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희대 그늘에 자리한 오래된 절, 조선 왕실의 원찰이었던
~ 천장산 연화사(天藏山 蓮華寺)
▲ 활짝 열린 연화사 일주문(一柱門) |
경희대병원 서쪽에는 연화사란 조그만 절이 둥지를 틀고 있다. 천장산(141m) 남쪽 자락에 자
리한 이곳은 조계종(曹溪宗) 소속으로 1499년 폐비윤씨의 묘역인 회묘(懷墓)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회묘는 원래 경희대병원 자리에 있었는데, 억울하게 죽은
어미를 위해 연산군은 1504년 회묘
를 회릉(懷陵)으로 높여 석물을 심고 회묘를 지키는 절을 세웠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화사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그 절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어미를 향한 연산군의 사무친 마음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덧없이 아작이 나버렸고
,
연산군 자신도
교동도(喬桐島)로 추방되어 바로 그해 겨울,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회
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어 방치되었으며, 절도 이때 풍비박산이 난 것으로 보인다. 반정파들은
연산군과 관련된 모든 것을 철저히 깔아뭉갰기 때문이다.
이후 터만 아련히 전해오다가 경종(景宗, 재위 1720~1724)의 능인 의릉이 인근
석관동(石串洞
)에 터를 닦으면서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조(英祖)가 1725년에 절을 지어 의릉의
원찰로
삼은 것이다. 허나 그 원찰의 이름도 야속하게도 전하지 않는다.
1870년대에 이르러 승려 묘련(妙蓮)이 절을 중수했는데, 그는 성품이 좋아서 인기가 대단했다
. 하여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절을 묘련사(妙蓮寺, 또는 묘련암)라 부르니 이때부터 절의
이름 3자가
역사에 나타난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파괴된
것을 1883년에 승려 정담(淨潭)이 남화(南化), 완허(玩
虛)의 도움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으며, 이때 궁인(宮人) 박씨와 상궁(尙宮) 최씨, 김씨 등이
시주해 여러 탱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중건이 마무리 되자 1884년 10월에 '천장산 묘련사 중
건기(重建記)'를
남겼다.
이후 절은 연화사로 이름이 갈렸는데, 그 시기가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1993년 자음(慈音)이
지은
'천장산 연화사 삼성각 상량문(上樑文)'에는
'부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이 머무는 곳이
연화장(蓮華藏) 세계이고, 중생의 근본적 자성(自
性)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청정한 연꽃과
같아
절 이름을 연화사라 했다'고 적고 있어 연화
장 세계에서 이름을 따왔음을 귀띔해 준다.
1950년대까지 절 주변은 자연에 묻힌 싱그러운 곳으로 그때는 영휘원<永徽園,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묘역>에서 오솔길을 따라 절로 들어섰다. 허나 1955년에
종로1가에 있던 경희대(옛 신흥대학)가 이곳으로 오면서 절 옆에 학교 건물이 들어섰고 덩달
아 주거지까지 조성되면서 절 주변 풍경화는 180도 달라지게 되었다.
하여 절은 경희대에 완전히 포위된 외로운 모습이 되었으며, 연화사의 첫 후광(後光)이던 회
묘는 경희대에 떠밀려 1969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전되었다. 또한 절 주변에 가득했
던
숲도 겨우 서북쪽에 일부가 남아 가늘게 천장산과 손을 잡고 있다.
1990년대까지 법당인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미륵전(彌勒殿), 대방(大房), 종각 등의 기와집들
이 경내를 이루었으며, 극락보전 앞에는 뜨락이 닦여있었고, 경내 뒤에는 약간의 소나무가 운
치를 이루었다. 허나 건물이 낡고 터가 좁아 1993년부터 크게 중수를 벌여
기존의 건물을 부
시고 집약적인 공간인 2층짜리 대웅보전과 삼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그 과정에서
'미륵전
상
량문'과 '묘련암 중수기(1875년)'가 발견되어 절의 숨겨진 역사 일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전 등 5~6동의 건물이 있으
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아미타괘불도(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2호)와 칠성도,
천수관음도, 신
중도, 지장시왕도,
산신도, 목각석가여래설법상(서울 지방유형문화재 464호),
산신도가 있다.
이중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는 1901년 10월 28일에 제작되어 다음달 11월 20일에 점안된
것으로 대은 돈희(大恩 頓喜)를 중심으로 계은 봉법(啓恩 奉法), 한봉
응작(漢峰 應作), 보암
긍법(普庵
亘法) 등이 참여해 조성했다. 아미타3존불을 비롯하여 가섭존자,
아난존자,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보현동자상까지 등장시켰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
했던
괘불 양식이다. 날이 날인지라 괘불의 화려한 외출을 기대했으나 이번에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밖에 1880년에 제작된 독성도가 있으며, 지방문화재 탱화들은 괘불을 제외하고 삼성각과 대
웅보전 1층, 관음전에 포진해 있어 찾기는 쉽다. (그들의 위치는 변경될 수 있음) |
▲ 경내로 인도하는 짧은 숲길
봄이 푸르게 붓질을 한 숲길에 고운 빛깔의 연등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 분위기를 한껏 드높인다. |
훤칠하게 솟은 일주문을 들어서 찰라와 같이 짧은 숲길을 지나면 바로 대웅보전 앞이다. 오색
찬란한 연등이 연화사의 좁은 하늘을 가득 메우며 부처님오신날의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연화사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좁게 경내를 이루고 있는데, 그 동쪽에 삼성각과 무애당, 관음
전이 있고
서쪽에는 불교용품과 공양미, 전통차를 파는 건물이 있다. 석가탄신일을 즐기러 나
온 수많은 사람들로
좁은 경내는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절은 초파일 특수로 즐거운 비명
을 지른다. |
▲ 오색 연등이 그늘을 드리운 대웅보전 뜨락
대웅보전 뜨락에는 행사용 천막을 주렁주렁 지어 전통차 시음과 다도(茶道) 체험,
연등 만들기, 불교용품 판매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나는 전통차 1잔을 섭취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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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각(三聖閣)
대웅보전 뒷쪽 구석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
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우리에게 친
숙한
산신과 독성, 칠성의 보금자리이다.
1993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건물 바로 뒷쪽에
콘크리트로 다져진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에
경희대 건물이 높이 자리하여 절을 대놓고 살
펴본다. |
▲ 삼성각 석가여래상과 칠성도(七星圖,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3호) |
삼성각 중앙에는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금동석가여래상과 고색이 역력한 칠성도가 자리해 있
다.
칠성도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중심으로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 칠
성불(七星佛),
칠원성군(七元星君), 노인성(老人星), 삼성(三星) 등 칠성 식구들이 복잡하게
담겨져 있는데, 칠성은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존재로 오랫동안 이 땅의 토속신앙으로
머물
러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때 불교의 일원으로 흡수되면서 그를 다루지 않는
절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다.
연화좌(蓮花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있는 칠성도의 주인, 치성광여래는 금륜(金輪
)을 들고 있는데, 양 어깨를 덮은 통견의(通肩衣)를 입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은 연화좌 위
에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본존불을 향해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인다.
그리고 머리에 쓴
관에는 해와 달을 상징하는 붉은 원과 하얀 원이 그려져 있고, 치성광여래
주위로 좌우 대칭되게
배치된 칠성불은 합장한 채 본존불 쪽으로 몸을 향해 있으며, 칠원성군
은 각기 홀을 들거나 합장한
채
치성광여래를 향해 서 있다.
이 탱화는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활약한 한곡 돈법(漢谷 頓法)을 중심으로 한
명 환조(漢明 幻照), 두삼(斗三), 태호(太湖), 창호(昌湖) 등이 동참하여 1901년에 그린 것으
로 이때
아미타괘불도와 지장시왕도, 신중도, 천수관음도가 같이 제작되었다. |
▲ 삼성각 산신도(山神圖) - 서울 지방문화재자료 56호 |
칠성도 우측에는 산신과 호랑이, 동자 등 산신 가족을 머금은 산신도가 걸려있다. 칠성도만큼
이나 고색이 깃들여져 있으나 그와 달리 등장 인물이 단출해서 보기는 좋다. 언제
제작되었는
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23년에 문성(文性)이 산신각을 짓고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
어
이르면 1880년대 후반, 적어도 칠성도와 비슷한 시기로 여겨진다.
그림을 살펴보면 가운데에 붉은 옷을 걸친 산신 할배가 커다랗게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에 모
자 모양의 두건을 쓰고
있고, 까무잡잡한 얼굴은 둥근 넓적하며 포근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
본다. 왼손에는 깃털로 된 부채를 들고 있으며 오른손으로 그의 수염을 쓰다듬고 있다.
산신 오른쪽에는 그의 비서인 동자 2명이 자리해 있는데, 모두 기물을 들고 있으며, 왼쪽에는
그의 심부름꾼인 호랑이가 민화(속화)풍으로 익살스럽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런데
시
중에 돌고 있는 어느 유명한 민화(民畵)의 호랑이와 많이 닮아서 혹 그를 참조하여
그린
것은
아닐까 싶다. 하여튼 옛 사람들은 호환(虎患)이라 하여 두려움의 대상인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짙었다.
산신 뒤에는 그의 활동무대인 산이 있는데, 노송과 길게 떨어지는 폭포를 그려 심산유곡(深山
幽谷)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
▲ 삼성각 독성도(獨聖圖) |
칠성도 좌측에 자리한 독성도는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 독성)를
담은 탱화로 아줌마 자세로 편안하게 앉은 백발의 독성 할배와 그의 활동무대인 천태산이 그
려져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으로 1880년에 제작되었으며, 삼성각에 깃든 3개의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나 이상하게도 지정문화재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
▲ 연등을 두룬 대웅보전 |
연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은 1993년에 지어진 지상 2층, 지하 1층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하
는
선방(禪房)과 공양간, 2층은 대웅보전, 1층은 강당(講堂)으로 작은 절에 걸맞게 집약적인
기능을 갖추고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불화를 보고 싶다면 1층을 기웃거리면 되며 시장기
를 단죄하고 싶다면 지하로 내려가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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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전에서 바라본 대웅보전 |
▲ 대웅보전(2층) 내부 |
대웅보전 2층 불단에는 금동 피부의
석가여래상이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地藏菩薩)을 좌우에
거느리며 자리해 있다.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비롯한 후불탱 3점이 그들을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으며, 그들
앞에는 중생들이 올린
떡과 과일 등으로 불단이 내려앉을 지경이다. |
▲ 연화사 신중도(神衆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5호 |
강당으로 쓰이는 대웅보전 1층에는 연화사의 보물인 신중도와 지장시왕도가 액자에 소중히 깃
들여져 있다.
신중도는 호법신(護法神)의 무리를 담은 것으로 등장 인물이 너무 과다하여 정신을 쏙 빼놓는
다.
주로 법당을 지키는 용도로 신중도(신중탱)를 많이 거는데,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
위태천(韋太天)을 중심으로 그의 식구들이 그려져 있다.
그림 좌우측에 대칭으로 자리한 제석천과 범천은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뒤에 두루고 머
리에 보관(寶冠)을 눌러쓴 채, 두 손으로 꽃을 들고 있으며,
그림 하단에는 위태천을 중심으
로
칼로 무장한 팔부중(八部衆)이 있고, 제석천과
범천 주위로 일월대신(日月大神) 등의 천신
(天神)과 산개(傘蓋) 등을 받쳐든 천동(天童), 악기를 연주하는 천녀(天女)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1901년에 수화원 한봉 응작(漢峰 應作)을 비롯해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
(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亘法), 재겸(在謙) 등 12명의 화승(畵僧)
이
그린 것으로 이중에서 계은 봉법, 보암 긍법, 돈법(頓法), 두삼(斗三) 등은 20세기 초 경
기도
지역에서 활약한 경선당 응석(慶船堂 應釋)과 교류를 가진 화승들이다.
그림의 구도와 형태, 필선, 채색 등이 깔끔하게 처리되었으며, 세부묘사가 정교해 19세기 중
반 이후 화풍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 연화사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6호 |
신중도 옆에 있는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
者), 시왕(十王)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신중도만큼이나 정신이 없는
이 그림은 연화사 탱화가 대거 조성되던
1901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림의 주인공인 지장보살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마련된 연화좌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
아있으며, 투명한 흑색 두건을 쓰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 왼손에는 육환장(六環杖)을 들고
있다. 그 좌우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합장인을 선보이며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고, 지장보
살의 신광
좌우로는
온갖 모습의 시왕이 지장보살을 향해 서 있는데, 시왕 뒤에는 8곡병(曲屛
)이 둘러져
있으며 광배는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이렇게 광배를 금색으로 처리한 수법은 대한제국 시절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유행했던 것으
로 그림의
인물 표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우두옥졸(牛頭獄卒)과 마두옥졸(馬頭獄卒) 등
인물
상호에
표현된 음영법이다. 이 음영법은 19세기 이후 서울, 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보
인다.
이 그림은 1867년에 경선당 응석이 그린 낙산 보문사(普門寺, ☞
관련글 보기)의 지장시왕도
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낙산 청룡사(靑龍寺, ☞
관련글 보기) 지장시왕도와
유사하며, 대
한제국 시절 서울, 경기 지역 지장시왕도의 도상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작품으로 채색 및
인물 표현에서도 19세기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하여 이를 통해 서울 지역 불화유파(佛畵
流派)의 사승(師僧)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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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불(灌佛)의식의 현장
대웅보전 1층 앞에는 초파일을 맞아 1년 만에
외출을 나온 아기 부처가 온갖 꽃으로 치장된
관정대(灌頂臺)에 우뚝 자리해 중생들의 인사
를 받고 있다.
관불의식 수요가 많아서 여기서는 참여를 하지
않고 1층 안에서 살짝 사진에 담았는데, 중생
들이 껴얹은 물을 맞은 아기부처의 표정이 잠
시 환해진 듯 싶었다.
허나 햇님이 퇴근하면 다시 어두컴컴한 창고에
봉인되어 1년을 기다려야 되니 오늘 냉수마찰
을 실컷 받아야 여한이 없을
것이다.
예전 초파일에는 대웅보전 2층 앞에서 관불의
식을 했었는데, 그때 절에서 의식에 참여한
사
람들에게 손수건을 나눠주는 인심을 베풀었다.
(그 손수건은 아직도 가지고 있음) |
▲ 관음전(觀音殿) |
대웅보전 옆구리에 자리한 관음전은 무애당(無礙堂) 머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다. 경내가 좁다 보니 새로 건물을 닦지 못하고 무애당의 허전한 머리를
활용해 관음전을 닦았는데, 이곳에는 대웅보전에 있던 관세음보살상과 천수관음도가 봉안되어
있다. |
▲ 연화사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44호 |
관음전이란 새로운 둥지를 마련한 천수관음도는 1901년에 한봉 응작, 보산 복주, 청암 운조(
淸菴 雲照) 등이 그렸다. 지금이야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다루는 그림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
만 정작 늙은 천수관음도는 매우 드물게 남아있어 그 희소성이 크다. 그런 그림이 무려 연화
사에 소중히 깃들여져 있는 것이다.
바다 가운데에 봉긋 솟은 연화좌 위에 천수관음이 붉은색 바탕의 옷을 걸치며 앉아있다. 그는
버들가지가
꽂힌 정병과 경책(經冊)을 받쳐 든 4비(臂) 등 40비를 갖추고 있는데, 그의 커다
란 광배
안에는 무려 1,000개의 손과 눈을 그려 놓아 관세음보살의 위엄을 한층 드높였다. 신
중도와 달리
등장인물은 달랑 1명이지만 그의 찬란한 광배로 인해 이 그림 또한 보는 이의
혼
을 쏙 빼놓는다.
연화사 천수관음도는 고려와 조선 전기 천수관음도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 수
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도상까지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25년에 제작된 대산사 천수
관음도가 연화사 천수관음도에서 계승을 받으니 그 가치는 꽤 크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얼굴
은
살이
많고 이목구비가 단정해 경선당 응석의 영향을 조금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
▲
연등의 물결이 하늘과 땅을 가르는 대웅보전 앞뜨락
(관음전에서 바라본 모습)
▲ 연화사 북쪽에 있는 선동호(仙洞湖) |
나무가 우거진 경내 서북쪽에는 경희대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서쪽에는 경희초등학교가 있고
, 동쪽은 경희여고와 경희대 교내로 연화사 주변을 180도 변형시킨 경희대이지만 천장산 자락
에 자리한 잇점을 살려 자연보호를 크게 여기면서 다른 대학교보다 녹지 비율이 엄청 높은 편
이다. 그러다보니 봄에는 봄꽃 명소, 늦가을에는 단풍 명소로 크게 추앙을 받는다.
주차장 북쪽에 무언가 낌새가 느껴져 가보니 조그만 호수가 숲에 무성히 감싸여 그림 같은 풍
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곳에 아름다운 호수가 감쪽 같이 숨어있었다니.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본 것인가?' 나 자
신도 크게 놀라 뒤로 자빠질 정도였는데, 그는 경희대 교내 서쪽 끝에 자리한 선동호로 숲속
에
깊히 묻혀 있어 서울이 아닌 먼 지방의 산골 호수로 순간이동을 당한 기분이다.
이런 곳이라면 선녀(仙女) 누님도 흔쾌히 내려와 목욕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걸
의식하여 호수 이름도 선녀의 동네를 뜻하는 선동호가 되었다.
호수 주변은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며, 봄 풍경과 늦가을 풍경이 아름다워 연화사에 왔다면 경
내 북쪽으로 조금 벗어나 이곳까지 둘러보길 권한다. 호수를 둘러싼 나무와 꽃, 햇님과 달님,
구름 등 하늘을 장식하는 식구들까지 호수를 거울로 삼아 그들의 매뭇새를 다듬으며, 여기서
잠시 망중한에 잠겨보는 것도 괜찮다. |
▲ 연화사 공양밥의 위엄 |
연화사는 10분이면 능히 다 볼 정도로 조그만 절이지만 그곳에 깃든 문화유산과 신이 나는
초
파일 분위기, 거기에 생각도 못 했던 선동호까지 겯드리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초파일 절투어의 으뜸 백미(白眉)는 뭐니뭐니해도 먹는 재미가 아닐까 싶다. 공양밥과 국수,
과일, 떡, 전통차 등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눈과 마음을 실컷 호강시
켜주었으니 이제는 입과 뱃속을 달래줘야 지친 몸에 활력을 주어 다음 일정을 수월하게 진행
할 수 있다.
대웅보전 지하층에 공양간이 있는데, 이미 사람들로 만원이다. 절에서 준비한 공양밥과 미역
냉국, 그리고 후식용 절편을 받아 빈 자리에 앉아 즐겁게 공양에 임했는데, 공양밥은 호박과
김치, 콩나물 등 갖은 나물을 밥에 넣고 고추장으로 비벼 먹는 이 땅에 흔한 공양밥 스타일이
다. 시장기가 강해서 그야말로 꿀맛이 따로 없었는데, 폭풍 흡입으로 불이 나기 직전인 목구
멍을 미역냉국으로 시원하게 진정을 시켰고, 절편은 청량사로 이동하면서 후식으로 섭취했다.
그렇게 연화사의 풍성한 초파일 인심을 확인하고 다음 인연을 기약하며 청량사로 이동했다.
* 연화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109-1 (경희대로3길 56 ☎ 02-962-61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