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이야기<밀양> 소감
이 청준 씨의 “벌레 이야기”는 1980년 11월 서울의 한 동네에서 일어난 이 윤상 군 유괴 살인 사건이 작품 소재가 되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범인은 체포되어 재판을 거쳐 사형 집행을 기다리게 된다.
형 집행 전 범인은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기를 빌겠다.”는 유언을 남긴다.
밀양은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이 창동 감독이 이 작품을 소재로 만든 영화로
2007년 5월 23일 개봉하여 150만 관객을 넘었다고 한다.
이 영화로 2007년 주연 배우 전 도연 씨가 한국배우 최초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벌레이야기>
약국을 운영하는 부부에게 외아들인 '알암'이가 있다.
알암이는 주산 외에는 별 취미도 없고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는 내성적인 아이다.
집 학교 주산학원만이 알암이의 행동 지경이다.
어느 날 아이가 귀가하지 않자 행방불명이 된 알암이를 마을 사람 모두가 찾아다닌다.
불안한 알암이 엄마에게 김 집사가 찾아와 교회에 다닐 것을 권면한다.
알암이 엄마는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하나님에게 의지하며 알암이를 찾아다닌다.
그러다 3개월이 지난 후 주산학원 옆 재개발 건물의 지하에서 알암이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수사결과 범인으로 밝혀진 주산학원 원장은 범행을 자백한 후 사형수가 된다.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낀 알암이 엄마는 신앙을 버리고 깊은 슬픔에 잠기지만
아이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김 집사의 설득에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온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를 배우면서 점차 평온을 되찾은 알암이 엄마는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는다.
그런데 거기서 "저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습니다." 라는 범인의 말에 또다시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가 용서했단 말인가.'
범인이 사형된 이틀 후, 라디오로 범인의 유언을 들은 아내는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범인의 유언은, 자신은 너무도 평안하며, 다만 유족들에게 죄송하다는 내용이었다.
<밀양>
서울에서 남편을 잃은 이 신애(전 도연 분)는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밀양에 와서 피아노 학원을 차려 아들과 산다.
거기서 카센터 사장 김 종찬(송강호 분)을 만나게 된다.
좀 속물처럼 보이는 종찬은 신애에게 연정을 품고 접근해 오지만 신애는 별 반응이 없다.
어느 날 신애의 어린 아들이 실종된 후 결국은 유괴살해된 것으로 밝혀지게 되는데,
범인은 신애의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이었다. 신애가 돈이 있는 줄 알고 그 돈을 노린 범행이었다.
절망에 빠진 신애에게 약국의 김 집사가 여러 번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신애는 교회에 나가 신앙에 의지한다.
교회 출석, 밝아진 얼굴, 구역예배, 마음의 평안을 얻었음과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간증,
찬양과 노방전도 등 그녀는 변했다. 적어도 표정만큼은.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범인을 용서하겠다며 교도소로 면회를 간다.
거기서 범인(도섭)과 마주앉은 신애는 범인으로부터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며
신애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뜻밖의 말을 듣는다. 면회를 마치고 나온 신애는 주차장에서 기절한다.
그리고 발악하듯이 신앙으로부터 떨어져나간다. 하나님의 존재도, 기독교 진리도, 사랑도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면서.
오랜 방황의 시간. 극단적인 괴로움에 마침내 칼로 자신의 팔을 긋는 자살 시도가 미수에 그쳐 병원신세를 지게 된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를 때 미용사가 범인의 딸인 것을 알게 된 신애는
머리를 자르던 도중 미용실을 뛰쳐나와 자신의 집 마당에 앉아 거울을 앞에 놓고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이때 종찬이가 들어와 거울을 받쳐주는데, 신애의 손에 잡힌 가위로부터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바람에 마당 구석으로 몰려가고 거기에 조용히 한 줄기 햇살이 내려 비추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문제>
<1> 이 청준 씨와 이 창동 씨가 제기한 문제는 무엇인가?
신은 있는가? 신은 과연 정의로운가? 신은 과연 사랑이신가? 기독교 복음은 진리인가?
<2> 이 작품을 통한 이 청준 씨와 이 창동 씨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 청준 씨가 의혹을 가지고 신의 정의에 대들었다면, 이 창동 씨는 신의 정의에 무관심하거나 조롱했다.
<3> 이 청준 씨와 이 창동 씨의 논리 전개 방식은 타당한가?
자기들 안에 이미 설정된 대답을 전제로 사건을 편협하게 또 코믹하게 전개함으로써 심오한 기독교 진리를 조롱했다.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라는 것이, 밀양에서처럼 도섭이가 뻔뻔스럽게 상처투성이의 신애를 무시하고
신애에게 자기가 먼저 용서받았다느니, 신애를 위해서 기도하겠다느니 하는 정도의 것이라면
기독교는 너무도 천박하고 수치스러운 것이 된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복음의 정신과 무관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은 너무도 진실하고 심오하고 따뜻하고 광대하다.
주님의 가르침이라면, 설령 범인이 용서의 느낌이 있더라도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며
차라리 말없이 신애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어야 했다.
죄인은 다만 그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로써만 삶의 명분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가 정말 용서의 의식을 가졌더라면 그렇게 능동적이거나 공세적으로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님은 자신을 증오하고 팔고 살해하는 자들을 용서함에도 진심과 심오한 눈빛과 애정과 겸손을 잃지 않으셨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이다.
그러나 범인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희극화시켜 기독교 진리를 논단하려고 하는 발상은 악의적이다.
더구나 인간이 먼저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순리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은 주권의 최종적 소재가 어디 있는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 내가 만든 컵을 훔쳐갔다면 그가 컵에게도 잘못한 것이지만 먼저 내게 잘못한 것이다.
컵의 소유권은 컵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컵을 만든 내게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 우주를 수탈의 대상으로만 이용한다면 인간은 우주에게보다는 우주의 주이신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하는 범죄가 범죄를 당하는 사람과 상관없다는 논리가 아니다. 분명히 그 사람에게 범죄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권의 서열을 논하는 것이다. 사람이 범하는 모든 범죄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상관되는 것이다.
살인범이 알암이를 유괴 살인했다면, 그것은 알암이와 그 부모를 만드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며 소유하시는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범죄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고귀한 존재인 인간에게도 범죄한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도섭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으니 당신의 용서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염치없는 논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진정으로 용서받은 자는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는 진정으로 용서받은 자가 아니라 그 죄책감이 용서됐다는 거짓된 희망으로 둔갑한 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의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한일서4:21)가 성경의 선언이다.
<4> 영화 속 약국 김 집사의 태도는 합당한가?
아니다. 전도의 열정이 있는 그녀가 현대의 수다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지만
성숙한 기독교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그녀는 “신애 씨처럼 불행한 사람에게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남의 불행을 함부로 정의하고 단정 짓는 태도는 그녀가 교만하고 사랑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5> 알암이 엄마(신애)의 태도는 올바른 것인가?
책에서나 영화 속에서 사실 그녀는 하나님께 귀의할, 그리고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럼 그녀가 보여준 신앙적 열정 상태를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그녀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책에서). 그럼에도 그녀가 보인 신앙적 열정은 얕은 근거에서 발생한
신앙 형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안에서 마음의 안식을 누리는.
<6> 책이나 영화 속엔 정말 기독교적인 인물이 없는 것인가?
상처받은 영혼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주는 목사님, 그것도 조롱의 표현이었다면 가장 속물처럼 보이는 사람,
그러나 그 무섭고 외로웠던 순간들을 함께해 주다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신애에게 거울을 받쳐주는 종찬이다.
하지만 종찬이가 기독교적 인물로 대변된다면 그것 역시 기독교를 희극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7> 그렇다면 책이나 영화에서 긍정적인 요소는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밀양(密陽-secret sunshine)은 비밀스런 햇빛이라는 뜻이다.
이 창동 씨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이끌었다면 이 부분에서 나는 그에게 감사하고 싶다.
즉 신애가 자기 머리를 손질하고 있을 때 그에게서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바람에 밀려 구석으로 몰려가고,
거기에 소리 없이 햇빛이 내린다. 이것이 떨어진 머리카락처럼 볼품없고 초라한 인생도 사랑하신다는
말없는 진리, 즉 기독교 복음 진리를 표현하려고 한 것이라면 말이다.
2011. 7. 22. 오후
이 호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