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나체 석고 흉상'
1886년 봄, 합판에 붙인 마분지에 유채
테오에게...
이번 주는 몹시 바쁘게 보냈다. 유화 수업 이외에 저녁에도 스케치 수업에 갔고 그후 클럽에서 모델을 두고 10시 30분부터 11시 30분까지 작업하거든. 이런 클럽에 다니면서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도 알게 되었다.
이번 주에는 대형 나체 흉상을 두 점 그렸다. 베를라의 수업인데 모델이 아주 맘에 든다. 석고 데생시간에도 같은 모델을 스케치했다. 이제 막 두 점의 커다란 인물화를 끝냈는데,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할 말이 있다. 첫번째는 몇 년 동안 옷 입은 모델들을 보고 그림을 그려온 후 다시 누드를 보고 고대의 작품을 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고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만일 파리의 학교에 입학할 수 있으려면 그전에 다른 어딘가에서 그림을 배워야 하며, 더 이상 완전 초보에 머물지 않으려면 길든 짧든 아카데미에서 작업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것이다.
베를라가 내게 아주 엄격한 충고를 했는데, 데생 수업의 빈크 역시 같은 말을 한다. 그들은 내게 최소한 1년은 스케치에 몰두하라고 하는구나. 가능하면 석고상과 누드 데생만 말이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며, 그후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야외 그림이나 초상화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나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석고상과 누드 모델을 접할 수 있는 있도록 노력해야겠지.
제리코나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인물들도 등을 가지고 있다. 인물들 주변으로 공간이 있는 것이지. 그들은 마치 물감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도 이런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이다. 베를라나 빈크의 이야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이 이런 기술을 내게 가르쳐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 둘 다 색채와 관련해서는 옳지 못하거든.
내 습작과 다른 동료들의 습작을 비교해 보면 거의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는 게 놀라울 정도이다. 그들은 그림에 맨살과 똑같은 색을 쓰는데, 가까이서 봤을 때는 그들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조금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면 그들의 그림은 지독할 정도로 밋밋해 보인다. 분홍색, 섬세한 노란색 등의 부드러운 색조들은 거친 효과를 만들어내니까. 반대로 내가 그린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면 초록빛을 띤 빨강, 노랑이 섞인 회색, 흰색과 검은색, 그리고 많은 색이 뒤섞여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뒤로 물러나서 바라보면 인간의 살이 물감에서 튀어나오는 듯 주변에 공간이 생기며 진동하는 빗줄기가 그 위로 쏟아진다. 아주 조금의 채색 만으로도 효과가 강조되는 것이다.
내게 부족한 것은 훈련이다. 아마 그런 그림을 50점은 더 그린 후에야 뭔가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 나는 시간을 끌며 아주 정성을 들여서 채색한다. 충분한 훈련을 못했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 생명을 끌어내기 위해 너무 오래 망설이게 되더구나. 하지만 이건 시간의 문제, 연습의 문제다. 더 짧은 시간 안에 정확한 붓질을 구사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달라붙어 훈련해야겠지.
몇몇 동료들이 내 스케치를 보았는데 그중 한 명이 내 농부 그림에 영감을 받아 다음 누드 수업시간에 모델을 훨씬 더 활기차게 그리기 시작했다. 명암을 분명하게 부각하면서 말이다. 그가 그 스케치를 내게 보여주었고 우린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건 이곳에서 내가 본 동료들의 스케치 중 가장 훌륭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그 그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니? 한 선생님은 일부러 그를 불러서 또다시 감히 그런 식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확인하건데 그건 제대로 된 유일한 스케치였다.
너도 이곳이 어떤지 알겠지? 하지만 문제될 건 없다. 우린 그런 일에 화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불행히도 항상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그들이 그리는 인물은 거의 항상 머리를 거꾸로 박고 넘어질 것처럼 불안정해 보인다. 단 한 인물도 두 발로 단단하게 서 있지 않는다. 인물이 안정되게 서 있으려면 처음 구도를 잡을 때부터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도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떤 일이 있든, 결과가 어떻든, 내가 베를라와 잘 지내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말이다. 나는 이곳에서 내가 머릿속으로 원하던 것과 현실이 충돌하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내 작업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고 약점이 무엇인지 더 잘 판단하여 그걸 고칠 수 있게 되었다.
1886년 초
첫댓글 더 짧은 시간에
정확한 붓질을 할 때까지 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