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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2일 연중 제8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집회 44,1.9-13
복 음 : 마르 11,11-25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11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 엎으셨다.
16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상에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풍요와 안정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020년 조사를 보니 기아 인구가 전 세계에 자그마치 8억 1천만 명입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 인구 5명당 1명이 영양 부족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간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돌보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과 제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빵을 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들에게
옷을 나누어줄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도구입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도구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해 달라고만 청합니다.
여기에 자기의 어려움마저 해결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하느님의 주인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 어려움을 해결해주지 않으면 불공평한 하느님이라면서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이런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전에, 하느님의 도구답게 살고 있었는지를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시는데,
“제가 바빠서요. 제가 왜 해야 하는데요? 저한테 뭐 해 준 것이 있나요?” 등의 말을 하면서
손이 되기를,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거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과연 주님께서 좋아하실 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시장기를 느끼신 예수님께서 마침 길가에서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십니다.
그 열매는 시장기를 끄기에는 충분치 않았겠지만, 허기를 잠재우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열매를 기대했는데, 잎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잎이 나기 전에 먼저 열리는 과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다가갔을 때 그 잎이 무성했다면
이미 열매가 맺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열매도 달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나무이지요.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결국 뿌리째 말라 버립니다.
우리도 열매 맺을 가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열매를 원하셔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인데 철저하게 외면하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서 계속 의심합니다.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으며 자신이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도구가 되어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뿌리째 말라 버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큰 도시에서 살다가 완전 시골로 귀촌한 한 교우가 직접 체험한 사건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교적을 옮기려고 가까운 시골 본당을 방문했습니다.
사무실에 들러 일을 마치고 성당 온 김에 성체조배나 하고 가려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안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안이 너무 추워 이빨이 딱딱 마주칠 정도였습니다.
왜 이리 추울까, 주변을 살펴보니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유리 창문마저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단 몇 분도 머물러 있지 못하고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성당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가 작업복 차림에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큰 마스크를 한 채 열심히 성당 바닥을 닦고 있었습니다.
엄동설한에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시는 초라한 아저씨의 모습을 뵈니
안타깝고 측은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데, 홀로 성당 바닥을 박박 닦던 그분은
바로 그 성당의 주임 신부님이셨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교우가 약 2년의 세월이 흐른 후 어느 토요일,
‘혹시나 오늘도 그 신부님께서 홀로 청소를 하고 계시면 도와드려야겠다.’ 생각하며
성당을 찾았는데, 그 왜소한 체구의 아저씨,
아니 주임 신부님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홀로 성당 청소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당 안에서 지극정성으로 성당 바닥을 청소하는
그 모습이 그리도 성(聖)스러워 보이더랍니다.
마치도 그 신부님이 성전 마당에 줄지어 서 있던 수많은 장사꾼들 사이에서
홀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처럼 보이더랍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마치 시장 한복판처럼 시끌벅적한 성전 마당을 둘러보시며 통탄하십니다.
조용하고 경건해야 할 성전 마당이 장사꾼들과 환전꾼들, 고리대금업자들로 빼곡했습니다.
제단에 바쳐질 동물들의 울음소리,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크게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라고 질타하시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으십니다.
갖은 물건들이 쭉 놓여있던 진열대를 둘러 엎으십니다.
과격한 예수님의 모습에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 당신 성전을 정화(淨化)시키십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봅니다.
우리끼리 만의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성전 정화작업이 아닐까요?
상상을 초월하는 건립기금으로 건립되는 성전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 떼를 극진히 사랑하는 겸손하고 예의 바른 사목자의 희생과 헌신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전을 건설하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우리 시대 사회적 약자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도
크게 환영받고 아무런 차별도 느끼지 않는 환대의 교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따뜻이 보듬어줄 수 있는 치유의 공동체,
나만 혹은 우리 가족이나 우리 본당만 생각하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보편적인 교회 건설이 시급하지 않을까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체코 프라하 카를대학의 신학자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이 방한하여
“포스트 코비드와 한국교회, 변화하는 시대의 신앙의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의 오후’라는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의 책이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몬시뇰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인용하며 ‘변화의 시대와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의미가 크게 다른 말입니다. 변화의 시대는 마치 날씨와 같습니다.
흐린 날, 맑은 날,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이 있지만 그것이 삶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의 변화는 마치 기후와 같습니다.
온대지방, 열대지방, 한대지방, 적도, 북극과 남극은 삶에 큰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준비하는 사람과 국가는 계속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과 국가는 쇠락의 길로 가기 마련입니다.
속지주의 시대에 익숙한 방법, 이동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대의 방법,
성사와 교회 그리고 성직자의 권위로 이끄는 방법으로는
팬데믹 이후의 교회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어려워졌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몬시뇰은 ‘시대의 변화’를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시대는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변화와 함께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동시에 목격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현재 변화의 속도와 범위, 깊이는 그간 확실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전반적으로 뒤엎고 있으며
또 전통의 종교적 확신이 무너진 뒤 나아가 세속적, 인본주의적 확신마저 흔들리며
제도에 대한 신뢰와 전문가들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문 닫힌 교회’를 예언적인 경고 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교회가 진정한 개혁, 특히 영성의 심화를 거치지 않으면
머지않아 대부분의 교회가 텅 비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기심과 물질주의의 유혹이 커지는 사회, 세대 간 갈등이 불러오는 반목,
군중 속 외로움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에 대한 우려를 전하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갈림길은 더 성숙한 형태의 그리스도교로 깊이 나아갈 기회라고 진단하였습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살아 계시고 부활하시며 변모시키시는,
보편적인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뚝 솟은 첨탑의 교회가 더 이상 사람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교님의 모관과 지팡이는 더 이상 권위의 상징이 되지 못하고 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물이 터져서 잡았던 물고기가 빠져나가듯이
젊은이들이 더 이상 교회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로는 성령의 은사가 열매 맺지 못하고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수도자와 성직자의 성소가 줄어들고 있으며 텅 빈 교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권위를 상실할 것 같은 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거부하였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오전이 제도와 조직, 성사와 교회의 틀을 공고하게 하는 시간이었다면
그리스도교의 오후는 그리스도와 소통하는 ‘영성’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정신적, 영성적 삶이 펼쳐져 나갈 적기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가 종말을 맞이하는 이 시기에 자기 비움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쪽에서는 성당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가두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책자를 나누어주고, 입교 신청서를 받았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약 장수가 약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두선교를 하는 쪽보다는 약 장수가 약을 파는 쪽으로 많이 몰렸습니다.
오후가 되자 가두 선교를 하는 사람들이 약 장수에게 가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는데 사람들이 별로 오지 않고,
당신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약을 파는데 사람들이 많이 오는 이유가 뭘까요?’
그러자 약 장수가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이 약은 가짜입니다. 몸에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게 좋은 약도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가짜 약을 진짜처럼 최선을 다해서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전하면서
그렇게 확신이 없고, 자신감이 없습니까!’
전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하는 사람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확신과 신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 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전례의 목적, 전례의 열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전례가 어떤 목적을 지향해야 하는지 밝혀줍니다.
복음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장면이고
그 다음은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는 장면이며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가 왜 뿌리째 말라 죽어야만 했는지를 설명하시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서술 방법을 대칭 구조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
이스라엘 성전 전례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성전이 돈을 좋아하게 될 때 본래의 전례 목적을 상실하게 되고
그러면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전례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렇게 밝히십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 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특별히 용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게 해 달라고 청하면
반드시 용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마지막으로 심어주십니다.
강도의 소굴이 된 전례는 서로 돈을 좋아하고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온전한 전례가 이루어지는 성당은 서로 사랑하고 청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충만한 신자들이 많습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용서를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며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그것도 잘 알고 있고 자신도 죽어 마땅한 사람임도 알고 있지만
자신을 고발한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브라디의 눈빛이 빛났고 수녀는 조용히 말을 계속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를 용서해야 되겠다고 다짐하여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기회만 있으면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만 더해갑니다.
정말 어쩌면 좋겠습니까?”
수녀는 정중하게 문의했고 브라디는 제법 대견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되지요.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게 안 되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생활도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천만에, 그러지 마시오. 용서할 수 있도록 좀 더 힘쓰셔야죠!”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큰 눈을 한 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신앙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사랑과 관련된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용서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받아야만 줄 수 있는 것이 용서입니다.
내가 용서받았다면 나도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기 싫고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브라디가 수녀님을 만나서 용서를 하고 싶고 용서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처럼
전례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는 우리에게 이런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앞으로 아무도 없게 하겠다는 결심이 생겨야 전례에 온전히 참여한 것입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1997년 7월 12일 파키스탄 북서부 스와트 지구의 밍고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두 형제와 자매 중 장남인 수니파 무슬림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말랄라의 아버지인 지아우딘 유사프자이는 교육 활동가이자 학교 소유주로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장려하는 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말랄라의 삶에 영향력 있는 인물로 봉사하여
그녀에게 교육에 대한 사랑과 학습할 권리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교육받을 권리가 없었습니다.
지아우딘은 탈레반의 행동에 반대하며 소녀들을 위한 교육을 공개적으로 장려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의심할 여지 없이 말랄라 자신의 행동주의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2008년 말랄라가 겨우 11살이었을 때 그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에서
“어떻게 탈레반이 교육에 대한 기본권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연설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격려로 말랄라는 BBC에 익명의 블로그를 쓰기 시작하여
소녀들의 학교 출석을 금지한 탈레반 치하의 삶을 설명했습니다.
2012년 10월, 당시 15세였던 말랄라는
그녀의 행동주의와 유명세 때문에 탈레반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한 탈레반이 그녀의 학교 버스에 올라타 그녀의 이름을 묻고 그녀의 머리에 총을 쐈습니다.
그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파키스탄에서 초기 치료를 받은 후
치료를 위해 영국 버밍엄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말랄라는 이 잔인한 공격에서 살아남았고, 그녀를 침묵시키는 대신
그녀의 삶에 대한 시도는 그녀의 결심을 강화했습니다.
회복 후 그녀는 전 세계 소녀 교육을 옹호하면서 더욱 활기차게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2014년 17세의 말랄라는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한 억압에 맞서고
모든 어린이의 교육권을 위해 투쟁한 공로로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평생동안 말랄라와 그녀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력과 지원은 그녀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그녀가 말하도록 격려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극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 사회의 문화적 규범에도 불구하고 지아우딘은
그의 딸을 세상을 바꿀 잠재력이 있는 개인으로 대했습니다.
그는 딸과 여자들의 인권 성장을 위해 자신의 딸부터 날개를 꺾지 않았고
그것이 한 나라의 교육 제도를 변화시키는 큰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말랄라가 아버지를 만남으로써 불가능이 없다고 믿게 된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없다는 내가 죽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나로 새로 태어나는 것이
하느님과의 만남인 미사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우리 전례도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저주를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가 세상 종말일 것입니다. 용서와 능력의 열매가 맺히는 전례가 되도록 힘씁시다.
하느님을 믿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신다.
성전에서 나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았을 때 제자들은 놀랐을 것이다.
무화과나무는 수분을 듬뿍 머금고 있어서 잘라 낸 다음에도
완전히 마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무화과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먼저 물이 오르고 부드러워진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들어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화과나무를 보고 이 비유를 깨달아라.
어느덧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된다.”(마태 24,32; 마르 13,28; 루카 21,30)
주님께서 찾으셨던 무화과는 율법의 잎은 달고 있지만,
실천의 열매가 없는 회당의 열매였다.
주님께서는 그때가 무화과 철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다.
시장하신 주님께서 나무에서 무언가를 찾으셨을 때,
그분은 무엇인가에 굶주리시면서 다른 어떤 것을 찾고 계셨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나무를 저주하셨고 즉시 말라버렸다.
율법이라는 잎은 무성하지만, 실천이 없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 말라 버리고 말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사업이 벌어지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야바위꾼들을 내쫓으시고, 장사하기 위해 나르던 물건들과 함께 그들을 모두 내쫓으셨다.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17절).
이 말씀은 “하이에나가 나의 소유를 탐욕스레 바라보느냐?”(예레 12,9)는 말씀과 같다.
하이에나는 밤에만 나타나는 동물로 피를 먹고 썩은 고기를 청소하는 짐승이다.
성전을 정화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있는 것을 보았다.”(20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의 종말을 겪지 않도록
포도 줄기와 굳건히 연결되고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언젠가 우리가 그분을 만났을 때,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 집에 있는 푸른 올리브 나무 같아라.
영영세세 나는 하느님의 자애에 의지하네.”(시편 52,10)
주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는”(23절) 이의 기도는 열린 마음에서 나오는 기도,
부서진 마음의 열매이며(참조: 시편 34,19; 이사 66,2) 뉘우치는 마음의 결실을 말한다.
기도는 헤아릴 수 없는 선의 뿌리요 샘이며 무수한 축복의 어머니이다.
우리는 기도의 힘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이미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알아주시고 청하는 바를 즐겨 들어 주시리라
믿는 그만큼 청하는 바도 얻고 응답도 받게 된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러면서 용서를 통한 사랑의 기도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이러한 삶으로, 이러한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25절)
우리의 삶이 항상 용서를 통하여 사랑의 기도를 주님께 바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그곳은 당신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잃은 아들을 찾아온 부모에게
“저는 저의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했던 바로 그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마르 11,17)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성전은 하느님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1열왕 8,29)라고 말씀하신 곳이니,
당신 이름과 함께 현존하신 그분을 만나고 대면하고 마주하는 ‘기도의 집’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교회 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는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할 때 교회다워진다는 말씀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주의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그것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1코린 3,16-17)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인은 집을 어찌할 수 있으되, 결코 집이 주인을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주인이 집을 소유한 것이지, 집이 주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을 기꺼이 주님의 소유로 내어드려야 할 일입니다.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1코린 6,20),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타인을 위해 내어놓을 때,
비로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성전인 우리는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마르 11,17)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행실로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하게 하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가 당신이 거주하시는 당신의 집인 까닭입니다.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김 마리 에바 수녀
성령강림 대축일이 지나갔다.
성령강림 카드도 뽑았다.
성령칠은과 성령의 열매를 선물로 받았다.
하느님께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영적 독서 시간에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 112항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신약성경은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를
그리스어 ‘아가토쉬네’(agathosyne)로 묘사합니다. (갈라 5,22참조)
이 그리스어는 선에 대한 애착, 선의 추구를 나타냅니다.
더 나아가 이는 다른 이들의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좋은 것,
다른 이들의 성숙과 건강한 성장, 그저 물질적 행복만이 아닌
가치들의 함양을 위한 노력을 의미합니다.
유사한 라틴어 표현으로 ‘베네볼렌시아’(benevolentia)가 있습니다.
이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태도입니다.
선에 대한 열망, 훌륭하고 좋은 모든 것에 대한 끌림,
다른 이들의 삶이 아름답고, 숭고하며,
유익한 것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성령칠은과 열매가 나만의 것으로,
나를 위한 선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무화과나무 같았다.
다른 이들을 위해 열매를 내어놓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꾸짖으시는 예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께 희망을 건다.
넘어지고, 착각하고 사는 나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다시 한번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선물이 나만을 위한 선물이 아님을 받아들이고,
나를 통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빌어보는 오늘이다.
[출처] 마르 11,11-25 연중 제8주간 금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