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5:30-33 - 성령으로 섬기기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15: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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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것일까요? 왜 우리머리의 한계를 아시면서 지루하기만한 성경을 알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된 육신으로 죽어가고 있다는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는 목숨을 다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죽어가면서 ‘육신됨’의 입장에서 죽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육신됨이 무엇이며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만 자체적으로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는 말씀은 ‘인간은 곧 육신이다’는 안목이 하나님의 안목임을 말해주시는 겁니다.
육신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 나라를 넘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을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화염검과 그룹들이 막고있는 이유는 생명나무만이 에덴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을 에덴동산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쫓아낸 취지를 본인들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취지모르고 다시 하나님과 합류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성경책을 막상 펼치게 되면 어떤일이 벌어지느냐하면 정작 에덴을 염원하는 ‘사람은 구원될 자격도 없고 구원될 수도 없다’는 소식이 가로막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구원을 받으려면 평소에 행할 수 있는 온갖 선행과 믿는행위를 실천해서 성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배려하고 조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편에서 행해지는 종교적 선한 행위마저 ‘육신적 생각’이라서 용납할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사람들의 모든 행동들이 바로 이런 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나가서, 구원, 영생, 천국, 거룩 등등의 입맛에 맞는 것들을 가능한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행함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자신의 모습을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30절에 보면, ‘성령님’이 등장해있습니다. 성령님은 물건이나 물체가 아니시기에 우리의 열정으로 불러낼수 있는분이 아닙니다.
성령을 믿는다고 해서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는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령이 먼저 오셔야하고 성령이 하시는일에 우리가 그 조치에 휩싸여야 합니다.
먼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해서 태어나셨다는 말은,
예수님 이외의 모든 인간들은 성령과 상관없는 육신이지 결코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는 말입니다.
성령의 사람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요? 먹고 살기위해 저자들을 긁어 모으셨나요?
아닙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이 인간 세상에 예수님께로 향하는 길을 내셨습니다. 곧 길이란 예전에 없는 길이었는데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길입니다. 친히 택한자들의 길이 되어 주신 분이십니다.
이 일을위해 그동안 점잖고 훌륭한 양심과 인격의 소유자로 인식이 되었던 유대교 지도자들은 졸지에 악마의 하수인 노릇을 해왔음이 들통나게 됩니다.
곧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로인해 참 하나님의 택한백성과 택함받지못한 자들이 나뉘어 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일이더라는 것입니다.
고요한 세상이 예수님 한분으로 인하여 발작을 일으키듯이 평범한 일상이 죽음과 생며므로 나뉘더라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자란 한사람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육신이었던 것입니다. 모든 자들이 구원 얻을 입장이 아니었던 것입니다...이것이 예수님으로 인해발생하는 일입니다.
또 한 분,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생각해봅시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고 최고의 충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자신은 죄인중의 괴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작업들이 모두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습니다. 이방인인 뭘까요? 이방인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가치를 분명히 하면서 붙여진 개념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구원받지만, 이방인들은 개같은 자라서 귀한 생명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개같이 이방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사도로 만드셨다는 말은 ‘개→아들’이 될 수 있는 근거가 예수님 내에 마련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신 구원과 영생을 감당할 수 없었느냐”고 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혈통적 집단으로 다지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그 안에 품어 담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식 놓고 키우는 것은 개나 소나 돼지도 하고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육신은 결국은 이 본성으로 귀환하는 식으로 모든 진리를 응출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즉 “내가 잘 되고 내 자식, 내 가족 잘되게 하시면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이런 사고방식으로 품을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것이 바로 ’육신적 생각‘이라고 깨버리십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인간도 이 본성을 철회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과 최종 안식과 평화를 요청하지만 그 요청이 튀어나오는 바탕에는 오직 내 가족, 내 혈육 중심은 죽어도 포기 못하겠다는 근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34-36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있어 추상적 보편성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구체적으로 펼치는 보편성은 ‘검’(칼)입니다.
곧 불화이고 쪼개짐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기를 쪼개는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스스로 아무리 반성하고 학대하고 쪼개고 낮추는 그 작업마저 자신을 더욱 더 위대하게 포장하는 포장지 무늬가 작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극도의 쾌락을 갖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자기에게 있어 자신만이 최종 섬김의 존재로 굳어져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작용은 모든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에서 출발해서 인간에게 찾아오심으로서 성령님의 목적이 따로 있음을 알립니다. 그 목표와 희망이란 딴게 아니라 “모든 말씀이 십자가 완성을 향하여 달리는 그 질주에 자신이 섞이게 해달라는 희망”입니다. 이 과정으로 인하여 성도는 자신의 육신됨으로 인한 망가짐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봉사입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매사가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죄인됨과 육신됨을 알게 하여, 이런 개같은 자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님의 일의 목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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