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TaMS90FABE
어찌 되었던 미군은 1950년 7월 1일 한국에 첫발을 디딘 이후 3년 1개월 간 전쟁을 치루면서, 전사자 54,246명을 비롯하여 실종자 8,177명, 포로 7,140명, 부상자 103,284명 등 172,800여 명이 희생당했다.
국군 희생자가 645,000명에 비해 무려 27%나 된다. 이처럼 많은 미군이 한국 땅에서 희생된 것이다.
특히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미국 장군의 아들! 142명이나 참전하여 그 중에 35명이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는 대통령의 아들도 있었고, 장관의 가족도, 미 8군사령관의 아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즉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중위는 1952년 미 3사단의 중대장으로 참전하였다.
대통령의 아들이 남의 나라에서 참전하여 전사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미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의 아들 샘 워커 중위는 미 제 24사단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부자가 모두 6.25
한국전쟁에 헌신한 참전 가족이다.
워커 장군이 1950년 12월 23일 의정부에서 차량 사고로 순직 시, 아버지 시신을 운구한 자가 아들이었으며,
아버지를 잃은 뒤에도 아들은 1977년 미국 육군 대장이 되어 자유의 불사신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었던 벤 플리트 장군도 한국전에 참전하여 사단장, 군단장, 8군사령관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의 아들 지니 벤 플리트 2세도 한국전에 지원하여 B-52폭격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미 대위는 1952년 4월 4일 새벽 전폭기를 몰고 평남 순천 지역에서 야간출격 공중전투 중 괴뢰도당의
대공포에 전사했다.
지미 대위가 처음 참전을 결심했을 때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우리의 심금을 울렸다.
“어머니!
아버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한국전선에서 싸우고 계십니다. 이제 저도 힘을 보탤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함께 싸우는 전우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 한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보냈다.
그 편지가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뿐 아니다.
미 해병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장군의 아들 윌리엄 해리스 소령은 중공군 2차 공세 때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했다.
미 중앙정보국 알렌데라스 국장의 아들 데라스 2세도 해병 중위로 참전해 머리에 총상을 입고, 평생 상이용사로
고생하며 살고 있다.
또 미 극동군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 클라크 육군 대장의 아들도 6.25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부상당했다.
한편, 미 의회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거나 중상을 입은 장병들에게 명예 훈장을 수여했는데 한국전 중 받은 사람은 136명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때의 464명보다는 적지만 제1차 세계대전 124명보다는 많은 것은 한국전쟁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나를 말해주고 있다.
이 자랑스러운 훈장을 마지막 받은 자는 이미 고인이 된 에밀 카폰 대위로 전사한지 62년이 되는 해에 추서되었다.
(2013.4)
카폰 대위는 1950년 11월 미 제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 소속의 군종 신부로서 평안북도 운산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냥 남아 병들고 부상 당하여 고통 중에 있는 포로들을 일일이 위로하며
희망을 준 사람이다.
그는 자신도 세균에 감염되어 많은 고생을 했고, 나중에는 폐렴으로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할 때까지 병사들을
돌보며, 신부로서 사명을 끝까지 완수한 공로로 명예훈장으로 추서되었다.
1950년 7월 1일 그 뿐만 아니다.
우리 국민이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것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시 미국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신임 소위 365명 중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희생당한 장교가 110명(그 중에 41명 전사)이나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들은 세계를 가슴에 품고 대망을 펼치기 위해 사관학교에 입교했는데 임관하자마자 한국전선에서 희생되었다.
피어 보지도 못 한 그들의 통한!
세계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름도 모르는 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쳐준 그들이 한없이 한없이
고맙다.
황흥룡 칼럼니스트
칼은 쓰면 무디어지고 안 쓰면 녹이 슨다. 그래서 칼은 늘 갈아야 한다. 자연의 섭리다.
1950년 6.25가 나자 미군이 참전하였다. 모두 잘 아는 역사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5년간 창고에 보관하였던 총과 총탄, 대포와 대포탄을 꺼내어 전쟁터에 왔지만, 총과 대포는 녹이 쓸었고 총탄과 대포탄도 유효기간이 지나서 인지 발사도 안 되고 터지지도 않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효기간이나 품질관리라는 개념이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가 계기가 되어 미국방성은
군대품질표준 MIL-STD-105A를 1950년 제정하여 무기체계에 대한 본격적 품질관리를 시작하였다.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합병 선언하면서 일어난 1990년 걸프전쟁 당시 미군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미군을 파병하여 이라크 군을 저지하였고 미군과 연합군은 1991년 1월에 이라크와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면서 싱겁게 끝났다. 이라크 군이 탱크를 참호에 숨겨 놓았고 미공군에 대비하여 레이다를 촘촘히 심어
놓았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순간적으로 탱크들과 레이다가 공습 파괴되면서 전쟁은 일방적으로 끝났다. 기능과 품질유지를 위하여 탱크는 주기적으로 시동을 걸어 녹슬지 않게 하고 레이다 역시 주기적 시험 운행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험 운전하는 탱크의 열선과 시험 운행하는 레이다의 위치가 연합군의 정찰기와 인공위성에
노출되면서 전쟁이 시작되자 연합군은 순간적으로 탱크와 레이다들을 공격 파괴하였고 이라크는 혼란에 빠지면서 전쟁이 일방적으로 끝난 것이다.
위의 내용은 필자의 기억에 의한 것이니 정확성은 이해 당사자들이 검증하기 바란다.
무기체계의 품질유지를 하지 않으면 6.25 전쟁초기 미군이 겪었던 낭패를 맛보게 되고 품질을 유지하면서 노출된 숨겨 놓은 이라크와 탱크와 레이다는 전쟁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렇듯 국방과 무기체계를 有備無患 상태로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지난 12월 26일 북한의 무인 비행기 5대가 남한을 휘졌고 다니면서 우리 국민은 공포에 떨었고, 우리 군은 우왕좌왕하였고, 전투기 한 대는 뜨지도 못 하고 추락하였고, 총탄을 100발이나 쏘았지만 새 한 마리도 잡지 못 하였다.
김정은은 턱이 빠지게 웃었을 것이고, 대한민국 국방은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100발 가운데 몇 개나 제대로
발사되었을까?
문재인 정권이 5년간 우리 군을 무장해제시킨 결과다. 칼은 녹슬었고, 전투기는 2달에 1대꼴로 추락하고, 미사일은 절반은 실패하고, 총과 대포를 쏘면 6.25 전쟁초기 미군 총과 대포 같을 것이다. 지난 5년 탱크는 작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니 북한은 우리 탱크가 어디에 숨겨 있는지 모를 수도 있겠다. 그게 축복이겠지만, 작동을 하지 않은
탱크는 녹슬었을 것이고 탱크병은 컴퓨터 시뮬레이션만 하였을 것이니 탱크 운전도 미숙할 것이다. 우리 군과
무기는 無備有患 상태인 것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군의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이다.
다시는 문재인 같은 종북좌파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 안 된다는 값진 교훈을 받았지만. 더 급한 것은 우리 국방이다. Zero Base에서 다시 구축해야 하는 엄청난 과제를 윤석열 대통령과 보수우파 유권자들은 떠 안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다. 튼튼한 국방안보가 자유민주주의를 보호하고 키운다. 가장 급한 것은 김정은이
오판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윤석열 정권은 문재인 정권에서 완전히 붕괴된 국방안보를 재건하는 일을 경제보다 최우선으로 삼기 바란다. 문재인 정권이 붕괴시키려던 자유경제는 정신과 양심이 바로 선 보수 우파 국민과 기업이 재건할 것이다.
2022년 12월 28일 이영작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