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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의 세상 이야기]202. 간디 vs 타고르 & 김동길 vs 김대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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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발을 알리는 기적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 기차에 한 젊은이가 힘겹게 올라탔다. 순간 그가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폼 바닥에 떨어졌다. 기차는 이미 출발을 한 터라 젊은이는 떨어진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젊은이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의 그런 행동에 놀라 이유를 묻자, 젊은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떤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한 짝뿐인 신발이 그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훗날 이 젊은이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외치며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킨 위대한 국부(國父)이자 정신적으로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민족지도자가 되었다. 그가 바로 간디다. 세계적
수준의 장편 서사시 《기탄잘리》로 1913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시성(詩聖) 타고르에게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인
‘마하트마’의 별칭을 받은 이후 간디는 본래 자신의 이름인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보다 우리에게 ‘마하트마 간디’로 더 유명하다.
특히
1930년 3월 간디가 영국의 소금전매법에 항거하여 이른바 ‘소금행진’을 했을 때, 조선의 언론들은 간디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을 기사화하였고
간디의 자주독립을 위한 거룩한 항거운동은 동병상련의 처지에 놓인 우리 조선인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때 만일 간디와 인도인들이 총칼을 사용했더라면 독립운동이 실패했을지도 모르며 수없이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영국에 대한 인도의 끈질긴 저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 1947년 8월 15일 200년간의 영국 통치로부터 드디어 독립을 이룬다. 그러나 간디가 그토록 열망하던 종교를 뛰어넘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800년 대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파키스탄이
이슬람 국가로 분리 독립한 것이다. 이 두 거성(巨星)이 자유를 잃고 헤매는 인도인들의 버팀목이 되어 긴 억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서로 상대를 존중하며 조국의 자주와 독립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늘 가깝고도 먼 사이였다. 간디가 이상보다 실천이 강한 인물인 반면, 타고르는 실천보다 이상을 앞세운 인물이었다. 각기 추구하는 분야가 달랐던 것이다. 간디는
정치에서 정의를 추구했으며, 타고르는 문학에서 미를 추구했다. 타고르는 간디조차도 종종 군중을 통제할 수 없을 때가 있음을 지적하며, 자칫 국수주의가 되기 쉬운 민족주의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두 사람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일화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언젠가 두 사람이 타고르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마침 간디를 따라온 지지자들이 집밖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시위를 벌이자 타고르가 이렇게 말했다. “베란다 너머로 당신의 무저항주의와 당신의 추종자들이 벌이는 난동을 보시오. 저것이
진정 당신이 말하는 무저항주의인가요?” “모든 사람은 인도의 실을 잣고 있어야 한다. 타고르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도의 실을 잣고 있어야 한다. 타고르는 자신의 외국산 옷을 불태워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의무이다. 내일은
신만이 아실 것이다.” 간디의
옥중 단식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이 바로 타고르였다. 이 두 분이 간디와 타고르처럼 동시대에 한 조국에 태어나 국가의 민주화를 앞당기신 큰 거물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故김대중 대통령의 출생이 명확하지 않은 관계로 두 분은 대략 5살에서 많게는 8살 정도의 나이 차가 난다. 물론 故김대중 대통령이 많다. 두 분의 가장 확실한 공통점은 서슬이 시퍼렇던 과거 독재정권의 타도를 위하여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감히 목숨을 거신 분들이다. 안기부나
중앙정보부 같이 당시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 무서운 곳(?)에 끌려가서도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참기 힘든 고문들을 이겨낸 대한민국의 민주화
투사를 대변하는 장본인들이다. 선생이 워싱턴 교외의 한 아파트에 은거하던 때에도 찾아가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난 뒤에 은근히 “반미·친북”이라는
잘못된 노선을 택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을
펴나갔을 때 그는 이미 나의 동지가 아니었습니다. 』 다만
링컨이 남긴 명언을 하나 인용하고자 한다. 모든
사람을 얼마동안 속일 수는 있다. 또 몇몇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다.”
그래서 저는 저 나름대로 민주화의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저도 어느 날 조용하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 때에는 다시 만나게 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아무렴
깊은 인연을 가졌거늘, 영영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 나라에 신의 분노가 임했다. 인도인은
이를 반성하고 이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라고 외쳤다. “지진은
과학적으로 그 원인을 따져볼 수 있는 것이지, 간디와 같은 그런 비합리적인 시각을 견지해서는 어떻게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서구세력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라며 통탄했다. “이 관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사 타고르의 말이 맞는다 하더라도 이때가 아니고서 언제 반성을 하겠는가. 어떻게 같은 민족끼리 노예를 만들고 인간이하의 취급을 할 수 있는가. 이 재난을 겪고도 이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는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자격도 이유도 없으며 해서도 안 된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한 문명이 타락하면 대부분 그 사회는 망하게 되어있고, 새로운 물결이 몰려온다. 물론 자연재해와 사회현상을 맞물리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도 없고 무리일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이번 재앙을 기회로 인간사회의 타락된 바에 대한 전반적인 자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질병을 치료해야만 건전한 문명이 될 수 있다. 이 질병을 치료 못하면 현대문명은 불안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이건, 가정이건 회사건, 국가건 조만간에 몰락하고 쇠망한다. 이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 즉, 불을 보듯 분명하고 뻔하다. 원칙
없는 정치를 원칙이 있는 정치로, 도덕이 없는 상업을 도덕이 있는 상업으로, 인격이 없는 교육을 인격이 있는 교육으로, 인간성이 없는 과학을
인간성이 있는 과학으로, 근로가 없는 재산을 근로가 수반하는 재산으로, 양심이 없는 쾌락을 양심이 있는 쾌락으로, 희생이 없는 신앙을 희생이
따르는 신앙으로 바꾸어야 한다.” “참된 사랑이 인도문 어귀에 모습을 드러내자 문이 활짝 열렸다. 모든 망설임은 사라졌다. 진리는 진리를 불러일으켰다. 진리의
힘을 눈에 보이게 한 마하트마를 찬양하라!”고 그를 우러렀다 “진리는 신이다. 신을 발견하는 길은 비폭력이다. 분노와 두려움과 거짓을 버려야 한다. 당신 자신을 버려야 한다. 정신이 정화되면, 당신은 힘을 갖게 된다. 그것은 당신 자신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힘이다.” 이는‘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즉,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우리가
진리를 지켜야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리를 지키면, 결국 진리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