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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1-10)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네 인생, 항상 웃을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든지, 항상 좋은 일만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인하여, 아파할 수밖에 없고, 힘들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청주에, 며칠간 엄청난 비가 내렸습니다. 어제 토요일 아침, 밤새 안전 안내 문자가 시간마다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재난 방송을 시청하다가, 직접 무심천에 나가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삼킬듯한 강한 물줄기였습니다. 청주는 비교적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심천과 미호강의 범람으로, 많은 곳이 침수되고, 오송 지하차도가 물에 잠김으로, 너무나도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를 잃은 상실과 아픔을 무엇으로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신속한 사고 수습이 이루어지고,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준비가 있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올 여름에는 더 이상의 폭우도 내리지 않고, 폭염과 무더위도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덥기는 하겠지만, 무덥지 않고, 짧게, 올 여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보고자 하는 에스겔 37장은 항상 좋은 일을 경험할 수 있는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가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이품 소나무가 있는 속리산 입구에 가면,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가 있습니다. 그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릴 것 같은 그런 여유로움을 느낄 수가 있는 곳입니다.
옥천에 가면, 대청호의 아름다운 경관과 수생식물이 어우러지는 천상의 정원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수생식물학습원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다녀왔는데, 그곳 언덕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대청호와 계곡들을 내려다보면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여유를 누려 보았습니다. 가는 길이 꼬불꼬불해서, 좀 힘들긴 했지만, “잘 왔다”고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단양에 가면, 양방산 전망대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패러글라이딩 타는 곳입니다.
차로 올라가는 길은 아주 험하고 가파르지만, 그곳 정상에 올라가면, 단양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가 있습니다. 패러글라이딩을 타려고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곳 전망대에 올라가면 멋진 카페가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단양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커피 한 잔하려고 올라간 것이었는데, 힘들게 올라가 보니, 카페가 없었습니다. 커피는 못 마셨지만, 한 번 정도 올라 가볼만한 곳입니다. 자동차로 올라가면 안되고, 걸어서 올라가야 할 곳입니다. 올라갈 때는 올라가는 커브길이 아찔해서 위험하고, 내려올 때는 가파라서, 타이어 불타버릴 정도입니다. 15인승 쏠라티로 올라갔다 왔는데, 수리비가 엄청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도, 걸어서라도, 한번 정도는 올라갈 볼만한 멋진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등장하는 골짜기는 가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그런 곳입니다. 마른 뼈가 가득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화려한 왕궁이나, 멋진 장소가 아니라, 마른 뼈가 가득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에스겔이 찾아간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였습니다. 그곳에는 마른 뼈들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골짜기는 어두움의 골짜기였습니다. 사람들의 관심도 없고, 사랑도 없는 버려진 골짜기였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여유롭게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주변의 풍경을 둘러볼 수 있고, 인생 사진 한 장을 남길 수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들판이 아니라, 마른 뼈들만이 뒹구는, 죽음이 가득한 음침한 골짜기로, 하나님은 에스겔을 왜 데리고 가셨을까요? 궁궐이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도시의 거리로 인도하시지 않고, 왜, 마른 뼈가 가득한 절망의 골짜기로 인도하셨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널려 있는 마른 뼈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른 뼈”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선택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사 49:16)고 하신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여 주신 가나안 땅이 아닌 머나먼 바벨론 땅에 있습니다. 그들이 자원해서 그곳에 간 것이 아닙니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노예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나라도 망했습니다. 한평생 살아왔던 집도 불타버렸습니다. 삶의 터전이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머나먼 타국에 끌려와 평생을 노예로 힘든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일도 없고, 소망도 없고, 오직 죽음과 같은 어두운 삶만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98년 여름, 동두천에서 사역할 때, 연천의 한탄강이 범람하여, 그 아래에 있는 동두천 시내가 물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청년들과 함께 동해로 3박 4일간 여름 수련회를 갔다가 밤늦게 동두천으로 돌아왔는데, 동두천 시내가 물바다가 되어, 들어갈 수가 없어, 외곽에 있는 권사님 집에서, 청년들과 함께 하룻밤을 뜬눈으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도 물에 잠기고, 성도들의 집도, 가게도 모두 물에 잠겨 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물이 빠지고 난 뒤부터, 장화 신고, 삽 들고, 물에 잠긴 성도들의 집을 방문하여, 진흙을 치우고, 쓸만한 세간살이를 찾아 물로 씻는 것이 하루 일과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물 빠진 지하실에 내려갔다가 감전되어, 돌아가신 어느 성도의 남편 장례식은 슬픔이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 이후, 비가 내리면, 다들 밖에 나와, 하늘을 보면서, “더 이상 비가 내리면 안되는데” 하면서, 한숨 쉬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결코 잊어지지가 않습니다.
한평생 살아왔던 조국 유다에서, 머나먼 바벨론으로 끌려온 사람들, 그들은 끌려오기 전, 사랑하던 가족과 친구들의 죽음을 목격했을지도 모릅니다. 한평생 가꾸어왔던 모든 것들이 파괴되고, 살던 집이 불타버리고, 뛰어놀던 마을이 산산조각 부서져버리는 것을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유다 땅에서의 처참한 파괴와 바벨론에서의 고통을 생각할 때, 그들에게는 소망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동안의 모진 학대와 고통을 당한 후에, 지치고 고된 몸을 이끌고, 바벨론 강변에 앉았을 때, 그들은 서로의 처참한 몰골을 바라보면서, “우리에게는 소망이 끊어졌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없다. 모든 것이 끝이다. 죽지 못해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사랑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방의 땅,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학대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정든 고향 땅, 예루살렘을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진다고 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핍박과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처럼, 머나먼, 이국 땅 바벨론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을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4:20-21)라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눈은 이미 그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골짜기에 있는 마른 뼈들은 말라 있었습니다. 잊혀진 채로 있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마른 뼈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마른 뼈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에스겔을 통해, 그 마른 뼈들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들을 마른 뼈들로만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른 뼈들이 거대한 군대가 되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서, 바벨론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비전을 보셨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마른 뼈들 속에 담긴 희망을 보셨습니다.
끝나기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아직 가장 좋은 날이 우리에게는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 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른 뼈와 같은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포기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미호강변 둑이 터져, 옆에 있던 지하차도가 순식간에 물에 잠겨 버렸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계속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방호수로 지하차도의 물을 퍼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 생명이라도 살리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구호활동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5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고생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붙들어주시고, 죽어간 생명도 다시 살리시고, 꺼져가는 생명도 다시 살려내시려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외면하는 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6-7)라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다시 살리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들을 보여주시면서,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에스겔 선지자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그 물음을 우리에게 한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아파하고, 고생하고,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런 고통과 아픔이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런 곳에서, 우리를 건져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를 원하시고, 평안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9.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은 그들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너희가 살아나리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살려주셨습니다. 마른 뼈와 같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평안이요,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요, 그들에게 기쁨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은 우리를 살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죄악과 죽음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우리가 그 죄악과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너희가 살아나리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죽음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늘이 끝이 아닙니다. 내일이 있습니다.
온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가려져 있다 할지라도, 그 너머에는 태양이 존재합니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날이라고 할지라도, 내일은 반드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여 주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생기를 부어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절망과 죽음과 아픔의 삶이 아니라, 소망과 생명과 기쁨의 삶이라고 하는 것을 늘 기억하시고,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마른 뼈와 같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죄악과 죽음의 절망의 골짜기에 있는 우리를 건져주옵소서. 소망이 가득한 한마음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생명과 기쁨과 평안의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