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 162호 경미(가명)야, 우린 가족이니까 함께 살자 | 글쓴이 : 관리자 |
경미(가명)야, 우린 가족이니까 함께 살자
공동선 162호
경미(가명)는 고등학교 3학년입니다. 아동복지시설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동보호종료를 몇 달 앞둔 어느 날 저의 아내인 베로니카의 카카오 톡으로 연락이 왔습니다.
경미 : 이모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11월이에요. 저는 대학교 발표가 하나씩 나오고 있어요. 떨어진 데도 있고 합격한 데도 있어요. 00원 퇴소하면 이모 집 주변에서 살게 되는건가요? 아니더라도 자주 찾아뵐게요. 항상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베로니카 : 경미(가명)야, 안녕. 00원 퇴소하면 민들레국수집 주위에 집을 얻어서 같이 살자. 경미 : 넹넹.
경미 : 이모 안녕하세요? 시간이 진짜 빠른 것 같아요. 벌써 2021년 마지막 달인 12월이에요. 시간이 빠르게 흐를 동안 이모도 못 본지 오래 되서 너무 아쉽고 슬퍼요. 이제 제 나이도 십대 마지막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옆에서 도와주시고 옷 사주시고 맛있는 것 많이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모와 대표님 그리고 모니카 언니까지 제가 정말 많은 도움 받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00원 퇴소해서는 이모 집 근처로 가서 살면서 이모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항상 건강하시고 올해 2021년 잘 마무리하세요. 베로니카 : 경미도 우리 가족인데 함께 살자. 걱정하지 말고 찬바람에 건강 조심해라. 경미, 파이팅!
경미가 태어나기 전에 아이 아빠를 만난 이야기부터 해야겠습니다. 1998년부터 1999년 11월까지지 제가 있던 수도원에서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교정사목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금호동 출소자의 집으로 파견 나가서 교도소에서 나왔지만 마땅히 갈 곳 없는 출소자 형제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금호터널 위 산동네에 허름한 출소자의 집이 있었습니다. 교도소에서 석방되었지만 갈 곳조차 없는 출소자들이 식구들입니다. 그곳에서 살림을 맡았습니다. 하는 일은 식구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밥을 해서 나누어 먹고, 낮에는 교도소에 가서 교리를 가르치곤 했습니다. 제가 맡은 교도소는 서울구치소 남사의 천주교 집회, 영등포 구치소 남사의 천주교 집회, 의정부교도소 남사의 천주교 집회였습니다. 그리고 전국 교도소의 장기수들을 틈틈이 면회 다니는 일까지 했습니다. 1998년 가을 어느 날이었습니다. 금호동 출소자의 집에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했는데 갈 곳이 없는 병수(가명) 씨가 왔습니다. 병수 씨는 나이 여덟 살 때 여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맡겨졌습니다. 보호 종료로 고아원을 나와서 살았습니다. 너무도 외로워서 전화 통화로 사귀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동거하다가 혼인신고를 하면 떠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덜컥 혼인신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여자가 사라졌습니다. 다니던 공장도 그만두고 여자를 찾으러 다녔습니다. 공장 선배가 술자리에서 여자가 떠나간 걸 놀렸습니다. 그만 선배를 때렸습니다. 폭력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의정부교도소에서 복역했습니다. 천주교 집회에서 만났습니다. 출소 후에 갈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금호동 출소자의 집으로 왔습니다. 얼마 후에 광진구 구의 동으로 출소자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어느 날 병수 씨가 인천에 일자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광진구 구의동에서 인천에 있는 공장까지 출퇴근을 할 수 없을 텐데도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아침상을 차려줬습니다. 한 달을 겨우 다니고 월급을 받자마자 공장도 그만 두었습니다. 출소자의 집에서도 떠나버렸습니다. 출소자의 집에서 지내던 저에게도 여러 가지 일들이 생겼습니다. 1999년 초겨울에 25년간 살던 수도원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2000년에 인천에서 겨자씨의 집을 조그맣게 시작했습니다. 송현동에서 출소한 형제들 몇 명과 지낼 때입니다. 출소한 형제들 밥 해주면서 청송 1교도소와 2교도소 그리고 2감호소에서 자매상담을 맡아서 하는 했습니다. 그때 또다시 병수 씨가 찾아왔습니다. 취직을 하려면 핸드폰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제 명의로 핸드폰을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인천 변두리의 작은 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또 연락이 끊겼습니다. 2002년 여름 어느 날 병수 씨가 벙어리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함께 살았던 벙어리 여자인데 남편의 학대에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나왔답니다. 병수 씨와 만나서 함께 여관에서 지냈는데 여관비가 밀렸답니다. 짐은 놔 둔 채 맨몸으로 겨우 여관을 빠져나왔답니다. 부랴부랴 보증금 백만 원에 월세 십만 원 하는 단칸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냄비와 밥솥 등 살림살이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병수 씨는 막노동을 다니면서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단칸방에는 “가와만사성”이라고 철자가 틀렸지만 글씨도 써서 붙여놓았습니다. 어느 날 병수 씨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안사람이 아이를 가진 것 같다고 합니다. 아마 2003년 5월쯤이면 아이가 태어날 것 같다 합니다. 더욱 열심히 일해서 돈도 모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마음뿐이었습니다. 병수 씨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습니다. 막노동을 하는 것이 정말 힘이 듭니다. 새벽에 나가서 온종일 일합니다. 죽을 정도로 고생해서 번 돈을 아끼고 아껴서 하루하루를 삽니다. 돈이 떨어지면 어쩔 수 없이 일하러 나갑니다. 겨우 하루를 일하고 돈을 받으면 또 아끼고 아껴서 살아갑니다. 어느 날 왜 일하러 나가지 않는지 물어봤습니다. 집에 쌀이 있는데 왜 일해요? 오히려 제게 물어봅니다. 2003년 5월 어느 날 병수 씨가 급하게 찾아왔습니다. 진통이 시작되었답니다. 제가 보증을 섰습니다. 제왕절개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병수 씨는 돈이 한 푼도 없다고 합니다. 부랴부랴 아기에게 필요한 물품을 장만했습니다. 다행히 산모는 건강했습니다. 퇴원할 때 제 신용카드로 여섯 달 할부로 결제를 했습니다. 병수 씨는 자기 딸이 예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이제는 아이가 예뻐서 일하러 나갈 수 없답니다. 아기 엄마가 가내공장에 일하러 다니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부부다툼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손찌검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크게 다치고 경찰이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부랴부랴 경찰서 유치장에 갔습니다. 병수 씨가 아기를 업은 채 유치장에 갇혀있습니다. 경찰들도 어쩔 수 없는지 아기 업은 병수 씨를 내보냈습니다. 병수 씨는 아기를 해성보육원에 맡기고 멀리 도망갔습니다. 몇 달 후 노숙을 하는 신세로 찾아왔습니다. 며칠을 굶었다고 합니다. 다시 방 한 칸을 얻어주었습니다. 부지런히 돈을 모아 딸을 찾아서 함께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코올 의존이 심합니다. 어느 날 정말 술을 끊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봉화 산골에 가서 살 수 있게 했습니다. 소주 한 병을 사려고 해도 십리도 넘는 길을 걸어 나와야 살 수 있는 깊은 산골입니다. 그곳에 가서도 며칠 후에 사라졌습니다. 신안 염전까지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염전에서 일이 너무너무 고달팠다고 합니다. 일 년을 일하고 정산을 했는데 받은 것이라곤 소금 몇 포뿐입니다. 그 소금을 민들레국수집에 보내왔습니다. 얼마 후에 영등포교도소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염전 일을 끝내고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불심검문에 걸렸답니다. 대포통장 때문에 벌금을 받았는데 낼 길이 없어서 영등포 교도소에 갇혀있는데 견딜 수가 없답니다. 부랴부랴 면회를 갔습니다. 나머지 벌금 백만 원을 내고 민들레국수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아이가 있는 해성보육원을 찾아갔습니다. 아이가 싫어할 것 같아서 미장원에서 병수 씨 머리를 염색도 했습니다. 다시 기회가 된다면 이제는 한눈 팔지 않고 아이만 위해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도록 새로 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찾아오는 작업을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시험 삼아서 며칠간 데려와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병수 씨입니다. 아이는 커서 보육원을 떠나 고아원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병수 씨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었습니다. 여인숙에서 소주만 마시면서 지내다가 어느 날 하늘나라로 외롭게 떠났습니다.
경미(가명)는 해성보육원에서 예쁘게 자랐습니다. 매달 면회를 갔습니다. 다섯 살쯤 되었을 때는 원장수녀님의 배려로 아이들을 데리고 짜장면을 먹으러 보육원 앞 중국집에 갔습니다. 네댓 살 아기 열댓 명을 데리고 짜장면을 먹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명절 때는 경미와 같은 방에 있는 아이 두셋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지내는 일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매년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경미가 여덟 살이 되면서 보육원을 떠나 고아원으로 옮겼습니다. 설날과 추석에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설 전날 오후에 고아원에 가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옵니다. 함께 저녁을 먹고 아이 옷을 사고 명절을 지내고 저녁에 고아원에 데려다 줍니다. 눈 깜짝 할 새에 경미가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추석 전날 데리러 갔습니다. 립스틱 빨갛게 바른 화장한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피부과 전문의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경미가 쓸 화장품을 좋은 것으로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핸드폰 사용 문제로 씨름을 했습니다. 잔소리도 마음 상하지 않고 잘 받아드립니다. 이제는 예쁜 옷도 운동화도 이제는 크게 욕심을 내지는 않습니다. 시설을 나와서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스스로 민들레국수집 근처로 오고 싶어 하는 경미를 보면 흐뭇합니다. 이제는 잔소리를 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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