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잭슨 주연의 "언싱커블"이란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미국내 대도시에 핵폭탄을 설치한 테러범 아서가 체포되고 군과 FBI. CIA로 구성된 수사팀은 고문을통해 아서로부터 정보를 얻기로하고 고문전문가를 부르게된다. 그런데 테러범은 고문을 각오한듯 어떤 끔직한 고문에도 폭탄이 설치된곳을 불지 않는다. 폭파시간은 다가오고 드디어 고문전문가는 아서의 부인을 테러범앞에서 고문하기로 작정하고 말리는 요원들앞에서 부인을살해한다. 거기에도 흔들리지않는 아서에게 이제 최후의 시간앞에 아서의 어린 자녀들을 고문하기로 결정한다.
마이클샌델에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는 정의의 상대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위의 영화에서 한 여성수사관은 어린아이를 고문하려는 고문전문가 앞에서 수천명이죽던말던 이아이들을 보호할거라며 외친다. 내가 모르는 수천명의 정의보다 눈앞에 보이는 어린아이의 고문에대한 정의가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다. 정의란 어디에 내가 서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대리기사에게 정의란 적절한 노동에대한 보상일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에 대한 정의는 콜센타의 입장에서면 색깔이 달라진다. 그들에게는 경쟁이란 구조속에 대리기사의입장이 크게 다가오지않는다. 손님의 입장에서는 더욱 반대의 경우가된다. 마치 우리가 마트에서 피말리는 가격경쟁에서 털리고있는 중소제품중에 더싼것을 찾는것과 같을 것이다.
이런 상대적정의에서 우리는 어디에서야하나. 작금의 현실을 후련하게 해결할수는 없다하더라도 정의에 목말라하는 약자의 손을 들어주는일에 인색하지말아야 할것이다. 파지를 줍는 노인들에게 대리기사의 수입은 우리가 대기업 직원들을 부러워하는 것과 비교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정의는 누군가의 용기와 선택을 기다리고있다. 그 정의를 선택하는 일에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 보자.
-끔찍한 날씨에도 누군가를 위해 일터에 나서야하는 나와 동료들을 응원하며 "신이시여 안전하게 인도하소서"-
'the unthinkable', 상상하기도 힘든 딜레마 상황속에서 생명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선택은 고려의 가치도 없는 악이라고 역설합니다. 노동의 댓가는 수단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분배적 정의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본래적 가치의 생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샌덜은 그 책에서 분배적 정의의 다양한 담론을 공론화함으로써 새로운 정의(定意)를 하고자 한 것이지 결코 상대론적 관점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생명과 노동의 댓가라는 두 가지 다른 가치를 혼돈했고 샌덜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용기있는 선택'에는 공감합니다.
좋은 견해 감사드립니다. 분배적정의의 다양한담론에 공감하면서도 샌델에 사례들에서는 생명이라는 원초적가치에 대해서도 내가 어디에 서있는가에 따라 다른 입장이라는 패라독스세대해 불편한 공감을 끌어내고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차에서 선로바꾸기처럼 말이죠. 수천명의 아이들을 폭탄에서 구할수있다면 두아이들을 고문하는것도 가능할수 있는 애기지요. 그걸 선택한 사람들도 나쁘게만 볼 수 없는거죠. 그러나 그걸 내가 해야하거나 내 아이들이라면 이건 상황이 달라지는거죠. 수천명의 죽음을 선택하는일도 결국 우리의 책임에 대해 말한다고 저는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정의의 상황화에대한 불편한 공감을 저는 해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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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공감합니다.
이책이 왜 여기에 꽂여있는지...
?!
'the unthinkable', 상상하기도 힘든 딜레마 상황속에서 생명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선택은 고려의 가치도 없는 악이라고 역설합니다. 노동의 댓가는 수단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분배적 정의의 논의 대상이 될 수 있으나 본래적 가치의 생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샌덜은 그 책에서 분배적 정의의 다양한 담론을 공론화함으로써 새로운 정의(定意)를 하고자 한 것이지 결코 상대론적 관점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생명과 노동의 댓가라는 두 가지 다른 가치를 혼돈했고 샌덜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용기있는 선택'에는 공감합니다.
좋은 견해 감사드립니다. 분배적정의의 다양한담론에 공감하면서도 샌델에 사례들에서는 생명이라는 원초적가치에 대해서도 내가 어디에 서있는가에 따라 다른 입장이라는 패라독스세대해 불편한 공감을 끌어내고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차에서 선로바꾸기처럼 말이죠. 수천명의 아이들을 폭탄에서 구할수있다면 두아이들을 고문하는것도 가능할수 있는 애기지요. 그걸 선택한 사람들도 나쁘게만 볼 수 없는거죠. 그러나 그걸 내가 해야하거나 내 아이들이라면 이건 상황이 달라지는거죠. 수천명의 죽음을 선택하는일도 결국 우리의 책임에 대해 말한다고 저는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정의의 상황화에대한 불편한 공감을 저는 해야했습니다
세상일이 그렇듯이 자신이 겪어 봐야지만 상대를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그러나 진리는 옛부터 존재해오고 있습니다. 서로를 이해할려고 노력하면 좀더 삶이 윤택해지고 올바른 길로 나아갈수가 있을 것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오랜만에 본문과 뎃글에서 고급스런 단어들이
등장 했네요. 님들에 말쌈이 다 맞고요?
하지만 기사님들에 삶이 다 틀리듯 정의도
주어진 삶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지 않을까요?
(단 밤이슬 까페에서 거론되는 것에 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