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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1월 25일 주일
[(녹)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해외 원조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교황은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언하며(2019년 9월 30일), 하느님 백성이 성경을 더욱더 경건하고 친숙하게 대하고, 하느님 말씀의 거행과 성찰과 전파를 위하여 이날을 봉헌하며 장엄하게 지내기를 권고하셨다.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은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해외 원조 주일’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2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고자 이 주일의 2차 헌금을 해외 원조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고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며,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이 겨울에 많은 사람이 가난과 추위와 고독으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늘 나라의 도래는 구원 약속의 성취를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구원 사업에 작은 도구가 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에게 빛을 전하는 노력을 하기로 다짐하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볼 것이며 암흑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는 말재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밝힌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회개를 촉구하시며 하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하신다(복음).
제1독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8,23ㄷ―9,3
23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9,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2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3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모두 합심하여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10-13.17
10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1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2-23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처음 하신 말씀과 그분께 부르심을 받은 첫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부르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을 버리고”(마태 4,20)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그들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리고 온전히 응답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협조자가 되는 첫걸음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그분의 말씀과 행동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배웠습니다. 갈릴래아 곳곳을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 앓는 이들과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보며, 제자들은 그분의 사랑과 연민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단순히 말씀을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의 인격을 닮아 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고 배웠다면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병자를 고치시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이 되어야 하고, 복음을 선포하시는 주님 사랑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선포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데서 시작됩니다.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주님의 협조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이철구 요셉 신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며칠 육지로부터 꽤 떨어진 섬에서 전문직 어부들과 지낸 적이 있습니다. 하루는 조업을 나가기 위해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가 잔뜩 껴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날 출항한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안개가 걷히겠지, 했었는데, 웬걸, 하루 온 종일 그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선장님은 “오늘은 종 쳤네!”하시면서 저보고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배 한 쪽 구석 작은 공간에는 싱싱한 생선이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큰 녀석으로 몇 마리 골라서 회를 떴습니다. 불도 피워서 소금을 뿌려가며 생선을 구웠습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화기애애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지요. 됫병들이 소주를 배 밑에서 꺼내오셨습니다. 그날 저는 하루 온 종일 취해서 정신이 오락가락했었습니다. 거기 계셨던 어부들의 주량은 상상을 초월했었는데, 그래서인지 다들 코끝이 빨갰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는 첫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의 그의 동생 요한. 이 넷은 갈릴래아 호숫가 한 동네에서 고기를 잡으며 먹고 살아가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당대 이스라엘에서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의 대명사였던 갈릴래아 지방, 그곳 출신이면서, 당시 지식인층이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도 아닌 어부 출신의 네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의 최측근 제자들, 당신 왕국의 가장 중요한 내각 구성 인물로 갈릴래아 출신 어부들을 선택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 약자들, 소외된 사람들을 가장 우선적으로 선택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 눈여겨 볼 일이 있습니다. 그저 고기 잡은 일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던 네 사람이었습니다. 그들 삶의 폭은 너무나 좁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실개천에 놀던 이런 어부들을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이 큰 바다로 안내하십니다. 더 큰 가치관, 더 의미 있는 삶의 양식에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나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보잘것없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떵떵거리며 살 이유가 없습니다. 어깨 힘들어 갈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솔직히 인정하게 될 때 신기하게도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진실하게 고백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우리가 별볼일 없는 사람임을 자각할 때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재미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완벽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는 전지전능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련하기에, 우리가 안쓰럽기에, 우리가 죽어가기에, 우리의 결핍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끌어 안아 주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 어떤 질문도 없이 그저 무상으로 우리를 당신 가까이 초대하십니다. 우리 역시 아무런 조건 없이, 그 어떤 질문도 없이 그저 감사하면서, 그저 행복해하면서 하느님의 초대에 성실히 응답해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 세계의 흐름을 바라보면 ‘힘의 정치’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관세를 통해 경제를 지키겠다고 말하고, 이민자 단속과 추방을 통해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말하며, 베네수엘라와 그린란드 문제에서는 군사력과 힘의 우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서로 다른 영역의 정책처럼 보이지만, 이 선택들에는 공통된 언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강하고, 우리가 결정하며, 우리는 양보하지 않는다는 언어입니다. 이 언어는 많은 이들에게 안도감을 주지만, 동시에 깊은 질문을 남깁니다. 관세는 외부를 차단함으로써 내부를 보호하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비용은 결국 시민들의 물가와 생활비 부담으로 되돌아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가계의 숨통을 조이고, 일상의 여유를 줄입니다.
이민자 단속과 추방은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명분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 질서 아래에서 가족이 갈라지고, 아이들이 부모의 부재 속에서 불안한 밤을 보내는 현실도 함께 존재합니다. 군사력의 과시는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더 큰 긴장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힘은 즉각적인 효과를 주지만, 그 대가는 조용히 삶의 자리로 스며듭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국경을 높이고, 관세를 올리고, 군사력을 과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 선택 아래에서 누가 울고 있는지, 그 안정 아래에서 누가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라고 말합니다. 성경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구조보다 사람을 향해 있습니다. 제도가 아니라 얼굴을 보라고, 숫자가 아니라 신음을 들으라고 말합니다.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35년이 되었습니다. 1년이 365일이니 계산하면 12,775번의 미사를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미사는 성당에서 봉헌하였지만 특별한 미사 장소도 있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 봉헌했던 미사가 생각납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산에서 미사를 봉헌했던 적이 있습니다. 새벽 2시에 출발해서 시나이산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어둠이 걷히고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간 순례자들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했던 곳입니다. 저는 참된 행복을 선포했던 곳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한 순례자들에게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선포해 보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곳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0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이른 새벽에 십자가의 길을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무덤 제대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무덤 제대에서 미사를 봉헌하면서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돌아가셨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이 생각납니다. 추기경님은 매년 성탄과 부활이면 의미 있는 곳으로 가셔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제가 살던 봉천동 달동네의 어린이집으로 오셔서 미사를 봉헌한 적도 있습니다. 상계동 철거민들의 천막으로 오셔서 미사를 봉헌한 적도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축성된 성전에서 주님의 제단에서 봉헌하는 것이 전례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사를 삶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봉헌하는 것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지난 성탄 때입니다. 루게릭병으로 8년 동안 아파하는 형제님이 생각났습니다. 형제님은 몸은 점점 굳어가지만 웃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유튜브를 통해서 미사를 보았지만 직접 미사 참례는 못 하였습니다. 저는 봉사자들과 함께 병실로 찾아가서 미사를 봉헌하자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기도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형제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잊지 못할 아름다운 미사였습니다.
사제의 삶은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면 자동차는 비록 잘못된 길을 갈지라도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도록 안내하게 됩니다. 사제의 삶은 세상이 주는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서 신학교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 희생, 헌신, 봉사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의 삶은 소중한 것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는 소중한 것들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픈 사람, 굶주린 사람, 헐벗은 사람을 돌보는 일이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가족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제도를 삶으로 실현하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질적인 풍요와 아름다운 장소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늘 우리 마음의 문 앞에서 우리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이 피듯이, 가난한 가정에서도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듯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자신의 태도요, 자신의 의지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다리 친교의 다리 봉사의 다리가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형제들 간에 사랑의 다리, 친교의 다리, 봉사의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로에게 다리를 놓고 그 안에서 사랑을 친교를 봉사를 나눈다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의 이름으로 합심하고 일치하여 같은 목소리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리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를 도와줄 때 우리는 커다란 힘으로 복음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그때부터 오히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마태 4,17)
어둠이 깃들면
그때부터 오히려
빛을 머금을 따름입니다
앞길이 막히면
그때부터 오히려
힘껏 나아갈 따름입니다
불의가 휩싸면
그때부터 오히려
더욱 의로울 따름입니다
두렴이 덮치면
그때부터 오히려
떨쳐 일어날 따름입니다
미움에 싸이면
그때부터 오히려
한껏 사랑할 따름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아나니아 (Ananias)
신분 : 신약인물 예수의 제자 순교자
활동지역 : 다마스쿠스(Damascus)
활동연도 : +1세기
같은이름 : 아나니아스 아나니야
주님의 명을 받고 사울을 찾아 나섰던 다마스쿠스의 성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손을 얹어 눈을 뜨게 하였고 또 사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사도 9,10-19).
전설에 의하면 성 아나니아는 다마스쿠스와 엘레우테로폴리스(Eleutheropolis)의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순교하였다.
복자 하인리히 소이에(수소)
Blessed Henry Suso
Beato Enrico Suso (Susone) Domenicano
(Uberlingen, Germania, 21 marzo 1295 - Ulm, 25 gennaio 1366)
Born:21 March 1295 at Uberlingen, Germany as Heinrich von Berg
Died:25 January 1366 at Ulm, Germany
Beatified:1831 by Pope Gregory XVI
Enrico = possente in patria, dal tedesco
Order of Friars Preachers; Dominicans; Order of Preachers
헨리쿠스 수소(Henricus Suso, 또는 헨리코 수소)는 유명한 도미니코 회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뛰어난 제자로, 독일 남서부 슈바벤(Schwaben)의 콘스탄츠(Konstanz)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르크(Berg)의 헨리쿠스 백작이고, 그의 어머니는 수소 가문의 성녀 같은 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실제 이름은 하인리히 폰 베르크(Heinrich von Berg)였으나, 어머니의 영향으로 수소라는 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13세 때에 콘스탄츠의 도미니코회에 입회하여 신비 생활과 신적 사랑을 통해 강한 영적 변화를 체험하고는, 18세에 '영원한 지혜와 영적 결혼'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콘스탄츠에서 공부를 마친 후 쾰른의 에크하르트의 학교에서 대학 공부를 하였다. 공부를 마치고 콘스탄츠로 돌아온 그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놀라운 현시를 보았으며, 예수 성명을 특히 공경하고, 천주의 모친께 남다른 신심을 지녔기 때문에 가끔 ‘신비가’란 소리를 들으며 생활하였다.
그는 매우 아름다운 신심서적을 저술하였는데, “영원한 지혜에 관한 소책자”(Das Buchlein der ewigen Weisheit)가 가장 유명하다. 이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작품으로 알려진 "준주성범"(Imitatio Christi)과 함께 여러 세기에 걸쳐서 인기를 누린 수소의 문학적, 신비학적 걸작이다. 그는 1348년 울름(Ulm)의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가서 생활하다가 1366년 1월 25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31년 4월 16일 그의 '문화의 길'(viam cultus)을 높이 평가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학자들은 그를 "독일 신비가들 가운데, 아니 어쩌면 모든 신비 저술가들 가운데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참고자료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0권 - '주조, 하인리히',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4년, 7869-7872쪽.
(가톨릭홈에서)
하인리히 소이에(수소)의 놓아두고 있기- 정달용신부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그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해보면, ‘버리고 떠나 있기Abgeschiedenheit’이다. 또는 ‘두루 놓아두고 있기Gelassenheit’이다. 이것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1260~1328)가 평생을 두고 생각하고 가르친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한때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 아무것도 알지 않는 사람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첫째,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원한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둘째, ‘아무것도 알지 않는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안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지 않았다.
셋째,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그가 가난한 사람이다. 사람이 참으로 가난해지려면 ‘가진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사물이든 자기 자신이든 ‘가진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그때처럼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는 그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사람’은 ‘버리고 떠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이다.
놓아두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제자였던 하인리히 소이세는 1295년경 3월 21일 스위스의 콘스탄츠에서 출생했다. 콘스탄츠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에 들어간 소이세는 수도원에서 기초교육을 받고, 1313년부터 1318년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등을 중심으로 철학을 전공한다. 이어 1319년부터 23년에는 슈트라스부르그 수도회 대학에서, 1323년부터 1327년까지는 쾰른의 수도회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다. 이때 스승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만난다. 콘스탄츠 수도원으로 돌아온 소이세는 선생Lector으로 후배를 가르치고 이후 20년간 그 곳에서 산다. 1330년경 그의 가르침은 이단異端의 의심을 받아 선생으로서의 직책을 정지당한다.
그러나 그는 바로 이 시기에 ‘두루 놓아두고 있기Gelassenheit’라는 신비사상을 터득하게 된다. 1347년경 소이세는 독일 울름의 수도원으로 옮긴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그는 ‘두루 버리고 떠나 있기’라고 하는 자신의 신비사상을 익히며 살았으리라 추측된다. 136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울름 수도원에 머물렀다. 소이세는 《진리의 서書》 《지혜의 서》 《생애》 등 중세 독일어 저서를 남겼으며 1831년 복자福者 위에 올랐다.
소이세는 스승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승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못된 오해로부터 건져낸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소이세에 의하면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를 가지고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런데 이러한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있는 것이 아니다.’ ‘무無’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모든 것의 그리고 일체의 것의 ‘근원根源’이며 동시에 ‘목표目標’이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리고 ‘저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그리고 심지어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그리하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와 ‘하나가 된다’. ‘이렇게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렇게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니-있는 것’ 즉 ‘무無’로 드러나는 ‘단순하고 순수한 하나’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 하인리히 소이세의 ‘신비사상神秘思想’이다.
‘그르게’ 놓아두기
‘버리고 떠나 있다는 것’ 그리고 ‘두루 놓아둔다는 것’은 잘못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잘못된 놓아두기’가 될 수 있다. 즉 ‘그르게 놓아두기’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 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의 ‘과업課業’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결코 하나의 되어버린 ‘상태狀態, Zustand’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과정으로 머물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하나의 완성된 그리하여 고정된 상태로 오해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마르게리테 폰 포레테Marguerite von Porete, 1310년 사망)은 ‘무無가 되어버린’ 영혼에 대해서 그리고 ‘자유로워진’ 영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한 영혼(사람)은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無’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제 이렇게 ‘자유로워진’ 영혼(사람)은 ‘단식’ ‘고행’ 그리고 ‘기도’ 등을 따로 힘쓰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상관없는 일’이다. ‘관심 밖의 일’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사람(소이세의 작품에 나오는 ‘이름 없는 무법자無法者’)도 있다. 어느날 소이세에게 사람의 모습을 가진 하나의 형상이 다가 왔다. 소이세가 물었다. 그리고 그가 대답했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어느 곳도 아니다.”
“너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네 이름은?” “이름없는 무법자다.”
“네 이성理性이 목표로 하는 것은?”
“구애받지 않는 자유다.”
“무슨 말이냐?”
“사람이 전적으로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도 세계도 상관하지 않고, 앞도 뒤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구애받지 않는 자유는 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올바로 놓아두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내가 설교할 때, 나는 언제나 첫 번째로 ‘버리고 떠나 있기’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즉 사람은 ‘자기 자신과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려 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람은 단순한 선성善性 즉 ‘신神 속에’ 들어가서, 그와 ‘하나의 모습eingebildet werden’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 말하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어떤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선한 일werke로부터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로워지려 한다’하여 그들을 나무라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루가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10,38-40)를 가지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분주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마르타와는 달리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는, 단순히 ‘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는 앞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잠잠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마리아는 그 후 사도들을 따라 다니면서, 부지런히 빨래하고 밥하는 일을 했다.
하인리히 소이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면서 ‘두루 놓아두고 있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서술해 내고 있다. ‘놓아두고 있는 사람der gelassene Mensch’은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놓아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옳은 일’이나 ‘선한 일’을 한다. 다만 그는 이 모든 일을 그에 마지막까지 ‘집착하지 않고’ 그 일들을 ‘놓아두는’ 그러한 마음으로 한다.
‘참으로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일 속에서’ ‘쉬고 있다’. 그리고 ‘일 속에서’ ‘한가롭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일이나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고요하다.
- 정달용 / 신부.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저서로 《그리스도교 철학》, 다수의 철학 논문이 있다.
