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헝가리군이 세르비아 방면에서 투르크군을 막기는 하였지만 알바니아 쪽 사정은 좋지 못하였다. 알바니아군을 효과적으로 이끌던 스칸데르베우가 1468년에 사망한 이후 알바니아군은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460년대와 1470년대에는 베네치아가 동부 지중해에 걸쳐 보유하고 있던 거점들이 하나 둘씩 오스만투르크의 진격 앞에 무너져갔다. 베네치아는 알바니아와 협력관계에 있었지만 스칸데르베우의 사망 이후 지리멸렬하던 알바니아는 아무 도움이 될 수 없었고 1479년에 크루예의 함락으로 알바니아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에게해의 여러 거점이 오스만 수군에게 점령당하고 1479년에 베네치아가 알바니아에 보유하고 있던 최대의 거점인 슈코드라가 오스만군에게 무너지며 베네치아의 지중해 무역은 중대한 타격을 받았다. 1480년대 초반에는 헝가리군이 보스니아의 일부를 회복하였지만 곧 상실되고 앞서 이야기한대로 1482년에 보스니아는 완전히 오스만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다. 마티아스의 ‘검은 군단’은 1480년대에 걸쳐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로 진격해오는 투르크군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여 스레야닌과 테메슈바르에서 오스만군을 격파하였으나 주변국들이 거의 모두 오스만제국의 편이 되거나 복속된 상태에서 헝가리 하나로는 오스만제국군에게 역부족일 수 밖에 없었다. 유럽의 동쪽 끝에서 오스만군의 맹공을 버티던 몰도바마저 1486년에 오스만술탄 바야제트 2세의 군대 앞에 굴복하고 술탄의 권위에 확실히 복속된 제후국이 되었다. 마티아스왕이 사망한 후 헝가리의 왕좌가 공석이 되지 신성로마군이 헝가리에 진주하였고 이어 1490년에서 1494년까지 헝가리에서는 왕위계승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신성로마를 등에 업은 폴란드왕 카시미르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가 블라디슬라프 2세로 등극하였다. 전 왕인 마티아스가 육성한 ‘검은 군단’의 병사들은 블라디슬라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였다가 해체되는 비운을 맞는다. 근 80년에 걸쳐 중부유럽을 지켰던 헝가리가 약화되자 오스만군의 진격은 거칠 것 없었다. 1493년에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동맹군이 현재 크로아티아 남쪽의 클바바(Krbava)에서 오스만투르크군에 궤멸되면서 아드리아 해안 전체가 오스만투르크군에 노출되었다. 투르크군은 해안을 타고 진격하면서 1503년에는 잠시이긴 하지만 이탈리아 북부까지 진출하였다. 서유럽 국가들은 동로마가 무너진 후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에 대한 방벽의 역할을 하던 헝가리가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같은 카톨릭 국가인 헝가리를 돕기는커녕 오히려 신성로마의 경우처럼 그 불행을 틈타 한 몫 챙기려 하였다. 다행히 1500대 초반에 오스만 제국의 동쪽 이란 지역에서 이스마일이 사파비 왕조를 세우고 오스만제국에 대한 변방민들의 반란을 사주하는 바람에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오스만군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유럽에 대한 압력이 잠시 해소되었다. 1509년에 이스탄불이 대지진으로 파괴되고 1510년-1512년에는 그의 두 아들인 셀림과 아흐메트가 왕위쟁탈전을 벌이면서 오스만 제국의 정국은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바에지트 2세는 결국 왕위계승전에 승리한 셀림에게 반강제로 황위를 내어준 후 셀림이 마련해 준 은거지로 가는 도중에 사망한다. 새로이 술탄이 된 셀림 1세는 새로이 세워진 사파비 왕조와의 전쟁, 그리고 남방(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헤자즈)원정에 군사력을 집중하느라 유럽전선에서의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셀림 1세는 사파비 왕조군을 칼디란에서 쳐부수고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꺾어 이집트를 제국의 영토로 만드는 등 정력적인 정복활동을 펼쳤다. 남방원정를 마친 후 셀림은 다시 유럽, 특히 헝가리에 대한 원정을 재개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20년에 사망한다. 이에 그의 아들인 술레이만이 술탄이 되었고 후일 대제(大帝)로 불리는 술레이만 1세의 치세하에 오스만제국은 그 절정기를 맞게 된다. 술레이만 대제
술레이만 1세는 즉위하자마자 대외원정 준비에 착수하였고 그 방향은 아버지 셀림 1세가 죽기 전 공격하려 하였던 헝가리였다. 오스만투르크가 사파비 왕조와 맘루크 왕조 등의 강적들을 연이어 격파하고 국세(國勢)가 크게 성장한 반면에 헝가리는 연이은 왕위 다툼으로 인하여 왕계(王系)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정치가 혼란스럽고 왕의 권위도 제대로 서지 않았다. 1490년에 ‘검은 군단’을 이끌었던 마티아스 왕이 죽은 후 신성로마의 입김으로 인하여 헝가리인이 아닌 외부인(리투아니아계) 야기엘론 왕가의 블라디슬라프 2세가 왕으로 섰다. 새로운 왕가는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중간층과 함께 농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하였고 블라디슬라프가 늙어가면서 왕권이 약해지는 기미를 보이자 1514년에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야노스 자폴랴(Janos Zapolya)를 비롯한 귀족들은 왕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군을 움직여 농민반란을 짓밟았다. 이후 1516년에 블라디슬라프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라요스(루이) 1세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불과 10살의 소년에 불과하였기에 주변의 귀족들과 함께 야기엘론 왕가의 ‘후견’세력이었던 신성로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은 더욱 높아졌다. 실제로 라요스는 아버지 블라디슬라프의 사망 후 신성로마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의 양자로 입적이 된 상태였고 야기엘론 왕가 역시 합스부르크 왕가와 마찬가지로 ‘황금양털 기사단(Order of the Golden Fleece)’의 일원이며 이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왕가는 야기엘론 왕가가 헝가리의 왕위를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더더욱 강해졌다. 1522년에 라요스는 합스부르크가의 마리아와 결혼하였고 헝가리는 거의 합스부르크의 위성국이 되었다. 라요스의 치세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1521년, 오스만투르크의 술레이만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유럽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기 때문이다. 소년왕 라요스는 귀족들에게 농민들과 의화의 중간층과 농민들과 싸우는 것을 중지하고 투르크의 진격을 막는데 집중하여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으나 귀족들은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으며 결국 1521년에 난공불락의 도시였던 난도페헬바르(베오그라드)는 오스만투르크에게 함락되었다. 그리고 현재 세르비아 북부인 사바츠도 함락되었는데, 이때 이미 발칸국가들은 모두 오스만투르크의 영토가 되거나 복속이 된 상태였고 헝가리만이 남아있었다. 술레이만 1세의 1526년 원정은 소소한 약탈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확실히 헝가리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중부유럽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헝가리를 무너뜨리면 다음 목표는 신성로마였고 그 다음에는 유럽전역이었다. 술레이만 1세의 목표는 단순히 영토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전 무슬림의 영도자로서 진정한 신인 알라를 믿는 자들이 사는 땅, 즉 ‘복종의 영역(다르 알-이슬람)’을 넓힐 의무를 다하는 것이었다. 모하치 전투
술레이만 1세는 헝가리를 공격하기 전에 라요스에게 ‘평화’를 몇 차례 제안하였지만 라요스는 이를 거부하였다. 오스만투르크와 비교하여 확실히 열세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라요스가 술레이만의 평화제안을 어찌하여 거부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술레이만의 제안은 헝가리의 복속, 또는 최소한 오스만투르크가 헝가리로부터 빼앗은 남부의 영토를 영원히 소유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헝가리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아울러 1526년에는 본격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오스만투르크의 약탈부대에 의한 소규모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이 약탈부대에 마저 밀리면서 변경부락들을 하나 둘씩 빼앗기고 있던 것이 헝가리의 상황이었다. 라요스는 잃어버린 영역을 하나하나 찾을 여력은 없다고 생각하고 만약 큰 회전(會戰)에서 투르크군을 꺾을 경우 모든 것을 한꺼번에 찾을 수 있다고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군과 싸우는 것마저도 라요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스만투르크군이 이스탄불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라요스는 주요 귀족들을 동원하려 하였지만 약속한 날에 군진에 도착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라요스가 스스로 무장하고 군진에 나타났을 때에야 굼뜨게 움직여 군진에 하나 둘 도착하였다. 오스만투르크와 싸울 헝가리군 부대는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하나는 라요스가 지휘하는 본군이었고 야노스 자폴랴가 트란실바니아에서 군을 이끌고 오기로 되어있었으며 크로아티아의 프란코판이 다른 부대를 이끌고 오기로 하였다. 이들이 군을 합친다면 약 4만정도가 모일 수 있었으나 술레이만이 1526년에 동원한 군은 10만에 달하였다. 헝가리군은 대부분이 기사, 그리고 활과 단병기를 든 보병부대였던 데 비하여 오스만군은 보병 중 상당수가 화승총을 가지고 있었고 다양한 구경의 포를 160문이나 동원하였다. 즉 헝가리군은 수적으로도 열세인데다가 구식무기를 들고 당시로서는 최신무기를 보유한 적과 싸우게 된 것이다. 헝가리군은 모하치에 먼저 도착하여 며칠을 쉬면서 장거리 행군의 피로를 덜 수 있었다. 이에 비하여 오스만투르크군은 찌는 듯한 더위에 행군하였고, 전장에 도착하였을 때 헝가리군은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더위에 찌들고 지친 오스만군이 도착하였을 때가 헝가리군으로서는 최고의 기회였으나 먼 행군에 노곤한 상대를 치는 것은 ‘떳떳하지 않다’고 하여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비록 일종의 야담이라 실제로 그러하였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는 서양판 송양지인(宋襄之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