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증녀"를 처음 만난 것은 해방되던해 가을이 었다. 우리 고향 안성읍에는 논바닥을 메꾸고 건축된 애원극장이 유일한 문화시설이었으며 건물 주인 피아니스트 애원은 대지주의 아들이면서 좌익운동의 멤버 였고 그래서 극장에는 소위 프로레타리아 연극이 늘 공연되고 있었다. 그무렵 지금은 극단이름도 연극의 제목도 잊었지만 서울에서 지방공연을 온 일행중에 "정득순", "주증녀"의 이름이 끼어있었다. 우리학교에서는 극장을 빌려 음악회와 연극공연을 하게 되었고 나는 "김세중"(작고한 조각가)이 쓴"해방전야"란 연극연출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남학교이기 때문에 부득이 남자가 여자로 분해야 했으며 도대체 여배우란 어떤 사람들인가 관찰하고 싶어서 무작정 그들이 투숙하고있는 여관으로 찾아 간 것이다. 가을 바람이 부는데 썰렁한 여름옷을 입고 배우들은 얼굴이 피곤해 보였지만 마지못해 우리를 만나주었다. 그때 "주증녀"는 젖먹이를 업고있었고 주로 "정득순"이 설명을 해주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지금은 생각도 나지않지만 우수에 젖은 "주증녀"의 얼굴이 퍽 예뻤었다고 생각되었다.
<그후 18년>
우리는 감독과 여배우로 재회하게 되었고 "주증녀"는 그때 그이야기를 송두리채 잊어버리고 있었다. 먼저 "주증녀"가 내작품에 출연한 영화를 열거해 본다. "일편단심", "월급봉투" ,"저하늘에도 슬픔이", "고발", "만선", "사격장의 아이들", "산불", "애인", "동경특파원", "춘향", "피해자", "작은 꿈이 꽃필 때", "극락조", "본능", "내마음의 풍차", "황토", "발가락이 닮았다", "야행"등 18편이다.
<편지>
주증녀선생! 당신이 이승을 떠난 지도 2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당신의 철부지였던 세아이는 훌륭하게 자라 잘살고 있습니다. 촬영장에 졸졸 따라다니던 막내는 사업가가 되어 큰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혜성이는 좋은 대학에서 물리과를 졸업하고 과학자 신랑을 맞았습니다. 결혼식이 아름다웠습니다. 당신의 부군 Y씨는 힘껏 딸의 행복을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신부는 세아이를 낳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딸이 보고싶으면 그렇게 황망히 데려가느냐고 했지만 당신은 정말 그리운 딸을 만나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지요. "문정숙"도 떠났고 "남정임"도 세상을 버렸습니다. 지금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한은진", "황정순"도 병석에 누워있습니다. Y씨는 작년 동경영화제에서 만났는데 활기찬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촬영하던 그많은 시간들을 회상하며 작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정사씬>
"山불"은 전남 월출산 빨치산의 실화를 극화한 "차범석"의 희곡이다. 낮에는 태극기가 날리고 밤에는 인공기가 걸리는 산골짜기 대밭마을에 벌써 쓸만한 사내들은 없다. 모두 어느쪽인가 편이 되어 집을 떠났기 때문이며 그들의 아내는 고독과 굶주림을 참으며 혼자 살아가야 한다. 빨치산의 아내 "도금봉"과 국군의 아내 "주증녀"는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앙숙처럼 지내는 어느날 젊은 사내가 마을로 잠입해 들어와 "주증녀"의 구원을 청한다. 산에서 도망한 사내는 굶주림에 지쳐있었으나 여자를 보자 먼저 본능이 발동한다. 대밭에 굴을 파놓고 남과 여는 갈증을 풀게 되는데 이 광경을 "도금봉"이 보게된다. 결국 두여자는 협의 끝에 사내를 사육하며 번갈아 욕구를 채운다. 나는 당시 섹스의 심볼이었던 "도금봉"과 점잖은 안방마님 "주증녀"를 두여자로 캐스팅했다. 촬영은 광주근처 담양의 대밭촌에서 시작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여배우 30여명을 끌고간 현장은 구경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주증녀"가 감독이 묶고 있는 토담집 사랑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마을사람인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분장과 의상을 끝마친 여배우였다. 남루한 옷차림과 기름기 없는 머리, 파리한 얼굴에 거친손 어디서 구해입었느냐고 물었다. "주증녀"는 마을 사람중에 가장 적합한 모습을 찾아 자기옷과 바꾸어 입었다고 한다. 조감독은 여배우들에게 마을 사람들과 옷을 바꾸어 입으라고 지시했고 다음날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은 이곳주민들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주증녀"의 의상 설정은 늘 현실감을 살리고 있었다. "도금봉"과 사내의 숨막히는 정사씬을 감독옆에서 보고있던 여배우는 물었다. 점잖은 캐릭터도 저 장면을 소극적으로 연기해야하느냐고, 그럴필요가 있겠나 싶어 비장의 무기가 있느냐고 했더니, 자신이 정사 할때의 얼굴이 궁금해서 거울을 보며 혼자 연구했다고 한다. 섹시한 것을 과시하는 여자나 점잔빼는 여자나 희열을 표현하는 것에 차이가 없어야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후 나는 카메라앞에서 적어도 정사씬에 한에서는 "주증녀"에게 연기지도나 설명을 생략하게 되었다.
<매맞는 연기>
"만선"은 "주증녀"의 대표작이지만 현재 필름이 실종된 상태다. "천승세"의 어촌 연극을 영화로 옮긴것인데 그무협 당국에서는 해외영화제 출품을 금지시켰다. 빈곤한 한국 어촌이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려졌고 노사갈등의 심각성과 무엇보다 어민들의 절망이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생각하지만 60년대의 한국영화는 거의 소재선택과 표현의 자유에서 절망적이 었다. 그때의 영화정책이 오늘처럼 관대했다면 세계도처에서 우리 영화는 이미 개가를 올렸을 것이다. 남해안 어느 갯마을, 모래밭에서는 남편(김승호)와 아내(주증녀)의 처절한 몸싸움이 벌어진다. 수평선을 향해 가물가물 떠내려가는 빈배에는 갓난아이가 실려있다. 장대같은 자식을 바다에 모두 잃은 어미는 막내아이 하나만이라도 뭍으로 떠나가 사람답게 살기를 기원했지만 애비는 한사코 그애를 어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맞선다. 카메라앞에서는 처절한 부부싸움이 벌어졌는데 갑자기 남배우가 못하겠다고 연기를 멈춘다. 이럴 땐 사정없이 여편네를 두들겨 패야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주증녀"가 말했다. "선생님 괜찮으니까 막때리세요." 카메라는 다시돌아갔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주먹이 난무하고 발길질에 여배우는 휴지조각처럼 파도에 어풀어졌다. 그런데도 사내의 폭력은 이어진다. 어미는 사내의 다리에 매달려 필사적이다. 3분간이어진 한컷이 이작품을 살리고 있었다. 물론 여배우의 온몸에서는 피멍이 들었다.
<눈물>
"만선"은 통영에 숙소를 정하고 촬영지 외딴섬을 향해 2시간 정도의 뱃길을 어선을 빌려 스탭, 캐스트 50여명이 왕복했다. 가을해는 워낙 짧아 촬영을 끝내고 서둘러도 밤바다를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점심도 빵조각으로 때우고 온종일 중노동을 했기 때문에 갑판에 누워 별을 쳐다보며 돌아왔다. 그날 배가 절반쯤 왔을 때 갑자기 엔진소리가 멈췄다. 잠시후 당황한 기관사가 올라와 엔진고장인데 수리불능이라고 한다. 배위는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지만 별수 없이 우리는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칠흑같은 밤바다에서 표류하는 배는 바위와 충돌하는 순간 난파를 면할 수가 없다. 언제 침몰할지도 모르는 공포속에서 우리들은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김승호"씨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 "하느님 당신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거야, 우린 영화하는 죄밖에 없어, 정말 이러면 재미없어" 공갈인지 구원인지 그의 목소리가 파도에 섞인다. "변기종"선생의 기도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그 소리에 열중하며 숨을 죽이고 있는데 누군가 "흑"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허장강"씨가 울기시작했고 그옆에서 "주증녀"는 눈물을 펑펑흘리고 있었다. 두사람으 그때 가정이 깨진 충격속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아이들을 이웃에게 맡기고 촬영나온 상태였었다.
<우정>
우리집 근처에 "문정숙"씨가 살고있었는데 "이만희"감독과 나는 그녀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일이 있다. 그날밤은 눈이 내리고 있었는데 "주증녀"는 먼저 와서 음식을 거들었다. 네사람이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분위기는 쉽게 달아오르지 않는다. 왜나하면 "문정숙"과 "주증녀"는 늘 라이벌관계를 면치못했다. 물론 그것은 캐스팅을 놓고 제작사가 두여배우를 저울질 하다가 끝내는 한쪽으로 결정짓기 때문에 장본인들은 대책이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나쁜 사이로 단정 지었다. 그것은 감독인 우리 둘도 마찬가지였다. 신문기사는 "이만희"와 나를 이유없이 앙숙처럼 써놓고 있었다. 물론 내심 선의의 라이벌의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수준은 아니다. 취기가 오르자 내가 먼저 실마리를 풀려고했다. 당신들 두 여배우는 얼굴 모양도 연기스타일도 전혀 다르지만 지금 똑같은 운명의 강을 건너고 있다. 뭐가 똑같으냐고 두사람이 달려들었다. 아들 하나씩을 데리고 서방한테 쫓겨난 처지부터 이북에서 가족버리고 남하한 신세가 같지 않느냐, 그따위 위인들과 살면서 어떻게 배우를 하냐, 누가 여배우아니랄까봐 신발 바꿔신느냐, 이 쬬다야. 스켄달 하나 없는게 감독이냐. 우리는 취중에 한꺼번에 스트레스를 토해냈다. 집주인이 전축을 틀었다. 부르스에 엉키고 맘보에 껑충거리며 빈양주병이 몇 개나 뒹굴었다. 나는 이 취객들이 끝내는 한방에서 쓰러져 잘것같은 예감이 들어 "주증녀"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길은 미끄럽고 몸은 중심을 잃어 허우적거리며 걷고 있는데 "문정숙"이 뒤따라나왔다. 자기가 "주증녀"네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했다. 나는 찬스처럼 발길을 돌였는데 두사람은 금호동 신당동을 서로 바래다 주느라 밤을 새웠다는 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