 다가 타 죽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멀리 20년전을 상상해 보면 몸이 으슥해 지는 피비린내 나는 참사가,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아직 피난민이 연출했을 그 비극―부모자식이 서로 껴안고 죽음이 절박하는 공포의 비명, 또는 부모를잃은 자식의 죽음에 허덕이며 내는 비명, 또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애, 혹은 불을 피하며 쓰라림을 견디지 못하여 수미다가와(隅田川)에 뛰어드는 비참한 모습, 이렇게 엉킨 눈물겨운 비극이 환상으로 눈에 떠오르고, 측은한 정감을 누르기 힘들며, 내 몸을 한동안 잊어버리고 망연자실했다.
이 처참한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을까. 먼저 우리는 비상시 즉, 피난을 해야 항 경우는, 군중이 밀집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감지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난을 만나면 침착해야 할 것이다.
듣는바에 의하면 관동대진재는 오전 11시 58분에 시작했기 때문에, 그때가 마침 식사준비시간이었다.
식사준비시간이었기 때문에 숯불이나 가스를 집집마다 쓰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만약에 숯불이나 가스를 쓰고 있었던 주부가 침착하게 자신이 쓰고 있었던 숯불이나 가스를 완전히 끄고 피난했었다고 하면 그러한 비참한 경우에 빠지지 않았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제야 시국은 날이 갈수록 긴박해서, 우리는 언제 어느 때 적의 공습을 받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관동대진재의 경험을 감안하여, 어떠한 적의 공습이 있어도 침착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5만 8천 명의 조난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이 기념탑에 배례했다. 안내자 말에 의하면, 납골당에는 두 말들이(二斗入) 항아리 2백 6십 개에 조난자 유골이 납골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나아가서 구 야스다(安田) 저택의 정원을 거쳐서 수미다가와(隅田川)에 이르러, 증기선 통통배를 타고 아사쿠사(淺草)관음으로 유명한 아사쿠사에 갔다. 노점이 즐비한 참배도를 나아가면 인왕문이 있고, 인왕문을 들어가서 북쪽으로 나가면 늙은 은행나무 몇 나무에 둘러싸인 관음당이 있다.
본당은 1649년 3대 장군 투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의 조영에 관계되는 것이며, 내부 중앙의 수미(須彌)단상에 궁전을 설치하고, 1치 8푼의 금상이라고 전해오는 비불(秘佛)관음보살을 안치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우에노공원(上野公園)을 더 견학하고 숙소에 돌아왔다. 또 단원 중에 안동정회(安東正會) 씨는 가정 사정으로 귀국했다.
○ 야스쿠니 신사
人人崇拜是何事, 萬古忠魂萬古昻, 興國臣民今日事, 國防館入國防知. 청하달빈(淸河達斌)
○ 코마(高麗) 신사
此社由傳問幾時, 同根同祖自然知, 老婆爲我歡迎說, 第一故鄕貴家思. 청하달빈(淸河達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