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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윤원영과 시인 나태주
푸른숲 김정호
최근에 수필가 윤원영 수필집과 시인 나태주의 산문집을 읽게되었다.
윤원영 작가의 책은 비매품이라 증정을 받았다. 나태주 시인의 책은 교보문고에서 구했다. 두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글을 한편 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교 분석하는 글은 아니다. 두 사람은 동시대에 함께 살면서 보고 느낀점이 함께 살아가는 나와도 비슷한 점이 많다. 책 두권의 감상과 두 사람의 인생여정을 보면서 자수성가한 두 분께 박수와 격려를 보내고 싶다. 윤원영 수필가는 많이 알려진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윤원영 수필가는 문경 지역에는 널리 알려진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작은 별이다. 그는 아버지가 일본에 있을 때 태어났다. 6남매중에 장남이다.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귀국하여 문경 가은 아버지 고향에서 탄광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탄광촌에 살게되었다.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중학교도 돈이 없어 제때 가지 못하고 한해 늦게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그는 중학교에 다닐 때 선배의 권유로 교회에 다니면서 반사를 하게 되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전 사범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결혼도 자기가 점찍은 여성을 찾아가서 장인 될 어른 앞에 무릎을 꿇고 승낙을 받았다. 장부 답다. 그리고 건강하다.
나태주 시인은 집이 가난한건 비슷하다. 나태주 시인도 6남매중에 장남으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에서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청상과부가 된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게 되었다. 나태주시인은 가난한 집안 사정을 생각하여 은행원이 되고싶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고를 가려했으나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라고 사범학교로 보냈다.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되고 싶었던 초둥학교 교사의 길로 가게되었다. 자신을 아버지의 아바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나이가 19세 차이다. 초등하교 교사가 되고도 늘 불만스러웠다. 처음부터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교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했다. 그는 중학교 다닐때 어느날 박목월의 시를 읽고서 시인이되려고 생각햇다. 그는 박목월 시인을 만나고 결혼 주례로 목월이 서천까지 가서 해주었다. 그는 박목월을 시인의 아버지로 김남조 시인을 시인의 어머니로 생각했다. 그는 또한 해르만해세를 좋아했고 이어령교수를 사모했다. 그가 서울 신문사에 신춘문에 시부문에 당선 된것도 박목월의 은혜로 생각한다. 나태주 시인은 사랑하는 여성이 있었다. 상사병에 시달리다가 죽을 것 같아서 시를 썼다고 한다. 사랑의 힘이 크다. 상처의 힘도 크다. 오늘의 나태주를 있게 한 힘이 사랑의 힘같다. 시인 박목월이 나태주시인에게 서울에 오지말고 시골에 근무하면서 시를 써라고 당부한 말을 새겨 들었다. 근무하는 학교가 소규모이며 때로는 폐교되는 아픔을 겪어면서 자연을 가까이 하고 꽃을 관찰하면서 국민시 “풀꽃”을 창작하게 되었다.
“오래 보아야/예쁘다
자세히 보아야/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아주 짧은시다. 첫째와 둘째줄은 자연이 준 선물이지만 세째 줄은 신이 준 한마디라고 회상했다.
너도 그렇다. 나도 그렇다. 많은 독자들이 세째줄에 매혹되며 좋아한다.
풀꽃시가 광화문 네거리에 게시되고 방송에 인용되고 나태주시인은 일약 국민시인으로 자리 매김되었다. 그의 지나온 어렵고 힘든 일들이 소개되면서 박수와 격려를 보내고 있다. 그는 병으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 가까워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더욱 신앙심도 깊어졌다. 그는 모태신앙이 아니다. 결혼 후에 부인의 안내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건강이 약해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신심이 깊어진 것 같다. 부부가 교회의 직분이 소개되지 않아서 알수 없지만 장로 직분은 받지않은 것 같다.
반면에 윤원영 수필가는 장로이며 부인은 권사다. 그러한 연유로 문경지역 YMCA와 인연이 되어 문경지역에 문화해설사 과정을 개설하여 자신이 해설사가되어서 퇴임후에 문화해설사로 맹활약을 했다. 또한 청소년 교육에 더욱 매진하기위해서 스카우트 연수를 받아서 훈련교수가 되었다. 두 사람 다 교직에 40년 넘게 봉직하고 교사 교감 교장을 거쳐서 퇴임했다. 나태주 시인은 직업은 교사이며 본업은 시인이라고 할만큼 시 창작에 전념했다. 반면에 윤원영작가는 거의 80세가되어서 수필가로 두번 등단했다. 두분 다 열정이 대단하다. 50년대 60년대 70년대 나라 전체가 가난했다. 나역시 70년대 초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정말 월급이 쥐꼬리 만했다. 우리 세대는 참고 견디며 이겨낸 인고의 시대였다. 특히 두 사람이 지나온 청소년 시절은 가난이 심했던 시절이다. 나태주시인은 1945년 해방둥이다. 윤원영 수필가는 1937년생이다. 그당시에 사범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은 그 지역 수재였다고 봐야한다. 대전사범이 율이세었고 다음이 공주사범 군산사범이라고 나태주 시인이 적었다. 우리 지역에도 안동사범과 대구사범이 있었는데 입학이 어려웠다. 두사람은 가난하고 어려운 가정사정을 이겨내고 또한 나라 전체가 가난한 시대에 제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훌륭한 교육자이다. 나태주 시인은 처음은 교직에 적응을 잘 못해서 어려웠지만 시골 학교로 다니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꽃을 사랑하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윤원영 수필가는 광부의 아들이 선생이되어 광부의 자녀들을 가르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나태주시인은 공주문화원 원장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외국에까지 다니면서 문학강연을 하는 명사가 되었다. 윤원영수필가는 문경지역에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하면서 교회의 장로로 보람과 기쁨을 가지면서 지나고 있다. 누구의 일생이 더 빛나는 가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가고 난뒤에 뒷모습이 진상이기 때문이다. 두 작가의 지난 날의 고난과 역경에 감사를 보내고 남은 여생을 응원하면서 힘찬 박수를 보낸다.
기차는 내 친구
윤원영
내가 철로변으로 이사 온 지도 어언간 40년이 넘은 것 같다. 그 무렵 우리 지역에는 석탄이나 시멘트가 많이 생산되었다. 그리하여 화물과 사람을 실어 나르는 열차가 하루에 이십 차례 가까이 부지런히 달렸다. 하필이면 시끄럽고 번잡한 철로 변으로 이사를 갓느냐고 주위에서 핀잔이 쏟아졌지만 우리 가족은 기차소리 요란해도 잠을 잘 잤고 애들은 잘 자라주었다.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인데 잠꾸러기여서 아침에 깨우려면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여기로 이사온 후 부터 매일 아침 7시경에 첫차가 기적소리 울리며 지나게 되면 아이들이 모두 벌떡일어나 철로변으로 달려가 손을 흔들어 댄다. 기차에 탄 승객들도 반갑다고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한다. 아이들은 더욱 신이나서 함성을 지르며 난리다. 학교에 다녀오면 철로변은 아이들의 놀이터다. 즐겁게 놀다가도 기차가 지나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승객들과 정을 나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이들과 기차는 정다운 친구 사이로 변해갔다.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내곁을 떠나 갔지만 이전에 아이들이 하였던 것처럼 기차가 지날때면 철로변에 우두커니 서서 마음으로 손을 흔들며 옛 친구인 기차를 맞이 한다. 요즘 문경은 석탄도 사라지고 인구도 급격히 감소되어 철로를 달리는 친구도 하루에 대여섯 번밖에 찾지 않는다. 손을 흔드는 아이도 없고 흔들어 주는 승객도 사라져가고 있다. 어느 날 철로 변에 서서 정든 여인을 보내듯 점점 멀어져가는 기차의 꼬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불현듯 추억의 열차가 요란하게 기적소리 울리며 나에게로 달려 왔다.
---------------중 략------------
내가 대전에서 사범학교에 다닐 무렵 3년 동안 대전철도국에서 고학을 하였다. 요즘 말로 아르바이트를 한 셈이다. 쉴새 없이 기적소리 울어대고 기차 연기 자욱한 대전역 구내에 자리 잡은 철도국 물품창고에서 근무했다. 학교에서 하교하면 사환일도 하고 야간에는 경비원을 도와 산더미처럼 산재한 물품을 관리하고 경비하는 일을 맡아하였다. 숙직실은 나의 공부방이요 보금자리 였다. 담당과장이나 직원들이 고생많다며 가끔 집으로 초청하여 성찬을 베풀어주셨고 어떤분은 고추장 된장 각종 반찬 등을 챙겨 주셨다. 그때 철도국 직원들이 나를 한 가족처럼 배려하고 베푸셨던 따뜻한 사랑이 지금도 가슴 깊숙이 간직되어 있기에 이처럼 ‘기차는 우리 집’ 이라고 불쑥 내뱉은 모양이다.
------------중락-----------
몇 년 전에 우리 집옆 기찻길 가까이에 마을 노인정이 세워 졌다. 가끔 아내와 함께 노인정 옆 원두막 마루 턱에 걸터앉아 옛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게 지내곤 하였다. ‘달까닥 달까닥’ 가차가 지날 때 마다 반가운 친구가 온 것처럼 벌떡 일어서서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 하였다. 옛날 기차를 반갑게 환영하던 꼬마들이 사라진 자리에 우리 부부가 친구가 되어 가고 있다. 올봄에 아내가 기찻길 옆 언덕 철도 땅에 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었다. 무공해 채소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이제 기찻길 옆 채마밭이 고향집 어머니의 텃밭이 되어버렸다.
방금 도착한 추억의 열차에서 나에게 포근한 사랑과 살아갈 용기를 준 고향집 철도 가족이 찾아 올것만 같다. 나는 오늘도 기찻길 옆 언덕에 서서 나의 오랜 고향친구를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의 꿈
나태주
우리 아버지는 평생 농부로 사신 분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꿈은 농부가 아니었다. 하기는 당시 농부치고 농부로 살고 싶어서 농부인 사람이 있을까만 말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꿈은 초등학교 교사였고 젊어서 아버지의 꿈은 경찰관이거나 군인이었다. 나아가 장년기엔 작은 사업가를 소망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가운데 아무런 직업도 갖지 못하고 다만 농사짓는 사람 농투성이로만 사셨다. “처옥자쇄(妻獄子鎖)”란 옛말이 있다. 아내는 감옥이요. 자식은 그 옥에 단 자물쇠 같아서 한평생 갇혀서 살수 밖에 없는 남자의 운명을 상징하는 말인데 아버지야말로 바로 그런 분이셨다.
우선 어머니가 붙잡고 할머니가 붙잡고 여섯이나 되는 자식이 매달렸다. 한 발자국도 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오직 가족을 위해 무한히 인내하고 희생해야만 하는 자리가 아버지의 자리였다. 그러니 당신의 꿈 같은 걸 펼쳐볼 여유나 기회가 있을 리 없다.
다만 아버지는 농토를 많이 가지고 농사짓는 농부가 되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맏이인 나더러 선생이 되면 돈을 모아서 논이나 몇 마지기 사 달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하셨다. 그러나 나는 글을 쓰면서 사는 일도 벅차고 이것저것 하느라 돈이 모자란 판에 아버지 논을 사 드릴 여유가 도무지 없었다. 애당초 나는 아버지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다고 생각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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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주 당신을 ‘반거챙’이란 말로 표현하셨다. 반거챙이는 ‘반거충이’의 충청도식 발음으로 ‘무엇을 배우다가 중도에 그만두어 다 이루지 못한 사람’ 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당신은 공부도 중도에 그만두어 이루지 못했고 농사꾼으로도 제대로 되지못하고 반만 되었다는 것이다. 신식 표현으로 말하면 경계인으로 살았노라는 하소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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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언가 열중으로 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된다. 무료해서도 안 되지만 삶의 의욕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끝내는 쉽게 몸과 마음이 쇠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되기도 할것이다. 비록 당신이 살고 싶어서 산 삶이 아니었지만 논밭에 나가 농작물을 살피며 산 아버지의 삶이 내내 그분에게 긴장감을 주고 건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98세 일기로 소천 하셨다. 아버지가 분명 천국에 가셨을 것으로 믿고 다시 뵈올때 까지 평안하기시를 빈다.
두 사람의 인생 여정을 보고서
김정호
먼저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동시대에 함께 살아온 자수성가한 훌륭한 교육자이며 문인이다. 나는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는 이현복 교수님의 말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막연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맞는 말인 것 같다.
사람 人자 네자를 새겨본다. 인 인 인 인 人. 人. 人. 人.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다.” 강의를 하면서 흑판에 인자 네자를 쓰고 풀이하면 대부분 수강자들이 숙연해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않기 때문일 것이다. 근래에 사람 人자 여섯자를 보았다. 의아해서 자세히 보았다. “사람아 사람아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이렇게 풀이 해두었다.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이 많으니 두 번이나 불러본 것으로 추측되었다.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가 나에게 너는 사람다운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늘 노력 중이라고 답할 것 같다. 부모다운 부모, 자식다운 자식, 선생다운 선생, 문인다운 문인, ‘다운’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있다.
위의 두 작가는 ‘다운’ 사람들이다. 첫째 무엇이 되기전에 사람이 되어야한다. 두작가는 첫째 사람답다. 그리고 선생답다. 또한 문인답다. 꼭 명성을 얻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야 대단한 문인이라고 생각하지않는다. 그가 남긴 작품이 훗날 누군가가 읽고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좋은 작가다.
두 작가는 교육자로도 성공했다. 교사, 교감, 교장으로 승진한다는 것이 쉽지않다. 잘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세월이 지나면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대체로 교직에는 10%미만 만이 승진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좁쌀같은 점수를 모으려고 농어촌으로 도서벽지로 가기도 하지만 연구 점수에, 힘든 업무에 책임을 맡아 기획을 하고 실적 거양을 하고 각종 점수 모으기에 낙타가 바늘귀를 뚫는 심정일 것이다. 그런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때로는 치사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이겨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보람을 찾았을 것이다.
두 작가의 인생여정이 아름답다. 물론 나태주 시인은 유명인사가 되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어려운 점도 많았을 것이다. 나태주 작가는 유머감각도 대단하다. 자기는 태생이 운전을 못하게 되어있다고 했다. 본인의 이름이 나 태주. “나, 태워줘.!하면 태우러 온다고 죠크를 했다.” 방송국에서 대담중에 젊어보인다고 하니 모자를 훌러덩 벗어보이면서 “해방둥이” 라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가 모자를 즐겨쓰는 이유는 대머리로 감추려고 쓴다고 했다. 아주 솔직하다.
윤원영작가는 늘 자기가 다니던 일본의 초등학교를 그리워했다. 그의 아들이 서울에서 중등학교 교사로 있는데 아버지를 모시고 일본에 가서 자기가 다니던 소학교를 찾아가 교장을 만나서 자기가 다녔던 학교라고 이야기 하고는 교장의 안내로 학교를 보고왔다. 소원 성취했다.
또한 문경 YMCA 전경홍 이사장과 의논하여 문경관광홍보요원 양성교실을 개설하여 홍보요원42명을 배출하여 활동하다가 “관광안내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문경시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연수를 통해서 정식 문화해설사가 되었다. 최초의 문경 새제 문화해설사로 관광객들에게 문경을 잘 알려주는 보람과 긍지를 가졌고 지금은 후배들이 문경지역에 문경 새제 뿐만이 아니고 문경의 도자기 등 여러 명승지를 소개하고 있다니 참으로 좋은 일이다.
두 작가는 가족관계도 화목하다. 윤원영 작가는 2남2녀이다. 자녀들의 자세한 근황은 알 수 없지만 자상한 작가의 가정교육으로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태주 작가는 1남1녀이다. 딸(나민애)이 서울대학교에서 명강의를 하는 교수로 알려져 있다. 역시 부친의 좋은 유전 인자를 물러 받았으며 보고 듣고 배워서 명성을 날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두 작가는 여러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며 존경의 대상으로 귀감이 되는 분들이다.
최인호작가는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은 “성직자와 초등학교 교사라고 말했다.” 가끔 일부 성직자나 교사중에 일탈하여 말썽이 생기기도 하지만 자기보다 낫다고 했다. 나도 역시 같은 생각이다. 그들을 존경한다. 앞으로 두 작가의 남은 인생 여정이 더욱 빛나고 아름다우며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2025.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