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해협
** 히틀러를 지칭
출전 : <살아남은 자의 슬픔>, 김광규 옮김, 한마당, 1986
베를리너 앙상블 앞의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동상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아내 바이겔의 무덤
◈시를 말하다
정끝별 l 시인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나의 어머니’)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몇 해 전 가을 잎들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땅에 아버지를 묻어 드리고 올 적에 나는 브레히트의 이 시를 생각했다. 180센티미터를 밑돌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47킬로그램이셨다. 브레히트의 시에는 이처럼, 절박한 현실 속에서 다시 부르게 하는 힘이 있다.
1933년 2월 28일 브레히트는 가족과 함께 독일을 떠난다. 히틀러가 그를 정치사상범으로 몰아 체포 대상자 명단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코, 오스트리아, 스위스, 덴마크(1933년 망명), 핀란드, 파리, 모스크바, 미국(1941년 망명), 스위스, 동독으로 이어지는 15년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브레히트 자신의 표현대로 “구두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꿔 가며”,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전전하는 동안 그의 문학은 강철처럼 단련되곤 했다. 나치즘이 초래한 학살과 전쟁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브레히트의 생존력은 놀라웠다. 할리우드에 팔아먹을 영화 대본을 쓰기도 했고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탈출하듯 뉴욕을 떠날 때 그는 묘비명 같은 시 한 편을 남겼다. “호랑이를 피해 달아나니/ 빈대들에게 뜯기게 되었네./ 평범한 것들이/ 나를 먹어 치우고 말았네.”
▣베르톨트 브레히트
미국에 망명할 즈음에 쓴 ‘사상자 명부’라는 시에서 브레히트는 죽은 동료들의 이름을 애도하듯 부르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병사한 마르가레트 슈테핀(Margarete Steffin),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카를 코흐(Karl Koch)…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라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가 탄생하게 된 지점이다.
‘살아남은’ 자신의 삶을 항변하려는 듯, 브레히트는 ‘폭력에 대한 조치’는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곤 했다. 폭력 앞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화되므로 폭력에 정면으로 대항하다가 희생당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폭력보다 오래 살아남는 것이 폭력을 이기는 길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연민이 느껴지는 시이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는 1939년 초에 쓴 시이다. 이 시를 쓸 무렵 브레히트는 덴마크에 망명 중이었다. 벤야민의 회상에 따르면 브레히트는 농가의 마구간을 회칠하여 작업실로 썼는데 그 작업실의 떡갈나무 기둥에 “진실은 구체적이다.”라는 문구를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의 다른 시들처럼, 이 시 역시 구체적이고 단순하고 분명하다. 브레히트는 학살과 전쟁의 주범이자 젊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를 ‘칠쟁이’, ‘엉터리 화가’라 희화화시킨다. ‘칠장이 히틀러의 노래’라는 시에서는 “칠장이 히틀러는/ 색깔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그에게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 독일 전체를 온통 잘못 칠해서 더럽혔다네.”라고 쓰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과나무의 감동”보다는 이 ‘엉터리 화가’에 대한 분노가 브레히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힘이었다. 사랑받고 있는 행복한 자,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돛단배, 따뜻한 처녀들의 젖가슴을 노래하는 아름답고 충만한 서정시 대신,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 어부들의 찢어진 어망, 40대인 소작인의 처의 구부러진 허리로 상징되는 현실의 결핍과 폭력에 대해서 쓰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부러 ‘운을 맞추’지 않은 거칠고, 구체적인 시에 대한 지향을 시사하는 시이다. 토질이 나쁜 땅에서는 나무가 굽어 자라듯, 나치즘의 광기가 휩쓸고 있는 그의 시대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임을 천명하는 시이다.
브레히트에게 시를 쓰는 일이란 “인간적인 행위로서, 모든 모순성과 가변성을 지니며 역사를 규정하면서 또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실천”에 다름 아니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선언 또한 이 시로부터 비롯되었다.
야만적인 자본의 논리가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우리 시대 역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이다. 1퍼센트의 부자는 돈을 쓰는 재미에 빠져 서정시 따위에 무관심하고, 99퍼센트의 빈자들은 밥에 매달려 서정시를 외면하고 있다. 월가를 점령한 젊은이들은 이렇게 외쳤다. “Who's street?” “Ours street!” “We are ninety-nine percent!" 이런 외침이 거세지는 시대는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임이 분명하다. 서정보다 자본이, 꽃보다 밥이, 노래보다는 목숨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2011년 가을, TV에서 월가의 시위 장면을 보면서도 나는 브레히트의 시를 떠올렸다. “암울한 시대에/ 그때도 역시 노래하게 될 것인가?/ 그때도 역시 노래하게 될 것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해”(‘모토’)!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1898.2.10-1956.8.14)는 1898년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뮌헨 대학 의학부 재학 중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위생병으로 소집되어 육군병원에서 근무하였다. 1928년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 체험을 통해서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덴마크, 미국 등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독일이 분단된 뒤 동독을 선택했다. 1949년 배우이자 아내인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극단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단하고 서사극을 발전시켰다. 1956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1922년 <한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Kleist) 상을 받았으며, 1954년 레닌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푼틸라 씨와 그의 하인 마티>, <도살장의 성 요한나>, <갈릴레이의 생애>, <코카서스의 백묵원>, <전쟁교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등이 있다.
글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에 시가,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ㆍ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Ich, der Uberlebende (Brecht, Bertolt살아남은자의 슬픔1898. 2.10~ 1956.8.14) Ich, der Uberlebende
Ich weiß natürlich: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I, the SurvivorI know of course: it’s simply luckThat I’ve survived so many friends. But last night in a dreamI heard those friends say of me: ‘Survival of the fittest’And I hated myself.
-살아 남은자의 슬픔 - 베르톨트 브레히트 [Brecht, Bertolt, 1898.2.10~1956.8.14 (김광규 옮김)
물론 나는 알고 있다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출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 베르톨트 브레히트|작성자 파이디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