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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전쟁과 평화 그리고 종교
1. 파시즘 체제의 폭주
1941년 12월 8일 오전 6시, 당시 일본 유일의 일본방송협회(NHK)는 임시뉴스에서 대본영 육해본부가 서태평양에서 미국, 영국과 전투태세에 돌입하였으며, 해군은 하와이 미국 함대 및 항공 병력에 대해 결사의 대공습을, 싱가포르 및 여타의 땅에 대폭격을 감행했다고 발표했다. 진주만 기습은 전날 이뤄졌다. 일본은 미국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하고 파죽지세로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일대를 점령하며 인도, 호주까지 위협했다. 미드웨이 해전을 비롯한 각종 전투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마침내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9일에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항복했다.
8월 15일 정오, 태평양전쟁을 알린 같은 방송국에서 녹음된 일왕의 〈대동아전쟁 종결의 조서(詔書)〉를 발표했다. 일본에 대한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였다.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일본의 자립과 동아시아 제국의 안정을 마음으로 바란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제하고 영토를 침략하고자 한 것은 원래 나의 본의가 아니다”라고 했다. 적국은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터무니없이 죄 없는 사람들을 살상하고, 그 비참한 피해가 미치는 범위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에 이르고 있다”고 했다. 일가(一家)의 국민으로 단결하고, 신국(神國) 일본의 불멸을 굳게 믿으며, 국가의 건설을 위해 단결해 나아갈 것을 주문했다. 여기에 국민과 세계에 대한 자신과 일본의 전쟁 책임에 대한 인식은 없다. 그리고 피해를 당한 이웃나라들에 대한 사죄의 변도 없다. 그리고 다음 해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선언으로 교묘히 빠져나갔다.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근대적 기획의 마지막 산물이다. 한 국가의 종말을 향한 기획은 어리석게도 치밀했다. 1868년의 메이지 혁명으로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반도 식민강권 통치, 중일전쟁, 그리고 파시즘 체제를 완성했다. 정부는 1937년 8월, 〈국민정신 총동원 실시요강〉에서 “거국일치, 진충보국의 정신”을 굳건히 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총동원의 자세를 요구했다. 이는 일본이 침략한 중국과의 전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전시하의 경제통제와 함께 이뤄졌다. 일본은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를 연속된 시각에서 대동아전쟁이라고 칭했다. 대동아공영권은 일본과 만주, 그리고 중국을 포함하는 소위 신동아 질서 건설을 말한다. 태평양전쟁은 구미 열강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켜 대동아공영권을 완성시킨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동남 및 남아시아를 포함, 오세아니아 일부를 포함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침략한 나라들을 전쟁 체제에 종속시키기 위한 전략적 구호였다.
이어 1938년 4월에 ‘국가총동원법’이 실시되었다. 목적은 전시 및 사변 때에 “국방 목적 달성을 위해 국가의 전력(全力)을 유효하게 발휘하고 인적 물적 자원을 통제 운용한다”는 것이다. 징용에 의한 국민의 전쟁 동원은 물론 노동, 단체, 수출입, 물가, 교육, 언론 등 국가의 모든 분야를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전시통제인 셈이다. 그리고 전쟁 수행의 핵심 자원인 국민에 대해 1939년 7월에 ‘국민징용령’을 선포했다. 군수생산에 대한 자유 모집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국민을 강제로 징집한 것이다. 1943년도 제3차 개정까지 차츰 징용의 대상 범위에 대해 직군이나 나이를 확대해 나갔다. 물론 징용 대상에는 한반도나 대만, 사할린, 남양군도도 포함되었다. 일반 자국민은 물론 일본이 지배하는 지역의 백성들도 전쟁터는 물론 전쟁물자를 생산하는 데에 총동원된 것이다. 심지어 2년 뒤에는 효율적인 전쟁 노동력을 장기적으로 충당하기 위한 〈인구정책 확립 요강〉을 발표하여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1억 인구 증가를 목표로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파시즘 체제가 노골적으로 부각되었다. 10월, 고노에 후미마로 수상은 대정익찬회 발족식에서 대동아 신질서 확립과 신세계 신질서 건설을 위해 고도국방국가 체제를 완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독일의 나치와 같은 강력한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구는 상부에는 모든 국가기구로부터 하부에는 모든 지역이 다 포함되는 방대한 파시즘 체제였다. 요강에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현현을 국시로 하는 황국은 일억일심 전 능력을 들어 천황에게 귀일하고, 물심일여의 국가체제를 확립하여 최고로 빛나는 세계의 도의적 지도자가 되기로 한다”고 하여 황국적 지도 국가를 내걸었다. 1941년 3월에는 국방보안법이 포고되었다. 사상과 언론의 통제책이다. 내각정보부가 정보국으로 승격되어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리고 동시에 치안유지법을 개정, 예방구금제도를 도입하여 사상범을 체포, 구금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전 국민의 정신과 손발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임시뉴스가 나간 1941년 12월 8일 정오에는 라디오를 통해 일왕에 의한 〈미영 양국에 대한 선전(宣戰)의 조서(詔書)〉가 발표되었다. “천우(天佑, 신들의 가호)를 보유하고, 만세일계의 황조(皇祚, 황위)를 계승해 온 대일본국 천황은 너희 충성 용감한 신민에게 분명하게 밝힌다. 나는 오늘 미국 및 영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중화민국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짓밟고 일본 제국에게 무기를 들게 하였으며, 미영은 장개석 정부를 지원, 평화의 미명하게 동양을 정복하고자 하는 비도(非道)의 야망을 품고 있다. 또한 제국의 평화적 통상을 방해하고 생존을 위협하며 굴복시키고자 한다.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고 제국 광영(光榮)의 보전을 기할 뿐”이라는 말로 조서를 끝맺었다. 천우로 시작하는 조서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제1차 세계대전(대독 선전) 때도 발표되었다. 국제공법의 범위 내에서 전쟁을 일으킨다고 했지만, 자국을 중심으로 세계 질서를 변화시키겠다는 거대한 욕망이 오히려 일본에 있음을 잘 보여준다.
마침내 일본은 무모한 전쟁에서 패했다. 1945년 8월 30일,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에 도착하여 본토의 접수를 시작했다. 9월 2일에 일본 정부는 미·영·중·소를 포함한 8개국 대표 앞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포츠담선언의 수락, 무조건적인 항복, 연합군최고사령부에 의한 포고·지시·명령을 따를 것, 일왕 및 일본 정부의 통치 권한은 연합군최고사령부의 권한하에 놓을 것 등 일본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일방적 조건이었다. 국가의 발생 이래 처음으로 전국이 외국 군대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다. 이럴 때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그러나 일본과 식민지 및 점령지의 백성이 받은 고통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패망 후 일본 외무성과 후생성의 조사에 따르면, 중일·태평양전쟁으로 사망한 일본인만 310여만 명이 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군인이 200여만 명에 해당한다. 1945년 3~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만 주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여만 명이 죽었다. 원폭으로 죽은 사람은 히로시마에서 20여만 명, 나가사키에서 10여만 명에 이른다. 그 외의 국가 국민은 200여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물론 조선인도 들어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이 조사한 것으로 실제로 그 이상이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잔혹한 역사의 시기에 종교는, 특히 불교는 어디에 있었는가. 근세의 단가(檀家) 제도로 인해 불교와 인연이 없는 집안이 없을 정도로 ‘불국토’인 일본에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불교는 태평양전쟁을 과연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2. 불교계의 전쟁 옹호
일본이 말하는 대동아전쟁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전쟁이다. 당연히 최고사령부는 일본 점령 후 대동아전쟁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다. 일단 태평양전쟁 기간으로 한정하고, 당시 일본 최고의 교단이었던 정토계와 선종계의 동향을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선전포고가 나가고 이틀 뒤인 12월 10일 대일본불교회는 긴급이사회를 개최해 “순국의 열성에 불타 총력을 발휘하고, 일억국민 총진군의 선구이어라”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전시교학과 진종》 이하 동일). 정토진종 대곡파(大谷派)에서는 국위선양 시국 돌파 보국법요를 엄수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 해인 1942년 3월에는 흥아생활운동 3년째의 지도 방침으로 황은감대(皇恩感戴)·호국정법(護國正法)·보은감사의 3강(綱)을 기본이념으로 ‘대조(大詔)봉대 흥아보국운동교본’을 작성하고 다음 달 그 운동을 발족했다. 4월에 불교계도 참여하는 전국흥아종교연맹이 창설되었다.
본원사파(本願寺派) 법주(法主, 최고지도자) 오타니 코즈이(大谷光瑞)는 9월 〈소식(消息, 법주의 법문)〉에서 “금일 무슨 생사를 논할 것인가. 오직 무아보은의 염으로 분골쇄신 황화익찬(皇化翼贊)의 대의에 따라야만 한다는 것뿐”이라고 했다. 황화익찬은 황도화의 길을 위해 일왕의 정치를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같은 파의 일본교학연구소 소장 오타니 코묘(大谷光明)는 “종교가는 모름지기 사상전사가 되어야 한다. 만약 승려로서 대동아전쟁하에서 사상국방의 운영에 정신(挺身, 솔선하여 몸을 던지는 일)할 수 없는 자가 있다면 승적을 반환하라”고 훈시했다. 1943년 1월에 법주는 “시국하 우리는 교가(敎家)에게 내려주신 대어심(大御心, 일왕의 마음 씀)에 감읍하고, 깊은 결의를 확고히 하여 교가의 입장에서 진충보국을 철저히 하고 경외하는 성지(聖旨)를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교시했다. 2월에는 왕실 신사인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참배했다. 7월에는 대동아불교청년회가 결성되어 “성전 완수에 정신(挺身)을 서원하고, 실천의 중핵”이 될 것을 맹세했다.
10월에 동서 본원사(세력이 가장 큰 대곡파와 본원사파)에서는 전시하의 종교보국 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협력체제인 교화협의회를 조직했다. 다음 달에는 ‘양본원사 전시종교교화운동’을 발족, 류코쿠대학을 비롯한 교립대학의 학도병 출진장행식(出陣壯行式)을 거행했다. 이때 본원사파 법주는 “보국의 대도를, 신명을 다 바쳐 빛내야 한다”고 교시했다. 12월에 대일본불교회는 부현(府縣, 도에 해당하는 지역) 회장에게 회 소속의 승려, 교사도 징용에 참가, 공원(工員)으로서 정신솔선 봉공하도록 지시했다. 1944년에는 연합군의 공세가 더욱 강화되어 일본이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1월 본원사파 법주는 “거종(擧宗)일체, 본래협화로써 무극의 황은에 봉답하라”고 교시했다. 4월에는 전시교학지도본부를 개최, 천황귀일과 아미타신앙, 야스쿠니(靖国)와 정토 관계, 9월에는 황국종교로서의 정토진종을 토의했다. 모든 교의가 일왕에게 귀결되었다.
마침내 패망의 해인 1945년 1월 본원사파 법주는 “왕법위본(王爲僞本)의 종풍”을 받들 것을 지시했다. 불법보다도 국가의 법을 최우선한다는 것이다. 3월에는 전시하의 결전 태세로써 전시종문총감부(戰時宗門摠監部)를 설치했다. 문자 그대로 모든 사찰과 신도들이 전투태세를 갖춘다는 의미이다. 6월에는 승려들이 솔선수범, 진두에 서서 분골쇄신하여 황국보호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문했다. 12월에 본원사파는 임시종회를 개최하여 “패전의 금일, 180도 회전을 보인 세상에 비추어 지금의 종무행정당국은 일억 총 참회의 실질을 구현하기 위해 사퇴할 것”을 결의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패전 후 일왕의 뜻을 받들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루아침에 정교일치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는 선종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동종은 1941년 11월 시국 대응 교학간담회를 개최하여 미소기(禊, 죄의 씻김을 위한 신도의 정화 의례)와 선(禪), 신사와 선종의 관계 등을 협의했다. 다음 해 3월 같은 종단의 이시구로 호류(石黒法龍)는 불교계 잡지 《대승선》에서 “일익일심으로 귀의하여 인과필연을 선용하는 선(禪)이야말로 대동아 필승의 법이다. (중략) 일본이야말로 과거 삼천 년의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필승일 수밖에 없는 계(戒)를 획득해 왔기에 오늘의 승리를 할 수 있다. 그것이 공안(公案)이다. 따라서 필패계(必敗戒)를 지켜온 영미가 필패에 이르는 것이 공안현성(公案現成, 현상계가 모두 살아 있는 불법)이다.”(市川白弦 〈일본 파시즘하의 종교〉 이하 자료는 동일)라고 하였다. 1월에는 임제종 보국단이 결성되고, 6월에는 조동종 보국회가 전시하 황민연성(皇民練成) 지도반원 양성소를 개설했다.
임제종 천룡사파(天龍寺派) 관장(管長, 최고지도자) 세키 세이세츠(關精拙)는 1942년 《무사도의 고양(高揚)》에서 일본의 독특한 도덕 체계인 무사도는 “군사적인 용맹을 높게 평가하고 죽음을 초개(草芥, 지푸라기처럼 하찮은 것)와 같이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선이 무사도에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선이 죽음을 미화하거나 살인의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아님은 야나기다 세이잔(柳田聖山)을 비롯한 이미 많은 선학 연구자가 이야기하고 있다. 세키는 선과 검, 그리고 무사도가 세계평화라는 하나의 목표를 갖는다고 했다. 전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같은 종 상국사파(相国寺派) 관장 야마자키 타이코(山崎大耕)는 1943년 《대법륜》 1월호에서 일왕의 선전포고를 받들어 필승해야 한다고 하며, 참선의 삼요(三要)를 끌어들여 “황국신민은 첫째, 어떠한 장기전에도 참고 견디는 대승근기, 둘째는 대동아공영권 확립이라는 대분심, 셋째는 자신의 전시 생활은 이대로 좋은가라는 대의정”이라고 했다. 간화선을 확립한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선사상이 담긴 《선요(禪要)》의 핵심 사상이 바로 삼요다. 대신근(大信根)·대분지(大憤志)·대의정(大疑情)이다. 이를 전쟁 수행으로 치환함으로써 깨달음을 향한 선어(禪語)를 오염시켰다.
선종이야말로 제국 군대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후원자였다. 그것은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군인들의 절체절명의 순간에 가장 안심을 주었다. 물론 활발발(活潑潑)한 선의 생명력에는 반하는 것이었다. 조동종 관장 하타 에쇼(秦慧昭)는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쓴 《일본주의 생사관》(1944년 2월)의 ‘대사일번(大死一番)’에서 “출진학도 제군, 제사(諸士)가 감격의 출진에, 국민 일억은 이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환희에 가득 차 있다”라고 말문을 열며, “일본은 무력(武力)을 위해 무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위대한 도의(道義) 철저함을 위해 무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싸움은 진무(神武)의 싸움이다. 제사는 신병(神兵)이며, 어디까지 신성(神性)을 끝까지 일관해야 한다. 신성은 자기를 몰각하는 곳에만 나타난다”고 말했다. 아마도 이 책은 전쟁터의 군인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수행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불도를 성취하는 것을 전쟁 수행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진무는 전설상 기원전 8세기 초에 일본 초대 왕으로 등극했다는 인물이다. 근대 일본은 신화를 사실로 끌어들여 일왕 권력을 강화했다.
1945년 2월 일본 유일의 종교신문인 〈중외일보(中外日報)〉에서는 “백년전쟁의 각오를 굳게 하자”라며 전쟁을 일상화하는 논리를 폈다. 정부에서나 민간에서는 패전을 전망하는 말이 나온 시점이었다. 3월에는 도쿄 대공습으로 패색이 짙어졌다. 조동종 승려이자 학자인 마스나가 레이호(増永霊鳳)는 5월 같은 신문의 〈특공정신의 근원〉에서 이를 개아의 부정에 의해 역사를 짊어진 혼의 부활이라고 하여 죽음을 미화했다. 8월에는 전시종교보국회 불교국·대동아불교청년회 등에서는 국민 총무장을 외치며 죽창 훈련을 개시했다. 다른 종파도 마찬가지이지만 9월에 당시 조동종 관장 다카하시 로센(高階瓏仙)은 “성지(聖旨)를 봉체하여 부동의 신념으로 신일본 건설의 초석이 되자”고 유시했다. 반성이나 참회는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3. 전시교학의 논리
1) 전도된 교의
전쟁 수행을 위해 자신의 교의를 왜곡하여 출·재가 신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데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 전시교학이다. 문자 그대로 전시에 행해진 교학이다. 일반 교학과는 다른 전쟁 수행용 교학은 불교계, 심지어 일본의 모든 종교계가 교단 혹은 종단별로 승인한 것이다. 그것은 파시즘 국가의 광기에 영합하는 악마의 교학이다. 예를 들어 1914년 국수주의적인 종교 단체인 국주회(國柱會)를 창설한 일련종(日蓮宗)계의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는 《칙교현의(勅敎玄義)》(1932)에서 국체(國體)를 본존, 황운(皇運)을 계단, 황도 교육을 제목으로 바꿔놓았다. 본문(本門)의 본존·제목·계단은 《법화경》의 행자로 부른 니치렌(日蓮, 1222~1282)의 핵심 교의인 삼대 비법이다. 《법화경》 제일주의로서 구원실성의 본사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하는 문자 만다라, 나무묘법연화경의 창제(唱題), 이 창제를 행하는 장소를 말한다.
그는 실제로 일왕과 그 가계를 숭배와 귀일의 대상으로 삼았다. 일본의 선조는 인도의 전륜성왕과 뿌리가 같으며, 메이지 일왕은 현인신(現人神)인 동시에 전륜성왕이다. 《메이지대제론(明治大帝論)》에서 메이지 일왕을 “진무천황의 재현, 국체, 일본, 도의 주인, 가르침의 스승, 백성의 어버이로서 국가 및 인류의 성표(聖標)”라고 하는 동시에 “나무구원성실(南無久遠實成)! 나무천조황태신(南無天祖皇太神)! 나무대일본천황(南無大日本天皇)!”이라고 외쳤다. 다나카는 팔굉일우(천하를 한 집안으로 만드는 것)라는 말을 창안해 군국주의자들에게 전쟁의 이념을 제공했다. 다나카의 최종 목표는 전 세계를 무력으로 통일하여 일본에 국립계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대전을 기획한 군국주의자들에게 정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불교 또한 전쟁의 논리 속에 깊이 포진하게 된 것이다.
정토계 또한 이와 다름이 없었다. 일본 최대 종단인 정토진종의 전시교학을 분석하면 먼저 다나카처럼 불보에 대한 왜곡을 일삼았다. 종단은 일왕을 불보인 아미타여래와 동격의 위상으로 삼았다.(필자 〈일본 근대불교의 전시교학의 구조 분석: 정토진종을 중심으로〉 이후에도 동일). 류코쿠대학의 교수 사사키 켄토쿠(佐々木憲徳)는 《은일원론: 황도불교의 심수(恩一元論: 皇道佛敎の心髄)》(1942)에서 일왕을 법신과 일체로 놓았다. 황도불교의 원리를 《심지관경(心地觀經)》의 〈보은품〉에서 찾아 은일원(恩一元)이라고 한다. 이 은을 일왕의 은혜로 보았다. 실제로 이 경에서 말하는 사은은 부모·중생·국왕·삼보를 말한다. 법신을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칙명에 의해 역대로 계승되는 일왕의 상주(常住)로 보았다. 이를 제위(帝位)의 법신이라고 한다. 칙어와 칙유 등 일왕의 언설을 일왕의 궤범으로 보았으며, 이는 제교(帝敎)의 법신이라고 한다. 일왕의 위덕은 화융으로 보고, 제덕(帝德)의 법신으로 삼았다. 이 모두를 일체삼보(一體三寶)라고 한다.
법신 또는 법신불은 대승불교에서 화신인 석가모니불의 근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모든 제불의 근본이기도 하다. 대승의 모든 경전은 이 법신불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경전의 주불은 법신불의 화신이거나 보신이다. 이는 초기 반야경에 속하는 《팔천송반야경》의 핵심 사상이다. 사사키는 일왕을 법신불의 자리에 등치시킨 것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존재는 법신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현존의 일왕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위치까지 가게 되는 것은 파시즘 권력에 완전히 종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또한 세속 권력과의 일치를 도모한 것이다. 실제로 정토진종 법주의 가계는 근대에 일왕가와 종횡무진의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었다. 세속 권력을 포섭함으로써 무소불위의 종교 권력을 확보한 것이다. 전쟁터의 신도들은 정교일치 속에서 야스쿠니(靖国) 신사를 사후의 극락정토로 인식한다. “구단(九段, 야스쿠니 신사가 위치한 지역)에서 만나자”라고 외치며 죽어간 군인들은 그곳에서 재회(再會)하고자 한 것이다. 번뇌 구족한 중생이 아미타불의 정토에서 만나 성불제중의 꿈을 실현하는 곳이 제국의 품 안으로 변형되었다.
선종의 목표인 깨달음을 향한 수행 과정은 수행승들에게는 생명이 의지하는 장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겐 오직 일왕만이 수행의 대상이자 표본이다. 임제종 불통사파(佛通寺派) 관장 야마자키 에키주(山崎益洲)는 《대승선》(1944년 11월호)의 칼럼 〈적개심의 앙양과 선〉에서 “각하(脚下)를 조고(照顧)하면서 자기를 규명한다. 대선정 중에 천황에 귀일하여 일거수일투족, 오직 지금 존황에 의해 살며 생활에 구현하는 것은 수행자의 당체이자 본분이며, 수처(隨處)에 주인공이 되는 활선이다. 이것을 흥선호국의 우리 종풍이라고 한다. 필승의 신념, 전력 증강의 기본이 된다”고 했다. 조고각하는 자신의 본성을 관하며 이를 떠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성 현현의 자리에 일왕을 놓음으로써 국가권력과 본성이 일치하는 황당한 모순이 발생한다. 임제의현의 수처작주의 의미 또한 왜곡되어 무아는 국가의 전쟁 수행을 위한 개아로밖에 작동하지 않는다.
선수행은 모름지기 견성성불이 최종 목표다. 그러나 어용학자들은 ‘미련 없이 죽는다’는 무사도의 죽음관을 확립하는 데에 선이 활용된다고 한다. 하지만 선의 살활자재(殺活自在)는 번뇌를 제거함으로써 대자유의 경지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차원까지 나아감을 의미한다. 10년 단위의 대외 전쟁을 행해 온 근대 일본은 선종계의 전쟁선(戰爭禪) 사상을 수혈하며 그 기세를 더욱 확장했다. 이를 수립한 자가 조동종의 승려 하라다 소가쿠(原田祖岳)이다. 고마자와(駒澤)대학의 교수로서 안국사(安國寺)를 비롯한 여러 사찰의 주지를 역임했다. 《참선의 입문》(1915)에서 생존경쟁을 일삼는 “우주의 모든 현상을 보면 전부 전쟁이 아님이 없다”고 한다. 무명번뇌를 대적하는 수행을 전쟁으로 보고 있기도 하지만, 연기로 구성된 이 세계를 과연 전쟁터라고만 할 수 있을까. 현실과 내면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는 언설의 모순은 머지않아 드러난다. 《대승선》(1944년 7월호)에서 그는 “일억 신민들은 모두 영예롭게 죽을 각오가 필요하다. 적을 발견하면 반드시 죽여라. 여러분은 반드시 거짓을 무너뜨리고 진실을 세워야 한다. 이것이 선의 기본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전쟁터에서 과연 이 언설은 무엇을 지시했겠는가. 전쟁선은 사람을 두려움 없이 죽이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선수행은 인간을 전쟁의 도구로도 변형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국주법종(國主法從)의 파행
그렇다면 근대 일본에서 종교가 국가의 위계질서에 포섭되는 과정은 어떤 것일까. 무엇보다도 근대 국가의 ‘천황신도’ 기획이 그 출발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권력을 추종하는 교단 각자의 교의적 전환이 이를 이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우선 근대 일본 사회 체제의 급격한 변혁인 메이지유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혁명은 장군과 다이묘(大名)의 주종관계로 형성된 봉건적 막번(幕藩)체제를 타도한 존황파의 승리로 이뤄졌다. 1867년 막부의 마지막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권력을 일왕에게 반환한 대정봉환(大政奉還)의 결과를 낳았다. 실권을 무사 정권이 장악했던 12세기 이래 형태만 남아 있던 왕권이 부활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정부는 다음과 같이 포고했다. “금번 왕정복고(王政復古)는 진무창업(神武創業)의 시원에 기초하여 모든 일을 일신하고, 제정일치(祭政一致)의 제도를 회복함에 있어, 먼저 신기관(神祇官)을 재흥, 설립하고 차츰 여러 제전(祭奠, 제사)을 흥하게 할 것을 명한다.”(〈태정관(太政官) 포고〉 1868년) 왕정복고, 제정일치, 신기관의 설립을 통해 명실공히 왕권 국가로 재탄생했다. 신기관은 고대 율령제하에서 조정의 제사를 담당하던 기관이다.
이 기관이 설립되자마자 신불분리의 명령이 내려졌다. “금번 왕정복고와 구폐를 일신하고자 함에 있어 제국 대소의 신사에서 승려의 형태로 별당(別当) 혹은 사승(社僧) 등으로 부르는 무리는 환속하도록 명령한다.”(신기(神祇) 사무국 포고, 1868년) 불교가 일본에 유입되던 6세기 중엽부터 전통 신앙인 신도와의 관계를 형성했던 신불습합이 신불분리로 이어지고, 곧이어 폐불훼석을 초래했다. 근세 단가제도를 통해 전 민중을 사찰에 예속시켰던 고삐도 풀렸다. 사찰은 통폐합되고, 사원의 토지는 몰수되었으며, 승려들은 환속해야 했다. 1,4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는 역사의 굴곡을 거치며 다시 국가에 종속될 운명에 처했다.
근대 왕정 체제의 이념적 기반이 바로 신도의 국교화다. 이를 위해 불교의 탄압이 함께 이뤄진 것이다. 1871년 5월에 국가의 종사(宗祀)로서 신관직 규칙 제정, 7월에 향사(郷社) 정칙 제정, 7월에 천황신도의 본산 이세신궁(伊勢神宮) 개혁, 1872년 신기성(神祇省) 대신 교부성(教部省) 설치, 11월에 단가와 주지가 없는 사찰을 폐지했다. 마침내 신불합병을 위한 대교원을 설치하여 국가신도에 대한 국민교육이 실시되었다. 핵심 내용인 3조 규칙은 ①경신애국의 뜻을 명심하여 지킬 것, ②천리인도를 명확히 할 것, ③황상(皇上)을 받들어 조정의 뜻을 준수하도록 할 것이다.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승려로 서구를 시찰하고 교단 개혁을 주장한 시마지 모쿠라이(島地默雷)는 신교의 자유와 정교분리를 내세워 이를 비판, 교단의 이탈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1889년 1~17조까지 일황의 무소불위 권한을 명시한 대일본제국헌법과 황실전범(典範)이, 1890년 교육칙어가 발포되었으며, 1900년에는 신도 관리를 위한 내무성 신사국이 세워졌다. 이로써 신도의 국교화는 완성되었으며, 일왕은 무소불위의 전제군주가 되었다. 신도는 국가 제사의 대상이자 주체로서 국교가 되었다. 이제 국체(國體)는 사해를 덮는 만세일계 일왕의 은덕이자 국가의 진운을 이끄는 절대자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말로서 이를 부정하는 자는 반역자가 된다. 전 국민은 국가신도를 무조건적으로 받들어야 비국민이 되지 않는다. 모든 종교의 신도는 국가신도의 하부 구조에 종속되어 국체가 자신이 믿는 종교적 신념이나 의례의 선험적인 조건이 되어야 한다. 일본은 신이 통치하고 보호하는 신국이 된 것이다.
정토진종 본원사파와 대곡파는 일찍이 진속이제(眞俗二諦)의 교의를 중시했다. 종단의 지도자들은 이를 절묘하게 운영하는 것에 자신들의 명운이 걸려 있음을 간파했다. 근대 천황제 국가에서 이 교의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종헌에는 어느 것을 우선시하라고 명시된 언어는 없다. 그러나 대곡파의 예를 들면 “황상을 봉대하고 정령(政令)을 준수하며, 세도(世道)를 배반하지 않고, 인륜을 어지럽히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며, 국가에 이익 주는 것을 속제문이라고 한다”라고 종헌에 명시했다. 당연히 진제는 아미타불의 본원과 칭명염불에 의한 극락왕생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다. 삶은 이원화된 것이다. 사찰에서는 진제가 우선일지는 몰라도 생활 속에서는 속제가 우선이 된 것이다. 종법은 교묘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속의 법이 앞선다는 교단의 방침은 1930년대에 이미 등장했다. 집행장 마에다 토쿠스이(前田徳水)는 기관지 《교해일란(敎海一瀾)》(1935년 4월호)에서 “종조 신란성인(親鸞聖人) 이래 왕법위본의 종풍을 받들고, 근왕보국(勤王報國)에 최선을 다해 온 묘뇨(明如)의 모범을 따라 현재의 비상시국을 맞아 본종 진충보국의 참된 정신”을 확립해야 한다고 훈시했다. 묘뇨는 오타니 코손(大谷光尊)으로 메이지 혁명기에 본원사의 21대 법주였다. 진속이제라고는 하지만 근대 초기부터 종풍은 왕법, 즉 국가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이 종풍은 당연히 국가의 질서를 따르는 것으로 확립된 것이다. 황도불교는 근대불교의 성격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선종계 또한 정토종계와 다름이 없었다. 이들은 개개인의 정신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군인들의 정신적 계보인 무사도에 선의 정신이 곡해되어 개입되어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중세 이래 무사는 직업군인과 다름없었다. 그들의 삶은 죽음과 직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종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을 경우, 주군 나아가 왕에 대한 충성이 최고의 가치가 된다. 근대 왕정국가에서는 당연히 근대화된 군인들에게 무사도가 강조되었다. 하라다 소카쿠의 전쟁선 사상은 당연히 군국주의를 굳건하게 했으며, 일선의 군인들을 전쟁 기계로 만들었다. 일왕을 위해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임을 토로한 《대의(大義)》를 지어 군인과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준 육군 장교 스기모토 고로(杉本五郞)의 군인선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임제종 불통사에서 수행했다.
선종은 특히 일살다생(一殺多生)의 논리를 활용했다.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죽인다는 의미다. 조동종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조동종 관장 아키노 코도(秋野孝道)는 《선(禪)의 골수》(1914)에서 러일전쟁에 대한 일왕의 조서에서처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다수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소수를 죽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이는 일련종 승려인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가 1932년 우익단체인 혈맹단(血盟団)을 이끌며 요인을 암살한 명분이기도 하다. 1941년에 류코쿠대학의 하라다 쇼지츠(大原性実)는 《종교보국(宗教報国)》(1941)에서 “대동아공영권 수립과 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일살다생의 대승정신을 발양해야 한다”고 했다. 전쟁터의 군인들에게 일살다생 논리를 주입하여 살인의 두려움을 없앤 것이다. 조동종 영평사(永平寺) 주지이자 관장 하타 에교쿠(秦慧玉)는 《선의 생활》(1943)에서 “국체명징 귀의삼보, 황운부익 증상묘수(証上妙修), 경신숭조 사자상승(師資相承), 황민연성 신심학도, 황민생활 행지(行持)보은”이라고 했다. 깨달음 속에서 일거수일투족 부처의 삶을 지향한다는 조동종의 가르침이 일왕과 국가신도에 대한 충성과 숭배로 뒤바뀌었다. 불법이 사라지고 오직 국체만이 남은 것이다.
4. 과연 불교는 홀로 설 수 있는가
일본의 불교 공인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552년이다. 백제의 성명왕이 불교를 일본에 전했을 때, 친불파와 배불파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이 일어났다. 일본에도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 수많은 신)’가 있는데 굳이 새로운 신, 즉 객신(客神, 외국의 신)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친불파가 승리하여 고대국가 건설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왕권국가 건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쇼토쿠(聖德)태자에 의해 제정된 〈17조 헌법〉 제2조에는 “두텁게 삼보를 경배하라. 삼보는 불법승이다. 즉, 사생이 종귀(終歸)할 곳이며, 만국의 극종(極宗)이다”라고 할 정도로 불교는 국가의 종교가 되었다. 중국·한국에 불교가 유입될 때처럼 일본 또한 국가가 나서서 불교를 보호한 것이다. 그것은 실크로드를 거쳐 국제화된 불교의 높은 문화적 수준과 외교에서 불교의 유용성에 눈을 돌린 결과이다. 이처럼 고대에는 국가불교로서 위상을 차지했다.
국가로부터 불교 교단의 독자성을 인정받게 된 것은 중세 신불교의 탄생에서부터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형성된 정토계, 신종계, 일련계의 종파불교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토착화와 대중성을 확보했다. 기존의 세력인 남도(南都) 6종 및 천태종과 진언종의 멸시와 박해를 받아 가면서 독립된 교단으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임제종처럼 막부의 권력과 깊이 밀착된 측면도 있지만, 그 외의 교단은 민중의 귀의에 의해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일련종을 세운 니치렌의 경우, 왕마저 부처의 심부름꾼이라고 할 정도로 국가권력을 초월한 강력한 법주국종(法主國從)의 사상을 형성했다. 조동종은 국가권력이 포진한 가마쿠라나 교토와는 거리가 먼 지방을 무대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약진했다. 일련종이나 정토진종은 전국(戰國) 시대에는 불법을 등에 업고 민중봉기인 잇키(一揆)를 통해 권력에 대한 저항운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잇키는 승려, 하급 무사, 농민, 상공업자 등으로 뭉쳐진 강력한 종교적 자치 집단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련계의 불수불시파(不受不施派)는 법화 신앙을 하지 않는 권력자로부터 보시를 받지도 않고, 법시(法施)를 하지도 않는다는 신념 때문에 막부의 권력자들에 의해 혹독한 고난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근세의 에도(江戸)막부는 불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본말사 제도를 구축함으로써 불교계는 국가권력의 장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기독교인을 색출하기 위해 실시한 단가제도 또한 불교를 더욱 수동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이제 불교는 국가의 우산 속에서 더 이상 포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또 하나의 권력이 되어 갔다. 제사를 지내는 장례불교가 형성된 것도 바로 근세의 국주법종의 장이 형성된 덕분이다. 애써서 민중을 포교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완전한 국가불교가 완성되었다. 근세 후반에는 지역에서 가렴주구의 온상이 된 불교계를 향한 폐불훼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메이지 신정부는 재정 확보와 국가신도화를 위해 이러한 폐불훼석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불교계는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비로소 자신을 성찰하게 되었다.
신불분리의 포고가 이뤄진 1868년 12월 임제종과 정토진종의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 최초의 제종동덕회맹(諸宗同德會盟)이 이뤄졌다. 모든 종파가 동의하는 8개의 조항을 서약했다. 그러나 첫 조항에 “왕법과 불법은 분리될 수 없다”는 내용을 내세워 정부에 제출했다. 구폐를 일소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것 등의 조항들은 근대불교의 방향을 설정한 것으로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그 이면에는 기독교를 배격하는 것이 목표이기도 했다. 이 또한 국가의 전략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신도가 국가의 제사로서 국교가 되어 가는 상황에서 불교계는 국가의 공인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과거의 화려했던 경력은 이제 무용지물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는 국가의 대외 전쟁을 옹호하거나 지원할 수밖에 없는 한계에 처하게 되었다. 10년 단위의 전쟁에 군종을 포함한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하게 되었다. 전시교학은 그러한 행위의 절정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불교와 국가의 관계는 이처럼 굴곡의 역사가 있다. 물론 현재의 헌법, 즉 연합군최고사령부가 중심이 되어 제정한 일본 헌법(1946년 11월)에는 정교분리의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이는 근대 국가신도를 부정하는 동시에 실질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문에는 5번이나 평화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 평화헌법이라고 부른다. 제20조에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①누구든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 어떠한 종교 단체든지 국가로부터 특권을 받거나 정치상 권력을 행사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누구든지 종교상의 행위, 축전, 의식 또는 행사 참가를 강요당하지 아니한다. ③국가 및 그 기관은 종교 교육, 그 밖의 어떠한 종교적 활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하위 법령에나 들어가야 할 조항이 버젓이 명시된 이유는 그만큼 실패한 국가신도와 관련된 근대국가의 뼈저린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은 18만 개의 종교법인이 있을 정도로 종교의 자유를 구가하고 있다. 물론 옴진리교와 같은 반국가적이며 반사회적인 종교에 대해 법인을 해산시킬 정도로 강력한 국가의 힘이 작동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불교는 과연 국가의 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현행 헌법이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고 제1조 1항에 명시해 놓았지만, 그것이 영원할 것으로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언제든 일본의 우경화와 국수주의적인 상황이 도래했을 때 왕은 또다시 실권을 쥘 수도 있는 것이다. 근대의 불교가 국가 폭력하에서도 국가와의 일치를 강조했던 것을 상기하면 국주법종의 역사가 재현되지 말란 법은 없다. 과연 불교는 막스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당한 물리적 폭력의 독점을 차지한 유일한 인간 공동체”라고 정의한 국가를 넘어설 힘이 있는 것일까.
종교는 평화를 희망하는 인류 공동체의 희망이다. 정립된 종교라면 평화를 자신의 제1 교의로 삼고 있음은 자명하다.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종교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때로는 자기희생이 필요하기도 하다. 여기서는 일일이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근대의 많은 일본 불교인이 실제로 평화를 위해 희생되었다. 교단이 자신의 교의를 배반했을 때, 그것을 온몸으로 부정하고 교조나 종조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삼아 모든 것을 내던졌던 것이다. 일본의 패망 후, 불교계는 전쟁에 참여한 자신들의 과오를 참회하며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도록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전쟁을 반대하며 희생된 불교인들의 명예를 복권시키기도 했다.
주지하듯 불교의 생명은 비폭력과 불살생을 의미하는 아힘사(ahimsā)에 있다. 생명 사상이 중시되는 오늘날 불교가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쩌면 불교는 교단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불조(佛祖)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태평양전쟁에서 얻는 교훈은 지금도 그칠 줄 모르는 지구상의 수많은 전쟁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전쟁의 연료인 욕망과 증오를 단멸시키는 힘을 내면으로부터 길러내는 동시에 이 힘을 윤리적 긴장감을 갖고 세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우리가 불교를 믿는 영원한 목표인 동시에 가장 큰 현실적 사명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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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무. 일본 교토불교대학 문학박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불교와 원불교의 관계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승가대학 교재: 한권으로 보는 세계불교사》(공저), 《佛教大学国際学術研究叢書: 仏教と社会》(공저) 등과 논문으로 〈일본불교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근대일본의 화엄사상과 국가〉 〈소태산 박중빈의 불교개혁사상에 나타난 구조 고찰〉 등이 있다. 현재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