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5.09]
바다의 땅 통영의 뒷산을 찾는다.
어버이날 인사차 찾은 길이라 여유로운 걸음은 언감생심,
이럴 적엔 천천히 걷기로도 두시간이면 내려설 산이 좋다.
역장역수(亦壯亦秀)의 산이라 한들 해동삼신산(海東三神山)이라 한들
막상 찾을 사정이 되지 않는다면 어이 귀하다고만 할까.
마음에 두어 걸을 수 있는 산이 다만 귀할 뿐.
여황산(179m)과 천함산(257m)을 잇는 능선을 걸을 참이다.
산은 세간의 기준으로 보면 보잘 것 없는 처지지만
실은 내내 능선을 넘나드는 바다의 바람과 울울창창한 숲의 바람이 동행하는 근사한 산이다.
선인들의 앞다툰 삼락(三樂) 중 마음에 남기로 상촌(象村) 신흠의 그것인데
선생은 문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문 열면 마음에 맞는 손을 맞이하며
문을 나서면 마음에 드는 산천경개 찾아가니 이것이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이다, 하였다.
선생의 고급한 정신에야 비할 바 아니나 뜻을 삼아
마음에 드는 동행과 마음에 드는 산천에 들어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으로
어리석은 자의 세가지 즐거움을 말한다면 선생, 어이 여기실까.
바람 좋은 뒷산 드는 길, 지도 한장과 간식 조금, 물병 하나가 다인 바랑에
'옛사람과 나누는 술한잔' 부제 붙은 문화사학자 신정일 선생의 저서<풍류>를 챙긴다.
마음의 동행은 길에서 만날테니 대수 아니며 풀어 놓는 삼락이 이와도 같다.
보지 못한 책을 읽을 때는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보면 옛 친구를 만난 것 같다, 하였으니
오늘 나는 능히 옛친구 만나는 기쁨을 얻을 터인 즉 이는 한 기쁨.
그 길, 연한 잎새 만나면 문득 시선 두고 초롱한 새소리 들리면 문득 귀 기울이고
고운 꽃 만나면 문득 향을 구해보고 넉넉한 숲 만나면 문득 쉬어갈지니
흔한 머뭄과 터벅터벅 느린 걸음에 한방울 땀도 쉬이 맺지 못할 터, 이는 한 기쁨.
이윽고 절정에 닿거든 아무렇게나 앉아 지나는 바람에 책장 넘겨
옛사람 풍류에 연신 탄복하다 그중 때로 옳구나 좇아 흉내도 내어 보고
서문에 소개된 즐풍(櫛風)과 거풍(擧風)을 몰래 행함도 좋으리니 이는 한 기쁨.
■ 코스 : 북신성당 - 여황산 - 북포루 - 명정고개 - 천함산 - 혜성아파트(총 6km)
북신성당을 들머리 삼아 오르면 곧 잘생긴 소나무에 길게 늘어뜨려진 그네를 만난다.
그곳에선 바람결에 몸 맡겨 두어번 하늘로 비상하고 길 이음이 좋겠다.
이윽고 얕은 오름짓 후 촘촘한 편백숲을 만나게 된다.
바람 좋은 날, 저 벤치 만난 길손은 길 잇기 필시 난망일테니 마음 굳게 잡수시라.
나 이외에는 모두가 다 나의 스승이다.
<법구경>의 말이 옳다.
하마터면 밟고 말았지 싶다.
길 위, 달팽이가 최선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장자>에 사람의 삶은 마치 백마가 틈 사이를 지나가는 것 처럼 빠르다, 하였으니
달팽이의 한 생애에서 나는 장차 무엇을 배울 것인가.
능선에 닿으니 조망이 트이고 활기있는 도심의 전경이 고스란하다.
좌측 남망산과 강구안 그 뒤로 희미한 한산도, 통영항과 우측의 뾰족한 미륵산.
북포루에서 바라본 가야할 천함산.
산은 명정고개를 사이에 두고 별개의 이름을 얻어 두었다.
북포루.
통영성(統營城)은 석성과 토성의 두가지 형태로 지어졌으며 4대문과 2암문, 3포루를 갖추었다 한다.
1993년 복원된 북장대외에 동피랑에 곧 동장대가 복원될 모양인데 서피랑의 서장대도 그런 날 있기를.
천함산 절정의 조망.
낮은 구름이었으나 소박한 눈맛은 잃지 않아 길손을 달래었다.
북서로는 우포마을 앞바다의 소망자도 대망자도가 점을 이루었고
북으로는 천개산 벽방산이 연신 너울을 일으키며 기운차다.
서쪽으로는 바다 멀리 사량도의 실루엣이 보일 듯 말듯이며
남으로는 인평항과 좌측 바위 뒤로 수국작가촌
그리고 수국도 너머 산양의 구릉들이 즐비하다.
그리 만난 마음의 동행.
천함산의 절정에 닿으니 좋은 소리가 앞서 나를 맞는다.
소나무에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산새 우는 소리,
들에 벌레 우는 소리, 학이 우는 소리, 거문고 소리, 바둑돌 놓는 소리, 비가 층계에 떨어지는 소리,
눈이 창밖을 스치는 소리, 차를 끓이는 소리들은 매우 맑은 소리다.
그러나 그 중에서 독서하는 소리가 가장 좋다, 라는 송나라 예사의 말이 헛되지 않음이다.
더불어 내 오늘의 삼락을 이루어줄 마음의 동행, 반드시 있을 것이라 여긴 것은
조선 후기 지암 이동항의 방대한 지리산 유산록인 <방장유록>의 한 대목 때문이다.
합천과 함양, 지리산, 덕산, 진주, 황매산를 아우른 36박 37일의 노정을 이은 선생과 일행이
길 떠난지 18일째에 드디어 백무동에서 제석봉을 거쳐 천왕봉 제일봉인 일월대에 올랐을 적에
'4월임에도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기운은 마치 10월의 날씨 같았으며
마침 네댓명의 호남지역 유산객이 먼저 산에 올라와 있어 그들과 함께 즐겼다',라 기록한 것이다.
그 시절의 산상 조우도 가능하였거늘 하물며 뒷산일 바에야
한푼 어치일 망정 풍류 논할 이 하나 없을텐가 여겼음이 옳았다.
옛사람 함께 즐겼다 하여 오늘 사람 굳이 따를텐가.
그저 바람소리, 새소리 나누고 책장 넘기는 소리 앞다툴 뿐.
'강산과 풍월은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그 주인이다.'
동파 소식의 말이다. 과연 그 말이 옳구나.
그렇다면 그 말을 받들어 풍류를 논하고
달 아래 아니어도 술 한잔 권커니 시도 한 수 읊을까.
술은 미처 준비를 못하였으나 시는 저 바다의 점점의 섬 모양
속속 입가를 맴도니 오늘에는 양만리(楊萬里)의 심사가 좋겠다.
강바람은 나에게 시를 읊게 하고
산위에 걸린 달은 나에게 술을 마시게 하네.
취하여 진 꽃 위로 쓰러지니
천지가 바로 이부자리로구나.
江風索我吟(강풍삭아음)
山月喚我飮(산월환아음)
醉倒落花前(취도낙화전)
天地爲衾枕(천지위금침)
책도 읽고 명상도 하고 몰래 거풍, 즐풍도 하는 등
천함산 정상서 한시간여 머물러 산을 내려서는데
두꺼비인지 거북이인지 애써 산을 오르고 있기로
다왔으니 힘내소, 격려하였다.
익숙치 않아 발이 좀 아팠지만
길도 좋기로 날머리를 지척에 두고선 잠시 맨발로 걸었다.
차갑고 따뜻하고 두텁고 여린 기운이 발바닥을 거쳐 전신을 휘감는다.
이만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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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 삼락(三樂)을 좇은 한나절.
가당치 않은 노릇에 숨차지만 마음 넉넉하였던 것은
인생은 짧다. 어두운 인생 여정을 함께 걸어갈 사람들의 가슴을 기쁘고 환하게 해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니 어서 어서 사랑하라. 어서 어서 친절을 베풀라,라는 A.F 아미엘의 말과
저자 역시 위로를 받았다는 <풍류>의 마지막 문장인
김수영 시인의 시를 새길 수 있음이 축복인 까닭이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일상으로 내려서 강구안을 구비돌아 집으로 간다.
비릿한 어물전의 왁자한 소리가 또한 좋다.
늘 푸른 / 홍순관
이상 행복팍팍 사랑팍팍 팬다
첫댓글 주말, 어버이날 통영 처댁 길에 일욜 아침 짬을 내어 뒷산 올랐더니 산바람, 바다바람이 좋았기로 나눕니다. 건강한 5월 되세요~~~
저도 소리..향내..바람결을 좋아합니다ㅎㅎ 언제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길을 걷다가 함께 가고있는 생물들을 만나고부터 내신발에 제발 들어주지 않기를..인연따라 가겠지요.. 용화사 오르는길을 30여년만에 갔다가 여전한 학두마리를 보곤 너무기뻤습니다 같은녀석들이기를 바라면서 유년의 소풍길을 오십이 넘어 걸었습니다 ^^
용화사 불사와 곁의 도로 공사가 대략 정비가 되어가는지 궁금하네요. 지난번 찾았을 적엔 온통 공사중인지라^^ 유년의 소풍 추억 축하드립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별다른(?) 취미가 없고 집에선 TV를 안보다 보니 소일거리로 간혹 책을 붙들고 합니다. 때로 무지막지 걷기에 집중할 때도 있지만 때론 조금 걷고 숲에 머물러 명상도 하고 책도 읽고 하면 좋더군요~~~
일상을 이리도 잘 표현하다니.. 팬다님 후기는 역시 입니다.... 글과 잘 어울리는 음악도.. 좋습니다
바다 보이는 산에 오르면 웬지 기분이 업되는지라 좀 주절대었습니다 ㅠ.ㅠ 감솨
'강산과 풍월은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그 주인이다.'
제가 가끔 느끼는 일상에 딱 어울리는 표현을 팬다님 덕분에 찾았네요
숲이 우거진 곳에서 거풍을 하셔야 훔쳐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맨발산행 시요님이 하고싶어 하던건데...
천함산 정상은 거칠 것 없는 곳이었고 책에 소개하기로 거풍은 '바지를 벗어 하체를 드러낸 다음 햇살이 내리쬐는 정상에 하늘을 보고 눕는 것'이라 하였기로 따르느라...ㅋㅋㅋ
좋은글 좋은사진 잘보고갑니다..^^
고맙습니다. 아리솔님 남은 5월 건강히 나세요^^
간만에 팬다님 후기를 정독을 했지만 자꾸 삼합으로 생각이~~ 지송합니다 ㅎㅎ 달팽이는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어느 삼락이라도 그리 조화되면 제격일테니 삼합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저도 삼합 생각이 간절하네요..ㅎㅎㅎ
마음만 벌써 몇번을 간 통영이건만.... 정작 가까이 가서는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선인들의 그 많은 삼락(三樂)도 삼합(三合)과 같지 않을까요....^^
세가지 즐거움이 합해지는 거니까^^;;
봄은 어디서 왔다가 가는지도 모르게 여름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도심으로는 봄과 여름이 어중간한 스탠스지만 숲에 들면 봄의 옅고 짙음이 순간순간 자태 뽐내는 요즘이니 봄이라고 하겠습니다^^
팬다님 멋진 후기와 음악에 한참 머물다 갑니다 옛사람과나누는 술한잔 먹고 싶어요^^*
천리 먼길에 사는지라 마음뿐, 술 한잔 올림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백이 그러하였으니 또한 월하독작하심도 나쁘진 않지 싶습니다^^
마지막 ㅅ ㅏ쥔....ㅅ ㅏ랑이도 담에 찍어봐야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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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ㅅ 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