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이제 - '그러나 이제'를 의미하는 헬라어 '뉘니 데'가 그 동안 진술했던 내용보다 한 차원 높으나 반대되는 내용으로 나아가기 위한 진술이라면, '그러므로 이제'는 그동안 진술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 위한 한 차원 높은 내용이 전개됨을 시사하는 접속사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 공인 본문에는 본 구절 다음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란 구절이 첨가되어 있다
이 구절이 4절에 반복되고 있으나 다른 사본들에는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비록 4절이 본절의 의미를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예수 안에 있는 자'만으로도 본절의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오리려 공인 본문과 같은 첨가가 본절에서 진술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를 흐리게 만들 수 있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에 의해 한정을 받음으로써 성도가 정죄로부터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해방되었다는 선포가 제한적인 의미만을 지니게 된다. 본절에서 바울이 '예수 안에 있는 자'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9절)는 신앙 고백적인 선언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된다.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행하기를 소원하지만 항상 죄의 법이 성도의 육신을 사로잡아 마음이 원하는 바를 못하게 한다. 이로 인해 성도는 심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결코 정죄당하지 않는다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 근거를 2절에서 34절에 걸쳐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롬 8: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 본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난제가 발생한다. (1)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단지 '생명'만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생명의 성령의 법'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2) '생명'이 '성령'을 수식하는가 아니면 '법'을 수식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 두 가지 난제는 함께 얽혀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은 성령과 불가 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원리를 가리킨다. 성령은 이 원리에 따라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계신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란 표현은 '생명의 성령의 법' 전체를 수식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수식어로 사용함으로써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오게 된 원천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죄와 사망의 법 - 혹자는 "모세의 법은 올바르나 힘이 없으며 죄의 법은 힘이 있으나 올바르지 않다.
그러나 성령의 법은 힘이 있고 또한 올바르다"고 진술하고 있다. 여기서 맨슨은 '죄의 법'과 '모세의 율법'을 각각 분리시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율법을 변호해 주면서 본 구절을 오해하도록 한다. 그러나 바울의 진술에서 '율법'과 '정죄'는 분리될 수 없다. 비록 '율법' 그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할 지라도 죄는 그 율법을 가지고 성도를 정죄한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죄와 사망이 인간 가운데서 역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 어떤 사본에는 '너' 대신에 '나'가 사용되고 있다. 7장에서 바울이 줄곧 자기 자신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너'보다 '나'가 본절에 더욱 어울리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7:25절부터 바울은 일반인 주어로 '우리'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본장에서는 '나' 대신 '너희'와 '우리'를 번갈아 가면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권위있는 사본들이 '너'를 지지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에서 '너'라는 독법이 '나'보다 더욱 타당하다. 한편 '해방하였음이라'는 표현은 '정죄함이 없나니'란 표현과 일맥 상통하지만, 전자는 보다 적극적인 표현인 반면 후자는 소극적인 표현이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 율법은 죄에게 종 노릇하는 육신으로 하여금 율법 자체의 요구를 이루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율법은 육신을 지닌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해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7:24과 같은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 블랙은 본 구절을 주해하기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도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선포하지 않는다.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신 바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뿐이며, 이를 하나님께서는 성고가 율법을 성취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4절 주석을 참조하라. 죄를 인하여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 하마르티아스'는 영역 성경에서 '속죄 제물로서'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속죄 제물이 되기 위해서'라고 번역되기도 했다.
혹자는 그리스도의 업적과 관련지어 이러한 해석을 지지한다. 그리고 초대 교부 중에서도 이 해석을 시도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본절뿐 아니라 본장 어느 곳에도 '속죄 제물'이 '제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페리'란 전치사가 '...을 위해' 또는 '...을 인하여'라는 의미보다 '...에 관해' 또는 '...에 따라서'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본절은 '죄와 관련해서' 또는 '죄에 관해서'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 본절은 예수의 성육신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는 죄가 없는 분이셨으나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으셨기에 죄의 유혹을 받았고 연약함도 경험하셨다. 이 과정을 통해서도 그는 범죄치 않으셨기에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던 것이다.
육신에 죄를 정하사 -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시지만 인간의 연약한 육신을 입으사 인류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죄의 유혹과 인간의 연약함을 체험하셨고 거룩하신 몸에 죄 정함을 입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사 인간의 좌와 허물을 대속해 주심으로써 죄많은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요구를 온전히 성취하셨다.
[롬 8: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 여기서 '육신'은 정죄된 육신을 가리킨다. 이미 정죄된 육신을 좇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며 육신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며 또한 인생의 목표를 육신을 만족시키는 데 두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성도가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육신에게 져서 비참함을 당하는 상태에 빠지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즉 바울이 지금 경계하고 있는 것은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육신에 져서 죄의 법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자 곧 불신자들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 성도는 매일의 삶 가운데서 연약한 육신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갈등과 고뇌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그러나 성도는 육신을 좇는 자가 아니라 영의 원리를 따라 사는 자이다. 이 영의 원리에서 가장 근본된 것은 복음이며,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며 양자됨과 기업을 이어받는 것에 대한 보증을 받는다. 따라서 본 구절은 매우 추상적인 표현이지만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성도에 대한 것이다.
율법의 요구 - '요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마'는 '의로운 행동', '계명 '규칙'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의로운 요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디카이오마'를 '의로운 요구' 좋아한다.
사실상 본 구절에서 '디카이오마'를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율법'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문장이 매우 어색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디카이오마'가 '의로운 요구'로 번역되는 편이 매우 자연스럽다.
[롬 8:5]"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을 좇는 자는...생각하나니 - 본절에는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 육신의 일과 영의 일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영'을 '성령'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바울의 저서에 있어서 '영'(프뉴마)은 '성령'을 의미할 때도 있으나 단지 죄의 원리 또는 그 세력과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될 때도 종종 있으며,
본장 전체에서도 '영'이 반드시 '성령'으로 해석될 수 없는 곳이 많다. 따라서 여기서의 '영'은 성령이 아니라 다만 육신과 대조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나 뜻을 의미한다. '육신을 좇는 자'가 육신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라고 하면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을 위해 모든 목표를 세우며 그것을 추구하는 자다.
그리고 '영을 좇는 자'가 목표를 세우고 추구해 가는 모든 과정에는 성령의 개입이 필요하다. 그런데 '영을 좇는 자'라고 해서 연약한 육신을 이기고 마음으로 원하던 바를 모두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을 좇는 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과 그것과 투쟁하는 죄의 법이 공존한다.
[롬 8: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 이는 사람의 가장 깊은 사고의 원천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육신'으로부터는 하나님과 아무상관없는 생각 곧 자기 중심적인 생각만이 나온다. 그러나 '영'에게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생각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교훈하고자 하는 내용은 '영의 생각'을 가진 자는 오직 영의 일만을 좇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인간에게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나는 두 종류의 생각이 있는데 문제는 이 두 가지 생각에 의해 발생되는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점이다.
이 해결에 대한 답을 이미 1절에서 언급한 후, 바울은 미리 주어졌던 답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두 생각을 대립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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