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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관은 철저한 성실한 선수였다. 이제는 선수가 아닌 코치 이장관으로 용인대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사진 김동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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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인천 유나이티드와 J리그 감바 오사카의 한일 프로축구 교류전이 열린 6월 6일 인천 문학월드컵경기장.
경기 직전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이날 경기 하프 타임에 인천 이장관(34)의 은퇴식이 열린다는 안내 방송 때문이었다.
갑작스런 은퇴 소식이었다. 박이천 부단장을 비롯해 일부 인천 관계자들도 “이장관이 은퇴하냐”고 되물었다.
이장관은 199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우선 연고 지명으로 계약금 1억 원과 연봉 1,560만 원에 부산 대우 로얄즈에 입단한 지 12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5월 18일 정규리그 인천-울산 현대전이 이장관의 마지막 경기가 됐다. 이장관은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었지만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팀에 없어선 안 될 소금 같은 선수였다.
프로 12년 동안 354경기에 출전했다. 김병지(서울,471경기), 김기동(포항,432경기)에 이은 K리그 통산 최다 출전 3위다.
지난 시즌까지 해마다 25경기 이상 뛰었을 정도로 큰 부상도 없었다. 철저한 몸 관리와 성실한 자세로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됐다.
이장관은 “언젠가는 선수 생활을 접어야 한다. 생각보다 빨리 결정한 것뿐이다. 후회는 없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선수 이장관이 아닌 코치 이장관을 은퇴 나흘 뒤인 6월 10일 새 보금자리인 용인대에서 만났다.
어제(6월 9일) 용인대 코치로 부임했다. 어떤 기분인가. 어제 첫 출근해 용인대와 경찰청의 연습경기를 지켜봤다. 용인대 선수들과 운동은 오늘 새벽에 처음 했다.
배우는 자세로 나서고 있다. 갑작스런 은퇴여서 지도자로는 많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잘하고 싶다.
갑작스런 은퇴였다. 어떻게 된 것인가. 이제 나이도 어느 정도 찼다. 올 겨울 현역에서 물러나 지도자로 새로운 삶을 살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은사인 김태수 용인대 감독님이 지난주 코치직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김감독님은 아주대와 부산 아이파크 시절 잠시 동안 지도하셨는데 내게 주장을 맡길 정도로 챙겨 주셨다.
그렇지만 곧바로 진로를 결정하기는 어려웠다. 인천과 계약기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장외룡 감독님과 구단에서 내 의사를 존중했다. 이 모든 일이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진행됐다.
구단에선 감바 오사카와 갖는 친선경기를 은퇴 경기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내가 거절했다. 부담스러웠다. 그냥 가볍게 인천 팬들에게 은퇴 인사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나. 아내가 많이 놀랐다. 은퇴를 갑작스럽게 결정했으니까 아무래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당장 월급이 안 들어오니 생활에도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나를 믿었다.
아내가 “힘든 결정을 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계속 당신을 믿겠다”고 했다.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난 더 나쁜 아빠가 됐다.
아이들이 날 찾아도 이젠 만나기가 더 힘들게 됐으니까. 여행이라도 다녀와야 했는데 시간이 없어 그러지도 못했다. 가족이 더 보고 싶어진다.
인천 선수들이 감바 오사카전에서 첫 골을 넣은 뒤 골 세리머니로 당신의 유니폼을 들고 관중석으로 달려갔다. 선수들이 미리 준비했다고 하는데 난 전혀 몰랐다. 사실 그 세리머니를 보지도 못했다. 차가 막혀 경기장에 늦게 도착했다.
경기가 전반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통해 세리머니 장면 사진을 봤다.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난해 부산 구단에서 코치직을 포함해 해외 연수를 제안했는데. (곰곰이 생각한 뒤)그 문제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그렇지만 아직 많은 말을 꺼낼 수는 없다. 코치 보장 및 해외 연수는 원래 FA(자유계약선수) 계약에 포함돼 있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게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구단과 계속 부딪치면서 좋은 감정이 들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은퇴를 종용하고 아예 선수들과 함께 운동하지 말라는 건 너무 한 거 아닌가.
난 2008년까지 계약돼 있었다. 배신감이 들었다.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정말 화가 났다.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구단의 제안을 거부하고 팀을 떠났다. 그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내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 같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말하기 어려웠다. 좋은 일도 아니지 않나. 굳이 내 입으로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속으로 앓았다. 가족이 더 심했을 것이다. 언론에도 사실과 다르게 보도되는 등 못난 아들 때문에 부모님께서 많이 슬퍼하셨다.
그러다 올해 초 인천에 입단했다. 인천 프런트와 친분이 있었다. 순천에서 2군 선수들과 운동하고 있었는데 좋게 봤나 보다.
어느 정도 컨디션이 올라오니 괌 전지훈련에 참가하라고 했다. 그렇게 입단하게 됐다. 체력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은퇴를 결정하기 직전 체력 테스트를 했는데 내가 1등을 했다. 지금도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
6개월 만에 팀을 떠나게 됐지만 뿌듯하고 행복했다. 어린 선수들이 “어떻게 12년 동안 350경기 넘게 뛸 수 있었냐”며 몸 관리에 대해 물었다.
좋은 본보기가 된 것 같다. 그리고 3, 4개월 동안 운동을 안 하다가 팀 훈련에 합류해 운동을 하니 정말 재밌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편하게 운동했다.
지난해까지 해마다 25경기 이상 뛰었다. 큰 부상도 없었다. 특별한 비법이 있었나. 특별한 건 아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등 일정 기간 훈련량을 계획적으로 짜고 운동을 해야 한다.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잘 먹어야 하며 또 잘 쉬어야 한다. 간단하지만 이를 꾸준히 지키는 건 어렵다.
술, 여자 등 유혹도 많을 뿐더러 ‘하루는 빼먹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 게 마련이다.
체력 운동만 열심히 해도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자발적으로 운동하려는 선수가 없다. 모든 게 체계화돼 팀 훈련량도 정해져 있다. 그래서 그것만 하면 되는 줄 안다.
하지만 선수마다 개인 차이가 있다. 좀 더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할 때가 있고 휴식을 취해야 할 때가 있다. 신체 리듬을 잘 파악하고 융통성 있게 운동을 해야 한다.
몸 관리를 누구에게 배웠나. 많은 감독님들 밑에서 배우는 사이 장점만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씩 깨닫게 됐다. 프로에 와서 몸 관리의 중요성을 더 많이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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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관(왼쪽)이 6월 6일 인천 유나이티드-감바 오사카전 하프타임 때 딸 채린을 안고 은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 제공=인천 유나이티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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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시절 부산에는 30대 중반의 김주성이 있었다. 귀감이 됐을 것 같은데. (김)주성이 형은 정말 대단했다. 훈련, 몸 관리 모두 열심히 했다. 훈련을 마치고 나면 숙소에서 공부에 열중했다. 주성이 형과 룸메이트여서 더욱 많은 걸 보고 배웠다.
2004년 11월 7일 전남 드래곤즈전에서 김주성의 부산 소속 최다 출장 기록(255경기)을 갈아 치웠다. (김)주성이 형은 내 우상이었다. 모든 면에서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주성이형이 세운 기록을 깼다. 그 전까진 전혀 몰랐다. 굉장히 기뻤다. 한참 모자란 내가 주성이 형을 이긴 유일한 한 가지였으니까.
K리그에는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최진철, 김진우, 김현수 등이 최근 현역에서 물러났다. 서른 살이 넘은 선수가 K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건 성실성, 기술, 체력 등 뭔가 장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 무대에 오른 지 1년도 안 돼 사라지는 선수가 얼마나 많나. 그런 상황에서 십년 넘게 뛰고 있는 30대 선수들은 정말 대단하다.
노장 선수들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팀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경기력, 정신력, 팀 분위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축구계 안팎에서 세대교체를 강제하는 것 같다. 세대교체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하는데 은퇴를 종용하는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계속 뛰고 있는 (김)병지 형, (김)기동이 형, (우)성용이 형은 정말 존경스럽다.
김병지, 김기동에 이어 K리그 통산 최다 출전 3위다. 그런데 국가대표 선발 및 수상 경력은 없다. 아쉬움도 많을 듯하다.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난 괜찮다. 오히려 감사한다. 난 실력 있는 선수가 아니다. 능력이나 신체 조건도 뛰어나지 않다. 그런 내가 이 정도까지 선수생활을 했다는 건 정말 행운이었다. 축구선수로서 난 정말 행복하게 살았다.
354경기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데뷔 골을 넣은 1997년 4월 19일 아디다스컵 천안 일화전이다. 당시 부산은 마지막 1경기를 남겨 놓고 천안, 울산, 부천 SK에 이어 4위였다.
우승하기 위해선 천안전에서 다득점 승리가 필요했다. 3-0으로 앞선 후반 22분 내가 팀의 네 번째 골을 터뜨렸다.
(하)석주 형이 찰 줄 알고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에서 바보같이 멍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석주 형이 “야, 때려”라며 옆으로 볼을 흘려줬다.
그래서 얼떨결에 그냥 강하게 오른발로 찼는데 골이 됐다. K리그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 받던 신의손을 상대로 넣은 골이었다.
골 세리머니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석주 형에게 달려가 90도로 허리 숙여 인사하며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외쳤다(웃음).
부산은 천안을 4-1로 꺾고 기적 같은 아디다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시즌 3관왕을 이뤘다.
상대했던 선수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누구인가. 전북 현대에서 뛰었던 에드밀손이다. 몸싸움에서 밀려 공간을 허용하면 곧바로 골을 넣는 등 훌륭한 공격수였다.
요즘 선수들 가운데에선 (박)주영이가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운 선수였다. 어린 나이에도 움직임이 매우 좋다.
수비수 뒤로 들어가는 침투 능력이 K리그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미드필드에서 좋은 패스를 많이 지원하면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장관에게 부산은 어떤 곳인가. 부산은 제2의 고향이다. 축구선수로서 꿈을 이룬 곳이다. 부와 명성을 누렸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면 시민들이 알아보고 응원했다.
날 진심으로 좋아해 준 곳이다. 부산 팬들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못하고 그라운드를 떠나 아쉽고 죄송하다. 그렇지만 부산 구단이 날 필요로 해 부른다 해도 가지 않을 것이다. (단호하게)절대로.
이장관
생년월일│ 1974년 7월 4일
신체조건│ 174cm/63kg
가족관계│부인 김현주(31), 딸 채원(4), 아들 주호(2)
학력│청주 덕성초-청주 대성중-청주상고-아주대
약력│1997년 부산 대우 로얄즈 입단
2008년 인천 유나이티드 입단
K리그 통산 기록 354경기 4골9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