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인규 權仁圭 (1843 ~ 1899)】 "子 권종해(權鍾海) 孫 권기수(權基洙) 3대 의병운동에 투신"
1843년 7월 12일 강원도 강릉(江陵)의 초당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헌규(獻圭), 자는 경행(景行)이며, 호는 동빈(東濱), 소운(巢雲), 또는 소은(巢隱)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추밀공파에 해당한다. 생부는 사비(思珌)였으나 동생인 극(極)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동몽교관을 제수받았으나 향리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유학자로서의 삶을 영위하였다.
1894년 8월 중순경 동학농민군이 기포하여 9월 4일 강릉부를 점령하였다. 다음 날 동학농민군은 강릉부 관아에 ‘보국안민’의 깃발을 내걸고 요호와 향리들을 체포하여 토지와 재산을 빼앗았으며, 9월 6일에는 강릉부 최대 지주 이회원(李會源) 집인 선교장(仙橋莊)을 공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회원은 동학농민군에게 백미 100말과 돈 300꾸러미를 보내 경계를 풀게 하고, 한편으로는 각지에 연락하여 민보군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민보군은 9월 7일 동학농민군을 급습하였다. 농민군은 20여 명의 시체를 남기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 쪽으로 퇴각하였다. 이회원은 이어 ‘영동구군대도호사 겸 관동26읍소모사’가 되어 이진석을 도총에, 이영찬(李永燦)을 대장(隊長)에 임명하고 박동의를 종사로 삼아 봉평·대화·평창 등 강원도 일대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다. 이회원의 통지를 받고 민보군에 참여하여 주로 문서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실천적인 삶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직후 전개된 의병 투쟁으로 이어진다. 일본에 의해 을미사변이 자행되고 단발령이 공포되는 사태를 보고 비록 나이 들고 병든 몸이지만 목숨 바쳐 일본을 물리칠 것을 맹세하였다. 거의 논리는 철저한 위정척사론에 기반하고 있다.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붙잡는 ‘척사부정(斥邪扶正)’의 행위로 보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키는 행위는 의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의병에 참여할 것으로 호소하였다.
민용호(閔龍鎬)의 관동창의진(關東倡義陣)에 참여하여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을 발표하여 민용호 의병부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여주 출신인 민용호는 단발령이 내려진 직후 여주를 떠나 1895년 12월 1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송형순(宋炯淳)·이병채(李秉埰) 등과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민용호는 평창의 방림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인근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12월 18일 강릉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도사 이승학(李承學) 등 강릉의 토착 세력에게 군무첩을 내려 이들을 의병에 편입시켰다. 민용호 부대에서 주로 격문 또는 포고문 등의 문서를 작성하여 의병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민용호와 만난 것은 강릉에 들어온 직후로, 만난 후에 큰 기대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용호 의병부대에서 나온 후 12월 말에 독자적으로 「창의포고문」을 작성하여 민용호 의병부대인 ‘관동9군도창의소’가 설치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의병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포고문에서 일본을 임진왜란의 원수이며, 국모를 시해한 ‘섬오랑캐’라면서 철저한 척왜론적 인식을 견지하였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원수를 갚지도 못하였는데 또 고개를 숙이고 단발령과 같은 그들의 정책을 따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혔다.
1896년 설을 쇠고 민용호 부대에 다시 참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관서와 관북 지역의 사민들에게 의병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창의통문」을 작성하였다. 여기에서 강릉 지역에 의병도창의소가 창설되었음을 알리고, 관북은 이성계가 왕업의 기초를 닦은 곳이요, 관서는 기자의 첫 교화를 받은 곳이라면서 이 난세를 당하여 한 번 죽어 대의를 이룰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각 항구에서 일본에 붙어서 생활하는 자들에게 「효유문」을 발표하였다. 이 효유문에서 “우리 땅에 머물러 있는 왜놈은 종자도 없이 모조리 없애야 한다” 또는 “소위 우리나라 대신으로 왜놈의 심복이 된 자와 수령들로 백성을 협박하여 머리를 깎게 하는 자는 용서 없이 처단해야 한다”라면서 일제에 협력한 개화파를 철저히 처단해야 할 것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의병이 거리에 넘치고 있으며, 의병이 가는 길에 일제와 붙어 협력하는 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경고하였다. 이어서 의병에 합세하여 일제를 격퇴하는 데 합력할 것을 부르짖었다.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의리로 미루어나갈 것, 사람을 쓰는데 반드시 심지가 깨끗하고 충의가 돈독한 자를 택하여 소임을 맡길 것, 이욕(利慾)을 영위하는 협잡배는 일체 쓰지 말 것, 재정을 마련하는 데 공정한 마음으로 경중을 헤아리고 우열을 따지며 사의(私意)로써 후박(厚薄)을 두지 말 것과 같은 방책을 제시하여 의리에 입각한 의병 정신에 따라 의병 투쟁을 지도해 나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민용호 부대는 원산의 선평장전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의병 활동은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아들 권종해(權鍾海, 1869-1922, 호; 惺坡, 자; 宣明, 이명; 周成)는 1907년 후기 의병기에 강릉에서 거의한 후 원주에서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1908년 2월부터는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3월에는 백담사전투에서 큰 공을 수립하였으며, 이후 인제의 운두령전투와 정선의 단림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강년을 체포한 직후인 6월 6일 권종해의 집을 습격하여 모친 경주 김씨를 살해하고 둘째아들 증수(曾洙)의 복부를 총검으로 찌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권종해는 이후에도 강원도 양양에서 활동하는 등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으며, 국망 후에는 중국 동북 지역으로 망명하여 의군부에 가입하여 유격장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정만교와 귀국하여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원도와 충북 일대를 잠행하면서 무력 항쟁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197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권종해의 장자인 권기수(權基洙, 1894-1922, 호; 靑溪, 자; 聖厚)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영월·평창·정선 일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으며,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1922년 순국하였다.
‘예안(禮安) 창의소에 답한 통문’, ‘창의 포고문’, ‘창의 통문’, ‘관동 창의소 포유문’, ‘관동 창의사 효유문’, ‘서고문’ 등과 서간문인 ‘의병장 민용호에게 보낸 편지’와 ‘유진장 이병채에게 보낸 편지’ 등 의병 활동 당시 작성한 문서들이 문집인 『소은창의록』에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