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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장도로와 안성군수와 대통령 비서관
1980년 3월 16일 일요일이었다. 국내정국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가 없을 때였다. 청와대로 출근한지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일제시대 때부터 총독의 관저로 사용하여 오던 청와대 2층 관저에서
"야, 권 마담. 잘 부탁한다. 오늘 각하 내외분께서 드라이브 가실 예정이다. 네가 모시고 다녀와라. 나는 오늘 못 간다"
"알겠습니다"
나는 의전수석 실을 나오며 "빠이빠이" 하는 정 수석에게 시원스럽게 대답은 했지만,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마담'소리가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야!' 라고 하질 말던가, 마담이라고 하질 말아야지. 마담이라고 하면 년이라고 해야 하질 않나!'...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의전수석 실을 나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기분도 좋았다. 일요일은 대부분 특별한 일이 없어서 무료하게 사무실을 지켰지만, 오늘은 대통령부부를 모시고 야외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 대통령은 외무부장관 시절부터 드라이브를 즐겼다. 그런데 외무부장관 시절에는 기자들이 옆자리에 동승하거나, 신문사 취재차량이 뒤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입이 무겁기로 유명한 최장관으로부터 기삿거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장관은 술이 거나한 상황에서도 기자들이 예민한 질문을 하면 '모르 쇠'로 일관했다. 이 소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그래서 나중에는 최 장관이 직접 기자들에게 드라이브를 가자고 해도 오히려 기자들이 핑계를 대고 피했다. 소득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드라이브라는 소문이 점차 퍼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모르 쇠' 최 장관의 '쇠 자물통'이 안 열린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는 융통성 없는 성실한 "일 벌레"이었다.
최대통령이 지시한 드라이브 코스로 경기도 성남을 거쳐 이천으로 내려가는 산업도로를 택했다. 최종 행선지는 안성이었다. 이윽고 차량행렬은
수년간 지켜봐 왔지만, 영부인이 드라이브를 나갔다가 토하기는 처음이라 나는 바짝 긴장했다. 안 경감은 총리 시절부터 최 대통령을 모셨는데, 서글서글한 인상에 온유한 성품을 지녀서 대통령이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안 경감이 다급한 목소리로 대책을 물었다.
"비서관님, 영부인께서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일요일이라 안성군청에는 영접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제 생각에는 경호실을 통해 안성경찰서에 연락해서 우선 서장 실 화장실을 사용하시도록 조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각하께 여쭤보십시오"
잠시 뒤, 안경감이 다시 무전연락을 해왔다. 최대통령이 내 의견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무전으로 경호실을 불러 안성경찰서에 연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안성경찰서의 전화번호를 몰랐고, 또 대통령 경호실에서 연락이 가야 경찰이 적극 협조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안 경감과
청와대 경호실의 연락을 받은 안성경찰서는 비상이 걸렸다. 대통령부부가 15분 안에 도착할 것이라는 급보였기 때문이다. 당황은 그만두고라도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것이다! 안성 경찰서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그런 날 벼락이 없었다!
안성군수와 경찰서장은 관내의 행사에 참석 중이라 도저히 그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가 없었다. 국가원수 내외분이 조그만 경찰서에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상황이라 경찰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이윽고 대통령의 차가 안성경찰서로 들어서자 늙수그레한 정보과장이 달려와서 영접을 하였다. 안성경찰서 입장에서는 때마침 경험 많고 노련한 정보과장이 근무하고 있어서 다행인 셈이었다. 어쨌든 영부인은 안성경찰서 서장실의 화장실을 이용했고, 대통령은 정보과장의 영접을 받으며 커피 한 잔을 마셨다. 차 시중을 드는 정보과장은 모든 행동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것도 팔자려니 하고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15분 가량 머문 뒤, 대통령부부는 서울로 향했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가만 생각하니,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만 같아 불안했다. 정 수석 대신이라지만 수행비서관 역할을 제대로 못했으니 나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그래서 정 수석에게 연락하여 사무실로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내 예감대로 청와대에 도착하자마자 최 대통령은 화가 단단히 난 얼굴로 지시했다. "내무부장관 들어오시라고 그래!" 아뿔싸! 이거 큰일 났구나! 겁이 덜컥 나면서 갑자기 내가 법과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학자인 아버지는 내가 판검사나 정치인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판검사는 잘못된 오판으로 사람을 해칠 수 있고, 정치인은 상 건달이나 하는 짓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외교관이었다.
그런데 오늘 수행책임자로서 대통령 부부를 편안하게 모시지 못했으니 불명예스럽게 청와대를 나갈 수도 있었다. 1969년 8월에 외무부에 들어와서 그 동안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는데, 오늘 일은 내 경력에 오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나는 정수석에게 오늘 일들을 가감 없이 상세히 보고하고, "각하를 잘못 모셔서 죄송하다"며 사죄했다. 정수석은 처음에는 성난 표정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화를 삭이고, 불안에 떠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그 길이 비포장도로인지 아무도 몰랐잖아. 그리고 그게 네 책임도 아니고……." "아닙니다. 미리 파악하지 못한 게 제 잘못입니다." 정수석의 위로 덕분에 내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잠시 뒤, 최대통령의 호출을 받은
그 당시는 박대통령에게 칭찬을 받은 공무원은 바로 영전되었고, 호통을 들은 공무원은 곧바로 목이 달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박대통령의 뜻과는 상관없이 인사권자 들이 권력자의비위를 맞추려고 멋대로 판단하고 내린 조치였다. 그래서 큰 당숙은 변명 한마디 못하고 억울하게 당했다는 것이 당시의 이야기들이었다.
정동열수석과 나는 인사권을 가진 고위공직자들이 제멋대로 하는 이와 같은 인사로 불이익을 당하는 공무원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공히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정수석과 나는 문제의 비포장도로 관할책임자인 안성군수를 걱정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서재로 불려간
"장관님, 각하께서는 무슨 지시를 하던 지 간에 나중에 반드시 확인하십니다. 특히 인사권자가 정당한 사유도 없이 제멋대로 당사자에게 불리한 인사를 하면 틀림없이 그 인사권자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그러니 각하가 언짢게 말씀하셨더라도 그 당사자를 당장 인사조치는 하지 마십시오. 그 일을 마무리하게 하고 추후 적절한 시기에 영전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거의 명령조의 조언이라 장군출신인 김장관의 입에서 '아이참' 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 하였다.
며칠 뒤, 나는 안성군수 L씨를 청와대로 불렀다. 나는 L군수에게 무슨 이유로
나는 안성군수에게 가급적이면 포장공사를 빨리 끝내는 것이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왜냐하면 최대통령은 한번 문제가 있는 일은 반드시 현장에 가서 재확인하는 끈질기고 확실한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안성군수가 갑작스런 인사조치의 희생양이 될 것 같아서였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온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절대 탓하지는 말라. 네가 상대방에게 잘하면 상대방도 너에게 잘하려고 노력할 것이다!」라는 교훈이 나의 대에서 흠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청와대는 한동안 평온하였다. 조용하게 굴러 갔다. 당시 의전비서관이던
5월 하순경으로 기억한다. 매사에 섬세하면서도 뛰어난 판단력과 탁월한 실력을 갖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안성군수에게 충고해주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안성 군에서 모내기를 하면, 최 대통령은 반드시 그 비포장도로로 가서 확인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1980년 5월 28일, 최 대통령과 청와대 직원들이 안성 군으로 모내기 행사를 나갔다. 나는 다른 볼일이 생긴 영부인을 수행하느라고 모내기 행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날 밤, 모내기를 끝내고 돌아온 정수석에게 물어보았다. "그 도로는 어떻던가요? 잘 포장되어 있었습니까?" "두 달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도 신경이 쓰이냐?" 정 수석은 퉁명스럽게 되묻고는 내가 궁금해 하는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L 안성군수는 이미 근처인화성군으로 전임되고, 부임한지 얼마 안 된 C 군수가 최 대통령을 영접했다고 했다. 정수석은 혹시 L 안성군수가 영부인의 멀미사건으로 불이익을 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자세히 알아보니, 지난 5월 20일자 내무부의 인사이동 때, 안성군수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것이었다. 또
(권영민/현 순천향 대학 초빙교수/전 주 독일 대사, 덴마크, 노르웨이 대사, 애틀란타총영사, 제주평화연구원장 대리 역임/저서: 자네 출세했네, 권대사, 자네 큰 실수했네, 베를린 맑은 하늘에 그림을 그리자!/서울대 독문과 졸업/아산 産)
첫댓글 권영민 앰버서더님 인사 올림니다. 매우 감명깊게 쓰신 글 읽었습니다.
김종환 장군은 제가 2군단 군단장 시절에 직접 모신 경험이 있고요 며눌아이가 현재 일본에서 외교관으로 근무 중 입니다 대사님과 동시대를 살아온 그래서 인지 퍽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아 감명이 더 합니다
최경보 대사가 고교 동창이며 서울서 자주 어울리는 친구죠.ㅎㅎ 이러다 보면 한 사람건너 모두 지인이요 친구가 되네요
기회 되면 찾아 뵙고 싶네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고국에서..
반갑습니다. 최대사는 아주 훌륭한 분으로서 높이 후배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줗은 친구를 두었군요. 우리 모두 한숱밥을 먹었던 사람들이죠. 감사합니다.
대사님```짱..............서울서 뵈요
정말이죠, O지 찍고 기다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