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찾을지어다." 입니다.
1813년 10월 17일에 나폴레옹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연합군을 침략했다가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에게 패했습니다. 그날이 주일이었습니다. 1941년 12월 8일에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공격을 감행했다가 결국 패망했습니다. 그날도 주일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도 주일입니다. 김일성이도 주일 새벽을 공격일로 정했습니다. 이들은 주일이 얼마나 거룩하고 복된 날이며 안식하는 날, 구별된 날인지 몰랐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날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예배라는 단어는 없지만 11절에 보시면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말씀이 곧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예배라는 단어의 헬라어 뜻이 '얼굴을 뵙다', '그 발에 입 맞추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에 나간 장수가 승리하고 돌아와서 왕 앞에 나아가 그 손등에 입 맞추듯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승리하고 돌아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예배하되 가끔씩, 때때로, 한 달에 한두 번, 일 년에 몇 번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예배드려야 합니다. '항상'은 ‘자주’ 라는 말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라는 뜻입니다. 항상 예배하라는 말은 사실상 매일 매일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본문 뒤의 37절을 보시면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있게 하며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그 일대로 하게 하였고"라고 합니다. 40절에서는 "항상 아침저녁으로 번제단 위에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매일 예배자가 되길 원합니다.
본문의 시가 언제 기록되었는가 하면 7절에 "그 날에"라고 했습니다. 그날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날이 어떤 날입니까? 위에 보시면 다윗이 법궤를 찾아 와서 하나님의 장막 안에 두고 제사를 한 날입니다. 그 날 제사 뿐 아니라 모든 예배자가 함께 먹고 즐거워했습니다. 무엇을 먹었습니까? 3절에 보시면 떡 한 덩이와 야자열매로 만든 과자와 건포도로 만든 과자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모인 무리 중 남녀를 막론하고 각 사람에게 골고루 주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의 떡을 나누어 먹고 백성들을 축복했던 것입니다(2절).
우리는 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까? 이에 대해서 프랭클린 지글러라는 신학자는 '예배학 원론'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배는 사람의 발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교제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사람은 이에 응답한다. 하나님은 사랑을 제공하고 인간은 예배를 통해 반응하게 하신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예배의식을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배드림을 허락하셨고 예배를 통하여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으시면 들어올 자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만나주지 않으시면 누가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귀를 막으시면 부르짖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내가 있듯이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기에 예배할 수 있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요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릴 기회가 있는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배의 기회를 허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 우리도 발견되길 축복합니다.
본문과 이어지는 말씀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5절에서는 위대하시므로, 26절에서는 하늘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에, 27절에서는 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즐거움이 그의 처소에 있으므로, 31절에서는 통치자이시므로, 33절에서는 심판하러 오실 심판주이시므로, 34절에서는 선하시고 인자가 영원하심으로, 35절에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36절에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만 영원토록 송축하며 영광을 돌리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내용을 말합니다. 8절에서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알리라고 합니다. 이름을 불러 아뢰는 것은 기도를 말합니다. 그가 행하신 일을 알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노래하며 찬양하고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찬양할 때는 5절에서 보면 비파와 수금을 타고 제금을 힘 있게 치고 나팔을 불며 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29절에는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가라고 했는데, 그 제물은 어떠해야 하느냐면 아름답고 거룩한 것, 구별된 것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시만 따로 기록해 놓은 시편 96편에서는 이 제물을 '예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 속에는 기도와 말씀선포, 찬양과 감사의 예물 드림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온전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그 자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아들과 며느리에게 늘 무시당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종종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할머니는 그것이 말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 부부가 좋은 것, 귀한 것은 골라서 항상 자기 아들 주려고 따로 보관하는 것을 봤습니다. 할머니에게 먼저 드시라고 하면 할머니가 덥석 받아 드시겠습니까. 손자한테 안 주고 당신에게 주는 게 고마워서라도 괜찮다고, 손자 주라며 양보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 내외가 자기 아들, 즉 손자만 챙기니까 할머니는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으로 주님을 먼저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쓸 것 다 쓰고 남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이고 믿음과 사랑이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을 향해 책망한 것이 무엇입니까. 삼상2:29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몫도 자기 자녀에게 돌렸습니다.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습니다. 우리는 내가 내 자녀를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하나님이 내 자녀를 소중히 여기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자녀가 하나님께 사랑 받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섬기고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들을 사랑해주십니다. 할렐루야!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도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축복으로 화답하십니다. 우리는 예배드림에 있어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감동을 따라 진리의 약속을 붙잡고 예배드려야 합니다.
이방인의 제사와 우리의 예배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그 대상은 당연히 다르고 드리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극정성으로 제물을 차려 제사하지만 우리는 정성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을 믿고 그의 보혈로 죄 씻음 받는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피는 양과 염소의 피가 아니라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피를 통해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성소에 나아가게 해주셨습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과 다른 피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과 보혈을 약속하셨을 뿐입니다. 이 약속이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제사와 우리의 예배가 다른 점입니다.
히9:11,12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그리고 행4:11,12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래서 우리는 이런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면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관심은 예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보다 더 기다리고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예배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예배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예배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예배를 통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며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고 했습니다(삼상2:30). 우리 삶에 예배가 최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곧 우리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나오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사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에 임하는 태도가 곧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자 사단의 공격을 막는 최선의 방어입니다. 예배에 실패한다면 사단에게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내 영혼이 살고 소생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표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예배는 내 믿음의 상징입니다.
한동안 젊은 세대를 일컬어 포기하는 세대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3포 세대라고 했는데(연애·결혼·출산),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5포 세대’, 여기에 꿈과 희망마저 포기하는 ‘7포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이후에는 다른 것도 다 포기해야 할 상황이란 뜻에서 ‘n포 세대’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예배를 포기하지 않으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선다면 우리에게는 포기와 실패, 좌절과 절망이 익숙한 단어가 아니라 낯선 단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로 살아가길 소원합니다. 예배를 사모하여 예배가 삶의 최우선순위가 되고 오늘 다윗처럼 예배가 회복되길 축복합니다. 그래서 더 하나님의 사랑 받고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