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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록(行錄)
강의 ; 임제스님의 행장에 대한 기록이다. 어떻게 공부하고 어떻게 깨닫고 어떤 사람들과 어떤 법담을 나누고 누구를 어떻게 교화하였는가를 자세히 기록한 내용이다. 기록은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아무리 그와 같은 사실이 그 때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뒷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금석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팔만장경도 또한 그 기록이다.
40-1 세 번 묻고 세 번 맞다
師初在黃檗會下하야 行業純一이어늘 首座乃歎曰, 雖是後生이나 與衆有異로다 遂問, 上座在此多少時오 師云, 三年이니다 首座云, 曾參問也無아 師云, 不曾參問이니 不知問箇什麻오 首座云, 汝何不去問堂頭和尙호되 如何是佛法的的大意오
임제스님이 처음 황벽스님의 회하에 있을 때 공부하는 자세가 매우 순일하였다. 수좌 소임을 보는 목주(睦州)스님이 찬탄하여 말하기를, “비록 후배이긴 하나 다른 대중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묻기를, “스님이 여기에 있은 지 얼마나 되는가?” “3년 됩니다.” “공부에 대하여 물은 적이 있는가?” “아직 묻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방장스님을 찾아뵙고 ‘무엇이 불법의 분명한 대의입니까?’ 하고 왜 묻지 않는가?”
강의 ; 수좌스님은 자신의 소임을 매우 훌륭하게 이행하였다. 7, 8백 명이 모여 공부하는 대중들 중에 그릇이 빼어난 사람을 잘 살펴서 방장스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목주스님은 일평생 수좌 소임을 보면서 임제스님을 놓치지 않고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불교의 역사를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대중들 속에 섞여있을 때 지금 같은 임제스님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목주스님의 사람을 알아보는 무서운 안목과 황벽스님의 사람을 단련하는 뛰어난 솜씨가 오늘날의 임제를 있게 하였다. 그와 같은 극적인 만남은 인류역사상 흔치 않다.
師便去問한대 聲未絶에 黃檗便打하다 師下來에 首座云, 問話作麽生고 師云, 某甲問聲未絶에 和尙便打하니 某甲不會니다 首座云, 但更去問하라하니 師又去問이라 黃檗又打하야 如是三度發問하고 三度被打하니라 師來白首座云, 幸蒙慈悲하야 令某甲問訊和尙하야 三度發問에 三度被打니다 自恨障緣으로 不領深旨하니 今且辭去하노이다 首座云, 汝若去時에는 須辭和尙去하라 師禮拜退하니라
임제스님이 바로 가서 물으니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벽스님께서 대뜸 후려쳤다.
임제스님이 내려오자 수좌가 물었다.
“법을 물으러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내가 묻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상이 느닷없이 때리니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가서 묻도록 하게.”
임제스님이 다시 가서 물으니, 황벽스님이 또 때렸다. 이렇게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다[三度發問 三度被打].
임제스님이 와서 수좌에게 말하였다.
“다행히 자비하심을 입어서 제가 큰스님께 가서 불법을 물었는데 세 번 묻고, 세 번 맞았습니다.”
“장애로 인하여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나려고 합니다.”
“그대가 만약 떠나려거든 큰스님께 가서 하직 인사나 꼭 하고 가게.”
임제스님은 예배하고 물러났다.
강의 ; 불법의 대의를 묻는 말이 체 끝나기도 전에 황벽스님의 몽둥이가 날아왔다. 그것도 무려 20방망이씩 세 번이나. 불법치고는 기상천외의 불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법의 분명한 대의임에 틀림없다. 임제가 어떻게 이해를 하든 황벽스님은 자신의 불법에 대해서 소신껏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팔만장경은 무엇인가? 이 임제록을 포함하여 모두가 금강산 안내문이다. 그러면 금강산은 무엇인가? 때리고 맞는 그 사실이다. 즉 대기대용(大機大用)이며 전체작용(全體作用)이다. 이 말도 그 사실은 아니고 한갓 설명이다. 선과 교의 다른 점을 굳이 말한다면 이와 같이 나누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임제스님은 여기서 삼도발문 삼도피타(三度發問 三度被打), 즉 세 번 묻고 세 번 맞은 그것이 세존의 6년 고행이 되고, 달마의 9년 면벽이 되고, 조주의 80년 부잡용심(不雜用心)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임제스님 자신의 모든 것이 되었다.
40-2 황벽의 불법이 별것이 아니다
首座先到和尙處云, 問話底後生이 甚是如法하니 若來辭時에는 方便接他하소서 向後穿鑿하야 成一株大樹하야 與天下人作廕凉去在리이다 師去辭한대 黃檗云, 不得往別處去요 汝向高安灘頭大愚處去하라 必爲汝說하리라
수좌가 먼저 황벽스님의 처소에 가서 말하였다.
“법을 물으러 왔던 후배가 대단히 여법(如法)합니다. 만약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거든 방편으로 그를 이끌어 주십시오. 앞으로 잘 다듬으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스님이 말씀하였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자네는 고안의 물가에 사는 대우스님 처소에 가도록 하여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강의 ; 임제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시는 목주스님의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그 노력이 눈에 선하다. 선정후교(先情後敎)라고 했던가. 사람을 제도함에 있어서 먼저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그 뒤에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다. 임제라는 걸출한 선지식을 만들기까지 황벽스님 못지않은 목주스님의 밝은 안목과 후배를 위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제를 논한다면 반드시 목주스님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군가가 있어서 사람을 이렇게 이끌어 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목주스님에게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공양, 공경, 존중, 찬탄해 드리고 싶다.
師到大愚한대 大愚問, 什麽處來오 師云, 黃檗處來니다 大愚云, 黃檗有何言句오 師云, 某甲이 三度問佛法的的大意라가 三度被打하니 不知某甲이 有過無過닛가 大愚云, 黃檗與麽老婆하야 爲汝得徹困이어늘 更來這裏하야 問有過無過아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에게 이르자 대우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황벽스님의 처소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저가 세 번이나 불법의 분명한 대의를 물었다가 세 번 얻어맞기만 했습니다. 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에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황벽스님이 그토록 노파심이 간절하여 그대를 위해 뼈에 사무치게 하였거늘 여기까지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강의 ; 임제는 이렇게 착하고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불법에 대해서 있는 정성을 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을 화반탁출(和盤托出)하여 선지식에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단지 불법을 물었을 뿐인데 저를 그토록 때리니 저에게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이러한 마음의 청정무구하고 순일무잡하며 더없이 순수한 임제를 한번 상상해보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이요, 이른 봄의 여리고 여린 새싹이다. 갓 태어난 어린 아기다.
그런데 대우스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기상천외하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아직 그 잘못을 몰라 마냥 죄송한 마음으로 전전긍긍할 뿐인데, “황벽스님이 그렇게도 노파심절로 그대를 위하여 뼈에 사무치는 사랑을 베풀었단 말인가?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와서 잘못이 있고 없는 것을 묻는가?” 참으로 어느 정도 정진을 한 사람이면 여기서는 눈을 뜨게 될 곳이다. 어찌 임제뿐이겠는가?
師於言下에 大悟云, 元來黃檗佛法이 無多子니다 大愚搊住云這尿牀鬼子야 適來道有過無過러니 如今却道黃檗佛法이 無多子라하니 儞見箇什麽道理오 速道速道하라 師於大愚脅下에 築三拳한대 大愚托開云, 汝師黃檗이요 非干我事니라
임제스님이 그 말끝에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황벽의 불법이 간단하구나.”
대우스님이 멱살을 움켜쥐며,
“이 오줌싸개 같은 놈! 방금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 이제 와서는 도리어 황벽스님의 불법이 간단하다고 하느냐? 그래 너는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빨리 말해봐라, 빨리 말해!” 하였다.
이에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이나 쥐어박았다.
대우스님이 임제스님을 밀쳐 버리면서 말하였다.
“그대의 스승은 황벽이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강의 ; “황벽의 불법이 간단하구나.” 그렇다. 황벽의 불법만 간단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불법도 간단하다. 엉터리 부연 설명을 하면, 아무런 조작이 없다는 뜻이다. 닦은 것도 아니고 깨달은 것도 아니고 증득한 것도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육도만행을 닦아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본래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것이다. 전혀 손을 댈 것이 없는 물건이다. 그저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는 일이다. 느끼고 아는 일이다. 식사하고 대소변 보는 일이다. 웃을 때 웃고 울 때 우는 일이다. 즐거우면 즐거워하고 아프면 아파하는 일이다. 세존이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하는 일이다. 그 사실 외에 다른 별 것은 아니다.
대우스님이 다그치는 질문에 임제의 대답이 또한 걸작이다.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 쥐어박았다. 임제스님의 불법은 더 간단하다. 스승에게서 간단하게 깨달아서 일까? 본래로 불법은 간명직절하다. 시끄럽지 않고 매우 고요하다. 저절로 그러하다. 그러면서 유현하다. 고고하다. 선문답에서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맞아 떨어진 일은 보기 드물다. 황벽스님에게서 흠씬 얻어맞은 값을 이렇게 멋지게 하였다. 참으로 총명하고 열리한 사람이다. 영혼이 밝은 거울처럼 환한 사람이다. 가을 하늘처럼 끝없이 툭 트여있는 사람이다.
40-3 호랑이 수염을 뽑는 구나
師辭大愚하고 却回黃檗하니 黃檗見來하고 便問, 這漢來來去去에 有什麽了期리요 師云, 祇爲老婆心切이니다 便人事了侍立하니 黃檗問, 什麽處去來오 師云, 昨奉慈旨하야 令參大愚去來니다 黃檗云, 大愚有何言句오 師遂擧前話한대 黃檗云, 作麽生得這漢來하야 待痛與一頓고 師云, 說什麽待來오 卽今便喫하소서 隨後便掌하니 黃檗云, 這風顚漢이 却來這裏捋虎鬚로다 師便喝하니 黃檗云, 侍者야 引這風顚漢하야 參堂去하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을 하직하고 다시 황벽스님에게 돌아오자 황벽스님께서 보고는,
“이놈이 왔다 갔다 하기만 하니 언제 공부를 마칠 날이 있겠느냐?”
“오직 스님의 간절하신 노파심 때문이옵니다.”
인사를 마치고 곁에 서 있으니 황벽스님이 물었다.
“어디를 갔다 왔느냐?”
“지난번에 스님의 자비하신 가르침을 듣고 대우스님을 뵙고 왔습니다.”
“대우가 무슨 말을 하더냐?”
임제스님이 지난 이야기를 말씀드리니 황벽스님이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대우 이놈을 기다렸다가 호되게 한 방 줄까?”
“무엇 때문에 기다린다 하십니까? 지금 바로 한방 잡수시지요.” 하며 바로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황벽스님께서 “이 미친놈이 다시 와서 호랑이의 수염을 뽑는구나.” 하였다.
그러자 임제스님이 “할”을 하였다.
황벽스님이 “시자야, 이 미친놈을 데리고 가서 선방에 집어넣어라.” 하였다.
강의 ; 임제는 태산의 무게 같은 불법의 대의라는 짐을 짊어지고 대우스님에게로 가서 거기서 그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돌아왔다. 얼마나 즐거웠겠는가. 아마도 발이 땅에 닫지 않고 날듯이 왔을 것이다. 불법을 물으러 갔다가 호되게 얻어맞은 황벽스님에게 보란 듯이 돌아와 “이 미친놈이 다시 와서 호랑이의 수염을 뽑는구나.”라는 멋진 인가를 받았다. 거기에 더하여 임제는 “할”로써 쐬기를 밖아 버렸다. 너무나 간단하게. 황벽스님의 불법이 보래로 간단하기[無多子] 때문이다. 이렇게 대장부의 할 일을 다 마치고 선방에 앉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40-4 호랑이 꼬리를 잡다
後潙山이 擧此話하야 問仰山하되 臨濟當時에 得大愚力가 得黃檗力가 仰山云, 非但騎虎頭요 亦解把虎尾니다
뒷날 위산스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며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임제가 그때 대우의 힘을 얻었는가? 황벽의 힘을 얻었는가?”
“범의 머리에 올라앉았을 뿐만 아니라, 범의 꼬리도 잡을 줄 안 것입니다.”
강의 ; 당대의 범 같은 선지식들을 참례하고 비로소 오늘 날의 임제가 되었다. 그르므로 두 사람의 힘을 모두 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두 사람과 관계없이 자신의 힘으로 눈을 떴다 고도 할 수 있다. 예컨대 만약 생감이라면 아무리 두들겨 팬다 한들 홍시가 되어 떨어지겠는가. 가을이 되어 홍시가 잘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지 않는가. 그래서 일체지, 자연지, 무사지(無師智)라고 한다. 그러나 앙산스님의 대답은 너무 멋지다. 위산스님은 사랑하는 제자 앙산의 공부를 점검하는 뜻에서 물었는데 뜻밖의 명답을 받아냈다. 이렇게 되면 제자에 대한 사랑은 몸살이 날 지경이다.
41-1 소나무를 심는 뜻
師栽松次에 黃檗問, 深山裏栽許多하야 作什麽오 師云, 一與山門作境致요 二與後人作標榜이니다 道了將钁頭하야 打地三下한대 黃檗云, 雖然如是나 子已喫吾三十棒了也라 師又以钁頭로 打地三下하고 作噓噓聲하니 黃檗云, 吾宗到汝하야 大興於世하리라
임제스님이 소나무를 심고 있는데 황벽스님께서 물었다.
“깊은 산 속에 그 많은 나무를 심어서 무얼 하려 하는가?”
“첫째는 절의 경치를 가꾸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후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고나서 괭이로 땅을 세 번 내리치니 황벽스님께서 말씀하였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그대는 이미 나에게 30방을 얻어맞았다.”
임제스님이 또 다시 괭이로 땅을 세 번 내리치며 “허허!”라고 하니 황벽스님께서
“나의 종풍이 그대에게 이르러 세상에 크게 일어나겠구나.” 하셨다.
강의 ; 후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소나무를 심는다는 말에 황벽스님은 매우 흐뭇했다. 그래서 “나의 종풍이 그대에게 이르러 크게 일어나겠구나.”라고 하였다. 자신의 종풍을 크게 부촉하신 말씀이다. 선지식은 자신의 법을 이을 제자가 여법(如法)할 때 그 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삶의 보람이요, 수행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괭이로 땅을 세 번 내리친 것은 무슨 뜻일까? 삼도발문에 삼도피타의 소식을 떠올린 것일까? “그래 알았다 하지만 그대는 이미 나에게 30방을 얻어맞은 것이 아닌가?”라고 했는데 또 다시 땅을 세 번 내리쳤다. 황벽도 도저히 제자 임제를 못 당한다. 너무나 대견스럽다. 흡족하기 이를 데 없다.
41-2 앙산스님의 예언
後潙山이 擧此話하야 問仰山하되 黃檗當時에 祇囑臨濟一人가 更有人在아 仰山云, 有祇是年代深遠하야 不欲擧似和尙이니다 潙山云, 雖然如是나 吾亦要知하니 汝但擧看하라 仰山云, 一人指南하야 吳越令行타가 遇大風卽止하니라(讖風穴和尙也)
뒷날 위산스님이 이 이야기를 하시며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황벽스님이 그 당시 임제 한 사람에게만 부촉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도 있는가?”
“있습니다만, 연대가 매우 멀어서 스님께 말씀드리지 않으렵니다.”
“그렇긴 하지만, 나도 또한 알고 싶으니 그대는 말해 보아라.”
“한 사람이 남쪽을 가리켜서 오월지방에서 법령이 행해지다가 큰바람을 만나면 그칠 것입니다.”
강의 ; 앙산스님은 임제스님의 무대에서 예언자로 등장한 분이다. 위산스님의 제자이지만 예언에 있어서는 언제나 물었다. 이것은 임제스님의 제 5세손인 풍혈연소(風穴延昭,896-973)스님에 대한 예언이라고 한다. 황벽스님의 종지가 임제에 의해 당시에 크게 떨치고 다시 먼 후대에 까지 전해지리라는 것을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이 증명하는 의미가 강하게 나타난다. 소나무를 심은 뜻이 풍혈스님에게까지 그 그늘을 드리웠다.
42 무슨 잠꼬대인가
師侍立德山次에 山云, 今日困이로다 師云, 這老漢이 寐語作什麽오 山便打라 師掀倒繩牀한대 山便休하니라
임제스님이 덕산스님을 모시고 서 있는데, 덕산스님이 “오늘은 피곤하구나.” 하였다.
이에 임제스님이 “이 노장이 무슨 잠꼬대를 하는가?” 하니 덕산스님이 후려쳤다.
임제스님이 의자를 뒤엎어 버렸는데 덕산스님은 가만히 있었다.
강의 ; 간단하다. 임제불법은 간단하다[無多子]. 쌍차(雙遮) 쌍조(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 대기(大機) 대용(大用) 기용제시(機用齊示). 대기원응(大機圓應) 대용직절(大用直截). 대사각활(大死却活). 살활제시(殺活齊示).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
43-1 이곳에는 산체로 매장한다
師普請鋤地次에 見黃檗來하고 拄钁而立하니 黃檗云, 這漢困耶아 師云, 钁也未擧어니 困箇什麽오 黃檗便打하니 師接住棒하야 一送送倒하다 黃壁喚維那호대 維那扶起我하라 維那近前扶云, 和尙爭容得這風顚漢無禮닛고 黃檗纔起하야 便打維那하니 師钁地云, 諸方火葬이어니와 我這裏는 一時活埋하노라
임제스님이 밭을 매는 운력(運力)을 하다가 황벽스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괭이에 기대어 서 있었다. 황벽스님께서
“이 놈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하시니
“괭이도 아직 들지 않았는데 피곤하다니요.” 하였다.
황벽스님이 임제를 후려치자, 임제가 몽둥이를 잡아 던져버리고 넘어뜨렸다. 황벽스님이 유나를 불러 말씀하였다.
“유나야! 나를 부축해 일으켜다오.”
유나가 가까이 다가가 부축해 일으켜 드리면서,
“큰스님! 이 미친놈의 무례한 짓을 어찌 그냥 두십니까?” 하였다.
황벽스님은 일어나자 말자 유나를 후려갈겼다.
임제스님이 괭이로 땅을 찍으면서 말하였다.
“제방에서는 모두 화장을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순간에 생매장을 해버린다.”
강의 ; 유나스님이 황벽스님에게 “임제 그 미친놈의 무례한 짓을 왜 그냥 두십니까?” 했을 때 그 답으로 일어나자 말자 유나를 후려친 것은 너무나 절묘한 거량이다. 너무나 매끄러운 응수다. 일부러 지어내도 만들 수 없는 거량이다. 임제의 “제방에서는 모두 화장을 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순간에 생매장을 해버린다.”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대사각활(大死却活)의 소식이다. 얼런 보면 죽이기만 하는 것 같으나 크게 죽음으로 다시 살아난 소식이다.
43-2 진짜 도적은 도망갔다
後潙山이 問仰山호대 黃檗打維那意作麽生고 仰山云, 正賊走却하고 邏蹤人喫棒이니다
뒷날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황벽스님이 유나를 때린 의도가 무엇인가?”
“진짜 도둑은 달아나 버렸는데 뒤쫓던 순라군이 얻어맞은 꼴입니다.”
강의 ; 위산스님은 제자인 앙산스님을 언제나 챙긴다. 그런데 앙산스님의 표현은 너무 순리다. 좀 더 앙산스님 다운 기용(機用)이 기대된다. 위산스님에게 한 방망이 후려쳤으면 어떠했을까? 앙산스님은 스승인 위산스님에게 예의에서 벗어나지 않고 법을 거량하신 매우 점잖으신 분이었던 것 같다.
44 황벽스님이 자기 입을 쥐어박다
師一日에 在僧堂前坐러니 見黃檗來하고 便閉却目하니 黃檗乃作怖勢하고 便歸方丈이어늘 師隨至方丈하야 禮謝하다 首座在黃檗處侍立이러니 黃檗云, 此僧雖是後生이나 却知有此事로다 首座云, 老和尙脚跟도 不點地어늘 却證據箇後生이로다 黃檗自於口上에 打一摑한대 首座云, 知卽得이니다
임제스님이 하루는 큰 방에 앉아 있다가 황벽스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눈을 감아버렸다. 황벽스님이 두려워하는 시늉을 하며 곧 바로 방장실로 돌아가 버렸다. 임제스님이 뒤따라 방장실로 가서 무례하였음을 사과하였다. 수좌가 황벽스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황벽스님이 “이 스님이 비록 후배이긴 하지만 이 일이 있는 줄을 안다.” 하였다.
수좌가 “노스님 자신의 발꿈치도 땅에 닿지도 않았는데 도리어 이 후배를 증명[인가]하십니까?” 하였다. 황벽스님이 스스로 자기 입을 한 대 쥐어박으니,
수좌가 “아셨으면 됐습니다.”라고 하였다.
강의 ; 임제스님의 조용하면서도 온 우주를 흔드는 전체작용은 그렇다 치고, 수좌의 거량과 마무리 하는 말이 빛난다. 수좌 소임을 보면서 조실스님의 법석을 보좌하려면 그 안목이 이쯤은 되어야 한다. 황벽스님이 자신의 입을 스스로 쥐어박은 일은 매우 유명한 사실로 기록된다. 황벽스님은 후배를 인가했다가 잘못을 뉘우치고 입을 쥐어박았고, 수좌는 그런 황벽스님을 보고 “알면 됐습니다.”라고 하여 주의를 주었다. 함부로 입을 땔 곳이 못된다.
45-1 이 노장이 무슨 수작인가
師在堂中睡어늘 黃檗下來見하고 以拄杖打版頭一下라 師擧頭하야 見是黃檗却睡하니 黃檗又打版頭一下하고 却往上間하야 見首座坐禪하고 乃云, 下間後生却坐禪이어늘 汝這裏妄想作什麽오 首座云, 這老漢이 作什麽오 黃檗打版頭一下하고 便出去하니라
임제스님이 방에서 졸고 있는데 황벽스님께서 내려 와서 보시고 주장자로 선판을 한번 두드렸다. 임제스님이 고개를 들어 황벽스님인 것을 보고서도 다시 졸자 황벽스님이 다시 선판을 한번 두드렸다. 그리고 윗자리로 가서 수좌가 좌선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말씀하셨다.
“아래 자리의 후배는 좌선을 하는데 그대는 여기서 무슨 망상을 피우고 있느냐?”
그러자 수좌가 “이 노장이 무슨 수작이야!” 하니,
황벽스님은 선판을 한번 두드리고 나가버렸다.
강의 ; 황벽스님의 오늘 장사는 영 글렀다. 앞 단락에서 보여준 수좌의 주의를 되갚음이라도 하려는 듯이 황벽스님은 “임제는 좌선을 잘 하는데 그대는 망상만 피우고 있구나.” 하면서 덮쳐나갔으나 도리어 당하고 말았다. 임제에게도 외면을 당하고 수좌에게도 못들을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끝까지 선판을 두드리는 일로 무위진인의 전체작용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오늘의 황벽스님의 뒷모습은 많이 허해 보인다.
45-2 한 개 주사위의 두 가지 그림
後潙山이 問仰山호되 黃檗入僧堂意作麽生고 仰山云, 兩彩一賽이니다
뒷날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황벽스님이 선방에 들어갔던 뜻이 무엇인가?”
“한 개 주사위의 두 가지 그림입니다.”
강의 ; 노름 한 판에 두 번 이겼으니 황벽스님이 한 가지 수작을 가지고 임제와 수좌 두 사람을 점검했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앙산스님의 말씀은 황벽스님의 장사를 일거양득으로 되돌려 놓았다. 선방을 나가는 황벽스님의 허허로운 뒷모습을 앙산스님의 기막힌 조명으로 개선하고 돌아온 뛰어난 장군의 위용으로 바꾸어 놓았다.
46-1 많은 사람이 운력하리라
一日普請次에 師在後行이러니 黃檗回頭하야 見師空手하고 乃問, 钁頭在什麽處오 師云, 有一人將去了也니다 黃檗云, 近前來하라 共汝商量箇事하리라 師便近前한대 黃檗竪起钁頭云, 祇這箇는 天下人拈掇不起로다 師就手掣得하야 竪起云, 爲什麽햐야 却在某甲手裏닛고 黃檗云, 今日大有人普請이라하고 便歸院하니라
하루는 대중이 운력을 하는데 임제스님이 맨 뒤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황벽스님이 고개를 돌려보니 임제스님이 빈손으로 오므로
“괭이는 어디 있느냐?” 라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가져갔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대와 이 일을 의논해 보자.”
임제스님이 앞으로 가까이 오자. 황벽스님이 괭이를 일으켜 세우며 말씀하였다.
“다만 이것은 천하 사람들이 잡아 세우려 해도 일으키지 못한다.”
임제스님이 손을 뻗쳐 낚아채서 잡아 세우면서,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은 제 손 안에 있습니까?” 하니 황벽스님께서
“오늘은 대단한 사람이 운력을 하는구나.” 하시며 절로 돌아가 버렸다.
강의 ; 운력을 하는데 괭이도 없이 뒤따라오는 임제는 처음부터 수상했다. 그 함정은 황벽이라는 대어를 겨냥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벽은 걸려들었고 임제라는 능숙한 칼잡이에게 당하고야 말았다. 결국 “오늘은 대단한 사람이 운력을 하는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절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황벽은 참으로 듬직한 일꾼을 하나 두었다. 어떤 일을 맡겨도 능히 해치울 일꾼이다. 한 평생에 이런 일꾼 하나 두었으니 황벽은 진정으로 뜻있는 삶을 살았다. 절로 돌아가는 황벽의 마음은 든든하고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46-2 지혜는 군자를 능가한다
後潙山이 問仰山호되 钁頭在黃檗手裏어늘 爲什麽하야 却被臨濟奪却고 仰山云, 賊是小人이나 智過君子니다
뒷날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괭이가 황벽스님의 손에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임제한테 빼앗겼느냐?”
앙산스님이 대답하였다.
“도둑은 소인이지만 지혜는 군자를 능가합니다.”
강의 ; 앞에서의 운력하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늘 그렇듯이 위산스님은 임제스님의 일을 들어 자신의 제자인 앙산스님을 점검하고 거량한다. 그래서 임제록에 나타나 있는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문답이 적지 않다. 잘 지어진 건물에 단청을 하여 더욱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격이다. 생명이 오래고 여운이 길게 한다. 남의 손에 있는 괭이를 뺏은 것은 도둑이지만 그의 안목은 뛰어나다고 임제스님을 크게 칭찬하였다.
47-1 이일을 안다면 그만 둡시다
師爲黃檗馳書去潙山하니 時仰山作知客이라 接得書便問하되 這箇是黃檗底니 那箇是專使底오 師便掌한대 仰山約住云, 老兄아 知是般事어든 便休하라 同去見潙山하니 潙山便問, 黃檗師兄多少衆고 師云, 七百衆이니다 潙山云, 什麽人爲導首오 師云, 適來已達書了也니다 師却問潙山호대 和尙此間은 多少衆이닛고 僞山云, 一千五百衆이니라 師云, 太多生이니다 潙山云, 黃檗師兄도 亦不少니라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의 편지를 전하려 위산스님에게 갔었다. 그때 앙산스님이 지객 소임을 보고 있었는데, 편지를 받으며 물었다.
“이것은 황벽스님의 것이다. 그대의 것은 어느 것인가?”
임제스님이 손바닥으로 후려갈기자,
앙산스님이 그를 붙잡으며 말하였다.
“노형께서 이 일을 아신 바에야 그만둡시다,”
둘이 함께 가서 위산스님을 뵈오니 위산스님이 물었다.
“황벽 사형께서는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7백 대중입니다.”
“누가 우두머리인가요?”
“방금 전에 이미 편지를 전해 드렸습니다.”
임제스님이 도리어 위산스님에게 물었다.
“이 곳 큰스님의 회하에는 대중이 얼마나 됩니까?”
“일천 5백 대중이라네.”
“매우 많군요.”
“황벽 사형께서도 적지 않으시구나.”
강의 ; 앙산스님은 임제스님에게 “당신 본인의 살림살이를 내어보시오.”라고 하자 임제스님은 대뜸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황벽스님과의 첫 대면에서 얻어맞은 그대로였다. 손바닥으로 후려친 그곳에 불법대의가 있다. 그가 있고 내가 있다. 온 우주가 있다. 무위진인이 펄펄 살아 움직인다. 대기대용이 전체작용한다. 앙산스님과 임제스님이 할 일을 다 했다. 그래서 정작 위산스님은 할 일이 없다. 의례적인 대중들의 숫자에 대한 문답으로 끝냈다. 가만히 들려다 보면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다.
47-2 보화스님이 돕다
師辭潙山하니 仰山送出云, 汝向後北去하면 有箇住處리라 師云, 豈有與麽事리오 仰山云, 但去하라 已後有一人이 佐輔老兄在하리니 此人祇是有頭無尾며 有始無終이니라 師後到鎭州하니 普化已在彼中이라 師出世에 普化佐贊於師라가 師住未久에 普化全身脫去하니라
임제스님이 위산스님을 하직하고 나오니 앙산스님이 전송하면서 말하였다.
“그대가 뒷날 북쪽으로 가면 머무르실 곳이 있을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가시기만 하면 한 사람이 노형을 보좌해 드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으며, 시작은 있고 끝은 없을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뒷날 진주에 이르자, 보화스님이 이미 거기에 와 있었다.
임제스님이 세상에 알려지자 보화스님이 도와 드렸다. 임제스님이 진주에 머무신지 오래지 않아 전신으로 이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강의 ; 보화스님과 처음 만나게 된 것을 말하고 있다. 앙산스님은 역시 예언가다. 보화스님이 임제를 보좌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는 또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조차 알고 있었다. 일가를 이룬 선지식이 법을 펼만한 장소를 얻는다는 것은 복이다. 그리고 교화를 도와줄 마땅한 사람을 얻는다는 것도 큰 행운이다. 앙산스님은 임제가 머물 곳과 도와줄 인물이 있을 것까지 다 알고 있었다. 예언대로 다 맞아 떨어졌다. 그것은 인연인가? 운명인가? 아무튼 임제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 먼 후대에 까지 그 영향을 미칠 희대의 큰 선지식으로서의 조건과 인연을 빠짐없이 갖추었다. 그리고 그 값을 충분히 했다.
48 검은 콩을 주어먹는 스님
師因半夏에 上黃檗하야 見和尙看經하고 師云, 我將謂是箇人이러니 元來是揞黑豆老和尙이로다 住數日타가 乃辭去하니 黃檗云, 汝破夏來하야 不終夏去아 師云, 某甲暫來禮拜和尙이니다 黃檗이 遂打趁令去하니 師行數里라가 疑此事하야 却回終夏하니라
임제스님이 여름철 안거 중간에 황벽산에 올라갔다가 황벽스님께서 경을 읽고 계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저는 스님이 그럴싸한 분으로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검정콩이나 주어먹는 노스님이군요.”
며칠을 머물다가 하직 인사를 드리러 가니,
“그대는 여름 안거를 깨뜨리고 오더니, 결국 여름 안거를 마치지도 않고 가려 하는가?” 하시므로,
“저는 스님께 잠시 인사를 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하였다.
황벽스님께서는 임제스님을 후려갈겨 내쫓아 버렸다. 임제스님이 몇 리를 가다가 이 일을 의심하고 다시 돌아와 그 여름 안거를 마쳤다.
강의 ; 임제는 스승을 찾아가서 “경전은 초월한 대선지식인줄 알았는데 아직도 경전에서 못 벗어난 평범한 수행자군요.” 라는 말로 한 대를 갈겼다. 그러나 황벽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중에 떠나면서 하직인사를 하려 왔을 때 비로소 대답을 한 것이다. 변명을 듣고 다시 제대로 한 대를 얻어맞고 임제는 가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 장면은 평소의 임제답지 않은 모습이다. 훤출하던 임제는 어디가고 황벽에게 끌려 다니다가 만다. 임제가 왜 이러는가?
49-1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으리라
師一日에 辭黃檗하니 檗問, 什麽處去오 師云, 不是河南이면 便歸河北이니다 黃檗便打한대 師約住與一掌이라 黃檗大笑하고 乃喚侍者호되 將百丈先師禪版机案來하라 師云, 侍者將火來하라 黃檗云, 雖然如是나 汝但將去하라 已後에 坐却天下人舌頭去在리라
임제스님이 어느 날 황벽스님을 하직하니, 황벽스님께서 물었다.
“어디로 가려 하느냐?”
“하남이 아니면 하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황벽스님이 곧바로 후려치자, 임제스님이 그를 잡고 손바닥으로 한 대 때렸다. 이에 황벽스님이 큰 소리로 웃으며 시자를 불렀다.
“백장 큰스님이 물려준 선판과 경상을 가져오너라.” 하시니
임제스님이 “시자야! 그것을 불을 질러라.” 하였다.
황벽스님이 말하였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그냥 가져가거라. 나중에 앉은 자리에서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게 할 것이다.”
강의 ; 스승과 하직할 때의 일이다. 하남을 가든지 하북을 가든지 확실하게 정해서 말하지 않고 ‘인연 닿는 곳으로 가게 되겠지.’하는 식이다. 또 한편으로는 본래 가고 옴이 어디 있는가. 늘 그 자리인 것을. 묻기는 새삼스럽게 왜 물어?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말투가 그게 뭔가. 황벽스님도 질 리가 없는 분이다.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의 촌보도 본래 옮기지 않는 모습을 좋이 서로 드날려 보였다. 그리고는 일상으로 돌아와서 이제 법을 주고받은 신표(信標)를 갖고 떠나라는데 그것마저 거절한다.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따위 같은 것은 불살라버리란다. 옷과 발우는 육조스님 대에서 이미 끝난 일인데 다시 무슨 짓거리인가? 그리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걸망만 무거울 뿐이다.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스승 황벽스님도 도저히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제자다. 스승이 주는 신표를 스승 앞에서 불사르게 하는 일은 오직 임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태산준령이다.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그 높이를 알 수 없다. 아예 입이 떼 지지도 않는다. 혀를 내두를 수도 없다. 뒷날 법을 받았느니, 받지 않았느니 하는 시시비비에 대해서 입을 틀어막게 하라는 황벽스님의 염려도 아랑곳없다. 신표를 불사르게 한 이 사건이야말로 온 천하를 먼 미래에 까지 진동시키고도 남은 일이다. 무슨 신표가 굳이 필요하겠는가.
49-2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다
後潙山이 問仰山호되 臨濟莫辜負他黃檗也無아 仰山云, 不然이니다 潙山云, 子又作麽生고 仰山云, 知恩方解報恩이니다 潙山云, 從上古人이 還有相似底也無아 仰山云, 有나 祇是年代深遠하야 不欲擧似和尙이니다 潙山云, 雖然如是나 吾亦要知하니 子但擧看하라 仰山云, 祇如楞嚴會上에 阿難讚佛云, 將此深心奉塵刹하니 是則名爲報佛恩이라하니 豈不是報恩之事닛고 潙山云, 如是如是로다 見與師齊하면 減師半德이요 見過於師라사 方堪傳授니라
뒷날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임제가 황벽스님을 저버린 게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은혜를 알아야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법입니다.”
“옛사람들도 이와 같은 경우가 있었는가?”
“있습니다만 너무 오래 된 일이라 스님께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나 나도 알고 싶으니 말해 보아라.”
“다만 저 능엄회상에서 아난이 부처님을 찬탄하기를, ‘이 깊은 마음으로 먼지 같이 많은 국토를 받드는 것이 곧 부처님의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은혜를 갚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그렇다.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이나 감하는 것이고, 견해가 스승보다 나아야만 비로소 법을 전해 줄 만하다.”
강의 ; 황벽스님과 사형사제간인 위산스님이 이 중요한 사건을 놓칠 리가 없다. 어록을 편찬한 사람의 의도가 엿보인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세상사 앞뒤를 모두 꿰뚫고 있는 제자 앙산에게 물었다.
“임제가 무엇을 잘못 한 게 아닌가?”
“아니지요. 참으로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은 일지요. 얼마나 멋집니까.”
“과거에도 그와 같은 사례가 있었는가?”
“그럼요. 능엄회상에서 있었지요. 아난이 ‘나의 이 깊고 깊은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을 모두 제도하는 일이 곧 부처님의 은혜를 갚은 일입니다.’라고 한 말이 곧 그와 같은 사례입니다.”라고 하였다. 글쎄요. 같은 사례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위산스님의 뒷말이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다. “견해가 스승과 같으면 스승의 덕을 반이나 감하는 것이고, 견해가 스승보다 나아야만 비로소 법을 전해 줄 만하다.”라고 했다.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관계가 그렇고 황벽스님과 임제스님의 관계가 그렇다. 곧 청출어람이 청어람(靑出於藍而靑於藍)이다. 잘되는 집안은 반드시 자식이 어버이보다 뛰어나다.
50 부처와 조사에게 다 예배하지 않는다
師到達磨塔頭하니 塔主云, 長老야 先禮佛가 先禮祖아 師云, 佛祖俱不禮니라 塔主云, 佛祖與長老로 是什麽冤家오 師便拂袖而出하니라
임제스님이 달마조사의 탑전에 이르렀는데 탑을 관리하는 스님이 말하였다. “장로께서는 부처님께 먼저 절하십니까? 조사에게 먼저 절하십니까?”
“부처와 조사에게 다 절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과 조사가 장로에게 무슨 원수라도 됩니까?”
임제스님이 곧바로 소매를 떨치고 나가 버렸다.
강의 ; 당시에 달마대사의 탑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그 견처(見處)가 보통이겠는가. 평범한 질문 같지만 함정이 깊은 곳이다. 임제는 불야타 조야타(佛也打 祖也打)하는 큰 방(棒)을 내렸다. 그리고는 기분 나쁜 놈을 만났을 때 “홱!”하고 나가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처가 있는 곳에 머물지 않고 부처가 없는 곳에 급히 지나가 버리는 도리다. 이쪽도 저쪽도 머물지 않는 법을 보여준 것이다. 양변에 집착하지 않는 쌍차(雙遮)의 도리는 안다마는 양변을 다 쓰는 쌍조(雙照)의 도리는 모르는가? 그리고 보면 조사들은 흔히 쌍조보다는 쌍차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탑주(塔主)의 말이 참 좋다. “부처님과 조사가 장로에게 무슨 원수라도 됩니까?” 부처님과 조사에게 다 예배를 하고 부처가 있는 곳에도 머물고 중생이 있는 곳에는 더불어 같이 살아라. 있음도 받아드리고 없음도 받아드려라. 선도 받아드리고 악도 받아드려라.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양변을 떠나지만 말고 양변을 다 수용하고 활용하라. 양변을 떠나기만 하는 것은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은 모르는 이치다.
51 오늘은 낭패를 보았다
師行脚時에 到龍光하니 光上堂이라 師出問, 不展鋒鋩하고 如何得勝고 光據坐한대 師云, 大善知識이 豈無方便고 光瞪目云, 嗄하니 師以手指云, 這老漢이 今日敗闕也로다
임제스님이 행각할 때 용광스님이 계시는 곳에 이르렀는데, 용광스님이 마침 법당에서 설법을 하고 있었으므로 임제스님이 물었다.
“칼을 뽑지 않고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습니까?”
용광스님이 묵묵히 않아 있자 임제스님이 말하였다.
“큰 선지식께서 어찌 방편이 없으십니까?”
용광스님이 눈을 크게 뜨고 쉰 목소리로 “사!”하니, 임제스님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 늙은이가 오늘 낭패를 보았구나.”
강의 ; 임제스님이 “큰 선지식께서 어찌 방편이 없으십니까?”라는 매우 부드러운 진흙 속에 가시를 숨겨둔 수법을 썼다. 그러자 용광스님은 칼을 빼들고 눈을 부라리며 “사!”하고 임제를 배는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임제의 한 마디는 도리어 용광스님을 배는 것으로 되돌려버렸다. “이 늙은이가 오늘은 당했구나.” 하여 끝내버린 것이다. 여기서 이기고 지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용광스님을 점검해본 것이다.
52-1 앉아서 차나 들게
到三峯하니 平和尙問, 什麽處來오 師云, 黃檗來니라 平云, 黃檗有何言句오 師云, 金牛昨夜에 遭塗炭하야 直至如今不見蹤이로다 平云, 金風吹玉管하니 那箇是知音고 師云, 直透萬重關하야 不住淸霄內로다 平云, 子這一問이 太高生이로다 師云, 龍生金鳳子하야 衝破碧瑠璃로다 平云, 且坐喫茶하라
삼봉에 갔을 때 평화상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황벽스님의 회하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은 어떤 법문을 하시는가?”
“금빛 소가 간밤에 진창에 빠져 아직까지도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습니다.”
“가을바람이 옥피리를 분다. 누가 이 소리를 아는가?”
“곧바로 만 겹 관문을 뚫으니 맑은 하늘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그대의 한마디 물음이 매우 높구나.”
“용이 금빛 봉황의 새끼를 낳으니 유리 빛 푸른 창공을 뚫고 날아갑니다.”
“자, 앉아서 차나 들게.” 하셨다.
강의 ; 자세한 전기가 남아 있지 않은 삼봉산의 평화상을 만나서 황벽스님의 불법을 첫마디부터 매우 시적으로 표현했다. 다시 번역하면 이렇다. “황벽의 불법은 화려하다. 그러나 어떤 의식사량계교나 언어문자의 자취에 메이지 않는다. 아예 그런 자취가 없다.” 평화상도 그에 맞게 시적으로 다시 묻는다. “아, 그 표현 참 좋다. 그러나 그 높고 청아한 경지를 누가 이해하겠는가?” “그렇습니다. 만 겹의 관문을 뚫고 맑은 하늘에도 머물지 않는 그 높은 경지입니다.” “그대의 그 한 마디 말이 스승보다도 더욱 높구나.” “천하에 누가 황벽스님의 불법을 능가하리요. 항차 나는 청출어남이 청어남입니다.” “자네와는 안되겠다. 그만 차나 한잔 들게.”
52-2 요즘 어떠하시던가
又問, 近離甚處오 師云, 龍光이니라 平云, 龍光近日如何오 師便出去하니라
평화상이 다시 물었다.
“근래에는 어디에 왔는가?”
“용광스님이 계시는 곳에서 왔습니다.”
“용광스님은 요즈음 어떠하시던가?”
임제스님은 곧바로 나가 버렸다.
강의 ; 평화상이 아무래도 임제에게 미련이 좀 남았던가보다. 황벽스님의 불법은 그만두고 여기에 오기 전에 어디 누구를 만나고 왔는가를 묻는다. 그래서 바로 앞에 있었던 용광스님을 거론하게 되었다. 묻자마자 “용광스님의 요즘 근황은 이렇습니다.”하고 횡하니 나가버렸다. 씩씩하고 여여하다. 활발발하다. 그대로가 전체작용이다. 백 미터짜리 고래가 폭포 같은 물을 토한다.
53 삼산이 만 겹의 관문을 가두어 버렸다
到大慈하니 慈在方丈內坐어늘 師問, 端居丈室時如何오 慈云, 寒松一色千年別이요 野老拈花萬國春이로다 師云, 今古永超圓智體여 三山鎖斷萬重關이로다 慈便喝한대 師亦喝하니 慈云, 作麽오 師拂袖便去하니라
대자스님이 계신 곳에 갔을 때, 대자스님이 방장실에 앉아 계셨는데 임제스님이 여쭈었다.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 계실 때는 어떻습니까?”
“추운 겨울에도 소나무는 한결같아서 그 푸른빛이 천 년을 빼어났고, 시골의 노인이 꽃을 꺾어 드니 온 세계가 봄이로다.”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고금에 길이 뛰어난 크고 원만한 지혜의 본체여, 삼산(三山)이 만 겹의 관문을 가두어 버렸더라.”
대자스님이 대뜸 “할!”을 하시니, 임제스님도 “할!”을 하셨다.
대자스님이 “어떤가?” 하시니, 임제스님은 소매를 떨치며 가 버렸다.
강의 ; 강설은 아무리 잘해봐야 어차피 군더더기다. 혹이다. 군더더기 소리를 부치자면 이렇다.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있는 그 사람을 대자스님과 임제스님이 서로 지극히 절제된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있는 그 사람이 누구인가?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사람이다. 불생불멸의 참 생명이다. 사시(四時)의 변화에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 천 년을 빼어났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온 세계라는 말은 공간적으로 그 사람을 표현한 것이다.
또 임제스님이 읊은 “고금에 길이 뛰어난 크고 원만한 지혜의 본체여,”란 말 역시 사람 사람들의 집안에 단정히 앉아 있는 참 부처를 뜻한다. 그는 옛도 아니고 지금도 아니다. 본래로 완전무결하고 원만구족한 지혜의 본체다. 여기서 삼산(三山)이란 신선들이 살기 때문에 속인의 발길이 닫지 않는 전설의 산이다.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빌어서 방장실에 단정히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사람 사람들의 본분의 산, 무위진인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그 사람을 극한의 높이까지 끌어 올려 표현하였다.
그 표현은 둘 다 아름답고 유현하고 고고하지만 말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뒤늦게 그것을 알고는 “할”로써 날려버렸다. 대자스님이 “어떤가?”라는 말에 임제스님은 소매를 떨치며 가버렸다. 참 잘한 일이다.
54 훌륭한 선객은 정말 다르구나
到襄州華嚴하니 嚴倚拄杖하야 作睡勢어늘 師云, 老和尙瞌睡作麽오 嚴云, 作家禪客이 宛爾不同이로다 師云, 侍者야 點茶來하야 與和尙喫하라 嚴乃喚維那호되 第三位에 安排這上座하라
양주의 화엄스님에게 갔을 때, 화엄스님이 주장자에 기대어 조는 시늉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노스님께서 졸가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훌륭한 선객은 정말 다르구나.”
“시자야! 차를 다려 와서 큰스님께서 드시도록 하여라.”
화엄스님이 유나를 불러
“이 스님을 셋째 자리에 모시도록 하여라.” 하였다.
강의 ; 노련한 화엄과 기민한 임제의 만남이라고 평한 이가 있다. 또 옛 사람은 용은 푸른 바다에서 노닐고 호랑이는 산에서 울부짖는다. 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깊이 음미해봐야 한다. 극도로 깊고 투명한 의식이 아니면 그 맛을 느끼기가 어렵다. 어린 녹차 한 잎을 찬물에 띠우고 조주 청다(淸茶)의 맛을 아는 경지라고나 할까.
삼위(三位)라는 것이 여기서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중국 총림에서 제1위는 전당(前堂·)수좌, 제2위는 서당(西堂)수좌, 제3위는 후당(後堂)수좌이다.
55 화살이 서천을 지나갔다
到翠峯하니 峯問, 甚處來오 師云, 黃檗來니라 峯云, 黃檗有何言句하야 指示於人고 師云, 黃檗無言句니라 峯云, 爲什麽無오 師云, 設有라도 亦無擧處니라 峯云, 但擧看하라 師云, 一箭過西天이로다
임제스님이 취봉스님 계신 곳에 이르자 취봉스님이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황벽스님 회하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은 어떤 법문으로 학인을 지도하시는가?”
“황벽스님은 법문이 없으십니다.”
“어째서 없는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소개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쨌든 한 번 말해 보아라.”
“화살이 서천을 지나가 버렸습니다.”
강의 ; 화살이 신라를 지나갔다. 화살이 서천[인도]을 지나갔다. 모두들 같은 의미다. 십만 팔 천리를 지나갔다. 라는 말도 있다. 낙처(落處)를 모른다는 뜻일 게다. 끈질기게 묻는 취봉스님을 멀리 따돌려 버렸다.
56 여기서 무슨 밥그릇을 찾는가
到象田하야 師問호되 不凡不聖하니 請師速道하라 田云, 老僧祇與麽니라 師便喝云, 許多禿子야 在這裏覓什麽椀고
임제스님이 상전스님 계신 곳에 이르러 물었다.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니 스님께서는 빨리 말씀 해주십시오.”
“노승은 그저 이럴 뿐이네.”
임제스님이 곧 “할!”을 하며 말하였다.
“허다한 머리 깎은 이들아, 여기에서 무슨 밥그릇을 찾고 있는가?”
강의 ; 범부와 성인의 경지를 초월한 자리를 물었다. 상전스님 자신도 그런 경지를 잘 수용하고 있노라. 라는 뜻이다. “할”이다. 그렇게 대답을 하면 공연히 머리만 깎고 밥그릇이나 챙기는 중이다. 본분 작가로서는 너무 부족하다. 죽도 밥도 먹지 말라.
57 짚신만 떨어뜨릴 뿐이다
到明化하니 化問, 來來去去作什麽오 師云, 祇徒踏破草鞋로다 化云, 畢竟作麽生고 師云, 老漢話頭也不識이로다
명화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자 명화스님이 물었다.
“왔다 갔다 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저 쓸데없이 짚신만 떨어뜨릴 뿐입니다.”
“결국 어쩌겠다는 말인가?”
“이 노인네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강의 ; 여기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이 또 한 분 있다. 아예 못 알아듣는다고 해버렸다. 임제스님의 이 말이 얼마나 좋은가. “그저 쓸데없이 짚신만 떨어뜨릴 뿐입니다.” 그렇다 누구나 집신만 떨어뜨리고 다닐 뿐이다. 다른 일이 있으면 안 된다. 무사시귀인(無事是貴人)이다. 일 없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을 뿐이다. 그것밖에 달리 무엇이 있던가. 언제나 그 자리 그 사람인 것을. 어쩌기는 뭘 어쩌는가? 참으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58-1 노파의 거량
往鳳林타가 路逢一婆하니 婆問, 甚處去오 師云, 鳳林去니라 婆云, 恰値鳳林不在로다 師云, 甚處去오 婆便行이라 師乃喚婆하니 婆回頭어늘 師便打하다
스님이 봉림스님에게 가던 도중 어떤 노파를 만났는데 노파가 물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봉림스님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봉림스님은 마침 계시지 않습니다.”
“어딜 가셨습니까?” 하였는데 노파가 그냥 가니까 임제스님이 불렀다.
노파가 고개를 돌리자 임제스님이 곧 후려쳤다.
강의 ; 노보살은 자신의 기봉(機鋒)을 숨기고 장난으로 거짓말을 했는데 임제스님이 추궁하니까 그냥 가버린다. 갈려면 곧바로 가버리지 임제스님이 부른다고 돌아보기는. 거짓말한 탄로가 나버렸다. 그것이 맞을 짓이다. 그러나 상당한 노파다. 아마 덕산스님을 시험하던 노파가 아닌가 모르겠다. 당시에는 선지식들을 시험할 수 있는 수준 높은 노 보살들이 많았으리라.
58-2 봉림과의 시문답(詩問答)
到鳳林하니 林問, 有事相借問得麽아 師云, 何得剜肉作瘡고 林云, 海月澄無影이어늘 游魚獨自迷로다 師云, 海月旣無影이어늘 游魚何得迷오 鳳林云, 觀風知浪起하고 翫水野帆飄로다 師云, 孤輪獨照江山靜하니 自笑一聲天地驚이로다
임제스님이 봉림스님이 계신 곳에 이르자 봉림스님이 물었다.
“물어 볼 것이 있는데 괜찮겠는가?”
“무엇 때문에 긁어 부스럼을 만드십니까?”
“바다에 비친 달이 너무나 밝아서 그림자가 하나도 없는데, 노니는 고기가 제 스스로 미혹할 뿐이다.”
“바다에 비친 달은 이미 그림자가 없는데, 노니는 고기가 미혹할 리 있겠습니까?”
“바람을 보아 물결이 이는 것을 알고, 물을 보고 작은 배에 돛을 올린다.”
“외로운 달이 홀로 비치어 강산은 고요한데, 혼자서 웃는 소리가 천지를 놀라게 하는군요.”
강의 ; 노파의 말을 뒤로하고 결국 봉림스님을 만났다. 봉립스님은 시를 짓는 솜씨가 뛰어난 분이다. 물론 임제스님도 그에 걸 맞는 솜씨를 발휘한다. 눈이 밝은 사람들은 긁어서 부스럼 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또 머리 위에 다시 머리를 만들어 올리는 것도 금기사항이다. 그런데 봉림스님이 긁어 부스럼 내는 짓을 하겠는가? 임제를 점검하기 위해서 그물을 던져보는 일이다. “본분자리에는 밝고 밝은데 그대는 왜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가?” “밝고 밝은데 길을 잃고 돌아다닐 일이 있겠습니까? 누가 길을 잃었단 말입니까?” 이렇게 수작하여 멋진 시가 오고 간다. “내 그대의 하는 꼴을 보고 하는 말이다. 내가 잘 못 볼 리 있겠는가?” “잘 못 보았습니다. 나는 경우가 틀립니다.” 하면서 그 유명한 “고륜독조강산정 자소일성천지경(孤輪獨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이라는 구절을 내 놓는다. 하늘을 찌르는 자긍심을 나타낸 말이다. 그야말로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다. 어느 누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랴 마는. 살활자재와 대기대용이 하늘을 찌르는 본분종사의 시절과 기백이다. 마치 단기필마로 조조의 수천 군중 속을 종횡무진하면서 취모검(吹毛劍)을 휘둘러 무를 배어 넘기듯 하는 상산 조자룡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林云, 任將三寸輝天地나 一句臨機試道看하라 師云, 路逢劍客須呈劍이요 不是詩人莫獻詩로다 鳳林便休하니 師乃有頌호대 大道絶同하야 任向西東이라 石火莫及이요 電光罔通이로다
“세 치 혀를 가지고 천지를 비추는 것은 알아서 할 일이나, 기틀에 맞는 한마디를 던져 보시게.”
“길에서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쳐야 하지만, 시인이 아니면 시를 말하지 마십시오.”
봉림스님이 거기서 그만두자 임제스님이 게송을 하였다.
“큰 도는 철저히 동일해서 동쪽과 서쪽을 마음대로 향함이라. 부싯돌의 불도 따라잡지 못하고 번갯불도 통하지 못하도다.”
강의 ; 봉림스님은 임제의 그 말에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는 “세치 혀를 가지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그것은 어쩔 수 없다 마는 재대로 살아 있는 한마디를 해보면 어떨까?” 이 말을 듣고 임제스님은 그의 시감(詩感)이 절정에 달했는지 천고에 빛나는 이런 말을 던진다. “명검을 알아보는 검객을 만나면 칼을 바쳐라. 그리고 시인이 아니면 시를 논하지 말라 하였소[路逢劍客須呈劍 不是詩人莫獻詩].” 여기서 봉림스님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임제스님은 내친김에 한껏 실력을 발휘한다.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큰 도는 철저히 동일해서 동쪽과 서쪽을 마음대로 향함이라. 부싯돌의 불도 따라잡지 못하고 번갯불도 통하지 못하도다.” 모든 시간에 다 있고, 모든 장소에 다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 도리다. 그러나 일천 부처님과 일만 조사들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광석화(電光石火)도 그 신속함에는 미칠 수 없다. 이 한 게송에 독자들은 눈을 뜰지라.
58-3 공적으로는 바늘도 용납하지 않는다
潙山問仰山호되 石火莫及이요 電光罔通이어늘 從上諸聖이 將什麽爲人고 仰山云, 和尙意作麽生고 潙山云, 但有言說이요 都無實義니라 仰山云, 不然이니다 潙山云, 子又作麽生고 仰山云, 官不容針이나 私通車馬니다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부싯돌의 불빛도 미칠 수 없고 번갯불도 통할 수 없는데 옛날부터 여러 성인들께서는 무엇으로 학인들을 지도하였는가?”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만 있을 뿐 전혀 실다운 뜻은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떤가?”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도 용납할 수 없지만 사적으로는 수레나 말까지도 통합니다.”
강의 ; 위산스님이 누군가. 이 말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일천 부처님과 일만 조사들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광석화(電光石火)도 그 신속함에는 미칠 수 없다는데 옛날 여러 성인들은 무엇으로 학인들을 지도하였는가?”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짱 거짓말이지.” “그것을 꼭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 말이 해당이 안 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눈을 뜨는데요[官不容針 私通車馬].” 위산스님이 사랑하는 제자 앙산스님에게 시험 삼아 물어 본 것인데 참으로 뜻밖에 좋은 말을 들었다. 그런 제자라면 마음을 놓을 수가 있다. 그래서 천하의 위앙종(潙仰宗)이 탄생한 것이다.
59-1 오늘은 운수가 나쁘다
到金牛하니 牛見師來하고 橫按拄杖하야 當門踞坐라 師以手로 敲拄杖三下하고 却歸堂中第一位坐하니라 牛下來見하야 乃問 夫賓主相見은 各具威儀어늘 上座從何而來관대 太無禮生고 師云, 老和尙은 道什麽오 牛擬開口어늘 師便打한대 牛作倒勢라 師又打하니 牛云, 今日不著便이로다
금우스님 계신 곳에 이르자, 금우스님이 임제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주장자를 가로 누인 체 문에 걸터앉아 있었다. 임제스님이 손으로 주장자를 세 번 두드리고 선방으로 들어가 첫 번째 자리에 앉으니 금우스님이 내려와 보고 물었다.
“손님과 주인이 만나면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데, 상좌는 어디서 왔기에 이다지도 무례한가?”
“노스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금우스님이 입을 열려는데 임제스님이 곧바로 후려쳤다.
금우스님이 넘어지는 시늉을 하는데 임제스님이 또 치니 금우스님이 말하였다.
“오늘은 운수가 나쁘다.”
강의 ; 정말 재수 없는 날이다. 젊은 선객 임제를 한번 점검하려다가 객승에게 인사도 받지 못하고 선방의 제1위 자리만 빼앗겼다. 사람 앞에 주장자를 가로 누인 것은 높고 험준하여 측량할 길이 없는 조사관문을 뜻한다. 임제는 그 관문을 주장자를 세 번 쳐 보이는 것으로 넘어버렸다. 금우스님은 또 인사하지 않은 것을 따지다가 한 대 얻어맞기만 했다. 넘어지는 시늉을 하다가 또 한 대 얻어맞았다. 이런 것을 “의기(意氣)가 있는 데 의기를 더하고 풍류가 없는 곳에 풍류를 보인다.” 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영 재수 없는 날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묘한 여운이 있다. 진흙 속에 가시가 있다. 언중유골이다.
59-2 다 이기고 다 졌다
潙山問仰山호되 此二尊宿이 還有勝負也無아 仰山云, 勝卽總勝이요 負卽總負니라
위산스님이 앙산스님에게 물었다.
“이 두 큰스님 중에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느냐?”
“이겼다면 다 이겼고, 졌다면 다 졌습니다.”
강의 ; 또다시 위산스님과 앙산스님의 재점검이다. 앙산스님은 언제나 상식적이고 평범하다. 그러나 온갖 골짜기의 물을 다 받아드리는 큰 바다다. 그래서 대 종장이 됐다. 물론 사람마다 독특한 가풍이 있지만 이렇게 앙산스님과 같이 포용력이 넘치는 큰 바다 같은 사람이 편하고 좋다.
눈 밝은 선지식들이 하는 일인데 이겨도 좋고 져도 좋다. 법을 거량하는 전쟁이라면 본래로 우열이 없다. 우열이 있으면 그것은 법의 전쟁이 아니다.
60 임제스님이 열반할 때
師臨遷化時에 據坐云, 吾滅後에 不得滅却吾正法眼藏이어다 三聖出云, 爭敢滅却和尙正法眼藏이닛고 師云, 已後有人問儞하면 向他道什麽오 三聖便喝한대 師云, 誰知吾正法眼藏이 向這瞎驢邊滅却고 言訖에 端然示寂하니라
임제스님이 열반하실 때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하였다.
“내가 가고 난 다음에 나의 정법안장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여라.”
삼성스님이 나와서 사뢰었다.
“어찌 감히 큰스님의 정법안장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이후에 누가 그대에게 물으면 무어라고 말해 주겠느냐?”
삼성스님이 “할!”을 하므로 임제스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정법안장이 이 눈 먼 나귀한테서 없어질 줄 누가 알겠는가?”
말을 마치시고 단정하게 앉으신 채 열반을 보이셨다.
강의 ; 삼성스님은 임제스님의 근본 종지며 가풍인 “할!”을 한번하고는 눈 먼 나귀라고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정법안장이 그대의 손에서 사라지리라고 수기를 받았다. 삼성스님이 이 어록을 모아서 편찬하였다. 그로인해 임제가풍은 천년세월이 넘도록 온 천하를 뒤덮었다. 불교에 안목이 조금만 있어도 임제스님의 법을 이은 후손이라고 자랑이다. 임제스님을 모르면 불교를 안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스님 모든 불자가 전부 임제스님의 사상을 이어받은 법손이다. 망승(亡僧)의 축원은 필히 “속히 사바세계에 다시 오시어 임제문중에서 길이 인천의 안목이 되소서.”라고 한다. 이런 사실이 “나의 정법안장이 눈 먼 나귀에게서 사라지리라.”라는 뜻이다. 이쯤 되면 임제스님의 말뜻을 어록이 다 끝난 지금에 와서 조금은 짐작하리라.
대혜(大慧)스님이 게송을 남겼다.
瞎驢一跳衆皆驚 正法那堪付與人 三要三玄俱喪失 堂堂擺手出重城
눈 먼 당나귀가 한번 날뛰니 수많은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는데
정법안장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으랴.
삼요와 삼현을 모두 잃어버리고
겹겹의 성문을 당당하게 손을 털고 나오더라.
백운(白雲)스님이 또 게송을 남겼다.
劈破泰山雷未猛 照開滄海月非光 瞎驢滅却正法眼 直得哀鳴滿大唐
태산을 쪼개는 우레도 맹렬하지 못하고
창해를 뚫고 비추는 달도 빛이 아니다.
눈 먼 나귀에게서 정법안장이 사라짐이여
슬피 우는 울음소리 천하에 가득 하네
양무위(楊無爲)가 또 게송을 남겼다.
正法眼藏 瞎驢邊滅 黃蘗老婆 大愚饒舌
정법안장은
눈 먼 나귀에게서 사라지고
황벽스님은 자비스런 노파요
대우스님은 말 재주 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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