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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친구와 함께 강도질을 하던 한 여성이 경찰에 의해 지명수배를 받아 몽타즈가 전국에 붙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예뻐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인터넷에서는 그녀를 ‘얼굴 강짱’ ‘얼짱 강도’가 되어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 미혜라는 여자였습니다.
사람들이 특수강도 짓을 한 이 여자를 두고서 “이렇게 예쁘게 생긴 여자가 어떻게 강도짓을 했을까?”라고 하면서 ‘마누라 삼고 싶다’ ‘이 여자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금품을 그냥 주었을 것이다’ ‘자수하면 연예인으로 밀어주자’라고 하면서 “예쁘다 = 착하다”라는 등식으로 강도 이미혜를 미화하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나쁜 죄를 지어도 얼굴이 예쁘면 용서가 되는, 면죄부를 주는 세상 풍조를 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죽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떻게 될까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떤 판결이 나올까요? 여러분에게는 어떤 심판의 결과가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의롭다 함’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롭다 인정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정죄 받습니다. 하지만 의롭다 칭함 즉 칭의를 받은 자가 심판에서 용서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칭의를 받을 수 있을까요? 16절에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에서는 범죄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되어지는 길은 전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아주 기쁜 소식입니다. 만약 의롭게 되는 데는 몇 천만의 돈이 요구된다면 우리 가운데에 의롭게 되지 못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학력이나 학위를 요구한다면 낙제에 해당될 사람도 있습니다. 또 40일 금식기도를 해야 죄인에서 의인이 된다고 한다면 아예 힘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화가 잘못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행위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행위가 추가되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동반되어야 하는 인간의 선한 행위입니다.
이 잘못된 신앙을 이용하여 십자군 전쟁에 선량한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는 자에게 면죄부가 주어지고, 천국에 들어간다고 선전했습니다. 면죄부 판매도 바로 그렇습니다. 헌금함에 헌금이 땡그랑하며 소리내면서 떨어지는 동시에 천국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선한 행위를 하도록 합니다. 심지어 지옥이나 연옥에 떨어져 있는 부모형제를 위해서 살아있는 자녀들이 선행이나 기도나 헌금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부모형제들을 지옥이나 연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복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만 믿으라 그리하면 의롭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으면 이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의 선한 행위나 무슨 공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다’ 즉 칭의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칭의는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칭의는 정죄라는 말의 반대되는 말입니다. 정죄는 누군가가 죄를 지었을 때에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칭의는 그 반대로 그 죄인을 죄가 없다고 선언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다 허물을 지닌 자들입니다. 한번 보세요. 나는 죄인이 아니다고 할 수 있는 자가 여기 있습니까?
서로 사랑하는 말씀과는 반대로 우리는 남을 미워하기를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남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거짓말은 또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부정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보았던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한결같이 하나님의 원하는 의의 자리에 설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니라”고 했듯이 이대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다면 틀림없이 정죄를 받고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드리는 그 순간,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대답이 서로 상반될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지으므로 죄인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실은 내 자신을 들어 다 보면 우리는 틀림없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시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드릴 때에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나를 향해 선포가 있습니다. “너는 의롭다” 탕탕탕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죄인이냐 의인이냐?
우리가 기도를 기도를 끝마치면서 “이 죄인이 예수님의 공로 ......” 라고 기도하곤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 맞습니다. 주눅이 들은 죄인의 삶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허물과 죄로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죄인의식을 가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꼭 집어 선택해 주시고 때가 되어 불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믿음을 선물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게 하시므로 의롭다 칭해 주셨습니다. 이신칭의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의인으로 삼아 주신 그 은혜를 참으로 감사합니다”
만약에저의아들하림이가아침마다문안전화를하면서“아버지, 오늘도허물많은불효막심한죄인이문안인사를드리오니 ...”라고한다면저의마음이어떻겠습니까? 저는대번에
“야 이 사람아 , 너는 내 사랑스러운 아들이다. 나는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아빠, 첫째 아들이 문안 인사합니다. Good Morning」라고 말해라”
고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으면 우리는 참으로 의로운 것입니다. 비록 내가 추하고, 더러운 죄를 어제에 지었다고 할지라도 의롭다고 칭해 주셨습니다.
내가 나를 생각해도 부족하고 추하기 그지없는데 나를 자녀 삼으시고 의롭다고 해주셨으니 이젠 백골난망이지 않습니까?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 은혜가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하신 말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본분들, 즉 율법의 말씀을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여 말씀하신, 그 분의 기대에 부응하여 살기를 기뻐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교회를 섬길 때에 예배를 드리고 나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는데, 수백 명의 교인이 점심을 나누게 되는데 여전도회원들이 식당 봉사하는 것을 힘들어 했습니다. 몇 구역별로 묶어서 한 주일씩 돌아가도록 했지만 늘 주방에는 일손이 부족했습니다.
대부분의 교우들은 교회에 예쁜 옷을 입고 와서 예배 드리고 점심을 먹고 가는 것을 교인의 의무로 알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대부분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특별히 무더운 여름날에는 주방에 들어가면 그 열기는 비지땀을 흘리게 합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방차례가 돌아오는 것을 겁냅니다. 점심을 없애자고 합니다. 그냥 부담없이 교회 다니고 싶어 합니다. 교회에 점심 먹으러 오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이러한 때에 남들이 꺼리고 힘들어하는 주방 일에 묵묵히 일하는 여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남들은 화려하게 차려 입고 예배 드리는 그 시간에 땀을 흘리며 음식을 장만한 그분에게는 힘에 부치고, 하기 싫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찬송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자신이 땀과 수고를 통해서 성도들이 먹고, 교제의 시간을 가지는 시간을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따르고 계명을 지키는 일이 힘들고 귀찮고 성가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귀하신 은혜에 젖어 들면 그것은 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가시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감사해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살 찢고 피 흘려 내 죄를 속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속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 같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를 눈과 같이 희게 해주시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을 때에 우리를 의롭다, 죄 없다 선언해 주십니다. 예수 십자가의 보혈이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가 없는 믿음은 가짜입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믿으므로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는 말은 「완료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날마다 살아나는 육신 정욕과 세상을 향하는 욕망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
그는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신을 못박았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의 십자가에 여러분의 손에 못을 박아라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신을 내어놓고 자신을 비우고 자아를 죽이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비움과는 다릅니다.
부처 앞이나 벽을 앞에 두고 가부좌를 틀고서 묵언수행을 통해서 자신을 비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염려와 모든 욕심을 비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 내가 죽는다는 말은 역설적인 말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성도 여러분, 내가 왜 십자가에 죽어야 합니까? 지금 예수님이 내 안에 내 속에 살아 계시게 하기 위함 입니다. 내 생활 속에, 내 언어 속에, 내 사상 속에 예수님이 살아 계시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신앙공동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살아 계시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이 박혀야 합니다.
많은 문제 속에서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것은 내 자아가 살고, 내 욕심이 살고, 내 자만심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노라고 했던 것처럼 주님의 은혜 앞에 나도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나를 못박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내가 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까?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왜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까? 다시는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으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될 것입니다(요일2:16).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까?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우리가 믿음 안에 살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내 죄 때문이며 나를 위한 대속의 죽임이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 안에 살기 위함 때문에 십자가에 나를 못박아야 합니다. 나의 자아를 죽여야 이 믿음 안에서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 바울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빌1:20-21)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속에 삽니다. 내가 살아서 아둥바둥거릴 때, 나는 냄새나는 한 인간으로 살다 끝납니다. 그러나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자아를 죽일 때에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살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된 자로 날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