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달
바다 쪽 통유리
밖으로 세상 만물 휘도는 것 내다보는
그 재미 하나 보고 혼자 사는 자네
외롭지 않은가 하고
스페인 싸움소의 뿔 같은 새벽달이 물었다
유령처럼 흰 소복 차림인 채로 어둠 속에 선 내가 말했다
슬픈 사유
한 과 한 과
진창같이 질퍼덕거리는 길바닥에 깔고
영생할 무덤집 열심히 도배하는
살과 뼈 속에는 외로움 기생할 틈바구니가 없네
바다 선물하기
바다로 간다
밀물이 툭 터질 듯한 배부름처럼 밀려들었을 때
시멘트 바람벽 속에 갇혀 있는 사랑에게
내 바다 보내주기 위하여
휴대 전화기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내 바다가 그쪽으로 흘러가도록 생중계한다
세상의 모든 유인도들의
머리 위로 솜뭉치처럼 피어오르는
구름에 대하여 은쟁반 같은
달에 대하여 깜박거리는
별에 대하여 갯벌밭을 기는
꽃게와 뿔고둥에 대하여
말미잘의 요염한 울긋불긋한 융털 같은 술 달린 속치마와 꽃 같은
입에 대하여
수줍게 웃고 있는
보랏빛 갯메꽃의 색정적인 웃음 색깔에 대하여
짭짤한 입내 풍기며 속삭이는
해풍에 대하여
그러면서 나도 내 바다 따라 그 사랑 속으로 흘러간다
산책
가슴 짙푸른 서른아홉 나이 때
남편 깨 팔러 가서 돌아오지 않아
혼자서 키우고 가르쳐 시집보내고 장가들인 딸 아들 일곱
서울 부산 광주 대전으로 다 나가 살고
아직도 그 남편 기다리는
허리 반쯤 구부러진 할머니의 집 뒷담을 지나고
손가락으로 헤아리기도 어려운 여러 해 전에
할멈을 산기슭밭 귀퉁이에 묻고
유자나무 심고 가지 손질하며 사는 영감의
잉잉거리는 벌통들을 오른쪽에 끼고
날이면 날마다 바지락 캐고 맛조개 캐고 게 잡아다가
팔아 도회지 나간 자식들에게 보내주며 혼자 사는
늙은 홀어머니의 집을 건너다보며
내가 이르는 곳은 언제든지
묽은 안개가 있고 그 너머에 섬들이 있고
물새들이 있고 갯잔디가 있고
퍼지르고 누워버리고 싶은
꽃보료 같은 해홍채*밭이 있는
검은댕기두루미 내내 서 있다가 어디론가 날아간
바닷가 모래밭이다
* 해홍채=나문재.
파도
꼿꼿이 쳐들고 온 머리부터를 모래톱에 처박고
온몸을 양파 껍질처럼 말면서 곤두박질치고
울부짖는 그대
멀고 먼 세상에서 흰 거품 빼어문 채 내내
사랑하고 악다구니 쓰며
줄기차게 살아온
그 삶을 후회하는가
모순
세상의 그 어느 것인들
두꺼운 자궁 속에 담겨 있던
씨알맹이 아니었으랴
그 아름답고 슬픈
벗어나기
뱀이 허물을 벗듯이
자유는
스스로와 우주를 파괴하는 자이면서도
지금보다 더 드높이 날 수 있는 날개 아닌가.
다시 가을 편지
그 누구인가가
허공에 늘어뜨려놓고 있는
사천팔만억 개의 유리 구슬 주렴 속으로
천리 밖의 섬이 옹기종기 모여들고
질펀한 청자빛 바다 물너울 위에서
눈부신 태양 빛살과
수억천 마리 금빛 고기들이 혼례 치르고 있는
내 공화국의 정원으로
그대의 먼지 앉은 음습한
영혼 보내주십시오
보송보송하게 해바라기하여 보내드릴게요.
산길
오시라고 열어놓은 그 길로
그 님 오시네
안개 속살 찢는 햇살로 오고
꽃잎과 풀잎에 맺힌 이슬 같은 눈물로 오고
백양나무 속잎 흔드는 바람으로 오고
님께 보이려고 향물로 씻어놓은
젖꽃판의 싸라기 같은 돌기로 오고
장끼와 까투리의 발자국으로 오고
풀피리 소리 비둘기의 날개 소리로 오고
부채춤 추는 합환화 향으로 오고
엉겅퀴꽃과의 숨가쁜 입맞춤으로 오고
정액 냄새 같은
밤꽃향과 함께 맨살 섞으며 오네.
보림사 가는 길
내 고향 장흥
보림사 가는 길 가장자리의
가지산 봉우리들은
어깨를 마주 대고 옹기종기 앉아들 있어
서너 발쯤의 작대기 한 개만 있으면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걸쳐놓을 수 있다
우리 비록 떨어져 살지라도
그대의 섬머리와 내 섬머리 위에
그런 작대기 하나 걸쳐놓고 살자.
노을
너
가버린 사랑 때문에 오늘 하루 내내 슬픔과 울분 못 견디고 혀와 입술 깨물어뜯어 머금었던 피 뿜어놓았구나.
마지막의 빛바다
아침 이슬 헤치고
숲속에 들어가서 진종일
한 송이 풀꽃 되어 세상을 향해 방긋 웃고 있고,
작은 새 한 마리 되어 하늘 꽃구름 저 멀리로 후루룩
날아갔다가 노을 등에 지고 돌아오고,
호수나 강이나 바다에 가서
한 방울의 물 되어 밤새도록
달빛 따라 바람 따라 출렁거리고
절망처럼 땅거미 내린 세상을 치자빛으로 밝히는
까치놀에 묻어 타는
마지막 빛바다 되고 싶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227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 지은이 / 한승원
- 펴낸 곳 / (주)문학과지성사
- 펴낸 때 / 1999년 8월
한 승 원
- 1939년 전라남도 장흥 출생.
-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로 등단.
- 시집으로 『열애 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달 긷는 집』이 있음.
-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해양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등을 수상.
- 중·고등학교 교사.
-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
[출처] 671. 한승원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작성자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