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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정재학 날 짜 2011/07/13 (05:55)
I P 112.217.***.*** 조회 112
전라도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5부-3)
전라도는 지금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 (5부-3)
(전라도의 화답)
(3)
과거 깊어가는 지역감정을 보며, 망국론까지 생각하였던 정치인들은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다양한 해법을 내놓았었다. 마치 영조의 탕평책처럼 고른 인재 등용과 같은 지역감정 해결책은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주효(奏效)하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지역감정을 해소하고자 하는 정치권력들이 보인 것은 농림부장관 자리나 하나 던져주는 무성의(無誠意)한 것이었고, 이에 대해 전라도인은 지역감정 해소를 말하는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라도인들은 ‘우리 손의 권력’을 요구하며 호남정권을 이룬 것이었다.
북한의 지역분열 공작이 가장 주요 원인이었지만, 지난 정권의 호남에 대한 무성의(無誠意)는 가증스러운 일이었다. 표가 필요하면 달려와 온갖 감언이설로 꾀여 표를 받아갔고, 그 후에는 토사구팽(兎死狗烹), 버리고 또다시 이용하는 짓을 전라도인들은 얼마나 경험하였던가. 그러므로 이명박 이후 차기(次期)정권에서도 무성의(無誠意)가 진행된다면, 호남은 다시 뭉칠 것이다.
그러나 호남인들도 가슴을 열어야 한다. 그래도 같은 민족, 혈족으로서의 신뢰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호남인의 첫 번째 자세는 가슴을 여는 것이다. 아마도 차기 정권은 전라도인들이 믿을 수 있는, 신뢰를 주제로 국정(國政)을 펼쳐야 할 것이다. 이에 호남인들도 화답을 해야 한다.
‘우리도 믿는다.’는 이런 자세가 진정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마음의 자세라고 본다. 그리고 5.18에 대해 열린 마음과 열린 시각을 보여야 한다. 5.18은 지역감정의 부정적 결과가 집약된 총체적인 모순이다. 당시 경상도 사람들만 공수부대로 온 것은 아니었다. 전라도 출신들이 공수부대 중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으로 왔다. 그리고 공수부대는 임신부의 배를 대검으로 찌른 적도 없고, 처녀의 젖가슴을 도려낸 적도 없다.
이러한 유언비어 혹은 연출된 장면은 모두 북한의 특수부대짓이었고, 심화된 비극은 북한의 공작으로 인해서였다. 특수부대는 공작을 마치고 귀환 중에 함께 가던 학생들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이유로 살해하여, 수많은 실종자를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남파되었던 북한특수군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 5.18의 진실에 대해서 전라도는 열린 마음과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
5.18에 북한특수군이 개입했다 해서, 5,18의 명예가 더럽혀지거나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분명 공수부대를 투입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전국적인 데모를 진압한 뒤 정권을 약탈하고자 하였음이 틀림없었고, 또한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은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하고 지키는 군대가 할 짓은 정녕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광주시민의 강렬한 몸짓은 민주화를 위한 강력한 몸부림이었음이 분명하였다.
다만, 우리 모두가 북한을 잊고 있었다는 오류를 인식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해방 이후 6.25 남침전쟁부터 60여 년 간 끝없이, 총 국력을 기울여 적화공작을 하던 북한이 5.18 사태를 가만 놔두었으리라는 생각은 참으로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사북사태처럼 작은 소요조차도 북한이 이용하거나, 확대시킨 일은 그 후 모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북한이 연출한 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100%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지금도 반값등록금 시위를 종용하거나, 확대시키고자 골몰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이를 위해 반값등록금 시위 공작에 투입된 간첩도 벌써 13명에 이르고 있다. 검찰은 이미 이들을 구속시켰다.
그러므로 5.18은 신군부의 정권 탈취 과정에서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 결과, 이에 분노한 광주시민의 궐기가 있었고, 그 후 이 사태를 남한적화에 이용하고자 북한이 특수부대를 파견하여 확산된 비극이다. 따라서 이 북한의 공작에 대해 우리 광주시민들은 인정하고, 5.18 역사에 이를 기록하고, 무연고 묘의 정체를 세상에 알려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위해 민주당 일색의 정치판을 엎어야 한다. 그 민주당에 들어있는 종북좌파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호남인 스스로 빨.갱.이를 제거하고자 빨.갱.이 논쟁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민노당 이하 각 정당 혹은 단체, 호남의 모든 조직 및 정관계에 들어있는 종북좌파를 제거해야 한다. 민노당이 종북종김(從北從金)을 목표로 하는 빨.갱.이 정당임을 몰라서 감쌀 것인가?
지역차별은 없을 것이라는 신뢰를 잊지 말고, 새로운 정권에 동참하여 나라를 다시 만드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이 일을 계기로 우리 백의민족은 하나로 단결하여, 대륙과 대양을 향해 나아갈지도 모른다. 호남과 비호남의 정신적인 통일은 틀림없이 남북의 통일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라도인들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누가 가르쳐서 행동하는 것 보다는 스스로 깨우치고 실행에 옮기는 일은 자유로운 영혼의 주인으로서 합당한 일이다.
정재학
(전교조추방시민연합회 공동대표, IPF국제방송 편집위원, 시인, 데일리안 광주전라편집위원, 인사이드 월드 논설위원, 전남자유교조 고문, 자유지성300인회 회원, 태평로포럼 회원)
* 많은 분들이 연재를 연장해 달라는 말씀을 하시기에, 전라도 사람들의 뜨거운 애국심을 담은 6부 ‘전라도의 영광’을 3 회에 걸쳐 올립니다. 못난 글을 읽어주심에, 오직 감사드릴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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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명 한마디 날 짜 2011/07/13 (12:24)
I P 218.101.***.*** 조회 143
정재학님 보시기 바랍니다.
정재학님께서 보시는 5.18에 관한 그 어떤 소신을 피력할 수는 있겠고, 또 그 누구도 막을 수는 없겠지만, 5.18에 대하여는 실제 진상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대목도 있기에 5.18에 관하여는 좀 더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고 나는 말합니다.
5.18광주사태 때 초기 강경진압을 한 사람은 분명 광주사람 31사단 사단장 정웅이었습니다. 그가 7공수 제7여단장이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병력을 요청하여 이루어졌으며, 33, 35대대 병력을 배속받아 작전지휘했던 인물입니다.
이 문제는 전두환과는 거리가 멀고,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강경진압했다고 보는 시각은 매우 틀린 것입니다.
당시 광주사태에 개입한 북괴군 특수부대는 목포해안으로 침투했었는데, 그 지역 해안경비를 담당한 31사단 정웅은 해안경계를 고의로 뚫어준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스러우며, 초기 강경진압은 사전에 김대중과 모종의 어떤 교감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기도 합니다.
광주 시위자들에게 무혈진압이라는 작전과는 거리가 먼 강경진압쪽으로 선회하여 작전명령을 내린자가 1987년 김대중의 평민당에 입당해 김대중으로부터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것은, 그와 김대중간 서로 어떤 사이였는지를 두고 두고 의심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정호용은 신군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은 당시 공수부대를 지휘할만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김대중은 5.22일날 전국적 규모의 봉기사태를 일으키기로 하고 최규하 현정권을 전복하고 정권을 탈취하려고 계획했었습니다. 당시 동교동 김대중 가택을 수사하던 국군보안사 장교에 의해 이희호로부터 입수된 문건에 의하면 김대중은 정권을 탈취하고 세울 새로운 정부의 내각구성까지 다 짜놓았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김대중은 분명 폭력에 의한 정권탈취를 목표로 거사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합수부장이었던 전두환 사령관이 이러한 김대중을 5.17 내란음모죄로 투옥시키지 않았다면, 그 때 이 나라는 김대중의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우리 대한민국의 적화는 더 빨리 다가왔을 것이라고 나는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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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2011-07-13 오후 10:31
나는 5월 17일 전남도청에 출장갔다가 5월 18일 자정까지 광주에서 머물며 현장을 지켜본 사람인데, 폭도들이 무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는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한마디 2011-07-13 오후 3:55
정재학님께서 밑에서 박관현에 관해서 언급하셨기에 한 마디 하겠습니다.
밑에서 김관현이라고 했는데, 그는 김관현이가 아니고 박관현입니다.
박관현 그는 아시다시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김대중을 만난 적이 있었는지는 나는 잘 알지 못하겠으나, 그가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에 의해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고, 그의 지시를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윤상원으로부터 광주에서 피신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가 여수로 빠져나갔을 때, 윤상원은 박관현이 개엄군에 살해되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립니다. 이 유언비어가 주효하게 먹혀 시위대가 급속히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제 죽은 것이 아니라, 광주에서 여수로 대피하고 있다가 나중에 서울 삼양동 모 다락방에서 숨어지내며 요꼬공장에서 일하다가 노동자들의 신고로 경찰에 잡혔다고 합니다.
***
박관현 관련내용 중 일부 발췌:
5.18일, 12:30분, 광주학생회관 및 한일은행 앞에 학생 500여명이 시가지를 돌며 시위하면서 “도청 앞에서 시민이 다 죽어가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당시의 전남대 학생회장은 박관현이었다.
그는 서울 학생회 간부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고 무등산에 숨어있었다. 누군가가 “박관현이 계엄군에 잡혀 죽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이로 인해 학생들은 더욱 분노했다.
박관현(당시 27세)은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열렸던 전남도청 앞 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수배된 뒤 1982년 4월에 투옥되어 단식투쟁을 벌이다 10월 12일에 숨졌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3:30
나머지는 한마디님의 말이 모두 사실입니다.
한마디 2011-07-13 오후 3:06
그리고 정재학님,
5월 18일 다음날, 폭도들이 무기고를 탈취하여 무장하고 광주로 진입할 당시, 그 때 죽었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거의 무장폭도들이 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나온 피탄은 우리 국군이 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기고를 탈취하고 무장을 취하는 일명 시민군이라는 그들이 과연 순수한 학생들이었을까요?
그들의 죽음이 어떻게 전부 우리 군의 강경진압과 발포에 의한 것이었다라고만 할 수 있습니까?
이것도 語不成說입니다.
한마디 2011-07-13 오후 3:04
12.12가 쿠데타 될려면 12.12가 정권을 탈취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도가 명백히 있어야 쿠데타(정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12.12는 당시 개엄사령관인 정승화가 박정희 시해범인 김재규의 연류 의혹을 조사해야만 했던 전두환이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결제를 받아 합수부장으로서 당당하게 자기 권한을 집행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정권을 탈취하려는 쿠데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語不成說입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2:54
아예 믿지 않으려는 생각인 모양입니다. 그러면 할 수 없지요.
그리고 전두환
5.18 이전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79년 12월 12일에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경복궁에서 찍은 신군부 사진을 기억하시지요? 이미 정권은 전두환의 신군부가 장악하고 있엇습니다.
도대체 아예 믿지 않으려고 하니, 여기다 대고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한마디 2011-07-13 오후 2:45
우리 나라에서의 촛불집회는 미군부대가 효선.미선을 추모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것입니다.
좌익들과 학생들이 이것을 보고 미선.효선의 죽음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면서 모방했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촛불집회라고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한마디 2011-07-13 오후 2:43
탈북자 증언에서 북괴군 특수부대 속에는 우리국군 복장을 한 병력도 있었고, 민간인 복장을 한 병력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겨누어 전투를 하면서 도망치는 학생들 뒤에서 쏘고 했었습니다. 꼭 시민들이 피해를 입은 것이 우리 공수부대의 진압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 공수부대가 초기에 강경진압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진압명령을 내린 지휘관은 광주사람 정웅 사단장이었으며, 전두환이가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서 공수부대를 투입해 강경진압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해야 할 것입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2:39
한마디님, 어찌 현장에서 있엇던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평화를 알리는 촛불은 그때 모두들 들고 있었고 당시 KBS MBC 방송에도 나왔습니다. 한번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셔도 될 것입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2:35
다만 여기서 논쟁이 되는 것은 공수부대의 진압에 대한 강도가 어떠했느냐는 것이겟지요.
이미 그 부분은 명명백백한 것이니 다툴 일 없을 것입니다. 나만 보면 일부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같이 본 것은 숲전체일 것입니다.
한마디 2011-07-13 오후 2:34
정재학님,
공수부대가 투입되기 전, 학생들의 시위가 평화적 시위를 했다고 하는 그런 말은 5.18재단에서 만든 자료에서나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촛불이라고 하는 것은 2002년 미군장갑차에 사고당한 효선.미선 여중생을 추모하는 미군들에 의해서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것을 2004년 노무현탄핵때 학생들과 좌익세력들이 본따서 집회때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것이지, 5.18 때는 그런 촛불집회는 없었습니다.
고성혁(견적필살) 2011-07-13 오후 2:21
그래봐야 님이 본것은 나무한그루일뿐. 숲전체가 아닙니다. 나무한그루를 가지고 숲전체를 말할 순 없죠.
정재학 2011-07-13 오후 2:16
한마디님, 경찰서 방송국 태우고 하는 것은 그 이후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대립이 극화될 때 발생한 것입니다.
직접체험한 저와 어떤 자료를 통해 본 것과는 실물에서 차이가 날 것입니다.
오히려 19일은 공수부대와 31사가 교대합니다.
한마디 2011-07-13 오후 2:00
정재학님,
31사단 정웅이 공수부대를 요청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합니다.
17일 당시 확대비상개엄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은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을 공격하고, 경찰은 포위당하여 매를 맞는가 하면, 파출소들이 파괴되고 방화되는 등, 경찰병력만으로는 도저히 시위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에 다급해진 전남경찰과 전남도지사는 31사 향토사단에 계엄군의 개입을 요청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정재학님은 자신이 본 것만이 그 진상의 전부의 것인양 말하면 여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1:41
현상과 사실에 대한 중립을 지키는 일은 어렵습니다. 냉정하게 오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겟지요.
그리고 조영환이는 우리 투타가 그 모든 것을 밝혀줄 것입니다. 난 둘을 화해시키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고성혁(견적필살) 2011-07-13 오후 1:38
좌우지간 정재학님도 518의 트라우마에서 빨리 벗어나길 빌겠습니다. 그 트라우마에 갇혀있는한 문제가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조영환님과의 논쟁도 사실 그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1:38
하여튼 고성혁님도 훌륭하신 분입니다. 의문에 대한 용기있는 지적은 참으로 좋습니다.
고성혁(견적필살) 2011-07-13 오후 1:36
외국의 진압에 대해서 제대로 알면 그런말 못합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1:33
당시 광주의 학생집회는 폭력이 없는 촛불집회였습니다. 그러니 경찰들도 가만히 놔두고 있었지요. 만약 폭력시위집회였다면, 경찰이 먼저 투입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찰이 시위집회 진압을 하지 않았다ㅡㄴ 것은 그만큼 광주는 평화로왔다는 것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때 서울은 시내버스를 두 대나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경진압은 서울에서 했어야 합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1:30
그건 시위집회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입니다. 보다 많은 다수의 시민들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경우이지요.
포리스라인을 지키는 경우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위대를 보호하지요.
고성혁(견적필살) 2011-07-13 오후 1:21
미국도 유럽도 인명피해 있습니다. 미국은 총기발사까지 해서 진압합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1:16
참, 고성혁님의 위의 글, 4대강 글은 제가 퍼갑니다. 좋은 글이며, 시의적절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하겟습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1:13
미국도 유럽도 사람을 죽이기까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든 학생이 어떻게 시위에 가담합니까?
무차별적인 야만까지 옹호해서는 안됩니다.
고성혁(견적필살) 2011-07-13 오후 1:11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시위지역에선 시위와 직접 관련없는 사람이라하더라도 그것을 구분할 수 없을 경우엔 그렇게 진압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고성혁(견적필살) 2011-07-13 오후 1:10
미국이나 유럽같은 곳에서도 그렇게 진압합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1:09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싶어서 저는 있는 그대로를 밝히는 것입니다.
정재학 2011-07-13 오후 1:07
고성혁님, 학생가방을 든 지금 막 버스에서 내린 학생 하나를 잡더군요. 시위와는 관계없는 학생이었습니다. 머리를 내리치는데, 피가 흘러서 바지를 타고 땅으로 흐르더군요. 물론 그렇게 맞은 학생은 터미날 벽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잇더군요.
너무 슬픈 표정이었습니다.
고성혁(견적필살) 2011-07-13 오후 1:05
정재학님. 당연히 그렇게 진압을 해야 되는 것이죠. 뭐가 잘못되었나요?
정재학 2011-07-13 오후 12:49
한마디님, 시위진압의 현장은 제가 5월 18일 본 그대로입니다.
이 시위에 김대중의 지시는 분명히 있었습니다.전남대 학생회장 김관현이 김대중을 만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학내 시위를 밖으로 끌어갔지요. 그러나 그것은 도청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촛불시위 같은 조용한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인권에 대한 개념보다 군과 사회전체가 야만에 젖어 있을 때입니다. 버스터미날에서 아예 사람사냥을 하는 것을 저는 지켜보았습니다.
그저 대학생이라 짐작되는 젊은이는 모조리 짐승잡듯 두둘겨 패더군요. 최초의 희생자가 터미날에서 발생했지요. 그걸 저는 목격한 것입니다. 현재까지 공수부대원이나 장교들이 5.18에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진압의 잔인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다만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북에 조정되고 확산되어 간 사실을 확실하게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 그 시대를 대학생으로서 겪어낸 증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하오니,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이라는 표현은 팩트요, 리얼리티입니다. 거기에 어떤 식이든 가공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그대로 밝히는 것이 훗날의 경구가 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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