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Phnom Penh Post 2012-3-16 (번역) 크메르의 세계
캄보디아 현대사의 최고 대가 벤 키어난 : 크메르루주 국제재판 출석을 거부하는가
KR historian won’t make trip
기사작성 : Bridget Di Certo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국제법정'(ECCC)의 검사들이 어제(3.15) 법정에서 진술힌 바에 따르면,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에 대한 연구와 방대한 저술로 학술상까지 받은 역사가가 당시 발생한 '대량학살'의 가해자로 고발된 이들을 고발하는 이 재판에서 증언하는 것에 대해, 너무 바빠서 출석할 수 없다고 한다.
저술가이기도 한 미국 '예일대학'의 벤 키어난(Ben Kiernan: 사진) 교수는 지난 40년간 캄보디아와 크메르루주 정권을 연구해온 인물이다. ECCC 검사들은 그가 너무 바빠서 2013년의 어느 시기까지는 이 국제법정에 출두할 수 없다고 밝혔다. 빈센트 드 빌데(Vincent de Wilde) 부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법정에 대해 그가 비디오 연결을 통해 증언할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화상 연결 아니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
하지만 변호인단은 키어난 교수가 법정에 출두해서 증언을 할 수 없는 불가항력성에 대해, 그 진실성을 의심했다. 그메르루주 정권의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이엥 사리(Ieng Sary) 피고인의 변호인인 미카엘 카나바스(Michael Karnavas)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이 신사분이 얼마나 완벽하게 시간을 못내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는 [예일대학에서] 강좌 2개를 맡고 있고, 그 강의일정은 이미 온라인 상에도 공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여름학기에는 어떠한 강의 의무도 갖고 있지 않다. 문제는 키어난 교수가 여기에 올 [자발적] 의향이 있는가 하는 점이지, 그가 여기에 올 수 있는 상황인가 하는 점이 아니다. |
키어난 교수가 최초로 캄보디아를 방문한 것은 크메르루주 정권이 캄보디아에서 외국인들을 강제로 내쫒은 1975년 이전으로서, 새롭게 출현하고 있던 공산당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그는 '태국 내 난민캠프들'로 가서, 이후 십여년 이상 크메르루주 정권기 및 붕괴 이후에 발생한 사건들에 관해 문서들을 수집하고 저서와 논문을 쓰는 등 방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브라더 넘버 투'로 유명한 누온 찌어(Nuon Chea) 피고인의 변호인인 미키엘 페스트만(Michiel Pestman)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그(=키어난)가 이 법정에 출두하려는 열정이 부족하다는 데 대해 실망했다." |
국가수반을 지낸 키우 삼판(Khieu Samphan) 피고인의 변호인인 안타 귀제(Anta Guisse) 변호사도 키어난 교수가 "일년 내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마찬가지로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 개인이 일년 내내 완벽하게 시간을 낼 수 없다는 점에 대해 약간은 혼란스럽다. (중략) 그는 캄보디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에 관해 40년 이상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곳은 이러한 사실들을 검증하기 위해 마련된 국제법정이다. 그런데 어떤 개인이 이러한 필요성에 맞춰 참석할 시간을 찾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몸소 이곳에 출석한다면 그것은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
하지만 검사측과 민간 당사자측은 키어난 교수가 화상 연결을 통해 하루 정도 진술하는 것으로도 족하다고 보았다.
역자 주 : <프놈펜포스트>는 모든 기사마다 독자들의 댓글 논평을 허용하고 있지만, 실제로 댓글이 달리는 경우는 매우 드문 편이다. 하지만 이 기사에는 중요한 댓글 논평이 1편 실려 있었다. 이 댓글 논평의 게시자는 자신의 실명을 밝히고 있는데, 그는 바로 나란끼리 띳(Naranhkiri Tith) 박사였다. 1933년생인 나란끼리 띳 박사는 존스 홉킨스 대학 국제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낸 국제경제 컨설턴트이며, 재미 캄보디아인 교포사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오피니언 리더이자 원로 지식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러한 비중을 고려하여, 나란끼리 띳 박사가 위의 기사에 단 댓글 논평도 번역하여 이하에서 함께 공개하였다. 벤 키어난 교수와 나란끼리 띳 박사에 대한 상세한 인물정보는 다음 게시물을 참조하기 바란다. [크세]
(바로가기) "[연구자 정보] 벤 키어난 교수 : 예일대학 캄보디아 학살 연구프로그램 책임자"
(바로가기) "[인물] 나란끼리 띳 박사 : 캄보디아 출신의 국제경제 컨설턴트" |

|
(사진: VOA) 나란끼리 띳 박사. |
[나란끼리 띳 박사의 댓글논평] (2012-3-17)
귀사(=프놈펜포스트)의 3월16일자 이 기사는 현재 진행 중인 크메르루주 국제재판의 본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기사이다. 이 국제재판은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정의를 실현시켜주는 재판이 아니라, 여러 불편부당한 업저버들의 입장에 따라 진행되는 하나의 쇼라는 점이다.
현재 크메르루주 국제재판의 주된 목적은 1979년에 베트남이 후원하여 진행되었던 크메르루주 고위 지도자들을 [궐석으로] 재판했던 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벤 키어난 및 그의 제자인 요욱 창(Youk Chhang)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C-Cam) 소장과 같은 사람들 덕분에,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이 해방의 임무로 변했고, 크메르루주 정권도 단순한 대량학살의 살인마들일 뿐만 아니라, 캄보디아인 외에도 짬족(Chams)이나 여타 소수민족들을 학살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란 함축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악마들을 악마화시키기"(demonize the demons)라고 부른다.
벤 키어난이 크메르루주 국제재판에 참석해서 증언하길 거부한 일의 이면에 있는 실제적인 요소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캄보디아의 비극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다음 2편의 논문을 읽어보길 권한다. 1편은 캄보디아인 학자인 에아 소팔(Ear Sophal)이 쓴 <양면을 지닌 연결의 한 측면: 베네딕트 키어난과 크메르루주>(One Side of the Two-Sided Switch: Benedict Kiernan and the Khmer Rouge)이고, 다른 1편은 호주인 학자 스테펜 모리스(Stephen Morris)가 쓴 <캄보디아 연구를 하기엔 맞지 않는 사람>(The Wrong Man to Investigate Cambodia)으로, 이 글은 벤 키어난의 경력과 과거 크메르루주 정권과의 연관성에 대해 쓴 글이다.
에아 소팔은 벤 키어난과 크메르루주와의 관련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렇다면, 벤 키어난은 현재 어떠한 노선에 서 있는가? 그는 1979년에 90도 다른 방향으로 연결되었다. (180도가 아니란 점을 기억하라.) 그는 크메르루주 정권으로부터 이제는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으로 전향한 것이다. PRK는 이전에 헹 삼린(Heng Samrin) 정권이라 불리다 현재는 훈센(Hun Sen) 정권으로 불리고 있고, 친-베트남적 성격을 지닌 정권이다. 하지만 키어난이 과거에 크메르루주 정권을 지지했던 것을 떨쳐버릴 수 있단 말인가? 더욱 밀고 나가자면, 그는 자신이 현재와 과거에 '맑스-레닌주의'(Marxism-Leninism)를 지지했던 것을 떨쳐버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는 '맑스-레닌주의'란 말 대신 '인도주의적 사회주의 이상들'(humanitarian Socialist ideals)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혁명들과 혁명가들에 대해 [자신의 과거와 단절할] 수 있단 말인가? |
한편, 스테펜 모리스도 동일한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 모든 것의 초기에, 벤 키어난은 캄보디아를 전공하는 호주인 대학원생이었다. 그리고 1975년 4월 그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 직후, 키어난은 크메르루주의 명목 상의 지도자에 대해 아첨하는 설명을 출판했다. 1975년 6월에 '디야슨 하우스'(Dyason House Papers)를 통해 발표한 논문 <키우 삼판: 캄보디아의 혁명 지도자>(Khieu Samphan, Cambodia's Revolutionary Leader)라는 글에서, 키어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 "키우 삼판의 인격, 특히 그의 겸허함, 준비된 미소, 단순한 습관 등은 크메르 농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자신이 농민의 아들이었고, 그의 행동은 마치 고행 수행자 같다는 말을 듣곤 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광적이지 않으며, 항상 고요한 사람이다." |
이 2편의 인용구들을 살펴보면, 어찌하여 키어난이 변호인단의 요청대로 크메르루주 국제재판에 출두하여 증언하려 하지 않는지 알 수 있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국제법정'(ECCC)이라 불리는 현재의 크메르루주 재판이 벤 키어난 및 그 제자인 요욱 창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제 그 스스로를 위한 쇼 같은 재판이 되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 나란끼리 띳이 워싱턴에서 2012년 3월 17일에 적다.
(Naranhkiri Tith Ph.D. Washington DC. March 17, 2012)
|
첫댓글 학문 세계에도 학문 정치라는 게 존재하죠..
아마도 캄보디아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세계를 통틀어도 극소수에 불과한데..
벤 키어난 교수는
미국 의회가 자금을 대는 '예일대 캄보디아 학살연구 프로그램'의 총 책임자이고,
유명한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C-Cam)도
실은 그 프로그램의 캄보디아 현지 설치 부설 프로그램이라서
사실상 벤 키어난 교수의 감독하에 있는 셈이죠..
그러니, 현재 캄보디아 연구학계에서
아마도 제도권 학자(교수, 박사 등등)라면
어느 누구도 키어난 교수와 등지긴 쉽지 않을 그런 위상을 지닌 것이죠..
더구나 좁은 물이니..
더욱 그렇겠죠..
그래서 과거에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
대부분의 저명 학자들과 제도권 연구자들은
키어난을 옹호하는 성명서에 서명을 했었죠..
하지만 그 성명서가 주창한 바가
의혹을 해명하는 내용은 아니었는데...
저는 일단 해당 부문에 대해 무식하니.. 논평을 할 입장은 못 되네요..
하지만, 우리가 계속 공부하고 관찰한 바에 따르면..
벤 키어난이 훈센 정권에 대해 비판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 것은
거의 분명해보입니다..
훈센 정권은 ..
현재 캄보디아 지역학을 하는 주요 학자들이나
양심적인 오피니언 리더들은 분명히 권위주의(=독재) 정권으로 보고 있는데..
키어난은 그 부분에 대해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점만큼은 저도 분명하게 비판하고 싶은 점이네요..
알만큼 아는 사람이
그런 데 눈을 감는 것 보면..
키어난의 학자로서의 자질 이전에..
교수로서의 행정능력..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상당히 "정치 교수"라는 건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미국식 정치 교수들은
자신의 동양인 제자들을 통해, 현지에도 또 짱을 박아 놓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요욱 창 소장이 되겠지요..
최근 중앙일보는 방한한 요욱 창 씨를
"캄보디아 최고의 양심"으로 극찬했던데..
우리가 아는 리카도 총재 여사님이나 무 소쿠 여사.
라오 몽 하이 박사님이나..
캄보디아 인권센터(CCHR)의 오우 위리어 소장보다
더 양심적인 것이란 의미인지 말이죠 ^ ^
하여간 키어난 교수가
훈센 정권을 비판하는 게 사정 상 좀 껄끄러우면,
캄보디아의 노동이나 인권 문제 정도는 거론했어야죠..
단 한번도 없단 말이죠..
그리고
나란끼리 띳 박사님도
입바른 소리 하는 데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노인이신데..
결국 댓글을 남기셨더군요..
최근에 미국의소리 방송에서 중요한 발언을 하셨는데
그것도 곧 번역할 예정입니다.
그건 그렇고
크메르루주 국제재판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더 별의 별 게 다 끌려나옵니다..
역사를 제대로 한번 복기할 수 있는
계기는 되는 셈이네요..
벤 키어난이라는 인물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캄보디아에 살면서도 참 무식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오해하면 안 될 것으로 생각되네요..
벤 키어난이 정치교수 성향이 강한 인물로 보이긴 합니다만..
실력없는 교수는 아니죠..
그의 연구목록이나, 기존에 우리에게 전해준 지식을 보면
양도 방대하고, 내용도 매우 촘촘합니다..
그 점에서 미국의 정치교수들은
표절, 중복게제 논란이 있는 일부 한국인 정치교수들과는 분명히 좀 다릅니다..
아카데믹한 측면에서 대체로 기본은 다 해주는 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