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家僮(위가동)
이기발(李起浡:1602~1662)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패우(沛雨), 호는 서귀(西歸).
1623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했다.
1627년(인조 5)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필선(弼善)이 되고
11636년 병조호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여 서울에 진격하였으나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전주로 돌아감.
사후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서귀유고(西歸遺稿)』가 있다.
어제는 모를 심느라 고생했고
昨日移秧苦 작일이앙고
오늘 아침에는 보리수확 하느라고 수고했네
今朝取麥勞 금일취맥노
어린 종은 이미 원망 섞인 말을 하고
蒼頭言已怨 창두언이원
백발의 나는 오히려 더 일을 시키네
白髮癖猶牢 백발벽유뢰
이른 새벽에 닭갈비를 주고서는
早決投雞肋 조결투계륵
누구나 기름진 꿩고기를 먹고 싶은 생각이 없겠냐마는
誰懷食雉膏 수회식치고
가을이 되면 술을 많이 빚어서
秋來多釀酒 추래다양주 가을이 되면 술을 많이 빚어서
가득 따라주면서 종들을 위로하리라
持滿慰羣曹 지만위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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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다 보면
옛날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천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 년 내내 쉬지도 못하고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노비들의 삶이 느껴진다
당대에 끝나지 않는 노비의 삶은
자식에게도 대물림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는가?
농번기에는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집에 키우는 일소처럼 일을 해야 했다.
오죽하면 소보다도 더 낮게 취급당하고
한마디로 말을 알아듣고, 말을 할 수 있는 가축이었다.
사고 팔 수 있는 노비(奴婢)
그들은 이름대신 구(口)의 단위로
한 명이 아니라 一 口 (일구)로 거래되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사노동
밥하고 빨래하고 잦은 심부름에
겨울에는 땔감에 밤이면 짚으로 새끼를 꼬아야 하고
농기구며 살림도구를 만들라고 잠을 설치는 일이 태반이다.
때에 따라 변덕스러운 주인의 화풀이용 멍석말이도 당하고
전시에는 주인 대신 전쟁터에서 목숨까지 바쳐야 했다
평생 시중들면서
병들면 버려지고
나라가 어렵거나 난리가 있으면
또 가뭄이 들면 먹지 못해 굶어주는 노비들도 속출했다
그들의 삶은 뼈 빠지게 일만 하다가
병들면 약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어가는 그냥 소, 돼지였다.
그래도 이 시를 쓴 이기발 이 분은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다
가동(家僮)에 대해 측은지심이 있었나 보다
가을이 되면 종들에게 술 한잔 따라가면서
배불리 먹게 해 주겠다는 그 마음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