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불행은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 : 고산스님(불교신문 2006.11.20 자료)]
쌍계사 조실 고산스님은 2006년 10월29일
부천 석왕사에서 500여명의 신도들이 운집한 가운데 법문을 했다.
스님은 매달 음력 초8일 석왕사에서 법문을 한다.
〈유마경〉을 중심 주제로 삼아 연속 강의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신도들이 새겨야 할 가르침을 덧붙인다.
이날은 '수행의 자세' 에 대해 이야기 했다.
스님은 "밥먹으면서도 '이 뭐꼬' 해야 견성한다" 며
스스로의 노력을 거듭 강조했다.
스님은 성불하기 위한 다섯가지 원칙에 대해 언급했는데
모든 것은 스스로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내용이었다.
"행복 불행은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
"언제나 처음처럼 무엇을 해도 최선을 다하고
그 마음 평생 실천하며 살때 미련이 남겠는가"
스님은 신도들에게 자주 신도들이 가기를 원하는
극락, 성불에 대해 언급한다.
스님은 진실과 정성이 담기지 않은
마음만의 신행과 수행에 대해 늘 일침을 가한다.
그리고 요행을 바라는 것도 늘 경계한다.
스님은 "빨리 해탈도를 얻기 위해서는
오로지 화두를 들어야 한다" 고 강조하며
"행복이든 불행이든, 극락이든 지옥이든
모두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잊지말라" 고 가르친다,
스님은 이날 법문에서도 "견성성불 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은 뒤 반찬 먹는 것을 잊어 버릴 정도로
화두에 집중해야 한다. 간장이 코로 가는지
입으로 가는지 모를 만큼, 밥먹으면서도
'이뭐꼬' 해야 견성할 수 있다" 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여러분들이 원하면 성불 빨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옛날 조사스님들께서 빨리
성불하기 위해서는 지켜야할 다섯가지
경계를 언급했다" 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째, 양고기를 매달고 개고기라고
팔지 말아야 한다(懸羊賣狗).
일부 상인들이 중국산을 국산이라고 속여 파는 것처럼
이는 거짓을 갖고 진실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곧 양심을 속이지 말라는 소리다.
장사를 하든 도를 닦든 염불을 하든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된다.
외국산이면 외국산, 국산이면 국산, 늙으면 늙었다.
젊으면 젊었다 하면 되는 것이지 속일 필요가 없어."
중국 고전〈안자춘추〉에 나오는 '현양매구(懸羊賣狗)' 는
양고기를 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이지만,
입적한 숭산스님은 활구법(活句法)에 이르기 위해
방편을 이용하는 의미로 쓰기도 했다.
"둘째, 도적을 갖고 아들을 삼지 말라(不得將 認賊爲子).
여기서 법문을 듣는 본 주인이 있는 그 자리가 부처자리다.
참 나를 찾아가야 하는데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입으로 맛을 보아 알고 코로 냄새를 맡아 알고,
손으로 만져 아는 것은 바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알고 들어서 아는 것 이게 도적이다.
'안이비설신의' (眼耳鼻舌身意) 이것은 나쁜 놈이다.
이 도적놈을 아들로 삼아서 자기 본분사로 하면 안 된다."
성불을 원하는 사람이 견지해야 할 원칙은
'정성을 다하여 진실된 마음으로 행하는 것'
'인적위자' 는〈능엄경〉에 나오는 이야기다.
망상을 진실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옛날부터 많은 스님들이 이 말을 즐겨 인용하며
오온(五蘊)에 의해 형성된 가아(假我)를
진짜 자신으로 착각하는 것을 금했다.
구산스님도 '무자(無子)화두의 열가지 병' 에 대해
언급하며 "공안이 무르익게 되면 자칫 마음이 안일해져
도(道)라는 게 별것 아니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도적을 아들로 삼는 것과 같은 병" 이라고 했다.
"세째, 빗자루에 금칠을 하지 말라(不得 鍍金粉).
몸을 호사 시키지 말라는 뜻이다.
썩은 나무나 똥 막대기에다 금칠을 하면
이걸 어디다 쓰겠는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썩은 빗자루는 바로 몸을 말한다.
이 몸에다 금칠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여러분들은 절에 나온 김에 백화점 가서
옷을 하나 사서 입을 궁리를 잘하는데
이게 썩은 몸뚱이에다 금칠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옛날 스님들도 낡은 누더기 옷을 입었다.
색신에다 신경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째, 말 꼬리에 붙은 파리가 되지 말라(不得 馬尾付蠅).
천리를 달리는 경주를 하는데 절대 무언가를
타지 않고 걸어와야한다는 기준을 내세웠다.
먼저 오는 사람에게 많은 상금을 준다고 하니
서로 뛰어가고 난리가 났다. 이처럼
천리를 가려면 많은 힘을 들여야 한다.
그런데 천리를 가는 말꼬리에 달라붙으면 어떻게 되겠나.
자기가 가는 것이 아니라 말에 타서 가니 공짜로 간거다.
그래서 말 꼬리 붙은 파리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 모인 신도분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고산스님 아니면 주지 스님이 제도해 주겠지.
그리고는 자기는 아무것도 안하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말꼬리에 붙은 파리 노릇과 다름없다."
사마천의〈사기〉는 '백이 숙제가 현인이었다지만
공자에게 찬양 받음으로 그 이름이 더욱 올랐고,
안연(顔淵)이 학문을 열심히 닦았다고는 하나
공자의 기미(驥尾)에 붙었기 때문에 그 행위가
더욱더 뚜렷해졌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사기〉에서 '부기미' 는, 대 인물에게
인정받으므로 그 가치가 세상에 뚜렷이
나타나는 의미로 쓰여졌는데〈후한서(後漢書)〉에는
'파리는 열 걸음 밖에 날지 못하나,
천리마처럼 빠른 말꼬리에 붙으면
천리 길도 쉽게 갈 수 있다.
말에게는 조금도 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멀리 떼어놓을 수 있다' 고 했다.
스님은 이 고사를 들어 수행에서 의타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마음을 갖고 깨닫기를 기다리자 말라(不得 藏心待悟).
모두들 나도 어서 부처님 돼야지,
극락가야지 생각만하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생각만 앞서니 염불도 수행도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천당도 못가고 성불도 못한다."
스님은 "이 다섯가지 원칙을 잘 명심하면
성불할 것" 이라며 말을 맺었다.
이날 스님의 법문 핵심도 이처럼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스님 스스로가 평생을 살아온 길이기도 하다.
스님은 늘 "언제나 처음처럼 무엇을 해도 최선을 다해야 해.
나는 언제나 노력하며 살아왔지.
나는 내 자신이 박복하다고 생각했어.
복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노력하는 것이 내게는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지.
어려서, 나는 남보다 더 공부에 전력했어.
다른 스님들이 다 잘 때도 나는 깨어 공부했지.
처음을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중요하지.
그리고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고, 그렇게 살 때 인생에
집착이나 미련이 남지 않는 거야" 라고 말했다.
스님은 다른 법문 자리에서도
"한시도 빈둥거리지 않는다.
풀을 매든지 화단을 정리하든지 무엇이든 한다.
쉴 새 없이 몸을 굴리니 이 나이를 먹도록
병원에 가는 일도 없고, 가만히 앉아서
잔소리만 하면 누가 나를 어른이라며
마음으로 존경하겠는가"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정성을 모아 진실된 마음으로 행하는 것.
일상의 삶에서 늘 견지해야 할 원칙이
성불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스님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나무관세음보살
[1] 행복의 조건
1. 항상 감사하라.
(누가 비난하고, 억울한 소리를 해도
힘들어도 무조건 '감사합니다' 하라)
2. 항상 미소를 지어라.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무조건 웃음으로 대하라)
3. 침묵을 지켜라.
(남의 단점이나 허물을 절대로 말하지 말고,
장점만을 보며 될 수있는 한 말을 적게하라)
[2] 현대인의 효행법
1. 몸에 병이 없도록 잘 관리하라.
(부모 앞에서 병든 몸으로 누워있는 것보다 불효는 없다)
2. 내 몸에 손상를 입히지 말라.
(비록 작은 상처일지라도
부모님은 그것을 볼 때 마다 가슴 아프다)
3. 직장에 전수 노력하라.
(일없이 빈둥대는 자식을 보는 부모는 억장이 무너진다)
4. 월수입의 20/1 을 봉헌하라.
(자신의 월급이나 기타 수입의 일부를 먼저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생활하라)
5. 서로 우애있게 지내고 화합하라.
(부모, 형제, 친척간에 화목하게 지내야
부모님 마음이 편안하시다)
[고산스님 법문에서 예경하는 마음으로 無量光明 옮김]
[최보식이 만난 사람] '쌍계사 조실(祖室)' 고산스님(조선일보 2012.05.28)
"조석예불을 소홀히 하는 승려를
이 염주로 때려 일곱 바늘 꿰맸다지.
목탁으로도 두들기고.
내 근처에는 아예 안 오려는 승려들도 있지."
고산(79) 스님은 씩 웃으셨다.
어린애 주먹만 한 염주알을 굴리시면서......
"계율을 안 지키면 수행자 자격이 없지.
부처님 열반하기 직전 아난존자가
제일 먼저 물은 게 그것이다.
'스승님께서 열반하시고 나면
이제 누구를 스승으로 삼으리까' 물으니,
'계(戒)를 스승으로 삼으라' 고 했다."
한낮의 햇볕이 쨍쨍했다.
부산 연산동의 혜원정사에는
분홍색 연등이 머리 위로 가득이었다.
뜰에 비친 그림자까지 불그레했다.
스님은 쌍계사의 조실(절에서 최고 어른)이고,
승려들의 '면허' 인 비구계를 수여하는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이시다.
'룰만 따지는 사람치고 재미있는 사람은 없다' 는
생각이 불쑥 들어, 나는 뭔가
대변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시작했다.
―내가 아는 승려들 중에는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는다.
이들은 "계율은 작은 것이다.
계율에 매여선 안 된다. 이를 뛰어넘어야
깨달음과 무애(無碍)의 경지에 이른다" 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이치는 금방 깨달으나, 다생습기
(多生習氣 · 오랜 생에 걸쳐 몸에 밴 습관)는
금방 없앨 수 없다' 고 하셨다.
설사 계율을 안 지키는 처사도 금방 깨닫고,
소 잡는 백정도 소 잡는 칼을 들고도
부처님 법문 한 마디에 깨닫는다.
깨닫는 이치는 그렇다 해도, 다생습기는 남아 있다.
바람이 그쳤지만 물결이 계속 출렁이는 것과 같은 이치지.
이런 고로 서서히 없애는 것이다."
―깨달음은 찰나에 얻을 수 있어도 몸에 밴 습성은
계율을 지키는 수행을 통해 없앨 수 있다는 뜻인가?
"계율은 그릇과 같다.
그릇이 똑발라야 물이 바로 담긴다.
물이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머물러 있는 것이
'선정(禪定)' 이다.
그래야 물 위에 그림자가 담긴다.
그림자는 바른 지혜를 비유한 거지.
이처럼 계율은 수행자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계율은 속세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 결혼 잘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욕망에 매이면 수행을 할 수가 없다.
수행자는 세속을 뛰어넘는(出世間) 공부를 하는 것이다."
―요즘 승려들을 보면 머리 깎은 것 외에는
나 같은 속세 대중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
"수행을 원만히 이룬 사람이면 성불(成佛)한 것이다.
하지만 수행 과정에 있으면 아직 '사람' 이다.
다생습기에 여전히 끌려갈 수 밖에 없다."
―호텔에서 웃통 벗고 도박하던
승려들도 그런 과정에 있다고 봐줘야 하나?
"수행 과정인데 아직 초월하지 못해
자연히 습기에 끌려간 것이지."
―내가 좋아했던 불교가 전체적으로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다.
"세속의 습성이 남아 있는 몇 사람이 그렇지,
그걸로 전체를 평가하면 안 된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가 '팔만대장경을 열람해 봐도
모순된 점은 없지만, 부처님 제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
아니꼬워 나는 불교에 귀의를 못하겠다' 고 했다.
그러면서 '한 자로는 승(僧), 두 자로는 화상(和尙),
초상난 집에 쭈그리고 앉아 만날 염불하니
세 자로는 수시귀(守尸鬼), 기생집에 가면
땡추들이 먼저 딱 차지하고 있으니
네 자로는 색중아귀(色中餓鬼)' 라고 놀렸다.
그러자 한유(韓愈)가 '이 철없는 친구야,
부처님의 도가 내려온 지 오래이고
수천명의 제자가 있는데 그까짓 몇몇
못된 놈으로 그러느냐' 고 했다.
대부분 스님들은 수행의 근본을 망각하지 않는다."
―어느 절에 가니 초입부터 '축(祝) 신임주지 ○○○○'
현수막이 쭉 걸려 있더라. 요즘은 주지나
종단 자리를 놓고 정치판처럼 다툰다.
"저런, 수행하면 그런 데 허비할 시간이 없다.
내가 어려서 해인사에 있을 때
'차기 주지(住持)를 누가 맡느냐' 논의가 있었다.
한 스님이 '이번에 주지는 자네가 맡게' 하니까,
당사자가 귀싸대기를 패더라고.
뺨 맞은 스님이 '와 이러노?' 하니,
'아무리 내가 승려생활 못하지만 나보고
주지하라는 거냐' 며 화내더라. 옛날에는 그랬다."
―스님도 쌍계사와 조계사 주지를 했지 않는가?
"맡겨주니 할 수 없이 대중을 시봉하는 마음으로 했지,
오래 할 게 못 된다. 나는 주지를 해도
내 손으로 불전함을 털어 돈을 세어본 적이 없다.
태국 · 미얀마 · 스리랑카에 가보니,
스님이 직접 돈을 못 만지게 한다.
스님이 호주머니가 달린 가죽부채를 내밀면
신도가 그 속에 시줏돈을 넣어준다.
버스를 탈 때도 스님이 부채를 내밀면 차장이
그 속에서 차비만 꺼내고 다시 잠가 주더라."
―스님은 과거에 총무원장을 맡고서 열 달 만에 물러난 적 있다.
"상대 후보 측에서 선거 규칙에 어긋났다며 소송까지 냈다.
그런 시비에 말리면서 '하고 싶은 사람
실컷해라' 고 한 뒤 바랑을 메고 내려와 버렸지."
―절집 풍토가 바뀌어야 하지 않겠나?
"환경이 뭐가 문제인가.
옛날 큰스님은 여기저기 시골 장터를 찾아다니며
가장 요란한 곳에 앉아서 수행했다.
귀에 시끄러운 소리가 안 들리면
'오늘 장 잘 봤다' 고 했다."
―스님은 계율을 어긴 적이 없나?
".......마음 속으로는 계율을 어기려고
한 적은 없다. 가르침을 지켜 나왔다."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인가?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 절 생활 25년쯤 됐을 때
오만한 후배 승려를 한 대 쳐버렸다.
그게 살인 미수로 고발돼 '폭력승' 이 됐고,
결국 산문출송(山門黜送 · 승적 박탈)이 됐다.
그 뒤에 다른 스님들의 탄원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생습기로 나도 모르게 울컥 성질이 일어나니까."
―절에서 25년이나 수행했으면.........
"그걸로는 안 되지, 다생습기는 남아 있지.
견성오도해야 그게 없어지지."
―열두 살 어린 나이에 출가했던 이유는?
"입산하면 돌아가신 모친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
당시 범어사에 계시던 동산(東山 · 1890~1965) 스님이 은사였다.
나는 출가하기 전에 이미 명심보감과
동몽선습 등을 읽었고, 절에 들어가서는 모든 경전을
다 열람하고 일대 강사(講師)가 된 거지."
―승려들에게는 계율에 능한 율사, 경전에 능한 강사,
포교에 능한 법사, 참선에 능한 선사가 있다.
스님은 이 모든 것을 고루 갖췄다고 들었다.
"어려서는 놀기를 좋아하고 낭만적이었다.
영화 구경을 가거나 부산의 용두산 공원에서 뛰어놀았지.
열일곱 살인가, 암자에 들어와 살 때였지.
내게 고추밭 일을 잠깐 맡겼는데 비료를 잘못 줘서
농사를 망친 적이 있었어. 호된 책망을 들었지.
그때 나는 '사람으로서 하는 일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라도 다 배워야겠다' 고 서원했다.
모내기, 쟁기길 같은 농사일은 말할 것도 없고,
부엌에 들어가면 일류 요리사요, 법당에 들어가면
목탁 치고 염불 하는 게 예식종장의 소리를 듣고,
강원에서는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보고도
읽을 수 있는 일대 강사가 된 거야.
다만 못하는 게 인터넷과 자동차 운전이다.
그건 수행하는 데 필요 없더라고."
―절집에서도 그렇게 부지런해야 하나?
"세속에 물든 것인지,
요즘 절간에도 놀고 먹으려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 상좌 중 절반 가량이
절집 일이 힘들다고 중도에 포기했다.
나는 경전만 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읽은 세속 소설도 다섯 짐은 될 거야.
유교 · 도교 · 천주교 경전을 열람 안 한 게 없다.
특히 신약 · 구약성서는 외우다시피 했다."
―선방 수좌들 중에는 '도(道)를 닦아
깨달음을 얻는 데는 경전 공부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고 하는 이도 많다.
"옛날에는 부처님의 행적과 법문을 배우게 한 뒤
강원이나 선방에 보냈다. 하지만 성철스님이나
혜암스님이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 (直指人心 ·
사람 마음에 달렸다는 뜻) 견성성불(見性成佛)" 이라며
머리를 깎으면 바로 선방에 보냈다.
이 때문에 스님들 중에는 선방에 앉아 오로지
'이뭣꼬?' 하며 간화선(看話禪)만 하지,
부처님의 일대시교(一代時敎 · 부처의 행적과 가르침)
조차 모르는 스님도 있다."
―그래도 선승을 높이 치지 않는가?
"나도 젊은 날 한때 '내게 한 물건이 있는데,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고 이름도 없다.
앞뒤도 없다. 몸뚱아리를 끌고 다니는 이것은
무엇인가' 를 화두로 삼아 참선만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깨달음에 진전을 얻은 것은
경전 공부를 하면서부터였다. 도반(道伴)들은
경전 공부를 하는 나를 보고 '타락했다' 고 말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자 내게 경전을 물으러 왔다."
―깨닫는다는 것은 뭔가?
"내 마음의 본바탕이 삼라만상의 근본이고
우주의 근본임을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으면
멀리 떨어진 것도 장중(掌中)의 구슬처럼 보인다."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서 계시나?
"옛날에 '스님 견성했습니까?' 물으면,
그 경지에 오른 선사는 '육육은 삼십육,
구구는 팔십일, 동지한식(동지에서 한식까지 날 수)은
105일이니라' 고 했다. 그 말이 맞다는 뜻이다.
그래도 못 알아들으면 '창천, 창천(답답하구나)' 이라 했다."
―내가 만나본 승려들 중에는
스스로 '깨달았다' 고 하는 이들이 좀 있다.
"그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직 먼 거다."
―깨달음의 경지에 있으면 일상이 어떻게 달라지나?
"스스로 체험해야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부처님 오신 날이니, '사는 게 허망하다' 는
중생들에게 한 말씀은 해줘야 하지 않나?
"부처님도 인생살이 무상함을 말했다.
'아침 풀끝의 이슬과 같고 저녁 연기와 같고
물에 뜬 거품과 같고 먼 산의 아지랑이와 같다' 고.
이 몸뚱아리도 무상하고 잡념도 무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 무상함 속에 진심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찾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다."
―너무 모호하다. 아침 이슬 같은
삶의 허망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나?
"몸뚱이는 죽더라도 내 마음자리,
내 본성은 존재한다. 절대 변함이 없다."
―몸이 죽었는데 마음이 존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생사가 본래 없다는 뜻이다.
중생들은 나고 죽는 것을 보지만,
깨달은 이들은 헌옷(몸뚱이)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으로 본다.
원래 주인은 항상 그대로 있다.
헌옷을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데
무슨 슬픔이 있고 허망함이 있겠나."
―스님은 헌옷을 버리고 내가 걸치고 있는 옷도 입을 수 있으신가?
"수행을 참되게 오래 하면 어디에 연연하고 매이는 게 없다.
내가 바꾸고 싶은 데로 바꿔버리면 되지."
―아직은 너무 정정하시다.
"세속 나이가 팔십인데 지금도 새벽마다 108배를 한다."
―새벽 4시에 기상하시고?
"무슨, 3시 반에 일어나지. 목탁이 치기 전에.
절 내 밭뙈기를 다 내손으로 매지.
아까 말한 대로 농사짓는 데는 신농씨,
법당에는 예식종장, 부엌에는 일류 요리사다."
스님이 직접 가꾼다는
고추 · 상추밭과 화단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땡볕이 여전해 밭에서 빛이 났다.
길목에서 할머니 신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큰스님을 잠깐 친견하려고............"
수줍게 인사하자, "나를 만나 봐서 뭐 할라꼬" 하며
방문을 열었다. 나무관세음보살
고봉스님으로부터 전강
석암스님의 '율맥' 계승
계정혜 삼학 두루 겸비
혜원정사 석왕사등 창건
1932년 경남 울주에서 태어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출가했다.
스님은 열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은사 스님의 말을 믿고 입산했다고 한다.
스님은 동산스님으로부터 참선을,
대강백 강고봉스님에게서 전강을 받았다.
1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경전을 배울 정도로 치열했다.
1961년 전강을 받은 뒤 청암사와 범어사 등에서 강사를 했다.
동산스님에게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예불 드리는 것을 배웠다.
동산스님은 아침 예불 후 각 법당마다 참배한 뒤
금어선원에 들어가 아침 공양 전까지 참선에 들고
아침 공양 후 제일 먼저 도량청소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산스님은 동산스님의 뜻을 이어가며 매일 108배 정진을 한다.
스님은 또 당대 율사인 석암스님의 율을 이었다.
계ㆍ정ㆍ혜 삼학을 두루 겸비한 수행자인 것이다.
20여년에 걸쳐 쌍계사를 중창 복원한 것을 비롯,
부산 혜원정사, 부천 석왕사, 통영 연화사 등
수많은 사찰을 새로 건립했다. 선ㆍ교ㆍ율을
모두 겸수한 고승대덕으로 지난 1998년에는
종단사태로 조계종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후학들의 추대로 제29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움에 처한 종단을 안정시켰다.
이에 앞서 은해사 주지, 총무원 총무부장, 중앙종회의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쌍계사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이다.
저서로는〈대승기신론 강의〉,〈반야심경강의〉,
〈나뭇가지가 바람을 따르듯이〉등 여러 권 있다. 나무관세음보살
'가장 행복한 공부' 無量光明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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