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기우제는 잦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음력 4월에서 7월 사이는 기우제가 연중행사처럼 거행되었다. 한 예로 태종(太宗) 재위 18년간 기우제의 기록이 없는 해는 1403년(태종 3년) 한 해 뿐이다. 나머지 17년간은 매년 2~3회씩, 1416년 한해에는 무려 9회의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보인다. 한편 같은 18년간 6회의 기청제(祈晴祭)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장마철인 6~7월 사이에 행해진 것이었다.
이렇게 나라에서 지내던 기우제 중에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 12제차(祭次)가 있어서 각 명산, 큰강, 종묘사직, 북교(北郊)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 12제차는 가뭄의 정도에 따라서 5월에 1차, 6월에 2차를 지내기도 하고, 5월에 5차까지, 6월에 8차까지 하기도 하고, 심하면 4월에 10차까지 하고 5월에 12차까지 다 끝내는 때도 있었다. 이러한 국행기우제에는 대신들을 제관으로 파견하였다. 그 밖의 고려시대 이래의 취무도우도 많았고, 승려나 장님들을 절에 모아서 비가 내리기를 비는 기록들도 있다. 한편 민간이나 지방관청에서도 기우제는 다양하였다.
동제(洞祭)를 지낼 때와 같이 제관들을 선출하고, 소머리나 돼지머리, 닭, 술, 과일, 포, 식혜 등의 제물을 차리고 강신(降神), 헌주(獻酒), 독축(讀祝), 음복(飮福) 등의 절차를 지낸다. 그밖에도 기우제 나름의 독특한 방법들이 많았다.
수많은 기우제의 일부 기록을 모아 전한 것의 대표로는 「기우제등록」을 들 수 있다. 「규장각도서」(奎章閣圖書)로 보관되어 있는 이 책은 1636년(인조 14년)부터 1889년(고종 26년)까지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낸 기록을 수록한 것으로 예조에서 편찬 · 간행하였다. 기우제에 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장마 때의 기청제(祈晴祭)에 관한 기록, 수표(水標) 및 측우기로 관측한 기록, 지방의 기우제에 필요한 향 · 축문 · 악기 등을 내려보낸 기록 등도 실려 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으면 그에 대해서도 제사를 지냈는데 기설제(祈雪祭)라 하였다. 비가 많이 내리고도 그치지 않을 경우에는 기청제도 지냈는데, 이를 영제라고도 부른다.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 숙청문에서 사흘 동안 지냈는데, 그리고도 개이지 않으면 다시 4대문에서 반복한다. 이런 제사에 대해 효험이 있었다고 판단되면 그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보사제(報謝祭)를 지낸 일도 있다.
결국 우리가 오늘날 과학이라고 말하는 범위에서는 다소 동떨어진 면이 있는 채로 측우기와 수표, 풍기대 등이 만들어져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홍수와 가뭄, 특히 이상기후에 관한 기록이 아주 많아서 기상학 연구에 열심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과 똑같은 뜻에서의 기상학이라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당시 널리 받아들여졌던 미신적인 생각과 연계된 기상학적 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많은 기록을 남기고 세계에서 가장 먼저 측우기를 발명하였다는 사실은 우리의 자랑스런 과학 유산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