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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헬렛의 인생 탐구
전도서 1장 1절-18절
구약 현창학 교수 전도서. Th.M.
2019.10.24. 목 선형수 목사
내가 가진 왕의 이미지는 권력을 휘두르고 쾌락을 탐하는 자다. 그런데 예루살렘 왕이요 다윗의 아들 코헬렛은 철학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굿뉴스바이블(GNB)은 코헬렛을 철학자로 번역한다. 코헬렛은 대통령이나 수상처럼 기능과 직함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데(예: Robert Davidson) 필자는 이에 동의한다. 코헬렛은 지혜자 그룹 혹은 학교의 교수와 같은 역할을 한 사람으로 추정된다. 코헬렛은 왕의 지혜 스승 혹은 자문 위원장 이었을 수도 있다. 필자는 솔로몬 왕이 주변의 왕들과 제후들을 모아놓고 지혜를 가르치는 코헬렛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열왕기상 10장에 실제로 스바 여왕이 지혜를 배우기 위해 솔로몬 왕을 찾아온 것을 기록한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개인이나 국가 혹은 총체적 인간의 삶에 중요하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 예레미야 등의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싸움이 이어졌다. 신약시대에도 세례자 요한, 바리새인, 서기관,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의심하여,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자가 맞는지, 진정한 그리스도 인지 여부를 알고 싶어 했다. 오늘 이 시대 역시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대결이 유형적 무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승천 후에 사도들은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는 방법으로 제비를 뽑아서 맛디아를 택했다. 제비를 뽑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이었다. 물론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은 기도에 전념하며 제비뽑기를 이용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지혜는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전도서 마지막 부분 12장 13,4절은 일의 결국을 다 들은 자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은밀한 행위도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것이다. 욥기 28장 28절은 주를 경외함이 지혜 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 근거가 되는 것인가?
코헬렛은 지혜 스승으로서 전도서의 화두를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 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전도서 1장 2절과 12장 8절은 전도서의 틀을 이룬다. 지혜 스승 코헬렛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1장2절은 굿뉴스바이블 식으로 표현하면 “인생은 쓸데 없어 다 쓸데 없어” 이다. 인생은 부질없는 것이다. 부질없다는 말은 대장간에서 쇠붙이를 불에 달구는 일에서 왔다. 쇠붙이가 불에 잘 달구어 지지 않아서 그 쇠붙이가 연장으로서 쓸모가 없을 때 불질없다 했다. 그 말이 부질없다가 되어 오늘날 쓸모없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뉴잉글리시 바이블은 “비어있다 비어있다 모든 것이 비어있다”고 표현한다. 뉴인터내셔널 버전은 “의미없다 의미없다 …완전히 의미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이 무슨 이득이 있는가(3)? 해 아래 모든 것은 헛된 범주에 싸여 있다.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것은 바람을 붙잡는 것이다. 지혜가 존재하나 소통할 수 없다면 모든 것은 헛되다.
헛되다, 의미없다, 쓸데없다 뜻의 헤벨(הבל)은 히브리어 구약 성경에 73회 나오는데 37회가 전도서에 쓰인다. 헤벨은 공기 혹은 수증기라는 뜻이다(시편62:10). 성경에서 헤벨은 일시적이라는 메타포로 쓰인다. 인간의 삶의 기간 혹은 인간 자체가 헤벨이라고 말한다(시편39:5-12). 사람의 말(욥21:34), 육체의 아름다움(잠언31:30)이 헤벨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헤벨은 지속하여 반복되지 못하는 것이다(잠언 21:6). 또 신뢰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외국 군대에 의지하는 것은 헤벨이다(이사야 30:7). 우상(신명기 32:21)도 헤벨이다.
구약 성경에서 인생 전체를 헛되다고 말하는 이는 코헬렛이 유일하다. 이것은 코헬렛이 삶에 흥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삶에 호기심이 지대하다. 코헬렛이 인생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그는 인생을 많이 누린 사람이다.
코헬렛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생에 큰 물음표를 가지고 열심히 그것을 살피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다른 이들이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인생의 의미를 말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코헬렛은 그럴 수 없거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에 그에게 하나님의 목적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현실은 모든 것이 헛되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어떤 선물이다.
전도서 1장 3절에서 11절에 코헬렛은 인생이 해 아래서 수고(עמל 아말)하여 얻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세상은 반복된다. 해가 뜨고 해가 진다. 내일도 마찬가지다. 바람이 분다. 동풍, 서풍, 남풍, 북풍, 그렇게 바람은 돌고 도는 것이다. 물이 바다로 모이지만 바다가 물을 가두기에 너무 비좁다고 말하는 이는 없다.
단조로운 자연 활동이 단어의 반복으로 묘사된다. 한 세대가 가고 한 세대가 온다(4). 그 해가 떠오르고 그 해가 진다(5). 그 바람이 돌고 돌다가 그 바람이 돌아간다(6). 강들이 그 바다로 흐르나 그 바다는 차지 않고 그 강들은 돌아가 흐른다(7). 간다(할라흐 הלך) 4-7절에 6회 반복된다. 6절에 돈다(סבב 사바브)가 4회 반복된다. 4-7절에서 분사를 15회 가량 사용하여 바쁜 인상을 더한다.
모든 것이 단조롭고 지겹다. 눈으로 보아도 만족이 없고 귀는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다(1:8). 해 아래 새 것은 없다(1:9-10).
역설적으로 오늘날 모든 것이 새롭다. 비행기는 더 빨라진다. 스마트폰은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보여준다. 종이 동전 화폐를 대체하는 카카오페이 등 대체 지불 수단이 경쟁한다. 젊은이는 집보다 자동차에 더 많은 것을 투자한다. 여행자들에게 모든 새로운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조건과, 시간과 공간 속에 우리는 갇혀 있다. 오늘의 사람들이 5천년전의 사람들보다 더 지성적이거나 더 의롭거나 더 우월하지 않다. 우리가 더 나은 정보를 얻는 것도 아니다. 대량 정보의 홍수에 밀려 살아가지만 자연, 본능, 직관, 관계 등을 우리는 잃고 살아간다. 더욱이 우리가 요즈음 배우는 것은 우리의 문화와 인격의 일부로 바뀌지 못한다.
전기가 물과 공기처럼 익숙한 환경에서 산다. 그러나 전기를 생산하는 원자력, 화력, 풍력, 태양광 발전 등은 환경에 깊은 상처를 주고 있다.
코헬렛은 무엇이 궁극의 이득인가 라고 질문한다. 인간은 결코 열등한 단계에서 우월한 단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있던 것이 있을 것이고, 행한 것이 행해질 것이다(전도서1:9). 살인, 시기, 지배 등 이런 일들은 바뀌지 않는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지난날 일어났던 것을 망각했기 때문이다.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은 지혜가 아니니라(7:10). 지금 있는 것은 예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있었던 것이 앞으로 있을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미리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예측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전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사실적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1:11).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1:11).
과거에 일어난 것으로 미래를 위한 결론 혹은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일어난 일의 겉 껍데기나 피상적 이야기만 알지, 그 진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잊혀진다. 있었던 것이 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혜자의 삶도 어리석은 자의 삶도 선한 자도 악한 자도 망각 속에 들어간다(2:16).
뒤에 오는 자가 이전에 행해진 일을 반복하는 것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반복 행위는 사색이나 지식의 결과가 아니다(2:12). 미래 세대도 우리 경험에서 유익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 과거도 잊혀진다. 오직 현재만이 남는다.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3:15). 인간은 모든 것을 쉽게 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기억하신다. 사람들과 언약을 기억하신다.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그의 신실하심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미 사라진 것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잃은 것은 없다.
코헬렛은 1장에서 과격한 어조로 말한다. 새것은 없다. 모든 것은 쓸데 없다. 진보는 없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전부는 현재이다. 우리는 현재 속에 살아야 한다. 오늘, 나는 내 모습 그대로 사는 것이다.
바람이 돌고 돌듯이 모든 것은 변한다. 한 세대가 가면 한 세대가 무대에 오른다. 실상은 가고 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서서히 모든 것이 변해가는 것이다. 강물은 흘러서 그 과정을 다시 반복한다.순간순간은 모든 것에 어떤 것에도 열려 있다.
지혜자는 권력이 없다. 왕은 권력을 휘두르나 지혜가 없다. 왕은 원하는대로 하기 때문에 현자가 왕의 결정에 도전하는 것은 속수무책이다.
솔로몬 왕은 지혜의 선생이었으나 축첩과 우상 숭배로 나라가 쪼개지는 원인제공자가 되었으니 그가 자랑한 지혜도 헤벨이다.
명성이 향기름보다 낫고 죽음의 날이 생일보다 낫다(7:1). 향기름은 좋은 냄새를 풍기지만 곧 증발하여 날아가 버린다. 명성도 얼마 안가서 증발하듯 사라진다. 명성이 향기름보다 조금 더 지속될 뿐이나 결국은 명성도 향기름도 사라지는 것이다. 죽은 자는 잊혀진다(1:11).
여론은 불안정하다. 인기에 영합하는 지혜, 확신, 견해는 그것들을 붙드는 자들과 함께 사라진다. 욥은 친구들을 질책한다. 너희가 그 사람들이로구나, 너희와 함께 지혜가 죽겠구나(욥12:2). 민심은 천심이다는 말은 거짓이다. 여론은 쉽게 달아 오르고 쉽게 식는다.
누군가 그 정상의 자리에 오르면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얼미 안가서 실망으로 돌아선다. 그들 손으로 뽑고 결정한 것이지만 그들 손에 스스로 장을 지지는 사람은 없다. 죽음은 삶보다 낫다, 왜 명성과 권력을 추구하느라 생을 낭비하는가?
그러나 이 세상은 모든 인간이 처음 가는 길이다. 인생은 한번만 살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인생의 과정은 모험이요 개척자의 길이 아닌가 생각한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나의 선택이나 의지와 상관없다.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쓸 수 있는 부모를 만나는 것도 인간의 선택이 아니다. 중학교 때 학교 수업료를 못내서 학교에 남아서 몇몇 친구들과 담임 선생님의 재촉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래도 나에게 어머니 아버지가 지금도 고향집에 살아 계시고 명절 때 마다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기다려 주시니 고맙고 다행이다.
인간의 삶은 단 한번만 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단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어떤 결정이 좋고 나쁜지 검증할 수 없다. 독일 속담에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말이 있다. 인생은 그림처럼 미리 스케치를 할 수 없다. 코헬렛은 우연이나 운명을 말하지 않는다.
인생을 가볍게 보는 유형과 무겁게 보는 유형이 있다. 가볍게 보는 유형은 모든 것을 안개요 헛것으로 여긴다. 베토벤은 인생을 무겁게 본 사람이다. 인생을 하나의 스케치가 아니라 완성된 그림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베토벤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자신의 행동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한다.
코헬렛은 베토벤 형 인간을 부정한다. 전체주의적 인간, 정치적 구호 같은 말과 행동은 코헬렛이 바라보는 인간이 아니다. 유신체제, 군사정권 아래서 모든 것은 확신과 불변의 진리처럼 선전되고 강요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어디 있으며 그들은 무엇인가. 김정은, 김정일, 김일성도 마찬가지다. 우상화되고 경직된 권력은 동독처럼 무너질 날이 온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 물고기는 생선이지만 다른 어떤 이 에게는 독이 될 수 도 있다는 말이 있다. 체질이 맞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음식은 독이 될 수 있다. 똑같은 창조의 세계, 해, 바람, 강, 바다를 보고도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시편 104편은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고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는 여호와의 창조 세계를 찬양한다.
반면에 코헬렛은 창조 세계를 영혼없는 기계, 프로그램화 된 로보트 처럼 여기는 듯 하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며, 바람이 가고 바람이 오고, 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고 바다는 채워지지 않고 다시 물은 흐르기를 반복한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가 오기를 거듭한다.
좀더 들어가 살피면 반복은 안정된 것을 말한다. 안정되어야 계획을 세우고 희망을 갖고 현재를 살 수 있다. 변덕스러운 부모는 자식을 정서 불안에 빠뜨린다. 굳은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하나님은 신뢰할 수 없다.
반복되는 세상 곧, 안정된 세계는 인간에게 삶의 의욕을 준다. 왕은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고자 했다. 하늘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것에 관하여 지혜로 구하고 마음을 다했다(15). 그러나 그의 탐구 결과는 바보들의 모험과 다를 바 없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다.
구부러진 것을 고칠 수 없고 부족한 것을 셀 수 없다(15). 지혜자라도 패역과 무질서의 세상을 곧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보라, 그가 굽게 하신 것을 누가 곧게 할 수 있으랴(7:13). 우주는 무질서하다. 마치 하나님의 설계인 것처럼 세상은 구부러져 있다.
욥기서에서 빌닷이 질문한다. 전능자가 의를 휘게 하겠느냐(욥 8:3). 전통지혜를 대변하는 젊은 현자 엘리후는 말한다. 진정 하나님은 악하게 행하시지 않는다. 전능자는 정의를 굽게 하지 않는다(욥 34:12).
그러나 욥은 정의의 부재는 하나님의 구부러지심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내게 불의를 행하셨다”(욥 19:6). 욥처럼 코헬렛은 이러한 휘어진 것들을 곧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휘게 하신 것은 누구도 곧게 할 수 없다.
부족한 것은 셀 수 없다(1:15).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채울 수 없다. 누가 그 마음에 분별력과 이해의 마음을 심을 수 있으랴?
바울은 초대교회 신자들을 앞장서서 핍박하고 죽이는 일에 가담한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편이라고 확신한다. 부활의 주님이 빛 가운데 그의 눈을 멀게 하시고 새로운 눈을 뜨게 하시기 까지 그는 지식으로 채워진 어리석은 자였다.
많은 지혜로 화가 많아지고 지식을 더하니 고통이 늘어난다(1:18). 솔로몬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백성을 재판하는 지혜와 지식을 구했다(대상 1:10).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지식에 더하여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셨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자기가 받은 지혜와 지식과 부와 재물과 영광으로 이방 여인들을 많이 블러들이고 그들과 같이 우상 숭배에 빠졌다. 그의 지혜와 지식이 그를 구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지혜자 계급은 인간의 행동을 관찰하고 어떻게 선하고 성공적 삶을 살 것인지 실천적 조언을 했다. 또한 선하고 성공적 삶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들을 가르쳤다. 잠언 1장7절은 여호와 경외는 지식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코헬렛은 인생 탐구를 통하여 두가지를 말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구부러진 것을 펼 수 없고 부족한 것을 셀 수 없다(1:15).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그가 굽게 하신 것을 누가 곧게 할 수 있는가(7:13).
뒤틀리고 패역한 국면에서 조차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맞서서 극복하고 변혁시킬 힘이 없다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행하신 방식이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은 받아들이는 평정심을 주소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바꾸는 용기를 허락하소서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를 받기 원합니다.
더 깊이 파고들고 더욱더 탐구할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지혜를 더할수록 슬픔이 늘어간다(1:18).
인생을 탐구하는 질문은 지혜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 선하고 성공적인 삶으로 가는 것과 천박하고 어리석은 것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도록 우리는 인생가운데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신다.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는 정직한 사람과 만나는 것은 신선한 일이다.
결국 코헬렛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지혜임을 가르친 것이다(12:13). 욥기 28:28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이고 악에서 떠나는 것이 총명이라 말한다. 솔로몬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은 지혜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망각했기 때믄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혜와 지식은 바람을 붙잡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