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장터
원래 계획에는 최 참판 댁을 들르기로 되어 있었지만 당구차가 깜빡 잊고 그냥 지나치는 바람에 빼 먹고 말았다. 물론 나중에라도 차를 되돌려 들를 수는 있지만 최 참판 댁 안 가본 사람 손 들으라고 하자 아무도 들지 않아 생략하고 말았다.
화개장터에 이르렀다. 우리는 여기저기 가게들을 갸웃거렸다. 화개장터는 예전보다 크게 번창하였다. 그곳이 관광지로써 번창한 까닭은 물론 자동차와 도로의 발달로 전국이 하루 생활권으로 바뀐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영남 가수의 ‘화개장터’라는 노래도 큰 몫을 했을 터였다. 강호동의 ‘1박2일’이 벌교를 다녀가니까 꼬막정식집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강호동이 만재도를 다녀가자 구미가 당긴 서울 양반들이 이제는 만재도 해산물을 집접 택배로 날라다 먹는다지 않던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지만 나와 789들이 살아왔던 60년 동안 우리나라는 무섭도록 많이 변했다. 우리 어려서는 전쟁 상처 회복이나 빈곤 질병 퇴치가 주된 과제였지만 이제는 수출입국도, 민주 정의 실현도 낡아 퇴색한 구호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이데올로기가 필요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특히 여행을 다녀보면 요즘의 시대정신은 안락이나 쾌락, 적당한 익살이나 해학, 뭐 그런 거 아니겠는지 그런 생각이 든다. 요즘 사람들은 분개할 줄도 모르고 욕할 줄도 모르고 주먹으로 감자를 먹일 줄도 모른다. 그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최대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것만 찾아다니는 모양새다. 하기야 우리 화백회 방침도 경치 좋은 곳 돌아다니면서 맛난 것 먹기 아니던가.
칼갈이 숫돌을 열 개 샀다. 많이 사니까 싸게 주었다. 예전에는 숫돌에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칼이나 낫을 갈았는데 새로 가느다란 기둥 모양의 숫돌이 나왔다. 거기에 칼을 대고 쓱쓱 문질렀다. 그런데 이제 요요 모양의 원통형 숫돌이었다. 요요보다 크기는 작았다. 원통형 금강석의 사이에 파진 홈에다 비스듬히 칼날을 집어 넣고 가볍게 원통을 열 번 스무 번 굴리면 칼이 잘 갈아진다 했다. 식당에 앉아 은어회와 참게장 정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에게 하나씩 선사했더니 다들 좋아라한다. 특히 임 선생은 갈아야 할 칼이나 낫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고 반색을 했다.
은어회, 참게장, 재첩국물 -- 섬진강의 명물들을 꼭 맛보아야 한다면서 세 가지를 곁들여 점심을 먹었지만 불행히도 사시사철 관광객들이 붐비는 화개장터의 음식 맛은 그저 그렇고 그런 수준이어서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다.
지리산 온천
화개장터에서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지리산 온천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가 그 호텔에 여장을 푼 데에는 해묵은 사연이 있었다. 작년 봄, 유 선생이 명예 퇴직할 때 교원공제회에서는 퇴직 기념품으로 인삼 제품이나 호텔 무료 숙박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 했다. 유 선생은 호텔 숙박권을 택했다. 그것을 작년에 못 써 먹고 이제야 겨우 생색나게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호텔도 경기가 예전만 못했다. 예전에는 선거철마다 관광버스들이 손님들을 실어 날랐는데 선거법이 일체의 향응을 금지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발길이 뚝 끊어졌다던가.
교사들도 예전에는 직원 연수를 이곳으로 많이 왔다. 특히 여교사들이 온천탕을 좋아했다. 온천호텔 가까이에는 군청에서 운영하는 청소년수련원이 있었다. 나와 임 선생, 문 선생은 청호중학생들을 인솔하여 그 수련원에 온 적도 있었다. 그 수련원에 도착하면 선생들은 할 일이 없었다. 도착하는 대로 학생들은 수련원 측으로 넘어갔다. 교사들에게는 따로 숙소가 제공되었다. 학생들이 2박 3일 수련을 받는 동안 교사들은 사성암이라든지 청학동이라든지 명승지를 슬슬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면 끝이었다.
이 선생이 저녁밥을 지었다. 호텔 방에 마련되어 있는 전기밥솥에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스위치를 켰다. 아직 밥이 되려면 시간이 한참 멀다고 생각했는데 이 선생은 스위치가 취사에서 보온으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 유 선생이 그 밥 먹기 폴쎄 글렀다고 탄식을 했다. 호텔 종업원까지 들락거렸지만 별 효험이 없었다. 전기밥솥은 적은데 8인분 쌀을 몰아넣으니 무리가 갔다. 결국 이 선생은 새 쌀로 새 밥을 지었다. 그 저녁밥이 화백회 회원들의 목구멍에 들어가기까지 이 선생의 고생은 필설로 형용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삼천만의 오락
언젠가 어떤 교수는 신문에다 화투치기를 삼천만의 오락이라고 썼다. LA 공항에서는 한국인들이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각에 공항 대합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놓고 화투를 즐긴다 했다. 나는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옳은 말이여. 정말 맞는 말이여.
여행을 하는데 화투가 빠질 수 없다. 나도 꽤 화투를 좋아하는 축이고, 이 선생은 즐겨 치지 않아서 그렇지 타짜 수준에 버금가는 실력이고, 유 선생이나 문 선생도 치는 요령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밤 열 시나 넘었을까. 드디어 ‘삥똥 보기’ 판이 벌어졌다. 정말 화투의 여러 가지 경기 종목 중에서도 ‘삥똥 보기’야 말로 ‘삼천만의 오락’이라는 찬사에 전혀 손색이 없는 종목이었다. ‘삥똥 보기’의 미덕은 참으로 많았다.
첫째, 놀이 방법이 아주 간단해서 화투를 잘 모르는 초보자라도 누구든지 함께 놀 수 있었다. 먼저 일인당 두 장씩을 나누어주는데 - 그 두 장이 삥(1월 송학)과 똥(11월 오동)이라면 판돈을 걸고 석 장째를 받는데 -석 장째가 삥과 똥 사이에 들어가는 국화(9월)이거나 난초(5월)면 판돈을 뺏어먹고 - 석 장째가 삥이나 똥이나 비면 판돈에게 뺏기는 방식이다.
둘째, 다른 종목과 달리 삥똥 보기는 주적 개념이 없어서 노름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화기애애할 수 있었다. 물론 엄밀히 생각하면 노름판에 앉은 사람 모두가 잠재적 적군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직접 상대하는 적군이 없었다. 삥똥 보기의 구체적인 적군은 화투 방석 가운데 쌓인 판돈이었다.
셋째, 다른 종목과 달리 삥똥 보기는 시종일관 시작부터 종료까지 웃음판이 이어졌다. 걸핏하면 언성이 높아지고 싸움까지 벌어지는 짓고땡이나 오이쪼와 달리 삥똥 보기는 행복 만점이었다. 국화나 난초가 나올 줄 알고 많은 판돈을 몽땅 걸었는데 비나 송학이 나와 패를 조이는 사람의 표정이 구겨지면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그야말로 ‘남의 불행이 자기의 행복’이 되는 순간이었다.
임 선생, 전 선생, 이 선생을 뺀 다섯 명이 밤 열 시 넘어 시작한 삥똥 보기는 새벽 한 시에 끝났다. 모두 웃음으로 듬뿍 배를 채우고 잠자리에 들어 기쁜 마음으로 코를 골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