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독립문 준공 ← 독립협회는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영은문(왼쪽)의 석조기둥을 제외한 나머지를 헐어버리고 바로 그 뒤에 독립문을 세웠다. 1897년 11월 20일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따 독립협회가 서대문구 현저동에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협회는 한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사적 32호로 지정된 독립문의 창건당시 면적은2,800㎡였다. 현재면적은 2,640㎡이다.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서재필이 독립문의 윤각을 스케치한 것을 바탕으로 설계를 담당했고, 토목·건축공사는 심의석이 담당했다. 중국인 노무자가 노역을 맡았으며 공사비는 기부금으로 해결했다. 독립문은 중앙에 14.28m, 너비 11.48m의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왼쪽 내부에서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 앞은 영은문의 주추였던 돌기둥이 두 개 있다. 문의 주재료는 화강암이다. 1978년 성산대로 건설로 인해 원래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서 80m정도 북서쪽으로 이동해서 복원시켜 놓은 것이 오늘날의 독립문이다./조선
[1910년] 톨스토이 사망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문학을 대표하는 톨스토이가 1910년 11월 20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 가정의 계속된 불화를 못이겨 방랑 여행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병을 얻어 이날 아스타포보역의 역장 관사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톨스토이는 1828년 남러시아 툴라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명문 백작가의 4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자랐다. 그는 1847년 대학교육에 실망을 느껴 카잔대학을 중퇴하고 향리로 돌아가 지주의 입장에서 영지내의 농민생활을 개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잠시 방탕생활에 빠지기도 했다. 1952년 복무중인 군에서 처녀작 ‘유년시대’를 익명으로 발표해 격찬받았으며, 1962년에는 소피아와 결혼하고 문학에 전념해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연이어 발표했다. 그는 러시아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 4,000여명의 미국이주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1899년에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부활’이다./조선
[1858년] 스웨덴 작가 라게를뢰프 Selma (Ottiliana Lovisa) Lagerlöf 출생 ← 라게를뢰프(1909) 1858년 11월 20일 태어남 / 1940년 3월 16일 죽음 라게를뢰프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여성이자 최초의 스웨덴 작가이다. 설화나 영웅담에 기초한 소설을 주로 썼다. 병으로 한동안 다리를 절었던 것을 제외하면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1885년에 란스크로나로 가서 교사가 되었고 그곳에서 첫번째 소설인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 Gosta Berlings saga>(2권, 1891)를 썼다. 이 소설은 고향인 베름란드의 부유한 제철소 주인과 소지주들의 생활상을 연대기적으로 다룬 작품으로서 1890년대 스웨덴 낭만주의 부흥운동에 기여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 시칠리아에 관한 사회주의적 소설인 <반(反) 그리스도의 기적 Antikrists mirakler>(1897)·<지주(地主) 이야기 En herrgardssagen>를 썼다. 1899~1900년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체류하던 중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예루살렘 Jerusalem>(2권, 1901~02)을 발표해 스웨덴 최고의 소설가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09년 노벨상을 수상한 뒤, 그 상금으로 아버지가 죽은 후 팔았던 모르바카의 저택을 되사서 정착했다. 현대 소설가 중 가장 재능있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28년] 한국의 대표적인 주연 여배우로 활약했던 영화배우 최은희 출생 대표작 :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선인장, 무영탑, 열녀문, 여자의 일생, 강화도령 자서전 : 최은희의 고백 “회한은 있어도 후회는 없는 삶이었다.” 배우 최은희가 영화에 바친 지난 70여년의 삶을 고백했다. 지난 10월9일, <최은희의 고백-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출간한 그녀는 이 책에서 두번에 걸친 납북과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 배우가 아닌 평범한 여성으로서 겪었던 상처들을 털어놓았다. 최은희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제까지 말하지 않았던 최은희의 진실한 고백으로, 지난날 나에 대한 억측들도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최은희의 고백…>은 1930년 11월9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어느 ‘속눈썹이 긴 여자아이’의 어린 시절로 시작한다. 남들처럼 평범한 여자로 살고 싶지 않았던 일제강점기의 여성이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시작하고, 영화계에 진출한 뒤 펼쳐지는 이야기는 한국의 근현대사와 맞닿아 있다. 생활고와 폭력의 상처만 남긴 첫 결혼, 인민군과 아군에 강간당했다는 헛소문을 뒤따르게 한 첫 번째 납북, 간통죄 1호라는 세상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허름한 여인숙에서 치른 신상옥 감독과의 결혼 이야기 등을 비롯해 유신체제하의 검열로 인한 한국영화의 추락을 경험한 이야기들이 담담한 어조로 드러난다. 특히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과 이별을 이야기하며 “신 감독이 오랜 세월 간직해온 대본이 있으니 누군가가 영화를 찍어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수상 : 2007년 앙드레김 베스트 스타 어워드 특별 공로상, 2006년 제5회 대한민국영화대상 공로상
[1910년] 멕시코 혁명 시작 ← 마데로(1910경) 1910년 11월 20일 멕시코의 반 디아스파 진영은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발표한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 날의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멕시코 전역에 혁명에 대한 기대가 불붙으며 멕시코 혁명의 서막을 열었다. 1911년 봄 마침내 마데로가 이끄는 혁명군이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대통령 7선을 저지하고 마데로는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마데로는 지나친 이상주의로 인해 멕시코 통치에 실패하고 암살당했다. 그뒤 디아스의 측근인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광기어린 전제적 통치를 펼치자 1914년 혁명군은 우에르타를 외국으로 쫓아냈다. 혁명군의 합의 없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자 혁명 세력은 다시금 반란을 일으켰고 카란사는 결국 1920년 철도 노동자 파업을 강제 진압하다 살해되었다. 11월 알바라 오브레곤이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혁명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그뒤에도 연방군과 반란 세력 사이에 폭력과 마찰이 계속되다가, 마침내 1934년 개혁주의자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혁명이 마무리되었다./브리태니커.
[1905년]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사진은 1898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은 자신이 발행하던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개탄하고 무효를 주장하는 글을 실어 서울에 배포했다. 장지연은 신문 2면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하에 논설을 싣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침략의 앞잡이로, 을사오적을 '매국의 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이 조약은 고종황제가 승인을 거부했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또한 기사를 통해 조약을 강제 체결하게 된 정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 비분강개의 논설이 실린 <황성신문>은 평소보다 많은 1만 부가 인쇄되어 서울에 배포되었고, 신문이 배포되자마자 장지연과 신문사 직원 10명이 경무청에 체포되었으며 신문에 대해서는 무기정간령이 내려졌다.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1일자 논설에서 <황성신문>과 장지연을 찬양한 반면 <제국신문>은 '과격한 논설로 나가면 탄압을 받아 신문 없는 사회가 될 것이므로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는 자중의 자세를 취했다. 장지연은 체포된 후 태형을 선고받았으나 1906년 1월 24일 석방되었고, <황성신문>은 같은 해 2월 2일자부터 속간되었다.
[1898년] 건축가 박길룡 출생 1898. 11. 20 서울~1943. 4. 27 서울. 호는 일송(一松). 한국 근대건축의 기틀을 잡았다. 음악평론가 박용구가 그의 장남이다. 1919년 이기인(李起寅)과 함께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경성제국대학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를 2회로 졸업했다. 1920년 12월에 조선총독부 기수로 들어가 1932년 박길룡 건축사무소를 개설하여 그의 이름을 건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일어났던 한인(韓人) 상업자본가의 건축 붐에 따라 한청 빌딩(1935)·화신백화점(1937), 이문당사옥 등의 상업 건물과 경성여자상업고등학교(1937) 등의 학교건물도 지었다. 그밖에도 활발한 건축 활동을 하여 한인 건축가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38년에는 일본인이 중심인 조선건축학회 이사를 지내기도 하며 한국 근대 건축계를 이끌었다. 조선총독부에 재직할 때부터 주택 건축에도 관심을 가져 개인주거건축을 지었으며, 민가·주택개량·소주택·서민주택에 관해 꾸준히 탐구하여 신문·잡지에 〈소액 수입자 주택〉·〈재래식 온돌의 구조〉·〈조선주택잡감〉 등의 계몽적인 글을 발표하기도 하고 〈재래식 주거 개선에 대하여〉(제1,2편, 1937)·〈조선식 온돌 개량에 대하여〉 같은 책을 냈으며 1942년에는 〈건축 조선〉이라는 국문·일문 혼합의 신문 체재 잡지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의 상업건축물에서는 건축의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볼 수 있으며 주거 공간에 관한 관심에서는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건축 양식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DMZ 장단역 증기기관차 화통이 파주시 임진각으로 옮겨짐 ‘철마는 달리고 싶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비무장지대의 장단역 증기기관차 화통이 파주시 임진각으로 옮겨진 2006년 11월20일 기억하십니까? 그리고 2007년 5월 17일 그토록 달리고 싶어 했던 철마가 긴-기적 소리를 울리며 민족의 염원을 싣고 '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의 첫걸음을 바로 통일의 관문인 파주시 문산역에서 출발하는 모습을 지켜 본 파주 시민들의 감회는 남달랐습니다. 멈춰 선 철마(鐵馬)조차 더 이상 버티고 서 있기 힘겨울 정도로 오랜 56년의 분단 세월동안 이제 노신사가 되어버린 문산에서 태어나 문산에서 자란 이덕호씨는 강 건너 도라산 건너편이 바로 아버지 어머님의 고향이라 소개하며, 항상 건너다보시고 가고 싶어 하실 때도 가시지 못하신 어머님의 살아생전 모습을 떠올리며 이번 일(남북철도연결구간 열차시험운행)을 통해서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애절한 바람은 비단 이덕호씨 한사람만의 소망은 아닐 것입니다. /pajubs.com (사진) 20일 오전 경기도 파주군 비무장지대 옛 장단역 구내에 심하게 녹슨 증기기관차 화통이 전진부대 통제속에서 임진각 보존처리장으로 옮겨지기 위해 대형 크레인과 트레일러로 운반되고 있다. /김병만/문화/ 2006.11.20 (파주=연합뉴스) /연합뉴스 http://www.junjin.net
[2000년] 인천국제공항을 잇는 영종대교 개통 인천 국제공항의 명물, 영종대교가 2000년 11월 20일 개통했다. 영종도와 인천 육지부를 연결하는 총 연장 4천4백20m, 주탑 높이 107m, 교각수 49개의 2층 다리인 영종대교는, 위층은 6차선 도로로 아래층은 4차선 도로와 복선 철도가 지나는 세계 최대의 통행능력을 자랑한다. 케이블이 다리의 하중을 지탱하는 현수교 방식으로 건설된 영종대교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최초로 2000m 이상의 현수교에 3차원 형상의 케이블이 적용됐다는 점이다. 3차원 케이블이란 기존 현수교가 다리 상판 좌우에서 서로 평행한 2개의 케이블로 연결하는 것과는 달리 평행하던 케이블이 주탑 꼭대기에서는 거의 붙었다가 다시 상판쪽에서는 벌어지는 것을 말한다. 상판을 지탱하는 별도의 구조물이 없는 만큼 주 케이블에는 지름 5.1㎜의 케이블 6,720가닥이 들어갔고, 케이블과 상판을 지탱하는 180개의 로프는 압력과 각도를 각각 달리 했다. 30m 바닷속까지 파고 들어가야 하는 주탑의 기초작업을 위해 국내처음으로 ‘뉴메틱케이슨’이라는 무인굴착방식을 동원했다. 진도 6의 지진과 초속 65m의 강풍에도 100년 이상 견디도록 설계된 영종대교는 주위의 바다경관과 어울리는 미적 감각을 살리기 위해 다리모양을 우리나라의 전통적 기와지붕의 처마곡선을 본떠 만들었으며 주탑의 모양을 마름모꼴로 하여 전체적인 외관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영종대교의 또 다른 절경은 춘하추동 사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변하는 야경이다. 주탑주변과 현수교 구간에 설치된 322개의 색채조명등을 통해 봄에는 녹색, 여름에는 흰색, 가을에는 노란색, 겨울에는 붉은색으로 매일 일몰직후부터 다음날 일출직전까지 밤바다를 밝혀준다. /조선
[1991년] 마케도니아 독립 1912년 제1차 발칸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가 패배하고 1913년 제2차 발칸전쟁에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세르비아·불가리아 3국으로 분할되었다. 1918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이 성립되어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고사회주의 정권하에서 마케도니아인이 처음으로 민족으로 인정받아 스스로 공화국을 형성하여 구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 내의 1개 공화국이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마케도니아공화국은 제2차 발칸전쟁 후 세르비아에 속했던 지역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1991년 유고연방의 붕괴 이후 독립국가로 되었다. /naver
[1962년] 케네디 미국 대통령, 쿠바 해상봉쇄 해제 선언 1959년 수립된 쿠바의 혁명정부에 대하여 미국은 1961년 4월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에 의한 쿠바 반(反)혁명군의 침공작전을 시작하고, 미주기구(OAS)로부터의 쿠바 축출, 미국 해 ·공군의 영해 ·영공 침범 등 군사 ·외교압력을 가하였다. 이런 속에서 쿠바는 1962년 9월 ‘소련-쿠바무기원조협정’을 체결하여 소련의 미사일을 도입하였다. 미국은 그 해 10월 14일 중거리탄도미사일의 발사대가 쿠바에 건설 중임을 공중촬영으로 확인하였다. 22일 미국 대통령 J.F.케네디는 텔레비전 전국방영을 통하여 처음으로 “소련은 서반구에 대하여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기지를 쿠바에 건설 중”이라고 공포하고, 쿠바에 대하여 해상봉쇄조치를 취하였다. 케네디는 소련의 N.S.흐루시초프 서기장에 국제연합의 감시하에 공격용 무기를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전세계의 긴박감 속에서 소련은 26일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한다면 미사일을 철거하겠다는 뜻을 미국에 전달하고, 27일 쿠바의 소련 미사일기지와 터키의 미국 미사일기지의 상호철수를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27일의 제안을 무시하고, 26일의 제안을 수락할 것을 결정하였다. 28일 흐루시초프는 미사일의 철거를 명령하고 쿠바로 향하던 16척의 소련선단(船團)의 방향을 소련으로 돌림으로써 11월 2일 위기는 사라졌다. 소련이 쿠바로부터의 폭격기 철거에 동의한 20일 미국은 해상봉쇄를 풀었으며, 12월 7일 소련은 공격용 무기를 쿠바로부터 철거하였음을 미국에 통고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63년 미 · 소 간에 핫라인(hot line:긴급통신연락선)이 개설되었고, 핵전쟁 회피라는 공통의 과제하에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모스크바조약)’이 체결되었다. /naver
[1959년] 서구 7개국 유럽자유무역연합(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 EFTA) 결성 가조인 OEEC(유럽경제협력기구) 회원국들은 EEC(유럽경제공동체) 비가맹국들을 포함하는 자유무역권을 설정하고 유럽 지역의 경제공동체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으나, 1958년 11월 협상이 결렬되었다. 그후 1959년 11월 스톡홀름협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1960년 5월에 영국·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스위스·오스트리아·포르투갈 7개국의 합의로 자유무역지역을 결성하였다. 당시 핀란드는 준가맹국이었다. 1970년 3월 아이슬란드가 가맹하였으나 1973년 1월 영국과 덴마크가 EC에 가입하면서 탈퇴하였다. 1986년에는 포르투갈이 가입하였다. 이 기구는 유럽 전체를 결집하는 자유무역지역 설립의 구상이 깨진 뒤 영국이 중심이 되어 EEC에 대항하여 결성한 것이며 각 회원국은 비회원국보다 독자적인 통상정책을 구성한다. 행정기구에는 매년 2회 여는 장관급 회담과 격주간 여는 실무자급 회의가 있다. 결정사항들은 각국 정부들이 자발적으로 이행하며 EFTA가 권한을 행사하지는 않는다. /naver
[1889년] 천문학자 허블(Hubble, Edwin Powell, 1889~1953) 출생 몬태나주(州) 마시필드 출생. 시카고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1910), 옥스퍼드대학교에 진학하였다(1910∼1913). 처음에는 변호사로 일하였으나 천문학에 흥미를 느껴, 1914년부터 여키스천문대에서 천체관측에 몰두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9년 윌슨산천문대의 연구원이 되었다. 지름 252cm 망원경으로 성운을 관찰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1920년대 초에 소용돌이성운 속에서 세페이드변광성(變光星)을 발견하고, 주기광도(週期光度) 관계를 기초로 하여 그 거리를 측정한 결과, 모두 은하계 밖에 있는 것임을 확인하고, 소용돌이성운이 외부은하임을 입증하였다. 1925년 은하계 밖의 은하에 대한 총괄적인 연구를 시작하여 모양에 따른 분류를 시도하였다. 1929년 은하들의 스펙트럼선에 나타나는 적색이동(赤色移動)을 시선속도(視線速度)라고 해석하고, 후퇴속도(後退速度)가 은하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허블의 법칙’을 발견하여 우주팽창설에 대한 기초를 세웠다. 1948년 팔로마산천문대에 지름 500cm 반사망원경이 설치되자, 본격적으로 우주탐사에 열중하였다. /naver
[1864년] 독립운동가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출생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영어명은 제이슨(P.Jason)이다. 전라남도 보성(寶城)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判書) 김성근(金聲根)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殿講)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 18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뒤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操鍊局)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洪英植)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명성왕후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 등과 독립협회(獨立協會)를 결성하고 모화관(慕華館)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守舊派)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인친우회(Friend of Korean)를 조직, 재미교포들을 결속하여 독립운동후원회를 만들었다. 그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美軍政廳顧問)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naver
[1894년]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루빈스타인(Rubinstein, Anton Grigoryevich, 1829~1894) 사망 829. 11. 28(구력 11. 16) 러시아 포돌리아 비흐바티네츠~1894. 11. 20(구력 11. 8) 페테르호프. 몰도바 베사라비아 비흐바티네츠에서 출생하였다. 모스크바로 이주, 그곳에 살았다. 5세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후에 A.빌루앵의 지도를 받았으며 1840년에는 파리에서 리스트에게 사사, 영국 ·독일 등지를 연주여행하면서, 당시 리스트에 버금가는 신동(神童)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 후 궁정악장이 되고, 1859년 왕실과 상류귀족의 후원으로 왕실 러시아 악우협회(樂友協會)를 설립, 그 지부의 확대를 꾀하는 동시에 러시아인들에게 유럽음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1860년에는 동생 니콜라이에 의하여 모스크바 지부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1862년 러시아에서 최초로 조직적인 음악교육기관인 페테르부르크음악원을 설립, 그 원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차이코프스키가 첫 제자의 한 사람으로 배출되었다. 루빈스타인은 러시아음악의 아카데미즘을 확립한 음악가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로서 활약하였으나, 작곡에서는 독일낭만파의 영향 아래 절충적인 경향을 풍겨 국민악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오페라 《악마》《네로》 외에, 6곡의 교향곡, 5곡의 피아노협주곡과 실내악곡, 피아노독주곡 《천사의 꿈》《f조의 선율》《페테르부르크의 야회》, 가곡 《그대는 꽃과 같이》《페르시아의 노래》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naver
그밖에 2002년 북한경비정, NLL(북방한계선) 침범 2001년 덴마크 총선, 70여년 만에 우파승리 1998년 클린턴 미국 대통령 방한, 김대중 대통령과 대북정책 집중 논의 1997년 북한 일본인 처 고향방문 1994년 남산 외인아파트 철거 1994년 앙골라 19년 간의 내전 종식 1992년 태평양 해저케이블(TPC4) 개통 1992년 한국-우즈베키스탄, 무역협정-투자보장협정-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91년 우편물 차량배달제 시행 1985년 MS윈도우 1.01리테일 버전 출시 1983년 미 ABC-TV, 핵공포 가상영화 ‘그날 이후’ 방영 1982년 박상은 살해용의자 정재파, 대법원서 무죄선고 1980년 정부, 공직자 재산등록제 및 사기앙양 종합대책 발표 1975년 프랑코 스페인 총통 사망 1975년 대구 서문시장에 화재. 천팔백여 점포 전소 1970년 유엔총회, 중국대표권 문제 중요사항으로 채택 1969년 펠레 900경기 만에 1,000골 달성 1967년 여야전권회담 성공, 합의의정서 발표 1966년 충남선 (논산-부여 간 24km) 기공 1963년 유엔총회, 인종차별철폐 선언을 채택 1961년 케네디-아데나워 서독수상 회담 1954년 미 8군사령부 일본으로 이동 1952년 이탈리아 철학자 베네데토 크로체 사망 1948년 국가보안법 통과 1947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결혼 1945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개정 1942년 일본, 조선징병제도실험요강 결정 1922년 연합국-터키 간의 제1차 로잔회의 개최 1918년 미주교포단체, 미대통령 윌슨에게 독립요망진정서 제출 1894년 러시아의 작곡가 루빈스타인 사망 1878년 아프가니스탄과 영국의 제2차 아프간전쟁 시작 1873년 프랑스군, 하노이 점령 1815년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4국동맹 맺음 1737년 영국 왕비 캐롤라인 사망 1602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폰 게리케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