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히예로니머스(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의 1505년작 〈세속적 환락들의 정원(Tuin der lusten; 세속환락정원世俗歡樂庭園; 세속쾌락정원; 세속향락정원)〉이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고락(苦樂)”은 “괴로움(고통)과 즐거움(쾌락)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얼추 풀리는(설명되는) 명사(名詞)이며, “감고(甘苦)”의 비슷한말 또는 유의어(類義語)이다.
“내성(內省)되다”는, 같은 사전에서 “자신을 돌이켜 살펴보다, 자신의 심리상태나 정신의 움직임을 내면적으로 관찰하다”를 뜻한다고 얼추 풀리는(설명되는), 능동사 “내성하다”의 수동태(피동태)이다.
한국에서 “쾌락주의(快樂主義)”나 “향락주의(享樂主義)”라고 번역되는 헤도니즘(hedonism; 히더니즘)은 “쾌락, 환락, 향락, 단맛, 감미(甘味), 달달함 따위”를 뜻하는 그리스어 헤도네(hedone)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아래 인용문은 독일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의 저서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1958) 제6장 제43절의 일부분이다. 인용문에 나오는 “고락계산법(苦樂計算法)”은 “고통과 쾌락을 계산하는 방법(pain and pleasure calculus)”의 준말인데, 더 정확하게는, “고락회계법(苦樂會計法)”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으리라.
이른바 “행복계산법(felicific calculus), 공익계산법(utility calculus; 공리계산법公利計算法), 쾌락주의적 계산법(hedonistic calculus), 쾌락계산법(hedonic calculus)”은 이 계산법의 별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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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철학자·법학자 제러미 벤덤(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고락계산법(苦樂計算法)”을 창안했다.
[…] 벤덤의 “행복”은 쾌락들에서 고통들을 빼면 남는 잔존쾌락(殘存快樂)들의 총합이다.
그런 행복은, 의식작용(意識作用)을 의식한 프랑스 철학자·수학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의식처럼, 감각들을 느끼고 세계의 객체들과 무관하게 존속하는 내감(內感; inner sense)이다.
특히 벤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기본가설을 세웠다.
첫째,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저마다 타고난 본성의 동일성’이다.
둘째, ‘고락계산법의 동일성’과 ‘고락을 느끼는 존재의 동일성’은 만인에게 공유되는 인간본성의 동일성을 표현한다.
셋째, 그런 동일성은 근대초기 철학자들에서 직접 유래한다.
“쾌락주의(hedonism; 헤도니즘)”라는 명칭은, 이런 맥락에서, 근대 쾌락주의와 오직 피상적으로만 관련되는 고대후기의 에피쿠로스주의(epicureanism)에도 부적합하지만 근대초기 철학자들의 철학에는 훨씬 더 부적합한 오칭(誤稱)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든 쾌락주의의 원칙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회피(苦痛回避)이다.
그래서 벤덤과 다르게 시종일관 철학자였던 스코틀랜드 철학자·역사학자 데이빗 흄(David Hume, 1711~1776)이 아주 잘 알았듯이, 벤덤은 쾌락을 모든 인간행동의 궁극목적과 동일시하고파서 그랬는지 ‘나의 진정한 길잡이들은 쾌락이 아닌 고통이며 욕망이 아닌 공포심이다’고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철학자 엘리 알레비(Elie Halevy, 1870~1937)의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La Formation du radicalisme philosophique)》(1904)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견해도 이런 원칙을 암시한다.
“예컨대,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건강을 바라나요?’라고 질문하면, B는 ‘병들면 고통스럽기 때문이요’라고 즉답할 것이다. 그러자마자 A가 B에게 ‘당신은 왜 고통을 그토록 증오해요?’라고 질문하면, B는 아무 대답도 못할 것이다. 이것은 궁극목적이므로, 다른 무엇도 결코 이것을 대신할 수 없다.”
오롯한 고통은 다른 모든 것과 일절 무관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은 애오라지 자신밖에 실감하지 못하며, 쾌락은 ‘쾌락을 제외한 다른 무언가를 즐기는 과정’이므로, A의 둘째질문은 대답을 불허하는 것이다.
고통은 내성(內省)되면서 자각되는 유일한 내감이다. 이 감각은, 경험되는 객체들과 무관하게, 논리적이고 산술적인 추론의 자명한 확실성에 필적할 수 있다.
고대의 여러 쾌락주의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변형된 쾌락주의들도 이런 고통경험을 궁극토대로 삼았지만, 근대 쾌락주의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강렬한 중요성을 획득했다.
왜냐면 고통도 쾌락도 세계의 의미를 여전히 다분하게 간직한 근대의 상황에서 세계는, 고대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간을 괴롭힐 수 있는 고통들을 회피하려는 인간을 결코 인간의 내면으로 끌어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stoicism)에서 에피쿠로스주의를 거쳐 쾌락주의(헤도니즘)와 퀴니코스주의(cynicism; 키니코스주의; 견유주의犬儒主意)에 이르는 모든 변형된 쾌락주의는 고대 세계를 소외시켰다.
그런 세계소외를 유발한 것은 세계를 결코 믿지 않으려는 격심한 불신이었다.
그리고 세계를 이탈하려는 맹렬한 충동은, 그러니까, 애오라지 자아(自我)만 입장시켜 안보(安保)할 내면세계로 몰입하려는 강렬한 충동은 세계소외를 촉진했다.
이런 쾌락주의들에 상응하는 근대의 퓨리터니즘(puritanism; 청교도주의), 관능주의(sensualism; 감각주의), 벤덤의 쾌락주의를 유발한 것은, 이제 정반대로, 인간을 결코 믿지 않으려는 격심한 불신이었다.
그리고 ‘현실을 인지하는 인간감각들의 타당성을 믿지 않는 의심,’ ‘진실을 인식하는 인간이성의 타당성을 믿지 않는 의심,’ ‘인간본성의 결함이나 타락(墮落)마저 믿어마지않는 확신’은 이런 근대 쾌락주의들을 촉진했다.
[…] 고대인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도 고통을 벗어났다고 상상하든지, 아니면, 이전에 만끽한 쾌락들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행복하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근대인들은 쾌락을 계산하든지 청교도처럼 나름의 선업(善業)과 죄업을 도덕적으로 회계(會計)해야만 스스로 행복하다고, 아니면, 구원받았다고, 다소 몽롱하게 산술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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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만물 척도 자본 현대 고대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아담 하와(이브) 수치심 철학 동물 창조 창작 자본주의
☞ 신음론(1): 도스토옙스키 지하인간(지하생활자)의 기록 수기 자연 고통 쾌감 심술 의식 문학
아래왼쪽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헤라르드 다비트(Gerard David, 1450~1523)의 1498년작 〈생체로 박피형(剝皮刑)을 당하는 시삼네스(Flaying of Sisamnes)〉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os, 서기전480~420)가 기록한 전설에서, 페르시아 황제 캄뷔세스 2세(Cambyses II, 서기전530~522재위)는 ‘뇌물받이(수뢰)와 거짓판결을 일삼은 부패한 판사(재판관) 시삼네스(Sisamnes)’에게 생체박피형(生體剝皮刑)을 선고했다.
아래오른쪽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퀜틴 마세이스(Quentin Matsys; 퀸턴 마세스Quinten Massijs, 1466~1530)의 1514년작 〈환전상과 그의 아내(De goudweger en zijn vrouw)〉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