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전리(葛田里)
1997년 2월 15일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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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산에
칡이 많아 치랏골
눈이
세차게 휘몰아쳐 온 천지를 하얗게 뒤덮어 버린 이월, 치랏골을 찾았다. 예전부터
칡뿌리가 온 동네 야산에 뿌리를 드러낸 체 흩뿌려져있어 치랏골이라 불리는 갈전리는
보은읍에서 상주방면으로 차로 15분쯤 가다보면 나오는 관기리에서 세중쪽 좁은 도로를
따라 20여분 떨어진 곳에 위치 해있다.
회색빛
허허벌판. 눈바람은
흩날려 시야를 가리우고 도로는 미끄러운 빙판이라 차는 엉금엉금 기어가는데 저만치
앞서서 옷깃을 여미우며 구부정한 어깨로 바람과 맞서서 걸어가는 한 노인을 보았다.
차를
세우고 노인의 행선지를 묻자 뜻밖에 치랏골이라 했다. 반갑고
안쓰런 마음에 노인을 태우고 어디를 갔다오시는 길이냐고 묻자 세중리에 위치한 보건소에
진료 받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이
추운 날씨에 병약한 몸을 이끌고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의 보건소를 걸어서 다니는 노인을
보니 마음이 씁쓸한데 그러고 보니 치랏골로 오는 동안 그 흔한 시내버스 한대 보이지
않았다. 갈전리
마을 사람들은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시내버스를 구경할 수 있다. 읍내라도
가려고 하면 꼭두새벽에 운행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야 하고 힘들게 읍내를 나갔다하더라도
갈전리로 되돌아오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저녁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갈전리 주민에게는 호사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여름,
겨울방학 때는 하루에 두 번씩 운행하던 버스, 그것마저 끊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세중리까지는 간간이 시내버스가 다니나 이곳 갈전리까지는 버스가
오지 않아 교통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요즘
같은 겨울철에 버스를 타기 위해 3킬로미터를 걸어 가야한다니 지금 같은 첨단문명,21세기의
도래라고 외치는 시대에 버스한대 구경할 수 없는 마을이 있었다니 새삼 안타까울 뿐이다.
치랏골의
교통문제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후보들이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는 사안이지만 현재 전혀
달라진 게 없다.
치랏골은
마로면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변둔리, 서는 세중리, 남은 옥천군 청산면,
북은 소여리에 접하여 있다. 본래
보은군 마로면 지역으로 예로부터 옥천 전씨 집성촌으로 칡 밭이 많이 있어 치랏골 또는
갈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증산리를 병합하여 갈전리라 하였다.
갈전리는
치랏골과 함께 자연마을로 시루산이 있는데 이 시루산은 갈전리 북쪽 시루봉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지방도에서
우회전하여 느티나무가 유난히 많은 진입로를 올라가니 쓸모 없는 시내버스 승강장이
눈에 띈다. 보은군에서
예산을 세워 건설한 승강장은 방학 때가 되면 한대의 시내버스를 맞을 수 없는 무용지물로
변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시멘트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면 야트막한 야산이 집들을 끌어안고 있는 형태의 마을이 보인다. 마을
가운데 공터와 최근 건축된 마을회관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고 그 둘레에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현상이다. 그
맞은 편으로는 사라져 가는 우리 전통가옥인 초가집이 비스듬히 서 있어 한겨울의 시골정취를
더욱 느끼게 해준다. 마을회관
앞으로 93년 9월 세워진 갈전리 마을 자랑비가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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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자랑비 -
소백산맥
정기 타고 동쪽에는 매봉, 북쪽에는 시루봉이 감싸주는 아늑한 골짝에 한집 두 집 지은
것이 한마을 이루어 그 이름하여 치랏골 갈전리라 하였도다. 인의예지
삼강오륜 미풍양속을 이러 받으려 혹한의 쓰러진 아버지를 구하려다 십 이세 어린 학생이
목숨을 잃은 효행비가 효자고개에 건립되어 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한답니다. 인심
좋고 훈훈한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힘 모아 땀흘려 축조한 저수지는 우리들의 젖줄과도
같으며 후손들에 밥그릇과도 같도다. 그 뒤의 느티나무 정자는 바람과 함께 술렁술렁
춤이라도 추듯하는 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풍요로운 인심 모아 영원히 지키리라. 우리
마을 갈전리.
치랏골
서쪽입구 들 섶을 돌아가니 움푹 파인 회색 빛 저수지에 눈이 내려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해
낸다. 바로
치랏골 소류지이다.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 축조한 저수지에서 물을 대어 논농사를 지어 70세대 239명이 배불리 먹고 살아가니
치랏골 소류지는 마을 주민들에게는 고마운 생명줄과 같다. 맑고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주어진 터전에 만족하며 땀흘려 농사짓고 살아가는 치랏골 주민들은
올 한해 계획으로 마을 안길 포장을 서두르고 있다. 또한
3년 전에 파놓은 상수도 암반 관정은 이용시설이 미비하여 활용되지 못하는데 식수용,
농업용으로 조속히 사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갈전
소류지에서 옥천 청산으로 넘어가는 산허리에 쑥 고개가 있다. 지금은
효자고개로 더 많이 알려진 고개이기도 하다.
비포장
흙 길을 따라 고개를 올라가니 하얀 눈에 덮인 산소와 비석이 철망 속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효자 정재수의 비이다. 1974년
1월 22일 한밤중. 눈보라가 휘몰아쳐 살을 에이는 듯한 강추위가 연일 계속되던 밤이었다.
충북
옥천군으로 설을 쇠기 위하여 경북 상주에서 출발한 아버지와 아들은 치랏골마을로 거쳐
쑥 고개를 넘어 가고있던 중이었다. 아버지는
습관처럼 주막에 들러 술을 마신 후 거나하게 취해있는 상태였다. 아버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술기운에 비틀거렸고 어린 소년 정재수는 그런 아버지를 부축하며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치랏골의
쑥 고개를 넘어가던 중 술에 취한 아버지가 졸음을 견디다 못해 자꾸만 쓰러져 잠들려고
했다. 추위
속에 쏟아지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동사하려는 아버지를 살리고자 갖은 애를 쓰던 정재수
소년은 그만 힘이 부쳐 추위 속에 얼어죽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이를 발견한 마을 주민들이 마음을 모아 장례를 치러주고 어린 소년 정재수의 효심을
마음속에 새기려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워 주었다.
40세
이상 나이를 먹을 치랏골 주민이면 이 꽃다운 죽음을 지금도 누구나 기억하고 있다.
인적
드문 효자고개의 조그만 무덤에 어린 생명이 잠들어 있다. 아버지를
살리려 발버둥치던 꽃다운 어린 생명. 효자고개
주위에 흰눈은 쌓이는데 덩그러니 초라한 비석은 과연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비석에
새겨진 글귀 전문을 옮겨본다. 『서기
1974년 1월 22일 밤 정재수 이곳에 잠들었으며 이는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소곡리에
태어났다. 십
세의 어린 나이로 혹한의 눈보라 속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출하고자 못다 핀 생명을 바쳤으니.
아!
아버지의 영혼을 엎어주던 그 맑은 효행은 뭇 사람의 심금을 울려 길이 후세에 흐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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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 효행비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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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주에 이런 효자가있다니 좋은소식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