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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4일 주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 : 탈출 34,4ㄱㄷ-6.8-9
제2독서 : 2코린 13,11-13
복 음 : 요한 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샤를 드 푸코 성인은 어느 날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늦가을이어서 나무에 떨어지는 잎사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떨어지는 잎에 대해 염려하거나 안달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재물이나 건강 때문에 근심한다는 것은
자신을 나무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나무를 보며 성인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나무와 인간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는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나 인간 모두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더군다나 인간은 하느님께 특별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나무보다 못한 삶이 아닌, 나무보다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떨어져 나가는 것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떨어져 나가는 것을 걱정하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 성인의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연결만 되어 있으면 생명을 잃지 않게 됩니다.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하는 것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하느님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당신께로부터 떨어지는 우리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진정으로 당신 안에서 하나를 이루도록 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약한 심정들이 주님과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주님께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하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다른 위격을 지니시면서도 본질이 같으시고,
유일한 실체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세 분이면서 동시에 한 분이라는 것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룬다는 세 위격의 신비는
우리 역시 주님과 하나를 이루어 가면서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하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낮추는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사랑의 신비였으며, 겸손의 신비였습니다.
그리고 그 신비 덕분에 우리도 사랑을 본받아
주님과 하나를 이루면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하나를 이룬 사람이 나의 이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울 수 있을까요?
그들 역시 주님 안에서 함께 하나를 이루어야 할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또 다른 ‘하나’를 만들게 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가 우리 삶에서 펼쳐지게 됩니다.
삼위일체 대축일
류해욱 요셉 신부
세 봉오리의 꽃송이이지만 한 그루의 꽃나무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은 현학적인 신학 언어가 필요하지만
자연은 말없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들려주네
단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의 언어를 읽을 수 있는 맑은 눈이라네
처음 냈던 제 사진 명상집에 있는 글입니다.
사진은 어느 봄날 집 앞에 있는 목련꽃을 찍은 것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교의입니다.
교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 위해서, 또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에게는 알아듣기 어려운 신학 언어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실상 신학 용어를 써서 설명하면 더 알아듣기 힘들지요.
여기에 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교우 여러분들께 알기 쉽게 교의를 설명할 수 있는가?
어려운 것이니까 그냥 넘어갑시다라고 할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삼위일체의 신비는 교회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교의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는
이해하기보다는 그냥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이해나 사변적인 지식을 넘어서서
하나의 신비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교의이기에
우리는 믿음의 마음과 눈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향해 자신을 여는 새로운 지평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보다는
그 신비를 받아들이면서 그 신비의 핵심을 여러분들의 삶 안에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신비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신비요 일치의 신비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지요.
그 의미는 서로 다른 세 분야의 기관이 혼연일체가 된다고 할 때 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지요.
삼위일체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삼위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나누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나누시는 사랑의 일치를 본받아
우리도 서로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신 대로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성부께서는 하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와 가르침은 아버지 성부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분과의 일치를 보여줍니다.
언제나 거기 성령이 또한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께서는 하나이셨습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께서 나누시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랑 안에서 사랑 자체이신 분이 사랑과 하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성부와 성령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비의 힘으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회 신부이셨던 안토니 드 멜로 신부님이 들려주시는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리겠습니다.
어느 주교님이 배가 고장이 나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섬마을에 하루 동안 머물게 되었습니다.
주교님은 가능하면 보람되게 하루를 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해변가를 거닐다가 마침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세명의 어부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주교님을 만나 몹시 기뻐하면서 자기들도 천주교 신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선교사가 이 섬에 와서 그리스도교를 전해주었고
그들은 아직도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주교님은 깊이 감명을 받고 기뻐하면서 그들이 어떤 기도문을 알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주교님이 그들이 주의 기도를 알고 있는지를 묻자 그들은 그것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주교님은 그들이 가장 기본적인 주의 기도도 모르면서
자신들을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하는 것에 놀랐습니다. 주교님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기도할 때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합니다.
‘우리는 셋입니다. 당신들도 셋입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분명 선교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전해주었을 텐데 다 잊어버리고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었지요.
주교님은 그들의 기도가 너무 유치할 뿐만 아니라 이단적인 요소까지 있는 것에 충격을 받고
이들을 바르게 이끌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루 종일 그들에게 주의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배우는데 참 더디었지만 열심히 배웠고 주교님도 인내롭게 가르친 덕분에
다음날 주교님이 떠날 즈음에는 세 사람이 모두 제법 실수 없이 주의 기도를 외울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아주 흐뭇한 마음으로 정말 하루를 보람되게 보내고 그 섬을 떠났습니다.
몇 달 후 주교님의 배가 다시 우연히 그 섬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갑판을 거닐며 저녁 기도를 드릴 때
문득 이 섬에 자기가 주의 기도를 가르쳐 준 세 사람이 있다는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회상을 떠올리면서 흐뭇한 마음으로 섬을 바라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멀리에서 불빛이 보이더니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세 사람이 배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세 어부였습니다. 그들이 소리쳤습니다.
‘주교님, 주교님을 다시 뵙게 되어 아주 기쁩니다.
저희는 주교님의 배가 이 섬을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주교님을 뵈오려고 달려왔습니다.’
주교님이 놀랍고 반가워서 말했습니다.
‘아 당신들이구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지금은 무엇을 원하시오?’
‘주교님,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마는 저희는 주교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아름다운 기도를 잊어버렸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그리고 그다음은 잊어버렸습니다. 다시 가르쳐 주십시오.’
주교님이 아주 겸손한 마음이 들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의 좋은 친구들입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시고 기도할 때 다시
‘우리는 셋입니다. 당신도 셋입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안토니 신부님은 고백합니다.
당신이 가끔 성당에서 할머니들이 끊임없이 로사리오를 바치는 것을 보면서
저 웅얼거림이 참으로 하느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스치지만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그들의 눈을 바라볼 때나 그들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얼굴을 대할 때
그들이 많은 신학자보다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있다는 것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사랑의 마음, 하느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그 마음입니다.
바오로의 말대로 세상의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으면서 우리가 새롭게 다짐해야 하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있는 플러싱의 신문사에서 부르클린 한인성당까지 가는 길은 3가지가 있습니다.
보통은 ‘BQE(부르클린, 퀸즈 고속도로)’라고 부르는 278번을 이용합니다.
278번이 막히면 ‘LIE(롱아일랜드 고속도로)’라고 부르는 495번을 이용합니다.
495번이 막히면 ‘VAN WYCK(반윅 고속도로)’라고 부르는 678번을 이용합니다.
주로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을 택하지만 가장 익숙한 길은 278번입니다.
자주 이용하는 길이기에 내비게이션의 안내도 필요 없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저의 목적은 부르클린 한인성당입니다.
선택한 길에 따라서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안전운전을 하면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마련입니다.
뉴욕에서 제가 하는 일도 3가지가 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일이 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저를 미주가톨릭평화신문으로 파견하였습니다.
매 주일 신문을 제작하고, 발송하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입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일이 있습니다. 매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신문홍보 때문에 他 주에 가는 경우에는 미사를 부탁하지만,
보통은 제가 미사를 봉헌합니다.
‘동북부 엠이 대표신부’의 일입니다.
엠이 주말 체험 교육을 준비하고, 엠이의 행사를 준비합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과 동북부 엠이의 일이
신문사의 운영에도 도움이 되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느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강력한 하느님 체험은 모세와 함께한 ‘출애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자이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치유되었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의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협조자 성령의 하느님입니다.
성령은 제자들에게 ‘은사’를 주었습니다.
은사를 받은 제자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예언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치유하는 사람, 선교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은사는 여럿이지만 같은 성령께로부터 나왔습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부르클린 성당으로 가는 길이 3가지가 있듯이,
제가 뉴욕에서 하는 일이 3가지가 있듯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분도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처럼
성부이신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마음으로 회개하는 우리를 크신 사랑으로 받아주십니다.
저는 전능하신 천주성부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음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믿습니다.
저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에서 얻는 평화와는 다르다는 것을 믿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믿습니다.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협조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심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부족한 신앙을, 성령께서 교회의 잘못을 사랑으로 채워주심을 믿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나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시는 참 하느님이심을 믿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은총과 사랑, 친교가 늘 우리와 함께
염철호 요한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아들 하느님, 그리고 두 분에게서 발하시는 성령 하느님께서는
각각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한 분 하느님이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인간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이지만,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계시되고 있고,
교회 공동체 역시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룬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있기에 교회는 하느님을 삼위일체이신 분으로 고백하고,
삼위일체가 바로 공동체의 원리임을 받아들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먼저, 오늘 1독서의 탈출 34,4-9은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 줍니다.
‘야훼’라는 이름을 지니신 주님께서는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을 때는 분노하시어 그들을 벌하시지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어
그들을 고통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다시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이토록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에 관해서는
에제 36,16-38에도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을 바빌론 유배지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이끌어 내시어 깨끗이 씻어주시며,
정결하게 해 주시어 다시금 당신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탈출 34,9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뻣뻣하여 항상 하느님 계획을 틀어놓는 역할을 하는데,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악과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피로 온 세상의 죄를 대신 치르셨는데,
이를 통해 당신 아들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 점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요한 3,16-18)
그런데 요한 14,15-17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되돌아가고 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 곧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어
우리와 함께 영원히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 당신께서 부활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당신 숨을 불어넣어 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아버지와 아드님이 보내어 주시는 진리의 영 덕분에
세상 안에서 고아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고 깨달으며,
그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곳곳에서 하느님의 세 가지 위격인 성부, 성자, 성령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오늘 2독서로 봉독한 사도 바오로도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항상 우리와 함께하기를 빈다고 인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 희생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음을 믿고 고백하며,
그 믿음이 코린토 공동체에서 제대로 드러나기를 기원하는 인사말입니다.
아울러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화해하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기를 기원하는 인사말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서 다시 한번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아
다양한 구성원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고, 또 각자의 자리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수난 죽음 부활이라고 하는 구원의 업적이
모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업적임을 고백하면서 이 신비를 거행하게 하였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우리 구원의 주역이시며,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살아있는 궁전”(1코린 6,19)이다.
바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인이 살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생명의 공간이시며, 삶의 모델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성 삼위의 이름으로 인사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
이 말씀은 전례 때에 당시의 신자들이 서로 포옹하면서 삼위일체의 축복을 주고받았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항상 우리에게 먼저 오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구원의 은총은 무상임을 알게 해주며,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은총임을 체험하게 한다.
가장 근본적인 은총이 바로 그분이시다. 다른 은총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모습, 사랑의 참모습도 발견하게 해준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크다.
하느님의 가장 큰사랑으로 표현된 선물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결정적인 말씀이시다.
그분은 아들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고귀한 실체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여 주셨으며,
그럼으로써 이제는 또한 당신의 자녀들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고자 하셨다.
이제 우리도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듯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성령의 친교란 성령 안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를 이루는 성령의 능력도 뜻한다.
즉 성령은 우리를 결합하는 원리이시고, 교회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분이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 안에 드러나게 해주시는 분이시다.
실제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격과 사명으로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신비스럽게 하나로 일치시켜 영원히 결합하는 사랑이시다.
복음: 요한 3,16-18: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삼위일체의 신비가 잘 소개되고 있다.
아들을 보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구원적 사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하느님이 무한하게 사랑하시는 분으로 게시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16절).
여기서 내주신다(parédo ken)는 말은
죽게하다(갈라 2,20; 로마 4,25; 8,32 참조)의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랑의 선물로 주시기 위해 포기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세상은 모든 인간과 우주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주 만물을 포용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기 거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무서운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큰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을 떠난 멸망의 상태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신비를 사랑의 신비로 강조하고 있다.
탈출기 역시 이런 의미이다.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 34,6) 라고 선포하신다.
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나타나실 때, 그 사랑은 무한히 펼쳐질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문제는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 놀라운 삼위일체의 구조를 실현하는 것이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이 성취되는 곳이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구분되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서로의 개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Y. De Montcheuil).
삼위일체의 신비가 사랑으로 하나 된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이제 먼저 우리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삶으로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을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합니다.
다 이해되지는 않아도, 그 사랑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 신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라는 이 용어가 생겨난 역사적 배경은 3세기~5세기입니다.
이때 교회에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이 ‘실제 하느님과 다르고’
또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바로 이런 주장들 앞에서 신앙인들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란 이 용어를 통하여 신앙인들이 고백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의 하느님이고,
또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삼위일체”라는 단어가 생기기도 전에 이미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이는 은총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의 하느님이신 성령께서는 같은 하느님이심을 말해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삼위일체”에 대한 의미를 잘 드러내 줍니다.
곧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드러내 주며,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따라서 이 신비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 말합니다.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탈출 34,5)
“주님,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주시기를 바랍니다.”(탈출 34,9)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2코린 13,1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길 빕니다.”(2코린 13,13)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인간들과 함께 사시기를 원하셔서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 예수님을 인간의 동행자로 삼으시고 벗이 되어
“함께 있게” 하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이끌게 하십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 주신 하느님의 ‘참사랑’입니다.
곧 아들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하시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함께 있음”입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의 복음적 의미로는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이 사랑입니다.
이 “함께 있음”이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입니다.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지 아니하고,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입니다.
서로 사귐으로 친교를 이루며, 상호 교제하고 상호 교환하며, 상호 내재(내주)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내어주어 타자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자신 안에서 타자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와 연대의 관계 맺음이요, 우애와 형제애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함께 있고, 서로 속해 있고, 서로의 것이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결합의 일치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 맺고 계시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께서 인류 역사 안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얼마나 은혜롭고,
그리고 얼마나 깊게 일하시는지를 드러내주는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신다.”는 것,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함께하시는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삼위로 함께 계시기에 사랑이십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이렇게 “함께 있음”이 바로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여기 이 수도가정에서, 이 성당에서 “함께” 만나
한 분이신 주님을 찬미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는 일,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거룩한 일,
그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성 안으로 쏙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2코린 13,1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손에 못이 박히고 가슴이 창에 찔리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면서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말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져줄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며,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현 캐트린 수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지금껏 살아오면서
알아들었으나 다 못 알아들었던 것이 많더라
내 영혼이 깊지 않아서일까?
내 마음이 넓지 않아서일까?
내 말이 맑지 않아서일까?
오직 한 가지 바람은
나를 너무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
영원토록 머무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구원이다.
[출처] 요한 3,16-18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